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 열반종 종조 보덕성사 행장도 * 자 지법 보덕성사 이력 * 한국문화와 불교 고구려 인물 보덕 * 고려 대각국사와 천태사상 * 행 장 * 普 德 和 尙(보덕화상) * 고구려 보덕 수호 정법 * 보장왕(寶莊王)의 봉노(奉老)와 보덕(普德)의 이암(移庵) * 불교를 업신여긴 왕의 마지막 * 보덕사의 남방 포교의 영험 |
海東佛祖源流 淨卷에 보면 散 聖 編
新 羅 祖 師
普 德 聖 師 行狀 高句麗時代ㅡ 統一新羅時代 西紀 595年 681年 普德 知法 普依
盤龍寺 靈塔寺 景福寺 新元寺 衍慶寺 水王寺
百濟 義慈王 十年 西紀 六百五十年 景福寺 創建 百濟 義慈王 十一年 新元寺 創建
字智法 法名 普德依 法號 移庵 평안남도(평양시) AD624~
| |
|
師字智法元是 高句麗 盤龍寺 沙門其主 寶莊王 或於道敎 廢佛僧法師 乃飛房南至百濟孤大山後有神人見於高麗馬靈山 告人日汝必 敗亡 無日具如 三國史 元曉 義湘 嘗在 於塔下 親稟涅槃經 有弟子 十一日 無上 寂滅 義融 智藪 一乘 水澤 四大 開元 明德 開心 普明 이와 같이 記錄되어 있다.
우리나라 佛敎史에서 記錄으로 남아있는 偉大한 聖人은 唯一하게 한분이 계시는데 高句麗時代에 普德和尙이시며 高麗時代 大覺國師 義天和尙께서 普德和尙은 聖人으로서 推仰을 하시였으며 聖師로서 大覺國師 文集에 記錄이 되여 전하여지고있다.
|
|
|
고구려시대
1. 수행하는 모습(암자) 2. 노승이 찾아와서 열반경을 강론할 것을 청하는 모습 3. 영탑사를 창건 (탑이 땅에서 솟아나왔다) 4. 금강산, 보덕굴 창건 (경전을 보는 모습) 5. 보덕성사께서 보장왕과 신하들 앞에서 상소를 하는 모습 6. 수백명의 제자들에게 강론하는 모습 7. 700명의 제자들과 함께 백제로가는 모습
백제시대
8. 경복사 창건과 대작불사 공사하는 모습 9. 대가람 경복사에서 원효, 의상 등 제자들에게 열반경을 강론하는 모습 10. 보덕성사와 16대 제자들
고려시대
11. 고려시대 대각의천국사께서 고대산 경복사에 방문하시여 조사전의 보덕화상의 영전을 친견하고 다음과 같이 계승을 읊으시였다. 12. 보덕성사, 원효대사, 의상대사께서 강론하시는 모습 ※참조 : 고구려의상, 백제의상, 고려의상, 원효의상스님과 대각국사의 모습 사찰을 창건하는 공사장 모습 |
▲TOP |
|
|
本 籍 : 高句麗 龍岡縣 出生 生年月日 : 西紀 五百九十五 ~ 六百八十年(?) 우리나라 最初의 宗派, 高句麗 時代 涅槃宗 創宗 盤龍寺 靈塔寺 百濟 景福寺 等 數十個의 寺刹을 創建하였음.
三國의 代表的인 弟子 十五大 外 弟子 七百名 以上 元曉, 義湘, 義賊, 景興, 大賢, 修學 ※現在 新元寺 等 寺刹이 북한과 남한에 金剛山 普德窟 大原寺, 大乘寺, 維摩寺 聖人 推戴
※高麗時代 大覺國師께서 聖人으로 추대하였음. 現在 우리나라 最初의 聖人 推戴되어 記錄으로서 大覺國師集에 남겨져 있음. |
▲TOP |
|
|
東國大 陸楨培 博士
보덕(普德, 생몰연대 미상)은 본래 고구려 고승이기 때문에 삼국시대의 인물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가 백제로 남하한 10년 뒤에 백제가 망하고 신라 땅이 되었으며, 그 문하에 훌륭한 제자들이 나와서 신라불교사에 적지 않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때 당(唐)에서 받아들인 도교는 보장왕(寶藏王)때에 더욱 편파적으로 숭봉(崇奉)되었으며 불법(佛法)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때 반용사(盤龍寺)에 있던 보덕이 도교만을 지나치게 신봉하면 국조(國祚)가 위태롭다고 여러 번 왕에게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그래서 보덕은 거처하던 곳에서 방장(方丈)을 날려서 완산주 남쪽의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겼다. 이것이 보장왕 9년(650)의 일이며, 그 후 오래지 않아 고구려는 망하고 신라가 통일을 하였다. 보덕은 고구려에 있을 때 《열반경》을 강설하였으며, 그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11인의 제자가 뛰어났다고 한다. 오늘날 그 이름을 볼 수 있는 보덕의 제자로는 김취(金趣) 등과 금동사(金洞寺)를 건립한 무상(無上), 진구사(珍丘寺)를 세운 적멸(寂滅)과 의융(義融), 대승사(大乘寺)를 세운 지수(智藪), 대원사(大原寺)를 세운 일승(一乘)·심정(心正)·대원(大原), 유마사(維摩寺)를 세운 수정(水淨)등이 있다. |
▲TOP |
|
|
고려 불교사상의 地位 - 東國大 총장 趙明基 博士
무릇 歷史를 規定하는데 그의 最大의 要因을 地理的 條件에 指摘 된다면 韓國은 亞細亞大陸의 中心部에 가까운 東쪽 半鳥에 位置를 定하고 있으니 그의 歷史的 性格은 어떻게인가 賦與되여 있을 것이다. 그것은 政治的으로나 文化的으로나 반드시 大陸에서 일어나는 變動의 餘波를 받는 同時에 또 그의 周邊에 있기 때문에 그의 本流에는 휩쓸리지 않는다. 卽 韓半鳥는 大陸인 中國과 滿蒙과에 接壤하여 있는 同時에 海洋을 隔하여 南方과 印度와도 交通을 할 수 있고 또 歐美의 諸勢力과도 接近할 수 있는 것이니 地理的 條件이 周邊的인 同時에 多隣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韓國의 文化面을 보면 그의 文化圈內에 國外勢力의 如何한 性格을 가진 文化가 波及되고 接觸되었는가 그것은 中國으로부터는 全體主義的인 外飾文化가 接種되어 있고 滿蒙으로부터는 强烈한 生活意識이 浸潤되어 이것이 纘細的인 韓族精神에 好對가 되어 있고 또 海洋을 隔한 諸民族의 颱風的 活動은 柔弱한 國民의 生活에 및이는 바가 무엇이가 가 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韓族文化는 滿蒙과 같은 意識的 征服的인 것도 아니고 海洋族과 같은 高壓的 我欲的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三方面의 勢力은 各各 그의 個性에 應하여 複雜한 交錯을 하면서 韓國固有의 情緖에 協和하고 이것을 근저로 하여 別個의 文化를 辨證法的으로 發展한 것이다. 이것이 곧 固有의 弘益人間의 理想에 外來의 中道思想이 加勢하여 비로서 宇宙人生의 價値를 認知하는 統和의 思想이 發生하게 된 것이 韓族文化의 發達 樣相이라고 할 수 있다.
