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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7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루가 17,1-6)
If your brother sins, rebuke him;
and if he repents, forgive him.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속속들이 아신다. 간악하고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 죄에 얽매인 육신과 거짓되고 불의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지혜가 머무를 수 없다. 지혜는 다정하고 거룩하기 때문이다(제1독서). 용서하는 마음은 믿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이웃 형제를 믿고 용서할 수 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의 깊이만큼 용서하는 마음도 커진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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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복음 곳곳에서 예수님께서 용서에 대해 수없이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서 서로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움을 드러내시는 것이지요. 어쩌면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함께 살아야 하는 공동체 삶에서는 ‘용서’가 늘 가장 큰 ‘화두’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용서를 하라고 가르치시는데 사도들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마치 제자들이 주님 말씀에 동문서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은 용서하라는 말에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라고 엉뚱해 보이는 요청을 하는지요?
물론 복음의 편집 과정에서 주제가 다른 단락으로 넘어가는 까닭에 그렇기도 하지만,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가 사람을 용서하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용서하기 힘든 근본 이유는 사람에 대한 ‘겨자씨’만 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악인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안에는 반드시 ‘선한 씨앗’이 있고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이 있습니다. 용서는 그 사람의 표면적인 태도와 모습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며, 사람 안에 숨겨진 하늘 나라 겨자씨가 자라날 것을 ‘믿고’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이렇게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사람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와 믿음이 용서의 시작입니다. 수없이 속고 또다시 상처를 받으면서도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고 기다리면, 사람들 내면의 선한 겨자씨를 발아시키고 자라게 하여 하늘 나라를 열어 줍니다. 자연의 씨앗이 움을 틔우고 자라는 데는 좋은 토양과 적당한 햇볕과 비와 바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 내면의 하늘 나라 겨자씨가 움트고 자라려면 얼마나 많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 인내와 배려가 필요할까요? 용서하기 어렵다면 무엇보다 먼저 주님께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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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습니다. 알 수 없는 마음이지만 눈빛 속에는 마음의 한 모습이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어린이는 쉽게 용서합니다. 금방 잊어버리고 빨리 적응합니다. 그러기에 어린이의 눈빛은 맑습니다. 미움과 의심이 사라진 눈빛입니다. 누구나 어린 시절 이런 눈빛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남이 죄를 짓도록 그런 일을 저지르지는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특히 어린이처럼 약하고 힘없고 어렵게 살아가는 작은 이들에게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죄는 우선 하느님을 등지고 외면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하느님을 유일하신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등지고 외면하기 때문에 쉽게 우상을 섬기거나 교만에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훼방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시키며, 인간과 자연 사이를 갈라놓는 온갖 행위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형제자매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가 지은 죄보다 뉘우치며 돌아오는 형제자매를 받아들이시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충만히 받은 모든 믿는 이는, 죄를 지은 사람이 돌아오면 받아 주고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죄를 물으시기는 더디 하시고, 당신에 대한 믿음을 보시어 우리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기는 빨리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의 욕망이 눈빛을 흐리게 합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타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휴식도 양보도 없습니다. 전진과 소유만이 있습니다.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장애물로 여기게 합니다. 범죄는 이렇게 해서 생겨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지 말고,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욕망의 조절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일을 했으며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따지지 않으십니다. 얼마만큼의 믿음으로 어떻게 살았느냐에 더 큰 가치를 두십니다. 그러니 죄짓게 하지 말아야 할 상대는 ‘늘 만나는 이웃’입니다.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람들’입니다. 언제라도 깨끗한 눈빛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욕망을 조절하는 길입니다..
형제적 충고와 용서
-정희완 신부-
공동체 안에서 형제에게 충고하고 그의 잘못을 용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들 가운데 누가 누구에게 충고하고 용서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사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형제적 충고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행하는 행위들 안에는,
내가 너보다 낫고 옳다는 우월의식이 숨어 있을 위험도 있고,
다른 사람을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끌고 와서
조정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형제적 충고라고 말하며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지만,
진실한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에서의 충고라기보다는,
그저 내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내 힘을 과시하기 위한 개입과 간섭인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아마도 참다운 형제적 충고가 있다면,
그것은 입으로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잘못을 내가 짊어지고 스스로 속죄하는 삶을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어서 예수님처럼 남의 잘못을 대신 짊어질 순 없다 할지라도,
그저 묵묵히 그리고 겸손하게 옳은 길을 걸어간다면,
바로 그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조용한 형제적 충고로 작용할 것입니다.
