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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15일 목요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은 16세기부터 시작된 대중 신심이었다. 9월 셋째 주일에 미사와 행렬을 하던 것을, 166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이 축일로 인가하였다. 1908년 비오 10세 교황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인 9월 15일로 날짜를 확정하였다. 예수님과 함께하시면서 겪으신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자 오늘의 축일이 제정되었다.
☆☆☆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Standing by the cross of Jesus were his mother
(요한 19,25-27)
and his mother’s sister, Mary the wife of Clopas,
and Mary Magdalene.
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아버지께 순종하며 받아들이신 분이시다. 이로써 그분께서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우리도 그분께 순종하며 우리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질 때 그분을 통해 구원을 받게 된다(제1독서). 십자가 곁에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계신다. 바라보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곁에’ 계신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고통을 겪고 계심을 나타낸다. 아들 예수님의 죽음의 고통은 그대로 어머니의 고통이 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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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장애인 바르나바 형제가 큰 수술을 하였습니다. 그는 마흔이 다 되도록 말 한 번 시원하게 못해 보고 제 힘으로 밥을 먹을 수도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중증 장애인입니다. 수술 후 그는 호흡기 장애를 일으켜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며 최악의 고통을 안으로만 삭이고 있었습니다. 통증을 호소하며 소리라도 지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그가 고통 속에서 그저 버둥거리기만 하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울 뿐입니다. 남들의 마음이 이럴진대 평생을 아들과 한 몸처럼 지냈던 바르나바 형제의 어머니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십자가 아래 성모님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바르나바 형제의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신부님, 하느님 나라가 분명히 있지요? 아들이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니까 이제 그만 놓아 주고 싶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놓는다고 놓아지겠습니까? 자식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바라보다 못해 던진 질문입니다. 차마 겉으로 말할 수 없어 마음속으로 혼자 대답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분명히 있습니다. 이렇게 착한 사람들이 가야 할 하느님 나라는 꼭 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알려 주신 것이 결국 하느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그 희망이 없다면, 죄 없는 이의 억울한 고통을 어떻게 이겨 낼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그 어떤 고통도 무의미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십자가 곁에 성모님께서 서 계십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께서 감당하시고 있는 이 기구한 운명을 이해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부활과 인류 구원의 역사가 숨어 있었지요. 지금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지만 주님의 날에는 그 모든 것의 의미가 환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슬퍼하는 사람들, 그 너머에 더 이상 눈물이 없는 눈부신 부활의 세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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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자식을 먼저 보내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라 했습니다. 그러기에 자녀의 죽음은 불효로 여겨져 왔습니다.
☆☆☆ 성모님께서는 천사의 방문을 받는 순간부터 평범한 여인의 길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말씀 속에는 그러한 결단이 숨어 있었습니다. 특별한 신분으로 사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만큼 의무가 주어지고 신분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 고통을 겪는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아들이 아프면 어머니는 더 아픈 법입니다. 게다가 죄인으로 죽어 가는 아들 앞에 나선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을 믿었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아들의 아픔만 염려하셨을 뿐입니다. 그 어머니께서 이제 믿는 자들의 어머니가 되시어 우리를 염려하십니다. 그분께서 곳곳에서 발현하심은 우리를 염려하시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늘의 어머님께 효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어머님처럼 하느님 말씀에 기꺼이 응답하는 일이 아닐까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신 예수님의 발아래 어머니 마리아께서 서 계십니다. 비통한 모습으로 아드님을 바라보시는 어머니께 주님께서는 위로를 보내십니다. 죽어 가는 아드님을 바라보고 계신 어머니께는 어떠한 위로도 소용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어머니께 그윽한 눈빛으로 위로를 보내십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는 순간,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프셨을 겁니다.
흔히 사랑하는 님은 앞산에 묻고, 사랑하는 자식은 가슴에 묻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드님의 죽음 앞에서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그 어떤 말도 위로의 말로 들려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요 형제들이다.”라고 하신 아드님께서 마리아에게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하셨을 때, 성모님께서는 그 어떤 말보다 아드님의 그 한마디 말씀에 온갖 고통〔七苦〕이 한순간에 사라지셨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드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모 마리아의 자녀들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아드님을 바라보시던 그윽한 눈매로 이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실 겁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극히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받드시듯이, 그렇게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성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모님을 모셔 줄 것을 청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러기에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십니다.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시는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가로막았던 또 하나의 유혹은 이렇듯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이었습니다.
성모님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어떤 표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차분한 슬픔으로 받아들이셨을 것입니다. 천사가 예수님의 잉태를 알려 주었을 때도 그분께서는 담담하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때의 모습 그대로이셨을 것입니다. 이후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사셨습니다. 철저한 겸손으로 사신 것입니다.
주위에는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낸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따뜻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실 것입니다. 슬픔 역시 주님께서 주시는 감정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는 ‘힘’을 청해야 합니다. 성모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십니다.
시메온의 예언은 그것을 뒷받침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성모님께서는 평생 아버지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뜻을 기다리며 사셨습니다. 잘 모르더라도 끝까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셨습니다. 왜 그런 삶을 사시는지, 왜 사람들에게 반대를 받아야 하는지, 기적의 능력을 지니신 분이 어찌하여 죽음의 길을 가시는지, 잘 모르셨지만 주님의 뜻에 따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길이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였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보는 어머니의 고통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억울한 죽음이 분명한 것을 알면서도 그저 보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고통 이상입니다. 그럼에도 성모님께서는 받아들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고통의 순간에도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신앙인은 성모님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보살펴 주십니다.
제자들의 어머니
-최영균 신부-
요한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관련한 두 개의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 복음 2장 1-11절의 카나의 혼인잔치이고, 다른 하나가
오늘 복음의 대목입니다. 두 개 모두 시간과 관련된 장면들입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예수님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첫 번째 기적을 마리아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실행하십니다.
마리아는 종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자신의 모든 신뢰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뢰가 기적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모델로서 사랑받는 제자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신앙의 모델로서 성모님은 제자들에게 슬픔이
곧 기쁨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치 물이 포도주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고통에 강해지려면
-김찬선신부-
애정결핍증이란 것이 있지요.
성장기에 그 나이에 맞는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 경우
나이 먹었는데도 사랑의 성장이 멈춰 유년기적 사랑의 상태에 머물고
늘 사랑의 결핍을 느끼기에 그런 사랑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것에 최고의 관심이 있으며
사랑을 받으면 기가 살고 받지 못하면 완전히 기가 죽습니다.
삶이나 일에 대한 의욕도 마찬가집니다.
사랑 받기를 원하는 그 사람이 자기를 사랑해주면
삶이나 일에도 의욕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완전히 의욕을 잃고 무기력합니다.
이들이 보이는 또 하나의 증상은 고통에 대한 무력감입니다.
이것은 꼭 애정결핍증을 가진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은 사랑만큼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만큼 견디는 힘이 있으며
사랑만큼 고통 중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사랑만큼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생명줄도 놓지 않습니다.
