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중세 유럽의 도시가 오물천지에 더러웠다는 것은 대단히 오랜 세월동안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고대 로마시의 청결한 '이미지'와 대비되어, 중세 문명을 미개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쳐왔다. 현대에 이르러, 학계 내에서 중세 문명의 여러 측면이 재조명을 받았고, 역사 애호가들에게도 그 성과가 많이 전달된 면이 있지만 그 애호가층을 조금만 벗어나도 대중들에게 뿌리박힌 '더럽고 미개한 중세' 이미지는 여전히 강고하다.
이 글은 실제 중세 도시의 위생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학계 최근 성과를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이전, 몇 가지 전제를 깔고 가야 한다. 첫째. "현대 기준으로" 보면 근대든 중세든 고대 로마든 사람 살기 힘다고 생각될 정도로 더럽고 악취나는 곳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둘째,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이든지 건강하게 잘 살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소위 '미개'해서 더러운걸 당연한 상태로 여기고 살았다고 봐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청결을 일정수준 이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제반조건을 갖출 능력이 되었느냐의 문제다. 그런 면에서 도시 위생 문제는 단순히 '겉보기에 깨끗하니 우월하고 더러우니 미개하다'라는 이분법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다.
중세의 위생이론
물론 중세인들의 병리학적 지식은 현대와 다르며 상당히 제한되있었다. 중세 모든 문화가 그렇듯이, 의학 지식 역시도 고대 그리스, 로마의 의학이론과 중세 신학의 결합의 형태를 띄었다. 여기에 더해서 고대 그리스 의학을 수용하여 발전시킨 이슬람 의학의 수용도 폭넓게 이루어졌다.
이 시기 인간 신체에 대한 이해는 근본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에서 나온 4체액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신체의 건강은 근본적으로 열건습냉의 성격을 가지는 4개의 체액이 균형을 이루어야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의학이론 및 그것에 영향을 받은 이슬람 의학을 바탕으로. 중세인들의 몸 이론이 나왔다. 중세에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한 몸으로 여겨졌다. 이것의 정치적 함의에 대해서는 지난번 솔즈베리의 존의 정치사상을 다루며 언급한바 있지만, 의학적인 면에서도 그러했다.
도시든, 국가든, 교회든 공동체는 한 몸이었으며, 이 몸은 개개인의 작은 신체들로 이루어져있다. 어느 하나의 건강은 다른 하나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한 영혼의 건강과 육체의 건강도 둘이 아니다. 따라서 공동체 구성원의 정신적 건강 못지 않게 신체적 건강을 돌보는 것은 공동체 전원의 책임이었다.
중세의 의학자들은 당연히 근대적인 혈액순환과 세균 감염 등을 알지 못했다. 이들은 죄악과 방탕한 행위가 영혼의 건강과 육체의 건강을 동시에 해친다고 믿었다. 따라서 경건한 생활은 건강의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오물과 악취 섞인 공기는 자연스럽게 내면의 죄와 연계되었다. 중세인들은 경건함만으로 병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영혼의 죄를 환기시켜주는 현실의 더러움 역시 영혼과 육신의 건강 모두를 위해 제거해야 될 것들이었다.
도시의 오물
흔히 중세의 거리는 거대한 똥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로 20세기 초반까지 학자들은 중세인들은 위생에 전혀 무관심했으며, 더럽고 악취나는 환경을 숙명이라고 받아들이고 살았다고 보았다. 이는 19세기 이래 역사학을 강력하게 지배해온 '역사의 진보' 사관의 영향이다. 그러나 중세인이라고 인간의 오감이 현대인과 달랐을리가 없고, 이들이라고 깨끗한 환경을 싫어했을리가 없다. 또한 앞서 보았듯이 중세의 의학과 신학 이론 전반에서 청결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실제로 당대의 행정문서들은 현대인의 편견과는 상당히 다른 중세인의 이미지를 전해준다. 중세의 통치자들은 도시 위생에 끊임없이 신경을 썼다. 요크의 도시위생 개선을 위해 내린 에드워드 1세의 칙령은 그 대표적인 예 중 하나다.
그 누구도 도시 내에 배설물, 거름, 혹은 다른 오물을 쌓아두는 것을 금한다. 배수로에 천과 아마포를 넣는 행위도 해선 안된다. 나무 줄기나 목재가 들어갈 경우 신속히 제거할 것을 명한다. 대변은 신속하게 치울 것이며, 배수로는 수시로 청소하라. 또한 도시의 네 구역에 각각 공중변소를 둘 것을 명한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원정을 떠나는 자신의 병사들이 요크에 머무는 동안 병에 걸릴까 염려했다. 위의 칙령은 그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이는 중세인들이 더러운 환경은 질병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당시 국가의 행정력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언제나 잘 이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소한 중세의 통치자들은 끊임없이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리면서 감시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인력과 물력의 한계로 현대도시의 깨끗함을 달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중세인들이 청결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다는 옛 통념은 수정되어야 한다. 1302년의 한 에피소드는 중세인들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런던에서 있었던 일인데, 국왕의 마부들 중 한 명이 급했는지 길거리에서 실례를 하다가 시민 두명에게 걸린 일이 있었다. 이때 시민들은 화를 내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볼일은 시내 공중변소에서 보는게 상식 아니오?"
