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9월 1일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루가 5,1-11)
“Master, we have worked hard all night
and have caught nothing,
but at your command I will lower the nets.”
말씀의 초대
바오로는 콜로새 교우들이 영적으로 풍성해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야만 불신앙을 참아 내고 굳건한 믿음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합당하게 살며 선행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은총의 길을 안내한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베드로 사도를 부르신다.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그에게 기적을 일으켜 주신 것이다. 놀란 베드로는 죄인인 자신을 떠나 달라고 청한다. 그의 겸손이었다. 베드로의 겸손과 순명이 그의 일생을 바꾼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복음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만나는 또 다른 장면입니다. 그는 밤새 고기잡이에 나섰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실패한 겁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깊은 데로 가서 ‘다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 허탕을 쳤지만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이끌리듯 그물을 던집니다.
이 장면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어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을까요? 경험은 자신이 더 많습니다. 고기잡이에 관한 한 그는 고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낮추고 순종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결과는 기적입니다. 엄청난 고기가 잡히는 축복이었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축복 앞에서도 겸손을 잃지 않았습니다.
실패 뒤에 신앙을 만난 이들은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 이들은 작은 실수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역전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을병을 앓다가 살아난 사람도 어딘가 다릅니다. 삶이 ‘한순간’이라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성공과는 인연이 없는 듯합니다. 그렇더라도 겸손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베드로에게 가셨듯이, 그분께서는 반드시 오십니다. 인생의 적(敵)은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마음속에 있습니다.
☆☆☆ 꿈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허황된 꿈과 현실적으로 가능한 꿈입니다. 복권을 사는 이들은 대부분 눈빛이 달라집니다. 당첨을 기대하는 막연한 희망 탓입니다. 그러기에 맑기보다는 몽롱한 눈빛입니다. 각고의 노력 없이 한탕을 노리는 사람의 눈빛이 어찌 야무질 수 있겠습니까? 허황된 꿈은 사람을 흐느적거리게 만듭니다. ☆☆☆
돈 많은 사업가가 바닷가를 여행하다 작은 어촌에 들렀습니다. ‘장사가 될 만한 것이 없을까?’ 하는 생?막?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다 배 옆에서 햇볕을 즐기고 있는 어부들을 만납니다. “왜 고기잡이를 나가지 않습니까?” 부자는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 세상의 지혜는 돈을 많이 벌라고 가르칩니다. 권력을 추구하라고 부추깁니다. 베드로도 야고보도 그리고 요한도 그렇게 잘살아 보겠다고 열심히 고기를 잡았을 것입니다. 때로는 밤새워 일했지만 허탕을 치면서도 말입니다. 그런 그들을 주님께서는 더 뜻있는 삶으로 이끄십니다. 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낚도록 하십니다. 사탕과 진주를 구별할 줄 모르는 아이는 사탕을 선택합니다. 주님께서 제시하신 영원한 생명과 이 세상의 지혜가 부추기는 부귀영화 가운데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허황된 꿈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망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한탕을 노리다 보니 때로는 사기를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들은 쓰라린 고통을 참고 견디는데 자신은 단박에 이루려 하니 편법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입니다. 허황된 꿈이 아니라 현실적인 꿈을 간직했더라면 분명 달라졌을 것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기적 앞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생각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겸손입니다. 주님 앞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신을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허황된 꿈에 젖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셨습니다. 그의 진심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몫은 넉넉히 잡았소이다.” 어부들은 건강한 웃음으로 답합니다. “아니, 그렇더라도 잡는 김에 더 많이 잡을 수 있지 않소.” 부자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습니다. “더 잡아서 뭘 하게요?” 어부들은 귀찮다는 말투로 대답합니다.
“많이 잡으면 돈을 더 벌지 않소. 그 돈으로 더 큰 배를 마련할 수 있고, 그러면 더 많은 돈을 벌고, 배를 여러 척이나 거느리며 부자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고는 뭘 하게요?” 어부들은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습니다. “뭘 하다니요? 그런 뒤에는 편히 앉아 쉬며 삶을 즐길 수 있지 않습니까?” 부자는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어부가 웃으며 답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우리가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예화를 조금 각색해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바다와 함께 살면서 탐욕을 버린 어부들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어부들을 당신의 첫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려면 욕심에서 자유로워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탐욕에서 벗어나면 분명 주님의 부르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뜻밖의 선물>
-양승국신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때가 있듯이 아무리 전문가라도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고기잡이에서만큼은 일가견이 있었던 전문직 어부였던 베드로도 오늘은 참담한 심정이 들 정도로 허탕을 쳤습니다. 한 두 시간도 아니고 밤새 애썼지만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실패는 오늘 우리 삶 안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때로 잘 될 것 같았는데, 우리가 기울였던 최선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간의 투자가 너무나 아깝고 허탈해서 바닥에 주저앉아버릴 때가 있습니다. 이제 나는 여기서 끝이로구나, 이제 내 인생은 끝났구나, 이제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며 좌절의 깊은 늪으로 빠져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하느님께서는 그런 바닥에서 서서히 당신의 활동을 개시하십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던 모든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버리는 순간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제야 그토록 우리가 기다렸던 당신의 손길을 펼쳐주십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의 삶에 대해 너무 쉽게 포기해버립니다. 너무 쉽게 체념해버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은 우리의 상상이나 능력 밖의 일들,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일들을 이루시기를 즐기십니다.
우리 삶이 아무리 하찮아보일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죄 속에 빠져있다 할지라도, 우리 나날이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결코 낙담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우리 삶에 기꺼이 참여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당신 뜻의 성취를 통해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과 웃음을 선사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아무리 나약해도, 아무리 죄인이어도, 이런 생각은 절대 금물입니다.
“이런 내 주제에 무슨 희망을?”
“이런 내 삶에서 더 이상 무슨 기대를?”
우리의 숨결이 멎는 마지막 순간까지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면 늘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아야 합니다. 언제 다가 올 줄 모르는 하느님의 예기치 않은 선물, 뜻밖의 기쁨, 예상치 못했던 은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늘 마음이 열려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때에 우리 삶에 개입하십니다. 갑자기 우리 삶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좋은 선물들, 가슴 뛰는 일들, 신나는 사건들을 맞이하기 위해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놓으신 아주 작은 가능성, 작은 씨앗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누가 그 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전삼용신부-
어제는 오랜만에 대학 친구들을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하다가 들어왔습니다.
사실 대학 친구들은 안 만나고 가려고 했으나 며칠 전에 한 친구에게 한 번 모이자고 메일이 왔습니다.
모일 수 있는 친구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모였습니다. 그것부터 놀랄 일이었습니다. 다들 바빠서 다 모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이게 된 것이 제가 한국에 와 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도 재미있습니다. 모이자고 주관한 친구가 저의 안부가 궁금해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제가 한국에 있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도 메일을 보내지 않던 친구가 저에게 메일을 보내서 만나자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국에 있다고 말한 친구는 제가 아예 유학을 떠나지 않고 오래전부터 한국에 있었는지 알고 그렇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잠깐 들어와 있는 것이었는데, 어쨌건 잘못된 정보 때문에 다 같이 모이게 된 것입니다.
