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9월 14일 수요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이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찾게 되었다.
황제는 335년에 이를 기념하는 대성전을 예루살렘에 지어 봉헌하였다.
이후 십자가 경배는 널리 전파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9월 14일로 이 축일이 고정되었다.
☆☆☆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3,13-17)
Just as Moses lifted up the serpent in the desert,
so must the Son of Man be lifted up,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may have eternal life.”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백성은 고달픈 광야 생활에서 오히려 이집트의 종살이를 그리워하며 모세에게 불평한다. 주님께서 불 뱀을 보내시자 백성은 모세에게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살게 한다. 하느님의 뜻을 거역할 때 죽음이 오지만,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주님 뜻을 따를 때 생명이 온다(제1독서). 성경에서 뱀은 죄와 죽음을 상징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죄와 죽음의 상징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쳐다보며 생명을 얻었듯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구원을 얻는다. 죄와 죽음을 올바로 바라볼 때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을 얻는다(복음).
☆☆☆
오늘의 묵상
뱀은 옛날부터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데, 『성경』에 등장하는 뱀은 하느님과 적대적인 존재로 죄와 죽음을 상징하는 부정적인 동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뱀은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동물이고 하느님을 거슬러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죄로 저주를 받아 평생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어야 하는 가련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창세 3,1-15 참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싫다며 불평불만을 할 때도 불 뱀이 나타나 사람을 물어서 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자 모세는 하느님 말씀대로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습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기둥에 매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고 다시 생명을 얻었습니다.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죄와 죽음의 상징인 뱀의 형상을 쳐다봄으로써 생명을 다시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보기에도 끔찍한 십자가는 죄와 죽음의 형상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운명에 놓인 사람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생명을 얻고 구원됩니다.
이냐시오 영신 수련 피정을 할 때면,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깊고 무거운지를 살핍니다. 그리고 마치 광야에서 구리 뱀을 쳐다보듯, 십자가의 주님을 관상하며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와 죽음의 고통을 대신 품고 계신 주님의 큰 사랑을 만나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였지요.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우리의 부끄러운 죄 너머에 주님의 은총 또한 풍성히 쏟아지고 있습니다. 단 하루도 죄짓지 않고 살 수 없는 우리지만 주님 십자가로 이렇게 숨 쉬며 살 수 있습니다. 원망의 눈물은 우리를 슬픔 속으로 더욱더 몰아넣지만 회개의 눈물은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니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생명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세상에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분에게서 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시며,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은 끝에 가서는 모두 그분께 되돌아갑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이 그분께 돌아가지 않으려 하며, 그분의 뜻에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린 사건’은 민수기에 나옵니다. 광야 생활에 싫증을 느낀 백성은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고생이 싫었던 것이지요.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
십자가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큰 십자가는 성당에 있습니다. 작은 십자가는 집에 걸어 둡니다. 목걸이와 반지에도 십자가를 새깁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모든 것은 장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을 그저 바라보고만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몸소 부르시고 찾아오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때가 차자 당신의 외아드님을 인간에게 보내십니다. 그것은 당신의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아드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드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당신 사랑의 표현입니다. 거룩하신 아드님께서 지고 가시고 못 박히신 십자가는 곧, 인간을 위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내어놓으실 수 있는 아버지의 대자대비하신 마음의 발로(發露)입니다.
보잘것없는 양식은 ‘만나’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매일 아침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적의 음식’이었습니다. 눈처럼 ‘하얀 만나’가 내려앉으면, 백성은 집으로 가져가 음식으로 만들어 먹었습니다. ‘눈과 입으로’ 체험하는 매일의 기적이었습니다. ‘만나’가 없었더라면 그들은 살 수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음식이 지겹다고 합니다. 기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깨우치시고자 시련을 내리십니다. ‘뱀’이 나타나 사람들을 해친 겁니다. 백성은 그제야 기적의 고마움을 깨닫게 됩니다. 모세는 구리로 만든 뱀을 기둥 위에 매달고, 그것을 바라보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뱀에게 물렸는데 ‘구리 뱀’을 쳐다본다고 어떻게 낫겠는가? 고통 속에서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모든 시련에는 주님의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내 생각만 내세우면 그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주님의 목소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구리 뱀’ 이야기의 교훈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시련입니다. 억울함입니다. 마침내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합니다. 누군가를 위한 희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십자가를 모셔 두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삶은 방황합니다. 왜 이 고통을 주시는지, 어찌하여 이러한 시련에 부대껴야 하는지 불평하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의 민수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 생활에 싫증을 느낍니다. 보잘것없는 음식과 계속되는 여정에 넌더리를 내며 항의합니다. 고생하며 ‘시달려야 하는 이유’를 몰랐던 것이지요. 그러자 ‘불 뱀’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불평하는 이들은 뱀에 물려 죽어 갔습니다. 사람들이 뉘우치자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달아 올립니다. 그것을 쳐다보는 이들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민수 21장 참조).
우리 역시 십자가를 보면서 힘을 얻습니다. 삶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은총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하루에도 여러 번 십자 성호를 그으며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삶의 중심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최영균 신부-
‘믿음’은 복음서의 중심 개념입니다. 복음서의 두 가지 큰 계명은 바로
‘믿음’과 ‘사랑’입니다. 믿음은 구원과 관련된 조건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동의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신뢰와 일치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운명에 자신의 삶을 기꺼이
동참할 각오를 하는 것이요, 그분의 어려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향과 노력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원하시지 않으면 누구도
예수님께 올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주도로 하늘에 공덕을 쌓고 성스러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이런 노력들이 하느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가 기도하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느님의 크나큰 선물이라는 것을
겸손되이 알아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 자유로운 십자가 선택
-김찬선신부-
오래 전의 얘깁니다.