적어도 공동체 안에서 형제적 충고를 할 때는 날 선 소리,
입바른 소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습으로 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참된 형제적 충고란 날카로운 말이 아니라,
따뜻한 용서로써 그를 끌어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
- 황영준 신부-
운전을 하고 어딘가를 가고 있었습니다. 초행길이라 헤매다가 급하게 차선 변경을 했습니다. 그러자 뒤에 오던 운전자가 경적을 울리며 제 차 옆으로 바짝 다가와 창문을 내리고 심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저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를 연발하며 그 차를 먼저 보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차를 보니 뒤 유리창에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빨간 딱지가 붙어있었습니다. 순간 천주교 신자가 어떻게 저런 욕설을 내뱉을까라는 생각이 들며 나도 쫓아가 한마디 내뱉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곧 ‘내가 운전을 제대로 했으면 저 사람이 저런 욕설로 자신과 남을 더럽히지 않았을 텐데.’ 하며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남을 죄짓지 않게 하는 것. 참으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때로는 나의 말투와 행동, 표정으로도 상대방을 죄짓게 할 수 있습니다. 꼭 물질적으로 피해를 주고 육체적으로 고통을 주는 것만이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는 것을 무섭게 경고하십니다.
아침부터 가족을 힘들게 하고 상처를 주고 집을 나서는 사람, 직장이나 학교에서 동료들과 상사와 부하들에게 말이나 행동으로 고통을 주는 사람, 내가 머물고 있는 자리에서 늘 주위 사람들에게 눈살 찌푸리게 하고 불쾌감을 주는 사람. 이런 모습은 우리 신앙인에게 절대 어울리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나로 인해 죄를 짓지 않게 하는 삶, 더 나아가 나로 인해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삶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입니다. 예수님 곁에 머물던 군중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 자체로 그들은 행복했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원하지 않아도
-김찬선신부-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요즘 젊은이들이나 세례 받은 지 오래되지 않은 분들은 모르겠지만
세례 받은 지 오래 된 나이 드신 분들에게 고백성사를 드리면
죄 고백을 다 한 뒤 꼭 이런 성찰 기도를 합니다.
“이 밖에 나 성찰치 못한 죄와
남이 나로 인해 지은 죄 있을 터이니
신부는 도무지 저를 벌하고 사하소서.”
실상 나의 많은 죄는 그로 인한 죄이고
그의 많은 죄는 나로 인한 죄입니다.
인간은 하나 같이 불완전하니
그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불완전한 그 때문에 불완전한 내가 죄를 짓고
내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불완전한 나 때문에 불완전한 그가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없을 수 없다 하십니다.
그러나 다음 말씀은 이해가 잘 가지 않고 표현이 너무 심합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남을 죄짓지 않게 할 수 없다 하시면서
남을 죄짓게 하면 불행하다니 어쩌란 말입니까?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불행하다는 말입니까?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는 경고의 뜻으로
다소 강한 표현을 하신 것쯤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아니면 글자 그대로 죄짓게 하면 무조건 불행하다는 뜻입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나로 인해 남이 죄를 짓는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으로 저에게는 읽힙니다.
그래서 길을 걸을 때 우리는 방자하게 걸어서 안 될 것입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수없이 내 발에 생명들이 밟히자나요?
말을 할 때 우리는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누구의 가슴에 비수를 꽂잖아요?
입을 옷을 고를 때 제 만족만을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누구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키잖아요?
누구에게 말을 걸 때 제 편한 사람에게만 걸지 말아야 합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누구에게 소외감을 줄 수 있잖아요?
밥을 먹을 때 과식하거나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남을 굶주리게 하잖아요?
심지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얘기할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하느님을 욕보이고 남을 기죽일 수 있잖아요?
다른 생명, 다른 존재에 대해 깨어있고
나의 행위, 나의 처신에 대해 깨어있음.
의식이 깨어있음은 말할 것도 없고
무의식까지 이렇게 깨어있기를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촉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남에 대해서는 늘 배려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늘 조심해서 처신을 하는 사람이기를 다짐하며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보는 고요한 아침입니다.
