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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1일 월요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오 14,22-36)
Immediately Jesus stretched out his hand
and caught him,
and said to him,
"O you of little faith,
why did you doubt?"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에 불만을 터뜨리고 만나를 지겨워하며 이집트 생활을 그리워한다. 이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노여워하시자 모세는 자신의 처지를 하느님께 하소연한다.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는 모세의 어려움을 볼 수 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자 배에 있던 제자들이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하며 소리친다. 호수 위에서 거센 바람에 시달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고 격려하신다. 제자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면 언제라도 다가오시는 주님이심을 보여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호수 한가운데서 작은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은 거센 바람이 불어 대자 몹시 불안해합니다. 어부 출신인 베드로는 양편에서 불어 대는 바람이 더욱 거세지면 자신들에게 어떤 위험이 닥칠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마저 배에 함께 계시지 않으니 불안한 마음은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누군가 다가옵니다.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은 더 큰 두려움에 싸여 “유령이다!”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귀가 번쩍 뜨입니다. 물 위를 걸어오시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깨닫고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께 달려갑니다. 예수님만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도 물 위를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베드로가 제정신으로 돌아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예수님만 바라보며 걸을 때는 몰랐는데, 거센 바람이 부는 호수 위에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두려워졌습니다. 곧 베드로는 물에 빠집니다. 예수님께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베드로를 건져 올리시고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칩니다.
오늘 복음은 분명합니다. 우리 삶에 위기가 닥쳤을 때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만 시선을 두고 있을 때는 풍랑을 뚫고 물 위를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두던 시선을 놓치고 자기에게 닥친 풍랑을 바라보는 순간 물에 빠집니다. 우리 삶에 어려움과 위기가 닥칠 때 삶의 문제만 바라보면 결국 더욱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어려울수록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면 풍랑은 잦아들고 다시 평화가 찾아옵니다. 주님께 시선을 두고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가십니다. 제자들은 놀라 유령이라고 소리칩니다. “귀신이다.” 하고 외친 것이지요. 그들은 무엇인가 두려웠던 겁니다. 겁먹고 있었기에, 유령이 보이고 귀신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는지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는데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완벽하게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철저하게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던 것이 원인입니다. 그러기에 불안했습니다. 어정쩡한 삶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정말 스승님이신지 확인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그의 청은 받아들여집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가 무사히 걸어오기를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물에 빠지고 맙니다. 그리고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베드로 역시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의심하였느냐?” 스승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의심했던 것이 죄스러웠던 것이지요. 두려워하면 의심하게 됩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그분께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못 걷습니다. 능력이 없는 탓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힘’을 지니면 걸을 수 있습니다. 물 위를 걷는 것처럼 힘들고 불가능한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힘’을 청해야 합니다. 의심을 버리고 애절하게 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교훈입니다.
☆☆☆
새벽녘에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어 제자들 쪽으로 가시자 제자들은 놀란 나머지 “유령이다!” 하고 외쳤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기적의 음식을 먹은 것이 어저께의 일이었음에도 제자들은 아직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자 베드로는 확인을 시도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당돌한 제안이었건만 스승은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그러나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곧 빠져 들고 맙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베드로의 이 외침은 자신의 잘못을 실토하는 고백입니다. 스승의 질책은 참으로 따뜻하였습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베드로와 그를 바라보는 스승의 인자한 눈길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처음에는 물 위를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자 겁을 먹고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의심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면, 인간의 힘으로는 전혀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교훈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힘을 지니는 것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의심을 버리고 믿는 일입니다.
“유령이다!”
-양승국신부-
<주님으로 인해 나는 의미있는 존재>
오늘 복음은 아직 제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왕초보들’이었기에, 아직 갈 길이 먼 ‘애송이’ 제자들이었기에, 쉼 없이 좌우로 흔들리는 제자 공동체의 실상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때 마침 갈릴래아 호수에는 맞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저는 여러 번 체험해봐서 잘 아는데 물이라는 것 정말 무섭더군요. 서해바다 같은 경우 조수간만의 차가 얼마나 큰지, 물이 빠져나갈 때, 물의 흐름을 거슬러 되돌아오기란 정말 힘듭니다. 갈릴래아 호수 같이 큰 호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된 맞바람을 한번 만나면 정신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오늘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제대로 된 역풍을 만난 것입니다. 거기다 악천후에 파도까지 넘실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경우 바람의 흐름에 따라 되돌아오던지, 바람의 흐름을 타고, 물결의 흐름에 맡기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상책인데, 당황한 제자들은 기를 쓰고 역풍에 맞섰겠지요. 그러다보니 힘은 힘대로 들고 배는 그 자리서 계속 맴돌고만 있었습니다.
그런 순간 누구에게나 드는 생각은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곳을 벗어나고자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노를 저었기에 제자들은 하늘이 다 노랗게 보였을 것입니다. 현기증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제자들이 겁에 질려 외치는 비명소리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정말 가∼관입니다. “유령이다!”
무슨 유치원생들도 아니고,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제자들입니다. 스승을 보고 유령이라니요. 보십시오. 아직도 가야할 길이 까마득한 제자들입니다. 아직도 더 큰 가르침, 더 큰 깨우침, 더 큰 신앙이 필요한 제자들입니다.
역풍을 만나 힘겨워하는 제자들이 너무 딱해 안심시키고 도와주기 위해 찾아오신 스승을 보고 유령이라고 외친 제자들, 그리고 이윽고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 순식간에 정말 ‘뻘쭘’하고 송구스럽고 수습하기 힘든 난감한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하필 그 어색한 순간, 좀 가만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분위기 파악 못하고 베드로 사도가 또 나섰습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용기백배해서 물위를 몇 걸음 걸어 예수님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어, 나도 되네.” 그 순간 베드로 사도는 다른 제자들 앞에 우쭐해졌겠지요? 그러면서 좀 뻐겼을 것입니다. “자네들 나 봤냐? 나야 나! 나라구! 수제자! 너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될 거야.”
유머감각이 보통이 아니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 잔뜩 기고만장해있는 베드로에게 한방 제대로 먹이십니다. 순식간에 거센 바람을 일으켜 베드로 앞으로 보내십니다. 갑자기 겁을 잔뜩 집어먹은 베드로는 여지없이 깊은 물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전의 그 자신감, 당당함을 순식간에 사라지고 큰 두려움에 체면불구하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마치도 개그콘서트 한 코너를 보고 있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지속적인 겸손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나는 의미 있는 존재, 주님 떠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겸허함입니다.
우리 내면이 나는 특별하다, 나는 대단하다며 교만과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십니다. 주님 도움 같은 것 필요 없다, 나 혼자 힘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떵떵거리는 사람에게서 주님은 홀연히 떠나가십니다.
비록 오늘 우리 매일의 삶이 흔들리고 크게 요동친다할지라도 늘 겸손하게 주님께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얻지 못할 잔잔한 마음의 평화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의 삶이 끝도 없는 고통과 좌절, 병고와 십자가로 도배된다 할지라도 어떻게 해서든 그분의 옷자락을 꼭 붙들고 그분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해나가실 것입니다.
신학교 시절, 잠깐이지만 가까운 친척한테서 수영을 배운 적이 있다. 그는 수영에서 가장 기초이자 핵심은 물에 ‘떠 있음’이라고 알려주었다. 수영 선수들을 보면 하나 같이 물을 많이 튀기는데, 이는 ‘잘난 척’하려는 것이 아니라 물 위에 떠 있기 위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일 뿐이다. 그럼 왜 물 위에서 물장구를 치는가? 수면에서 하는 물장구는 물 깊은 곳에서 하는 것보다 훨씬 힘이 덜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영은 물에 떠 있을 때 편안히 오래 할 수 있다.
