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며칠간, 설교 준비라는 중압감에서 해방이 되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짚어 상고해 보는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삶의 길목마다에 세워져 있는 에벤에셀의 돌탑들이
내겐 너무나 은혜로운 전환점들이었음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신앙생활은 열심 그 자체였다. 열심이 특심이라는 말은 꼭 내게 어울리는 그런 말이었다.
난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줄 알았다.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종교 행위를 하다보면 하늘도 감동하여 천국에 보내줄 수밖에 없는 것이
신앙생활의 내용이겠거니 살았던 것이다.
그런 나에게 한국 개혁주의 진영의 독보적 목사님들 몇 분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난 한국교회 전반에 퍼져있는 신비주의와 기복주의의 허상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신비적인 경험을 허다하게 해왔던 내게 그러한 신학의 스승들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용한 목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개혁신학의 틀 위에서 나의 신학이 정립이 되어갈 즈음 난 미국으로 신학을 공부하러 떠나게 되었다.
친정이 미국인 아내를 만나 그것도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난 그곳에서 침례교 신학과 감리교 신학과 장로교 신학을
각 2년씩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나에게 좋은 스승들을 또 붙여 주셨다.
난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스승들을 만나면 귀찮을 정도로 그들을 달달 볶아대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밤이고 낮이고 난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개의치 않는 거머리 같은 사람으로 살았다.
처음에는 그러한 학문적 욕구 충족의 차원에서 선생들을 못살게 굴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난 기독교의 실체를 하나하나 정립해 나가고 있었다.
그 무렵 내 좌우명이 ‘스승을 만나면 반드시 그 스승을 뛰어 넘자’였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난 길게는 2-3년 짧게는 수개월 만에 그 스승들이 갖고 있는 학문의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었다.
난 하루에 서너 시간 잠자는 시간 외엔 책상 앞에서 떠난 적이 거의 없다.
그러니 목회에도 신경을 쓸 수가 없었을 터.
난 목회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여 놓고 문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관리하는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솔직히 말해 ‘나의 구원’이었다. 이렇게 죽도록 공부를 해서 정립하고 가르치고
믿었던 것이 ‘아니요’에 해당하는 것이면 어떡하나 싶었다. 그래서 정말 죽도록 공부를 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말든 내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진짜 어떤 분이신가?’였다.
그 선생들로부터 소개받은 개혁주의 신학의 교과서라해도 과언이 아닌 로이드 존스나 아더핑크, 존 오웬, 바빙크,
워필드, 아브라함 카이퍼, 게할더스 보스, 클라인 등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그들이 갖고 있는 신학적 지식의
교집합들을 정리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중세 종교 개혁 이전의 엉터리 율법주의로 회귀를 한듯한
왜곡된 개혁주의 신학에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신학자들 각자가
서로 어긋난 소리를 하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할만 했다.
그런데 신학자 자신의 일관성 없음이나 한 책 안에서의 삐걱대는 논리는 그야말로 억지다 싶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하고 서성이고 있을 때 난 원어 성경에 눈을 돌렸다.
그런데 미국에는 원어 성경에 관심이 있는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많이 없었다.
아니, 전문적인 언어학자들이나 문자 고고학자들은 아예 날 상대도 해주지 않았기에 주변에 있던 목회자들을
돌아보았을 때의 내 판단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신학교 때부터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재미있게 공부했던
나는 혼자서 사전을 가지고 씨름을 했었다. 그래서 미국에 있을 때부터 설교에 원어를 너무 많이 섞어서 쓰는
설교자라는 평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부족했다. 신학교 몇 년 동안에 배운 일천한 원어 실력으로는
성경의 진의 파악이 많이 힘들었다.
그렇게 밀려서 한국에 입성을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번에도 나에게 좋은 스승들을 붙여 주셨다.
하나님은 라틴어와 아람어, 그리고 수메르어를 수십 년 간 연구를 해오셨다는 교수님들을 만나게 해 주셨다.