|
| 우리 文化의 固有的 基本的인 特質을 우리의 原始生活에서 찾아 본다면 그것은 一般的으로 古代 氏族社會는 血緣을 紐帶로 하는 社會集團인 點에 있어서 人倫的이고 또 祖神의 祭祀를 中心으로 하는 點에 있어서 宗敎的이라 할 수 있다. 이 人倫的 宗敎的인 社會集團은 神話에 依하여 그의 機能을 說明하고 그의 權威를 賦與하는 것이다. |
|
韓國 古代 國家組織에 있어서 新羅의 王을 神祗에 奉任하는 意味에서 次次雄(巫)이라하고 氏族의 首班이란 意味에서 麻立干(王)이라고 한다. 이와같은 性質을 가진 韓族의 古代社會가 時代와 같이 發展하여 가는 途中에 이것을 新方面에로 導化하는 新 指導理念인 佛敎와 儒敎가 輸入된 것이 韓國文化 發展의 將來를 決定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民族이 가진 固有的 基本的인 것이 여기에서 佛敎的 乃至 儒敎的으로 發展하게 된 것이다.
이 兩敎는 우리 自身이 所持하고 있는 上記 古代文化의 二面, 卽 宗敎的面과 人倫的面에 各各 結合되어서 이것을 高級的 文化에 發展식힌 것이다. 여기에 文化의 發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民族의 偉大한 努力과 創意를 意味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新指導理念은 哲學的 理念的인 點에 있어서 古代의 神話的인 世界와는 判異하니 이런 意味에서 古代的인 것은 否定하면서 그의 情神만은 復興 再生식히고저 하는 것이다. 그런데 佛敎와 儒敎는 同時에 指導的 地位에 登場한 것은 아니고 時代的으로 先佛 後儒이니 佛敎는 처음부터 壓倒的 絶對的으로 支配를 敢行하여 新羅 및 高麗를 通한 不動의 地位에 屹入하여 있으나 이것은 大蓋古代生活의 連續이다. 統一時代의 新羅 및 여기에 繼續되는 中世 高麗에 있어서는 國家的으로나 社會的으로나 宗敎的 關心이 무엇보다도 컷든 것과 또 佛敎의 儀禮的 藝術的 特質이 우리 古代文化에 接續하는데 가장 容易한 것에 起因되는 것이다. 勿論 本邦의 佛敎 受容方法은 우리가 가진 關心으로 부터 行해지는 것이다. 卽 그의 關心事는 祈禱的이며 護國的인 것이다. 換言하면 從來의 固有 新敎에서 求得할려고 한 것이 여기에 改良되어 宏壯한 佛寺와 嚴肅한 儀禮를 通하여 滿足을 얻고저 한 것이다. 寺塔의 建立과 法會의 動修는 勿論이고 藏經의 雕造등도 學究的 事業이 아니고 固有精神인 祈禱的 要求이고 護國的 思想으로 進行되었기 때문에 驚嘆할만한 大事業이 完成되었든 것이다.
이와같은 點에서 外來의 佛敎가 固有의 文化와 融和하고 信仰的으로는 印度와 中國등의 佛敎와는 特異한 韓族佛敎가 創造的 確立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大書特筆할 것은 그의 敎義가 究明되어 民族 獨自的 理論 卽 民族正氣의 理念이 確然히 中外에 表現된 것이다. 이것이 卽 韓國佛敎思想이며 韓國文化의 基幹이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文化와 文化와의 協同精神은 統和 發展의 原理에 依하여 無限大로 擴張할 수 있는 것이다. 卽 그것은 氏族으로 부터 部族社會에 部族으로 부터 聯盟社會에 또는 이것으로 부터 國家社會 乃至 民族社會에로 發展하고 나아가서는 이 精神이 世界的으로 擴大되는 것이다.
三國이 鼎立하여 角逐하고 있을 때에 各自 國家本位의 思想이 强烈하였기 때문에 民族의 統一精神은 且置하고 民族意識조차 없었든 것이다. 다만 國土를 擴張하고 또 侵略의 不安을 除去하기 위하여 統一意慾이 各國에 共通되어 있었다. 新羅 善德女王 때에는 慈藏律師가 皇龍寺에 九層塔을 建立하여 「隣國을 隆伏받고 九夷가 來貢하여 王室이 永安하기를」하는 大願을 立한 것은 佛力에 依한 護國思想을 表現한 것이다. 그때의 統一意慾은 大槪가 이와같은 類에 不過한 것이다. 新羅의 統一事業은 完全한 意味의 三國統一이 아니고 다만 百濟의 全土와 그의 全遺民을 合倂한 外에 高句麗의 南界와 그의 遺民의 一部를 所有하는데 不過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統一事業이라고 하지마는 三國中 가장 後進 國家인 新羅에 依하여 實現된 것은 全然 奇蹟的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것은 實로 堅固한 團結力과 勃然한 統一意慾이 會三歸一의 原理에 依한 佛力이라고 確信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여기에서 비로서 한 政府밑에서 한 組織으로 뭉쳐진 한 理念體가 된 것이니 이 意味에서 新羅의 統一은 佛思에 있어서 깊은 意義를 가지게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것이 民族 相互의 自覺的이고 創意的이며 또는 民族理念의 實踐的이라 할 수 있다.