물에 뜨는 방법은 집에서 이불 위에 누워 있다고 생각하고 물에 몸을 맡기면 된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하면 자꾸만 물속에 가라앉는다. 물에 가라앉는 부위는 힘이 들어가 있는 곳이다. 연습을 하고 또 하고, 물과 친해졌을 때쯤, 물의 부력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을 때쯤, 자연스럽게 몸이 물 위에 떴다. 잠깐이지만 그 기분은 마치 엄마 품에 포근하게 안겨 있는 아이처럼 편안했다.
온몸에 힘을 뺄 때 물의 부력이 나를 떠 받치듯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하신다. 살다 보면 여러 가지 문제로 마음이 울렁일 때가 있다.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 또는 친구들 안에서 발생하는 감정, 사회생활에서 오는 긴장감…. 모두가 우리 마음을 뒤흔든다. 오늘 하루를 지내며 혹시라도 마음이 흔들린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말씀에 나를 던져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그분의 힘이 나를 편안히 감싸고 계신다는 믿음 안에서…
주님의 손
-최영균 신부-
살아가다 보면 삶의 여정에서 심한 역풍을 만나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우리 힘이 참으로 보잘것없음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제자들을
배에 태워 먼저 보내시고 산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산 위에서 제자들이
걱정스러워 그들을 지켜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힘겨워하는 모습,
한걸음에 달려 내려가 도와줄 수도 있으셨겠지만 주님은 오히려 그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바람에 지치고, 풍랑에 지친
제자들이 잠들어 있던 그 새벽, 주님께서 조용히 그들에게 다가가십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인생의 여정을 아주 짧게 보여주는 한편의 짧은 영화처럼
느껴집니다. 세상의 풍랑에 우리가 고통스러울 때, 이 슬픔과 아픔을 전적으로
치유하고 궁극적인 평화를 주실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이심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세상에 홀로 던져진 존재로 느껴질 때도
주님은 우리를 지켜보시며 당신의 손을 내밀어 우리를 일으켜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힘들다고 느껴지실 때 하늘을 한번 보십시오.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주실 것입니다.
인생의 동반자
- 이동훈 신부-
오늘은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이다. 올해 맞이하는 비안네 축일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교황 베네딕도 16세께서는 올해 6월 19일(예수성심 대축일)부터 1 년간 ‘사제의 해’로 선포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양떼를 섬기는 목자의 참된 모범인 아르스의 본당신부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선종 150주년’임을 상기시켰다.
비안네는 주민이 230여 명에 지나지 않는 프랑스의 아르스라는 아주 작은 시골에 부임했다. 당시 얼마 되지 않는 교우들 대다수는 세상사에 쫓기면서 신앙엔 무관심하며, 영적으로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태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비안네는 40여 년을 사목하면서 대단한 변화를 이루어 냈다. ‘성체의 성인’, ‘고해소의 성인’, ‘본당신부들의 수호성인’등으로 불리는 비안네는 모든 사제의 귀감이다. 그러나 비안네 신부도 처음부터 그렇게 훌륭한 것은 아니었다. 정규 학교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신학교에 들어가 라틴어 이해 부족으로 여러 번 낙제해 사제가 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비안네 신부는 부임하던 첫날 성당 안에 계신 예수 성심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을 예수성심께 봉헌했다.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다 따라하겠으니 친히 본당 신부님이 되어 주셔서 도와 달라”고 기도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 일도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주님께 의탁한 것이다. 주님께 의탁하고 시키시는 대로 따르기로 마음먹은 비안네 신부를 통해 하느님은 놀라운 일을 하셨다. 예수님께서 본당신부 일을 대신 해주신 것이다.
어부였던 베드로에게도 폭풍이 몰아치는 호수에서 배를 모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여길 만큼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예수님을 믿고 마음을 다잡아 물 위를 걷다가도, 거센 바람을 보고는 그만 두려움에 휩싸여 물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주셨다.
인생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들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이 풍랑을 헤쳐 나갈 수 있게 해준다. 바다에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분의 손을 잡고, 그분과 함께 있으면 살 수 있다. 비안네 사제와 베드로의 삶에서처럼.
믿음, 그것은 구원 체험
-김찬선신부-
바람을 보는 것과
주님을 보는 것.
선을 보는 것과
악을 보는 것.
우리는 보는 것에 머물고
머무는 것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애초에 무엇을 보는지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봐야 하고 주님이 이룩한 선을 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오죽 좋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베드로는 주님만 바라보고 가다가
거센 바람을 보는 순간 물에 빠집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갔을 때는 물에 빠지지 않았는데
거센 바람을 보는 순간 물에 빠집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물에 빠지지만 사실은 두려움에 빠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거센 바람을 보자 두려워졌다고 얘기하고 있고
그래서 그만 빠져들기 시작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물에 들어가되 빠져죽지 않으려면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수영을 배우려면 물에 대한 두려움부터 없애야 한다고 합니다.
물에 빠질까 두려워 물에 들어가지 않으면
죽지는 않겠지만 아예 수영을 할 수가 없을 것이고,
그래서 용기를 내어 물에 들어가도 두려움이 있으면
그 두려워하는 물에 결국 빠지고 맙니다.
제가 그러합니다.
저는 물을 두려워하여 수영을 잘 못합니다.
어렸을 때 형들 따라 냇가에 갔다가 죽을 뻔했기 때문입니다.
홍수가 그쳤지만 아직도 물살이 거세었는데
저는 물가에 있다가 그만 급류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급류에 쓸려가다가 사람 다리가 잡혀 살아났는데
그 때의 경험 때문인지 물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도 있습니다.
이 원초적인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든
주님께 대한 믿음이든
믿음이 있으면 두려움을 극복하게 됩니다.
그런데 냇가에서 하는 수영일 경우
나도 수영을 할 수 있다는 믿음만 있어도 되겠지만
거센 풍랑을 헤쳐가야 할 경우는
자신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나의 능력이 거센 풍랑보다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거센 풍랑을 만날 때
우리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지식이 아니고 머리 작용이 아닙니다.
머리로는 능력의 주님께 맡기면 다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것 압니다.
머리로 알지만 실제로 거센 풍랑이 일면
보게 되고 두려워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처럼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
주님께 매달려 구원받는 체험을 한 다음에야
믿음은 다져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지식이 아니고 체험인 것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구원체험인데,
그것도
살아가면서
다져지는
구원체험인 것입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양승국신부-
<실패 앞에 설 때 마다>
베드로 사도,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교회의 반석, 초대 교황, 위대한 사도, 천국의 관리자...
그러나 베드로 사도, 그가 더욱 존경스럽고, 더욱 정감이 가고,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또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베드로 사도, 그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향한 오랜 신앙여정에서 수시로 흔들렸고, 나약했고, 갈등했고, 번민했다는 것입니다.
그 같은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오늘 복음에도 잘 그려지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렵다 못해 소리까지 질러대는 제자들 앞에서 물위를 걸어 등장하십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건너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오너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 사도는 “네, 주님!”하고 용감히 대답은 했겠지만, 속으로 엄청 겁이 났을 것입니다.
망설이고 있는 베드로 사도를 향해 주님께서 “자, 봐라, 이렇게 걸어봐라.” 하면서 자상히 물위를 걷는 법을 가르쳐주셨을 것입니다. 용기를 낸 베드로 사도는 배에서 내려 물위로 발을 내딛기 시작합니다.