이는 사랑이야말로 어떤 물리적 힘보다도 센
진정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생명의 힘이고,
사랑은 삶을 살아가는 힘이며,
그래서 고통을 견디는 힘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는
바로 이런 사랑의 힘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잘 나갈 때는 들끓던 사람들이 죽게 되자 모두 떠나가지만
마리아는 끝까지 함께 있으면서 고통의 길을 같이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아들의 십자가 밑에 서 있습니다.
어떻게 그 고통의 모습을 피하지 않고 지켜보고
지켜 볼 뿐 아니라 서 있을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입니다.
이런 어머니께 청해봅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내 맘 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여인이시여 - 김정미 수녀- 첫 쉼터를 시작했던 곳은 수녀원 수련원 자리였다. 수련원 수호성인은 ‘통고의 성모님’이시고 9월 15일에 축성되었다. 수련원이 파주로 옮겨간 뒤 그 춥고, 썰렁한 건물에서 가출한 십대 여자 청소년들의 쉼터를 시작했다. 영문도 모르고 ‘통고의 성모님’도 쉼터의 수호성인이 되셨다. 주보성인 탓일까? 끼가 넘치고 자유분방한 가출한 십대 여자 청소년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마치(감히) 그 하루하루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을 바라보는 십자가 길의 성모님이다.
한번은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누어주겠다고 모두 모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천사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이상하게도 ‘행복 바구니’와 함께 ‘불행 바구니’도 한 개씩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겠어요?
“행복을 나누어주겠다고 해놓고 왜 쓸데없는 불행도 나누어주는 겁니까?”
두 바구니를 받아든 사람들이 천사에게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이렇게 답변했답니다.
“행복과 불행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입니다. 싫다면 모두 돌아가십시오.”
좋은 일과 나쁜 일,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이러한 식으로 쌍을 이루면서 우리의 삶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좋은 일, 기쁨, 행복 등의 것만이 내게 다가오길 원하고 있지요. 그래서 좋은 일이 생기면 “와~ 나에게도 이런 좋은 일이 일어나네.”라고 생각하다가도, 나쁜 일이 생기면 “하필이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나쁜 일, 슬픔, 불행이 내 삶에서 없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이러한 부정적인 일들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실제로 이렇게 부정적인 일들을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서 최선을 다하며 생활했던 사람들은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일들을 자기 삶의 일부에서 쫓아내고자 했던 사람들은 기억 안에서 초라하게 사라질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어차피 내게 다가올 또는 이미 다가온 부정적인 일이라면 거부하기보다는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훨씬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은 이렇게 부정적인 일들을 사랑의 마음으로 극복하신 한 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이십니다. 당신 삶 전체가 인간적으로 볼 때는 나쁜 일이었고, 슬픔과 불행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불평과 불만보다는 가슴에 안아 두실뿐이었고, 사랑의 마음으로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하셨습니다. 오늘 복음만 봐도 알 수가 있지요.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직접 보고, 아들의 시신을 당신의 두 팔로 받는 상황에서도 성모님께서는 의연하게 서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비보다는 햇빛이 들기만을 원합니다. 여기서 햇빛이란 좋은 일, 복된 일, 즐거움과 기쁨으로 충만한 일 등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이 있지요.
“햇빛이 계속되면 사막이 되어버린다.”
시련이나 아픔이라고 말할 수 있는 비도 내려야 사막이 아니라 옥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햇빛만 계속되면 결국 옥토가 아닌 아무것도 살지 못하는 사막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내 삶을 무엇으로 만들겠습니까? 사막입니까? 옥토입니까? 옥토를 원한다면 부정적인 그 모든 것들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자주 고통의 연속이다. 성모님의 일생도 예수님을 잉태하신 순간부터 아니 예수 탄생 예고 때부터 고통으로 이어졌다. 성모님의 고통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받았던 슬픔과 고통을 말한다. 십자가 밑에서 아드님 예수가 희생제물로 숨을 거두실 때까지 그의 모든 수난과 고통을 함께 걷고 지켜보신 어머니는 그렇게 아들 예수의 수난에 참여하신다.
그래서 당신이 겪으셨기에 우리를 위로해 주시리라 희망할 수 있으며, 당신이 이 같은 고통을 이겨내셨기에 우리가 겪는 어떤 고통도 모두 이해해 주시고, 우리가 이겨내도록 당신 아드님께 전구해 주신다는 신뢰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며 우리에게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맺어주신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혈육으로 이루어진 부모와 자식 관계를 한 단계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증인들을 통해 새로운 가족관계로 열어주신다.
오래전 선배 수녀님 한 분이 “우리는 생전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그 ‘절절한 사랑’을 살아보지 못하고 하느님 앞에 나갈 것이다. 부모가 되어 자식을 키우는 그 속이 썩고 애가 타는 사랑을 우리는 한 번도 체험하지 못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것이 가장 겁난다.” 하는 나눔을 듣고 ‘내가 원하는 것도 저런 것일까?’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했다. 그리고 뭔가에 홀린 듯 쉼터 아이들의 삶에 빠져들었다.
지난 10년간 쉼터에서 나는 참 많이 울었다. 개인적으로는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예기치 못한 급환으로 두 분의 동료 수녀님이 이른 나이에 갑자기 돌아가셔서 울었다. 주변의 많은 만남과 헤어짐 때문에도 울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삶에 너무 깊숙이 끼어들었기 때문에 울었다. 아무래도 영문도 모르고 쉼터의 주보가 되신 ‘통고의 성모님’ 때문에 울 일이 켜켜이 쌓였던 듯하다.
아이들은 거칠지만 단순해서 어떤 시기가 지나면 나와 실무자들한테서 엄마를 만나고, 아빠를 만난다. 자신들을 거리로 나서게 한 ‘애증이 서린 부모’로 여기기도 해 아이들 생애 동안 쌓아놓은 상처를 거칠게 품어내기도 한다. 그 품어냄이 일시적인 분노로 나오기도 하고, 자신을 병들게 하는 정신적 병리현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어릴 적 꼬마아이를 친척에게 맡기고 어디론가 떠났던 아버지가 10여년이 지난 뒤 주검으로 나타나 친자 확인을 요구하는 경찰의 출두요구를 받기도 한다. 아이는 이미 오래전에 친척집을 나와 거리에서 지내다 쉼터에서 살고 있었다. 어떤 아버지는 정신질환으로 폭력을 휘둘러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막내딸만 쉼터에 와서 살다가 경찰의 연락으로 홀로 죽은 아빠의 사실 확인을 위해 불려 간다. 쉼터의 아이들 모두 십대이건만 아이들의 삶의 경험은 너무 모질고 고통스럽다.
