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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28일 금요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예수께서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루가 6,12-19)
Jesus went up to the mountain to pray,
and he spent the night in prayer to God.
When day came, he called his disciples to himself,
and from them he chose Twelve,
whom he also named Apostles:
말씀의 초대
부름 받은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며 그분의 가족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하여 주님의 거룩한 성전을 이루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돌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밤새 기도하시고 열두 사도를 부르신다. 열두 사도 공동체가 이루어져 예수님과 함께 세상 구원을 위한 교회의 기초를 놓게 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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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밤새 기도하시고 나서 날이 새자,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뽑으십니다. 마치 합격자를 발표하시듯, 그를 따르던 사람들 가운데 당신 곁에 가까이 두실 사도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사도들을 뽑으시면서 사도가 될 자격으로 과거 경력이나 능력을 묻지 않으십니다. 어부이든, 세리이든, 능력이 있든 없든 이런 것은 그분의 합격 기준이 아닙니다. 한편 그들 미래에 대해서도 묻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팔아넘기든 배신하든 있는 그대로 부르십니다.
하느님 편에서는 계획이 있어 사도들을 부르셨지만, 우리 편에서는 이것을 운명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은 세속적으로 보면 기구한 운명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 부름 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순교했고,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부름을 받지 않았으면 아무 일 없이 평범하게 한평생 살았을 텐데, 그들은 모두 자신의 평범한 삶을 포기하고 떠돌이 삶을 살다가 순교를 해야 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이러한 부르심으로 시작되었고, 그 부르심은 교회를 통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회에 한 발 더 깊이 봉사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조건이나 능력 때문에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부름 받은 것입니다. 부르심 그 자체가 의미 있고 소중한 것은 바로 이들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때로는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아야 하지만,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품고 사는 가장 복된 운명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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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말씀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명단이 나옵니다. 뛰어난 인물들이 아닙니다. 명성이 자자하거나 화려한 직업을 가진 분들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분들이 훗날의 초대 교회를 이끌어 갑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끌어 주시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르기에 거저 하늘이 돕는다고 말합니다.
조선조 말기의 화가 ‘장승업’은 종이 파는 가게의 ‘노비’였습니다. 그는 주인 아들의 어깨 너머로 그림을 배웠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장의 그림을 그리자, 그의 천재성은 드러났고 마침내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그림을 알아본 사람들이 그를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안견, 김홍도와 함께 조선 시대의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지며, 화가로서는 최고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의 재능은 하늘이 내린 것이었습니다. 천민도 신분의 벽을 넘을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삶은 후대의 개혁가들에게 큰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하느님의 뜻’은 머물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전하고자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시몬과 유다’ 사도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업적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알려지는 자체에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 일은 주님을 염두에 두고 해야 합니다. 사람을 염두에 두면 잡음이 생깁니다. 사도들의 삶에서 묵상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 신한열 수사-
대학 초년 시절 인도의 마더 데레사께서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언론에서 대서특필했고 김포공항에서부터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그분의 손이나 옷자락을 만지려고 몰려드는 바람에 입국장을 나오면서 넘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나는 이튿날 강연을 하려고 학교에 온 데레사 수녀님을 위해 덩치 큰 친구 몇몇과 함께 보디가드 역할을 자처했다. 그분의 손을 잡고 강당에서 총장실로 운동장으로 이동했다. ‘살아 있는 성녀’ 라고 언론에서 떠들었기 때문일까 ? 과연 들은 대로 사람들은 수녀님의 옷이라도 만지려고 사방에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노동자 손처럼 거칠고 굳은살 박힌 그분의 손을 잊을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한테서 힘이 나와 사람들을 고쳐주었기에 군중은 그분을 만지려 했다고 전한다. 그들은 그분이 지니신 신비한 힘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그리스어 원문에서 이 신비로운 ‘힘’ 을 가리키는 말은 ‘뒤나미스 ()’ 다. 권력과 권위를 뜻하는 ‘엑수시아 ()’와 다른 말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부어주실 때 제자들이 받는 힘이 바로 이 뒤나미스다. (사도 1, 8) 예수님을 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만난 사람은 그 내밀한 친교에서 힘과 능력을 얻어 그분 사랑의 증인이 된다.
성경은 사도들을 보통 제자들과 확실히 구분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부활 메시지를 선포할 사명을 받은 이들이 사도이고 그들이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사도들은 세상 곳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기쁘게 감내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인간적 또는 초인간적 능력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힘’ 이었고 하느님께 받은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 이었다. (2티모 1, 7 - 8) 그리스어에서는 모두 같은 말 뒤나미스다.
오늘 우리 신자들은 제자로 머물 것인가 아니면 사도로 간택되어 파견될 것인가 ? 사도란 힘을 지닌 사람이다.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힘, 위로하고 격려하고 일치하게 하는 힘을 받은 사람이다. 예수님을 만지려 손을 내밀고 또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는 그분의 손길에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이다
영적인 직관력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 두 사도를 뽑으신 내용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서 특별히 열 두 사도를 뽑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밤 새워 기도를 하셨다고 복음은 기록합니다.
밤 새워 기도하셨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
누구를 뽑을까 고심하셨다는 뜻일까요?
제자들을 놓고 어떤 사람이 사도로 더 적합한 사람일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셨다는 뜻일까요?
고민을 하셨다면 아마 열 두 사도 중
두 사람 때문에 특히 고민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유다 이스카리옷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열혈 당원 시몬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심하여 뽑으심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예수님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을 배반할 사람을 사도로 뽑으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열혈당원을 뽑으신 것도 주님께서 세상 왕국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세우고자 하셨던 그 순수한 뜻을 훼손하는 것이니
잘못 뽑으신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본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도(Saint)이기에 예수님께서 뽑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뽑으셨기에 성도가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가 될 만하기에 예수님께서 뽑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뽑으셨기에 사도가 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밤 새 기도하심은 적합도 면에서 고심하신 것이 아니라
어떤 제자가 하느님의 뜻인지,
그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하심일 것입니다.
제가 부산 봉래동에 잠깐 있을 때,
점쟁이가 영세를 받기 위해 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점쟁이들을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만나서 얘기를 해보니 상당히 이해가 가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내려서 점을 치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은 주역을 가지고 점을 친다는 것입니다.