설마 했는데, 물 위로 한 발을 내려서니 물로 빠져들지 않고 설 수 있었습니다. 신중에 신중을 더해 또 한 걸음을 옮겼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빠져들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 사도의 내면의 상태를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우쭐한 기분도 들고 속으로 이렇게 외쳤겠지요.
‘아싸! 이제 나도 된다. 나도 스승님처럼 물위를 걸을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다른 제자들을 향해 그랬겠죠.
“야, 너희들 봤냐? 수제자의 본 모습을! 너희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될거다.”
그러나 팽배했던 자만심도 촌각이었습니다. 잔뜩 기고만장해 있던 베드로 사도 앞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거센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큰 파도가 갑자기 들이닥치면서 불안감에 휩싸인 베드로 사도의 내면은 즉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에 베드로 사도는 있는 힘을 다해 외쳤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수제자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지는 순간입니다. 의아한 눈길로 베드로 사도를 바라보던 다른 사도들 ‘잘난 척 하더니 쌤통이나. 내 그럴 줄 알았다.’ 며 속으로 엄청 웃었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한계는 바로 여기까지였습니다.
때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능력과 힘, 그를 바탕으로 한 성공도 허락하시지만, 그와 반대로 철저한 실패, 무기력, 한계, 나약함, 좌절, 실망감, 막다른 골목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극단적 한계 상황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의식을 부서트리시고 주님께서 하신다는 진리를 깨우쳐주시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주님께서 손내밀어주시고, 주님께서 도와주셔야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배려가 아닐까요?
가끔씩 맞이하는 실패, 한계 앞에 설 때 마다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은 바로 제대로 된 우리의 인생이 펼쳐지는 순간임을 말입니다. 그 순간은 이제야 훌륭한 선수들로 구성된 팀을 이끌고 승리를 준비하는 활기찬 인생의 후반전이 시작되는 순간임을 말입니다.
믿음 약한 베드로?
-전삼용신부-
1915년 1차 세계대전 중이었습니다. 이 해에 에디스 케벨이라는 영국인 간호원이 어쩌다 그가 근무하던 독일 야전병원에서 영국 병사 포로가 탈주하는 것을 도와주었다는 죄목으로 인하여 체포되어 독일군에게 총살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처형 전 독일 재판소는 그녀에게 "같은 민족인 영국 병사를 탈주시킨 것은 당신이 영국인 간호원이었기에 영국을 향한 애국심의 발로였던가?" 하며 준엄하게 질문하였을 때 에디스 케벨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아닙니다. 애국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를 탈주시킨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모방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그리스도를 그대로 모방하려는 것이 교만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가끔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하셨을까?”라고 충고를 하면, “우리가 예수님이야? 우리가 예수님이랑 같아?”라는 식으로 예수님을 따라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어쩌면 인간으로서 교만한 생각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모습을 보고 그것까지 따라하려고,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인간이기에 물 위를 걸을 수 없고,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기에 물 위를 걷는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까지 따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베드로가 그렇게 청한 것이 교만에서 나온 행동일까요?
먼저 풍랑이 이는 갈릴레아 호수를 밤에 배를 타고 건너보신 일이 있으신 분은 그 출렁이는 시커먼 바다에 발을 내어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믿음이 요구되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저도 성지순례 때 바람이 이는 밤에 나룻배를 타고 흔들흔들 거리며 갈릴레아 호수를 건너보았고 베드로가 걸었다는 물을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시커멓고 출렁이는 물은 바라보는 것만도 끔찍했습니다.
자신도 그 위를 걸어보겠다고 말했던 베드로의 믿음은 어쩌면 사도들 중의 으뜸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베드로에게는 물 위를 걷는 것이 특별해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스승이 그렇게 하기에 자신도 그렇게 해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스승이 하는 것을 모방하려 하는 마음에 그렇게 청했고 그 청으로 인해서 유일하게 물 위를 걸은 사람으로 기록되게 된 것입니다.
제자란 무엇이든 스승을 모방하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삶과 다르지 않고 닮은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셨고 그래서 우리 삶의 모델이 되신 분입니다. 베드로는 어쩌면 모든 것에서 스승을 모방하려는 가장 제자다운 제자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은 것은 그가 건방지게 물 위를 걷기를 청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따라하면서도 온전히 따라하지 못할 것이라는 약한 믿음과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감히 유령처럼 물 위를 걷는 분에게 자신도 따라 해도 되느냐고 여쭙기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오르기 직전에 그의 제자 엘리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로부터 데려가시기 이전에, 내가 너에게 해 주어야 할 것을 청하여라.”
엘리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승님 영의 두 배를 주십시오.”
엘리야는 스승 된 입장으로서 황당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제자라고 키워놓았더니 자신보다 두 배의 능력을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스승을 뛰어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능력을 받습니다.
저의 교수 신부님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넘어서는 제자가 나온다면 나는 정말 기뻐서 펄쩍펄쩍 뛸 것이다.”
참다운 스승은 제자가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 스승으로서의 참 기쁨일 것입니다. 스승을 넘어서려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이 좋은 것인데 하물며 스승을 그대로 모방하려고 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자신의 스승이 하는 것은 무엇이거나 따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스승님으로서 우리에게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하도록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것까지도 따라하려 했기 때문에 물 위를 걸은 최초이자 마지막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칫 베드로의 약한 믿음이 부각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저는 당시에 베드로가 가장 용감했고 가장 믿음이 강했고 가장 제자다운 제자였다고 느낍니다.
우리도 항상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어떻게 그분처럼 살아?’가 아닌, ‘그분의 제자는 그분처럼 살아야 돼!’라고 말하며 매 순간 모든 것에서 그분의 삶을 모델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옛날 페르시아의 왕이 빨리 말을 키우고 싶어서 말에 있어서는 가장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불러서 조언을 구했습니다.
“이보게. 이 말은 혈통이 아주 좋다네. 따라서 이 말이 크면 세상의 그 어떤 말보다도 빠르고, 힘이 넘칠 것 같거든. 그런데 나는 그렇게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너무 지루하네. 가장 빨리 이 말을 살찌워서 성장시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 전문가는 곧바로 이렇게 답변했답니다.
“임금님의 눈입니다.”
빨리 자랐으면 하는 것, 어쩌면 임금이 가지고 있는 욕심일 뿐이지요. 적당히 먹을 것을 주고, 시간만 지나면 살찌고 성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욕심 가득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임금의 눈을 바꾼다면, 대신 자연의 순리에 따라는 성장 속도에 맞는 눈을 가진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요.
생각해보니 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욕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하고,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들. 사실 그 욕심이 나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 준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욕심을 버린다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지요?
이러한 욕심이 어쩌면 자동차 운전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차선을 바꾸면서 힘들게 운전하시는 분들이 많지요. 또한 도로에서 규정한 속도를 위반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의 경우, 다른 차가 자기 차 앞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차선변경과 속도위반을 하고 양보운전을 하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남들보다 더 빨리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힘들게 운전을 해도 모든 규칙을 잘 지키고 안전하게 운전하는 사람과 얼마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이런 욕심을 간직한 눈이 아니라, 사심 없이 주님께 대한 강한 믿음을 두는 눈을 원하십니다. 그래야 세상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도 가능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그 모습을 본 베드로는 자기 역시 그 물 위를 걷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 같습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이 말에 사랑 가득한 주님께서는 “오너라.”라고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베드로는 물 위를 걷습니다. 하지만 거센 바람에 ‘혹시 빠지지는 않을까?’라는 의심이 들지요. 그러한 의심과 동시에 베드로는 물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주님을 향해 걷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적인 욕심과 의심을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은 주님께 대한 강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주님과 함께 진정한 구원의 길로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일에 대해 의심을 품지 마십시오.