지금도 여전히 쉼터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우리의 관계는 ‘새로운 어머니와 자녀,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있다. 혈연으로 맺어진 엄마 아빠, 형제자매로 ‘이가 꼭 맞는’ 가족이 아니라 부모가 떠난 자식들과 자식 없는 엄마(?), 이모·삼촌이 어우러져 예수님이 맺어주신 새로운 형태의 가정을 이루어 낸다. 형태만 가족 꼴을 이룬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일어나고, 쉼터에 오기 전에 일어난 많은 삶의 역사에 깊숙이 개입한다. 함께 가슴 아파하고, 함께 울고, 함께 분노하고, 함께 기뻐한다. 아이들을 야단치기도 하고, 아이들과 함께 감정적으로 맞서기도 하고, 서로 소리치며 싸우기도 한다. 서로의 삶의 증인이 되어주고, 버팀이 되어준다.
아이들은 자신의 짧은 생애를 통해 긴 고통을 걸어왔고, 그 고통을 힘겹게 이겨내고 있다. 아이들한테는 그 고통을 이겨내는 동안 함께 울어주고, 함께 희망을 찾고 함께 견뎌줄 새로운 가족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이 새로운 가족을 맺어주시고 생명을 주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딸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 아버지, 형제자매이시다.’
산고 (産苦)
-전삼용신부-
일제 강점기 때 여학교를 다니며 일본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라 하시며 한 할머니께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한 성주가 성을 짓고 싶어 하였는데 성을 지을 때 기둥에 산 사람을 한 명 넣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성주는 누구든 자신의 성에 기둥이 되면 아들을 사무라이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사무라이는 신라시대 화랑들처럼 귀족가문의 자제들로 구성된 높은 신분의 단체였던 것입니다.
이에 평민 한 어머니가 새로 짓는 성의 기둥이 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성주는 그 어머니를 기둥에 넣고 성을 지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아들은 성주의 약속대로 사무라이가 되는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높은 귀족신분이 아닌지라 함께 훈련받는 귀족 자제들로부터 심한 차별을 받게 됩니다.
몇 번이고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성의 기둥이 되어버린 어머니를 생각하며 끝까지 참고 견뎌서 훌륭한 사무라이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모진 고통을 참아 낸 것은 아들이지만 그 아들에게 힘을 준 것은 어머니의 희생이었습니다.
옆에 자신을 위해 희생해주고 고통을 당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진정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힘이 됩니다.
저도 대학 시험 볼 때 교문을 붙잡고 기도를 드리시는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수학 시험을 망쳤어도 나머지 시험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여 대학에 한 번에 붙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사실 제가 떨어지라고 기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축구나 야구도 홈경기가 유리한 것은 응원해 주는 편이 많으냐, 적으냐에 따라서 성적이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분만하는데 남편도 따라 들어가게 한다고 합니다. 아내만 산고를 겪고 자식을 낳으면 되지만 남편도 그 고통에 동참하게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아내의 고통이 물리적으로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남편이 옆에 있음으로 인해 어차피 받아내야 할 고통을 더 힘 있게 참아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는 것은 어머니이지만, 사실 어머니만이 아니라 아버지도 함께 낳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은 교회를 낳는 고통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이 고통을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도 함께 고통을 당하십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실 때 이미 메시아가 인류의 죄를 씻기 위해 당해야 할 고통을 함께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제가 논문을 쓰고 있는 발타살이라는 신학자이자 추기경님은 “골고타 언덕에서 성모님께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당했는데 그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은 것이 정말 신비한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성모님을 “공동 구속자”로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는 뜨겁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성모님을 공동 구속자로 보는 견해는 이처럼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였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루는 딸로서, 신부로서, 또 어머니로서 함께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 공로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그러나 이는 유일한 구원자는 그리스도라는 명제에 어긋나기 때문에 또 여러 신학자는 이런 견해를 반대합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의 고통은 구원을 위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었을까요?
남편이 산고를 겪는 아내 옆에 있다고 해서 그 고통을 분담할 수 없는 것처럼 성모님의 수난고통은 인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에 단 일점일획도 더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이 당신 희생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에 조금이라도 더했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이 완전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충하는 무엇으로 보기 보다는 마치 옆에 선 남편이 아내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힘을 주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희생에 힘을 주는 동반자의 역할로써 보아야합니다.
그렇더라도 ‘공동 구속자’란 말이 완전히 틀리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번역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공동’이라 함은 무엇을 함께 공유한다는 의미가 더 강하지만 라틴어 어원으로는 ‘공동(co-)’이란 뜻은, 영어로 with, 즉 함께 참여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예를 들어 미사를 집전할 때 공동 집전자가 성체를 축성하는 것이 집전 사제가 축성하는 것에 단 일점일획도 더해지지 못하지만 그 사제들을 ‘공동 집전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공로가 인류 구원을 위해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지만, 성모님은 교회를 탄생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을 당하신 분이십니다.
두 분은 골고타에서 산고의 고통을 겪으시고 한 분은 그 고통으로 죽으시고 한 분은 영적으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 고통으로 우리가 탄생하였으니, 마치 어머니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사무라이가 된 사람처럼 우리도 그분들의 고통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그분들이 원하는 참다운 자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모님을 새로 태어난 교회의 상징인 요한에게 ‘어머니’로 내어주십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교회의 어머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만이 아니라 성모님의 산고에 의해서 태어난 자녀들임을 잊지 말고 그 분들의 희생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 것을 결심해야겠습니다
어느 날 한 부인이 어려운 가정생활을 비관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빨리 천국에 가고 싶어요. 더 이상 살기가 힘들어요.'
바로 그때 하느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살기 힘들지? 네 마음을 내 이해한다. 자, 이제 너를 참된 평화와 안식이 있는 천국으로 데려가마. 그런데 천국에 가기 전에 가족들을 위해 몇 가지만 하고 갈 수 있겠지?'
그 부인이 너무나 감동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선 집안이 너무 지저분한 것 같은데, 네가 죽은 후 정리를 잘하고 갔다는 말을 듣도록 집안 청소를 좀 하도록 해라. 나는 사흘 뒤에 오마.'
그녀는 열심히 집안 청소를 했고, 정말 사흘 후 하느님께서 다시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했구나. 떠나려니 아이들이 맘에 걸리지? 네가 죽은 후 아이들이 엄마가 우리를 정말 사랑했다고 느끼게 사흘 동안 최대한 사랑을 주도록 해라.'
부인은 사흘 동안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정성스레 요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다시 사흘 후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너 남편 때문에 상처 많이 받고 미웠지? 그래도 장례식 때 ‘참 좋은 아내였는데'라는 말이 나오게 사흘 동안 남편에게 최대한 잘 해 주어라.'
그녀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천국에 빨리 가고 싶어 사흘 동안 최대한 남편에게 잘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흘 후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천국으로 가자. 그런데 그 전에 네 집을 한번 돌아보려무나.'
그래서 집을 돌아보니까 깨끗한 집에서 오랜만에 아이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남편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천국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지요. 결혼 후 처음으로 ‘내 집이 천국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하느님, 갑자기 이 행복이 어디서 왔죠?'
하느님께서는 환한 미소를 띠며 '지난 9일 동안 네가 만든 것이란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이에 부인은 다음과 같이 감격하며 대답했습니다.