물론 길거리에서 볼일 보는 사람은 늘 있었겠지만, 최소한 그게 사회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들 수가 있다. 중세에 공중 화장실이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 있었다. 앞서 보았듯 에드워드 1세를 비롯한 통치자들과 도시의 시장들은 화장실 설치를 의무화했다. 중세 도시의 공중 화장실들은 대체로 가장 인파가 붐비는 지역과 강변, 다리 등에 설치되었다. 강변에 설치된 이유는 물론 아주 약간만 가공을 하면 원시적이지만 수세식 화장실을 만들수 있었기 때문이다.(이 방식은 로마제국 시대에도 이용되던 방식이다) 설치만 한것이 아니라 관리인을 지정하여 봉급을 주면서 유지와 청소를 담당하게 하였다.
보다 부유한 이들은 집에 개인화장실을 만들었다. 이런 경우 뒤처리가 문제인데, 대체로 집안에 파이프를 설치해서 뒷뜰에 파놓은 구덩이로 빠지게 하였고, 강이나 시냇물 근처에 사는 이들은 공중변소와 비슷하게 흐르는 물을 이용했다.
그러나 14세기 말쯤 되면 늘어난 도시인구 때문에 수질 오염이 위험 수위에 다다르게 된다. 이때부터 도시 행정관들은 보다 치밀하게 배설물 처리를 관리하기 시작하였다.(물론 이때부터 관리가 더욱 정밀해졌다는 것이지, 그 이전에는 관리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행정문서가 풍부하게 살아남기 시작하는 존 왕 시절부터 이미 기록은 찾아볼수 있고, 그 기록의 내용으로 미루어보건대 Rawcliff 선생이 지적하듯 존 왕 이전에도 관련법규는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이 오물처리와 관련한 규제는 흑사병을 겪고 난 뒤에는 더욱 체계화되었다. 이때부터 뒷처리용 구덩이는 아무렇게나 파지 못하게 하고, 엄격한 규격을 따르게 하였고 반드시 둘레를 목재와 돌로 두르도록 하였으며, 엄격히 지정된 자리에만 파게 하였다. 심지어 이웃에게 악취로 폐를 끼치지 못하도록 이웃집까지의 거리까지 규정해놓았다. 그리고 이 오물들은 밤중에 정기적으로 도시를 도는 수거용 수레를 통해서 실어나가도록 하였다.
물과 목욕
도시 위생을 위해서는 청결한 물의 공급이 필수적이며, 몸이 청결을 유지하려면 씻어야 한다. 그런데 중세에는 로마와 달리 물공급이 우물에만 의존했고, 목욕은 거의 하지 않았다는 것도 대단히 깊게 뿌리박힌 편견이다.
우선, 그리스도교 교회는 목욕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가졌다. 로마 말부터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전에 하던 그대로 목욕을 즐겼다. 많은 신학자와 사제들도 목욕을 청결 유지와 기분전환을 위한 수단으로 권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어머니 모니카가 사망했을때 슬픔을 이기려 목욕을 했다고 전해진다. 목욕을 거부한 것은 몇몇 금욕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금욕의 한 수단으로 목욕이라는 즐거움을 포기했던 것이다.
교회 내에 목욕을 향한 이 두 가지 시선은 다음의 에피소드에 잘 드러난다. 4세기 말 한 주교는 너무 목욕을 좋아해서 하루에 두번씩 대중목욕탕을 갔다고 한다. 이에 한 금욕주의자가 이렇게 물었다.
금욕주의자: 주교님, 대체 왜 하루에 목욕을 두번이나 하십니까?
주교: 세번 할 시간이 없어서요.
서로마가 멸망한 뒤 이런 목욕문화가 사라졌다는 서술이 많지만, Elizabeth Archibald 선생이 지적하듯이 이는 심한 과장이다. 사라진 것은 로마 시내에 황제들이 지었던 초대형 목욕탕들이다. 서로마 붕괴 직후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이런 대형 목욕탈을 돌릴만한 노예들을 확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형 목욕탕들은 여전히 활발하게 영업했다.