지동설 많은 사람들이 의외로 용서할 수 없어서 괴로워합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체로
임종자를 위해 기도하는 수녀원 - 김은배 수녀- 지난 설날에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하신 분이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아 기억을 더듬으면서 전화를 받아야 했기에 약간 당황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많이 감사를 드렸으며 다시 제 수도생활을 점검하게 되었습니다.
새벽을 열며 스페인에서 실제로 있었던 어떤 남녀의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이들은 가정불화로 너무나 힘들어 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고민을 들어줄 상대를 찾던 중, 우연히 인터넷 채팅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던 것이지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도록 하세요. 빠다킹신부 용서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 -서현승 신부- 신자분들과 면담을 하다보면 누구 누구가 미워 죽겠는데, 아무리 미워하지 않으려해도 안 되고 그럴수록 죄짓는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말씀을 무한경쟁의 사회일지라도··· -이인옥- 딸아! 어떻게 나무가 뽑혀 바다에 심겨질 수 있냐고 너는 물었지. 그러나 나는 그보다 더한 일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살아온 몇 십 년 안 되는 기간에도 믿기지 않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곤 했지. 바다 밑을 뚫어 육지와 육지를 잇고, 사막에 물을 대어 농장을 만드는가 하면 공중에서 사람이 살기도 하는 세상이 되었단다. 온 지구인을 놀라게 했던 달나라 탐사사건도 이젠 옛말이 되어버렸고, 얼마 전엔 우리나라에서도 우주인을 뽑지 않았니? 그런 일에 비하면 나무 한 그루를 바다에 심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듯하구나. 용서는 위대한 용기 오늘 말씀의 주제는 용서이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보통 두세 번 용서하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용서의 횟수를 더 늘려 잡으셨다. 용서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장재봉 신부- 도대체 언제까지? -임종심-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강영구 신부 - 이성보다 강한 믿음
삼순이는 이름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항상 놀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을 지은 부모도 밉고, 또 이렇게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미웠습니다.
그날도 삼순이는 친구들로부터 이름이 촌스럽다고 놀림을 받았지요. 삼순이는 울면서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기사는 말하지요.
“아니, 다 큰 처녀가 왜 길에서 울고 다녀?”
“글쎄 친구들이 자꾸 이름을 가지고 놀려서 그래요. 저는 그게 평생 스트레스거든요. 훌쩍 훌쩍.”
그러자 택시기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름이야 뭐 아무려면 어때? 삼순이만 아니면 되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도 상처 주는 것에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좋은 것을 주는 것에 더 큰 행복을 느낍니다. 문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수는 없다고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서 자기도 모르게 남을 죄짓게 하고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던 것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자기 자신을 낮추어 이웃들에게 다가설 때 상처보다는 기쁨과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겸손하게 살아야지.’라는 마음을 갖지만, 나도 모르게 어느새 다른 사람보다 윗자리에 올라서려는 이기심과 욕심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부족한 우리이기에 사도들처럼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주님께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청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더해 주시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들은 돌무화과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심겨질 정도로 불가능한 일들도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착각 속에 빠집니다. 주님 덕분에 많은 것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나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지요.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당신은 나의 어떤 점이 제일 좋아요? 내 지성미? 아니면 내 미모? 아니면 내 능력?”
그러자 남편이 무심하게 한마디 했습니다.
“당신의 그 유머 감각이 좋아.”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은 내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이기에, 또한 당신께서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겸손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들은 이 세상 안에서 더 많은 은총과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이재성 수사-
금전이나 명예 그리고 부당한 처사나 모욕 등에 관련된 문제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돈을 꾸어주고는 갚지 않아서 용서할 수 없고, 자신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행위를 용서할 수 없고, 내가 당연히 차지해야 하는 자리를 누군가
가로채서 용서할 수 없고, 나를 인정해주지 않기에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공통적으로 욕심과 관련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근본적으로 자신의 욕심만 없으면 문제가 사라지기
때문에 욕심을 없애야겠다고 사태를 파악하는 사람이 의외로 드뭅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즉시 자신의 내적인 문제임을 알 수 있을 텐데,
자신을 직시하기를 두려워합니다. 욕심이 너무 커서라기보다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바라보는 연습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타인에게만 돌리는 사람은 아직도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지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은 예전에 제가 가정방문하면서 돌보아 드렸던 유가족이었습니다. 집에서 투병 생활을 하다가 임종이 가까워지자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싶어하셨습니다. 저희는 할아버지를 동네 근처 병원에 모시고 상태를 의료진에게 말씀드린 후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왔습니다. 다음날 할아버지가 임종하셨다는 연락을 받고 영안실로 찾아갔습니다. 할머니와 유가족은 슬피 울면서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켜 드리지 못했다며 많이 힘들어 하셨습니다.