이와같은 統一新羅도 年代를 지남에 따라 貴族社會가 發生하고 그리고 그 社會 自體內의 腐敗와 內訌과 地方의 豪族의 勢力의 增大에 基因하여 드디어 大分裂이 되어 前日의 三國鼎立의 狀態를 그대로 再現하게 되었다. 卽 新羅의 面에는 後百濟가 일어나고 北에는 泰封國이 나타나서 서로 侵伐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亂世에 있어서 彼此의 理念은 또한 統一平和이 였으니 이 統一을 위해서는 實로 弓裔가 일어나서 自己를 王이라고 僭稱하는 同時에 또 彌勒佛이 되었다 하고 그의 長子를 靑光菩薩 季子를 神光菩薩이라 하며 年號를 永德萬歲라고 定하였다. 그리고 新佛經二十卷을 著作하여 이것을 講說하고 儀式의 威勢를 갖추고 舊世代的인 釋迦佛에 代하여 彌勒佛이 新世代인 此世를 統御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佛敎思想을 刷新함으로써 國家社會를 改革한다고 하는 新理念을 信하고 이 彌勒思想으로서 天下를 統一하고저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너무 果敢한 行動과 너무 越等한 思想이 도리어 失敗의 原因이 되었다. 다음에 高麗의 太祖 王建이 일어나서 新國家를 建設할 때에 그의 部下 崔凝에 向하여 「昔日 新羅는 皇龍寺에 九層塔을 建立하여 統一 大業을 成就하였으니 이제 나도 開京에 九層塔을 西京에 七層塔을 創建하여 佛力을 빌려서 群凶을 除去하고 三韓을 統合하여 一家를 成하고져 하니 나를 위하여 發願의 疏를 作하라」고 한 것은 有名한 事實이다. 太祖의 統一事業은 人爲的 努力뿐만 아니고 이와같이 佛力 에 依賴하고저 하는 것이 理解되는 바이다. 이 思想이 高麗一代를 通하여 指導層의 雰圍氣로서 國家社會의 理念이 되었든 것이다. 그러나 어느 時代를 莫論하고 內外 大小 事件등 複雜多端하여 變遷無常한 것이 現實의 世上이니 恒常 愛國 志士가 있어서 이것을 憂慮하고 永久의 幸福을 얻고저 努力하는 것도 現實이다. 그러면 이와같은 前提下에서 보는 大覺國師의 任務는 무엇이며 思想은 어떠한 것인가 이것이 바로 알고저 하는 것이다.
國師의 根本精神은 佛敎 最高次의 思想인 華嚴과 天台를 一佛乘으로서 止揚하고 定蕙雙修의 方法으로서 實踐하여 이것으로서 全思想界를 統一하여 國家에 歸一하고저 한 것이니 이것은 곧 新羅의 元曉思想을 復興하여 時弊를 矯正하고 佛敎의 本面目에 還元하고저 한 것 이며 그의 具體案으로는 高麗佛敎를 全面的으로 改革하여 天台宗이라 하고 이 一宗으로써 全部를 統攝하고저 한 것이다.
國師가 天台宗을 開創하여 韓國佛敎 宗派의 一員으로 出現하게 됨으로부터 在來의 五敎九山 卽 九山을 禪의 一宗으로 하면 六宗이었든 것이 爾後는 五敎兩宗 卽 七宗으로 改編되었다. 新天台宗이 禪宗과 通하게 되었기 때문에 在來의 禪宗의 異名인 九山과 區別하지 아니하면 안되어서 智者大師의 所住 山名을 因하여 天台라 함에 對하여 蕙能大師의 所住 山名을 取하여 九山派를 統合하여 曹溪宗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天台宗에 依하여 五敎九山이 五敎兩宗으로 되었을 뿐아니라 各宗의 宗名까지 全部 改稱하게 되었다. 卽 國師 以前의 宗名은 圓融 法相 法性 戒律 涅槃이었든 것이 國師 開宗 以後에는 華嚴 慈恩 中道 南山 始興으로 改名하게 되었다. 이것은 아마 華嚴은 所依經典으로 稱名하고 中道는 그의 敎理로써 하고 慈恩은 寺名이요 南山과 始興은 曹溪와 天台와 같이 山名을 取하여 宗名으로한 것같다. 이와같이 宗名이 變更된 時期는 高麗肅宗六年(一一O一)에 撰한 國師의 基誌銘에는「當世之學 佛者 有戒律宗 法相宗 涅槃宗 法性宗 圓融宗 禪寂宗 師於六宗幷究至極」이란 것이 있고 仁宗十年(一一三二)에 撰한 僊鳳寺의 碑銘에는 「僧統 一來上國所有天台 賢首 南山 慈恩 曹溪 西天梵學 一時傳了」라는 것이 있으니 이것에 依하여肅宗六年으로부터 仁宗十年 사이에 改稱된 것이라고 推測할 수 있다는 것은 學界의 定說이 되어 있다. 그리고 또 大宋尙書主客員外郞楊傑이 大覺國師의게 보면 書翰에 「孰若祐世師 五宗窮妙理」라하고 이 五宗을 注하기를 賢首性宗 慈恩相宗 達摩禪宗 南山律宗 天台觀宗이라고 하였으니 이것도 그의 傍證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宗敎改革으로 말미암아 宗名이 變更된 것이고 조금더 視野를 넓히면 天台宗으로 보아 諦觀法師는 國內에서 有名할 뿐아니라 宋나라에 까지 그의 影響이 많았고 그의 著書 天台四敎儀는 各國佛敎學者의 膾炙가 되었으나 이것은 끝까지 學問에 그치고 開宗은 못하였다. 