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예수의 족보가 성경에 기록된 본질적 의미
몇 십 년 전만 해도 조그마한 글씨로 쓰인 손 바닥만한 파란색으로 된 신약 성경이 불신자들을 전도하기 위해 불신자들에게 전해지던 일을 기억할 사람은 다 기억할 것이다. 나 역시 학창시절 바로 그 문제의 성경을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여하튼 누군가로부터 받은 적이 있다. 그가 그것을 주면서 처음부터 읽으라고 하였다. 그의 말을 듣고 처음부터 읽으려고 첫 장을 여니 누가 누구를 낳는 내용이 계속 이어졌다. 그때 나는 계속 이어지는 그 낳는(족보) 이야기를 끝까지 읽을 인내력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 장도 읽지 않은 채 성경을 방치해 버렸다. 그러면서 도대체 이 성경은 그 지루하고 따분한 사람 낳는 이야기를 왜 그렇게도 장황하게 기록해 놓았까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성경의 그 족보는 기독교의 교주인 예수의 족보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예수의 족보인 줄도 몰랐다. 그러나 그 족보는 매우 중요하다. 그 까닭은 그 족보로 해서 기독교는 유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과 같은 율법의 종교가 아닌 은혜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의 교주인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자인 까닭도 그 족보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성경에서는 다른 종교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족보가 언급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예수의 족보가 기록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인 이유에서 기록되었다.
그것이 기록된 본질적 의미를 모른다면 율법과 복음의 근본적인 차이도 구원의 근본적인 의미도 모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그것을 모른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을 모르고서는 구원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그러면 예수의 족보가 성경에 기록된 본질적인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이니까 적어도 그 족보에 대해서는 덤으로 그냥 알아 놓아야 한다는 생각은 아직 그 본질적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신앙생활 오래 한 사람도, 또 구원받은 사람 중에서도 그 족보가 성경에 기록된 본질적인 의미를 모르는 이들이 있다. 이 본질적 의미를 모른 채, 예수의 족보에 대해서 성경의 개별적인 사안들을 아무리 많이 알고 아무리 많이 기억한다고 해도, 그것은 한갓 지식으로 머물뿐 믿음에 생동성을 부여하는 데 별 의미를 갖지 못 할 것이다. 그 족보에 관한 개별적 지식들은 거시적, 전체적, 본질적 관점에서 조명될 때 비로소 그것들은 하나로 통일되어 믿음에 생동성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이에 여기서는 예수의 족보를 성경의 거시적, 전체적, 본질적 관점에서 다루고자 한다.
내가 성경에 예수의 족보가 기록된 본질적인 의미를 알게 된 것은, 2003년 3월 구원을 확신한 지 2년 후, 2005년 여름 어느 수요일 저녁, 한 교회에서 평신도의 형제로서 로마서를 강해할 때였다. 강해 첫 시간에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 1:2-3)의 말씀을 접하는 순간, 레위기 “그가 팔린 후에 그에게는 속량 받을 권리가 있나니 그의 형제 중 하나가 그를 속량하거나, 또는 그의 삼촌이나 그의 삼촌의 아들이 그를 속량하거나 그의 가족 중 그의 살붙이 중에서 그를 속량할 것이요 그가 부유하게 되면 스스로 속량하되”(25: 48-49)의 말씀이 연상되면서 학창시절에 그 따분하고 지루하게 여겨진 마태복음 1장의 예수의 족보 이야기가 기록된 본질적인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그 본질적인 이유를 바로 레위기의 이 구절과 아래에서 언급된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희 9:22)는 말씀과 창세기의 아담의 타락에서 찾은 것이다.