빠다킹신부
-김영곤 신부-
오늘의 복음 말씀은 한편의 드라마에서 크라이막스를 보는 것 같은 긴박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시고,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친 이야기는 예수님의 능력과 제자들의 믿음을 대조시키면서 구원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아버지와의 일치에서 나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따로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아버지와의 일치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아버지와 함께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말씀하시고 아버지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십니다.
반면에 제자들의 믿음은 나약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그 믿음의 두께가 달라지니 말입니다.
‘두려움을 버리고 용기를 내어라’하시며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을 격려하십니다. 그 말씀에 힘입어 성질 급한 베드로 사도는 용감하게 도전을 합니다. 그러나 아뿔사! 미처 준비되지 못한 마음은 거센 바람으로 그만 겁에 질려 버리게 됩니다.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결국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부족으로 물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의 손을 잡아 당겨주십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 사도와 같은 행동을 수시로 하고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우리 믿음의 두께가 두꺼워졌다, 얇아졌다 하니 말입니다.
용기있게 무엇을 하다가 갑자기 덜컥 자신감이 없어져 어쩔 줄 몰라 한 적이 있습니까? 호기를 부리다가 된통 봉변을 당하고 한쪽으로 물러선 아픈 기억이 있습니까? 신나게 무었을 하다가 갑자기 재미가 없어진 적이 있습니까? 삶이 온통 무지개 빛으로 보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잿빛으로 보인 적이 있습니까? 자전거를 배우는 도중에 누군가 뒤에서 밀어주고 잡아줄 때 잘 타고 잘 나가고 있다가, 어느 순간 뒤에서 아무도 잡아주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는 갑자기 쓰러져 버린 경험이 있습니까? 간난 어린아이가 혼자라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울고 있다가 부모의 모습이 보이든가, 아니면 부모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울음을 그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그리고 즉시 우리에게 당신의 손을 내 미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달려가다가 넘어져도, 물에 빠져도 우리는 울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치 어린이가 넘어져 울다가도 어머니의 손길이 닿으면 울음을 뚝 그쳐버리고 일어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오너라.”하시며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이 들리면 즉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용기를 내어 그분께로 달려갑시다. 비록 달려가다 넘어져도 그분의 손길이 항상 나를 잡아 일으켜 준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분께로 달려갑시다. 그 분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확신하고 그분께로 달음질칩시다.
깊은 신뢰와 믿음은 커다란 용기와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우리의 신뢰와 믿음은 한 방향으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며, 예수님께서 내미시는 손을 우리는 굳게 잡고 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기도와 신앙은 삶의 나침반과 힘의 원천으로 작용합니다. 강하고 굳센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리라고 믿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 대한 깊은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기도와 내적 힘"
-이수철신부-
어찌 보면 깊은 허무의 탄식 간절한 기도일 수 있습니다.
깊은 허무에서 터져 나오는 기도입니다.
누구나 내재해 있는 허무의식, 하느님 찾으라는 싸인 일 수 있습니다.
믿는 이들의 기도를 통해 삶의 허무는 하느님의 충만이 됩니다.
허무라는 환상의 베일을 벗겨내면
하느님의 생명으로 가득 찬 현실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내적 힘은 기도를 통한 하느님 체험에서 옵니다.
하느님과의 친밀한 기도입니다.
오늘 새벽 성무일도 성경독서 시
아모스 예언자는 하느님과 대화의 기도를 나누었고,
어제에 이어 복음의 예수님은 군중을 돌려보낸 뒤,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고
저녁 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합니다.
1독서 민수기의 모세 역시
하느님께 인정받은 참으로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봅니다.
땅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던
모세를 두둔하시는 주님의 다음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그는 나의 온 집안을 충실히 맡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입과 입을 마주하여 그와 말하고,
환시와 수수께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주님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두려움 없이 나의 종 모세를 비방하느냐?”
이 말씀,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 해당되고 있습니다.
밤마다 모세처럼
하느님 아버지와 입과 입을 마주하여
친밀한 대화의 기도로 영육을 충전시켰던 예수님이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로 영안이 활짝 열린 예수님,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이 탄 배를 발견했고,
하느님의 능력으로 새벽에 호수 위를 걸어 와 제자들을 구해주셨습니다.
“유령이다!”
두려워 소리 지르는 제자들을 부드러운 음성으로 격려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애초부터 타고 난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은 없습니다.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는 기도요,
체험을 통해 깊어지는 기도에 믿음입니다.
거센 바람에 두려움과 더불어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부르짖는 베드로의 외침, 그대로 기도입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이어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를 구해 내시며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이런 구원 체험을 통해 베드로의 믿음은 더욱 강해졌을 것입니다.
민수기의 모세 역시 미르얌의 치유를 간청합니다.
“하느님, 제발 미르얌을 고쳐주십시오.”
제자들과 늘 함께 하셨던 주님은
우리의 인생 항해 여정에도 늘 함께 하시며
이 은혜로운 미사 중에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아멘.
두려워 마라
-임문철 신부-
교구청에서 일할 때, 한 신부님을 도와 공소의 토요 특전미사 집전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그 공소에 가려면 넓은 길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마을 공동묘지를
가로지르는 샛길을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득이 샛길로 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마침 가을이라 달은 밝기만 하고,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면 다 허물어진 애기 무덤 위에 자란 하얀 억새꽃이 손에 닿을 듯한데,
순간적으로 어릴 적 본 영화 ‘월하의 공동묘지’의 한 장면이 생각나면서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명색이 신부란 사람이 공동묘지의 귀신을
무서워하다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오싹해진 기분이 멀리
달아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 공동묘지 근처에는 백여 년 전
신축교난 때 순교한 분들이 함께 모셔진 성당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는 길에는 용기를 내어 일부러 그곳을 들렸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같은 공동묘지인데도 그렇게 마음이 평화롭고 따스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보다 먼저 주님을 믿고 따르다가 이제 주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는 그 영혼들의 상태가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워 마라. 걱정을 마라. 주님 계시니 두려움 없네.”
떼제의 노래가 절로 흘러나왔습니다.
관계와 능력
-이인주 신부-
베드로는 호수 위를 걸어오는 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고는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도 물 위를 걸었다. 이 사건은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서 이루어진 깊은 차원의 관계를 말해준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사건이기에 베드로 또한 그분의 말씀과 능력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능력이 어디서 온 것일까?
여러 차원에서 볼 수 있겠지만 첫째는 순수성이라고 하겠다. 초월적인 능력이나 힘은 바로 순수성에서 나온다. 순도 100퍼센트의 다이아몬드나 금에서 신비스런 빛깔이 나오듯이 예수님한테서 그런 순수성이 확연하게 드러남과 동시에 물 위를 걷는 기적도 일어난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의심 없이 믿었고, 그래서 물 위를 걷게 되었다. 그런데 잠시 두려운 생각이 드는 순간 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순수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예수께서 축지법을 쓰셨나 하는 것이다. 불가나 도가에서는 예수님도 이 방법을 배워 물 위를 걸으셨다고 하는데, 신빙성이 전혀 없다. 이스라엘을 떠난 적이 없으신 예수께서 언제 동양에 와서 그것을 배우셨겠는가?
