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범선생님을 찾아본 동기는 한줄메모장에 젤라가 신석범선생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글을 보고 찾아보게 됐습니다~~젤라님 감사해요)
법성포 초등학교가 올해로 100주년이다
당시 인의산 자락에 있던 법성포 국민학교를
공동묘지였던 지금의 대덕리 자리로 옮기면서
23년간 교육에 정열을 쏟았던 사람이 신석범선생님이시다
(다음은 “법성향지”에서 법성포인물사로 소개된 그분을 간추려본다)
흔히 현대교육의 상징적 인물로 스위스의 교육가 페스탈로찌를 꼽는다
그는 교육을 사상 및 철학적으로 이론화,체계화하였을 뿐 아니라
몸소 실천적인 사표가 되었던 교육의 대부인 것이다
그에 버금가는 교육가가 이고장 법성포에도 있었다
일제 말엽부터 광복후까지의 약 23년간 그 즈음 법성을 아는이 치고
신석범을 모르는 이가 없을것이며, 신석범하면 교육이 떠오를 만큼
그는 한 세대를 법성교육을 위하여 살다간 위인이다
예부터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라 하였고
속어에도 “농사중에는 자식농사가 으뜸이다”라고 하였다
제자식 학교에 넣어 6년동안 학교 한번 찾아가보지 않고
담임선생 한번 만나보지 않고 졸업시키는 부모가 태반이었던 시절
전북 줄포에서 출생한 송은 신석범!
남의 고향, 남의 자녀의 교육을 위하여 자신의 정열을 불사르고
청춘을 다 바친 신석범!
대덕리로 이사한 학교가 불에 타 지역민들이 망연자실하고 있을때
신석범은 “우리가 실망만 하고 있을때가 아닙니다 하루속히 학교를
재건해야 합니다 어린 자식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야 합니다
내가 앞장 서겠습니다!“
당시 모두에게 벽돌한장 흙 한줌 나무 한그루 돌 한덩이 학생과 선생님의
혼이 깃들어 있는곳 법성포 국민학교!
처음 반신반의 하던 지역민이나 미친소리한다고 조소하던 관청에서까지
오척단신으로 어디에서 그 무서운 집념이 용솓음치는것인지
“참 신석범은 하늘이 낸 사람이여!” 할 정도였다니 그분의 헌신과 봉사
정신을 지금의 법성포 젊은이들이 본 받지 않았나 싶을 정도이다
그래서 노인당에서 그에게 지어준 아호 松隱( 송은 :송은 그이 굳센 의지와
깨끗한 절개의 의미하며 은은 그의 겸손한 덕성을 의미하는것임)
그는 씩씩하였으되 교만하지 않았었고 영민하였으되 결코 이기를 피할줄
하는 덕인이었다
정읍농업학교를 나온후 공직에 있다가 1924년 삼양사에 몸을 담고 출장소장으로
나오게 되면서 법성과 인연을 맺고 1981년 8월 81세로 열반에 든
송은 신석범선생님에게 법성포 국민학교 중고교 학부형 주민들이 힘을 모아 세운
법성포초등학교 정중앙 전면에 그분의 공덕비 비문을 소개하면서
지금이라도 그분의 교육발전에 헌신하신 공을 향지에 실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우리 어린이들의 배움의 집을 마련하고 놀이터를 닦기에 비바람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 심노를 모두 바치신 송은 신석범 선생님의 거룩한 공덕과
높으신 은혜를 길이 빛내기 위하여 여기 돌비를 세우노라“
(편집하여 옮긴이 : 황제원)
첫댓글 기억하지요~~~
날씨 더운데 무거운 몸으로 어떻게 지내냐? ^^
야은 길재,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과 함께 삼은(三隱)이라 불렸는데 그럼 신석범선생님까지 사은(四隱)이라 불러야 겠네요.
덕산 황포도 있는데...너는 아호가 뭐냐~~후심 송포도 있는데...
우리는 구질구질한 것은 안키운다. 대가리가 복잡해지니...///참,쉐마도 호가 있다. 형호~~~
모르면 말이 되남
고생 했구만 / 역시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