백 종순 안젤로 수사님이 살아계실 때의 얘기지요.
정동 교육회관 성당의 십자가는 십자가가 없는 십자가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몸만 있고
예수님이 매달려 있어야 할 십자가는 없습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십자가가 없느냐는 수사님의 지적에,
예술 작품이니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고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말씀드렸는데
오늘 새삼스럽게 그때 생각이 나고
이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영어에는 "Cross"란 말이 있고, "Crucifix"란 말도 있지요.
Cross는 원래 예수님이 달려있지 않은 십자가이지만
Crucifix는 예수님이 못 박혀 있는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십자가는 어떤 것입니까?
Cross입니까, Crucifix입니까?
영어로는 오늘이 "Exaltation of the Holy Cross"축일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축일인데 “거룩한” 십자가의 축일입니다.
십자가는 절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기는커녕 죄인들을 매달던 죽음의 형틀이며
인간이면 누구나 끔찍하게 생각하는 저주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저주스런 것이 거룩한 것으로 바뀌었습니까?
모든 사람이 기피할 때는 저주스런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선택하여 매달리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피할 때는 죽음을 가져오는 저주스런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선택하심으로 생명을 가져오는 것이 됐기 때문입니다.
실상 누가 십자가를 선택하겠습니까?
억지로라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그것도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도 지지 않을 십자갑니다.
요즘의 감성세대는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피할 수 있어도 십자가를 선택합니다.
이렇게 해서 사랑=자유로운 십자가 선택이라는 등식이 나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죽음의 형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선택하는 순간 자유로이
당신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자들과의 별리도 선택한 겁니다.
십자가를 선택하는 순간 자유로이
천대와 모욕, 조롱과 멸시도 선택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선택하는 순간 자유로이
못과 창으로 인한 5상만이 아닌
당신의 사랑과 선이 배반과 저주로 되돌아오는 상처도 받았습니다.
다 그럴 줄 알고 사랑으로 자유로이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르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 아니고
다 그럴 줄 알고 자유로이 선택하였기에
십자가 위에서 죽음이 죽고 모든 악이 사라졌습니다.
세 청년이 불가마 속에 있었지만 불이 털끝도 건드리지 못한 것처럼
제자들이 배반하였지 주님은 배반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모욕하고 조롱하였지
주님은 모욕당하지 않고 조롱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상처를 주었지 주님은 상처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죽였지 주님은 죽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요,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는 십자가의 이치를 우리에게 깨우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제 십자가에 달려 그리스도와 함께 죽게 하셨습니다.
새순이 돋는다 - 김정미 수녀- 어느 날 한 아이가 경찰과 함께 쉼터에 왔다. 거리에서 지낸 십대 청소년들이 겪는 그리고 겪을 수밖에 없는 삶의 과정을 치룬 아이의 모습은 그만한 때의 어리고 앳된 소녀의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십자가, 새 인생이 시작되는 희망의 자리> -양승국신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정말 중요한 숙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십자가가 지닌 제대로 된 의미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십자가가 담고 있는 신비를 깨닫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이루어지고 나면 참으로 놀라운 은총 뒤따르는데, 그것은 바로 고통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신앙인,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당당할 수 있는 신앙인, 무거운 삶의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은총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정확한 개념 파악이 이루어진 사람의 하루하루는 매일이 천국으로 변화됩니다. 삶은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찬 경이로운 일상으로 변화됩니다. 매일 만나는 주변 사람들은 아름다운 하느님의 모상으로 거듭납니다. 십자가에 높이높이 매달리셨던 예수님, 사람들은 그의 몰골을 보고 기막혀했습니다. 너무나 끔직해서 혀를 내둘렀고, 치를 떨었습니다. 다들 철저한 실패의 인생으로 단정했습니다. 완벽한 패배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합니까? 예수님께서 매달리셨던 십자가는 더 이상 실패와 절망, 낙담과 좌절의 자리로 여기지 않습니다. 더 이상 십자가는 인생 종치는 자리, 삶이 끝나는 막장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보다 십자가는 새 인생이 시작되는 희망의 자리, 쇄신과 거듭남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새 출발의 자리, 작은 죽음을 통해 더 큰 생명을 획득하는 은총의 자리, 한 사람의 희생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축제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거의 완벽하게 이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람들은 곧 도래하실 메시아에게서 기대했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 모습은 다름 아닌 능력의 메시아였습니다. 권능의 메시아, 힘의 메시아, 정치적인 메시아, 암울한 현실로부터 해방시켜줄 승리의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예수님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그 모습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모습,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곳에 서 있는 낮은 자의 모습,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이의 모습, 결국 십자가 위에 높이 매달리신 가장 슬픈 모습의 메시아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앙을 이해하기 위한 최종적인 열쇠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살아가시면서 신앙의 의혹이 들 때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셔야 합니다. 신앙생활 해나가시면서 여러 가지로 이해 안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셔야 합니다. 정말 억울한 일, 정말 기가 막힌 일을 겪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역시 어쩔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셔야 합니다.
하지만 저의 상상과 달리 저는 단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배 멀미를 때문이었습니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도 아파오면서 배 위에 서 있기도 힘들었습니다. 결국 처음에는 빨리 배 타고 나가서 많은 고기를 잡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잠시 뒤에는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은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부님께서 멀미약은 먹었냐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도 멀미를 많이 하시는데, 귀에 멀미하지 않는 약을 붙이고 또 마시는 멀미약까지 복용한 뒤에는 괜찮다면서 저에게 멀미를 그렇게 하면서도 약을 먹지 않았다고 핀잔을 주시더군요. 하지만 배를 탄 적이 없었던 저는 그냥 일반 차타는 것과 똑같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배 멀미도 하지 않을 줄 알았던 것입니다.