그분도 고시 공부를 하러 절에 갔다가
거기서 주역을 배워 알게 되었고
계속해서 고시에서 낙방을 하자
점치는 것을 생업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역으로 모든 것을 맞추지는 못하기에
정신을 맑게 하는 수양을 해야 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주역에 의한 점괘에 영적인 직관력이 더 해져야만 되는데
영적인 직관력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기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얘기에 의하면
인간적인 욕심이나 감정이나 생각이나 판단을 없앨 때
그때 영적인 직관력을 가지게 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인간적인 생각이나 판단을 비우시고
하느님의 뜻을 오롯이 찾는 기도를 밤 새 하신 것이 아닐까,
저는 오늘 인간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추측해봅니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그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양승국신부- <사제의 특권은 봉사하는 특권> 사목헌장 반포 40주년을 기념하는 강연회와 토론회가 서강대학교에서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교회에 내려주신 가장 값진 선물 가운데 하나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입니다. 이 공의회를 통해서 마련된 여러 헌장이나 문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헌장 중에 하나가 사목헌장입니다. 오늘 강연회에서는 오늘날 우리 교회가 공의회의 정신, 특히 사목헌장의 영성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반성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루기 민감한 문제들도 많이 거론되었지만, 제 개인적으로 정말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부끄러워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나름대로 심각하게 고민도 했습니다. 한 강사께서는 김추기경님께서 언젠가 아시아 주교회의에서 하셨던 말씀을 다시 한 번 인용하셨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하느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죽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사목헌장이 교회에 제시한 노선의 핵심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말살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께서 모욕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회복되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존엄성이 회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기꺼이 민중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투쟁해야 합니다. 빈곤의 퇴치를 위한 투쟁, 가난한 사람들이 무시되고 멸시받는 현실에 맞선 투쟁, 소비향락주의와의 투쟁, 부의 숭배와 맞선 투쟁, 남녀 간의 대립구도와의 투쟁, 가족 간의 분열에 맞선 투쟁...교회는 백성들이 직면하고 있는 제반 현안에 기쁘게 동참함으로 인해 자신의 본분과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제, 수도자를 비롯한 교회 안의 지도자, 봉사자들은 하나의 특권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군림하는 특권, 명령하고 지시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세상 사람들 앞에 자신 있게 ‘나는 하느님 나라를 보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잠자다가 깨웠을 때, ‘왜 사느냐?’고 누군가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라고 즉시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선교란 세상을 복음으로 아름답게 꾸미는 일입니다. 진정한 선교란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리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복음을 선포하는 우리 자신이 먼저 복음화되어야 합니다. 선교일선에 나서는 나는 복음화가 되어 있습니까? 복음화를 외치는 우리 교회는 복음화가 되어있습니까?” 강사로 나선 신부님들의 주옥같은 말씀들, 뼈에 사무치는 말씀들, 다시 한 번 진지한 숙고와 회개를 촉구하시는 말씀들에 하루 종일 가슴이 많이 찔렸습니다. 오늘 성 시몬 사도와 성 유다 사도의 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협조자로 부르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을 도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의해 다시 한 번 재천명됩니다. 사목헌장 머리말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뽑으신 이유는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도래했다는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세상만민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는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입니다.” 시몬과 유다를 비롯한 예수님 제자들의 가장 일차적인 과제는 백성들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이 겪고 있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함께 겪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을 교회와 분리시키거나 이원화시키지 않고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세상 안으로 투신하는 일이었습니다. 교회의 보물인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철저하게 그들과 동화되고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성 시몬 사도와 성 유다 사도의 축일을 맞아 세상의 모든 사목자들이 다시 한 번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육화와 겸손의 영성을 철저하게 실천하게 되기를 빕니다. 진정한 사목이란 세상 사람들이 사목자를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향해 사목자 자신을 활짝 여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진리를 기억하고 이 땅의 모든 사목자들이 열린 마음으로 신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향해 다가서길 기원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자랑하고 내세우는 신앙인이 되자. 시몬(응답하셨다, 들음이란 뜻)은 가나안 출신으로서(마태 10,4; 마르 3,18) 혁명당원이었다(루가 6,15; 사도 1,13). 혁명당원은 극단적인 유대 민족주의자들이며 율법주의자들이다. 이들은 구약 성서의 메시아를 유대인들이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를 이루게 해주는 분으로 해석했다. 유대의 왕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며, 다른 어떤 민족도 유대를 지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당시 유대를 지배하던 로마인들에 대하여 세금 납부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인들의 통치 자체가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여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키곤 했다.
유다(존경받는 또는 찬미하리라는 뜻)는 타데오(마음이 크고 높음이란 뜻)라고도 불리는데, 그는 모든 사도들의 이름이 나타나는 곳을 제외하고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시몬은 성 유다와 함께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복음을 선포하였고, 페르시아에서 함께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시몬은 십자가형 또는 톱으로 몸의 절반이 잘려 순교하였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시몬을 표현할 때는 큰 톱이나 십자가와 함께 묘사를 한다. 그러나 동방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성 시몬은 에데사에서 평화로이 운명하였다고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살펴보면 결코 뛰어난 성덕이나 학식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뛰어난 재능이나 화려한 지위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 시대의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보통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혁명당원과 세리처럼 서로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달갑지 않은 시선을 받는 사람들도 그 안에는 여럿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러한 이들을 뽑으신 까닭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힘과 능력에 의지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에도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 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도록”(마태 10,9-10) 하셨다. 무엇인가를 자신이 가졌다고 생각하면 그 가진 것에 의지하고자 한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께만 의지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제자들을 빈손으로 파견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자랑하고 내세워야 할 것은 세속적인 어떤 능력이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이며 그리스도뿐이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당신의 제자로 뽑으셨다. 주님의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머무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약점을 자랑해야 한다(2고린 12,9).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해야 하며(예레 9:22-23), 아무도 인간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1고린 3,21). 이처럼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내세우고 자랑해야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인간적으로 보잘것없는 자들을 택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로도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갈라 6,14)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주님의 참된 제자는 그가 무엇을 가졌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내세우고 자랑할 주님이 그 안에 계시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결정된다. 크고 화려하고 거창한 능력이나 힘, 기술이나 재능을 가지는 것보다 더 고귀한 것은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다. 온전히 주님께 의지할 수 있는 믿음, 주님을 내세우고 자랑할 수 있는 믿음이 더 고귀한 것이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제자들처럼 주님을 자랑하고 내세우는 신앙인이 되자.