주지하듯이, 아담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소유인 인간과 인간의 거주지인 땅은 인간을 죄로 유혹한 마귀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께 지은 죄로 마귀에게 팔려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인간의 아비가 되고 마귀는 인간의 거주지인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됨으로써 세상의 임금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을 영원히 죽게 할 마귀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귀의 통치가 아닌 하나님의 통치 하에서 영생을 누리자면, 인간은 하나님께 지은 그 죄 값을 다 갚아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께 그 죄 값을 갚자면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희 9:22)는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께 피를 흘러서 죽어야 한다. 이 말씀에는 인간이 피를 흘릴 경우, 그 흘린 피가 죄로 더러워진 인간을 깨끗이 씻어 정결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죄로 그 피가 깨끗하지 못하다. 그런 까닭에 인간이 피를 흘려서 그 몸을 씻어봤자 그 몸이 깨끗케 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더러워져 질뿐이다. 이는 더러운 걸레를 더러운 물에 빨면 빨수록 그 걸레가 점점 더 더러워지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인간들 중에는 그 어떤 인간도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할 자가 없다. 이를 위의 레위기 25 : 48-49절의 말씀에 비춰보면, 그것은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속량할 만큼 부유하지(깨끗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물론 천사도 인간의 구원자(속량자)가 될 수 없는데, 그 까닭은 우선 천사는 하나님께 죄지은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며, 둘째 천사는 영적 존재이기에 피 흘릴 육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죄 지은 당사자는 바로 인간인 까닭에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할 자도 그 당사자인 인간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인간이 피를 흘러 그 피로써 하나님께 그 죄 값을 모조리 갚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죄로 더러워졌기 때문에 그 누구도 구원자가 될 수 없다. 바로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물론 인간은 이 딜레마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그 딜레마를 해결한 능력이 있는 분이 딱 한 분이 있으니, 그 분이 바로 추호도 죄가 없는, 그래서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인 바, 하나님이 그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스스로 하나님께 죄지은 당사자인 인간의 아들, 즉 인자가 되어 인간이 지은 죄를 하나님께 모조리 갚은 것이다. 이것 역시 위의 레위기 25 : 48-49절의 말씀에 비춰보면,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친척(형제 및 삼촌)이 되어, 너무나 더러워(가난하여) 자기 자신을 속량(구원)할 수 없는 인간을 대신 속량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인간의 친척(인자)이 되어 인간을 속량(구원)하자면 인간의 몸에서 태어난, 그래서 인간과 같은 피를 흘릴 육의 모양을 가져야 한다. 그러자면 하나님에게 인간으로 태어날 인간의 족보가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족보에서 인간의 아들(인자)로 태어난 하나님이 바로 예수임은 주지하는 바이다. 따라서 예수의 족보는 인간의 구원과 본질적으로 연관된다. 이에 예수의 족보가 성경에 기록된 본질적인 의미를 아는 것은 바로 인간 구원의 본질적 의미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는 아들이 단 한 분뿐이다. 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아 그 피로써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할 하나님의 아들이 단 한분뿐임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까닭에, 한번 구원이 영원하지 않고 타락하여 읽어버릴 수 있다면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타락한 자들을 다시 회개케 하여 새롭게 하자면 하나님에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 십자가에 못 박을 또 다른 아들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아들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성경은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희 6:6)고 암시한다. 따라서 인간을 구원할 족보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족보 외에는 없다. 이에 성경은 구원받을 만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없다고 한 것이다.
인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는 말씀에 따라서 십자가에서 친히 피 흘려 죽어 그 피로써 인간이 하나님께 지은 모든 죄 값을 다 갚음으로써 이뤄진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은 인간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 의한 것이다. 이에 인간은 그 행위의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구원받는 것이(물론 아무리 그 대가를 지불해도 결단코 구원받을 수 없지만) 아니라 예수(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받는 것이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사람들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 자기들의 집을 방문한 것을 매우 기쁘게, 영예롭게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의 족보를 통해 구원자인 인자(예수, 인간의 친척)로 이 죄악의 세상에 온 것은 그 보다 훨씬 더 기쁘고, 더 영예롭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니 우둔하다. 하나님이 인간의 족보에 기록돼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기쁜 소식(복음)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기쁜 소식을 기쁘게 여기지 않으니 우둔하다. 불신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2. 예수의 부계 족보와 모계 족보 : 영적 족보와 육적 족보
하나님이 인간의 족보를 통해 인간의 아들, 즉 인자로 죄악의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그 죄로부터 구원할 것임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서 예언되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런데 예수의 족보는 2개, 즉 그의 아버지 요셉의 계보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계보 둘로 나누어진다. 우선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한 까닭에 인류를 구원할 그 피는 인간 마리아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그 육적 형질은 마리아의 것을 이어받았다. 따라서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했으므로 그의 아버지 요셉과는 육적으로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요셉의 족보에 기록된 것은 그 족보가 영적 의미를 지님을 의미한다. 부계, 즉 요셉을 따르는 영적인 예수의 족보가 바로 마태복음 1장에 나오고, 모계, 즉 마리아를 따르는 육적인 예수의 족보가 누가 복음 3장에 나온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1장의 예수의 족보는 그의 부계를 따르는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누가복음 3장의 예수의 족보는 그의 모계를 따르는 육적인 의미를 지진다. 이 육적인 예수의 족보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에서 보듯이 이미 창세기에 나온다. 물론 영적인 족보도 구약의 여러 곳에서 예언되고 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의 부계 족보는 아브라함에서 요셉(마리아)에로 내려오는 식으로 기록돼 있고, 누가복음 3장의 예수의 모계 족보는 그 반대로 마리아(요셉)에서 아담을 거쳐 하나님에게로까지 올라가는 순서로 기록돼 있다. 이 두 족보는 다윗까지는 같지만, 다윗부터 다르다. 즉 부계 족보는 다윗이 솔로몬을 낳는데서 시작하여 여러 대를 거쳐서 요셉(마리아)에 이르고, 모계 족보는 다윗이 나단을 낳는데서 시작하여 여러 대를 거쳐서 마리아(요셉)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요셉과 마리아는 다윗을 같은 조상으로 하고 있지만 다윗의 후손에서 갈라진다. 즉 요셉은 다윗에서 난 솔로몬의 계열에 속하고 마리아는 다윗에서 난 나단의 계열에 속한다.