저의 친구들은 종교가 없습니다. 그 중에서 두 명의 친구는 이 번 기회로 성당에 나오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이 모임을 주선한 친구는 천주교를 믿어보려 했지만 여러 가지로 맞지 않는 것이 많아 수녀님과 싸우고 교리를 조금 받다가 말았던 친구입니다. 제가 한 때 “모든 것엔 다 때가 있어.”라고 말해 주었는데 그 친구는 지금까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지금이 바로 그 때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연봉이 1억이 넘고 부족한 것이 없는 친구이지만 살아가는 의미를 느끼지 못해 거의 우울증까지 갔었고 자살까지 생각하며 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제야 저를 만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고 누군가가 섭리해 주신 것임을 인정하고 바로 지금이 종교를 가져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아내를 불러서 함께 성당에 다녀보자고 하였습니다.
종교는 마음이 약한 이들이 의지하는 인간이 만들어 낸 무엇이라고만 믿었던 그 친구가 하느님의 섭리를 믿을 수 있기까지 겸손해진 이유는 그만큼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힘들 때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나고, 또 그런 일이 반복됨을 보면서 자신의 삶에 누군가의 힘이 작용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드디어 하느님을 받아들일 만큼 겸손해 진 것이고, 바로 때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이게 된 이유가 바로 하느님이라 부르는 신의 섭리라고 느낀 것은 그 친구 하나 뿐이었습니다. 제가 유학 나간 지 모르고 한국에 있다고 무심코 대답한 친구는 결국 자신 때문에 다 모이게 된 것이라고 말하며 하느님의 섭리하심이 들어 올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 안에서도 한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껴 신앙을 갖기를 선택했고, 한 사람은 그저 일상적인 일로 묻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왜 같은 사건 안에서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은 듣지 못하는 것일까요?
하느님은 준비되어 있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사람이 당신의 부르심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겸손하여 졌을 때 부르시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다 때가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도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고기잡이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한 번도 잡아보지 않은 목수의 아들이 오더니 깊은 곳으로 나가 그물을 한 번 내려 보라고 하자 그 말에 순순히 따릅니다. 자기의 전문분야에서까지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순종할 수 있으리만큼 겸손해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정말 많은 고기가 잡히자 베드로는 겁이 나서 자신은 죄인이니 자신을 떠나달라고 청합니다. 겸손해진 사람이기 때문에 고기가 잡힌 것이 바로 예수님 때문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교만한 사람이면, ‘운 좋게 많은 고기가 걸렸네?’라고 생각해 버릴 것입니다. 겸손해지면 사람은 단 한 순간도 하느님의 섭리 밖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그 사람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제가 유학을 다시 나와 공부하는 것이 너무 싫어서 한국 생각만 하고 있을 때 함께 나온 한 사람의 미니홈피에 적힌 글을 읽었습니다.
“나로선 아무리 하기가 싫고 정말 아니다 싶더라도 진정 교회를 생각하고 나를 아끼는 이들이 그 길로 가라고 하면 그건 틀림없이 하느님의 뜻이다.”
이 신부님도 원치 않는 것이었지만 주교님이 원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잘 깨닫고 있는 것을 보고 제 자신을 반성하였습니다. 저는 가기 싫다고 하여 주교님께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한 달간 묵상해 보라고 하신 것과는 사뭇 다른 자세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겸손한 사람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만 교만한 사람은 특별한 일도 그저 일상의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신학교에 들어왔지만 참으로 그 부르심을 인정한 때는 비로소 겸손해 졌을 때였습니다.
신학교에 들어와서도 교만하여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모든 거 버리고 신학교에 들어왔는데...’
그러나 이틀을 굶고 밥을 조금만 먹지 않아도 죽을 것만 같은 약한 존재임을 깨닫고는, ‘주님 저를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행복의 눈물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어제도 신앙을 갖기로 한 친구가 계속 저에게 행복하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행복하려면 겸손해져서 합당하지 않은 죄인인 나를 불러주신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합니다. 주님은 모든 만남과 사건 안에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
-최성기 신부-
사람이 무슨 일을 도모하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움직이는 일입니다.
회사나 단체들,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사람을 움직이고 존중하는 것이 기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왕이든 사장이든 가장이든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이든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는 이는 외적인 제도나 법에만 의존하게 되고,
사람을 압박하는 사람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오늘 복음은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깊은 곳에 그물을 친다’는 것과 ‘사람 낚는 어부’라는
말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의 아주 깊은 곳을 느끼지
못하고 겉도는 인간관계만이 내가 맺는 관계의 전부일 때, 다른 사람을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거나, 내 삶의 들러리 정도로만
여길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움직이게 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과 통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느끼는 슬픔, 그가 느끼는 한계,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그가 느끼는 기쁨을 함께 공감할 수 있을 때,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그의 존재를 들어올리고, 진정으로 그를 만나고 함께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서로의 존재를 어루만져주는 인생의 동반자,
내 삶을 함께하는 진정한 친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대박 -김석인 신부- 나의 작은 경험을 나누고 싶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보답하고 싶은 열망을 느꼈다. 하느님께서 나를 어떤 길로 부르고 계실까? 여러 가지 길을 알아보며 많은 노력을 했지만 속 시원하게 ‘이게 내 길’이라는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 단순한 동기로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 되어 포콜라레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군 입대를 했다.
그런데 군대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중요한 기회를 잃었다. 물론 형제들 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랑하고 또는 나의 내면에서 그분과 대화하는 시간에, 말씀을 기억하며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순간에 계속 그분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지만 이 모든 것의 원동력이 되는 영성체나 그분을 조배할 기회를 완전히 잃었다. 그래서 예수님께 주일만이라도 미사 참례를 하고 성체를 모실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드렸다.
그러던 중 심하게 복통을 앓으며 몸이 좋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병명으로 장기간 치료가 필요해 국군통합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젊고 힘이 넘치던 나에게 입원은 커다란 십자가였다. 마음을 추슬러 하느님의 뜻으로 잘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때 나는 하느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음을 깨달았다. 병원에서는 매주 한 번씩 미사가 있었고 영성체를 하며 예수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었다.
또한 동료 환우들과 함께 친교와 기도 생활을 시작하면서 주변 환우들을 보살피기 시작했다. 이렇게 생활하다 보니 가톨릭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환우들이 생겨나 교리반을 조직하고, 외부에서 수녀님을 초청해 정기적으로 교리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거의 3개월마다 30여 명의 세례자들이 태어났다. 정말 대박이었다.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치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경우 나에게 오는 십자가를 잘 받아들이고 십자가가 주는 의미를 깨달으라고 하시는 것 같다. 예수 성체를 모시고 싶다는 나의 기도를 질병이라는 십자가를 통해 들어주셨다. 그리고 그 상황을 통해서 형제들과 함께 나누며 서로 사랑했을 때, 하느님은 나를 사람 낚는 도구로 써주신 것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 낚는 어부의 대박이었다.
스승에서 주님으로
-김찬선신부-
베드로 사도가 부르심을 받는 얘기를 하는 오늘 루카 복음은
다른 공관 복음, 마태오, 마르코와 다를뿐더러
함의가 너무 풍부하고 의미도 깊어 할 얘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그중 한 가지에만 집중을 하겠습니다.
스승님에서 주님에로의 변화.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그물을 쳐 고기를 잡기 전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스승님이었습니다.
누구를 스승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겸손입니다.