-경규봉신부-
부르심
-서인덕 신부-
“신부님은 왜 사제가 되려고 하셨어요?”라는 질문을 받고서 ‘나는 왜 사제가
되었는가?’하고 다시금 제 성소의 첫 발걸음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어렸을 때 저의 가족은 절에 다녔습니다. 열심히 다니던 절에 언제부터인가
가족 모두 가지 않았습니다. 이집 저집을 기웃기웃 하는 것처럼 저 역시
이 교회(개신교), 저 교회(성당) 기웃기웃 했답니다. 그러다 어떤 계기가 되어
저희 가족은 가족세례를 받았습니다. 가족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례하면서
신부님의 모습이 너무도 멋있어 보였는데, 제 성소의 첫 발걸음은 그저 멋있어
보였던 신부님처럼 되어보겠다는 결심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복사를
하며 성소의 싹을 키웠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자 했습니다.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건강한 체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 몸둥이가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건강을 그분께서 주셨기에 이렇게 사제로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를 하느님께서 불러주셨습니다.
여기보다는 저기가, 이것보다는 저것이 탐이 나는 우리이지만 하느님께서
각자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 불러주셨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지금 하는
일에서,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 더 충실하지 않을까 하고 묵상해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
- 김인옥 수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뽑으실 때 선발 기준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틀림없이 특별한 자격은 없었을 것이다. 복음의 정황으로만 상상해 본다면 산에서 밤새워 기도하고 날이 새어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 음성을 듣고 달려간 사람들은 예수님 근처에서 자다가 잠귀가 밝아 벌떡 일어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양승국신부- <다이어트를 위한 기도>
한 외국 어린이가(비만수치가 꽤나 높은) 하느님께 드린 ‘다이어트를 위한 기도’입니다.
“하느님, 저를 빼빼하게 해주세요. 그게 너무 힘드시거든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뚱뚱하게 해주세요.”
수능을 앞두고 교회나, 성당, 사찰에서는 수험생들을 위한 기도가 한창입니다. 분위기가 사뭇 비장합니다. 때로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합격 100% 보장’, ‘불합격 시 전액 환불’...
‘이번에 저희 아들, 어느 어느 대학, 어느 학과, 그것도 수시모집에 꼭 합격시켜주십시오.’라고 수도 없이 반복하는 어머니들의 기도 앞에 하느님께서 참으로 난감하시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기도도 기도일까, 하느님을 너무 몰아세우는 기도는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감출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시는데, 우리의 기도방식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중차대한 ‘큰일’을 목전에 두고 하느님께 기도드리십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당신과 동고동락할 제자단, 요즘으로 말하면 주교단을 설립하기에 앞서 기도하러 산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새워가며 어떤 기도를 바치셨을까요? 아마도 이런 기도였겠지요.
“아버지, 당신 종이 듣고 있사오니 말씀해주십시오.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버지 나라 건설에 합당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다른 무엇에 앞서 깊은 침묵에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심연의 침묵 가운데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을 것입니다.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고 간구하셨을 것입니다.
제대로 된 침묵기도란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 홀로 남아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침묵기도입니다.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겠고 버리지도 않겠다.”고 하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침묵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과 그분께서는 오늘 우리 처지가 어떠하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고 드리는 침묵기도입니다.
결국 참된 기도는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기도입니다.
인간의 언어는 너무나 제한적입니다.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긷든 수많은 이야기들, 미세한 영혼의 울림들을 필설로 표현하기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그저 하느님 현존 안에 있는 그대로 머무는 것입니다. 때로 하느님 앞에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많은 말보다 침묵이 더 필요합니다. 때로 우리가 그저 그분의 든든한 팔 안에 푹 안겨있는 것도 필요합니다. 자상한 아버지이신 그분 앞에 그저 편안히 앉아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 기도인지 모릅니다.
때로 그분 앞에 우리가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도 좋은 기도입니다.
때로 많은 사람들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꽤 많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시작하기 직전에는 심한 긴장감을 느낍니다.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기도 합니다. 그 순간의 기분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그러고 나면 하느님께서는 어느새 제 마음을 안정시켜주십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도록 이끌어주십니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군중들은 모두가 따뜻한 마음을 지닌 내 형제요 자매로 변화되는 기적이 벌어집니다. 어느새 불안감은 사라지고 기대감에 부풀어 강론대로 올라갑니다.
나는 뽑힌 사람
지난봄 남미 에콰도르에 4명의 선교수녀 파견이 있었다. 지난해에 서원을 한 모든 수녀에게 지원서가 배부되었고 38명이 지원을 했다. 성탄 무렵 수녀회 소식지를 통해 파견될 수녀님들의 이름이 실렸다. 책임을 맡은 수녀님은 수련장 수녀님이셨다. 내년이면 50이 되는 수녀님이 지원서를 쓰신 것이다. 후배들에게 말로만 가르치는 것보다 삶으로 실천하고 싶어서 지원하셨다는 말에 숙연해졌다. 선발된 수녀님들 중 막내는 지원서를 받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한다. 지원서를 제출하고 나서는 잊고 지냈는데 어느 날 관구장 수녀님이 전화를 하셔서 “수녀님, 그곳에 뼈를 묻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라고 물으셨고 수녀님은 숨 한번 들이쉬고 “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20년 전 우여곡절 끝에 입회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러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매년 서원을 갱신하며, 그해의 사도직으로 파견 받을 때, 아니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나의 인내를 필요로 하는 사건 안에서 예수님은 나를 부르신다. 가끔씩 부르심을 듣고도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우기도 하지만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분의 부르심은 계속되고 있다.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 읽자니
너무도 중요한 일이 너무도 간단히 기술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도 절제된 글입니다.
주님께서는 밤새 기도하시고
내려오셔서 바로 제자들 중에서 12 제자를 뽑으시고
이어서 이제 당신만을 쳐다보는 많은 불쌍한 중생들을 맞이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초점은
당신의 지상 사업 중에서 당신 사업의 성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일,
많은 제자들 중 12 사도를 뽑으시는 그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밤새 기도하십니다.
밤샘 기도는 번민의 표시일까요?
번민의 표시라면
사도들이 어떤 제자인지를 몰라서 하는 번민일까요,
아니면 어떤 제자인지를 알기에 하는 번민일까요?
12 사도를 제자들 가운데서 뽑으셨으니
아마 이미 어떤 제자들인지 다 알고 있지만
그 중 어떤 제자를 사도로 뽑아야 할지 번민하신 것일 겁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새 기도하시는 그 비장함이
이미 여기서도 엿보입니다.
