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 어 / 예정론을 마치며 -문경규, www.cresal.net/
- 청함의 구원과 택함의 구원
성경을 보면 청함의 구원이 있고 택함의 구원이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말씀하셨다. 또한 성경은 구원의 문에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크고 넓은 문이 있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마7:14)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 ”(마7:21)는 점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가르침은 어거스틴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진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누구든지 청함을 받는 자는 곧 택함을 받은 자요, 주여 주여 부르는 자마다 이미 영원한 구원을 받은 자에 해당한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 그것은 어거스틴에게는 청함과 택함의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에게는 믿음의 시작이 곧 구원이요 예정의 결과다. 따라서 누구든지 청함을 받은 자는 곧 예정된 택함의 구원을 받은 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레니우스에게는 청함의 구원과 택함의 구원이 확연히 다르다. 이레에게 청함의 구원이란 죄 사함을 받아 태초의 아담의 무죄한 상태로 돌이키는 것이며, 택함의 구원이란 태초의 창조의 목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에 온전히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형상의 온전함에 이른 자들은 오직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갈5:22)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된다.(갈6:8) 그리하여 천국은 믿음만 있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열매맺는 자들만이 들어간다는 말씀을 성취한다.(마21:43).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는 이같은 택함의 구원이나 열매맺는 구원을 가르치지 않는다. 열매맺는 구원을 말하면 그것은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이라며 몰아붙이기 일쑤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성령의 열매는 행위로 맺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을 좇는 온전한 믿음이 아니면 성령의 열매를 맺을 방도가 없다. 따라서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함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지 못한 청함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음을 뜻한다.
아마 이 말을 듣는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사람이 무슨 재주로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는가.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도데체 무슨 말인가 하며 곤란함을 토로할 것이다. 안타깝지만 교회는 아직도 이 정도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 초의 도보는 기가 막히게 가르치면서 조금만 어려운 말씀에 들어가면 구원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며 거부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많은 교회가 아직도 택함의 구원에 대한 지식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는 길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좁고 협착한 영의 길을 알지 못하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택함의 구원에 무지한 상태에서 청함의 구원에만 매달려, 택함의 구원을 제거하고 외면하고 있는 것이 교회의 영적 현실이다.
어거스틴도 바로 이와 같은 자였다. 그는 청함의 구원을 받은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다 보니 청함과 택함 사이를 구별하지 못하였고 좁고 협착한 구원의 길에 대하여는 전혀 무지한 상태였다. 이같은 수준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믿음의 시작이 곧 구원이라고 외치는 일이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으며 그 구원은 영원보장된 은혜의 구원이라고 외치는 일 뿐이었다.
자유의지의 제거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그 즉시로 청함과 택함의 구원을 받는다고 했던 어거스틴의 구원론을 위협한 것이 바로 펠라기우스의 주장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믿음을 시작하기로 결심할 때 그 위에 은혜의 구원이 부가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자유의지에 대한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어거스틴에게 심각한 위협이다. 만일 펠라기우스의 주장대로라면 구원이란 그야말로 자유의지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되고, 인간의 능력으로 쉽게 성취할 수 있는 행위의 구원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입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유의지가 믿음의 시작에 관여할 수 없도록 막아야 했다. 그것을 막지 못하면 구원은 은혜의 구원이 아닌 자유의지에 의한 행위 구원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연유로 어거스틴은 자유의지가 믿음의 시작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완전하게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시작에 자유의지가 관여할 수 없게 만들었고 거기에 100% 하나님의 의지만 남게 하였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예정론이다.
자유의지와 은혜의 조화
청함과 택함의 구원이 구분되어 있는 이레니우스에게는 이런 문제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자유의지와 은혜가 서로 자리다툼을 벌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청함의 구원의 영역에서 자유의지를 침해하거나 제거하지 않으시며 은혜를 바탕으로 자유의지의 회개를 촉구하고 부르신다. 이 청함의 구원에서 자유의지는 구원에 대한 결정권이나 우위권을 갖지 못한다. 단지 구원을 시작하든지 말든지를 할 수 있을 뿐이다. 혹여 자유의지가 믿음을 시작한다해도 구원의 길은 이제 출발선에 있는 것에 불과하고, 자유의지가 은혜를 거부한다해도 은혜의 초청은 언제나 쉬지 않고 계속된다.
청함을 받은 성도가 택함의 구원에 이르려면 말씀과 성령의 연단을 받아 온전한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도록 힘써야 한다. 이 과정에서 주도권과 결정권을 갖는 것은 역시 은혜다. 은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유의지를 조정하거나 제거하지 않으며 자유의지가 회개하고 거듭나며 깨닫고 순종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이러한 성장의 과정이야말로 이레니우스가 말한 구원의 핵심 과정이다.