왜냐면 저는 스승으로 삼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학교 다닐 때 의례적으로 갖게 된 스승이 아니라
제가 마음으로 존경하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스승 말입니다.
20대 때까지만 해도 저에게 영향을 준 사상이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20대 후반 이후
그들도 다 저와 마찬가지로 사람에 불과하게 되었기에
깨달음을 위해 누구의 책도 읽지 않습니다.
성경과 성 프란치스코의 글들 외에는 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때 이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저에 대해
Self educated person, 독학생이라고 합니다.
이는 제가 교만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여러 교설에 휘둘리지 않고
예수님만을 스승 삼기 위해서이고
실제로 예수님만이 저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한 때 프란치스코가 예수님을 제치고
더 스승이었던 적이 있었으니
예수님만이 저의 스승이라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입에 발린 스승이 아니라
진정 내가 존경하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스승이라면
그는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소중한 분입니다.
그럴지라도 스승은 주님만큼은 아닙니다.
스승은 그 가르침을 따르는 분이지만
주님은 그 존재를 따르는 분입니다.
스승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분이지만
주님은 나를 좌우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스승께는 자기 존재 영역을 포기할 필요가 없으나
주님께는 자기 존재 영역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순간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주님을 만나러 어디로 갈까나
-상지종신부-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갈까나
이병에 가득히 넣어가지고서 라라라 라라라라 온다나"
어렸을 적 즐겨 부르던 동요입니다. 고기를 잡으러 어디로 가야할까요? 고기가 있는 곳으로 가야지요.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는 어리석음을 빗대는 말로서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한다'라는 뜻의 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렇다면 주님을 만나러 어디로 가야할까요?
성당에, 기도하기 위한 고요한 침묵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기도할 때... 맞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성당에'만', 고요한 침묵의 시간과 공간 속에'만'이라고 생각한다면 틀린 답입니다. 적어도 주님을 만나는 데 있어서 만큼은 '연목구어'라는 말이 맞지 않으니까요.
일상 생활 안에서는 주님과 함께 있음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애써 특별한 장소와 시간을 찾는 분들을 보면, 그분들의 열심한 모습에 감동을 느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상 생활 안에서, 자그마한 만남들 안에서는 주님을 만나고 있지 못하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가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만난 어부 베드로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부럽기까지 합니다. 자신의 일상 생활 안에서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써 베드로에게 있어서 오늘의 일상은 어제와는 다른 일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어디로 갔을가요? 아무데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 자리를 진득하니 지키고 있었을 뿐입니다.
행운의 사나이 어부 베드로! 호박이 덩굴째 들어온다고 했던가... 물고기도 많이 잡고, 주님의 부르심도 받고... 왜 나에게는 이런 행운이 없을까? 아니요.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 행운('은총'이라고 하는 것이 신앙인다운 표현이겠죠.)을 지금까지 잡지 못한 것뿐이지요. 높은 곳만, 먼 곳만 바라보고 있으니,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싶네요.
"베르나르도야! 너는 날 만나러 어디로 올거니?"
친구 예수님께서 던지시는 하나의 화두입니다. 벗들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시지 않나요?
"가긴 어딜가요? 지금 함께 계시잖아요.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내게 맡기신 일들을 통해, 당신은 언제까지나 함께 하시잖아요. 함께 하시고 부르시는 당신을 몰라 본 제가 바보죠!"
이렇게 답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그리스도인일이 아닐까요?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고 있으니까 말이죠. 사랑하는 벗님들 모두 가장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자그마한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참담한 심정>
-양승국신부-
하필 물때가 맞지 않아 밤낚시를 완전히 망친 날, 예수님께서 시몬의 배에 올라오십니다. 그리고 시몬에게 하시는 말씀은 더욱 뚜껑 열리게 만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 그 말을 들은 시몬은 솔직히 말해서 기분이 몹시 언짢았습니다. 그날은 전문직 여부였던 시몬과 동료들조차 밤새도록 그물을 쳤지만 단 한 마리도 못 잡았던 일진이 좋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어떻게 단 한 마리도 못 잡을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사실 낚시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낚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써 한 마리도 못 잡은 시몬의 그 참담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낚시는 사실 물때가 언제이냐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다릅니다. 시몬과 그 동료들이 밤낚시를 한 때는 아마도 가장 물때가 가장 좋지 않을 때로 추정됩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쳐보았지만 피라미 새끼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 허탈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루 밤을 괜히 허송세월 했다는데서 오는 허탈감, 일단 잡아야 먹고사는 게 어부인데, 한 마리도 못 잡았으니 공쳤다는 말입니다.
일단 고기를 좀 잡았어야 새벽녘의 그 기가 막힌 매운탕에 소주 한잔도 할 수 있고, 또 피로도 풀 수 있을 텐데, 완전히 공치다보니 속은 더욱 쓰렸습니다. 학수고대하고 있는 가족들 얼굴이 떠오르면서 시몬의 어깨는 더욱 쳐졌습니다. 집에 들어갈 면목이 없었습니다.
이토록 심기가 불편해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불난 데 부채질이라도 하듯이 억장 무너지는 소리를 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 이 말을 들은 시몬과 동료들은 심한 모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 지가 뭔데, 아무리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한다지만, 그래도 고기잡이에는 우리가 일가견이 있는데, 우리가 이 직종에만 종사해온 지가 벌써 30년인데, 지가 뭘 안다고, 그리고 말하는 것 들어보니 더욱 가관이네. 지금 이 시각에 고기는 무슨 고기! 그리고 또 깊은 곳으로 가서 치라고? 야! 끓는다 끓어!"
동료들을 겨우 달랜 시몬은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며 마지못해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쳤습니다.
이 상황에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치라 "는 예수님의 요청은 한 마디로 기존에 시몬이 지니고 있던 낡은 가치관, 인간적인 삶의 양식,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버리라는 요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인간적인 것들을 버려라! 그래야 완전히 새로움인 나를 받아들일 자격이 생긴다"는 진리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보다 전적인 신뢰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기존에 시몬이 가지고 있었던 인간적인 자질이나 능력, 경험들을 다 던져버리고 당신과 함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자는 예수님의 초대가 바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쳐라"는 말씀의 요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부르시고 선택하실 때 조건 없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따라서 인간은 시몬처럼 절망 속에서도 희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제 시몬은 배를 육지에 대고 어부라는 직업을 버립니다. 이제 시몬은 새로운 성취수단을 발견한 것입니다. 시몬의 삶은 이제 고기를 낚던 삶에서 하느님의 사람을 낚는 일로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새벽을 열며
서부 아일랜드의 폭스포드 양모 공장은 아일랜드의 자선 수녀회의 버나드 수녀가 세운 것으로 그 지역 전체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준 놀랍고도 창의적이며 혁신적인 사업으로 평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1907년 1월 23일. 이 양모공장에 그만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안타까움과 함께 큰 실망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요. 이렇게 일반 사람들도 큰 실망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 공장을 설립한 버나드 수녀는 얼마나 크게 실망을 했겠습니까?
아무튼 이러한 절망의 순간에 수녀님께서는 주님께 밤새 기도를 올렸다고 해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모든 재난에는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실수까지도 모두 불타버렸으니,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합시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면 그 가운데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우리들 곁에서 그리고 우리의 수준에 맞춰서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무슨 걱정을 할까요?