3. 예수의 족보에 나타난 기독교 복음의 성격
그러면 예수의 족보는 어떤 성격을 갖는가? 성경에서는 육적인 의미보다는 영적인 의미가 더 중요하고, 더 본질적이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어야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이지 육적 자손은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 따라서 구약 성경에서 언급되는 인물들은 대개 예수의 영적 족보에 속하는 부계 사람들이다. 이런 까닭에 마태복음의 부계에 속하는 몇몇 사람들을 살펴봄으로써 이제 예수의 족보의 성격을 살펴보자.
일단 예수의 족보를 보면 세상에 내 놓을 만한 자랑할 만한 족보가 결단코 아니다. 우선 믿음의 조상이라 불러지는 아브라함해도 자기 살기 위해 그릴 왕 아비멜렉에게 자기 처를 자기 누이로 속인 죄를 지었다. 구약에서 대표적인 믿음의 본으로 여겨지는 다윗은 세상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중범죄자이다. 그는 자기 심복 우리야의 처, 밧세바에 유혹되어 그녀와 불륜을 저지르고, 그에 그치지 않고 그 불륜을 은폐하기 위해 그 심복 우리야를 전선의 최 전방에 배치하여 의도적으로 살해하여 한 가정을 멸한 가정 파괴범이다. 비록 이들이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아, 결국에는 세상의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존귀한 사람들로 여겨져 하나님이 그들의 가계를 통해 구원자를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그래도 따지고 보면 그들은 죄로 더러워 질대로 더러워졌으며, 따라서 세상적으로 보면 그들은 그리 높은 수준의 인격적 도덕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나아가 예수의 족보에는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로 추한 사건도 있다. 바로 시아버지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과 통정하여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사건이다. 거기에는 또한 세상에서 가장 천시 받은 여리고성의 기생(창녀) 라합도 기록돼 있다.
유대인의 족보에는 여자는 기록될 수 없는데도, 예수의 족보에는 여자가 4명이나 기록돼 있다. 물론 그들이 거기에 기록된 것은, 그들이 정결하거나 정숙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방금 봤듯이, 라합은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 받는 여리고 성의 기생이고, 다말은 그 시아버지와 불륜을 저지른 여자이고, 다윗의 심복,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는 사정이야 어떠하던 다윗과 불륜을 저지른 여자이며, 룻은 도저히 유대인의 성경에는 기록될 수 없는 이방(모압) 여자이다.
이상으로 보건대,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예수의 족보는 세상의 그 어떤 족보보다 더 천하다면 천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하나님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는가 이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그들의 족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대개의 경우 악인들은 그들의 족보에 기록하지 않고 빼버리기도 한다. 특히 명문대가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명문대가일수록 그 족보가 천민들의 족보보다 더 더러울 수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명문대가의 족보는 아주 거룩하고 깨끗한 것으로 여기고, 천민들의 족보는 아주 천하고 불결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예수께서 세상에서 거룩하다고 여김 받는 바리새인들, 서기관, 율법자들을 독사의 세끼,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고, 그 당시 세상에서 천하다고 여김 받는 “세리와 창기들이 그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태 21:31) 한데서 나타난다. 예수께서 볼 때, 어차피 세상 사람들은 죄인인 까닭에 다 더럽고 추하지만, 그래도 그 경중을 따진다면 세상에서 거룩히 여겨지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천하게 여겨지는 사람들보다 더 악하고 더 더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율법학자들의 친구는 될 수 없었지만 세리와 창기의 친구는 될 수 있었다.