그러나 大覺國師는 章疏蒐集 學者探訪 刊經事業등 大規模의 事業을 遂行하면서 天台創宗을 한 것은 그의 偉大性이 最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羅代의 元曉 義湘 麗朝의 諦觀 大覺등의 衆星은 모두 全佛敎를 一理에 攝하는 天台一乘의 理念을 捕捉한 것이니 그의 現顯은 國家로서 하고 그의 實修는 定慧로서 하는 것이 國師의 着眼한 特色이라 할 수 있다. 이와같은 學問을 大成하기 爲하여 章疏를 蒐集함은 勿論이고 國家를 保安하기 爲하여 宋에 交遊하고 遼에 親書하여 隣近 諸國에 好修하게 된것은 天台一乘의 國家的 活用이라고 보는 바이다. 國師의 藏經事業은 그 自體가 벌써 護國的 意義를 가졌다 함은 前述한 바이나 漢文을 使用하는 文化圈內에서는 藏經의 雕彫造가 곧 그 國家의 威勢와 文化의 高低을 測定한 尺度가 되는 것이니 國師의 雕經은 天下의 中華라고 自負하는 韓民族을 壓到하였고 그의 餘勢가 蒙古 滿洲 契丹등 諸民族의 羨望의 的이 된것은 不動의 事實이다. 回願컨댄 宋代의 蜀板 以後 數十種의 雕板을 거듭하였으나 國師의 續藏이야말로 廣範圍의 蒐集 大部帙의 編纂 雄大한 雕板 技工의 |
精密등등 空前의 偉觀이니 世界 印刻史上의 無類의 絶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와같은 國師의 一生四十七年間의 功績은 全佛敎史上에 一大明星이며 佛敎를 統一化하여 國家思想에 接續식힌 點에 있어서 羅朝의 元曉등과 麗朝의 諦觀등의 祖道를 繼承하여 이것을 中興 復古함으로서 宗名을 確立하여 具體化하고 이것을 普照國師가 이어서 定慧雙修를 强調하였고 太古國師가 또 다시 이어서 禪敎 統一門을 設하여 再强調하였고 李朝의 淸虛大師가 後襲하여 兩宗(禪과敎)合倂論을 擧하니 千朶萬枝의 佛敎라 할지라도 韓民族에 있어서는 그의 根幹를 一指에 把握 할 수 있고 이것이 곧 國家志向의 原動力이 되나니 祖師의 永生이 여기에 있을 것이고 國師의 意圖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 |
|
韓國佛敎는 前述한바와 같이 三國時代에는 僧朗 圓光이 있고 新羅에는 元曉 義湘 太賢 憬興 義寂이 있고 高麗에는 諦觀 均如 義天 知納 太古 懶翁 등이 있으니 이 사이에 屹立한 國師는 特殊한 地位를 가지고 以上의 諸師와 다른 方面이까지 着眼한 것은 注目할만한 것이다. 卽 章疏의 蒐集 目錄의 編成續藏의 雕造은 勿論이지마는 이보다도 遼 宋의 大陸佛敎와 判異한 것은 一乘佛敎를 提唱한 것도 아니고 定慧雙修의 旗幟를 建立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다만 別天地를 開拓하여 高麗 民族의 現實에 適合하도록 卽 亂脈이 된 思想을 統一하여 國家 安寧을 保存하기 위하여 統和佛敎를 組織하는 것을 理念으로 하고 여기에 宗敎的 信仰을 근저로 하므로서 永久의 實踐에 옮기고저 한 것이 國師의 國師다운 所以를 發露한 것이다.
|
<註> 1. 大覺國師以前의 五敎九山이라 함은 圓融宗 法相宗 法性宗 涅槃宗 戒律宗의 五敎와 가지산 도굴산 사자산 성주산 봉임산 동리산 의양산 수미산 실상산의 九山이나 이 九山은 同一한 禪派임으로 統合하여 禪寂宗이라 함으로 五敎九山을 六宗이라하고 大覺國師 以後에는 天台宗을 加하여 七宗이라 하고 그의 宗名까지 變更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再考를 要하는 바이다. 國師以前의 六宗(五敎九山) → 以後의 七宗(五敎兩宗) → 禪敎兩
|
|
▲TOP |
|
|
高句麗時代 ~ 統一新羅時代 西紀 623年 涅槃宗創宗 西紀 595年 ~ 681年 (87歲) 普德 知法 普依
盤 龍 寺 靈 塔 寺 景 福 寺 新 元 寺 衍 慶 寺 水 王 寺 大 乘 寺 |
▲TOP |
|
|
第二十七代 榮留王 七年에 逆臣 蓋蘇文이 王에게 告하기를 「三敎 벽여정족? 一不可 今儒釋竝與 而道敎未盛 請遣使於唐求之」하소서 하니 王이 表를 올려서 陣請하였다. 唐高祖皇帝가 道士 叔達等八人과 兼하여 道德經을 보내주었다. 王이 기뻐하면서 이를 佛寺에 있게하고 國人과 함께 그 講說을 들었다.(三國史記云 寶藏王二年). 그러므로 文獻通考에 보면, 高句麗는 唐 高祖때에 使臣을 보내어서 道敎를 請하매 沈叔安에게 命令하여 天尊像을 가지고 道士와 그 나라에 이르게 하였다고 하였다.
翌八年에 王이 使臣을 보내어서 佛, 老의 敎法을 求하였다. 第二十八代 寶藏王二年에 使臣을 唐에 보내어서 道敎를 求하였다. 三國遺事卷三에依하면高句麗의 末期에 國人이 다투어서 五斗米數를 받들었다고 하였다. 中國風 俗史에 말하기를 五斗米란 卽 張道陵의 敎派라고 했다.
이때 沙門 普德이 盤龍寺에 住하면서 左道가 날로 熾盛하고 國祚가 危殆함을 딱하게 여겨 동하였으나 듣지 않으니 인하여 百濟의 完山州(今全州)孤大山(高達山)으로 옮기었다. 卽 寶藏王九年六月이고 唐高宗帝永徵元年庚戍이라고도 하고, 唐高宗帝乾封二年丁卯로서 普藏王二十六年三月三日이라고도 하는데 後說이 믿을만 한것 같다.