세 번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비춰본 설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물 위를 걷는 정도로 만족하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차원을 달리하는 분이시다. 이곳에 계신가 싶었는데 벌써 저기 계시고, 문이 잠겨 있는데도 안에 들어와 계신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도 하셨다. 부활 전에 이러한 능력을 만분의 일이라도 발휘하셨다면 안 될 것이 있었을까?
결국 순수성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믿음의 순수성만 제대로 유지한다면 안 될 것이 없다는 결론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가면 물 위를 걷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셨던 것처럼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차원에서 베드로도 예수님한테서 배움 끝에 전수를 받았던 것이다. 그것이 오늘 물 위를 걷는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능력을 바라는 사람들은 그냥 능력이 생기길 바랄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를 점검해 봐야 한다. 내가 순수하게 그분께 의탁한다면 그분은 나에게 당신의 능력을 나눠주실 것이다. 그것을 믿어라.
<주님, 너무도 캄캄합니다>
-양승국신부-
아침부터 들려온 충격적인 소식으로 다들 우울한 하루를 지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생활고나 빚으로 인한 자살 문제가 점점 심각해져 뒤숭숭한 나날이었는데, 사회분위기를 좌지우지하던 영향력 있던 인물마저 그렇게 허탈하게 목숨을 끊으니 여파가 더 커지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매일 신문 사회면을 크게 장식하는 자살과 관련된 사건을 접할 때 마다 씁쓸함을 넘어 두려움을 금치 못할 지경입니다.
물론 "얼마나 상황이 절망적이었으면, 얼마나 중압감이나 스트레스가 컸으면 그런 결정을 했을까?" 하는 마음에 가련한 마음이 앞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느 정도 극복 가능한 어려움 앞에서 사람들은 보통 나름대로의 계산 아래, "한 몇 년만 꾹 참고 고생하면 지나가겠지" 하고 기꺼이 고통에 맞섭니다.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사람이라면, 1-2억 정도의 빚 앞에서 "한번 이겨내 보자"고 자신을 다독일 것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너무도 엄청난 상황 앞에서 사람들은 쉽게 포기하지요.
건전하던 한 회사원의 상황을 순식간에 터무니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만들어버리는 우리의 사회구조가 원망스럽습니다. 건강하던 한 아버지를 단번에 폐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금융권의 횡포가 무섭기만 합니다.
그 어떤 조언도, 그 어떤 위로의 말도, 그 어떤 희망의 메시지도 전할 수 없는 많은 형제자매들의 절박한 처지가 너무나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불행하기 그지없는 최후의 선택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단 1%의 가능성에도 희망을 가지고도 한 번 살아보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들, 이미 사망진단서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시한부 인생의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생명을 갈구하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건강만 회복된다면, 다시 한번 살아서 수술실을 나갈 수 있다면 그 어떤 대가도 달게 치루겠다는 환우들이 숱하게 많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선물이자 은총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절망스럽다 하더라도 인위적으로 어떻게 해서는 안될 그 무엇입니다.
정말 죽고 싶은 생각이 드는 분들의 심정,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자살은 안됩니다.
하느님께나 가족들에게나 자신에게도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죽을 마음이 있으면 그 마음으로 한번 살아보려고 노력하시길 간절히 부탁 드립니다.
정말 괴로울 때, 정말 죽고 싶을 때, "이렇게 살아서 뭣하나" 하는 마음이 들 때 오늘 베드로의 외침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주님, 제가 지금 이렇게 고통스럽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죽고만 싶습니다. 제발 한번 도와주십시오!"
"주님 제 앞길이 너무도 캄캄합니다. 제 손을 붙들어주십시오. 저도 한번 노력해보겠습니다. 제발 절 살려주십시오."
주님은 자비가 충만하신 분, 우리의 간절한 외침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배와 맞바람
-류해욱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대목입니다.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재촉해서 제자들을 배를 태워 당시보다 먼저 건너가게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 말해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같은 내용의 요한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그분의 놀라운 능력을 보면서 이 세상적인 구세주로 잘못 생각하여 억지로라도 왕으로 떠받들 낌새를 보입니다. 제자들이 많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그렇게 하는 날이면 큰일이지요. 맏형인 베드로가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 어떤 그리스도이신지는 몰랐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얼른 먼저 제자들을 배를 태워 보내고 당신이 손수 사람들을 돌려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기도하러 산으로 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큰일을 앞두고 있거나 큰일이 일어난 후에는 주로 산으로 기도하려 가십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에게도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 안에서 그런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것이지요. 놀랐던 마음을 아버지와 함께 나누고 특별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만 함께 있는 시간을 갖고 당신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조용히 반추하면서 감사드리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조용히 산에 오르는 시간, 우리 삶을 돌아보며 하느님과 함께 머물며 삶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동안에 제자들이 타고 갔던 배가 맞바람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갈릴레아 호수는 갑자기 풍랑이 일기로 악명이 높은 호수입니다. 평시에는 그림처럼 잔잔하고 아름다운 호수에 갑자기 맞바람이 불어 성난 듯 거센 풍랑을 일으킵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맞바람과 이 풍랑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기도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배에 예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을 때 맞바람이나 풍랑을 만나 역경과 시련에 빠지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이 참으로 우리에게 복음, 즉 기쁜 소식인 것은 우리가 역경에 처할 때가 있지만 그때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구원의 손길을 내미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제자들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맞바람이 거세게 불어 닥칠 때, 우리 삶의 여정이 험난한 길을 따라 걷게 될 때,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손을 내미십니다. 순풍에 돛단 듯 흘러가는 것이 우리가 타고 있는 인생이라는 배가 아니지요. 오히려 맞바람을 맞을 때가 더 많은 것이 우리네 인생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이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분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유혹에 빠지려고 할 때, 우리가 슬픔에 잠겨있을 때,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알아보는 눈과 열린 마음입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아직 눈과 마음이 열리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제자들은 “나다, 안심하여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자 곧 주님을 알아보고 그분께 다가갔습니다. 늘 제자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위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주님께 다가가려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처럼 우리 인생길에 맞바람이 불어 닥치면 그만 믿음이 약해져서 주님이 거기 계시다는 것을 잊고 두려워하고 무에 빠지게 됩니다. 베드로는 그때 주님께 구해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믿음이 약해져서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 도와달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달라고 외치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용기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약함 때문에 자주 넘어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지녔기 때문에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지니고 우리 인생이라는 배를 저어 앞으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 불어오는 맞바람이 오히려 무더위를 식혀주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손길
-강영구신부-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하고 말씀하셨다.
그대에게
당신은 당신이 곤경이 빠졌을 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줄 스승이나 동료 혹은 벗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런 스승이나 동료 혹은 벗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만일 당신 주위에 당신이 곤경이 빠졌을 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는커녕
당신의 불행을 은근히 즐기거나 당신을 더 깊은 구렁 속으로 밀어 넣는 사람들이 있다면 당신은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곤경이나 위험에 빠졌을 때를 대비하여 여러 가지 준비를 합니다. 돈과 재산을 모우고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갖가지 지식을 쌓고, 또 보험에 가입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자신에게 안전을 보장해줄 것이라 자신하면서 흐뭇해합니다.
그러나 행복과 성공을 함께 기뻐해주고, 곤경에 빠졌을 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용기와 힘을 보태줄 동료나 벗이 없다면, 돈이나 재물, 지위나 명예 속에서도 불행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물에 빠졌지만, 예수의 손을 잡고 살아납니다. 그가 물 위를 걷겠노라 터무니없는 만용(蠻勇)을 부릴 수 있었던 것도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 없음을 꾸짖지만, 사실 그는 예수님을 철저히 믿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따뜻한 손길이 이웃과 형제들에게 구원과 행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그들도 당신에게 사랑과 자비의 손길을 내밀 것입니다.