중세에도 교회의 입장은 비슷했다. 앞서 보았듯 당시의 일반적인 태도는 신체의 건강과 영혼의 건강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으며, 영혼이 죄를 피하듯 신체의 먼지와 오물도 씻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회가 경계했던 것은 당시의 공중목욕탕이 종종 매춘굴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즉, 목적이 청결에 있는 목욕은 교회가 적극 권장했던 바였다.
그러나, 교회가 어떻게보든간에, 목욕탕은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대중목욕탕이 급감한것은 근대 초로 접어드는 16세기의 일이었다. 여기에는 사회적, 종교적으로 여러 이유가 있었으나 흑사병 시기를 거치면서 성적 분방함을 자제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해야된다는 믿음과, 동시에 뜨거운 물과 온도가 전염병의 원인이 된다는 속설이 퍼진 것도 그중 하나였다. 1526년 에라스무스는 "25년전만 해도 브라반트에서 대중목욕탕만큼 인기있는 곳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도 없다. 지난 역병으로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라고 썼다.
어찌되었건 중세 중후반기에 청결에 대한 관심은 흔히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높았다. 이는 도시 물 공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상하수도는 위생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러나 상하수도를 건설하고 유지하는데는 막대한 비용과 조직력이 필요했다. 그때문에 비용과 조직을 갖춘 곳, 즉 수도원이 우선적으로 상하수도 시설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외에 부유한 이들도 집에 시설을 잘 갖출 수 있었다. 지금도 12세기 윈체스터 주교 저택의 유적에는 정교하게 지어진 상하수도 시설이 남아있다.
캔터베리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물공급시설:
저수조에 채워진 물은 파이프를 통해 수도원으로 공급되었다
도시 엘리트들도 상하수도 시설에 관심이 많았고, 끊임없이 투자하였다. 물과 관련된 시설들, 홈통, 배수로, 우물 등은 도시 정책에 있어서 우선순위였다. 각 주요도시들에서 수도관을 건설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려는 노력은 대단히 치열하고 지속적이었다. Lynn과 Exeter같은 도시들은 아예 전문 배관공과 금속 기술자들을 보유하면서 수시로 수도관을 점검하고 유지, 보수할수 있도록 하였다. Exeter는 14-15세기 후반에 걸쳐, 수도관을 더욱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보수할수 있도록 길이 25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지하터널을 만들었다. 이 터널은 사방이 돌로 마감되어있었고, 배관공이 쉽게 들어갈 수 있을정도로 컸다. 이 터널은 아직도 남아서 관광명소로 기능하고 있다.
엑시터 시내로 물을 공급하던 지하수로
비용과 원동력
당연히 위와 같은 도시 인프라를 만들고 유지하는데에는 막대한 비용과 노력이 든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선 맨 처음에 언급했듯이 여러 왕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은 분명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아무리 국왕과 행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분권적인 유럽의 정치구조 하에서는 그것을 실현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결코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었던 고대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의 그 많은 인프라들은 그 건축을 통해 명성과 정치적 영향력을 얻으려던 엘리트들의 경쟁 덕분에 가능했다.
중세도 마찬가지였다. 국왕들과 행정관들의 노력 못지 않게, 시민 스스로의 공헌은 대단히 중요했다. 우선 중세 전성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시민적 정체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에 자치권을 얻어낸 도시들은 저마다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발전시켜가고 있었으며, 도시 경관과 위생은 자기 도시에 대한 자부심의 중요한 요소였다. 중세 중기 이후부터 이(lice)와 여타 더러움의 증거는 점차 야만인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도시의 유력 시민들은 자기 도시에 이런 요소가 많을 경우 수치심을 느꼈다. 이러한 측면에서 도시의 부유한 엘리트들은 도시 위생 유지에 상당한 자금을 댔다.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앞서 언급한 중세 특유의 '몸 이론'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시는 여러 신체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신체였고, 공기와 수로는 그 혈관이었다. 몸 한 곳이 아프면 몸 전체가 힘들듯, 시민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관념은 도시 거주민들에게 강력한 연대의식을 불어넣었다. 부유한 시민 A가 호화로운 저택에서 위생적인 환경에서 산다고 해서, 비위생적인 데서 사는 다른 사람들을 남 일이라고 무시해버릴 수 없는 환경을 조성했던 것이다. 동시에 선행으로 하늘의 공덕을 쌓는 중세 가톨릭 교회 특유의 신학도 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관념은 상당한 수의 엘리트와 유력자들이 도시 인프라 조성과 유지의 의무를 떠맡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아래위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중세 유럽의 도시들은 공중 화장실을 만들고, 관리인을 고용하고, 밤새 분뇨수거차를 돌리고, 배수로를 청소하고, 수도관을 설치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
나오며
사실 더러움의 강도나 양으로 본다면, 유럽의 도시들은 중세보다 오히려 17세기에 더욱 비위생적인 환경을 가졌을 것이다. 당연히 이는 17세기 사람들이 더 어리석거나 미개해져서가 아니라, 상업과 도시가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도시인구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중세에 지었던 도시 인프라로는 더이상 이들을 수용할수가 없었고, 15세기까지 잘 기능하던 공중변소들만으로는 17세기 도시인구가 배출하는 양을 감당할수가 없게 되었을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섣불리 과거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리려는 행위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준다. 단순히 한 시대를 재단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 시대의 여러 측면을 낳은 복합적인 이유들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중세인은 결코 운명론에 빠져서, 질병을 천벌로 받아들이거나 더러움을 묵묵히 참고 살지 않았다. 인력과 물력, 기술력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조금이라도 더 쾌적하게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며 살았다. 분명 현대에 비하면 한계가 많았고, 그게 당연한 것이지만, 이들을 '미개'하다고 비웃기보다는 이들이 어떻게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왔는지에 주목하는 것이 더욱더 생산적인 논의를 낳는 진짜 공부일 것이다.