李奎報의 南行月日記에 말하기를 夫全州者 或稱完山 古百濟國也.... 有中子山者 最?? 州之雄鎭也 其所謂完山者 特一短峯耳 異哉一州之 以此得號也 距州理一千步 有景福寺 寺有飛來方丈.....昔普德大士 自盤龍山 飛來之堂也 普德字智法 常居高句麗 盤龍山 景福寺 一日忽謂弟子曰 句麗唯尊道敎 不崇佛法 此國不必久矣 安身避難 有何處所 弟子明德曰 全州高達山 是 安住不動之地 乾封二年丁卯三月三日 弟子開戶出見 則 堂己移於高達山... 海東明德大士 亦自捉각? 爲普德聖師之高第 라고 하였다. (東國李相國集上三五一頁-三五四頁) 三國遺事 卷三에말하기를 安八年辛未 祐世僧統(義天)到孤大山 景德寺飛來方丈 禮普聖師之眞 有詩云 涅槃方等敎 傳受自吾師 可惜飛房後 東明古國危 跋云 高句麗王 惑於道敎 不信佛法 師乃飛房 南至此山 이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僧傳云 釋普德 字智法 前高麗 龍岡縣人也 詳見下本傳 常居平곤城 有山方老僧來請講經 師固辭不免 赴講涅槃經 四十餘卷 罷席 至城西 대보산암혈하선관 有神人來請 宜住此地 乃置錫杖於前 指其地曰 此下有八面七段石塔 掘之果然 因立精舍 臼靈塔寺 以居之」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師(普德)有 高弟十一人 無上和尙 與弟子金趣等 創金洞寺 寂滅 義融二師 創珍丘寺 智數 創大乘寺 一乘與心正大原等 創大原寺 水淨 創維摩寺 四大與契育等 倉中臺寺 開原和尙 創開原寺 明德 創燕口寺 開心與普明 亦有傳 皆如本傳 이라고 하였다.
佛祖源流에 말하기를 「普德聖師 (乃至)元曉 義湘 嘗在於塔下 親稟涅槃經 有 弟子十一人曰 無上 寂滅 義融 智藪 一乘 水淨 四大 開元 明德 開心 普通」(佛祖源流 散聖之部 一葉左)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普德의 器局의 大함을 생각하여 볼 수 있다. |
▲TOP
|
|
|
열반경에 정통한 스님
고구려 불교의 학문적 선진성은 고구려 스님들의 중국·일본에서의 활약을 보더라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나라 안에서의 불교학적 발전상을 살펴보는데에는 현존하는 자료가 너무 빈약하다.
|
빈약한 자료 가운데 고구려 말기의 불교 지도자 보덕(普德)스님에 관한 기사는 그나마 고구려 불교의 실체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보덕 스님의 삶과 사상은 곧 고구려 불교의 절정과 더불어 위기를 함께 보여 주고 있다.
"삼국유사"가 인용한 "승전"에 따르면, 보덕스님은 법명이 지법(智法)이고 고구려 용강(龍岡) 출신이다. 용강은 오늘날 평안남도 용강군 보덕스님이 한때 머무르던 반룡사(盤龍寺)도 바로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스님은 주로 수도인 평양성에 살며 활동했다. 우리나라 열반종의 시조로 추앙받을 정도로 열반경에 정통한 스님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구려에 있을때에는 열반경 강의를 청하였지만 처음에 굳이 사양한 것으로 보더라도 말이다. 또한 동시대의 삼론종 계통 고구려 스님들처럼 ‘종(宗)’을 개창하지 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열반사상은 뛰어나나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후세에 열반종으로 열매 맺었고, 원효와 의상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 |
|
보덕스님은 노승의 간청에 못이겨 열반경을 강의하였고, 강의를 마친 뒤에는 평양 대보산의 바위굴에서 참선하다가 땅속에 묻혀 있는 8면7층 석탑을 발견하고 거기에 영탑사를 세우고 살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포교보다는 오히려 자기 수행에 힘썼음을 보여준다. 왜 그랬을까 ? 열반경에 정통한 법사로서 열반경의 가르침대로 불법을 적극 포교하지 않고 그는 왜 산속에 바위굴에 은둔하다시피 하며 참선을 일삼았을까 ? 아마 그를 둘러싼 사회적 제약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중국의 사상적 침략에 맞서 당시 고구려 사회에는 세속화된 도교 신앙인 오두미교(五斗米敎)가 급속히 퍼지고 있었다. 20여년 동안 거듭되는 전쟁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장수와 연명을 선전하는 오두미교를 다투어 믿었다. 어려운 교리와 내세적 신앙으로 인식되어 온 불교보다는 단순하고 쉬운교리와 장생술을 통해 눈앞에 현세적 욕망을 충족시켜 줄 듯한 도교가 훨씬 매력적이였을 것이다.
게다가 624년, 당나라 고조는 고구려에서 오두미교가 인기가 좋다는 소리를 듣고 도사는 보내 도교를 적극 포교하게 했다. 그는 이것으로 고구려 사람들의 높은 민족자주의식을 거세하려 했던것 같다. 영류왕은 영류왕대로, 전쟁에 시달려 폭발하기 직전인 백성들의 눈을 현실로 부터 돌리기 위해 도교를 적극 받아들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가 위축될 것은 뻔한 일이다. 보덕의 소극적 활동과 은둔 수도로 이러한 사회적 조건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불교와 도교가 똑같이 보호받고 있었다. 영류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불교와 도교를 같이 배우고자 한 사실에서도 볼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구지배층을 숙청하고 보장왕을 옹립한 뒤로 사정은 달라졌다.
보장왕이 즉위하자마자 연개소문은 도교를 특별히 진흥시킬 것을 진언하였다. “유교와 불교는 모두 융성한데, 도교는 아직 흥성하지 못하므로 당나라에 특사를 보내 도교를 구하도록 하십시오” 연개소문의 의도는, 구지배층의 사상적 기반인 유교와 불교를 억제하고 새로운 지배이념으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는 것이었다.