'정말이요? 그러면 이제부터 여기서 천국을 만들어가며 살아볼래요.'
하느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지요. 바로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그 완성의 몫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의 삶이 너무나 힘들고 지친다는 이유로 그 완성의 몫을 외면하고 있는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우리들은 오늘 우리들이 기념하는 고통을 이겨내시는 성모님을 떠올려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 잉태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고통과 질곡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든 삶도 부족했는지,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아들의 모습을 직접 보고 묻어야만 했지요. 그런 가운데에서도 절대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느님께 철저히 의탁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셨던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 직접 본을 보여주면서 이기셨던 고통의 삶. 따라서 우리도 이제 힘들다고만 하지 말고,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조금만 더 힘차게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입버릇처럼 말하는 힘들다는 말 하지 말기.
어느 사형수 어머니의 노래
-김귀웅 신부-
박삼중 스님의 <사형수 어머니들이 부르는 통회의 노래> 중에서
십자가 곁에 계신 성모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글이 있어 옮겨봅니다.
“아들아, 너는 생인손 마냥 아프지만 귀하기 한량없는 내 몸의 일부였다.
너를 예쁘게 낳기 위해 과일 한쪽 상한 걸 먹지 않았지.
세상에서 제일 깨끗하고, 정갈하고, 보기 좋은 것만 먹고 마시고 생각했었단다.
에미 마음이란 다 그런거야.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그게 다 내 살이고 내 핏줄로
버무린 귀한 새끼란다. 너도 배 속에선 손짓 발짓으로 에미 마음과 교통하며
금자동이 은자동이로 세상에 나왔단다.
아들아, 이 못난 청개구리야!
자식을 낳아서 보는 것만으로 부모는 행복한 거란다. 너에게 무엇을 바라더냐?
내 너에게 좋은 옷을 바라더냐? 내 너에게 맛난 음식을 바라더냐?
속 썩이는 자식이라도 살아 있으면 부모는 가슴에 소금밭을 일굴망정 기쁘게
가슴앓이를 견디는 거란다. 이 불쌍한 것아!
살아서 얼마든지 이 에미 가슴을 할퀴고 물어뜯더라도 그 아픔마저도 달게
받을 수 있건마는 천둥벌거숭이 내 새끼 너를 가슴에 묻고
내가 어이 살아가겠느냐….”
우리의 한 분 어머니!
-방순자 수녀-
전에 가장 열악한 산동네를 찾아 공부방을 시작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우리 가정이 얼마나 위기에 처해 있는지 뼈아프게 체험했다. 30가정에 양쪽 부모가 있는 아이는 두세 명, 더 놀라운 것은 한 부모 가정 중에 엄마와 있는 아이는 네 명뿐이고 거의 아빠와 살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의 피폐 상태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4학년만 되면 내면의 분노가 폭력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부모가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은 탓으로 아이는 아무 죄 없이 받아야 할 사랑을 못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땅의 모든 어머니에게 자식이란 죽는 날까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천륜의 근본이 무섭도록 빠르게 무너져 가고 있다. 어느새 우리나라도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완전한 사랑의 어머니가 필요함을 아시고 한 어머니를 주신다. 아들 예수님 없이는 존재 이유가 없는 분이 성모님이시다. 두 분의 사랑과 일치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라고밖에 할 수 없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을 인류 구원의 산 제물로 바치면서 이미 당신 자신도 사랑으로 함께 죽으셨다. 그런데 그 기막힌 아들이 십자가에서 고통 중에 죽어가며 어머니에게 한 유언이 바로 ‘인류의 어머니’가 되시라는 말씀이다. 성모님은 십자가 밑에서 아들 예수님 대신 우리 죄인을 자식으로 얻으셨기에, 가장 고통을 안겨준 이 자식들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진리다. 가장 복되신 여인이라고(루카 1,48 참조) 일컬어진 분이 더없는 통고(痛苦)의 여인이셨다는 사실이 바로 이 진리, 곧 ‘사랑과 고통의 정비례 법칙’을 증명해 준다.
이 세상은 ‘죄의 무감각’이라는 가장 무서운 병에 걸려 의식할 겨를도 없이 ‘죄의 홍수’에 휩쓸려 파멸로 떠밀려 가고 있다. 혼자 힘으로는 세속이라는 거대한 물살을 거슬러 헤엄쳐 갈 수가 없는, 이런 세상에 살아야 하는 가엾은 우리에게 예수님은 유일하게 죄를 모르시는 거룩한 어머니를 새 구원의 방주로 주신다. 예수님과 함께 영혼 깊이 못 박히고 창에 찔리신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을 우리의 안전한 피난처로 주신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의 손발에 못질하는 그 제단 옆에는 언제나 성모님이 계신다. 천상 어머니는 희생제물이 되신 당신 아들을 바치는 비통한 봉헌을 거룩한 미사 때마다 계속하신다. 여전히 당신과 예수님에게 못질을 계속하는 이 못난 자식들을 함께 바치시는 거룩한 사랑의 어머니, 이분을 나는 내 영혼의 집 안에 어머니로 모시고 살고 있는가? 진정한 어머니를 잃어가므로 인간이 파괴되어 가는 오늘날, 나의 모습과 삶으로 또 하나의 인자하신 어머니 마리아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는가?
사랑의 키 낮춤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오늘의 히브리서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다 합니다.
우리의 보통 생각은
우리 인간이나 순종을 배우고
그것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운다는 것인데
오늘 히브서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순종을 배우셨고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불순종의 죄를 짓던 사람이
고난을 통하여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자녀들이 모두 모이는 이 명절
손자들의 언어를 배우는 할애비, 할미의 배움과 같을 것입니다.
매우 인격적인 순종이지요.
죄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랑의 키 낮춤이라고나 할까요?
자기의 고집에 사로 잡혀있고
자기의 고통에 빠져 있는 그런 자기 안의 갇힘이 아니라
우리의 손자가 나타날 때 그러하듯
대상을 만나는 순간
자기의 고집도 사라지고
자기의 고통도 사라지고
그의 뜻과
그의 고통만이 전부가 되는 그런 사랑의 키 낮춤입니다.
어제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는 예수님께서 그러하셨고
오늘 십자가 아래서 아들의 고통을 당하신 마리아께서 그러하신
인격적인 순종,
사랑의 키 낮춤을 우리는 사랑합니다.
새벽을 열며
갑곶순교성지에서는 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곳이 무척 좁다고 이야기하지만, 2명의 직원과 제가 관리하기에는 이 성지의 땅은 너무나도 넓습니다. 그러다보니 매일 손에 장갑을 끼고서 일을 할 수밖에 없어요. 삽질, 곡괭이질, 예초기로 풀베기, 배수로 파기, 나무 심기 등등……. 어떻게 생각하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일들이 갑곶성지에는 가득합니다.