그런데 이레니우스의 구원론을 접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도데체 어느 정도 성장하고 얼마나 성화되어야 구원받을만큼 되는 것이냐고 한다. 그것은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의문일 뿐이다. 그것은 그 안에 들어가보면 안다. 예를 들어 쟌느 귀용이나 앤드류 머레이처럼 그 안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느 위치에 어떻게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레니우스의 구원론은 아직 그 핵심적인 내용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안에 감추어진 많은 내용들도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이것이 과거에 많은 사람들이 이레니우스의 구원론에 대해 의문을 가지면서 멀리 하게된 이유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아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고, 눈과 귀에 성령의 할례를 받고 마음 눈이 밝아지게 되면 그 모든 것을 밝히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온전한 구원론인 것을 말이다.
예정론의 퇴치
만일 어거스틴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의 핵심과정을 제대로 알았다면 예정론 따위는 파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의 구원론 안에서는 은혜가 자유의지를 존중하면서 또한 자유의지를 이끌어 변화시키며 끝내는 자유의지가 치유되어 은혜에 순복하고 일치하게끔 만든다. 이러한 구원의 핵심과정에 무지했던 어거스틴은 믿음의 시작에 집착하여 자유의지를 소멸시켰으며 끝내는 은혜마저도 폭군적인 형태로 만들어 예정론이라는 기형적인 구원론을 배태시켰다.
따라서 교회가 예정론이라는 괴물을 물리치려면 먼저 구원의 핵심과정을 온전히 조명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레니우스의 창조의 본질을 제대로 조명하는 노력이 필요하며 이레니우스의 창조론의 핵심이 먼저 증거되어야 한다. 그 후에 이레니우스의 구원론이 제대로 조명된다면 예정론이라는 괴물이 다시 교회에 발을 붙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첫댓글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인간이 갖고있는 이성으로서 한계를 인정하지못하면 성경은 역설적이 됩니다.
칼빈은 그의 교리를 펼칠때 제일먼저 우선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우선하기에 칼빈의 교리도 때로는 역설적이고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게됩니다.
칼빈의 예정론도 이성적인 생각과 이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생각을 염두해두고 공부하여야합니다.
웨신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섭리하시는데 두가지 원인을 구분합니다.
제 1 원인되시는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에 따라, 모든 일들이 변함이나 틀림이 없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동일한 섭리에 의해서, 하나님은 제 2 원인들의 성질에 따라
그 모든 일들이 필연적으로, 자유롭게 또는 우발적으로 일어나도록 작정해 두셨다.
하나님은 그의 일반적 섭리에서는 여러 수단들을 사용하신다.
그렇지만 그는 그 수단들 없이 그것들에 초월, 그리고 역행하여서도 그의 기쁘신 뜻대로 자유롭게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무한하신 선하심이 그의 섭리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섭리는 아담의 첫번째 타락과, 천사들과 사람들의 모든 죄까지도 포함한다,
하나님은 허용하시되 여러 세대에 가장 지혜롭고 강력하게 제한하시고, 그 밖에도 명하시고 주관하시어
그 자신의 거룩한 뜻들을 이루도록 하신다
@보혈의피 그러나 죄악성은 오직 피조물에게서 나온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가장 거룩하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의 조성자이거나 승인자가 아니시며 또한 그러실 리도 없다.
제1원인되시는 하나님의 예정을 인간적인 논리로 재단을 하려하면 그모든 생각은 판단하는
그 사람의 의식과 죄로 들어 날 뿐입니다.
샬롬!~
귀한 강론에 감사를 드립니다.
진작 이런 확실한 구원론이 있었다면 한국교회는 지금 처럼 타락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칼빈주의 신학을 하면서 예정론 부분에서 엄청나게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이야 이것 저것 다 내던지고, 성령님의 가르침만 신뢰하면서 살다보니 편합니다.
이 글에 많은 공감을 하고 있으며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어거스틴이 청함에 구원론 수준에서 머물러있는지는 모르겠고 오늘날 많은교회가 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도
조상탓이 아닙니다. 오늘날 개혁주의 물려받았다는 그들이 잘못된 것입니다.
개혁주의 구원론은 구원의 서정에서 택함,부르심,중생,칭의(회개와믿음),성화,영화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의 열심이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거듭난 이후로 인간의 책임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협력을 강조합니다.
칭의와 성화는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입니다.
귀한 댓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