적어도 외관상으로 볼 때, 예수의 족보는 세상에서 가장 죄 많은 더러운 족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로 통정하여 자식을 낳은 그런 반인륜적인 시아버지와 며느리, 기생, 가정 파괴범을 세상 족보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세상에 기생이 없는 것도 아니고, 또한 세상에서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통정하는 불륜이 없는 것도 아니고, 가정 파괴범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세상족보에는 그런 사람들이 아예 기록이 되지 않거나, 설렁 기록된다고 해도 그들이 범한 추한 죄악은 다 빠지고 좋은 것만 기록된다. 따라서 이런 실상을 알고 보면 예수의 족보나 세상의 족보나 실은 그게 그거이다. 아니 오히려 예수의 족보가 더 깨끗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상 족보는 가식과 꾸임으로 가득한데 비해 예수의 족보는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인간의 죄악상을 하나도 꾸미지 않고 있는 그 대로 백일하에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의 족보는 외식하는 바래새인들의 족보라 할 수 있으며, 예수의 족보는 외식이 없는 세리와 창기의 족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적 기준으로 볼 때는 세상 족보가 더 깨끗하지만,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볼 때는 예수의 족보가 더 깨끗하다.
복음의 기독교가 예수의 족보를 통해 보여 주고자 한 것은, 세상 족보가 꾸밈과 가식, 즉 외식으로 가득하듯이 세상 사람들도 외식으로 가득하며, 이에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죄가 많은 데도 그걸 모르고 의로운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족보는 바로 그러한 세상 사람들에게 그(족보의) 가면을 벗고 그 가면에 가려진 갖가지 죄악상을 고통스럽게 직시하게 하여, 그로써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의 숨겨진 갖가지 죄악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또한 이로써 예수의 족보는, 궁극적으로 예수를 믿음으써 예수의 족보(하나님의 혈족)에 새롭게 기록되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독교가 세상 종교들, 특히 유교와 같은 허례허식, 위선, 외식, 명분의 종교가 아님을 보여준다.
위에서 봤듯이 예수의 족보에는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최대의 흉악한 죄악, 즉 시아버지(유다)와 며느리(다말)의 불륜, 다윗의 간음과 이 간음을 은폐하기 위한 그의 살인, 그로 인한 가정파괴가 기록돼 있다. 이런 죄악이 예수의 족보에 기록된 까닭은, 첫째 인간들은 누구든지 그런 엄청난 죄를 저지를 죄악 중에서 태어났음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며, 특히 그렇게 태어났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우둔함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며, 둘째는 아무리 흉악한 죄라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그 믿음 안에서 다 사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또한 예수의 족보에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까지도 기록된 까닭은, 첫째 인간인 이상, 인간은 성별에 관계없이 다 죄인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며, 그 다음 죄인인 이상, 인간은 성별에 관계없이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다 예수의 피로 구원 받을 수 있는 (남여) 평등한 존재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이다. 그 다음 유대인인 예수의 족보에 유대인의 족보에는 도저히 기록될 수 없는 이방 여자가 기록된 까닭은, 하나님의 선민인 구약의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받아 하나님의 선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며, 따라서 그것은 기독교가 특정한 민족, 즉 유대인만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세계만민을 위한 보편적 복음임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족보, 즉 인간들의 족보를 누가 복음 3장에서 유일 절대신인 하나님에게로 까지 언급한 것은 인간의 최종 근원이 바로 창조자인 하나님이며, 이에 인간은 바로 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보여주며, 나아가 인자, 즉 인간의 족보에 등재된 예수가 그간 하나님과 인간을 단절케 한 죄를 그의 피로써 청산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을 교통케 하며, 이는 예수를 믿어 예수의 족보(하늘의 생명 책)에 새롭게 등재된 인간(성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통하여 그의 원래의 근원에로 귀환케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의 족보를 통해서 기독교의 신은 인간과 우주를 창조한 유일 절대 신임이 확인되고, 또한 이 신과 인간은 합일적 존재임이 입증된다.
|
첫댓글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참고할 만한 좋은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교주라는 말이 좀 거슬리네요. 그냥 예수님이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요.
다른 종교와 비교하자면 그 표현을 써야 하기에 그 표현을 사용했을 뿐 별 뜻은 없습니다.
기독교가 특정한 민족, 즉 유대인만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세계만민을 위한 보편적 복음임을 의미한다. ㅡㅡ> 유대교는 유대민족만 위한 종교이지만 기독교 그리스도교는 세계만민을 위한 복음이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