만약 배 멀미만 하지 않았다면, 저는 고기를 낚으면서 최고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배 멀미 때문에 최고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지요. 그리고 멀미약을 먹는 등의 준비를 철저히 하는 건데 라는 후회만 안고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몇 년 전의 이 일이 기억나면서 우리 신앙인들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이 십자가에서 죽음도 당하셨습니다. 또 우리들에게 이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 많은 성인 성녀들이 십자가를 짊어졌고, 그 결과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큰 영광을 누리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이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 삶을 살자니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요. 고통과 시련이 그 안에 담겨 있으며, 이 고통과 시련을 참아낸다는 것이 나약한 몸을 지닌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해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마치 배 멀미를 하지 않기 위해서 멀미약이 필요한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에서 겪게 되는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해주시지요.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오늘 십자가 현양 축일을 맞이하면서 내가 짊어질 십자가를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십자가의 영광은 십자가의 고통 없이는 얻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믿음으로만이 극복 가능합니다.
아이의 친엄마는 아이가 두 살 때 친아빠의 오토바이 운전미숙으로 죽었고, 아이는 친척집에 보내졌다가 이미 재혼하여 동생을 둔 친아빠와 계모에게 다시 보내졌다. 계모는 건강이 약하다며 동생과 살림을 돌보는 것은 아이의 몫이었고, 집안일이 다 끝나야 학교에 갔다. 영리한 아이여서 그 상황에서도 공부를 따라가고 성적도 잘 나왔다. 친아빠와 계모는 주중 그리고 주말에 열심히 교회에 나가고, 십일조는 물론 찬양대에서 봉사하며 교회 생활에 헌신적이며 매우 활동적으로 참여한다.
친아빠는 특히 계모의 ‘예민한 신경과 건강’을 위해서도 매우 헌신적이어서 그 세 식구의 모든 뒷바라지는 아이에게 맡기고 버젓한 직장에, 중산층 정도의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중학교를 마치자 친아빠와 계모는 그동안 아이를 ‘충분히’ 보살폈다며, ‘독립심’을 키워주기 위해, 아이를 ‘산업체 특별학교’로 보냈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 몇 시간씩 고등학교 과정을 배우며 공장기숙사에서 지냈다. 월급은 계모가 모아준다고 가져갔다. 아이는 중학교 담임교사도 말렸던 이곳에서 반년을 견뎌낸 뒤, 좌절과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학교를 나와 새로 만난 언니 오빠들과 거리 생활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경찰에 의해 쉼터로 오게 되었고, 건강검진에서 임신 초기임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자기가 임신한 사실도 몰랐다. 학교는 자퇴처리되었고, 휴대전화 요금이 밀려 있었다. 여러 각도의 상담과 숙고 끝에 아기를 낳아, 입양시키기로 어려운 결정을 한 후 아이는 스스로 담배를 끊었다. 시간제 일을 하며 휴대전화 연체료 갚을 돈을 모으고, 대입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아이는 무섭게 집중하며 자신의 미래를 준비해 갔다. 아이의 친아빠와 연락을 하여 가족상담도 시작했다. 친아빠는 중산층 보통 가장의 모습으로 나타나 아이의 결정을 매우 기뻐했다. 자신은 ‘아이를 위해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정신적 지지자로 남겠다.’며 아이의 어떤 재정적 지원이나 함께 사는 데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자신에겐 돌보아야 할 ‘예민한’ 부인과 딸, 장모, 장모의 모친이 있다고 했다.
친아빠의 넉넉한 재산과 고정수입으로 인해 아이는 학업지원·의료지원 등 당시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회복지 지원을 하나도 받을 수 없었다. 친아빠는 아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충분히 양육했으며, ‘산업체학교를 자퇴한 것은 아이의 선택’이었고 그 이후도 아이의 선택으로 사는 것이니 부모로서 책임을 다한 것이라 했다. 그리고 자신은 ‘언제나 아이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아이는 연체료를 다 갚고, 대입검정고시를 치르고, 열흘 뒤 아기를 낳아 입양시켰다. 아이는 아기를 보내며 “아가, 미안하다. 네가 미워서 너를 보내는 것이 아니고, 엄마가 지금은 너를 돌볼 수 없기 때문이야. 사랑한다.”고 말했다. 아기를 보내고 아이는 우울증과 탈모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목표로 한 대학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이번에는 대학입학 준비를 위해 몇 달간 전일제 일자리를 찾았으나 어린 나이에, 시설에 살며, 검정고시 출신자로 전일제 자리는 어려웠다. 삶의 고비를 만날 때마다 아이는 그동안의 삶의 경험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무기력과 우울로 빠지려해서 아이에게 또 다른 목표와 동기가 필요했다.
아이는 ‘어떤 시기에는 엎어지고, 어떤 시기에는 다시 일어나 걸으며’ 자신의 삶의 조건을 끊임없이 개척하고 극복해 나가야 했다. 이는 아이의 친아빠가 ‘그것은 아이의 선택이고, 아이의 책임이다. 나는 정신적 지지자로 아이를 위해 언제나 기도한다.’는 말로 어린아이에게 지울 당연한 대가나 처벌은 아니다. 도리어 아이는 친아빠와 그 가족의 짐을 대신 고스란히 홀로 지고 걷는 것이다.
아이는 지금 시간급이 좀 더 높은 야간 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이번 학기에 다시 복학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그 아이한테서 나는, 죽은 십자나무에서 새순이 돋는 생명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본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사랑과 고통의 변증법 -김찬선신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며 문득 30년 더 된,
그래서 까맣게 잊고 있던 군대 일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하사로 군 생활을 했습니다.
