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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5일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루가 16,9-15)
I tell you, make friends for yourselves
with dishonest wealth,
so that when it fails,
you will be welcomed into eternal dwellings.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편지글을 맺으며 그곳 신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며 격려하고 안부를 전한다. 이들은 모두 다양한 계층과 출신의 사람들이지만 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낸다(제1독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은 세상에서 오로지 한 가지 선택만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하느님을 섬기느냐 세상을 섬기느냐의 물음 앞에 서게 된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우리가 응답해야 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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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날은 컴퓨터 없이는 못 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컴퓨터를 조금이라도 다룰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직장에 출근하든 집에 돌아오든 맨 먼저 컴퓨터를 켭니다.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인터넷을 통해 세계 곳곳의 정보 수집은 물론, 게임, 영화, 음악 등 모든 분야를 접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컴퓨터의 정보 처리 방식은 매우 복잡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로 들어가 보면 아주 단순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비트(bit: binary digit)라고 부르는 ‘0’과 ‘1’의 두 숫자로 우리가 경험하는 복잡한 정보 세계를 연출해 냅니다. 다시 말하면 ‘예’와 ‘아니요’의 응답으로 모든 정보 세계가 짜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마태 5,37)고 말씀하셨지요. 우리의 삶은 매우 복잡한 것 같지만 이렇게 ‘예’와 ‘아니요’라는 단순한 응답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예’와 ‘아니요’의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 단순한 응답으로 우리는 아름다운 삶을 만들기도 하고, 보기 흉한 모습으로 살 수도 있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라고 하셨지요. 우리는 오직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합니다. “예.” 해야 할 때 “아니요.” 하고, “아니요.” 해야 할 때 “예.”라고 대답하면 우리 삶은 헝클어지고 혼란스러워집니다. 자신의 삶이 아름답게 연출되는 것은 순간순간 선택의 기로에서 올바르게 대답할 때입니다. 지금 자신의 삶이 맑고 평화롭지 못합니까? 삶의 가장 기초가 되는 순간의 선택에서 올바르게 ‘예’와 ‘아니요’를 하고 있는지 물어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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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재물로 친구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나누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쥐고만 있으면 아무도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풀어야 옵니다. 온갖 만물이 찾아듭니다. 그리하여 ‘그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혼자만 구원받겠다는 것은 이기심입니다. 나 홀로 구원받겠다며 산으로 간다면 바리사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이 악하게 살았기에 비난받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들만 구원받겠다며 ‘따로 살았기에’ 주님의 질책을 들었던 것입니다.
돈과 재물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그것을 다루는 사람에게 윤리적 책임이 있습니다. 알면서도 우리는 혼란해집니다. 있어야 선하게 살고, 없으면 힘들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돈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재물 많은 사람 앞에서 주눅이 듭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늘 기도해 왔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였습니다. 어서 빨리 ‘재물의 유혹’을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 있어야 미래가 보장된다는 유혹입니다. 하지만 미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분께서 ‘주셔야’ 미래가 있는 것이지, 돈과 재물이 넘친다고 미래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착각遝 뿐입니다. 지금 나누고 베풀면 주님께서 우리의 앞날을 잡아 주십니다. 화려하게 가꾸어 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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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고 하십니다. 나누는 삶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나누면 커집니다. 나누는 재물은 훗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옵니다. 체험해 본 사람은 압니다. 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 내어 놓는 데 힘이 듭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 여겨야 한결 쉬워집니다. 실제로 그분께서 주셨기에 모든 것이 존재합니다.
십자가를 지면 부활을 체험합니다. 부활은 ‘전혀 새로운 상황의 반전’입니다. 내어 놓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십자가입니다. 작은 아픔입니다. 바라지 않고 내어 놓는다면 더 아름다운 십자가가 됩니다. 그런 이에게 부활의 상황은 반드시 옵니다. 그렇게 체험한 부활을 우리는 많이 듣고 있습니다.
재물을 쥐고 쌓기만 하면 섬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나누는 사람입니다.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나누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면 ‘일용할 양식’은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그러니 주 하느님을 모시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젊은 나이 때부터 나누는 연습입니다. 작은 것부터 나누지 않으면 큰 것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가난한 시절에 베풀어 보지 않은 사람은 부자가 되어도 쉽게 베풀려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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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개 한 마리가 두 명의 사냥꾼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누가 사냥개의 주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갈림길이 나타났습니다. 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또 한 사람은 왼쪽으로 향합니다. 사냥개는 서슴없이 오른쪽 사람을 따라갑니다. 누가 주인인지 판가름 나는 순간입니다.
믿음의 길을 선택한 이는 많습니다.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신앙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려고 애쓰는 가운데 맡겨진 일과 사명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련을 만나고 예상치도 않던 문제로 고통을 겪으면 신앙생활도 흔들립니다. 심한 경우에는 성당 다니는 것마저 포기합니다.
세상은 그러한 사람을 부릅니다. ‘뭘 그래? 제 몫 챙기고 노후 대책 마련하며 편히 살아야지.’ 그러나 주님의 목소리는 다릅니다. ‘그만한 일에 실망하고 포기하면 어떡하는가? 다시 새롭게 출발해라.’