이렇게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처음 성지를 방문하시는 분들이 저를 신부(神父)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냥 성지에서 일하는 한명의 일꾼 정도로만 생각하지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합니다. 민소매와 작업바지 그리고 작업화를 신고 있는 나의 모습을 누가 신부로 볼 수 있겠어요? 알아보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지요. 저 역시도 교우들이 신부로 봐 주길 원하지도 않습니다. 저를 알아보면 일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니까요.
그래도 성지에 대한 인상을 좋게 심어드리기 위해, 성지에 오신 순례객들과 눈이 마주치면 꼭 먼저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꽤 많은 분들이 인사를 하면 ‘다른 사람에게 인사를 하나?’라고 생각하시는 지 뒤를 돌아보면서 어색한 표정만 짓습니다. 그리고는 그냥 휙 하고 지나가지요. 인사한 제가 오히려 어색해지는 순간입니다.
잠시 뒤, 그 분께서 내 앞으로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는 “아니 신부님이세요? 복장을 그렇게 하셔서 신부님인줄 몰랐어요.”하면서 아주 반갑게 인사하십니다. 신부면 인사해야하고, 신부가 아니면 인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이런 분들만 계신 것이 아니에요.
너무나 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예초기로 풀을 베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떤 자매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예초기의 엔진을 끄고서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여쭈니, 자매님께서는 음료수를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아저씨, 더운데 정말로 수고 많으십니다. 이것 좀 드시면서 하세요.”
내가 신부라는 사실을 모름에도 불구하고, 성지에서 일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먼저 다가오셔서 친절을 베푸시는 모습. 감동이었지요. 그리고 제 모습도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아는 사람에게만 친절을 베풀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만 다가섰던 나는 아니었는지……. 입으로는 주님을 그렇게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께서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셨던 사랑은 왜 철저하게 외면을 하고 있었는지……. 보이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사랑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외치는 것은 외선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들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을 맞이해서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합니다. 바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직접 봐야 하는 아픔이지요. 그런데 이제는 우리 모두의 성모님이 되셔서 우리들의 고통을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지만,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우리들의 어머니로 맡겨주셨거든요. 따라서 이런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삶 안에서 철저한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사랑을 전혀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주님께 사랑을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과 성모님께서 사랑을 실천하셨던 그 모습을 기억하면서 우선 내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실천을 먼저 행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커피 대접을 해봅시다. 벽다방인 자판기커피도 좋아요.
빠다킹신부
고통의 신비
-최혜영 수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삶은 예수님의 삶만큼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믿으셨기에 믿음 하나에 자신의 전 생애를 내던진 분, 나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신 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였기에 혈연을 넘어 신앙 가족 공동체의 중심에 세워지신 분….
마리아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처럼 적나라한 인간실존의 고통과 죽음을 관통하실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리아는 가난한 이민자로서 이집트 피난살이를 경험하였고, 가난한 과부로서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냈으며,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아들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찾았고, 마침내는 사형수의 어머니로서 십자가 밑에 섰습니다.
고통을 겪은 사람만이 남의 고통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고통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현실이지만 결코 피해서는 성장할 수 없는 인생의 길이기도 합니다. 고통을 피하기보다는 금이 불 속에서 단련되듯 우리 자신들도 고통의 용광로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인내심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김경희 수녀-
오늘은 성모님의 많은 모습 중에 특별히 십자가 밑에 계신 어머니를 묵상하게 됩니다. 루이사 피카레타의 글입니다. “통고의 어머니, 이제 어머니께서는 마지막 희생을, 곧 숨을 거두신 아들 예수님을 무덤에 묻어야 하는 희생을 치를 준비가 되셨으니 하늘 뜻에 온전히 맡기시고 예수님을 동반하셔서 어머니의 손으로 무덤에 안장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팔다리와 손발을 가지런히 매만져 정돈한 후 작별인사와 마지막 입맞춤을 하시려는 순간, 심장을 가슴에서 비틀어 뜯어내는 듯한 아픔을 느낍니다. 사랑이 어머니를 예수님의 지체에 못박고, 그 사랑과 비통함 때문에 생명이 없는 아드님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생명도 막 꺼지려고 합니다.”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신 마리아, 당신 아드님과 함께 수난의 길을 걸으시고 그 아들의 시신을 품에 안고 슬픔에 잠기신 성모님의 마음을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수난의 예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 넘어지셨을 때 아기 예수님이 넘어졌을 때를 연상하시면서 “얘야, 내가 여기 있다” 하고 외치는 어머니의 모성으로 힘이 되어주시려는 성모님, 피땀을 흘리며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 곁에 어머니는 늘 함께하셨고, 아드님이 겪으시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성모님의 이 고통을 어떻게 위로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시는 어머니이신데 저는 어머니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머니 마리아께서 바라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2003년 루르드에 갔을 때입니다. 벨라뎃다 기념관에서 성모님 발현 설명을 듣고 있는데, 루르드의 발현 메시지가 ‘기도하고 희생하며 보속하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 순간부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 처음 듣는 것 같았습니다. 성모님이 우리에게 호소하신 말씀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늘 묵주를 들고 오신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기도는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과 영광송으로 엮어진 단순한 묵주기도인데 왜 이 기도를 많이 하지 못하겠습니까? 어머니 마리아께서 원하시는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리라 결심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어머니께서 늘 함께하신 것처럼 저도 기도로 함께 어머니의 길을 따르고 싶습니다.
-한종민 신부 -
오늘 우리 교회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는 기억합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현양 사건과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는 본기도에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아드님 곁에 서서 성모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하셨으니, 주님의 교회도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기도를 통해서 고통의 성모 마리아의 의미를 보다 깊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합니다.
그 잉태는 마리아의 응답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응답은 하느님께서 강생을 통해서 행하고자 하시는 구원에 대한 마리아의 협력입니다.
그 강생 사건이후에 성모님이 된 마리아는 예언자 시메온을 통해서 예수님과 당신에 관한 예언을 듣게 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34ㄴ-35)
이 예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겪게 되실 고통과 함께 그 고통에 동참해야 하는 마리아의 운명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은 성경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선포된 말씀을 통해서 마리아가 그 예언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순간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에게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를 부탁하십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십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겪으시는 극한 고통 속에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고통 속에서 마리아는 침묵합니다.
침묵은 동의(同意)의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극한 고통에 말없이 동참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침묵 속에서 그 고통을 동감(同感)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당신의 제자를 부탁합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 부탁의 말씀은 우리 교회를 성모님께 맡기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신 당신의 어머니께 교회를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고통을 함께 하신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메온의 예언에 대해서 마리아가 성모님으로서 어떻게 그 고통을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 고통에 말없이 동참하고 그 고통에 말없이 동감(同感)했습니다.
고통은 선(善)이 아닙니다.
고통은 피해야 하는 악(惡)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악을 선으로 승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온 몸과 마음으로 끌어 안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악(惡)의 십자가는 선(善)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도 그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침묵으로 그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하셨습니다.
그리고 동감(同感)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 안에서 십자가는 아들을 죽이는 악(惡)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선(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많은 고통과 그 고통을 통해서 일어나는 악(惡)을 체험합니다.