인간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뜻하시는 사람들을 뽑으셔야 하니
그 아버지의 뜻이 어떤 제자들에게 있는지 번민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선택이 아버지의 뜻이기를
밤새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저도 관구 봉사자를 할 때 제일 고민스러웠던 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결정입니다.
입회 결정, 퇴회 결정, 인사이동 결정.
한 인간의 운명을 좌우할 뿐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도 좌우할 것이기에
인사가 만사라는 말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사람에 대한 결정을 하는 것은 여간 고민스럽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하기에 또한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도한 다음의 선택은 어떠한 선택이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일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의 선택은 예수님의 잘못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도 같은 믿음을 내 주변 사람들에게 갖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그 누구는 관구 봉사자의 잘못된 인사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내 아내와 남편은 내가 눈이 멀어 잘못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내 자식이 나의 선택이 아니고
내 부모가 나의 선택이 아니듯
내가 선택한다고 하는 모든 선택도 나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을 가집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시몬과 유다는 이렇게 뽑힌 사도들입니다.
여러 제자들 중에
하느님 성전을 짓는데 주춧돌이 되도록 뽑힌 것입니다.
시몬과 유다가 사도로 뽑혔을 때
많은 제자들 가운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뽑힌 것 때문에
인간적으로 우쭐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뽑힌 것의 그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말입니다.
우리도 어떤 소임을 받으면 그 뜻을 다 모르더라도
그 소임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일 뿐 아니라
많은 사람 중에 내가 그 소임에 뽑힌 것이고
하느님 성전을 짓는데 주춧돌이 되도록 뽑힌 것입니다.
나의 가정이라는 하느님 성전.
나의 수도 공동체라는 하느님 성전.
레지오 마리아라는 하느님 성전.
평화 봉사소라는 하느님 성전.
무수한 하느님 성전의 주춧돌이 되는 뽑힘입니다.
<독서> : 주님 안에서 모두가 하나 됨으로써 하느님의 참된 성전을 이루자.
-경규봉 신부-
유다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율법이었다. 유다인들은 율법에 의존하여 살았다. 율법은 그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길이며, 삶의 원칙이며 기준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거스르는 것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과 똑같았다. 아무도 율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율법을 거스르는 것이 죄이다.
의인과 죄인의 구분은 율법을 지키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때때로 그들은 율법에 얽매여서 율법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올바르게 보거나 알지도 못했다. 그들은 율법에 가려서 하느님이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시며, 용서와 은총의 하느님이심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가 지극하신 하느님이시며, 용서와 은총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 그리스도를 십자가상의 희생 제물로 내어주실 정도로 사랑이 지극하신 하느님이시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은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는 표이다.
율법이 비록 사람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길이었지만, 사람은 결코 율법을 충실히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외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율법을 대신하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구원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 외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은총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사도 바울로는 이와 같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깊이 체험했다. 그리하여 그는 에페소의 교우들에게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에페 2,8) 하고 전하며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이방인들이 하느님을 알고 구원받게 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과 화해하셨고(로마 5,10; 2고린 5,18-20), 유대인과 이방인도 화해하도록 하셨다. 이제 율법은 그 힘을 잃어버려 사람을 단죄할 수도 없고(갈라 3,13-14; 골로 2,14 참조),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하거나 구분할 수도 없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들 모두를 하느님과 화해시켰고, 그들 사이를 가로막던 장벽과 적대감도 없애 버렸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새 아담이 탄생했으니, 이는 곧 교회 공동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도록 하셨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같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함께 아버지께로 나아간다. 이제는 이방인들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새로 창조된 하느님 백성이 되고, 하느님의 한 가족이 되었다.
교회 공동체가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모퉁이돌이고(이사 28,16; 1베드 2,4-6),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건물의 기초이다(마태 16,18; 1고린 3,10-11 참조). 교회라는 건물은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 위에 세워지고 연결되어서 자라나며 하느님께서 자리하시는 하느님의 참된 성전이 된다.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도 한 분뿐이신데 그분이 바로 사람으로 오셨던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1이모 2,5)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길은 이제 더 이상 율법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인종, 성별, 노소의 구분도 없어지고 모두가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하여 하느님의 성전을 이룬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이웃과 일치를 이루는 삶, 그것이 참된 신앙인의 삶이다.
오늘 당신 외아들의 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느끼며 감사드리자. 주님 안에서 모두가 하나 됨으로써 하느님의 참된 성전을 이루자...............◆
예수님을 머릿돌로 모신 공동체
-곽길섭 신부-
찬미 예수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들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여러분과 지금 만나고 있는 이들에게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몇 년 전, 교포사목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자그마한 나라였지만, 자연 경관이라든지 삶의 환경이 너무나도 쾌적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도착하며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었네’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곳에서 첫 주일미사를 지내던 날이었습니다. 처음으로 공동체 신자 전체를 만나는 날이었죠. 제의를 입고 입장해서 성전 안에 모여 있는 신자들을 본 순간 저는 ‘우와’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도 13시간은 족히 날아가야 하는 곳에 한국 신자들이 성전을 가득 메우며, 주님을 찬미하고자 모여 있더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한인성당이 없었기 때문에 현지 성당을 빌려 미사 시간만 할당 받아 주일미사를 겨우 한 대 봉헌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였는데도 약250여명의 본당 가족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한국사람 대단하다’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느 곳에서나 함께 모여 주님을 찬미할 줄 아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던 공동체의 관한 인식 정도를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모퉁이 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라는 1독서의 의미가 현실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결코 하느님의 공동체는 단 몇 명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그분을 믿는 모든 이들의, 모든 이들이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 우리 본당이라는, 우리 민족이라는 작은 공동체들이 모이고 어우러져 그분께서 원하시는 세상 공동체를 일구어 나아가야 함을 깨닫고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 있던 모퉁이의 머릿돌을 중심으로 한, 하느님 집의 한 부분임을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미사 이후, 그곳 현지인들과 봉헌하는 미사에서는 함께 하나 되는 세상 공동체에 관한 인식을 더욱 더 깊이 할 수 있었고, 예수님 때문에 연결되고 이어지는 이 모든 관계성에 대해서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마음을 비우고 반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아무리 작은 공동체라도 제대로 주님을 머릿돌로 모신 공동체가 되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공동체를 빙자한 이기의 집단, 집단 이기주의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의 공동체임을 자처하면서도 내면은 그렇지 못한 모습을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 쉽게 목격하며 생활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시몬과 타데오 사도 축일을 지내는 축복을 허락하시며, 말씀을 통해서 당신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셨던 일을 기쁜 소식으로 알려 주십니다. 다만 열둘을 뽑으셨지만, 그 안에 배반자 가리옷 사람 유다까지 포함해서 온 세상을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뽑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뽑기 전에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시고, 그 다음에 뽑으셨습니다.