세상의 기준을 선택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 기준과 역행하기 때문입니다.
한때인 것을 …
- 장동현 신부-
저는 본디 운동을 과히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다 마라톤에 취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만나는 사람에게 마라톤 예찬론을 늘어놓기 바쁩니다. 곰지락거리는 것조차 싫어하던 제가 이렇게 변한 것이 참 신기합니다. 연습과 대회출전을 우선하다 기도 생활과 공동체 생활에 지장을 준 적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마라톤에 반쯤 미쳐 있는 상태입니다. 중독이 아닐까 약간 걱정도 됩니다.
저보다 앞선 경험을 했던 한 지인에게 걱정을 털어놓았습니다. 대답하기를, 한때라고 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지나갈 거라고 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5년, 10년 후에도 지금처럼 열성적으로 마라톤에 빠져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때 제가 삶에서 가치 있다고 여기거나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귀한 물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나이를 먹다 보니 그런 것들이 더 이상 가치 있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지금 내가 세상 것 가운데서 누리고 가지고 있는 것들이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한때요, 지나가는 것들을 영원한 것인 양 움켜쥐려는 것이 안쓰러울 따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라 하십니다. 그 반대로 하느님께 높이 평가되는 것이 사람들 앞에서 혐오스러운 것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영원하시다는 것입니다. 그 밖의 것들은 다 한때요,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신앙인은 영원의 여행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긴 호흡, 맑은 정신이 필요합니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써라?
-김찬선신부-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도
불의한 재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얘기합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에서 불의한 재물이란 것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불의한 짓을 하여 모은 재산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재물이란 그 자체로 불의한 것이라는 뜻인지....
어제 복음과 루카 복음의 전체적인 재물 이해를 볼 때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한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어떤 분에게 고백성사를 주었습니다.
약간의 거짓말을 하여 이익을 취한 것에 대한 죄 고백이었습니다.
큰 죄도 아니고 되돌리기도 불가능한 이런 경우
사제로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곤란합니다.
양심에 꺼려하는 그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마음에 영 걸리면 그것으로 가난한 이를 도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만들라고 하였는데
불의한 재물로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
깡패 짓을 해서 돈을 번 경우
그것으로 좋은 일을 하라고 하여 마음 편하게 해 주면
그 사람은 깡패 짓을 그만 두려하기보다는
좋은 일을 깡패 짓을 합리화하는 구실로 삼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를 경계하며
불의한 재물로 가난한 이를 도우라고 충고를 해야 할 것입니다.
실로 우리는 살아가며 부정하게 이득을 취하며 살아갑니다.
물건이 조금 나쁜 것인데도 좋은 것이라고 하며 팝니다.
우리가 어떤 이득을 취하는데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이런 식의 부당 이득의 측면이 어디나,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살이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저희 수도자는 그런 돈벌이를 하지 않으니까 깨끗한 사람인 양,
그렇게 돈을 벌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나무랄 수 없습니다.
시골 가 땅만 파고 살지 않는 한 어쩌면 불가능하다 할 것입니다.
저는 세상살이를 하는 신자들의 이런 고달픔에
연민을 가지며 위로하는 뜻에서(합리화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옛말을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오늘 복음에 적용해봅니다.
하느님께 혐오스러운 것
-전삼용신부-
젊은 변호사가 멋진 사무실을 빌리고는 사람들에게 대단한 인상을 주려고 사치스러운 전화기를 구입했습니다. 그 전화는 아직 가설되지 않은 채 책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첫 번째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젊은 변호사는 일부러 그를 밖에서 15분쯤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잘난 체 하기 위해 수화기를 들고 정말로 통화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네, 국장님이십니까? 국장님, 그건 시간 낭비입니다. 아, 네 정 그러시다면, 하지만 천만 원 이하로는 안 됩니다. 좋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안녕히 계십시오.”
변호사는 수화기를 내려놓았습니다. 손님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젊은 변호사가 물었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 ... 전화를 가설하러 왔는데요.”
이 변호사는 은근히 으스대고 싶었지만 결국 비웃음을 사고 맙니다. 전화를 개설하러 온 사람은 전화가 안 되는데도 전화 받는 척을 한다는 것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처지를 다 아시는데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더 잘 사는 척, 더 많이 아는 척, 더 행복한 척을 하는 것을 잘 아십니다. 오늘 말씀처럼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 받는 것이 하느님께는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한 번은 고해성사 하러 들어오신 분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다 받아들이겠는데,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우선 먹고 살아야 신앙도 있고 뭐도 있는 거지...”