우리가 그 고통을 피할 때 그 고통은 우리에게 악(惡)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고통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악(惡)은 세상과 사람을 살리는 선(善)이 됩니다.
성모 칠고
-조성풍 신부-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예외 없이 고통스런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단지 그 고통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반대받는 표적으로 살아가신 아드님과 함께해야 했기에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프셨을 성모님의 고통을 교회는 일곱 가지로 전해줍니다 .
첫째, 시메온의 예언을 들으신 고통. 둘째, 이집트로 피난 가신 고통.
셋째,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으신 고통.
넷째, 십자가 길에서 예수님과 서로 만나신 고통.
다섯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보신 고통.
여섯째, 예수님의 성시를 품에 안으신 고통.
마지막 일곱째, 예수님의 성시를 돌무덤에 장사지내심을 보신 고통.
그러나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과 함께한 자신의 일생을 결코 불행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는 협력자로서의 삶에 기꺼이 순명하셨음을 압니다. 사실 우리 삶 안에 도전으로 다가오는 많은 고통들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때문에 실망하거나 체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실망과 체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희망이
하느님의 뜻 안에 자리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어머니
-강영구신부-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그대에게
진주조개는 속살을 파고드는 진주핵(珍珠核)을 품고 아픔의 세월을 견딥니다.
진주(珍珠)가 커지면서 아픔도 함께 커집니다.
인고(忍苦)의 세월이 지난 후 그 무엇보다 영롱하고 단단한 진주(珍珠)가 태어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진주(珍珠)의 영롱함에 감탄합니다.
진주의 영롱함은 아픔이 뭉쳐져 만들어진 것입니다.
호사(豪奢)와 향락은 쌓이고 뭉쳐져도 빛이 나지 않습니다. 악취가 날 뿐이지요.
고통은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여인 중에 복된 여인’(루가1,42)입니다.
잘 난 남편이나 출세한 아들 때문에 복된 여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부귀영화(富貴榮華)와 호사스러움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복된 여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라는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복된 여인이 되지 않았습니다(루가11,28).
죽음보다 더 큰 고통 때문에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 위에 인생의 뿌리를 내렸기에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루가11,28).
십자가 아래에서 죽어가는 아들의 비명을 듣고도 혼절(昏絶)하지 않는 독함으로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고통 중에서도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1,38)하고 기도하며 서있을 수 있었기에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복됨은 진주(珍珠)보다 더 영롱하게 빛납니다.
고통을 피하려하지 마십시오.(一明)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 : 주님과 함께 수난과 죽으심을 당하시는 성모님
-경규봉 신부-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 성모 통고 축일을 지낸다. 성모님은 주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신 분이시며, 성모님의 고통은 주님의 십자가상 고통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성모님은 주님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고통을 당하셨다. 약혼한 처녀의 몸으로, 약혼자와 무관하게 아이를 잉태하였고, 그 사실을 약혼자가 알고 있다는 사실부터 고통이다. 요셉이 성모님과 파혼하려고 마음먹고 있을 때에 하느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성모님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말했다고 성서는 간단히 기록하고 있지만, 요셉이 겪는 심적 고통은 상당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또한 요셉의 심적 고통을 보면서 성모님이 겪는 고통 또한 얼마나 컸을까 하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처럼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고통을 당하셨다.
만삭의 몸으로 나자렛에서 베들레헴까지 먼 길을 여행해야 했으며, 더욱이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빈들의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낳아야 했다. 아마도 산파의 도움도 없이 예수님을 낳고 뒤치다꺼리까지 하셔야만 했으니 그 고통이 어떠했을까? 갓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요람에는 뉘이시지 못할망정 방안에라도 뉘이셔야 했을 터인데 말구유에 눕히셔야만 했으니(루가 2,7),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봉헌하실 때 시메온이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루가2,35)라고 예언하였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참담했을까? 무엇보다도 헤로데가 아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집트로 피난길을 떠날 때에, 또한 베들레헴의 무죄한 아기들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마태2,16-18), 성모님의 마음이 오죽이나 아팠을까? 소년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려 3일 동안이나 걱정하며 찾아다니실 때 성모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루가2,41-50)?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하실 때에 성모님이 겪은 심적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또한 예수님이 마귀 들린 사람이며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악령을 쫓아낸다는 소문을 들으셨을 때(마태 12,27) 성모님의 마음은 오죽 답답했을까? 마침내 예수님께서 제자로부터 배반당하시어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운명하실 때 십자가 아래 서계신 성모님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을까?
성모님은 이처럼 고통을 당하신 분이시다. 성모님은 누구보다도 더 주님과 함께 하셨으며, 주님과 함께 하신 그만큼 많은 고통을 당하셨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 위에서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시는 고통을 맛보셨다. 그리고 그러한 성모님의 고통은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25)라는 바울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우는 것이었다.
교회는 일찍부터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했으며, 예수님과 함께 고통과 수난을 당하신 성모님과 함께 십자가 밑에 서 있는 것을 기도의 이상적인 모델로 여겼다. 그것은 성모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고통을 당하셨지만, 성모님의 영혼 깊은 곳에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내적 평화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혼의 평화와 모든 심적, 육적 고통을 이겨내시면서 주님과 함께 하신 것이다.
오늘 고통의 성모 마리아 축일을 지내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혼의 평화와 힘을 가지고 성모님과 함께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하루가 되자.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 성모칠고 - 하느님 은총과 자비의 물리적 순간
-박상대 신부 -
어제는 교회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으심으로써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며, 나아가 부활과 생명, 구원과 해방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영광스러운 십자가 안에는 말 못할 고통이 묻혀있다. 바로 십자가 아래에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아들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한 여인의 고통이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성모 마리아께서 일생을 통하여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받으신 고통을 기억하면서 그 고통을 나누고자 한다. 아울러 구원의 역사 안에서 차지하는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며, 그 고통이 그분만의 고통이 아니라 아직도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세상 구원을 위한 우리 모두의 고통임을 각오하려 한다. 그러므로 오늘 기념일이 어제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성모께서 겪으신 고통에 대한 구원사적 반성(反省)은 이미 중세기 이전부터 있어왔다. 중세기에 이르러 ‘성모님의 일곱 가지 고통’, 즉 성모칠고(聖母七苦)를 일부 지방교회에서 기념하기 시작하였고, 1600년대에는 수도회로 확산되었고, 1814년 비오 7세 교황이 전체교회에 보급시켰다.
성모님께서는 평생을 두고 아들로 말미암아 마음 쓰시고 속을 태우셨겠지만 그 가운데 일곱 가지 고통을 알아보자.