어떤 분은 40년 가까이 아람어만을 연구해 오신 분도 계셨다. 그런데 그 분들 모두가 나를 참 귀하게 대해주셨다.
그런 거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목회자가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원어 성서를 열심히 연구하는 선배 목사님과 후배 아이도 만나게 되었다.
난 예의 그 오기가 발동해서 몇 개월 안에 그들의 울타리를 넘으리라 결심을 하고 밤잠을 설치며
원어 연구에 매달렸다. 그러면서 그 분들로부터 참 많은 도움을 받았다.
교수님들이 추천해 주신 프랑스와 영국의 문자 고고학자들의 책들을 하나하나 탐독해 들어가면서
난 수메르 문명으로부터 흐르는 문자의 흐름을 정리할 수 있었다.
다고네의 글자와 도상, 넬슨 굿맨의 예술의 언어, 폴 리괴르의 상징이론에의 접근, 모리스 블랑쇼 끝없는 대담,
벤베니스트 알파벳은 시나이 반도에서 탄생했다, 등등 많은 책을 샅샅이 읽었다.
그러고 나니 우가리트어로부터 시작하여 애굽의 상형문자, 그리고 가나안의 패니키아 문자와 원 시나이어,
그리고 아람어와 고 히브리어, 그리고 거기서 흐르는 헬라어와 라틴어, 그리고 지금의 알파벳에 이르기까지
그 흐름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난 이제 성경을 문자로 곡해케하는 마소라 문법에서도 조금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이 알파벳(알렙+베잍, 알파+베타, 하나님의 성전)이 원 시나이어(BC1,500년경 모세 때)에서 발출되고
생성되었다는 것도 언어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그림문자에 가까운 원시나이어와 그것과 섞여서 하나님의 역사 속 택한 백성들에게
사용되었던 아람어와 히브리 고어들의 연관성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열심을 다시 한 번
절절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원 시나이어의 그 그림문자로 내 이름 석 자 뿐 아니라
간단한 의사소통의 언어도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열심히 연구를 하고 당시의 고문서들을 열심히 읽어 보아도 그 문자들의
원의 추적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파자라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생경하여 그 작업에 푹 젖어있었다.
그런데 고문서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문자의 내용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 자음 알파벳 일곱 번째 글자인 ‘자인’은 ‘무기, 대립, 갈등’등의 의미를 담은
문자로 히브리어 성경 해석자들은 이해를 하고 있다. 그런데 고문서를 찾아 읽어 보니
그 문자는 혁명, 파괴, 활성화,
가운데, 재검토, 장식 등의 의미로도 쓰인다. 나를 가르쳤던 아람어 선생은 무기, 대립, 갈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 문자를 억지로 끼워 맞추어 주고는 ‘이게 정답이다’라며 일보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성경에서 찾아 읽어본 그 문자는 그런 의미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의미를 함의하고 있었다.
만일 그러한 기초적 의미 몇 개에 묶여서 성경의 그 무궁무진한
내용을 그 안에서만 정형화시켜 읽어내야 한다면
우리가 게마트리아(Gematria)나, 노타리콘(Notarikon)의
카발라들과 뭐가 다른 게 있겠는가? 그들은 중세 시대에
나타난 유대 신비주의자들이다. 그들도 지금 원어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는 이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가슴에 품고 있는 히브리 자음 값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으로 토라를 해석했다.
그렇다면 지금 그러한 히브리 자음 값만을 가지고 파자라는 형식을 통해 성경을 그 틀 안에서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는 이들이 ‘타로 점’을 만들어 낸 유대 신비주의자, 카발라들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 내게 문자를 가르쳐 주는 스승들에게 그 의미 값을 배우면서
반드시 성경의 모세 오경이나 선지 서들이나
시가서의 어절들을 갖다 대 준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어떻게 문자로 이해를 하는 지를 자주 시험해 본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에게 문자에 대한 지식은 있는데 정리된 신학이 없다. 그래서 문자 공부를 열심히 하는
후배 아이는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이나 예정이나 선택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리고는 김성수 목사와 자기는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아니다. 절대 아니다. 문자를 공부하고 율법주의를 배격한다고 해서 절대 목적지가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난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아람어를 40년간 연구했다는 교수님은 불교와 기독교를 하나로 묶어서 이해를 하고 있었다.