조금은 성경말씀을 무시하고 또 조금은 비웃는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라고 했다가 여지없이 비웃음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비웃음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나라를 차지할 수 있고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면 그들은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그렇게 말하는 이를 비웃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돈을 좋아해서 그렇게 말해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뿐임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어 자신들의 위선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못마땅해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참혹한 죽음을 안겨주려 합니다. 그래도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지 보려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계신 예수님을 보며 그 분이 틀렸다고 후회하는 모습을 인정하는 것을 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런 고통을 줘서 더 비웃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 신념 안에서 당당하셨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비웃었던 이들은 정신이 멍해졌습니다. 왠지 자신들이 예수님께 비웃음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처럼 돈도 좀 원하고 육체적 즐거움이나 권력을 원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끝까지 세상 것들을 원하지 않는 것을 보고 혼돈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비웃는 사람들을 삶으로 비웃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생각하지 말고 나의 확신대로 살며 오히려 세상을 비웃으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본래 부잣집에서 태어나셔서 돈 걱정 없이 사실 수 있으셨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거지의 삶을 택하셨습니다. 그분이 드나들던 문은 보통 사람의 허리밖에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드나들기 위해 최소한의 공간만 구멍을 뚫어놓고 문으로 사용하였고 잠자리도 누우면 그만인 조그만 공간에서 주무셨습니다. 물론 먹는 것, 입는 것도 살 수 있는 만큼만 드시며 사셨습니다. 모든 것을 최소한만 취하며 은근히 부자들을 비웃었던 것입니다.
처음에 그의 마을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친구들도 그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프란치스코는 그의 삶으로 자신이 옳다는 것을 드러냈고 이어 친구들과 많은 이들이 그의 삶을 따르려고 몰려들어 그의 동료들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모든 것을 버리고 거지의 삶을 사는 것을 비웃는 친구들을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께 혐오스럽게 보이느니보다는 사람에게 비웃음 당하는 것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당당하게 살기 위해선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은 하느님께서 혐오하시는 것들입니다. 언젠가 다 사라질 공허한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지 말고 보이지는 않지만 영원한 것을 추구합시다.
무아(無我)
-이재성 수사-
재물이란 참으로 유용하면서도 위험합니다. 재물에 대한 적절한 절제와 자선은
나의 영혼에 더할 수 없는 유익을 가져오지만, 재물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은
우리의 영혼을 파멸시킵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아직도 부족하고 필요한 것이
많기 때문에 재물을 구하는 것이지, 결코 욕심이 아니라고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ego)’가 있기 때문에 내 것이 있고, 내 것이 있기 때문에
부족함이 있고,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욕심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근본적인 것에는 ‘나’가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의 근본에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없다.’ 이 점이
성인과 우리와의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나’가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내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은
글을 쓰고 밥을 먹고자 하는 내적인 욕구가 있고 외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연인들이 서로 사랑하며 웃고 우는 것도 울고 웃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바람 따라 팔을 움직이는
허수아비처럼 누군가에 의해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내 것을 주장하고 욕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
-김은배 수녀-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많은 은총을 주셨지만 그중에서도 저에게 환자들을 돌보는 사랑의 은총을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리면서 오늘 묵상을 합니다.
“재물을 올바르게 이용하여라.” 하느님은 저를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간호 수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도직으로 가정방문을 시작했습니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힘들었고 때로는 가정방문을 가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의욕만 넘쳐 환자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제 방식대로 대하다 보니 환자가 저를 힘들어 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제가 좋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해도 상대방이 원하지 않으면 줄 수가 없기 때문에 저는 상대방이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환자들과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찾아보면서 환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기 위해 환자와 함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원하는 것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하늘을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기까지 저는 많은 상처를 받았으며 때로는 엎어지고 넘어지고 올바르게 서 있을 수가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환자 방문을 간다거나 다녀와서 함께 나눔을 할 때도 저는 다만 도구인 것을 잊어버리고 제가 갔기 때문에 환자가 편안해지고 통증조절도 잘 되었다는 의기양양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고등학생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평소에 제 목소리가 크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날은 제가 더 크게 말했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대답을 요구했습니다. 다음에는 오지 말라는 학생의 말을 듣고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하느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체험할 수 있도록 이런 실수를 통해 치시고 다시 일으켜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 재능을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 쓰게 하시고 저를 더욱 작아지게 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셨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이영창 신부-
오늘의 복음은 어제의 복음 ‘약은 청지기’ 비유의 뒷부분으로 예수님께서는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잘 들어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9절).
이 구절의 의미는 아주 묘합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세속의 재물’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재물을 공박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물도 ‘친구들’을 사귀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즉 보통 불의, 사기, 그리고 타협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원래 셈족 언어로는 ‘부정한 돈’이라고 표현되는 그 세속의 재물로 우리가 죽었을 때에 성부 곁에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바로 그런 친구들을 사귀는데 사용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그렇게라도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집’ 이라는 전형적인 묵시문학적 표현은 구원의 자리 즉 ‘천국’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친구들’이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막연하여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루가 복음 사도의 전체적인 신학사상에서 미루어 볼 수는 있습니다 :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헤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가 12,33-34).