① 예언자 시므온의 예언: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루가 2,34-35)
② 성가정의 이집트 피난: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어서 일어나 아가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대가 알려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하고 일러주었다. 요셉은 일어나 그 밤으로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았다.”(마태 2,13-15)
③ 성전에 남아있던 예수를 사흘 동안 찾아 헤맴: “사흘 만에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내고,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루가 2,41-52)
④ 골고타로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모자(母子) 서로 상봉하심: “예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손에 넘어가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성밖을 나가 히브리말로 골고타라는 곳으로 향하셨다. 골고타라는 말은 해골산이라는 뜻이다.”(요한 19,16-17)
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주사위를 던져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마태 27,35)
⑥ 예수님의 시신을 내려 품에 앉으심: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내렸다.”(요한 19,38)
⑦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심: “그 시체를 내려다가 고운 베로 싸서 바위를 파 만든 무덤에 모셨다.”(루가 23,53)
성모칠고 중 ④~⑦에 관한 성서상의 정확한 기록은 없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동행하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장면을 멀리서나마 지켜보았던 여인들을 일일이 언급하고 있으나(마태 27,55-56; 마르 15,40-41; 루가 23,49), 성모님에 대한 언급은 없다. 성모님에 대한 유일한 성서상의 언급은 요한복음사가의 오늘 복음에 해당하는 대목이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있었던 어머니 마리아와 애제자(愛弟子) 요한을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다. 복음서를 종합하여 보면 성모 마리아는 과월절을 시작하던 새벽시간에 예수께서 붙잡혔다는 소식을 도망쳐 나온 제자들로부터(마태 26,56) 전해 듣고 달려와, 줄곧 아들 예수 근처에 머물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리아는 아들의 십자가 길을 동행하였고 가능한 십자가 곁에 있었던 것이다.
말하기는 쉽지만, 마리아는 어떻게 이 모든 시간들을 이겨내었을까?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을 에는 비통 중에 하염없이 우시네.”(부속가 4) 인간의 어떤 말도 표현도 성모님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성모님께서 겪으신 고통이 어디 칠고(七苦)뿐이겠는가?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수많은 고통이 늘 그분과 함께 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26절) 오늘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당신이 어머니 마리아와 하나임을 확인하신다. 그리고 애제자에게도 말씀하신다.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27절) 이렇게 성모님은 마음을 에는 고통 중에 십자가의 신비로 탄생되는 교회의 어머니요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 우뚝 서신다. 그분은 일생을 고통으로, 그러나 포기나 좌절함이 없이 아들과 하느님의 뜻을 좇아 끝까지 인내와 겸손으로 구원사업에 협력하셨다. 그러기에 성모께서 받으신 고통과 아픔은 하느님 크신 은총과 자비의 물리적(物理的)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성모 통고의 참의미
교회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낸 다음 날에 성모 통고 축일(9월 15일)을 지낸다. 이렇게 마리아 어머니의 고통을 지내는 신심은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복음서에 근거하고 있고, 또 이 축일은 풍성한 영신적 이익을 가져다 주고 있다.
1. 복음서의 근거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가 서 있었다"(요한19,25).
마리아 어머니가 갈바리아에서 함께 자리하신 것은, 예수를 성전에 봉헌할 때 성령이 시메온으로 하여금 예언하게 한 그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있었다. 그때 시메온은 이렇게 예언하였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루가2,35).
복음서를 보면 우리는 마리아의 다른 고통들도 익히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를 낳을 때 큰 불편을 겪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루가2,7). 베들레헴의 아기 학살 사건이 있었다(마태2,16-18). 3일 동안이나 예수를 걱정하며 찾아다녔다(루가2,41-50). 나자렛 주민들이 아들 예수를 들고 일어나 동네밖으로 끌어냈고,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다(루가4,28-30). 그 후 예루살렘의 율법 학자들로부터도 같은 곤욕을 치루셨다(루가11,53-54, 19,47-48 등등). 그 외에도 수난 기사들이 있다.
바오로 6세는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의 신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계시며, 야훼의 고난받는 종의 어머니로서 고통을 당하셨다"고 마리아의 고통을 이사야 53장을 암시하면서 설명하셨다(마리알리스 꿀뚜스 7).
2. 마리아의 연민
마리아와 함께 십자가 밑에 서 있으려는 것이 옛 신자들의 기도이자, 기도의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4-5세기에 걸쳐서 살았던 "사막의 교부" 포에멘 원장은 오랜 탈혼에서 깨어난 뒤에 이렇게 혼자말을 하였다: "내 영혼은 구세주의 십자가 밑에서 울고 계시는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와 함께 있었습니다.
나 역시 마리아 어머니와 함께 흐느껴 울고팠습니다."(APOTHEGMA 144).
4세기의 성 에프렘 시리아 사람은 예수의 십자가 밑에 서 계신 마리아의 애가를 썼는데, 이 마리아 애가는 성 토요일 저년 기도에서 지금도 불려지고 있다(시리아 전례).
500년경의 성 로마노 작곡가는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마리아 찬가"를 썼는데, 이 찬미가 속에는 예수께서 당신 모친에게 고개를 돌려 십자가의 신비를 설명하신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서방 교회의 대성인들도 마리아의 고통을 묵상하고 가르쳤는데, 그들 중에서도 성 암브로시오와 안셀모 그리고 베르나르도가 가장 돋보이는 인물들이다. 이 영성의 주제(통고)는 13세기에 이르러 아주 보편적이고 대중적으로 보급되었는데, 특히 프란치스코회 설교자들과 성모의 종 수도회들의 공로가 가장 크다.
이 시대의 성모 통고 신심을 알려 주는 좋은 시는 야꼬뽀네 다 또디(+1306)가 강렬한 슬픔을 표현한 "마돈나의 비애"가 있다:
오 아들아, 네 영혼이 널 떠났구나,
오 아들아, 기가 죽었구나,
오 아들아, 멀어져 가는구나,
오 아들아, 힘이 쇠하였구나!
오 아들아, 붉고 흰 피로 목욕하였구나.
오 아들아, 비할 데 없구나,
오 아들아, 난 누구에게 가야 하리? 오 아들아, 너는 날 떠났구나!
이러한 분위기는 중세기 성모 신심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었는데,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성자 곁에서 그 모친 마리아도 함께 수난하였다"는 사상이 짙게 깔려 있는 성시이다. 이어서 나온 시가 저 유명한 "십자가길의 성모"(STABAT MATER)이다. 그리고 11세기에 나온 "그리스도의 생애 묵상"이란 책에서 보편화되어 알려진, 소위 "성모님의 발작설"은 서서히 사라졌고 또 교황과 신학자들도 이를 인정치 않았다.
3. 마리아의 통고
마리아 통고 신심은 14세기 초에 나타났다. 이런 신심을 크게 보급시킨 분은 아마도 헨리코 수소(1295-1366) 성인인 듯 하며, 이 밖에도 도미니코회 라인강 주변의 신비가들의 공로가 크다고 한다. 갈바리아의 중심 장면에서부터 수난 전체로 묵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즉 예수님의 체포에서부터 장례 때까지를 묵상하던 중에 이 신심이 표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신비가들은 먼저 "마리아의 다섯 가지 기쁨"을 대중적인 신심으로 보급시킨 뒤, 성모님의 다섯 가지 고통 신심을 전파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성모 칠고로 발전되었다. 성모 칠고 묵상은 두 가지 형태가 있다.