이쨋든 그의 진언에 따라 643년, 왕이 당나라에 도교를 청하자, 당태종은 옳다구나 하며 도사 8명을 보낸다. 보장왕은 기뻐하며 볼교사찰을 도관(도교사원)으로 만들고 도사를 받들어 유교선비의 위에 앉게했다. 유교·불교에 대한 억제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연개소문과 새 왕의 종교정책은, 전왕때의 투항주의적 대당정책을 펴던 구지배층에 반대하여 신지배층(정변주도세력)과 백성들의 사상 통일을 바탕으로 당나라에 힘있게 대항하려는 정치적 의도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들어온 도사들은 고구려 지배층의 이러한 의도와는 달리 움직였다. 고구려 이름난 산천을 진압하고(맥을 끊거나 누르고) 평양성의 지세를 변조하였다. 평양성의 형세가 초승달 형세라 하여 성을 증축하여 보름달 형세로 고쳐 놓게 하였다. 그리고 뒤로는 고구려 국운이 다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참언을 퍼뜨렸다. 심지어 고구려 자주권의 상징인 시조 동명성제의 조천석(朝天石)을 파괴하기까지 했다. 조천석은 동명성제가 하늘의 상제를 배알했다는 전설이 담긴 바위였다. 이 당나라 도사들을 조종하고 있는 것은 바로 호시탐탐 고구려를 노리고 있던 당나라침략주의자들이었다.
이와 같이 외세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고구려를 침략하는 상황 속에서 보덕 스님은 정법을 지켜 나라를 위기에서 건지고자 했다. 스님은 ‘그릇된 도(도교)가 정법(불교)에 맞서 국운이 위태롭게 되었음'을 개탄하여 여러 차례 왕에게 간했다.
지난날의 소극적 은둔에서 떨쳐일어나 열반경의 말법시대 위기의식과 정법수호의 신념으로 용감하게 간언한 것이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귀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중국 도사들에 의해 도교신앙이 고구려 사람들사이에 널리 퍼짐에 따라 민족자주의식이 날로 약화되고 사상이 분열되어 갔음에 틀림없다. 뿐만아니라 무위자연의 교리를 설교하는 도교의 영향으로 현실도피의식과 허무주읙가 만연되어 갔을 것으로 보인다. 오랜 전쟁에 대한 염증과도 맞물려 그것은 나라의 운명에 대한 무관심과 개인적인 보신주의를 낳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 강대한 수나라의 백만 대군과 빈번한 침략에도 똘똘뭉쳐 이겨냈던 고구려가 이후 당나라의 침략앞에서는 일부의 비열한 배신과 지배층 내부의 분열로 마침내 멸망에 이르게 되었음을 보더라도 고구려 말기 중국의 사상적 침략의 중대한 피해를 알수 있다.
열반경에 밝은 보덕스님으로서는 특히 정법을 지킬것을 강조한 열반경의 가르침에 따라, 백성들에게 앞에 든 바와 같은 사악한 견해를 심어주고 있는 외도(도교)에 맞서 정법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열반경에 부처님도 무위자연설과 비슷한 ‘자연 외도’를 비판하며 “모든것은 자연히 되는게 아니라 인(因)과 연(緣)에 의해 되는 법”이라고 하셨다. 무위자연설은 모든 일이 다 그러거니 하며 현실을 타개해 나가는 실천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그것은 현실도피와 무관심을 초래한다.
얼핏 보면 불교도 작위적인 것을 반대하므로 ‘무위(無爲)’의 가르침 같지만 결코 ‘무위’에 머무르지 않고, 방편을 가지고 유위 세계에 뛰어들어 보살행을 실천한다. 이것이 도교와의 결정적인 차이다. 도교는 ‘도와 합치되면 교화는 자연히 된다’고 하지만 불교는 ‘도와 합치되는 것만으로는 열반이 될수 없고 몸소 나서서 고통받는 중생과 함께하며 그들의 고통을 없애주고 안락을 가져다 주는 실천을 해야 진정한 열반이며 여래의 교화’라고 한다. 특히 열반경은 고통받는 중생과 함께 하는 자비가 바로 불성이요 여래라고 단언하였으며, 거기서 가르친 보살의 다섯가지 실천(五行)이라든가 여래행이 모두 다 다름아닌 자비의 실천이다.
심지어 열반경에서는 진정한 장수불사의 길은 모든 중생을 외아들같이 여겨 사랑하고(慈), 고통을 함께하고(悲), 기쁨을 함께하고(喜), 평등하게 대하는 일(捨)이라고 했다. 열반경에 통달하여 이러한 가르침을 잘 알고있는 보덕스님으로서는 당시 유행하던 도교 신앙의 개인적인 수행와 공양미를 바침으로써 생명을 연장하고 장수할 수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나라와 백성 전체에게 해로운지를 누구보다도 잘알고 있었다.
머무름이 없는 열반의 길
보덕 스님은 이러한 사도를 절복하고자 조정에 누차 간하는 등 정법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배권력이 끝내 스님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자 할수없이 스님은 백제 땅 완산주(전주)로 옮겨 가고 말았다. 모든것은 본질적으로 머무름이 없음을 알기에 그는 굳이 정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구려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
허공이 시방에 거리낌 없듯이 그도 장소에 거리끼지 않고 백제로 넘어갔다. 살던 방 하나를 공중에 날려 완산주에 왔다는 이른바 ‘비래방장(飛來方丈)’의 설화가 열반의 본성을 체득한 그의 경지를 반영하고 있다. 스님의 ‘비래방장'은 고려때까지도 전주 완산 경복사에 있었다고한다. (동국이상국집) 650년, 스님이 백제로 망명의 길을 택한 것은, 당시 신라의 당나라 침략자와손을 잡은 나라로서 고구려와 적대하고 있던 형편이었기 때문에 불가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망명 후에도 백제의 권력자에게 결탁한다든가하는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제자들을 양성하며 열뱐경을 가르치기에 전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수제자 11명은 대개 백제 땅 전북 지방에 절을 세우고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갔다.