그러므로 우리가 재물로 사귀어야 할 ‘친구들’이란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은혜를 베풂으로써 나중에 하느님 곁에서 우리의 중재자가 될 모든 사람들이며, 추상적으로는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게 베푼 모든 자선행위 및 선행으로서, 여기서는 의인화되어 표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재물은 다른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사랑과 우정의 공간을 넓혀주는 역할을 하든가, 아니면 이기적으로 사용되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질시를 받거나 사회적 불안과 불평등을 야기 시키는 구실을 합니다. 이와 같은 양 극단적인 재물이 ‘동참’과 ‘우정’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이기주의적 폐쇄와 원한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는 재물을 대하는 우리 자신의 태도로써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재물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자신의 신앙의 진실성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것입니다. 재물의 정당성이 인정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우리가 재물을 만들어 간직하거나 또는 소유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모든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 쓸 경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정당하게 번 재물이라 하더라도 부당하게 사용되는 것이며 따라서 ‘세속의’ 재물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또한 옛 교부들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성 바실리오 성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 “네게 관리하라고 맡겨진 재물을 마치 네 것인 체하는 너는 도둑이 아니냐?… 네가 가지고 있는 빵은 배고픈 이들의 것이고, 네 가방 속에 넣어 두고 있는 외투는 헐벗은 이들의 것이며, 네 집에서 썩어가고 있는 신발들은 신을 신지 못한 이들의 것이며, 네가 감추어 둔 돈은 궁핍한 이들의 것이니라. 네가 베풀어 줄 수 있는 이들이 많으면 많은 만큼 그만큼 너는 불의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성바실리오).
오늘날의 교회도 똑같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69항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이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입각하여 공정하게 나누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재화의 거의 대부분이 인류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쥐여져 있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대개가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고자 함으로써 복음을 거스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복음을 들으면서 나 자신도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려고 하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할 것입니다. 또한 재물을 모음에 있어서 나만, 내 가족만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재물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너희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 데도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내어 주겠느냐?”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아멘..........◆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김윤태 신부-
요즈음 세상은 어떤 이유가 있던지 간에 재물이 돈이 많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이 듭니다. 현실적으로 경제적인 여유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사람구실은 고사하고 말할 수도 없는 세상입니다.
이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웃고 울고 싸우고 죽어가고 있습니까? 서민들의 한숨 섞인 한마디 중에 어떻게 되던지 간에 '돈벼락이라도 한번 맞아봤으며 좋겠다'는 말입니다. 신문이나 방송 등에서 심심치 않게 돈 때문에 일어난 아픈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분명 이 재물을 우리는 무시하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도 돈을 무시하고 살 수 없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재물은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현실적으로 하느님 없이는 살아가도 돈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느껴지는 오늘날 입니다.
푸념과 폭언과 협박이건 안타까운 마음의 절규 "하느님도 무심하지지" "귀신은 뭐하노" "사람이 무슨 잘못이고 돈이 웬수지" 등 우리들의 답답한 마음을 토해내는 것들입니다.
설령 세상이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돈 없이 세상에서 사람구실을 할 수 없다고들 하나, 그렇지 않음을 알기에 토해내는 말들입니다. 아무리 돈이 권력의 힘이 있다고 하나 지금 이 순간밖에 되지 않음을 알기에 돈의 힘에 굴복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 성경의 말씀에 보면 재물의 많고 적음도 하느님의 축복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 재물이 모두 함께 나누어지고 베풀어질 때 축복이지, 혼자만 특정 계층만을 위해서 사용된다면 자신에게 굴복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면, 분명 그 재물은 축복이 아니라 독약이며 머지않아 심판의 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시간의 늦고 빠름이 있을 다름이지 분명 행인지 불행인지 드러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감추어져 있는 것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라는 성경말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을 택할 것이냐 재물을 택할 것이냐가 아니라 모두 함께 더불어 살아갈 것인지 끼리끼리 모여서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아 갈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성경은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충실하다"라로 말합니다. 세상에 하느님께 주신 것은 모두 복된 것입니다.
재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것이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드러나거나 하느님 위에 군림하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재물이란 무엇일까요. 손익계산의 방법이 아니라 내어놓고 나누는 사랑의 계산이 될 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축복이며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는 도구됩니다.
이런 삶이 가능한지 이야기 한 토막을 통해서 생각해 봅시다. 선교사 한 분이 아프리카에 갔는데, 삼형제가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유산으로 말 17마리를 남겨두었는데, 맏이는 2/1 둘째는 3/1 막내는 9/1을 갖도록 유언했는데 도저히 말이 산채로 나눌 수 없어 서로 양보하지 못해 싸우고 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선교사는 고민과 기도를 거듭한 후 이야기했습니다. "간단합니다. 여기 내가 타고 온 말이 한 필이 있습니다. 이것을 드리지요. 합쳐서 나누어 보시지요." 하였습니다.
삼형제는 말 18마리를 가지고 맏형 2/1=9마리, 둘째 3/1=6마리, 막내 9/1=2마리로 분배를 마친 그들은 각각 자기 몫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계산해도 틀림없었는데 한 마리가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때 선교사가 "이제 다 나누었지요. 남은 한 마리는 저의 것입니다."하고 선교사는 웃음 띤 얼굴로, 이처럼 사랑이 있는 곳에는 모든 것이 원만히 잘 해결될 뿐 아니라 더욱 더 풍부하게 됩니다.