원해서 하사가 된 것이 아니라
신체 건강하고 대학 나왔다고 하사로 뽑힌 것입니다.
그런데 하사가 된다는 것은
큰 고통을 겪어야만 되는 것이고,
그래서 불행하고 운이 없다고 여겨지던 것이었습니다.
똑 같은 기간 군대 생활을 하는데
자기보다 군 생활을 조금 한 사람이 상급자가 되는 것을
상병이나 병장이 받아들이기 힘드니
졸병들을 시켜 어떻게 해서든지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의 괴로움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저의 선배 하사한테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매일 밤, 1-2시 쯤 술 먹고 들어와서는
잠자고 있는 저를 깨어 두들겨 패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6개월을 그러하니
맞지 않으면 잠자리가 편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왜 하사가 되어가지고 병들한테 잘 해주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병들한테도 존댓말을 쓰고
한 번도 상급자로서 대우를 받으려들지 않고 시키지도 않았으며
가끔 하사들과 병들 사이에 패싸움이 벌어지면
저는 하사들 편에 서지 않고 가운데서 뜯어말렸습니다.
그러니 저의 선임인 하사가 볼 때는 형편없는 하사였던 것이지요.
계속되는 구타에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였지만
그래도 제가 꺾이지 않으니 6개월 쯤 되어서는
그 선임 하사가 저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다른 부대로 전출되었습니다.
이때 이후 저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군 생활 14 개 월 만에 내무반장이 되었는데도
병들이 저의 지휘를 잘 따라주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제가 제대할 때
그 선임 하사가 일부러 찾아와 저에게 사과를 하고
사실은 저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에 왜 이 이야기를 길게 했느냐 하면
고통은 승리하였을 때 현양 받는 것임을 얘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심리학에서 새디즘과 매조히즘이 있습니다.
가학적 또는 피학적 성 도착증을 말함이지요.
그런데 십자가 현양은 고통을 받을 때 쾌감을 얻는
이 피학대성 만족과 다릅니다.
십자가를 현양하는 사람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고통이 싫습니다.
고통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다른 점이며
자기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고통을 기꺼이 받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사랑 때문에 기꺼이 고통을 받고
사랑 때문에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통에 굴복하지 않는 自己愛가 있는 것이며
고통보다 더 강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해도 삶은 살 가치가 있다고 자기 삶을 사랑하는 것이요
고통 다음에는 반드시 고통도 어쩌지 못하는
자유로운 부활의 경지가 있음을 믿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고통 때문에 인생이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 때문에 인생이 더욱 찬란해지고
사랑이 자라는 것임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과 고통은,
사랑은 고통을 감수하게 하고
고통은 사랑을 자라게 하는,
변증법 관계입니다.
희생이 일치를 이룬다
-전삼용신부-
저희 집은 오산 비행장 바로 옆이었기 때문에 항상 비행기의 굉음을 들으며 자라야했습니다. 다른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말하곤 하지만 저희 어머니는 저를 비행장 철책에 걸려있는 것을 가져왔다고 하셨습니다.
어렸을 때 물론 이런 말이 농담인 것을 알면서도 가끔 심하게 야단을 맞으면, ‘정말로 나는 주워온 아이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또한 제 이름을 ‘삼용’이라고 귀하지 않은 이름으로 지어주신 것을 비롯하여 많은 아버지들이 그렇듯이 표현을 잘 안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시기는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가끔씩 들 때도 있었습니다.
이럴 때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께서 저희를 위해 고생하신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어머니가 하루 종일 남의 밭에 나가 품을 팔 때, 우유와 빵을 간식으로 받으면 그것을 드시지 않으시고 잘 두셨다가 일 끝나고 돌아오셔서는 가게 하나 없어 군것질을 하지 못하던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저는 그 때 먹었던 우유와 단팥빵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또 어머니는 생선 머리만 맛있다고 드셨습니다. 물론 생선의 머리가 가장 맛있기는 하지만 풍족하지 못한 양 때문에 몸통은 우리를 주시고 머리만 드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삼겹살을 구워주셨는데 어머니는 배가 부르다며 우리가 드셔보라고 드리기 전까지는 입에도 대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때는 어머니의 그 맘도 모르고 우리가 다 먹어 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골에 살 땐 저희 집이 비만 오면 잠기는 그런 동네에 있었는데 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던 아버지는 가족을 생각하며 사람들이 말리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생명을 무릅쓰고 불어난 냇가를 헤엄쳐 집에 돌아오셨습니다.
아버지는 지금도 다리를 저시는데 그 이유는 우리를 위해 겨울에도 일을 하시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지셔서 허리를 다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몸으로도 우리를 위해 계속 일을 하셨습니다.