혹시 우리 집안 일에만 집착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혹시 우리 본당 일에만 집착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혹시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일에만 집착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머릿돌로 모신 공동체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과 그 무엇을 머릿돌로 삼은 공동체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팔아가며 생활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밤을 새워 기도하시며 열두제자를 뽑으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합니다. 아주 작은 공동체가 되었든지, 커다란 공동체가 되었든지, 모두가 하나되는 세상 공동체를 위하여 머릿돌이 되어 주셨던 예수님의 이 사랑을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온 세상을 위한, ‘자신의 작은 공동체’에 함께 해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 2, 19).”..........◆
예수님을 만나 달라진 사람들 -이기양 신부- 사람은 자기가 처한 위치에 따라서 삶의 방식이나 마음가짐이 달라져야 합니다. 달라지지 않으면 본인뿐만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들도 힘들어지지요.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좀 더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면 결혼 전과 결혼 후의 모습이 달라져야 합니다. 별 변화가 없다면 함께 살수가 없지요.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혼이었을 때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밤새 술을 마시고 월급은 송두리째 유흥비로 탕진해 버리는 남자가 있다면 가정이 유지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 전과 결혼 후가 달라져야 하지요. 미혼일 때처럼 밤늦게 다니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또 집안 청소는 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주변이야 어찌 되던 본인의 용모 꾸미기에만 관심을 둔다면 가정을 이루고 살수가 없지요. 결혼 전과 결혼 후가 달라지는 것이 있어야 함께 어울려 살수가 있고 그것이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신앙 생활도 이와 똑같습니다. 세례를 받기 전과 받은 이후가 달라지지 않으면 여러 가지가 힘들어 지지요.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게 된 사람은 모시기 이전과 그 삶의 방식과 태도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고 있는 시몬과 유다 사도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러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열 두 사도들은 부름을 받기 이전과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달라지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지요.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른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살던 방식 그대로 돈을 섬기는 삶을 살다가 자신은 물론이요 주변이 다 불행해지고 말았습니다. 변화되어야 할 사람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오늘 축일로 지내는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이스카리옷과 구별되어, 타대오(용감한 자)라고 불립니다. 유다 사도는 절망적이고 불가능한 일을 당한 이들의 수호 성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다 사도는 유다 서간의 저자로서 유다 지방에서 선교하고 교회를 다스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등지에서 선교를 하고 페르시아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시몬은 예수님의 제자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혁명 당원이었던 그는 늘 전투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지요. 당시 혁명 당원들은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기를 들고 직접 싸움에 나섰으며 갈릴래아를 다스리던 헤로데 정권에 과격하게 반대하였습니다. 그런데 혁명 당원 시몬을 부르신 예수님은 폭력과는 거리가 먼 분으로 원수마저도 사랑으로 감싸시며 그저 하늘 나라를 설파하시고 가르치시고 실천하셨을 따름인 분이셨습니다. 사도들은 이런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아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행하고 설파하고 가르쳤지요. 만약 시몬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서도 무력으로 세상을 살겠다고 그 전과 별반 다름없는 삶을 고집하였다면 불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시몬 사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도 페르시아 지방에서 선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열 두 사도 중의 한 사람으로 세리였던 마태오가 있습니다. 마태오가 살아온 삶의 명분은 오직 재물의 축적에 있었습니다. 돈벌이를 위해서는 나라도 동족도 팔아치우는 매국노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 세리 마태오였지요. 그 마태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키가 작아서 동네를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던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길을 앞질러 달려가서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 애타게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5)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마태오는 재빨리 나무에서 내려와 떨리고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집에 모십니다. 그리고 고백하지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루카19,8)
세리 자캐오가 예수님의 제자 마태오로 변화되는 순간입니다. 마태오가 예수님과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변화되지 않고 그 방식 그대로 살았다면 불행할 수밖에 없었음을 두말 할 필요도 없지요.
오늘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에게는 묵상할 것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기 이전과 세례를 받은 이후의 내 모습에 과연 변화가 있는가??? 또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과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가???하는 부분입니다. 하느님을 모른 채 살아가는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과 내가 별 차이점이 없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아무 일 없이 그냥 차이가 없다는 정도로만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삶이 불행하다는 데 심각한 고민이 따르지요. 그는 신자로서 마음에 짐이 생기고 하느님 앞에서 양심의 가책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안식이 없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되지요.
세례를 받은 우리는 알게 모르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처럼 달라지지 않고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오직 돈만을 생각한다면 엉뚱한 길을 가게 되지요. 그런 사람은 본인만 불행해질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과는 그 삶의 방식이 달라야 합니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바른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 당연히 자녀 교육에 신경을 쓰고 열심히 해야 하지요. 그러나 출세만을 위해서 자녀를 키우고, 내 아이의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상의 부모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행하면 불행해집니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세상 사람들처럼 쉽게 흔들리고 좌절하며 점을 치러가거나 부적을 사오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미신 행위도 하는, 양다리를 걸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또 우리 신자들에게 잘 지켜지지 않는 안타까운 모습이 있습니다. 자녀의 결혼 문제가 그것입니다. 평소에는 하느님께 열심한 사람들이 막상 자녀를 결혼시킬 때가 되면 세상의 호화로운 장소를 찾고 교통이 편리하다는 이유를 대며 다른 곳의 성당을 찾아갑니다. 그것은 물질과 편의만을 따르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지요.