이런 마음과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비록 어렵고 힘들고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분명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면 됩니다. 너무 욕심내지 말고 나누면 안 되는 일이 없으며, 많이 가진 사람은 적게 가진 사람보다 많이 내어 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나 자신 뿐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럼 분명 돈 없이는 살수 있어도 하느님 없이는 즉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날이 마지막 때 입니다. 우리 각자의 마지막도 이런 모습이기를 기도합니다...............◆
새벽을 열며
어떤 한 어촌에 가난한 어부가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역시 어부였는데 어느 날 파도에 배가 뒤집혀 바다에서 유명을 달리하셨지요. 이 가난한 어부는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아버지의 고깃배를 수리해서 바다에 나갈 채비를 하였지요. 이 말을 전해들은 친구가 그를 찾아와 말합니다.
“이보게, 자네 아버지가 바다에서 변을 당하셨는데 무섭지 않나?” “무섭긴! 어부가 바다를 두려워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럼 자네 조부께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 “역시 어부셨지. 그분도 바다에 나가셨다가 풍랑을 만나 그대로 영영 돌아오지 못하셨네.”
그러자 친구는 놀랍다는 듯이 재차 물었다. “그럼 증조부는?” “증조부께서도 진주를 캐려고 잠수했다가 바다에서 돌아가셨지.”
친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렇게 가족 모두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어떻게 다시 바다로 나갈 수 있단 말인가!”
친구의 말에 이 어부가 되물었습니다. “자네도 부친상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돌아가셨나?” “집에서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네. 워낙 고령이셨거든.”
“그럼 조부께서는?” “그분 역시 노환으로 고생하시다가 집에서 돌아가셨지.”
“증조부께서는?” “지병으로 오랫동안 누워 계시다가 집에서 돌아가셨네.”
친구의 말을 들은 어부가 말합니다. “모두들 집에서 돌아가셨는데 자넨 집이 무섭지도 않나?”
어쩌면 바다나 집이나 모두 두려워할 수 있는 곳이지요.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가가 아닐까요? 세속적인 판단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인 것입니다.
어제는 머리도 식힐 겸해서 이발하러 외출을 했습니다. 그런데 거리에 떨어진 낙엽들이 참으로 많더군요. 그리고 이 낙엽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우리들도 이 낙엽처럼 모든 것을 훌훌 벗어버리고 떠나갈 것을 왜 이렇게도 아등바등 살아갈까? 사람을 미워하고, 세상을 미워하고, 또 어떤 때는 주님까지도 원망하게 되는 우리들의 모습들……. 그런 미움, 갈등과 다툼 속에서 성취한 권력, 명예, 부, 가족, 만남…….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이 세상에 남겨 놓고 결국 빈손으로 주님께 가게 될 것을…….
결국 중요한 것은 세속의 판단 가운데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이것야말로 가장 중요하며 우리들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가장 중요하기에, 예수님께서도 힘주어 말씀하시지요. 능력이 안 되면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서(자선을 베풀라는 의미), 먼 훗날 하느님 앞에 나설 때, 자기를 변호하게 만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는 말씀을 오늘 아침 가슴에 새겨 봅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 파견하신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혹시 세속적인 판단만을 내세워서 정작 지금 내가 해야 할 것들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세속적인 판단이 아닌, 주님의 뜻을 따르도록 합시다.
빠다킹신부
바리사이의 불충실
-서현승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강조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현세의 재물을 자신의 신앙적 열성과 경건함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으로 생각했던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특히 돈을 좋아했다고 성경의 저자가 증언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재물의 많음이 곧 자신의 행실에 대한 축복의 증표로
생각하고 있던 터였으니 예수님의 말씀이 못마땅하게 들렸던 건 당연했을 테죠. 하지만 현세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더라도 하늘 나라를 중심 가치로 삼으라는
예수님의 말씀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재물 자체를 부정하시는 것도 아니었고
세속의 재물을 하느님과 같은 선상에 놓고 택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옳은 체하고
사람들에게 떠받들리기를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비난하셨던
겁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은 곧 우리의 갈라진 마음을
다시 하느님께로 모으라고 초대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한결같이
충실하신 하느님의 마음처럼 우리도 당신께 충실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초대의 말씀인 것입니다. ‘위선자’(마태 23,15) 또는 ‘눈먼 자’(마태 23,17)인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적인 모습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정말로 아파할 수
있고 뉘우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치 좀 보자
-김광태 신부-
본당을 방문하다 보면 역설적인 두 모습을 만나게 된다. 거창한 사목 프로그램에 따라 뭔가 대단한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선교활동이나 미사참석률, 봉헌금 등 실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결과는 하나도 없고 신자들의 불평까지 많은 곳이 있다. 반대로 사목지침서는커녕 두드러진 사목 프로그램 하나 눈에 띄지 않는데도 모든 지표가 두드러지게 향상되고 신자들의 만족도도 높은 곳이 있다. 전자는 폼만 그럴싸하고, 후자는 폼은 엉성해도 매사에 진지하게 임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듣다 보면 마치 이분이 편법을 장려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물론 부정한 재물을 자기 자신을 위해 이용한 일을 칭찬하셨을 리는 없고, 사람들이 세상일에 쏟는 열정을 영적인 일에서도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일 게다. 오죽 답답하셨으면 이런 비유까지 동원하셨을까 싶다.