아무리 부모님께서 우리에게 싫은 소리를 하신다고 하더라도 이런 기억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태어날 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사랑의 희생들을 바라보며 부모님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희생은 사람을 갈라지지 않게 연결시켜주는 접착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오늘 저를 찾아오신 한 형제님께서 미사시간에 특별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외우는 ‘하느님의 어린양’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청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받기 위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구약을 이해한다면 즉각적으로 ‘아! 우리 죄를 위해 피를 흘리고 돌아가셔야 할 희생제물이 오시는구나!’라고 이해해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어린양은 구체적으로 탈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게 했던 희생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전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어린 양을 희생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하늘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로 자신의 옷을 깨끗이 빨아 빛나는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베드로 1서 1장 19절엔 이스라엘 백성이 죄로부터 해방 된 것은 “어린양의 피”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미사 때,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어린양의 가장 명확한 의미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흠도 티도 없는 “속죄 제물”을 의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인류의 죄를 위하여 희생되기로 준비되어 계셨지만(1베드 1,20), 그 완성은 당신이 깨끗하게 만드신 인류와 혼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아담이 옆구리에서 피를 흘려 하와가 탄생하였고 둘이 한 몸이 되었듯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와 교회가 탄생하였고 그 교회와 한 몸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성경의 시작이 이 아담과 하와로 시작되지만 성경의 끝은 두 번째 아담과 하와인, 죽임을 당하신 하느님의 어린양과 교회, 즉 천상 예루살렘과의 혼인잔치로 끝맺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 창조 때부터 계획된 커다란 창조와 구원의 계획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셔야 함을 예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 영원한 생명이란 바로 우리가 나온 원천인 그리스도와 혼인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영원하시기에 사람이 되신 하느님과 한 몸이 되지 않고서는 누구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연 피를 흘리는 희생적 사랑은 갈라졌던 관계를 하나로 이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당신과 하나로 연결시켜 주시되 하느님만이 지닌 영원한 생명까지도 누리게 해 줍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을 믿어야 하듯이, 십자가도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임을 믿어야합니다.
많은 교회 간판에,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씌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글로 표현하지 않고 십자가로 보여줍니다. 우리를 위해 고생을 하신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겠습니까?
주님 현존을 두 눈으로 보아라
십자가를 통한 영광과 구원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분들이 순교성지인 이곳에 성지 순례를 오십니다. 하지만 갑곶성지의 경당은 많이 좁기 때문에, 오시는 순례객들의 수에 따라서 경당에서 미사를 하기도 하고 아니면 야외에서 미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의 일이었어요. 전화를 통해서 순례객들의 수가 150명 정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야외에서 미사를 해야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경당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최대 인원이 150명이거든요. 더군다나 이분들만 오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야외에서 미사를 해야만 했었습니다. 힘들다고 불평불만을 던지지 맙시다. 그 힘든 순간에 주님의 영광도 함께 옵니다. 빠다킹 신부
십자가를 들어높이기 위하여 -강영구신부-
십자가의 삶 -조성풍 신부 -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강성덕 목사 -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양승국신부- <인생의 양념, 십자가> 한 인간지에 연재되고 있는 ‘가족 구성원들 간의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과 함께 읽고 있습니다. 결혼이란 것이 둘만 사랑하면 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란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두 사람만의 결합이 아니라, 양 가문의 결합이다 보니 거기서 파생되는 지엽적인 문제들이 상당하더군요. 더 나아가서 결혼이란 것은 전혀 다른 성장 배경이나 환경, 다른 가치관과 사고방식, 다른 의사소통방식을 지닌 두 세계가 만나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했습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란 말도 있지만, 그에 앞서 두 사람은 서로 완전히 다른 존재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리라 생각합니다. 결혼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습니다. 중년에 접어든 한 가정주부께서는 미숙한 운전 탓에 실수로 자기 집 담벼락을 크게 들이받았다고 합니다. 겨우 정신을 차려 차문을 열고나오니, 굉음에 놀란 남편도 따라 나와서 한 마디 던진 말에 기가 차지도 않았답니다. 당연히 ‘어디 다친 데는 없냐?’고 물어볼 줄 알았는데, 차 범퍼가 많이 부서졌다고 화부터 내더랍니다. 또 다른 어머니는 그 영양가 만점인 ‘시금치’를 싫어한답니다. 왜냐하면 평생 시어머니, 시누이, 시동생들로부터 시달림을 받다보니 ‘시’자로 시작하는 단어만 보면 갑자기 긴장되고 주눅이 든다는 것입니다. 아내 되는 분들의 스트레스 받는 내용만 소개해드렸는데, 남편들께서 겪는 소외감, 허탈감, 공허함도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맞아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자가는 의외로 우리 삶 가까이 존재한다는 사실. 특히 가족구성원들이 가장 무거운 십자가일 수도 있다는 사실. 가족 구성원들 마음 안에 독버섯처럼 자리한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마음, 상대를 무시하고 상대의 기를 반드시 꺾어놓고야 마는 완고한 마음, 고통이나 십자가를 분담하려하지 않고 상대방에게만 전가하려는 이기적인 마음이야말로 십자가 중의 십자가란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네 인생은 동화 속처럼, 인테리어 잡지에 실린 사진처럼, 고상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행복한 순간이 다가오기도 하지만 한 순간입니다. 그리고는 다가오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 삶은 십자가의 연속입니다. 한평생 십자가로 점철된, 계속되는 십자가의 고리로 연결된 십자가의 나날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인생에 있어서 십자가는 기본으로 여기는 넓은 마음, 십자가는 우리의 단조로운 나날을 재미있게, 활기차게, 맛있게 만드는 양념과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넉넉한 마음이 중요합니다. 때로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가 너무 커서, 너무 기가 막혀서 고달플 때 기억할 말이 여기 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그것보다 더 좋은 묵상은 없습니다.” “슬픔은 그 누군가의 더 큰 슬픔을 통해서 치유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십자가 역시 그 누군가의 더 큰 십자가를 통해 해결되고, 이해되며, 극복됩니다. 그 누군가의 십자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매달리신 십자가입니다. 오늘도 등에 지워진 십자가의 무게로 휘청거리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새로운 탄생과 영원한 생명, 구원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수단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구원의 여정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정은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신 십자가 상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수용하고, 믿고, 그분을 따름으로 완결됩니다.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 십자가상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 십자가에 담긴 진리를 깨치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새로이 태어난 사람이고, 구원의 길을 열심히 걷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은총, 사랑과 용서의 상징인 십자가 (민수 21,4-9) -경규봉신부- 왜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을까? 