유치원 선생님과 대학교 교수님을 떠올려 보세요.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칠까요? 말투부터 다르지 않습니까? 바로 학생의 수준에 맞춰서 이야기하다보니 자신의 말투와 다른 말투를 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도 상대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를 사랑하셔서 연약한 인간의 몸을 취하신 것은 물론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신 주님께서는 어떨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명령하십니다.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일상 삶으로 다가오셔서 관여하시는 것이지요. 문제는 사람들이 일상 삶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베드로는 바다에 있어서는 자신이 전문가라고 생각하면서 목수 출신인 예수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곧바로 받아들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 수준에 맞게 일상 삶에서 언제나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주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받아들인다면, 앞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하는 버나드 수녀님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처럼 나의 이웃에게도 같은 수준으로 다가가 주님의 사랑을 전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세상의 일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빠다킹신부
부르심
-김인한 신부-
지금 사는 곳은 산허리 빨간 벽돌집에 사내들만 모여 사는 곳입니다.
모두 부족한 이들이지만 주님의 도구로서 사는 이가 되기 위해 오늘 하루도
용맹정진하고 있습니다. 이곳 학생들의 신학교 입학까지의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한 사람 한 사람 다 자신의 모든 발걸음이 계속된 하느님 부르심의
결과라고 고백합니다. 누가 보기에는 별 대단할 것 없는 인생사이고
의미심장한 사건 하나 없지만, 그래도 부족한 자신을 부르신 것에 대해
감사하며 따르는 젊은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베드로가 그러하였듯이 주님 부르심에 응답할 줄 아는 이는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스스로가 부족하기에
자신으로 사는 것은 의미가 없고, 바로 주님의 도구로서 살아가는 것이
의미가 있음을 안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이들, 그리고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이들조차도 자신을 삶의 의미로 삼기에 주님께 의미를 두는 삶에
자신을 투신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으로 가득한 그물을 부여잡기보다
베드로처럼 과감히 그물을 버림으로써 오롯이 주님으로 인해 의미를 갖는
우리들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산 위의 마을에는 어부들이 산다
-박기호 신부-
필자는 ‘산 위의 마을’에 살고 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도 들었고, ‘가난한 자 행복하다.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도 들었다. 구원의 길도 알고 있다. 그런데 알고만 있을 뿐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천국 문앞에 얼쩡거릴 뿐 들어가지 못하면 신앙생활도 무상할 것이다.
초대교회 제자들처럼 살아갈 수는 없는가? 사업에 넘어져 빈손 되고 공부로 자식농사 망치기도 하는데, 그까짓 명예고 재산이고 자식이고 하느님 앞에 던져버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갈 수는 없을까? 말씀대로 살아볼 수는 없을까? 한번 해보자. 환란의 도시를 떠나 기도생활에 전념하고 정직하게 노동하면서 살아보자. 그래서 1,000일 기도를 바치면서 은인들의 도움으로 발전 전망이 없는 오지의 화전민들이 물러났던 산골짝에 마을을 건립하고 가족들을 모았는데 왔다가 돌아간 사람, 갈팡질팡한 사람`…. 하여튼 현재 4가족 16명이 살고 있는데 우리같이 정신 나간 사람들이 종종 물어물어 찾아온다.
어부는 고기를 왜 잡는가? 행복을 얻으려는 것이다. 돈을 가져야 행복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예수님 방식은 변통이 아니라 직통이다. 돈 없어도 치유받고 배불리 먹게 하셨다. “나를 따르라. 그러면 직행복(直幸福)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재산의 포기도, 도시문화의 단절도, 자식의 미래도 두려워 말라. 가진 것 없어도 만족스럽고 행복하면 그만인 것을.
배를 가진 어부는 바다에 살고, 산 위의 마을에는 그물을 버린 어부들이 산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서영남 -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는 두려워하며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하고 애원합니다. 두려움이 뒤섞인 황홀함은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부였지만 이제는 사람들을 낚는 어부로 변했습니다.
콜베 형제는 청송교도소에서 16년째 살고 있습니다. 10여년 전에 콜베 형제의 대부인 교도관의 소개로 처음 만났을 때는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음에 안 들면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날아갔습니다. 징벌방을 밥 먹듯이 들락거렸습니다. 20년 6월형에 감호처분을 받았기에 희망 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몰라보게 변했습니다. 지난 10여년 동안 매달 한 번씩 면회를 다녔습니다. 콜베 형제가 변하는 모습을 보는 행복에 저는 청송이 먼 줄도 몰랐습니다. 편지도 제대로 쓸 줄 몰랐는데 서예공부를 열심히 해서 멋진 달필로 변했습니다. 공장의 반장을 하면서 힘없는 사람들, 나이 많은 노인들을 극진히 돌보아 줍니다. 힘들게 일해서 받은 상여금을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민들레 국숫집에 쌀을 보탠다며 여섯 번이나 이십만 원씩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출소하게 되면 자기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도 버렸습니다. 자기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용서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살아가는 삶의 현실에서, 자신의 처지에서 깊은 의미를 추구해 더욱 성숙한 삶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현실을 살면서도 그 현실을 뛰어넘는 초월적 가치를 따르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콜베 형제는 지금도 청송교도소에서 살고 있지만 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 베드로의 순명
- 이기양 신부-
가끔 저에게 이런 말을 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사목을 하시고 좋은 결과들을 내실 뿐 아니라 큰 애착을 가지고 성전을 꾸미고 가꾸시는 모습이 너무나 뵙기가 좋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온 정성을 다 들이시다가 어떻게 여기를 떠나실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몇 년 머무르다가 훌쩍 떠나야 하는 성직자의 상황을 잘 아는 신자들이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것이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이지요.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다져놓은 자리는 편안하고 안락합니다. 이렇게 편안하고 안락하며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축적된 자리를 떠나서 예측이 안 되는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일 수밖에 없지요. 애착이 깊을수록, 또 확신과 지식이 가득 차 있을수록 떠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거기에 안주한다면 더 이상 발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제나 수도자가 한 곳에 안주한다는 것은 더 이상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수도자나 성직자는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 또 업적이나 사람들보다는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인간적인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을 성숙시키는 이러한 떠남의 과정은 아픔과 아쉬움을 뒤로하지 않고는 만들어질 수가 없습니다. 어리석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자기를 믿는 경우를 봅니다. 자신에 집착하고 연연해하는 사람들은 매사에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주위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정치인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모습이지요. 그러나 그 사람이 떠나야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것을 그 주변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본인만 모르지요.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전형적인 어리석음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 상황을 여실히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어떤 사명을 맡기실 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 오늘 복음에 그려지고 있지요. 예수님께서 첫 번째 제자들을 뽑으시는 장소가 어디이며, 어떤 과정을 통해서 뽑으시는지를 알면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베드로를 사도로 부르시는데 인간 베드로가 가장 애착을 갖고 확신하고 있는 직업을 통해서 부르고 계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장 애착을 느끼며 놓으면 죽을 것처럼 여겨 떠날 수 없었던 자리는 바로 “어부”의 자리였습니다. 몸담고 있는 겐네사렛 호수를 떠난다는 것은 그에게 그 자체로 죽음이었을 것입니다. 어부라는 직업을 떠나고 더군다나 배를 버린다는 것은 베드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고 꿈도 꾸어보지 못한 일이었을 터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오늘 예수님께서 부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만나신 곳은 겐네사렛 호숫가입니다. 겐네사렛 호수는 우리가 잘 아는 갈릴래아 호수의 옛 이름이지요. 말 그대로 베드로에게는 겐네사렛 호수가 홈그라운드였습니다. 고기잡이에는 누구보다도 선수였던 베드로에게 그물을 쳐 고기를 잡을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직업적으로 예수님과 베드로는 상극이었지요. 호숫가에서는 모든 것이 베드로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루가 5,4)
예수님의 이 한마디에 베드로는 반문합니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루가5,5)
베드로의 인간적인 반응을 볼 때 벌써 그의 전문적인 지식이 예수님의 권위에 꽉 눌려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힌 것을 보자 베드로는 놀라움을 넘어서 두려움에 사로잡히지요.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한 갈릴래아 호수에서 밤새 이 잡듯이 뒤졌지만 한 마리도 안 잡혔던 고기가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두 배에 가득 그물이 찢어질 지경으로 잡혔던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며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립니다.