물론 세례를 받았다고 일시에 그 삶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시몬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26,33)고 장담을 했지만 죽음 앞에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26,72)하고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베드로는 회개를 하고 수제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한 발짝 한 발짝씩 하느님께로 나아갔지요.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배반하고 목숨을 지켰을 때 행복했을까요? 목숨은 지켰으나 마음은 참으로 불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온 몸을 바쳐서 예수님의 사도로서 활동을 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맞이했을 때는 참으로 행복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을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나라의 평화를 체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차원이 다른 삶을 사는 것이지요. 이렇게 베드로는 세상을 놓고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신자와 비신자는 달라야 하며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매일매일 성장해 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일은 아주 쉽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기 전의 삶의 방식을 내려놓고 변화되었을 때 조화로운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듯이 신자인 우리는 신자가 되기 전의 삶의 방식과 태도에서 달라져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오늘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삶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요, 그 때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를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세상의 모든 집착과 욕심을 버릴 때 내 앞에 나타납니다. 움켜쥔 손으로는 만날 수 없는 길입니다. 오늘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에 우리는 주님께로 가는 길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14,23)
새벽을 열며 옛날 어느 나라에서는 혼기를 앞둔 딸을 교육할 때 바구니를 들려서 옥수수 밭으로 들여보낸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가장 마음에 드는 옥수수를 따가지고 오라고 말하지요. 그 옥수수가 정말로 훌륭하고 멋지다면 훌륭한 신랑감을 골라준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혼기를 앞둔 딸들이 훌륭하고 멋진 옥수수를 따기 위해서 호기 좋게 들어갑니다. 하지만 대개 빈 바구니를 들고 밭을 걸어 나온다고 하네요. 왜 그럴까요? 결혼하기 싫어서 그럴까요? 욕심 없이 살아보세요. 빠다킹신부
기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뜻을 따름
-이성우 -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으며, 어떻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있으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우리의 삶을 통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이 지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살며,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뽑으시는 장면입니다. 증거하고 있는가? -최명숙 목사- 장애로 인해 폐쇄적인 생활을 했던 나의 어린 시절은 어둠과 절망으로 점철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나를 둘러싼 그 어둠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엔 무척 어둡고 안쓰러운 모습이어서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당당하고 밝은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늘 삶의 한계 그 끝에서 죽음의 문을 마음으로 들락거렸던 나의 소녀시절은 온통 먹구름에 덮인 채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절망을 병처럼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주님이 내 병든 인생을 건드리는 그 순간 광활한 소망의 하늘이 열리고, 봄날 고사(枯死)된 것처럼 굳어버린 벚나무 가지에 기적처럼, 하늘날개를 단 나비처럼 꽃무리가 일듯이 내 삶이 피어났습니다. 그분 안에서 내가 그토록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날이 세자 그들 가운데 열둘을 뽑으셨다.” -양승국신부- <전교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유> 참으로 존경스러운 분들이 있습니다. 전교에 혼신의 힘을 쏟는 분들입니다. 수고비를 받는 일도 아닌데도, 표창장을 주지도 않는데도, 수시로 문전박대를 당하는데도, 무한한 인내심이 필요한데도, 결국 결실은 초라하기만 한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전교의 과정에서 겪은 고초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우리가 다른 종파 사람들, 특히 사이비 종교 사람들이 전교하러 오면 어떻게 처신하는가를 생각해보면 전교의 어려움을 즉시 알 수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좀 날 가만히 내버려두세요!” “자꾸 이러시면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한 사람 입교시키면 얼마씩 받지요?” 이런 고초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이 그렇게 전교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언젠가 한 식당에 들렀습니다. 식당의 크기는 서 너 평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식당이었습니다. 메뉴도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무조건 된장찌개입니다. 그런데 그 식당은 늘 사람들로 빼곡합니다. 어떤 때 밖에서 좀 기다려야 합니다. 비결이 무엇인가 살펴봤습니다. 그 식당에 앉으면 마치 내 집에 온 듯 편안한 느낌입니다. 무엇보다도 밥에 기름이 자르르 흐릅니다. 반찬이 많은 것이 아니지만 아주 깔끔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주인아주머니가 얼마나 친절하고 싹싹한지 모릅니다. 거기다가 가격이 터무니없이 저렴합니다. 그 식당에서 단 한번이라도 밥을 먹어본 사람은 그 식당에 중독이 됩니다. 멀리서도 일부러 찾아옵니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외식이라도 할라치면 비싸고 별로 먹을 것도 없는 곳보다는 싸고 실속 있는 그 식당에 데리고 갑니다. 전교에 목숨을 거는 분들, 아마도 그 식당에 중독된 사람들과 비슷할 것입니다. 너무나 좋으신 주님, 이 세상 그 누구도 주지 못할 참 위로와 평화를 주시는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 좋은 주님을 혼자만 차지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좋은 주님을 어떻게 해서든 이웃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주님을 전하러 일어서는 것입니다. 모진 박해가 다가와도 문제없습니다. 문전박대를 당해도 상관없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시몬과 유다 사도는 전교를 위해 배를 타고 수많은 항구를 찾아다니셨다고 전해집니다. 전설에 따르면 시몬 사도는 복음을 전파하다가 페르시아에서 체포되어 순교를 당하셨는데, 박해자들은 살아있는 시몬 사도의 몸을 톱으로 썰어 두 동강을 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몇몇 시몬 사도의 성화에서는 톱을 쥐고 있는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유다 사도는 어떤 지역에서 왕을 비롯하여 6만 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개종시켰다고 합니다. 치유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 훌륭한 가르침에 탄복한 사람들이 많은 금은보화를 유다 사도에게 선물로 안겨주었으나 이렇게 말하면서 끝까지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 자신의 것도 버린 내가 어떻게 남의 것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사심이나 이기심이라곤 조금도 없는 순수한 하느님의 사람 유다 사도를 보고 사람들은 감탄을 연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사람은 인간의 모습은 지닌 신입니다!” 오직 복음 선포만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다 포기한 사도들, 오직 주님만이 그들의 전부였던 사도들, 복음에 필요한 곳이라면 언제든지 일어나 지구 끝까지라도 달려갈 마음이 있었던 사도들의 열정이 오늘 우리에게도 조금이나마 나눠지길 기원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윤경재 신부-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다.” (루가 6, 12,13) 예전에 처음 청주교구 소속인 감곡성당에 순례했을 때였습니다. 그 성당이 우리나라에서 지어진지 올해로 110주년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9 번째로 오래되었다고 하더군요. 1896년 프랑스에서 부임하신 임 가밀로 신부님께서 이곳에 있던 99 칸 대궐 같은 집을 보고 성모님께 봉헌하기로 마음을 먹으셨답니다. 수많은 기도를 한 후에 여러 가지 난관을 겪으며 본당을 세우신 뒤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이 성당터에 그들의 신사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여러가지 기적같은 일들이 생겨나서 실패하였답니다. 성당 안 제대 위쪽에 모셔진 성모상을 보면서 육이오 사변 때 인민군이 쏜 총알 흔적이 일곱 군데 남아 있다는 그 사연을 듣고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제대 앞에서 성모상을 보면서 묵상을 오래 하였습니다. 또 저에게 더욱 감명 깊었던 것은 성당 안 묘소에 묻히신 임 가밀로 신부님께서 평소에 말씀하셨다는 글귀였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평소에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주위사람들에게 자주 말하셨답니다. 이 글귀가 비문에 적혀 있었습니다. 