마리아의 통고 내용은 예수님의 수난 내용과 같다. 예수의 수난이 곧 마리아의 수난이었다.
1. 예수, 체포되시고 매맞으으심을 묵상합시다.
2. 예수, 빌라도에게 끌려가 재판받으심을 묵상합시다.
3. 예수, 사형 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4. 예수,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묵상합시다.
5. 예수, 숨을 거두시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을 묵상합시다.
6. 예수, 십자가에서 내리움을 묵상합시다.
7. 예수, 베로 감아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시다.
그러나 복음서 전체를 보아서 예수의 어린 시절이 포함된 "성모 칠고"도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시메온의 예언.
2. 무죄한 어린이들의 학살과 에집트 피신.
3. 예수, 예루살렘에서 잃어버리심.
4. 예수, 체포되시고 재판 받으심.
5. 예수,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심.
6. 예수, 십자가에서 내리움.
7. 예수, 베로 감아 무덤에 묻히심.
이 신심의 또다른 변형은 당신 아들이 생활하시고 활동하시다가 사형당하신 곳을 찾아보시는 "성모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이다. 이 신심은 야고보 데 보라지네의 "황금 전설’에 따른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성모 칠고" 신심은 14세기에서 보편화되었고, 또 수많은 묵상과 기도를 그리고 시들이 쏟아져 나와 이 신심을 더욱 고취 시켰다. 물론 성모 칠고를 그린 회화와 성상들도 제작되었는데 저 유명한 "피에타"는 곧 이 신심의 영향으로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1464년초, 도미니꼬 회원인 앙렝이 "동정 마리아의 새로운 시편"(매일 성모송 150번 바치는 기도)을 전파하고 다닐 때, 그는 성모성 50번마다 우리 주님의 수난과 당신 모친의 통고 그리고 최후의 만찬부터 장례까지를 묵상의 주제로 추천하였다.
1475년에 쾰른에서 처음 생겨난 로사리오회는 "다섯 가지 통고"가 포함되어있는 15가지 신비 목록을 만들어 묵상토록 하였다. 위의 "다섯 가지 통고"는 게쎄마니의 비애, 매맞으심, 가시관을 쓰심, 십자가 지고 가심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다.
1482년, 플란델의 교구 사제인 요한 드 쿠당베르는 아래와 같은 형식으로 성모 칠고를 묵상하도록 가르쳤다:
1. 시메온의 예언(루가2,34-35).
2. 에집트로 피신하심(마태2,13-21)
3. 삼일 동안 예수를 잃으심(루가2,41-50).
4. 갈바리아로 오르심(요한19,17).
5. 예수, 십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심(요한19,18-30).
6. 예수, 십자가에서 내리심(요한19,39-40).
7. 예수, 무덤에 묻히심(요한19,40-42).
이 신심은 오늘날 "성모 통고회"가 보전하고 있고, 또 교황의 승인도 받았다.
4. 영성
구세주 예수의 수난에 대한 성모 마리아의 동참은 성서 신학이 다시금 활력을 불어넣어 준 마리아 영성의 중요한 일면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마리아를 "죄에 떨어진 원조에게 약속된 뱀에 대한 승리 속에 이미 예언적으로 그 여인의 모습이 암시되어 있는"(교회 55) 여인, 그리고 "시온의 훌륭한 딸"(교회 55)로 부르고 있으며, 바오로 6세께서는 주의 봉헌을 언급하시면서, 마리아를 "옛 이스라엘의 사명을 완수하신 분이자,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의 모델"(마리알리스 꿀뚜스 7)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갈바리아의 마리아는 "하느님의 일을 완수하신"(참조. 요한 19,30) 성자의 수난으로 그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팠던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스라엘과 교회 모두를 위해 "해산의 고통과 괴로움 때문에 울고 있었다"(묵시 12,2).
성서적인 이런 입장에서 보면, 마리아의 기쁨과 고통(신적 모성과 십자가의 고통)은 마리아와 교회에 대해 불가분의 성격을 띄는 것이다. 그러므로 9월 15일, 성모 통고의 전례는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을 상기시키는 중요한 신심이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25).
그리고 성모 통고 축일의 본기도는 다음과 같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당신 성자 곁에서 그 모친 마리아도 함께 수난하게 하신 천주여, 당신 교회로 하여금 성모와 함께 그리스도의 수난을 나눔으로써 그 부활에도 참여케 하소서. 성부와..."
<묵상마무리>
오늘은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평생을 예수님의 곁에서 수난과 고통을 함께 하신 성모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그동안 주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수난에 직면하자 모조리 떨어져 나갔습니다. 비록 멀찌이서나마 자리를 지킨 것은 요한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더 이상 군중의 환호를 받지 못하자 신앙을 지탱하던 인간의 의지가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종교계와 국가의 권위가 그분을 배척하자 사도들은 그만 꺽여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인간적인 버팀목에 의존하고 있다가 그것이 사라지자 그들 역시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십자가 곁에 머물렀습니다. 그분의 믿음은 결코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여겼지만 그분의 신성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점에 있어서 수정처럼 투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파멸로 만사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예수를 단순한 메시아가 아니라 하느님으로 우러러 보던 마리아는 어떤 기분이셨을지 생각해 봅시다. 말하자면 마리아에게는 하느님이 죽어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죽음은 마리아에게 더없이 비통한 인간적인 체험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심장을 도려내는 칼날과 같았습니다. 마리아는 단순히 메시아인 당신 아들 때문에 비탄에 잠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 때문에 비통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가 십자가의 심오한 그 신비를, 이른바 둔감하고 배은망덕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자신을 내던지시는 하느님의 신비를 간파한 사람은 오직 마리아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들의 본보기가 됩니다. 그분의 동정심은 하느님께서 품고 계시는 우리에 대한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당신 어머니 마리아를 모든 그리스도인의 어머니로 선포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혈연관계를 뛰어넘어 예수님 중심의 새로운 관계를 물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모시면서 공경하게 되고 내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그 이름처럼 다정하고 감미롭고 자애로운 이름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생기면 맨 먼저 어머니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사람, 애타게 기다리던 취직 통지를 받은 사람, 피땀 흘려 싸워서 승리의 월계관을 쓴 운동선수. 그들에게 마이크를 갖다 대면 한결같이 그 기쁨을 맨 먼저 어머니에게 알리고 싶다고 합니다. 앓아 누웠을 때는 어떻습니까? 어머니가 손만 잡아주어도, 아니 머리맡에 앉아 계시기만 해도 견딜 수 있었지요.
그분은 분명 우리들의 어머니이시니 좋은 일이 있을 땐 기뻐해 주시라고, 슬픈 일이 있을 땐 위로해 주시라고 응석을 떨곤 합니다. 영원한 젊음을 지니고 저희를 지켜주시는 성모님은 분명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에 가장 가까이 계셨던 성모님은 우리의 온갖 시련의 동반자요, 지주이십니다.......(아멘).......◆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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