내 안에 이미 하나님이 있었는데 내가 그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란다.
그리고는 무슨 이상한 다단계 화장품 선전을 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불리는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난 그들에게 건전한 신학적 바탕에 세워지지 않는 문자의 집이 신비주의나 기복주의 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 일갈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비주의에 대하여 “경험을 통하여
신을 인식함(cognitio deo experimentalis)”이라고 간단히 정의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문자 고고학에 빠진 그들은 그들보다 더 유치하고 얕다.
그러면서 자유, 자유 하는데 정말 밥맛없다. 무슨 놈의 자유가 그런 자유가 다 있나?
술에 취해 스승을 욕하고 다단계 화장품 판매를 독려하면서도 ‘난 진리를 아니까 뭐든지 해도 돼’라고 하면
용서가 되는 건가? 좋은 동지들을 만났는가 싶었는데 또 난 그들과 다른 길로 홀로 접어들었다.
그러한 지적 허영심과 지적 호기심 충족을 ‘은혜 받음’과 혼동하고 있는 우리 서머나 식구들이 혹 있을까봐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진리 탐구에의 길은 참 길고도 험한 여정이다.
그래도 난 다음 계단으로 올라가 더 열심히 파고 들어갈 것이다.
진리의 맥 안에서는 모든 게 하나인 것을 확실하게 알았으므로..
첫댓글 카페에서 어느 분이 김성수 목사님에 대한 분별을 구하여왔습니다.
이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검색하여 CBS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한 간증 49분
마가다락방 초청간증 오전 1시간 10분 오후 1시간 40분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리고 평균 1시간20분을 하는 102번의 로마서 강해중 76번을 들어보았습니다.
로마서 7장 끝부분에서 로마서 8장 시작부분으로 이어지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더 읽지 않았습니다.
10분 넘어가는 동영상은 거의 보지않은 편인데 이만하면 그래도 큰 결심을 한 것입니다.
교만하다 비난받을지 모르는 말이지만 이렇게만 들어보아도 분별이 갔습니다.
분별을 청하여온 분에게는 아직 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조심스러워서입니다.
김목사님은 하나님을 깊이 알고자하는 열심과 하나님의 뜻인 성경을 바로 알기위한 학문적 탐구심은
가히 그 같은 자가 없다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완성에는 다다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원어의 뿌리를 찾아 정확한 어의를 알고자 했으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언어는 그 민족 정신과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그 민족에서 태어나 살면서 그 당시의 모국어로 읽지 아니하면
원 뜻에서 한참 빗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경을 기록한 영(성령)의 언어로 읽어야 합니다.
그 언어로 계시되고 비추어져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말의 의미는 사람의 말로 전달될 것입니다.
내가 아는 익숙한 육신의 말로 전달될 것입니다.
성경은 공부하고 배우고 연구해서 풀리는 것이 어닙니다.
다만 하늘의 모국어로 전달되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성령님의 인도로 배워야했습니다.
처음 싻부터 생명의 과정을 거쳐 그 생명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그 나라의 모국어를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고린도전서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요한1서 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요한복음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님의 계시와 인도에 대한 말씀은 이외에도 아주 많습니다.
왜 이렇게 성령님의 가르치심에 대하여 강조하였을 까요....
영과 육을 분별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 다른데
하나님의 영이요 생명을 육신에 속한 사람의 생각으로 풀려니 무리인 것입니다.
역사상 IQ 250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분이 청년의 때부터 원어를 공부하며 성경을 연구한다 할지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김목사님의 업적은 높이 인정합니다.