여기에 하느님의 심오한 뜻이 있다. 그것은 불뱀을 없애기만 하신다면, 이미 불뱀에 물린 사람은 모두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물린 사람들도 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살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함으로써 하느님을 보다 깊이 믿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일반적으로 뱀에 물리면 물린 자리 위쪽으로 독이 퍼지지 않도록 묶은 다음, 십자로 물린 자리를 칼로 째고 독을 빨아내는 것이 상식이다. 그래서 뱀에 물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모세가 구리뱀을 바라보면 살 수 있으니까 구리뱀을 바라보도록 열심히 설명하고 권했지만, 믿음이 없고 인간적인 생각에만 사로잡힌 사람들은 모세의 말을 믿지 않고 구리뱀을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고집대로 물린 자리 위를 끈으로 묶고 상처를 째고 독을 뽑아내다가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더라도 모세의 말을 따른 사람이나 믿음을 가지고 모세의 말을 따른 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나는 체험을 했을 것이다. 백성 가운데에는 전혀 물리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한 번 물린 사람도 있을 것이며, 여러 번 물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번 물린 사람은 한 번 구리뱀을 바라보고 살아났을 것이며, 여러 번 물린 사람 여러 차례 바라보고 여러 차례 살아났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아무 것도 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리뱀을 바라보기만 함으로써 살아난 사람들은 삶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절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또한 여러 차례 물렸다가 살아난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더 많이 체험했을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삶이 곧 은총임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여기서 광야는 인생이며, 이스라엘 백성은 곧 우리 자신이고, 뱀은 죄를 상징한다. 우리는 인생이란 광야에서 죄라는 뱀에게 물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죄로 인한 죽음에서 벗어나 새 생명을 받고 구원되도록 하셨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그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면 다시금 새 생명을 받고 구원되어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새 생명을 받고 다시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곧 구원의 상징이며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의 상징이다.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보내면서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시어 은총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자. 비록 많은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용기를 갖고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가자. 그리하여 나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 오늘은 ‘큰’ 십자성호를 긋자.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진리를 행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배광하신부-
보라, 십자나무
보라
신구약 성경 강의록을 만드는 과정에서 구약의 가장 중요한 말씀을 나름대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구약성경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 사건입니다.
그런데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인간에게 동반자로 곁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대변해 주는 말씀으로 창세기의 야곱에게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교활하고 세속적 욕망과 집착이 강했던 사기꾼 야곱은 형의 복수를 피하여 도망갑니다. 그 외롭고 두려운 도피길에서 피곤에 지쳐 잠이 든 야곱의 꿈에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 28, 15)
그런데 복음을 강의하면서 또다시 가엾은 인간과 함께 하신다는 예수님 동행의 말씀에 깊은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
그리고 창세기로부터 시작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긴 사랑의 편지인 성경 끝자락 요한 묵시록에서는 결국 인간을 떠나지 못하시는 절절한 하느님 사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묵시 21, 3)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찾아낸 하느님 인간 동행의 말씀은 공교롭게도 모두 “보라”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보는 것에서 시작되는 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하루에 151권의 책 분량에 해당하는 정보를 오감을 통해 받아들이고 처리한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시각을 통하여 83%, 청각을 통하여 11%의 정보를 처리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눈을 주신 까닭은, 눈을 통하여 당신의 위대한 업적과 창조의 놀라움을, 그 안에 인간을 위하시고 사랑하시는 현존을 ‘보라’하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보게 되면 세상은 온통 기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가득 찬 기적 안에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볼 수 있도록 만드신 그 은총의 눈을 우리는 감고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성경의 모든 증언을 통하여 하느님의 동행, 현존을 보았습니다.
때문에 모세는 단호히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주님께서 하신 이 모든 위대한 업적을 두 눈으로 보았다.”(신명 11, 7)
살아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을 향한 희망의 여정에 실패한 까닭은, 그들이 보았던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온갖 불평불만을 일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를 비롯한 탈출 1세대들은 가나안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보고도 보지 못한 의심의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실패한 구약의 불뱀 대신 신약의 십자가가 다시금 세워졌습니다. 낮엔 구름기둥으로, 밤엔 불기둥으로 현존하셨던 하느님 구원의 기둥이 십자가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를 대신한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이 십자나무에서 꽃피워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볼’ 것을 호소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다른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보면, 그 안에 구원의 길이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스스로 십자가에 들어 올려 진 까닭을 오늘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 그 구원의 은총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 15)
십자가가 위대한 까닭은, 첫 인간 아담으로부터 죄로 죽은 모든 인간들, 우주의 온갖 고통과 죽음이 이 십자가를 통하여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며 인간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시는 하느님 위로이시며, 고통의 길을 동행하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완성시킴과 동시에 고통과 죽음을 승리로 이끄셨다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때문에 십자가 밑에서 이 모든 광경을 목격한 백인대장을 비롯한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증언하며 말합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 27, 54)
참으로 십자가는 막혔던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 주며, 불신과 증오와 미움으로 얼룩진 인간과 인간을 용서와 사랑으로 연결시켜 주는 생명나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볼 때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조욱현신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 때문에 하느님과 모세에게 반항을 한다. 하느님은 불뱀으로 그들을 벌하시고,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로 하여금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게 하신다. 이 구리 뱀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 민수 21,4-9의 구리 뱀은 사람들의 그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리게 하는 표지였다. 이것이 후에는 우상이 되어 히즈키야 때 다 없애 버렸다.