사람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뛰어넘는 순간과 맞닥뜨리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을 만나면 당황하고 두려워하게 되지요. 베드로는 엄청나게 많이 잡힌 고기를 보고 기뻐하거나 당장 달려가 퍼담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잡혔으면 “웬 떡이냐!”하고 반가워하며 한 걸음에 달려갔을 텐데 지금 베드로의 반응은 전혀 그와 다르지요.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루가 5,8)
이것은 어부의 반응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만난 사람의 반응이지요. 지금 베드로는 ‘이 예수님이라는 분이 인간이 아니고 정말 하느님이시구나.’하는 신앙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루가5,10)
그러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말이 필요 없는 예수님의 완전한 K.O. 승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살찌우는 ‘순명’에 대해서 묵상하게 됩니다. 고기잡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예수님께서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어부 베드로에게 다가와 다시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베드로였다면 그 말씀을 따랐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나의 지식과 경험으로 맞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신자들이 더 깊은 신앙으로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상식을 뛰어 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베드로와 달리 그물을 치는 수고를 다시 하려고 하지 않지요.
하느님께 순명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어야 새로운 계기가 생깁니다. 나의 지식과 경험을 뛰어넘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지요. 나의 지식과 경험에 안주하면 거기까지 밖에 하느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내 지식과 경험의 범주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스스로 하느님을 제한하는 한계를 두는 참으로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그러나 나의 경험과 지식을 접고 무한하신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풍요로움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를 다 놓고 하느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러자 밤 새워 노력했으나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고기잡이로서의 절망과 피로가 한순간 희망으로 바뀌고, 실패는 성공으로 바뀌었으며, 보이지 않던 앞날에 새로운 길이 제시되었습니다. 비린내나는 고기잡이 어부에서 인간 영혼을 구원하는 사도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신앙으로 성숙할 수 있는 길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것입니다. 나의 지식과 경험을 넘어서 예수님의 말씀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루가5,5)하고 따를 때 풍요로운 결실이 맺어질 수 있다는 오늘 복음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 이창신 신부-
삶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깨우쳐 주는 작은 목소리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어긋난 우리를 바로 잡아주기도 하고, 잊고 살았던 삶의 진리를 새롭게 체험하게도 합니다.
제가 얼마 전 경험한 일입니다. 저는 한 달에 한 번 본당 관할구역에 있는 한 양로원을 방문합니다. 그 날도 몇 명의 신자와 함께 약속된 시간에 양로원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한 할머니께서 매달 찾아와 줘서 고맙다하시며 조그마한 선물이라며 포도주 한 병을 내놓으셨습니다. 날씨도 더웠고, 저는 제가 할머니들을 위해서 뭔가 해드려야 한다는 입장만을 생각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포도주를 받아서 돌아왔습니다.
집에서 자세히 포도주를 보니 그 포도주는 국산으로 지하철 티켓 두 장 값이면 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참 싼 포도주도 있다구나 했는데 사제관 식사를 도와주시는 자매님께서 옆에서 듣고 계시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포도주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포도주네요."
사제가 되어 신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좋은 선물, 값비싼 선물에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저는 그 한마디의 말씀에 큰 방망이로 머리를 맞는 듯 큰 충격을 받았고, 그동안의 삶을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큰 것, 좋은 성과, 인정받는 일에 관심을 가지도 보니 작지만 소중한 진실을 보는 눈과 귀가 멀었나 봅니다. 아직 가격표도 떼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 포도주는 지금 제 방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으뜸 제자인 베드로와의 첫 만남을 전합니다. 어부인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고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아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어부로서 어디서 고기잡기가 좋은지 더 잘 아는 베드로,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하고 지쳐 있었던 베드로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한번 더 해보겠노라며 다시 그물질을 합니다. 그리고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베드로가 왜 처음 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호수로 나갔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일수도 있고, 복음서가 전하듯 색다른 권위를 가진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호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그 말씀을 받아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실천으로 옮겼다는 사실입니다. 외면해버려도 상관이 없을 법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했기에 그는 놀라운 결실을 맛볼 수 있었고, 고기낚는 어부로서의 삶에서 사람을 낚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사업에 뛰어들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작지만 그래서 소홀할 수 있는, 지나쳐버릴 수 있는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외면하고 무시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작은 그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도 있고, 잊고 살았던 진실의 모습을 되찾을 수도 있습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활기찬 하루를 시작하는 시장 사람의 성실과 정화원들의 정성된 빗질로 유지되는 깨끗한 거리. 아이스크림 하나에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어린아이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이웃이 건네는 인사와 미소. 우리 주위엔 나를 가르치는 작은 목소리를 많습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 주위에서 함께 하는 사랑을 담은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그 작은 목소리가 주는 작은 감동으로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쁨이 넘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 조성풍 신부-
살아가면서 누군가 앞에서 말을 통해 무엇인가를 전해야 할 때마다 어려움을
느끼곤 합니다. 특히나 강론을 준비할 땐 더 그런 느낌이 듭니다.
최선을 다해 강론을 하지만 혹시 무성의하게 보여지면 어쩌나, 또 강론의
내용에 상처받는 분이 계시면 어쩌나 등등의 고민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어려움에서 조금이나마 해방될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을
하느님께서 주셨습니다. 똑같이 강론을 듣고서도 각자에게 전해지는 부분은
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면, 그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알맞은 형태로 요리해주시리라’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강론을 멋지고 맛있는 요리라고 생각했던, 더 나아가 그런 요리를 내 힘만으로
장만하겠다는 욕심이 부담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강론은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요리 재료일 뿐이고, 그 재료를 신앙인 각자에게 적합한
영양식으로 만들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이 안도감을 주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소금 항아리’를 통해서도 말씀을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제자들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제자들은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라고 아룁니다. 저도, 여러분도 이번 순교자 성월 동안은
‘사람 낚는 행복한 어부’가 되도록 청해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험
- 최혜영 수녀-
평범한 어부들이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상에 밀려 한 치 앞을 못 보던 사람들에게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낚으라”는 초대는 결단을 요구하는 모험입니다. 여태 익숙해진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주심으로써 신뢰를 가질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익숙했던 자아를 버리고 새로운 자아로 나아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몬 베드로는 두려움 가운데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나의 약점과 부족함만 바라본다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지평을 넘어 예수님께 마음을 향할 때 두려움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깊은 곳으로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수영 잘하는 친구를 따라 깊은 곳에 가서 수영을 했을 때 느꼈던 기분을 아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따르는 모험을 왜 마다하겠습니까?