마치 지금 이 성당 안에 순례 차 들어온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신지 60년이 지났지만 저의 귓가에는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려옵니다. “요셉 형제, 어서 오시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대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대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한동안 자리를 뗄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내내 임 신부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무리 중에 열두 사도를 뽑으시기 위해 특별히 산에 오르시어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모든 일을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 속에서 수행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또 모든 일을 계획아래 수행하셨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 곁에 열두 사도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이 없었겠습니까? 심지어 당신을 배반까지 할 인물도 뽑으셨습니다. 못난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그들이었습니다. 성급하고 옹졸하며, 잘난 체하기 좋아하고, 의심 많으며, 어리석기까지 했습니다. 단하나 그들은 우리들이 갖지 못한 덕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해 모든 것을 내 던지고 따르는 용기였습니다. 세상에 쓸데없는 미련을 두지 않고 주님만 따르는 소박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따로 마련하신 계획이었습니다. 그 당시 제자들과 사람들은 잘 모르고 지나쳤겠지만, 이제 뒤에 남아 있는 우리들 눈에는 확연히 들어납니다. 그러니 열두 사도들처럼 우리도 당신의 기도를 통해 뽑아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스스로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뽑아 주셨다는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주님께서 뽑아주셨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죄에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돈 관리를 맡았던 유다가 돈 몇 푼에 주님을 팔아넘겼듯이 세속적 욕심에 빠진다면 또 다른 유다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하셨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그러니 그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단 하나 오롯이 우리를 봉헌하는 길 뿐입니다. 신뢰의 기도 - 토마스 머튼 내 주, 하느님 제가 어디로 가야할지 제 앞에 어떤 길이 놓여 있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어디서 끝이 날지는 전혀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은 제 자신도 알지 못하고, 제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따르려는지도 모릅니다. 하오나, 주님. 저는 당신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으며, 제가 하는 모든 일에서 그런 소망이 표현되기를 바라고, 그런 소망을 저버리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비록 제가 아둔하여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올바른 길로 저를 인도해주옵소서.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주 하느님께 신뢰심을 잃지 않게 해주소서. 그러 하오면, 주여. 저는 행복하겠나이다.
평생 현역(現役), 죽어야 은퇴(隱退) -이수철신부- 수도자들은 물론 진정 믿음의 사람들은 평생 현역이요 죽어야 은퇴입니다. 예전 어느 장상의 툭 던진 말씀이 생각납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으나 ‘조금 더 가면 더 좋을 것이 있을꺼야.’라는 마음을 가지고서 계속 앞으로 나가다가 결국은 밭이랑이 끝나서 빈손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마음들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끊임없는 욕심으로 인해서 계속해서 ‘조금만 더’를 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게 계속 ‘조금만 더’를 외치다가 나의 인생이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을 떠올려 봅니다. 12명의 제자들. 그들 중에서 잘난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부, 세리, 열혈당원 등등...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 별로 대단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뛰어난 언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만큼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으로 기준으로 볼 때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뽑기 위해서 밤을 새우면서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부자청년 역시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세속적인 기준에서 뛰어난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들을 제쳐두고서 형편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신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의 욕심 없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쫓지요. ‘조금만 더’를 외치면서 이 세상의 것에 대한 미련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욕심 없음이 제자들을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그 전의 볼품없는 모습에서 세상에 주님을 열심히 증거하는 큰 일꾼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 역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주님을 증거하고 계십니까? 혹시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세속적인 욕심이 주님을 증거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열두제자만 밤을 새워서 기도한 뒤에 뽑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도 주님께서 심사숙고하신 뒤 뽑은 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귀한 몸을 왜 욕심이라는 것으로 망가뜨리는지요?
오늘은 욕심 없이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느껴보고 싶습니다. 욕심 없이 살아가는 진정한 행복을…….
예수님께서 얼마나 철저하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기를 원하셨는지, 그분의 뜻대로 살고자 하셨는지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산으로 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홀로 산에 가시어 밤새워 기도하신 것입니다. 당신 안에 모든 것을 지니신 예수님도 밤새워 기도하시고, 그 후에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여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하고 그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토록 많은 시간 혼자서 기도하셨는데, 우리는 오죽하겠습니까? 우리는 더 많이 기도해야 되지않겠습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우리 삶에서 가장 필요한 에너지원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선의로 시작한 일이라도 하느님의 뜻보다 내 욕심이 커지게 마련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는 일들은 결국 하느님과 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고, 나와 다른 이의 관계도 멀어지게 만듭니다. 또한 타인과 하느님의 관계도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을 통한 기적의 힘은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절망이 소망이 되고 슬픔이 기쁨이 되고 미움이 사랑이 되는, 두려움과 불안이 평안으로, 그리하여 약한 자가 강해지며, 비굴한 자가 당당해지고 용기있는 자로 변화됩니다. 이와 같이 환경도 변화되어 날마다 승리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에 의해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라고 찬송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뿐 아니라 암보다 더 치명적인 ‘절망’이라는 병이 그분의 손에 의해 치유됩니다. 게라사의 광인뿐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가, 자캐오가 치유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병이 그분 안에서 치유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날마다 나의 몸과 마음과 나의 병든 환경까지도 치료하고 계시는 그분의 손길을 느끼고 있습니까? 그렇게 내 삶의 변화를 통해 그분을 내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장상은 소모품이다.”
자본주의의 철저한 능력위주의 인스턴트 시대,
비단 장상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모품처럼 취급되는 시대입니다.
성실하게 일하다 쓸모가 적어지면서
사오십 대 한창 일할 나이에 자리에서 물러나면 새 사람이 들어섭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런 현실 같지만,
비정한 자본주의의 현실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씁쓸한 패배감, 배신감, 허탈감을 쉽사리 떨쳐버리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수도자들은 물론 진정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소모품이 될 수 없습니다.
평생 현역이요, 죽어야 은퇴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할까요?
언제 어디서나 중심이 되어 살아야
평생 현역에 죽어야 은퇴의 충만한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삶이 그 모범입니다.