가까이 계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행복한 8월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베드로의 의심 - 우리 신앙의 현주소
-박상대 신부-
마태오, 마르코 그리고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다음에 일제히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기적과 예수께서 풍랑에 시달리던 제자들의 배에 오르시자 즉시 풍랑이 가라앉은 기적을 보도하고 있다.(마태 14,22-33; 마르 6,45-52; 요한 6,15-21) 물론 구체적인 내용은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다. 원전(原典)으로 통하는 마르코복음(6,45-52)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의 북동쪽에 위치한 베싸이다로 보내신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혼자 산에서 기도하신다. 그 동안 날이 저물어, 즉 밤이 되었는데도 배는 역풍을 만나 목적지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밤이었지만 이것을 보신 예수께서는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 쪽으로 오시다가 그들 곁을 지나쳐 가시려고 하신다. 시간은 흘러 새벽 4시쯤이었다. 이에 제자들이 유령을 보는 줄 알고 비명을 지른다. 모두가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 하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도 그쳤다. 제자들은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는 빵의 기적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복음서는 보도하고 있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이렇듯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권능이 부각되고 있다. 물위를 걸으시고, 예수님 앞에 풍랑도 복종하는 이변(마르 4,35-41 참조)을 통해 명실공히 예수님은 인간과 자연 위에 군림하는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저 놀라고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음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미성숙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요한복음(6,16-21)은 원전의 내용을 대폭 줄였다. 빵의 기적이 있었던 그 날 저녁 제자들만 배를 타고 호수 북쪽 가파르나움으로 가고 있었다. 어둔 밤이 되었음에도 예수께서는 돌아오지 않으셨고, 배는 거센 풍랑을 만나게 된다. 그래도 배는 힘들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 때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 제자들의 배로 다가가신다.
이에 제자들이 겁에 질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 안에 모시려 하는 순간, 그들은 어느새 목적지에 가 닿았다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6장을 통해 ‘생명의 빵’에 관한 새로운 신학을 모색하고 있는 바,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그 가운데 삽입함으로써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 라는 구약의 하느님 현존(출애 3,14)을 예수님께 적용시키고 있다.
이제 마태오복음을 살펴보자. 이야기의 소재는 같지만 마르코복음과 크게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야기의 전반부는 거의 같다.(22-25절) 그러나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겁에 질려 엉겁결에 “유령이다!”(26절) 하며 일제히 소리를 지른다. 예수께서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27절)라고 하신 말씀은 마르코, 요한복음과 같다.
마태오복음의 독창적인 부분은 바로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다.(28-31절) 이는 마태오가 원전에 덧붙인 것으로써 교회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마태오복음 공동체의 교회적 상황과 미래 교회의 교회론적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모두들 유령을 보는 것으로 여겼지만, 예수께서는 “나다.” 라고 하셨다. 이 말씀으로 제자들은 일단 안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베드로와 예수님 간에 펼쳐지는 기막힌 사건을 목격하면서 믿음을 가중시킨다. 베드로와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도 그친다. 이 때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33절) 하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그 사이에 베드로도 깨달은 것이 있다. 자기도 물위를 걸어 예수께로 갈 때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만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거센 바람에 시선을 두는 순간 물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즉각 손을 내밀어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비명을 지르는 베드로는 구해주신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뼈에 새겨야 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31절)
마태오복음 공동체는 나름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공동체를 배 한척에 비긴다면 그 배는 지금 거센 풍랑에 시달려 목적지를 잃고 세상이라는 바다위에서 헤매고 있다는 말이다. 그 앞에, 아니면 이미 배위에 예수께서 계시지만 그들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환난과 박해의 풍랑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 속의 베드로 같은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희미한 가운데 예수님의 현존을 바라보지만 그것도 잠시뿐, 세파에 밀려 신앙을 잃고 물속에 빠져든다. 오늘날 우리 자신들도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다. 베드로의 의심과 나약함이 바로 우리 신앙인의 현주소이다.
교회는 우주만물 위에 군림하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지만, 그 구성원인 신자들은 세상의 고통과 어려움 때문에 그분을 보지 못한다.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고, 그분을 보더라도 그분께 시선을 두지 않고 다른 곳에 시선을 두면 교회는 입으로는 신앙을 고백할지라도 세속의 풍파에 빠져들게 된다. 오늘 복음은 신앙과 세속 사이에서 온갖 유혹과 어려움을 겪는 우리에게도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이다..........
유령이다!(마태 14,22-33)
-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는 밤 사경에 호수 위를 걸으시고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게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유령이다!"하였다. 그들은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예수님게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아침에서 저녁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부활로, 이 일에서 저 일로,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미 성숙함에서 성숙으로, 어설픈 믿음에서 성숙한 믿음으로, 즉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이 우리네의 일상생활이요, 인생여정이다. 그러나 그 배가 건너편으로 안전하게 도달하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를 저어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왜냐하면 각자 자기 인생의 선장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나 대신 내 배의 노를 저어줄 수 없고 또 남의 배를 타고 나의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 선장은 배가 항구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목적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고 그 목적지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 목적지가 분명하지 못하면 엉뚱한 항구에 도달하게 된다. 인생이라는 망망 대해에 배를 타고 저 건너편으로 가노라면 순풍을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기치 못한 거센 바람을 만나기도 한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커다란 어려움을 만나게 되었다. 복음은 이것을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적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실 때도 있고 또 때로는 주님이 나와 함께 있지 않으시는 것 같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도대체 주님은 어디 계시는가? 지금 내가 이렇게 큰 어려움을 만나서 허우적대고 있는데 주님은 나의 고통을 알고 계시는가?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가 가시듯이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아니 한번도 우리를 포기한 적이 없으시고 우리한테서 떠나신 적이 없다. 제자들이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들에게 다가가시는 분은 예수님이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유령이다!"라고 소리를 지르는 제자들에게 다가 오시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 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다. "유령이다!" 라고 소리를 지르면서도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 하지 마라."라고 격려해주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절망 속에서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라는 외마디 속에는 항상 우리를 위로하시는 주님의 소리가 있다. 우리를 격려해주시는 말씀이 있고 "나다."라고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시는 표지가 있다. 그것을 보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아니 그 소리를 들으려고 하고 그 표지를 읽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반드시 주님의 음성과 모습이 있다. 예수님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우리가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많은 유령들이 있는 법이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보지 못하고 "유령"으로 보이게 하는 많은 허상들이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지그,a 제자들의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이다. 복음은 제자들의 이런 어려운 상황을 "밤 사경에"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밤사경은 가장 어두운 시간이다. 지금 제자들의 입장이 아주 캄캄한 상황이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이 "유령이다!" 라고 두려움에 휩싸여 상황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즉시 주님께 신뢰하는 청들 들였다. "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이 "오너라"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운 마음을 가졌다. 그 결과 베드로는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하고 다시 주님을 찾았고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소리를 질렀다. 고맙게도 예수님은 다시 곧 손을 내미시어 그를 붙잡으시고, " 이 믿음이 약한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따끔하게 나무라셨다.