주제 파악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한만옥 신부-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델피의 신탁으로 이렇게 외쳤다. “너 자신을 알라!” 사실 자신을 아는 것, 이른바 주제 파악을 잘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일에서 자신의 주제를 아는 것은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제를 모르고 어떤 일에 뛰어들었다가 패가망신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보아 왔다. 그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느님 앞에 자신의 주제를 알고 분수를 알아야 신앙생활도 잘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 적어도 고기 잡는 일에는 어부인 자신이 목수인 예수님보다 한 수 위여야 했다. 그런데 갈릴래아 호수에서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을 때 예수께서는 “깊은 데로 배를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고 말씀하신다. 그전에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베드로는 반신반의하면서 예수님 말씀대로 그물을 친다. 결과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하고 고백한다. 예상하지 못했던 그 엄청난 사건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자신의 주제, 정말로 보잘것없고 죄스러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 주제 파악으로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나는 주님 앞에 어떠한 존재인가? 그분 앞에 내세울 만한 것이 있는가?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 [루까 5, 1-11]은 예수님의 포교생활의 초기 모습 중에 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즉, 예수님의 복음전파는 구약의 가르침이 계속되어 오던 회당에서 하셨는데, 회당에서 예수님을 사람들이 쫓아내자 거기에서 그치지 않으시고, 이제는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배에 앉으시어 사람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복음전파의 모습은 회당이라는 어느 장소에 제한되거나 제약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장모의 집처럼 개인집, 게네사렛 호수가, 밀밭가, 또 산에서 등 어느 장소이건 어느 장소에서도 필요 하다면 언제든지 아무 구애를 받으시지 않으시고 자연스럽게 하셨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오늘 복음에 게네사렛 호수가에 이루어졌던 장면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께서는 그 호수에 배가 두 척이 있었는데 시몬 베드로의 배를 빌려서 육지에서 배를 조금 떼어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신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즉, 인간적인 경험, 인간적인 지혜, 노력을 다 써 봤지만, 기대하던 결과는 이 조건, 이 경우에는 헛수고였다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스승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가 있었다. 즉, 일생을 그 바닥에 자랐고, 그 일로 잔뼈가 굵어 왔고, 고기잡는 그 일에는 전문가였던 그 베드로, 그는 주 예수의 말씀 앞에 자기의 능력, 경력, 재능, 힘, 그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알았고, 겸손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낮출 줄 알았기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그물을 치겠습니다!" 말할 수 있었고, 행동에 옮길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일생을 어부로 살아 왔고, 게네사렛 호수라면 자기가 노는 마당처럼 손바닥처럼 훤히 들여다 보고있는 그가 그 모든 지혜와 경력을 바보처럼 포기하고 고기한번 잡아본 적이 없어 보이는 예수의 말을 따른다는 것은, 그 말을 듣는 우리들에게도 놀라운 순종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대로 한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많은 고기가 엄청나게 걸려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어 다른 배의 동료들의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 되었다."고 복음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이렇게, 그렇게 능력있고, 그렇게도 잘 알고, 그 일에는 그렇게도 경력이 많은 그 베드로가 그 모든 것을 낮추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른 그 결과는 지금까지 자기 생애에 보지 못했던 엄청난 결과였다.
그러기에 "그는 겁을 집어먹고 저는 죄인이오니 저를 떠나 주십시오!"하며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진실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하느님을 대한다면, 많은 말이 필요한 것도 아니요, 삶을 통해 있는 그대로 보다 더 큰 하느님의 능력을 매사에 경험하게 되고 보게 될 것이다. 아멘.
부르심
-서북원 신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당신의 일을 도울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들의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본다면 과연 이것이 합당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똑똑한 사람도 많았을 텐데 예수님은 모자라게 보이는
열두 제자를 선택합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떠한가요. 우리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회적인 잣대로 똑똑한 이들도 얼마간
있지만 대부분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부족하지만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내가 선택 되었습니다. 세상이 가져다주는 부귀영화! 과연 그것이 인생의
전부일까요? 분명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단순함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불확실한 미래를 주님께 내어 맡기는 정신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부르심에 주저하지 마십시오. 내가 신앙인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이 다하는 날까지
전적으로 그분만을 신뢰하며 그분이 가르쳐주신대로 이 현세를 살아갑시다.
혹 시련이 온다 할지라도 그분이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실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정진합시다. 그런 이에게 복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의 그물
-이종진 신부-
불현듯 마음속에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는 내가 ‘놓친’ 사람들이다. 서로의 부덕으로 소원하게 된 관계가 다시금 회복되기를 바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혹시 지나치게 사람들에게 매여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기도 한다. 신앙인으로서 정말 염려해야 할 일은 ‘내가’ 사람들과 맺는 관계보다 그 사람들이 ‘하느님께’ 속해 있는가 하는 것이어야 할 텐데.
그렇다면 사람을 낚도록 부름 받은 우리의 처지는 ‘그물’에 비유할 수 있다. ‘사람을 낚는다.’란 표현은 오늘날에는 그 어감이 썩 좋은 것은 아니다. 한 인격이 마치 대상처럼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을 낚는 이와 낚이는 이의 관계가 자칫하면 종속관계로 오해될 수 있다. 그래서 복음서의 이 표현을 계속 사용한다면, 사람 낚는 ‘어부’는 곧 하느님이요, 우리는 그분이 던지는 ‘그물’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그물은 어부의 의향에 따라 움직인다. 마치 화살이 궁수의 조준에 따라서 과녁을 향해 날아가듯이. 그물에 물고기가 걸려드는 것은 어부에게 맡겨진 사안이다. 그러므로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의 임자는 어부지 그물이 아니다. 그물은 다시 ‘빈 그물’로 돌아가서 새롭게 물고기를 낚아 올릴 준비를 한다.
하지만 그물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은 있지 않겠는가? 그물코가 촘촘하게 잘 짜여 있지 못하면 잡힌 물고기가 빠져 달아나는 일도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물이 탄탄하게 잘 짜여 있는지 점검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물을 뜨는 것은 물론 어부이신 하느님의 몫이지만, 그 조련에 순응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요 책임을 수밖에 없다.
어부의 자리를 찬탈하고 싶은 유혹에 직면할 때마다 그물은 자신이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아울러 자신의 태만과 부주의로 인한 손실에 대해 그물은 어부에게 탓을 돌려서도 안 된다.
새벽을 열며
어떤 남자가 성당에 기도하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기도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계속해서 주님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지금 당장 제게 100만원만 주십시오. 너무나 급합니다. 주님 지금 당장 100만원만 주세요.”
이 남자는 지갑에서 100만 원짜리 수표를 꺼내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기도하던 사람은 “알렐루야, 주님 너무나 감사합니다.”를 외치면서 밖으로 나갔어요. 그리고 이 남자는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러더니 조용히 두 손을 모으고 이렇게 기도했다고 하네요.
“주님, 이제 기도에만 집중해 주세요.”