게으른 주부는 낮에 할 일이 없어 무료하고, 부지런한 주부는 음식을 만들고 청소며 빨래 등으로 너무 바빠 잠시도 앉아 있을 틈이 없다. 그런데 본래 부지런한 사람이 따로 있을까? 사랑이 있으면 마음을 써야 할 일이 끊임없이 보이게 마련이고, 사랑이 없으면 마음이 가지 않아 할 일이 없는 것뿐이다.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가족들 때문에 다 참아내고, 그나마 일할 자리가 있다는 것으로 감사하며 사는 신자들을 볼 때마다 부끄러움을 느낀다. 내가 신부였으니 망정이지 만일 일반 직장에서 이렇게 일했다가는 쫓겨나기 십상이겠다는 생각도 든다. 힘들게 살면서도 성당에 와서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도 많은데, 이 일만을 위해 살면서도 온갖 꾀를 다 부리고 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복음은 꼭 나에게 하시는 말씀 같다.
예수님은 재물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들려주신다.
-오창열 신부-
예수님은 재물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들려주신다. 재물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천상 일도 잘 다룰 수 있다. 재물은 우리의 육신 생활과 이웃 사랑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재물과 돈을 인생의 전부로 생각하는 사람, 곧 돈과 재물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다. 재물과 돈이 하느님 자리를 대신하게 되면 사람은 악을 행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자기를 드러내는 거짓 덕성을 멀리하셨다. 위세를 떨치는 부와 의인 행세와 명예를 좇는 탐욕을 멀리하셨다. 그런 것을 ‘위선’이라고 규정하셨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일을 일삼는 ‘위선자’라고 질책하셨다. 그들은 성서 말씀을 자기가 편리한 대로 해석하여 부를 누리고 명예롭게 오래오래 사는 것을 하느님 앞에 의롭게 살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구원관을 고쳐주시려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 너희는 부자이니 불행하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명백하다. “너희가 옳은 체하며 떠받들리기를 좋아하지만 하느님은 너희를 가증스럽게 보신다.” 야고보 사도는 이 가르침을 풀어서 이렇게 가르친다. “가난한 형제는 하느님께서 높여주시는 것을 기뻐하고 부요한 형제는 하느님께서 낮추어 주시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아무리 부요한 사람이라도 들에 핀 꽃처럼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부자도 자기 사업에 골몰하는 동안에 죽고 맙니다.”(야고 1,9-11)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이성원신부-
한 달에 한 번씩 봉성체를 나갑니다. 시골이라 노인들과 장애인이 많습니다. 무슨 장애인이냐고 생각하지만 실제 농사를 짓다 보면 의외로 사고 위험이 많다고 합니다. 처음에 봉성체를 나갈 때는 길도 잘 모르는데다 차를 이용해서도 20,`30분씩 시간이 걸리는 데 짜증이 났습니다. 그것도 지저분한 방에 들어설 때면 내심 찜찜했고 집 안에서 나는 쾌쾌한 냄새는 얼른 예식을 마치고 가야지 하는 생각만을 갖게 했습니다. ‘도시에서는 보통 며느리나 딸들이 집안을 깨끗이 청소해 놓고 봉성체가 끝나면 식사 대접을 하건만`….’ 생각이 이쯤에 이르면 가난한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던 사제서품 때의 결심은 온데간데 없어집니다.
점점 속물로 변해가는 제게 하느님께서는 정신을 차리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날도 아흔이 넘으신 바오로 할아버지 댁으로 봉성체를 나갔습니다. 할아버지는 겨우 성당에 나오실 정도고 할머니는 몸이 안 좋아 집에만 계셨습니다. 집에 들어서니 좀 일찍 간 관계로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아직 식사중이셨습니다. 얼른 상을 치우려는 두 분 사이로 반찬이 보였는데 멸치·오이지·김치가 통에 담겨 있는 그대로 놓여 있었고 하나같이 곰팡이가 피어 있었습니다. 두 분은 상한 음식을 놓고 마주앉아 그렇게 식사를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골에서는 이런 일이 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제라는 게 참 부끄러웠습니다.
그 다음달에도 바오로 할아버지 댁에 봉성체를 갔습니다. 집에 들어서며 “할머니, 봉성체 왔어요. 십자가하고 초를 놓는 상 어딨어요?” 하니까 혼자 계시던 할머니께서 “아유, 어서 오세요. 숟가락도 가져올까요?” 하시더군요. 할머니가 가벼운 치매에 걸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가 참 정겨웠고 참 곱게 늙으셨음이 고마웠습니다. 한 달 전쯤부터 바오로 할아버지가 풍에 걸리셨습니다. 음식도 배에 호스를 꽂아 드십니다. 제가 가면 울기만 하십니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를 비웃었다.’ 마치 저에게 하신 말씀 같습니다.
저희가 언제?