참고
Carole Rawcliffe, Urban Bodies: Communal Health in Late Medieval English Towns and Cities (Woodbridge, 2013).
Virginia Smith, Clean: A History of Personal Hygiene and Purity (Oxford, 2008).
Elizabeth Archibald 선생의 2014년 강의, Durham University
첫댓글 유럽 본토 쪽은 안다뤘길래 왜 그런가 했더니 영국대상인 문서네요.
영국은 본래 유럽 본토, 특히 로마의 유산이 많이 남은 남유럽보다 위생면에서 뒤떨어졌다고 그동안 많이 생각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연구결과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대륙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mr.snow 그렇군요.
@mr.snow 아니면 음식이 읍읍
@데미르 그리 오래 산건 아니지만 지난 몇년간의 유학생활을 돌아보건대, 영국음식이 다소 소박할지는 몰라도 단연코 인터넷발 드립같은 쓰레기는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맛있게 먹으며 살고 있습니다.
@mr.snow 뭐 전 유럽여행의 끝이 영국ㅇ라 그런지 주변국에 비해 맛이 없어서 그런것 같습니다. 그 여행도 10년 다되가는ㅜㅜ
그러고보면 흑사병 시절에도 나름 위생에 신경썼던 거 같은데 뭔가 방향이 잘못된 거 같다능;;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07.04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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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사 그 유럽보다 깨끗했다던(?)비잔틴이나 사산, 이슬람도 개고생한거 보면...
흠....많은걸 배우고 갑니다..
흑사병의 경우는...늘어난 도시인구..상대적으로 늘어난 도시빈민..영양섭취및 위생상태가 부족..그래서 더 많이 퍼진걸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죠.
지금의 서울이 근 천만에 달하는 인구를 수용할 능력이 있기야 하지만, 여기에 2천만을 구겨넣으면 도시는 순식간에 초대형 똥덩어리가 될겁니다. 마찬가지 원리죠.
@_Arondite_ 그전에 지방으로 ㄱㄱ ㅋ
@이성환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유는 복합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전근대 도시에 역병은 사실 피할수 없는 숙명입니다. 고대 로마제국도 저 유명한 안토니누스 역병이 있었고, 비잔티움도 유명한 사례가 있지요. 17세기도 그렇고...
재밌는 주제이기도 하고,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후...저도 평소 이렇게 알고 있었는데, 이것 말고도 잘못 알고 있는 젱보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중세에서 있어서 국내의 대중적 지식은 대단히 많이 업데이트가 필요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정말 좋은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
잘 읽었습니다 ㅇㄴㅁㅇㄴㅁㅇ
감사합니다ㅎㅎ
주제에 걸맞는 깔끔한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걸 보면 역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라는게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것;;
서양사 전반에 걸친 문제이긴 하지만 중세는 그중에서도 편견이 지나치게 강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
음 제가 본 책에서는 프랑크 기사들의 청결에 대한 부정을 본거 같은데 책이 현재 제 수중에 없어서 기억을 더듬으면 그리 자주 씻지 않고 일년에 1~2회의 목욕을 행했으며 어쩌다가 방문하는 이슬람교도들이 프랑크기사들을 매우 냄새나는 자들 이라고 기록했던걸 본 기억이 나는데 음 중세전성기랑 초기는 좀 다른가요
당시의 연대기적 기록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얼마나가 과장이냐, 얼마나 대표적인 케이스이냐를 비판적으로 따져봐야지요. 옆집 아저씨가 목욕을 싫어해서 자주 안한다고 해서 우리 동네 사람들 모두가 일괄적으로 더럽다고 볼수 없는것과 같습니다. 제 글은 가장 최신 연구성과들을 토대로 작성한 것입니다. 중세 초기는 사료가 워낙 부족해서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극단적으로 달랐을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