기도와 일이,
관상과 활동이,
홀로와 함께의 리듬이 습관화된 삶이
중심이 되어 살 수 있게 하는 요체입니다.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시고 새날, 새 하루를 맞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기도와 일이 균형 잡힌 삶이 습관화될 때
평생 현역에 늘 새 하늘과 새 땅을 살 수 있습니다.
기도로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열둘을 뽑아 사도라 부르신 후
무리를 이루어 온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관상의 샘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사도들을 뽑는 분별력의 지혜요,
치유 능력임을 깨닫습니다.
흡사 모든 이들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생명의 샘’ 주님 같습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신 주님 안에 깊이 뿌리내릴 때
우리 또한 공동체내의 각자 자리에서 중심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전체가 잘 결합된 건물과 같은 공동체는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 집니다.
이래야 중심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는 우리들입니다.
하여 삼위일체 하느님을, 영원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 시간,
우리 삶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내림으로
우리 영육의 상처와 질병이 치유되는 시간입니다.
아멘.
부르심의 특징
-최영균 신부 -
예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길은 다양합니다. 민족을 구하기 위해 모세를 불러 세우신 것도 있고 이사야와 에제키엘도 부르십니다. 비단 구원사적인 큰 부르심뿐만 아니라 작은 부르심들도 우리네 삶을 꽉 채웁니다.
개인과 집단을 가로 질러서 그리고 위와 아래를 넘나드는 하느님의 부르심 속에서 인간은 때론 거부도 하고 투정도 부리고 꿈 속에서 하느님과 겨루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예” 하고 순명하는 경우도 물론 많이 있습니다. 아무튼 부르심도 가지각색이요, 응답도 십인십색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부르심 중에 인간에게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 갖고 태어난 재능, 성격, 그밖에 여러 가지로 주어진 것은 상하좌우가 없습니다. 부르심에 잘 응답하며 살 때 바로 거기에 참 행복의 길이 있습니다. 잘 응답하는 것을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순명’이라고 합니다. 사소하고 작은 것, 크고 중요한 것, 높고 낮은 사람도 없이 자신의 삶 속에서 해야 할 바를 실행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말씀이 각인되어 있는 마음의 소리를 인간적 두려움 없이 따를 때 당장은 내게 불리하고 힘든 것 같은 현실 속에서 그분의 뜻이 활짝 피어납니다
돌멩이 열 두 개
-강영구 신부 -
+예수께서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그대에게
우리 성당 제의실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가끔씩 사람들에게 빵 대신 돌멩이를 던지곤 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그 돌을 원망하여 걷어차 버리다 발가락 하나가 부러지고
왜 어떤 사람은 그 돌을 주춧돌로 만들어 집을 짓는지.”
밤을 새워 기도하신 예수님 앞에 하느님께서는 열 두 개의 돌멩이를 던졌습니다.
모난 것, 뾰쪽한 것, 깨진 것, 둥글넓적한 것, 큰 것, 작은 것......
예수께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돌멩이 열두 개를 주춧돌로 삼아 교회라는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빠져나와 예수님의 이마를 치기도 했습니다.
비록 못생기고 모난 돌이라 해도 다 쓸모가 있고 제 자리가 있습니다.
적재적소(適材適所)라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습니다.
크고 반듯한 돌이라도 집짓는 사람이 골라 쓰지 않으면 진흙 속에 파묻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은총이며 축복입니다.
열두 사도들을 부르시듯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셨습니다.
당신을 어디에 어떻게 쓰시든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루가1,38)하고 응답하시면
행복할 것입니다.
당신은 부르심을 받은 귀한 돌입니다.(一明)
사도 시몬과 타대오
-박상대신부-
오늘 교회는 시몬과 유다 타대오 사도의 축일을 함께 지낸다. 이들은 예수님과 가장 가깝게 지내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 12사도 중 두 사람이다. 신약성서는 12사도의 명단 속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전해주고 있을 뿐 다른 내용은 거의 없다.
시몬은 갈릴래아 지방 가나 출신(가나안)으로서(마태 10,4) 그에게 붙여진 "혁명당원"(마르 3,18; 루가 6,15)이라는 별명처럼 하느님 외에는 어떤 통치자도 인정하지 않고 무력으로라도 로마제국의 압제에 항거하여 이스라엘을 되찾고자 뭉친 젤롯당에 속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시몬이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과 활동 속에서 정치적인 메시아의 모델을 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유다 타대오는 신약성서에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명기되기도 하고(루가 6,16; 사도 1,13), 사도 야고보와 함께 알패오의 아들 타대오(마태 10,3), 또는 그냥 타대오(마르 3,18) 라고 명기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도를 편의상 "유다 타대오" 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는 명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데, 그것은 가리옷 사람이 아닌 다른 유다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주님, 주님께서 왜 세상에는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고 저희에게만 나타내 보이시려고 하십니까?"(요한 14,22) 하고 묻는 대목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사도 유다 타대오가 혁명당원 시몬처럼 예수께서 정치적인 메시아이기를 바랬던 점을 알 수 있다.
전해오는 자료에 의하면 시몬은 처음에 이방인과 유다인들에게, 나중에는 이집트, 키레네, 마우리타니안, 리비아 등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마지막으로는 페르시아에 이르렀다고 한다. 유다 타대오도 처음에는 팔레스티나에 머물다가 아라비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선교하다 마지막에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페르시아에서 시몬과 유다 타대오는 함께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전설에 의하면 시몬은 톱으로 몸이 잘리는 순교를, 유다 타대오는 도끼에 목을 잘려 순교했다고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장엄한 과정을 거쳐 12제자를 선발하신 사실과 그분의 계속된 치유행적을 보도하는 내용이다.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12제자를 엄선하신 사실은 공관복음서 모두에 실려있다.[☞오늘 복음에 관한 자세한 해설은 연중 제23주간 화요일의 복음산책을 보세요.]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 보듯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이르러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의 말씀에 굶주리고, 병고에 허덕이며,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들이었다. 루가는 이렇게 산과 평지를 구분하였다. 산은 기도와 소명의 장소요, 평지는 선포와 활동의 장소라는 것이다. 이것이 루가복음사가가 소명과 활동을 함께 묶어둔 이유일 것이다. "제자"란 역사적 예수의 공생활 중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을 일컫는 말이요, "사도"란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복음선포의 지상사명을 받은 이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산에서는 제자이나 평지에서는 사도라는 의미이다. 진정한 신자란 예수님 앞에서는 제자로 불림을 받아 그분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세상 앞에서는 사도로 파견되어 죽음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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