-장재봉 신부-
그날 그 자리에서 꼭 주님의 오른편에 세워질 수 있기를 우리 모두는 기대합니다. 우리는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하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쯤이야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까요. 헐벗은 이웃을 위해 헌 옷도 모으고, 병문안을 가기 위해 시간을 쪼개는 일도 즐겁게 합니다. 살펴보면 참 많은 분들이 드러나지 않게 봉사하면서 살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선한 사업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자격은 갖추고 계시는지요?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자선에 대해서 엄하게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그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오른편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선행을 까맣게 잊어버린 머리가 나쁜 사람들뿐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기에 복음을 전하고, 내 손이 아니라 주님의 손으로 가난한 이에게 도움을 주며,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주는 그분처럼 생활한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더 주지 못해서 가슴 아픈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날 선행의 증거는 내가 헤아려두고 찍어서 간직했던 행사사진이 아니라, 까맣게 잊고 지낸 ‘그분들’의 증언입니다. “예수님, 바로 저 사람이 나를 도와주었어요!” 하고 소리치는 그분들의 입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천국행 티켓이며 하늘 나라 시험의 합격증서입니다.
노(老) 수녀님과 노(老) 신부님
-임종심-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큰딸이 돌아와 대구에 계신 시어머님께 인사를 가려고 KTX를 예약했다. 그날따라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일 때문에 동두천에 가 있던 애들 아빠와 서울역에서 만나 같이 내려가기로 했는데, 기차시간을 잘못 알고 동두천에서 늦게 출발했다는 것이다. 발매된 기차표는 역에 가야 취소할 수 있다고 해서 큰딸에게 문단속하고 시간 맞춰 오라고 하고는 작은딸과 함께 정신없이 역으로 달려가 그 다음 시간으로 교환했다. 온 식구가 헤쳐모이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폭우 속에서 큰딸이 무사히 오길 기다리며 출입문 쪽을 계속 주시하는 동안 주변 풍경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행선지가 어딘지는 몰라도 놀러 가는 사람, 일하러 가는 사람, 배웅 나온 사람, 마중 나온 사람 등 다양한 사람의 군상이 흥미로웠다. 마침 그때 내 시선을 멈추게 한 장면이 있었다. 바로 노 수녀님과 노 신부님의 만남이었다. 복장에서부터 눈에 띄는 그분들. 노 수녀님 곁에는 젊은 수녀 두 분이, 외국인이신 노 신부님 곁에는 통역을 하는 나이 지긋한 평신도 한 분이 계셨다. 수도복이 비에 젖은 채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는 곳에서 포옹하는 그 모습이 정말 보기가 좋았다.
해맑은 웃음을 지니신 연세 지긋한 수녀님과 신부님이 서로 정답게 인사하신 후 종종걸음으로 다음 행선지로 떠나시는 모습을 보며 흩어진 가족들을 기다리며 긴장하고 있던 내 마음이 환해졌다. 비록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그분들한테서 풍겨 나오는 향기가 참으로 그윽했고, 짧은 동영상을 보듯 그분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림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평생을 하느님을 따르는 분들한테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요 아름다움이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오늘 복음 말씀은 경제력을 삶의 중심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중년의 나를 일깨우는 하느님 말씀으로 들린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양승국신부-
<돈보스코의 의미>
한 장애우들 시설에 미사를 봉헌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미사 끝에 한 형제가 제게 다가오셨습니다. 살레시오회에서 왔다고 하니 당신도 세례명이 ‘돈보스코’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셨습니다.
왜 세례명을 돈보스코로 정하셨냐고 여쭈었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돈’자가 들어가서 선택하셨답니다. 돈을 좀 많이 벌고 싶어서. 돈 많이 벌면 어려운 사람들 많이 도와주고 싶어서.
사실 ‘돈’(Don)이란 말은 이태리어에서 존칭에 해당됩니다.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분들, 신부님 같은 분들의 이름 앞에 붙이는 존칭입니다. 따라서 ‘돈보스코(Don Bosco)’라는 의미는 다름 아닌 ‘보스코 신부님’이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인 돈보스코께서는 살아생전 돈(錢)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필립보 네리 신부님 같은 경우 “주님, 제발 저에게 돈이 쌓이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비오니 아무도 제게 유산을 물려주지 말게 하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셨답니다.
왜냐하면 착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이자 사심이나 욕심이라곤 조금도 없으셨던 필립보 네리 신부님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막대한 재산의 기부를 원했고 유산을 남기려고 줄을 섰었답니다. 복잡한 절차, 계속 쌓이는 돈이 너무 귀찮았던 성인께서는 그런 기도까지 바치셨답니다.
그러나 돈보스코는 정반대였습니다. 누군가가 유산이라도 당신 앞으로 남겨주면 그렇게 기뻐하셨습니다. 틈만 나면 어디 ‘눈먼 돈’ 없는가 하고 주변을 둘러보셨습니다. 돈 냄새 나는 곳을 찾아다니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의 보호 아래 있었던 수많은 청소년들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돈보스코의 두 손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아이들의 생계가 달려 있었습니다. 돈보스코는 한평생 아슬아슬했던 통장잔고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습니다. 때로 수천 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내일 아침 먹을 빵이 없어 마음고생을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돈보스코는 천부적으로 대단했던 자존심까지 꺾어가며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했습니다. 정말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며 사람들에게 손을 벌렸습니다.
이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예수님 시대 당시 지도층 인사들이었던 바리사이들 역시 얼마나 돈을 좋아하고 밝혔던지 루가 복음사가는 이런 사실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바리사이들이 돈을 좋아하고 찾아다닌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돈보스코처럼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자기 한 몸 잘 챙겨보려고, 사리사욕을 충족시키려고 그리도 혈안이 되어 돈을 따라다닌 것입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 말씀을 곰곰이 묵상해봅니다.