결국 베드로가 물에 빠진 것은 믿음이 약하였기 때문이요, 믿음이 약하다는 말은 의심하였다는 것이다. 그럼 의심이란 무엇인가? 의심이란 확신과 불신 사이에 있는 것이다. 즉 절대적인 믿음과 절대적인 불신 사이에 있는 것이 의심이다. 그러니까 의심이란 어느 한쪽에 완전히 기울어진 것이 아닌 이쪽에도 조금 걸치고 저쪽에도 조금 걸쳐 있는 상태이다. 의심이란 이쪽으로도 완전히 기울어질 수도 있고 저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질 수도 있는 중간 상태이다. 그러니까 의심은 잘하면 절대적인 믿음으로 기울어 질 수도 있고 잘못하면 절대적인 불신으로 기울어질 수도 있는 어중간한 상태이다. 우리가 이런 의심이 들 때가 많이 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아닌지, 저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이 길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인지 아닌지, 하느님의 듯은 어디에 있는가? 라고 자문하게 될 때가 이것은 아직 확실하지 못한 의심 중에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면 의심이 들 때 어떻게 해야하는가? 예수님은 우리가 의심이 들 때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그런 의심이 들 때에도 예수님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를 들려 주시고 당신의 현존을 볼 수 있는 표지를 보여 주신다.
제자들이 "유령이다!"라고 두려워 소리를 지르고 있는 상황에서도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소리를 들려 주셨고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베드로가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하고 청하였듯이 예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에 신뢰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오너라."하였을 때 베드로는 아무 의심없이 배에서 내려 물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즉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신뢰하였을 때 물위를 걸어갈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고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은총을 받았다. 그러나 베드로가 또 다시 물에 빠지는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거센 바람을 보고서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신뢰하고 믿음의 행동을 옮겼을 때에는 물위를 걸어가는 기적이 일어났고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는 여정이었지만 거센 바람이 불었을 때 예수님을 보지 않고 또 예수님의 소리를 신뢰하지 않고 거센 바람을 보았을 때에는 물에 빠지는 어려움을 겪에 되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배를 타고 이 편에서 저 편으로 건너가는 도중 만나게 되는 많은 어려움 앞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걸어갈 때에는 더욱 큰 믿음으로 성장하고 물위를 걸어가는 기적도 일어나지만 큰 어려움 앞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의 소리를 듣지 않고 "거센 바람을 볼 땡에는" 점 점 더 큰 깊은 수렁에로 점 점 큰 불신으로 빠져들게 된다. 의심이 든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의심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성숙시켜줄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아니면 우리의 불신만을 더욱 더 크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의심이 들 때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
확신과 불신 절대적인 믿음과 절대적인 불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의심 중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라는 소리를 아마도 수없이 경험한 후에야 비로서 확고한 믿음으로 성숙될 수 있으리라.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판관기를 보면 기드온이 300명의 용사를 데리고 미디안의 수십만명을 물리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이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날 일이라면, 기드온이 300명의 용사를 데리고 미디안의 수십만명의 병사를 물리친 사건은 세계지상전에 길이 기억되어질 일일 것입니다. 그 전쟁의 승리로 그는 한때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되어질 뻔 했습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과 기드온의 다른 점은 그가 승리한 이후에 방심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방심은 전쟁에 대한 방심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방심이었습니다. 즉 그는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자기가 사는 오브라 성읍에 둠으로서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에봇을 섬기게 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하고 기드온과 그 집안의 올가미가 되게 했습니다. 300명의 용사로서 수십만명의 군대를 물리친다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기드온은 처음부터 자신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아시는 대로 우리 문중의 부대는 므나쎄 지파에서도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집안에서도 가장 어린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그가 300명만을 데리고 미디안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엄청난 하느님의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들이 어떤 무기를 가지고 싸웠습니까? 사실 무기랄 것도 없습니다. 빈항아리에다, 횃불에다, 나팔을 가지고 갔으니 이게 무슨 무기입니까?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도 이겼습니다. 여기서 기드온은 하느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기적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기적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승리이후, 그는 얼마되지 못해 영적인 침체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금으로 에봇을 만드는 실수를 범했고, 결국 그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영적으로 타락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기적, 그 이후'에 대해 자신의 영육적 관리에 대해 부족합니다. 어떤 큰일을 체험하거나, 하느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난 다음이 그만 교만해지거나 방자해져서 영적 침체로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능력을 곧장 잃어버리고, 제 잘난 멋으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이며, 사탄은 바로 이런 시기에 우리 인간들의 영적 결핍 공간을 파고드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든다면,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그런데 금식 이후에 사탄이 찾아와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또 다윗은 전쟁에서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전쟁터에 직접 나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시편을 보면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은혜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그에게 바쎄바라는 여인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시험에서 승리하셨지만, 다윗은 이기지 못하고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면서 갈등을 겪는 것중에 하나도 이런 것입니다. 은혜를 체험했으면 그 은혜가 지속되거나, 그 감격을 가지고 계속 살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조금전에,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서 그 체험 때문에 뭔가 할수 있을 것 같았는데 얼마가지 못해 낙심하거나 주저앉아 버릴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체험한 은혜보다는 내가 지금 부딪히는 현실이 더 크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먼저 22-2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군중을 보내신 뒤에 조용히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도 거기에 혼자 계셨다. 그 동안에 배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사건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오병이어는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어떻게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개로 50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 먹일 수가 있겠습니까? 마술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미리 단체로 도시락을 주문해 놓았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먹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적어도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체험이었음에 분명합니다.
더구나 그 기적의 현장에 가장 가깝게 있었던 제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에 가득 담을 만큼 남았습니다. 그들은 남은 것을 광주리에 주어 담으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그들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주님은 그들을 재촉하셔서 그들에게는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당신 자신은 산에 기도하러 가십니다.
왜 예수님은 이들을 황급하게 보내고 자신도 그 자리를 피하신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이 기적을 체험한 후에 그 곳에 모인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임금)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군중들은 한껏 꿈에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꿈입니까? 요즘 유행하는 말이 있습니다. "잘 자, 내 꿈 꿔" ... 멍청한 사오정은 "잘 자, 개꿈 꿔", 허준은 "잠은 잘 자야 되며, 내 꿈 꾸지 않는다면 침을 놓아야겠소".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런 꿈이 아닙니다. 어떤 꿈입니까? 적어도 5000명을 먹이실 수 있다면 자신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도 그런 기대감에 적지않게 동요를 하고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기대감을 뒤로한 채, 제자들은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자신은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왕이 되어 그들이 요구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것이 주님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배를 타고 육지에서 멀리 떨어졌을 즈음에 바람이 몹씨 불더니 급기야 큰 파도가 치고, 호수가 그들을 삼킬 것 같은 위험이 닥쳐 온 것입니다. 말씀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우리는 여기서 이상한 점을 한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들이 호수로 나가게 된 것은 순전히 자신들의 의지라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냥 육지에 머물러 있으면서 조금전에 체험했던 오병이어의 감격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주님은 그들에게 호수로 나가라고 하셨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다로 나갔더니 파도가 치고, 큰 물결이 일어나서 자신들을 삼킬 것 같은 위험이 닥친 것입니다. 차라리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이런 고난은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말씀에 순종했는데 오히려 고난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건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모든 일들이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내가 고난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주님의 말씀에 제대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내가 온전한 순종을 하기만 한다면 적어도 나에게 시련이나 고통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고난이 닥친 것입니다. 고난도 보통 고난이 아니라 그들을 집어삼킬 것 같은 죽음의 고난이 그들에게 닥친 것입니다.