고려때 ‘비래방장’을 방문했던 대각국사 의천 스님의 시와 <불조원류(佛祖源流)>에 따르면 원효와 의상도 그에게서 열반 방등교, 즉 열반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을 배웠다고 하니, 그의 열정적인 교화와 후세에 끼친 영향을 알수 있다.
보덕스님이 남긴 가르침
보덕 스님은 열반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고 사람들에게 가르친 선지식이었다. 그는 권력에 눈이 먼 지배자의 잘못된 종교정책에 따라 현실도피의 잘못된 신앙에 빠진 고구려 백성들을 정법으로 인도하고자 지배자에 대하여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는 불의에 대하여 적당히 관용하고 권력과 결탁하는 것은 ‘자비를 빙자한 악마’라고 한 열반경의 가르침에 따라 불의를 결코 방관하지 않았다.
그는 국토의 모든 중생들이 늘 서로 화합하고 정법을 말하며 살기를바라는 서원(<열반경> 고위덕왕보살품)으로 그 어려운시기에 정법을 수호하는일에 정진하였다. 그것은 자기 몸 한몸이나 불교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나라와 중생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바른 것, 그런 것을 가리지 않고, 그런것이 만연되고 불의가 횡행하는 것을 방관하는 것은 중도도 자비도 아니다. 진정한 자비는 섭수할(받아들일) 것은 섭수하고 절복할(꺾을) 것은 절목하여 정법으로 이끄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보덕스님은 우리에게 행동으로 남겼다.
|
남쪽 나라로 庵子를 옮긴 普德
김 무 조 (문학 박사/파전한국학당 원장/토향회 회장) |
▲TOP |
|
|
고구려 말년에 나라에서는 도교를 숭상하였는데 백성들도 다투어 이 오두미교 (五斗米敎, 도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이 말을 들은 당의 고조(高祖)는 도사를 시켜 천존상(天尊像)을 보내고, 또 도덕경(道德經)을 입수하여 강술케하니 왕도 신하들과 함께 자리를 하기도 했다. 그 뒤에 보장왕이 즉위하고 나서는 또 세 종교(유.불.선)를 모두 일으키려 했다. 그때 왕에 게 사랑을 받고 있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이가 왕에게 진언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성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도교는 그렇지 못하오니 특별히 도교를 구하도록 하십시오.” 이때 큰스님 보덕은 반룡사(盤龍寺)라는 절이 평양 근교인 용강군(龍岡郡)에 있었는데 그곳에 주석하면서 심히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만약 이렇게 도.불이 맞선다면 나라의 운세가 위태로워질 것이 틀림없다.”라고 판단하고서는 여러번 왕에게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래서 곧 신력을 발휘하여 방장(方丈, 스님의 거처하는 방)을 날려 남쪽에 있는 전라도 완산주(完山州)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가서 살았는데 이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안되어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이 보덕의 행적을 고려에 와서 문렬공(文烈公) 김부식(金富軾)은 전기를 써서 남겼고, 진락공(眞樂公) 이자현(李資玄)은 현액을 써서 역시 역사에 길이 남겼다. 전북 완주군 고달산(高達山)에 경복사(景福寺)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보덕화상의 방장이었다고 전해진다. |
▲TOP |
|
|
당서를 살펴보면 이보다 앞서 수나라 양제(煬帝)가 요동을 정벌할 때 비장(裨將) 양명(羊皿)이란 자가 있었는데 전쟁이 불리해지자 죽음을 앞에 두고 맹세했다.
|
| “ 내 반드시 다시 태어난다면 고구려의 총신이 되어 저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 했는데 연개소문의 개(盖)가 바로 양(羊).명(皿)의 합자 아닌가.연개소문이 고구려의 재상으로 정권을 전횡했으니 양명의 영험이 나타남이라 하겠다.
또 고구려 고기(古記)를 상고해 보면 이렇게 적고 있다. 수나라 양제가 대업(大業) 8년에 30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쳐들어 왔으며, 10년 10월에는 고구려왕이 표문(表文)을 올려 항복할 청할 때 한 사람이 몰래 소노(小弩, 작은활)을 품속에 감추고, 표문을 가진 사신과 함께 양제가 탄 배안에 들어갔다. 양제가 표문을 들고 읽는데 소도를 쏘아 양제의 가슴에 맞추었다.
이 때 양제가 곧 군사를 돌리려고 좌우에게 일렀다. “내가 천하의 군주가 되어 작은 나라를 친정(親征)하여 이기지 못했으니 만대에 웃음거리가 되었다”라고 하니 이때 우상(右相) 양명(羊皿)이 아뢰었다.
“신이 죽으면 고구려의 대신이 되어 반드시 그 나라를 멸망시켜 제왕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이 예언이 맞았는지 양명은 고구려에 태어났다. 나이 15세에 총명하고 신기한 무용이 있어 왕은 그를 가까이 불러 들였다. 그는 스스로 성을 개(盖)라 하고 이름을 금(金)이라 했다. 그는 벼슬이 소문(蘇文)에까지 이르니 바로 시중(侍中)의 벼슬이다.
|
|
그 후 개소문은 왕의 측근에서 “솥에는 세 발이 있고, 나라에는 세가지 교가 있는 법입니다. 신이 보기에는 이 나라 안에는 오직 유교와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으므로 나라가 위태로운 것입니다.” 왕은 이것을 받아들여 당에 도교를 청하니 이에 태종이 서달(서達)등 도사 8명을 보내 주었다. 왕은 기뻐서 불사(佛寺)를 도관으로 만들고 도사(道士)를 존경하여 유사(儒士)위에 앉게 했다. 도사들은 전국을 순례하면서 평양의 지세가 신월성(新月城)이라하여 도사들은 주문을 읽어 남하(南河)의 용에게 명령하여 만월성을 더 쌓아서 용언성(龍堰城)이라 하기도 하고, 천년보장도(天年寶藏堵)라고도 했다.