사실 재물이란 것 좋은 것입니다. 어느 정도 재물이 있어야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도 갖춥니다. 사람 노릇도 할 수 있습니다. 문화생활도 누립니다. 봉사도 하고 자선도 베풀 수 있습니다.
늘 지나침이 문제입니다. 재물에 대한 과도한 집착, 재물의 노예에로 전락, 재물을 하느님 섬기듯 하는 모습이 문제입니다.
열심히, 그리고 정직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척하는 일은 우리가 이 땅에 온 중차대한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성실하고 건전한 부자는 개인의 노력에 하느님 축복이 더해진 결과입니다.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재물에 모든 것을 걸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먹고살만하면 시선을 이웃들에게 돌리라는 것입니다. 재물보다 훨씬 더 위에 있는 것들도 많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랑, 사람, 우정, 의리, 신의, 그리고 하느님.
길동무(道伴)
-강영구 신부 -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 명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사람이 왕의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왕궁 안으로 들어가면 돌아 올 수 없습니다. 그는 평소에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아내에게 같이 가줄 것을 부탁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한 발짝도 같이 가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사랑하는 아내에게 동행을 부탁하자 궁궐 대문까지만 같이 가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소홀히 했던 셋째 아내가 임금님 앞까지 동행하겠노라 하였습니다.
첫째 아내는 돈과 재물, 권력과 지위, 명예와 향락입니다.
이것들은 내가 평소에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죽음과 동시에 나를 떠나고 맙니다.
둘째 아내는 가족과 친구, 친지들입니다.
그들은 무덤까지는 울며 동행하지만 더 이상 나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셋째 아내는 선행과 자선, 사랑입니다.
끝까지 나와 동행하게 되는 길동무입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와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까?
당신의 도반(道伴)은 믿을 만합니까?
좋은 길동무와 함께 행복한 하루가 되십시오.(一明)
소유와 위탁의 관계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에는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말씀들이 서로 모여있다. 전체적인 이해를 돕는데는 우선 어제 복음이었던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를 떠올려야 한다. 그 비유가 오늘 복음과 바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청지기의 편법적인 부정직함을 알면서도, 그러나 약삭빠르게 일을 처리하는 슬기로움을 칭찬한 부자주인의 입장을 은근히 동조하시면서,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8절)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청지기가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실직의 위기에 직면한 상태에서 신속하게 자신의 미래를 위한 대책을 마련했다는 점에 있다. 청지기의 부정직함은 접어두고라도, 그의 행동은 곧 심판의 위기에 직면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즉각적인 회개촉구의 모범이 될만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는 청지기의 부정직함이다. 이 부정직함이 오늘 복음의 세속과 재물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에 비웃음을 보인 이유를 먼저 보자. 그들이 예수를 비웃은 이유는 예수께서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13절)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말씀에 비웃음을 보였다면,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재물을 통한 자신들의 넉넉한 생활을 그들의 정직함에 대한 하느님의 보상이라고 믿었다. 그들이 야훼 하느님의 전통을 보호하고 전수하며, 율법을 글자 그대로 착실하게 지키는 대가로 재물을 보상받았다고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재물과 하느님을 일치적 관점에서 보고 있으며, 보상으로 받은 재물의 소유권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속적 재물과 하느님을 철저하게 따로 떼어 생각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생각에 의하면 재물과 하느님은 각각 서로 다른 주인이다. 이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13절) 거듭 말하지만 재물은 세속적이며, 부정직함과 온갖 탐욕을 반영하고 있다. 돈이 있는 곳에 부정부패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세속의 재물과 하느님에 대한 문제에서 어떤 답을 얻을 수 있는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재물과 하느님에 대한 일치적 관점의 태도는 일단 답에서 제외된다. 그것은 그들의 태도가 하느님께 가증스럽게 보이기 때문이다.(15절) 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상으로 주어진 세속적 재물의 주인을 자기자신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답은 소유(所有)와 위탁(委託)의 철저한 구분에 있다. 세속의 재물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에 의해 위탁된 것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주어진 재물은 하느님에 의해 맡겨진 종속적인 관계를 유발시키는 것이다.
세상의 주인은 하느님뿐이시다. 하느님 외에 어떤 무엇도 인간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세속의 재물 또한 하느님의 것으로서 인간은 자신의 삶 속에서 이를 잘 관리하도록 불림을 받은 셈이다. 사람은 적게 맡았던 많이 맡았던 맡은 것에 대한 자신의 소명(召命)과 책임을 잘 완수해야 한다. 여기에는 늘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며, 지극히 작은 일에 부정직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부정직할 것이다"(10절)는 원칙이 적용된다. 맡은 것이 많을수록 비리와 부정부패가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기 때문에 이를 항상 조심하여야 한다. 아울러 이 땅에 기아(饑餓)에 허덕이고, 재물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며, 인권(人權)을 팔아야 하는 일이 있는 한, 우리는 각자의 소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마음 깊이 깨닫고 뉘우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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