그가 껍질을 부수는 일을 했다면 껍질안의 생명을 들어내는 일은 남은 자들의 몫이어야할 것입니다.
한 사람이 그일을 다 할수는 없을 것입니다.
김목사님이 그 생을 마침으로 사람의 한계를 들어낸 것입니다.
아마 그는 너무 많은 외골수 적인 찾음으로 인해
그 정신세계에 불균형을 초래했을 것입니다.
그 또한 감당하기 어려운 인간의 한계였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분의 죽음은 사람이 할 수 있는 한계를 보여준 것이기도합니다.
성경은 그 것을 쓰시 하나님만이 풀어 보여주실 수 있는 감추인 만나입니다.
그 만나를 찾아가는 첫관문은 회개입니다.
큰 건물을 지으려면 기초를 깊이 파고
기초를 튼튼히 놓아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성할 수 없습니다.
보혜사로 오신 성령님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해야합니다.
눈을 떠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하고 간청하며 기다려야합니다.
애드류 머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말씀은 말씀을 기록한 영이 함께 할때에만 생명이다"라고...
영과 생명의 주인은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갈라디아 1:11-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아멘
이상은 제가 보고 느낀 바 생각들을 써본 것이니
다만 한 사람이 본 견해로 참고하시길 바랄뿐입니다.
제게 메일을 보내주신 분께도 이 댓글로 답변을 대신하려 하오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일로 느낀 것이 많습니다.
고맙습니다
PS: 아래 김 목사님의 편지는 이 댓글을 다 쓰고서야 보게되었습니다.
역시 너무 무리한 것입니다.
한계에 도달한 것입니다.
마가다락방 간증때만도 얼굴에 여유와 웃음이 있었는데
로마서 76번 강해때에는 얼굴에서 빛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진작 알았다면 찾아가 만나보았을 것입니다.
끝없는 이야기가 펼쳐질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합니다.
@백합향 백합향님의 글을 잘읽었고 이해하는데 많은도움이 되었습니다
말씀드릴것은 게시판에 처음 이까페에 김성수목사님의 사망 소식을 전하신 Dome....님의
서머나 교회로 시작되는 글을 한번보심이 어떨까요
그글도 글이지만 그밑댓글에 저에 의견도 있습니다
그분이 많이 주목을 받으시기에 ...
설교를 들었지만 다맞는것같지만 ... 무언지모를 영적혼돈과 아 ! 저건아닌것 같은데 하는 아주미묘함이 ..
이의를 제기할만한 주제가 전혀아니기에 여하튼 다시는 듣진않았습니다
그리고 저희모임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평신도들의 평범한기도모임]
어린 아이부터 어른에이르기까지 그분을모르는 아이들까지 ....
@haha 우린 가슴에묻고 다시는 듣지않았구 또 일면식이없기에 잊었구요
그런데 그 밑댓글들을보며 같은 느낌들을 받은사람들도있구나
깜짝놀랐습니다
그러나 김성수목사님과 무엇보다 그 사모님과
그 자녀들을 생각할때 너무마음이 아프고 꼭 주님의 은혜가 그가정에
임하길 기도합니다
@haha 아멘
혀가 국맛을 분별하듯 영은 영을 분별하며
생명은 생명을 분별합니다.
저는 물어뜯기는 것도 싫고 논쟁도 싫어서
완곡하게 표현하는 글을 쓰기도합니다.
글을 찾아 댓글들을 잘 읽어보았습니다.
요한3:6-7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백합향 목사님 잘알아들었습니다
요즘 글이 안올라오시느것같아 좀 궁금했었습니다
윗글들에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haha 또 김성수 목사님이 옳은말씀도 많은데
들어야될 그들에게 도리어 빌미를 제공한것은 아닌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
이 마지막때 ...