이 사건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그들은 조금전까지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기적의 현장을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그 감격이 아직도 마음 속에서 가라앉지 않은 상태입니다. 어쩌면 그들이 쉽게 호수로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주님께서 조금전에 보여주신 오병이어에 대한 기적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은혜를 받았으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기적을 체험했으니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호수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거친 파도, 즉 고난이였습니다. 큰 풍랑이 그들을 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경험이 없습니까? 하느님을 멀리 떠나서 생활을 하다가 어떤 계기로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고서 주님앞에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돌아왔는데 오히려 더 큰 고난을 만나거나, 아니면 여전히 내 앞에 놓인 문제들이 해결되어지지 않은채 나를 수렁으로 빠트리고 있음을 경험한 일이 없으십니까? 기도 중에 하느님의 뜻이라고 확신하여 앞으로 나아갔는데 오히려 더 큰 어려움에 빠졌던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은총을 받고 난 뒤, 하느님의 방법대로 사업을 경영하면 하느님께서 축복하실 것 같아 신부님 모시고 개업 예배드리고, 주일날은 문닫고, 교회에서 온전히 봉사하면서 그렇게 생활하는데 사업은 더 어려워지는 것을 경험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교화간부들이 열면 십일조해서 축복받은 사람들의 얘기고,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하면 일이 잘 풀릴 것 같아 당장 사업자금이 어려운데도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렸는데 오히려 더 자금난에 허덕인 경우를 만난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말씀에 순종할때'와 '순종하지 않을때'가 어떻게 다르단 말입니까? 아니 어떤 차이가 있단 말입니까? 적어도 말씀에 순종하면 뭔가 풀리는 모습이 보여야 할텐데 풀리기는커녕 더 큰 어려움을 만나다니 이게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까?
오늘 제자들이 우리들이 평소에 의아하게 생각하던 그런 상황에 봉착했습니다. 그들이 은혜 받은 감격을 가지고 순종하면서 나아갔는데 그들이 만난 것은 파도였습니다. 고난이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빨리 해결해 주시면 그래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도 아닙니다. 정작 필요한 예수님은 주위에 없습니다. 아무리 애태우며 불러도 오시지 않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믿더니 쫄딱 망했구나" "예수 믿어도 별수 없네" 이런 말들은 정말 듣기 싫은 말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도 주께서 빨리 내 생활을 회복시켜 주시면 이런 것 쯤은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주위에서 뭐라고 하든 얼굴에 철판깔고 못 들은척하고 어느정도 지낼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한해가 가고, 두해가 가도 도무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인생의 거친 파도는 더 거세게 몰아칩니다. 거센 정도가 아니라 이제 얼마있지 않으면 그 파도 때문에 바다에 빠져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주님은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25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벽 네 시쯤 되어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새벽 4경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떠날 무렵은 초저녁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이 초저녁에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떠난 시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도대체 바다에서 파도와 몇시간을 싸운 것입니까?
왜 예수님은 좀 더 일찍 그곳에 나타나시지 않으신 것일까요? 산에 기도하러 갔다가 깜빡 잠이 들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너무 깊은 기도를 하시느라 제자들은 안중에도 없으셨던 것일까요? 왜 새벽 4시경이 되어서야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일까요? 아마 그들이 파도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거의 기진맥진해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힘을 쓰고 싶어도 쓸 힘이 없는 상태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한가지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렇게 여러시간 파도와 싸우면서 호수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배에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거나, 이렇게 오랜시간 파도와 싸울때 배가 뒤집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들이 탄 배가 오늘날처럼 그렇게 좋은 배도 아니었을테고…, 이런 저런 것들을 종합해서 보면 이들이 호수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 정말 신기할 정도입니다.
여러분은 왜 이들이 이 오랜시간동안 파도와 싸우면서 물에 빠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힘으로 버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베드로가 어부출신이기 때문에 파도의 방향을 잘 알고 있어서 그 지식을 가지고 거대한 파도와 맞섰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고린토1서 10장 13절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여러분이 겪은 시련은 모두 인간이 능히 감당해 낼 수 있는 시련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제자들을 바다로 나가게 하신 것은 주님이셨습니다. 그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의 현장에서 주님은 그들을 지켜주고 계십니다. 비록 지금 당장 모습을 그들에게 나타내 보이시지는 않았지만 그 고난의 현장에서 주님을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도 더러는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까지 우리를 몰고 가시는 법은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가 견딜만큼의 고난을 주십니다. 또 견디기 어려우면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 주닙이십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는지 모릅니다. "차라리 고난없이 인생을 살게 하시지 왜 그렇게 하시는가?"라고 말입니다.
주께서 제자들을 바다로 보내시고, 그곳에서 풍랑을 만나게 하시고, 오랜시간 동안 그들로 하여금 파도와 싸우도록 내버려 두신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이유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힘으로 파도와 싸워서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파도와 싸웠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절망입니다. 좌절입니다. 실패입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눈물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고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을 통해 절망과 좌절을 경험해보지 못하고서 믿음을 얘기한다는 것은 모순일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절망, 좌절, 실패, 이런 것들을 경험해보기 전에 믿음이 무엇인지 온전히 알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전까지 제자들은 어떤 환경가운데 있었습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는 환경이었습니다. 만약 호수로 나가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것이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그들이 보았던 것은 병자를 고치시는 모습입니다. 머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산에서는 주옥같은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언제나 흥분과 감격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이런 날만 계속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 기쁜 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대로 만사형통한 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전혀 얘기치 못한 일들이 내 앞에 닥칠 수도 있습니다. 마치 갈릴레아 호수의 풍랑이 전혀 예기치 못할 때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아오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뒤 신나는 일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 자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정말 신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내 삶속에서 더러는 예기치 못한 고난이 나에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배제하면 안됩니다. 제자들은 이 사실을 아직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파도를 만났을 때 죽게 되었노라고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을 내 힘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보려고 하지만 거대한 인생의 파도 앞에 맥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여전히 자신의 힘이나 능력을 믿고 인생의 파도와 싸워 이겨보겠노라고 거만을 떠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이 파도와 맞서서 싸우다 지칠때까지 내 버려두십니다. 그리고 지쳐서 절망적인 상태에 놓이게 될 때 주님은 그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주님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6절에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려 엉겁결에 '유령이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깊은 은총 속에 있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밤에 물 위로 걸어오실수 있는 분이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외에 누가 감히 풍랑이 이는 물 위를 걸어 오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으로 알지 못하고 '유령'이라고 소리질렀습니다.
영적으로 침체에 빠진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이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이 '유령'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침체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파도와 맞서서 싸우느라 기진 맥진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세상적인 생각들입니다. 세상적인 생각이라면 당연히 호수 위를 걷고 있는 물체는 '유령'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침내 두려워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27절에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주님은 파도부터 잠잠케 하신 후에 나타나지 않으시고, 먼저 나타나셔서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라고 먼저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들은 환경이 극복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환경을 극복하기에 앞서 주님의 말씀앞으로 그들을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절망과 실망속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에게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중에 고난당하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까? 낭패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아니 인생의 거대한 파도앞에 놓인 분이 계십니까? 그런데 그 인생의 파도가 물러가기를 원하십니까? 고난이 하루속히 지나가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는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정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가 만나는 고난이 아닙니다. 어려운 환경이 아닙니다. 눈이 가리워져서 내 인생의 파도앞에 서 계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 더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인생의 파도가 아무리 거대해도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는 말씀이 내 귀에 들려진다면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질 것입니다. 인생의 파도앞에 서 계시는 분이 유령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게 된다면 그 거센 파도를 넘어서게 될 것입니다............◆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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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의심하나 하지않고 굳센믿음으로 주님안에 머물게 성령님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