여기에는 영석(靈石)이 있었는데 도제암(都帝巖)이라 하기도 하고 또 조천석(朝川石)이라 하기도 했다. 대개 옛날에 성제가 이 돌을 타고 상제(上帝)에게 올라가 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개금(盖金)은 또 왕에게 아뢰어 동북과 서남쪽에 긴 성을 쌓게 했는데, 이때 남자들은 부역에 나가고 여자들이 농사를 지었다. 이 때의 이 역사(役事)는 전후 16년이나 걸려 이룩되었다. 보장왕 때 와서 당나라 태종이 친히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들어 왔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또 당나라 고종(高宗)때에 우상 유인궤(劉仁軌), 대장군 이적(李적)과 신라 김인문(金仁問) 등이 고구려를 쳐서 나라를 멸망시켜 왕을 사로 잡아 당나라로 돌아가니 보장왕의 서자 안승(安勝)이 4천여 가구를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해 왔다. |
▲TOP |
|
|
고려의 우세승통(祐世僧統)인 의천(義天) 대각국사(大覺國師)는 옛날의 보덕스님의 비래방장(飛來方丈)인 고대산 경복사에 가서 보덕성사의 영정을 첨례하고 시를 지어 경의를 표했다.
열반의 평등한 가르침은 우리 스님으로부터 물려 받았다하네 애석하도다. 그 방이 날아가고 난 뒤에는 동명왕의 옛나라도 망하게 되었네 (涅槃方等敎 傳受自吾師云云 至可惜飛房後 東明古國危)
대안(大安) 8년 신미(辛未)는 고려 희종(熙宗) 7년(1211년)이다. 이때 대각국사는 보덕의 비래방장으로 알려진 경복사를 심방한 것이다. 고려의 불교가 신라의 계통을 이어 오교(五敎)와 구산(九山)이 갈려 대립하고 있던 것을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설파하고 화엄종인 규봉(圭峰)의 교종을 통일하는 한편 선종의 교리에 입각하여 천태종(天台宗)을 창설하여 선종의 종파를 통합하고 원효의 중심사상인 일불승(一佛乘),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원리를 방편으로 삼아 고려 불교의 융합을 꾀했다.
그래서 끝내는 해동천태시조(海東天台始祖)가 되었다. 이러한 거벽(巨擘)의 큰스님 의천은 앞서간 큰스님의 자취를 모두 순례했는데 그때 남간사(南澗寺) 사문 일념(一念)이 이차돈을 위하여 예불결사(禮佛結社)를 맺었는데, 당시 사인묘를 참배하고 과염속사인묘(過염속舍人廟)란 시를 남긴 것이 또한 역사에 유명하다.
적어도 국사가 신라의 선배 스님인 보덕과 염촉의 유허지를 순례 참례했다는 것은 그만큼 불가에 크게 공헌한 큰스님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보덕의 ‘보덕’이란 화엄경(華嚴經) 입경입법계품(入經入法界品)에 나오는 말로서 53위 선지식(善智識) 가운데 32위에 속한다. 선재동자(선재동자)가 구도를 위해 문수(文殊)의 지도를 받아 점차로 남행(南行)하면서 설법을 듣는다. ① 덕운비구(德雲比丘) ② 해운비구(海雲比丘) ③ 선주비구(善住比丘) ④ 미가장자(彌伽長子) ⑤ 해탈장자(解脫長子) ··· 그래서 서른 두 번째 만나는 분이 보덕정광야신(普德淨光夜神)이고, 뒤에가서는 미륵보살(彌勒菩薩) 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로 순행의 끝을 맺는다.
보덕이 53 선지식을 갖춘 한 삶이라면 화엄계에 있어서는 지도적 대각의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선재동자는 복성장자(福城壯者)의 아들로 태어나서 선지식을 차례로 만나 십대원(十大願)을 이룩하고 정토에 왕생항 영원한 법계에 들어 갈 수 있도록 원했던 사람이다. 이 화엄의 염화장세계에 가기 위하여 선재동자가 서른 두 번째 만난 대덕이 보덕이다.
고구려의 보덕스님이 혹시 선재동자의 현신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겠는가. 고구려에 불교를 펴고 다시 백제에까지 널리 부처님의 후광이 미치도록 한 것을 보면 선재동자의 현세적 현신이라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의천(義天)은 보덕선사의 영정에 글을 올리고 그 발문(跋文)에 “고구려의 보장왕이 도교에 혹해서 불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보덕법사는 이에 승방(僧房)을 날려서 남족 나라로 옮겨놓았다”라고 했다.
그 후에 다시 신인(神人)이 고구려 마령(馬嶺)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망할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라고 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모두 보덕스님의 불교적 영험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선재동자가 남행을 하면서 선지식인을 차례로 만나 드디어는 불국토에 진입하는 정진의 과정과 보덕스님이 고구려의 불교를 남쪽 나라 백제에 옮겨 끝내는 백제를 불국토로 만든 것과 어찌 같다고 하지 않겠는가.
보덕스님은 일생을 통하여 제자 스님 11명을 길러 내었다. 이 스님들은 모두 훌륭한 불사를 이 세상에 남겼다. 그중에 무상화상(無上和尙)은 제자 김취(金趣) 등과 더불어 평남 안주군 오도산(五道山)에 금동사(金洞寺)를 창건했고, 일승(一乘)은 정심(正心) 대원(大原) 등과 함께 전북 전주 무악산(毋岳山)에 대원사(大原寺)를 창건했고, 수정(水淨)은 전북 정읍군 칠보산에 유마사(維摩寺)를 창건했고, 사대(四大)는 계육 등과 함께 전북 진안군 성수산(聖水山)에 중대사(中臺寺)를 창건했고, 개원화상(開原和尙)은 충북 단양군 금수산(錦繡山)에 개원사(開原寺)를 창건했고, 명덕(明德)은 지금은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으나 연구사(燕口寺)를 창건했다. 개심(開心)과 보명(普明)도 역시 본전에는 그 전기가 전한다. 일연은 보덕의 행적을 이렇게 찬미했다.
석씨의 행적이 끝없는 바다라면 도교, 유교 백가닥 물 여기로 모아든다. 가소롭다. 왕 넘치는 못 막았어도 창해도 누운 용은 살펴보지 못했구나 |
|
첫댓글 _()_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