@haha 사람이 천마디 말로 아무리 바른 설명을 할지라도
그 말이 성령으로 부터 흘러나오는 영이요 생명인 말씀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 적절치 않는 비유와 설명이 잡다한 지식으로 혼선을 주기도합니다.
성령으로 전해지는 언어는 단순하고 쉽고 시원하고 명쾌합니다.
단지 설명이나 지식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말씀안에 있는 영과 생명을 전달하게 됩니다.
이런 것을 혀가 국맛을 분별하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누구한테 배웠느냐가 문제입니다.
성령으로 부터인지... 사람으로부터 인지...
소경은 누가 소경인지 누가 눈떠 보는 자인지 분별할 수 없겠지만
눈뜬 자는 둘다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haha 사람이 바른 성경 지식과 바른 교리를 배울 수는 있지만
그 지식이나 교리가 생명이 되지는 못합니다.
먼저 밭을 갈고 바른 씨가 심어져야하며
싻터서 자라 열매 맺어 결실해야합니다.
사람이 가르쳐서 되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겠어요?
본인이 전심으로 구하고 순종하려 애쓰며 찾고 찾아가야 합니다.
결국 주안에서 안식을 주지 못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백합향 마가의 다락방은 2013년 1월에 하신거고, 로마서 76번 강해는 2012년 8월입니다.~ㅋ
사람 컨디션은 날마다 다르죠, 안색도 마찬가지고.
본인의 느낌을 믿지마세요. 헛된 양식으로 이 그만 가시고
목사면 공부를 하세요. 쉽게 가려하지 마시고.
@내사랑케이 공부 많이 해서 가는 길이라면 신학, 성경공부 많이한
신학 석박사나 목사들이 많이 가겠군요.
내가 제일많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목사란 칭호로 불리우지 않는 것입니다.
또 신학을 한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현직 목사님이 초청하셔서 가서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드군요.
"선생님의 글은 신학을 한 목사가 쓸 수없는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부르심의 은혜입니다.
그 길은 사람이 원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시작부터 성령님의 인도와 이끌림을 받아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심으로 몇명의 영혼을 완전한 믿음으로 인도했는지
그 전도의 열매로 평가될 것입니다.
@내사랑케이 마가 다락방 간증때에는 초청 간증이라 그랬는지 밝은 모습이었지만
로마서 어디쯤하나 잠시 잠시 열어본 로마서강해 내내 밝음이 전혀 보이지 않는 굳은 모습이었습니다
간증하는 모습은 즐거워 보였지만 강해때에는 어두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강해때에는 영과 생명의 흐름을 느끼기 보다는 표현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느껴졌습니다
76강해 단 하나를 본 그 후로는 다시 보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생명이 아닌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일 마다 설교준비하는 적이 없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사는 평소의 삶 그것이 설교 말씀으로 나옵니다
성령께서 흘려내려 주시는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할뿐입니다
항상 새롭게 열어주
@내사랑케이 20세에 처음 회개한 그날 주님을 만난후로
주님의 이끄심으로 말씀의 길을 따라 찾아오길 50여년이 흘렀습니다.
광야길을 지나 안식의 땅에 들어 가게되었습니다.
쓰다보니 길어집니다.
그만 하겠습니다.
안타깝네요. <자살>은 영향력이 강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었습니다.
남은 사모님과 자녀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우나,
거짓의 열매를 계속 먹으면...
하나님 앞에 의롭지 않습니다.
물질 앞에서... 약해지면 안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 크리스찬이든 아니든...
남편이 먼저 가시면, 아내의 수고와 고생은,
누구나 감당해야할 삶입니다.
사람의 눈과 귀는 피할수 있어도,
하나님 앞에선 모든 것이 드려납니다.
불의의 삯을 사랑하면 안 됩니다.
막달라1000님 참으로 야속하고 얄미운얘기만 하시네요. 이제 그만 님의 율법의 잣대로 재시고 입좀 조심해 주세요.