오늘 복음의 "들린다"라는 말은 십자가에 다리셨다는 뜻이며(요한8,28;12,32), 하늘의 영광에로 돌려졌다는 뜻(사도 2,33;5,31; 필립2,9)으로 이중적인 높임의 뜻이 있는 것으로 서로 분리가 될 수 없다. 우리들에게도 이 십자가가 없으면 아무런 면류관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 모든 인간들이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 십자가를 통한 세상의 구원업적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의 업적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업적은 인간으로 그 아들을 믿고 따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이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에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그분만이 하느님 아버지게 이르는 "길"이다. 이제 그분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우리의 생명, 영혼, 운명 전체를 맡기고 그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게 되면 구원에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분은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그분 안에 가지고 오신 구원의 은총까지도 거절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구원을 거절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고 그것을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결과, 즉 멸망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매 순간의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였다가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회개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이제 우리도 언제나 나약한 의지 때문에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질 수 있으나, 항상 높이 들리신, 즉 십자가와 영광에로 들려지신 주님께로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지고 가는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진정 부활을 체험하며 나 자신이 새로이 태어나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의 완성 즉 구원과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여야 한다. 그 분을 닮는 것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음"을 이루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도 늘 살면서 십자가의 신비를 더 깊이 체험하여 구원의 은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용감히 전할 수 있는 용기와 은총을 구하자.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답니다. 야외에서 미사를 할 경우, 뜨거운 햇빛을 피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천막을 치면 되는데, 이 순례객들은 주로 연세 드신 할머니들이라서 천막을 칠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비좁더라도 성당에서 미사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시간이 되었고, 순례객들이 성지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수가 원래 오시기로 했던 150명을 넘어서 170명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다른 본당에서도 많은 순례객들이 오셨습니다. 좁은 경당에 사람들이 서로 자리를 좁혀 가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지요. 그러다보니 점점 더워집니다. 에어컨을 아무리 튼다 하더라도 에어컨 한 대로 200명이 넘는 사람의 체온을 낮출 수가 없더군요.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불평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 순간에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지요.
“여러분이 있는 이곳은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자리에 사랑보다 미움이, 그리고 불평이 가득하다면 어떨까요? 바로 주님의 집인 이곳에 계신 주님을 쫓아내고, 대신 마귀를 초대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많이 덥지요? 하지만 주님의 집에 다른 어떤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미움과 불평은 없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는데 더 열심히 노력한다면, 분명히 여러분은 더 많은 것들을 얻어 가실 것입니다.”
순례객들은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고, 실제로 2시간 동안 불평불만 없이 자리를 지켜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성지에서 떠나실 때, 많은 분들이 제게 이렇게 말씀을 하세요.
“신부님, 오늘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정말로 뜻깊은 하루였습니다.”
고통과 시련. 그 순간이 어쩌면 주님을 맞이하는 순간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그 고통과 시련이 있으면 안 된다고, 그 고통과 시련이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만 기도할 때가 얼마나 많았나요?
오늘은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직접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셨지요. 그리고 이제 우리들에게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는 어떤 것인가요? 그 십자가가 영광의 십자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고통과 시련이 동참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영광만을 갖겠다고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그대에게
여기 예리한 칼이 있습니다.
흉포한 생각을 하는 폭력배는 그 칼로 사람을 해칠 생각을 하겠지요.
일류 요리사는 그 칼로 예술작품 같은 음식을 만들고 싶을 것입니다.
외과 의사는 그 칼로 병든 사람을 살려낼 생각을 합니다.
같은 칼이지만 누구의 손에 들리는가에 따라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본래 십자가는 죄수를 처형하는 죽음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스승 예수님은 사람을 죽이는 도구를 살리는 도구로 바꾸어 놓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는 하느님의 대자비심(大慈悲心)이 나타나는 자리가 됩니다.
십자가의 위에서 아래로 내려뻗는 종선(縱線)은
하느님과 사람이 만나고 하늘과 땅이 맞닿는 자리입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지르는 횡선(橫線)은 사람과 사람, 너와 내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단절로 고립되고 소통(疏通)이 없는 곳에 절망과 죽음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만남의 자리, 소통(疏通)의 자리가 되어 인류에게 구원과 생명을 줍니다.
거룩한 십자가를 현양(顯揚)하려면 예수님처럼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매달려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고
십자가를 통해서 너와 내가 만나 ‘형제자매’라고 부르게 됩니다.
당신의 삶이 십자가를 현양하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초등학교 시절 다음날 수업을 위해 마지막으로 준비하는 것이 연필을
깎는 일이었습니다. 가지런히 깎인 연필을 바라보는 것은 가슴 뿌듯한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연필은 자신의 껍질을 벗어야만 필기구라는
자기 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포기할 때에야 비로소 자신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그런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자아포기를 통해 십자가는 수치스런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영광의 도구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십자고상을 걸고, 십자성호를 긋고, 십자 목걸이를 하면서 그 의미를
새기고 또 전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자아포기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합니다. 어느 날 “나 목말라요!”라고 말하는 부랑인과의
운명적 만남을 통해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요한 19, 28)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떠올린 마더 데레사는 십자가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도 십자가의 삶을 따를 수 있어야겠습니다.
◆오늘은 십자가 현양 축일이다. 개신교회에는 축일이 없다. 그래서 생소하다. 신앙서적을 보면 저자가 자신의 태어난 날이 누구의 축일이라서 세례명으로 그분을 따른다고 말한다. 성인들의 영성이 그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주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것이 부럽다. 우리의 신앙교육에서는 선배들의 좋은 표양을 별로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해서 성인들의 책을 우리 아이들에게 반드시 읽도록 하리라는 것이 오래전부터 품었던 내 계획이다.