과연 주님께서는 이 남자의 기도에만 집중하실까요? 그렇지 않겠지요?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나만 특별한 대우를 받기를, 나만 더 잘 되기를 바라는 그래서 자기만을 드러내려는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기심과 욕심이 바로 주님과 나의 간격을 더욱 더 멀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은 베드로를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과정을 잘 보면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우선 베드로의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는 그래서 고기 잡는 데에는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수 출신이신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만약 여러분의 일에 어떤 사람이 관여하면 기분이 좋으세요? 그리고 그 관여하는 사람이 나와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 분야에서 전문가인 나보다도 더 많이 아는 체를 한다면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 사람의 말을 따르겠습니까? 아니겠지요.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는 분명히 거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반대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 결과는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만을 드러내는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그 자리에는 주님께서 계시지 않다는 것이지요. 생각해보세요. 베드로가 “고기 잡는 것은 제가 전문가입니다. 따라서 아는 체 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 나의 자리를 주님과 함께 하는 자리로 만들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바로 내 안에 간직하고 있는 욕심과 이기심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주님께 나의 첫 자리를 드렸으면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성호를 그으면서 주님과 함께 하도록 합시다.
빠다킹신부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강영구신부-
시몬 베드로는 나자렛의 목수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이 지닌 어부(漁夫)로서의 전문적인 지식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그 순간 그는 눈이 번쩍 뜨여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罪人)이라고 고백합니다.
죄인(罪人)이 따로 없습니다.
윤리적,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짓을 하는 사람만 죄인(罪人)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지닌 학식, 전문지식, 지위와 명예, 돈과 권력 따위에 의지해서 서려고 하는 사람이 죄인(罪人)입니다.
돈과 권력, 지위와 학식 따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하늘의 소리를 외면하는 사람이 죄인(罪人)입니다.
하늘과의 관계가 단절된 가운데 사는 사람이 죄인입니다.
불행하게도 죄인(罪人)은 자신이 죄인(罪人)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이라 고백하는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불러 제자로 삼습니다.
자신이 죄인(罪人)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는 이미 죄인(罪人)이 아닙니다.
자신이 죄인(罪人)이라는 사실을 알면 그때부터 하늘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 매혹과 공포의 양면적 신앙여정
-박상대 신부-
루가복음 5장부터는 예수님의 공적인 가르침과 활동이 제한된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어 넓은 지평으로 펼쳐진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교적 회당에서 행해졌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겐네사렛(갈릴래아;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군중에게 행하신 가르침과, 현직 어부(漁夫)들인 시몬과 그의 동료들로 하여금 엄청난 고기를 잡게 하신 자연이적(自然異蹟)을 통하여 첫 제자들을 얻으신 제자소명사화를 보도하고 있다.
예수님의 활동무대가 회당에 국한되지 않고 이를 초월하는 이유는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예수께서 언제 어디에 계시던 그분이 계신 바로 그 시각과 그 장소가 구원성취의 시간이요 장소이기 때문이다.(루가 4,21) 예수께서 시몬과 그의 동료(안드레아, 야고보, 요한)들을 첫 제자로 삼으신 소명사화는 4복음서 모두에 보도되고 있다.(마태 4,18-22; 마르 1,16-20; 루가 5,1-11; 요한 1,35-42)
마르코의 소명사화가 이들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마태오가 이를 그대로 베꼈고, 루가는 마르코의 원전(原典)에 자연이적사화를 곁들였다. 요한은 제자소명사화의 구조와 내용을 전혀 다르게 편집하였고, 오늘 복음의 자연이적사화를 부활하신 예수의 발현사화와 연결시키고 있는 반면(요한 21,1-14), 루가는 이것을 제자소명사화에 연결시켰다.
루가의 이러한 의도는 일방적으로 예수님에 의해 불림을 받는 마르코에서와는 달리 시몬(베드로)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군중을 향한 가르침을 마치시고 갑자기 시몬을 향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4절) 시몬이 예수께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 응답하였다.(5절) 예수께서는 물풀만 걸려든 빈 그물을 씻고 있는 그들을 보시고 밤새 허탕을 쳤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와 시몬은 서로 아는 사이다. 예수께서 가파르나움 회당을 나오셔서 곧바로 시몬의 집에 들러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일(4,38-39)로 두 사람은 아는 사이가 되었고, 시몬은 예수님의 능력에 이미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마르코는 그 순서를 다르게 보도하고 있는 바, 소명사화(1,16-20)가 먼저고 장모치유(1,29-31)는 그 다음이다. 이 점이 바로 마르코에 없는 자연이적 사화를 루가가 곁들인 이유이다. 천직(天職)이 어부였던 시몬이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능력 앞에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였던 시몬이 예수께 떠나달라면서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한다.(8절) 예수께서는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는 시몬 베드로를 제자로 불러‘사람 낚는 어부’로 삼으신 것이다. 예수와의 직접적인 대면에서 베드로는 예수께 대한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경험한다.
이는 신비를 경험한 인간의 통상적인 태도이다. 매혹이 강하면 예수를 따를 것이고, 공포가 강하면 예수를 버릴 것이다. 비록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고자 예수를 따라 나섰지만, 매혹과 공포의 양면적 압박은 늘 베드로를 따라다닐 것이다. 신앙이란 아마 매혹과 공포의 양면적 여정이 아닌가 싶다.......◆
<밤새도록 애썼지만>(루가 5,1-11)
-유광수 신부-
교회란 무엇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몰려온 군중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해주는 곳이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싶으면 교회에 와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 일을 하는 것이 교회이다.
교회가 말씀을 전하는 것을 복음 선포라고 하고 또는 사도직이라고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갖은 사람들이다. 언제 어디에서든 자기에게 몰려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 주어야 한다.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할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일이다. 이 일은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오늘 복음은 교회가 또는 내가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예수님은 어부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러 나갔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채 허탈한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는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타고 있는 배는 교회를 상징한다. 그리고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라는 말은 권위 있게 가르치시는 스승의 모습을 말한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곳이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앞으로 사도로서 복음을 전해야 할 시몬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라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 아니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도록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훈련시키신다.
우선 예수님은 시몬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하고 이르셨다. 이 말을 듣고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분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하고 대답하고 이어서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묵상할 것이 많이 있다.
첫째, 똑같은 장소, 똑같은 도구(배, 그물), 똑같은 사람이 고기를 잡았으나 결과는 너무 달랐다. 한쪽은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하였고 또 다른 한쪽은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쪽은 허탈감, 빈곤함, 절망감이 감돌았고 다른 한 쪽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의 풍요로움, 일한 보람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넘치는 분위기였다. 다시 말해서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도구를 가지고 똑같은 장소에서 고기를 잡았지만 한쪽은 빈곤함과 허탈감이요 절망감이었다면 다른 한 쪽은 풍요로움과 기쁨이 가득찼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오게 하였는가?
어떻게 하면 열심히 일했지만 결과가 비참해지고 빈곤함만 남게되고 어떻게 하면 생각하지 못한 많은 풍요로움을 가져오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가? 그 차이가 무엇인가? 그 비결은 지극히 간단하다. 즉 복음을 전한다고 할 때 인간적인 노력과 인간적인 방법에 의존하는? 아니면 말씀에 의존하는가? 에 달려 있다.
시몬과 그의 동료들은 어릴 때부터 어부로서 살았고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른 일은 몰라도 고기 잡는 일만큼은 자기들이 자신있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으로 먹고 사는 직업인들이다. 그러니까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그 누구의 도움이나 의견을 들을 필요없이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반대로 이번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물을 내리었더니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다는 것이다.