율법을 분명히 어겼던 간음한 여인도 사람들은 돌로 치려했지만 예수님의 긍휼의 잣대는 정죄하지 않는 용서 였습니다. 제발 남의 죽음에 영향력이 있네 없네 하시지 마시고 남은 가족들의 2차 충격을 위해 긍휼을 구하는 기도나 해주시는 것이 훨~그리스도인 다운 행동입니다. 자꾸 하나님의 자리에 앉지 마시길 간청합니다 경건의 능력과 모양의 판단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셨던 목사님
목사님을 사랑하신 하나님
아멘입니다
김성수 목사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을 알고자 하는 열정 또한 휼륭하셨습니다.
그렇게 사셨음도 인정합니다.
저도 인간적으로 공감과 친근감을 느낍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내가 한영 한 생명 한 사랑으로 연결되는 사랑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님 잡히시기전에 주님께 맹세를 합니다.
"주님을 죽는데 까지 따라가리라"고...
하지만 주님은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의 맹세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네가 닭 울기전에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육에 속한 사람의 한계입니다.
그러던 그가 오순절 이후 하나님께 속한 사랑을 알았고 받았습니다.
그후 목숨을 바쳐 사랑을 다해 순교를 합니다
헌데 김목사님이 처음 회개 - 십자가 죽음(죄사함) -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의 간증같은 것은
아직 찾아 보지 못했습니다
혹시 그런 자료가 있으면 이곳에 올려주시든지
제게 메일로 보내주시면 좋은 참고가 되겠습니다
목사님도 로마서강해 76에서 연가시와 톡소포자충(http://blog.naver.com/joungkjj/140174868422)
에 대해 많이 알고 이야기를 하셨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자살이 스스로의 의지로 택한 자살(自殺)인지
그를 자살로 몰고간 불가항력적인 타 요인에 의한 죽음인지는 사람으로는 판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판정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사랑 케이님 글에 "목사면 공부하세요 쉽게가려하지마시고 "
본인은 어떤위치에 있는지 모르지만 본인이 하나님앞에 그말을 할수있을만큼 떳떳합니까 ?
여기 글을쓸때 주님앞을 먼저생각하셨습니까 ?
우리가 육을벗는날 주님앞에 우리의 모든생각말이 드러날것입니다
여기 글을올릴때 주님을의식하지 않았다면 첫단추부터 다시끼우길 권면드립니다
설혹 그렇지않다하여도 전혀 주님의 사람다운 겸손함이 안느껴지는군요
" 목사님을 사랑하셨던 하나님 "
그말 하나님앞에 책임질수있는말입니까
목사님이 사랑했던 하나님 그것은 사람쪽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한그말은 누구의 말이요 보증입니까 ?
나는 돌아가신 목사님과 남은가족에 가슴아픔과 주님의 은혜만있길 바랄뿐입니다
본인과 논쟁하고 싶은마음은 전혀없음을 말씀드리며
글이라도 길든 짧든 본인의 인격이드러납니다
믿음의 색깔이드러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haha 논쟁하고 싶지 읺다고 하곤 자신의 할 말은 아주 길게 다하네요. 목사에게 공부하라는 말에 왜 발끈하나요? 누구에게 가르치는 위치에 있으면 겸허히 배우는 자세 당연하죠. 영적느낌 운운하며 설교준비도 없이 양들을 책임집니까? 아님 잠잠히 계시던가 배우기 싫으면 가르치지도 말아야 합니다. 다른 이의 생명이 걸린 문제인데 심각성을 모르는 거죠.
나 역시 못 느끼겠네요 글에서 사랑과 겸손을..오히려 그 반대. 사랑하고 축복한다고 글로 쓴다고 느껴지는 건 아닐테니까요 바보 아닌 이상. 저의 인격이 이거밖에 안돼서요 우린 다 불가능한 죄인이죠 다 거기서거기 하나님 앞에 다 똥걸레. 십자가 은혜만 꼭 붙들고 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