나는 십자가와 매우 뜻깊은 만남이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교회라는 곳을 갔을 때 선물로 성서와 십자가를 받았다. 성서는 곧바로 집구석에 처박아 두었지만 십자가만은 지금처럼 늘 품고 다녔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던 기간 내내 십자가는 누군가에 빚진 사람처럼,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상징처럼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결국 교회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새롭게 십자가를 만난 것은 샤를 드 푸코의 글을 읽으면서부터다.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는 끝없이 묵상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예수님보다 낮은 자리에 갈 수 없다는 그의 신념은 곧 나에게 십자가를 따르는 삶의 의미를 새롭게 해주었다.
우리 묵상의 중심에는 언제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계시다.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만들어 손에 높이 들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에 높이 들리셨다. 오늘 복음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 담겨 있다고 강조한다. 이 글을 쓰면서 집 옆에 있는 공소의 십자가를 다시금 바라본다.
십자가 현양 축일에 우리가 읽는 독서는 민수기의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을 광야에서 떠돌아야 했던가! 때로 그들은 이민족에 의하여 공격을 받고 멀리 쫓겨나기도 했고, 때로 그들은 마실 물과 먹을 음식이 없어서 갈증과 굶주림에 허덕이기도 했다. 이집트에서 탈출하기만 하면 곧바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믿었었는데, 광야에서 40년을 떠돌아야만 했으니, 그들의 육적 고통은 물론 심적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이러한 고통으로 인하여 그들이 하느님과 모세에게 대들자 주님께서는 백성에게 불뱀을 보내셨다. 그리하여 불뱀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기도해주기를 모세에게 청한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시어 뱀에 물린 사람이 살도록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불뱀을 없애신 것이 아니라, 구리뱀을 쳐다봄으로써 살 수 있도록 하셨다.
-박상대 신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상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연 십자가와 십자고상이다. 그래서 오늘은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와 성공회가 세상과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고 해방시키신 그리스도께서 매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를 우러러 경축하는 날이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4세기경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335년 9월 1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고, 그 다음날인 14일에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가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십자가’를 무덤성당 안에 걸어 현양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한 데서 오늘 축일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무덤성당은 곧 부활성당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무덤 안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셨기 때문이다. 나중에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성 십자가는 약탈당하게 되는데, 628년 동로마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이를 다시 찾아와 본래의 자리에 안치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추가되었다. 교황 세르지우스 1세(687-701)에 이르러 이 축일은 전체 교회가 기념하는 축일로 자리 잡게 된다.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걸맞게 전례복음은 요한사가의 ‘십자가 신학’을 잘 보여준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요한 3,1-21) 중에서 발췌된 내용이다. 니고데모의 호감에서 출발한 예수님과의 대화는 어느새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自己啓示的) 가르침으로 반전되었다.
이는 곧 요한복음사가의 편집의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니고데모와 행한 대화의 연속으로 보기는 어렵다. 즉, 예수의 역사적 발설(發說)이라는 보다는 요한복음사가의 독자적 성찰의 결과로 후에 편집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으니(13절),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란 그 누구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지고(至高)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사람이 되셨고, 영광 중에 다시 높이 들려 올려진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신 까닭에 세상은 물과 영으로 다시금 태어나, 멸망을 피하고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받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느님께 불순종의 대가로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기둥에 달아놓은 구리뱀을 본 사람은 치유를 받았다.(민수 21장) 여기서 구리뱀은 신약의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에 비유된다. 그러나 불뱀에게 물린 사람들을 실제로 치유한 것은 뱀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이다. 바로 그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있는 것이다. 십자가 자체가 세상에 구원과 생명을 주기보다는 십자가에 높이 달려 못 박혀 돌아가신 사람의 아들, 즉 하느님 스스로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16절) 이 말씀은 모든 복음서와 성서 말씀의 요약이며, 결론이다. 요한은 자신의 서간에서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1요한 4,9-16) 세상의 구원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게 되는 동기(動機)는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구원의 방법(方法)으로 하느님은 ‘외아들을 보내주시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낸 목적(目的)은 곧,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자기 외아들까지 보내어 세상을 구원하려는 동기(動機: motivation)이다. 그 동기가 바로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심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 십자가’ 위에서 성취된 것이다. 한때는 노예나 흉악범을 처단하던 형틀 십자가! 십자가는 이제 우리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은 왼손을 가슴에 얹고 오른손으로 이마에서 가슴으로 왼쪽 어께에서 오른쪽 어께로 ‘큰’ 십자성호를 그으며 십자가에 묻혀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자. 아멘......◆
예수님! 그분이 왜 하늘에서 내려오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고 복음을 믿어 새로운 생명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당신께서 어떠한 값을 치르고 이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16 과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이마다 모두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단죄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셨습니다.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나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즉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자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우리를 심판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18 그를 믿는 이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외아들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 그리고 믿지 않는 이들. 구원을 얻기 위한 단 하나의 수단인데 그것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잃은 것인가는 나의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각각의 입장은 이러합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행실이 악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모두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행실이 폭로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자기 행실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빛(예수님)에 대한 나의 태도가 구원을 결정합니다. 빛을 버린다는 것은 진리의 요구에 따라 사는 삶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빛을 향해 가까이 나아가고, 빛의 비추임 안에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빛 안에서 사는 삶....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 그것은 먼저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나를 위해 하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빛과 어두움. 참으로 좋은 표현입니다. 어두움에 있을 때는 빛 속으로 나아가길 거부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빛 속에 있을 때는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나 자신에게 있어서 빛과 어두움의 경계는 어디입니까? 빛에 드러내기 싫은 부분은 어떤 부분입니까?..............◆
[두올묵상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