무엇을 말하는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인간적인 노력과 방법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적인 노력을 많이 해도 말씀이 없으면 또 말씀대로 하지 않고 자기 노력과 방법대로 한다면 아무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것이다. 복음선포는 나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말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시몬과 그의 동료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을 때에 오는 절망감, 허탈감, 피곤함, 공허함 등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모든 것들이 비극이요, 부정적인 상황들이지만 그것은 또한 예수님을 알아보고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게 하는 은총의 시간이고,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이다. 만일 시몬과 그의 동료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시몬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지도 못하였을 것이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보고 무릎을 꿇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셋째,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할 때 그 결과는 비참해진다는 것이다. 시몬과 그의 동료 어부들은 장차 사람낚는 어부들이 될 사람들이다. 고기잡는 일이 그들의 일이 아니라 사람들을 낚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사람낚는 어부로서 살아가지 않고 고기 잡는 일에 매달릴 때 그 결과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쓰라린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사람은 복음을 전할 때 기쁨을 맛보고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넷째, 복음을 전하는 일은 믿음의 행위이지 인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예수님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시몬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고 했을 때 "스승님의 분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물을 내렸다는 것은 믿음의 행동이다.
우리 같으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물을 내리겠는가?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일로서 쉽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스승님의 분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하고 그물을 내렸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주님께 선택받은 사람들
J. 밀턴은 '아레오빠지데카' 라는 글에서 "신이 인간에게 이성을 주었을 때는 자유의지를 준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해오면서 사람을 선택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크게는 나라 일인 대통령, 극회의원 선택에서부터 작게는 기정일인 친목회 회장 선택까지 집단체일 경우는 항상 사람을 선출하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뽑을 때, 성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8장에 보면, 이드로가 모세에게 이런 사람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① 재덕을 겸비한 자 ②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자 ③진실무망한 자 ④ 불의한 이(利)를 미워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면에서 보면 건강한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육체든 정신이든 건강해야 합니다. 보건복지부에서 정신과 의사 100명의 추천을 받아 작성한 건강 10가지 수칙을 보면 이렇습니다. ① 긍정적으로 세상을 본다. ②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③ 반갑게 마음에 담긴 인사를 한다. ④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한다. ⑤ 누구라도 칭찬한다. ⑥ 하루 세끼 맛있게 천천히 먹는다. ⑦ 약속시간에는 여유 있게 가서 기다린다. ⑧ 일부러 라도 웃는 표정을 짓는다. ⑨ 원칙대로 정직하게 산다. ⑩ 때로는 손해볼 줄을 알아야 한다. 괜히 이리저리 휩쓸리고 군중심리나 개인친분도, 연고나 지역 감정적으로 선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믿는 자에게 큰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제자들을 선택할 때에 어떤 사람을 택하였나 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이런 사람을 택하여 쓰시는 것입니다.
1.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거니시다가 고기를 잡는 어부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 또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각기 그물을 던지거나 그물을 손질하는 중에 있었습니다. 즉 열심히 자기 일에 충실하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1) 인간은 역할적 존재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일거리가 있습니다. 그 일을 해야 합니다. 크든 작든 중요하든 소홀하던 간에 자기 일이 있는데 그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자는 큰 일에도 충실합니다.
(2) 일거리가 없는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일거리가 없는 사람은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자기가 일을 싫어해서 일을 안 하는 사람이거나 다른 하나는 남이 일거리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야 어떻든 간에 이런 사람은 누구에게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대체로 게으르거나 책임감이 없는 사람입니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3) 자기 일에 충실하면 인정받습니다.
디모데오1서 3장 13절에 "보조자로서의 직무를 잘 수행한 사람은 훌륭한 지위에 오르게 되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에 더욱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고 했습니다. 교회나 직장이나 사회가 일반입니다. 자기 일을 잘하면 더 좋은 일, 더 큰일 , 더 중요한 일을 맡겨주십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불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두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들은 자기 일에 충실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시고 더 주셨습니다(마태 25,28).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계속 쓰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명령을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종교학자는 인간론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명령은 신의 최초의 법이다." 마태 4,19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이 말씀은 법이요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따라야 합니다.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은 두말없이 이유없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성경 속에 하느님을 순종하고 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성공하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공통점이 세 가지 있습니다.
(1) 즉시 따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즉시 따랐습니다. 나귀 주인은 주가 쓰시겠다 할 때 즉시 보냈습니다(마태 21,3).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드리라고 하니 즉시 모리아 산을 향해 나갔습니다. 하느님을 순종하는 것은 시각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은 모두다 하느님을 순종하는데 지혜로운 사람은 미리 순종하는 것입니다.
(2) 믿고 순종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따랐지 그 말을 못 믿으면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믿음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버리고 순종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배를 버리고 따랐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따라갔습니다(창세 12,1). 사람이 인정 버리지 못하고 미련 버리지 못하면 결국 그것 때문에 올가미가 되어서 순종하는 복을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새사람이 되었으면 옛사람의 습관과 성격을 버려야 합니다.
순종하지 못하던 사람이 순종하고 이것저것 따져보고 이유 많던 사람이 믿고 버리고 순종하여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3. 과감한 결단의 사람을 쓰십니다.
R. 데카르트는 인간생활에 있어서 최대의 해악(害惡)은 결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은 누구를 쓰시느냐 하면 결단을 내리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니엘도 이사야도 결단을 내린 사람들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오로도 결단의 사람이고 베드로 역시 결단을 내린 사람이므로 주님께서 크게 쓰시려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결단은 몇 가지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1) 머뭇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럴까 저럴까? 할까 말까? 갈까 말까? 하며 따져보고 생각해 보고 계산해 보고 눈치보고 머뭇거리다가는 결단의 기회를 놓치고 말 것입니다. 어부들은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결단을 내렸습니다.
(2) 과감히 해야 합니다.
어부가 직업을 바꾼다는 것은 진짜 어려운 일입니다.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도 없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돌봐주는 이도 없습니다. 그래도 담대하게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습니다.
(3)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배와 그물을 버린다는 것은 물질적 손실입니다. 이것 감수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사람이 현재만 보고 장래를 내다보지 못하면 현재의 손실에 얽매이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더 큰 일을 하지 못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법입니다(요하 12,24). 한 알의 희생을 아까워 맙시다. 희생은 하나를 잃는 것이요, 그 결과는 30이나, 60 또는 100을 얻는 것입니다.
(4) 비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상식 선에서 보면 직업 버리고 부모 버리고 가정 버리고 배버리고 떠나면 반드시 비난의 화살이 오게 될 것입니다. 과감하게 결단하는 사람은 비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큰일하는 사람을 보면 이런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베드로가 루가복음 18장 28절에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하자, 주님께서 뭐라고 하신지 아십니까? 29-30절에 "나는 분명히 말한다.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의 상을 받을 것이며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왕이면 주님께 나도 선택받아 쓰임 받는 자가 됩시다. 기왕이면 직장에서 사회에서 큰 일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일에 충실해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신의 법인 하느님의 명령을 순종합시다.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비난도 희생도 손해도 각오하면 한 만큼 비례하여 여러 배의 축복을 받게되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
[두올묵상팀]
|
첫댓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때는 이미 죄인이 아닙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면 그때부터 하늘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