저는 “임종 지키시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 늘 병실이나 환자 옆에 계시지만 정말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아니면 잠깐 자리를 비우고 나갔다 온 사이에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일이 있기 때문에 내일로 미루는 경향이 많은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임종 시간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시간이기 때문에 맞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있는 그 시간이 바로 최선을 다해야 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만큼 다하시면 어떨까요?”라는 말씀으로 위로합니다.
저는 할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지켜드리지는 못하셨지만 우리의 기도가 할아버지를 지켜드렸어요. 저희 수도회는 설립자로부터 전해 오는 전통적인 기도가 있습니다. 매일 자기 전, 전 세계 모든 공동체에서 ‘지금 이 순간 임종의 고통 속에 계신 분들의 영혼을 위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저희 수도회가 국제 수도회이니만큼 각 나라의 잠자는 시간이 다르고,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24시간 내내 기도가 끊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저희도 자기 전에 돌아가면서 기도를 하고 있으니, 마지막 순간에 많은 기도의 힘이 함께하셨고, 할아버지의 영혼이 혼자서 하늘나라에 가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임종자를 돌본다는 것은 임종을 앞둔 모든 이의 아픔을 함께 나눈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날마다 돌아가면서 하는 잠 자기전의 묵주기도는 24시간 이어지는 고리기도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둘은 채팅을 통해 그 동안 숨겨왔던 고민과 속내를 상대방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만남이 계속되면서 두 사람은 어느새 한시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가상 세계의 연인이 되었지요. 그들은 채팅을 하는 동안 남자는 여자에게 My Honey(내 사랑)라고 불렀으며, 여자는 남자에게 Prince(왕자님)라고 부르면서 점점 더 사랑을 키워왔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둘은 가상의 세계가 아닌 현실에서 만나 서로의 사랑의 확인하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드디어 인터넷 상에서 그토록 다정했던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을 때, 그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하루가 멀다 하고 부부싸움을 하고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던 남편과 아내로 확인이 된 것입니다.
자신의 고민을 들어줄 이상향인 배우자와 살고 있으면서도 실제 함께 살면서도 그 장점을 보지 못하는 모습. 어쩌면 이 모습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우리들은 장점보다는 단점을, 긍정적인 부분보다는 부정적인 부분을 더욱 더 부각해서 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잘못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는 성인(聖人)의 사회가 아닙니다. 부정적인 모습은 하나도 없고, 긍정적인 모습만 가득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기에, 그들의 회개를 위해 꾸짖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그렇게 행동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하다고,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 만큼 작은 믿음만 있어도 뿌리가 강해서 600년까지도 견디어낸다는 돌 무화과나무도 뽑아서 바다에 심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요.
믿음은 주님과 나와의 좋은 관계만 형성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과 나와의 간격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나와의 간격을 더욱 더 좁혀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혹시 누구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지요? 혹시 남을 죄짓게 하는 것은 아닌지요? 남의 잘못에 대해서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 모든 잘못은 바로 나의 믿음 없음 때문이라는 것을 이 새벽에 깨닫게 됩니다.
듣곤 합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거의 비슷한 고민들을 털어놓는 걸 들을 때면 전 그분들에게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는 다소 생뚱맞은 조언을 합니다.
미운 감정과 미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엄연히 차이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몹시 밉기 때문에 실제로 미움을 말이나 행위로 드러내는 것은 그야말로 죄를 짓는
것이어서 그것을 두려워하고 피하고자 하는 마음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사람의
여러 감정들 중에 당연히 있을 수 있는 미운 감정 자체를 스스로 못견뎌 하고
제거하려 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교만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움이라는 감정 역시 사랑의 또 다른 형태의 에너지일 경우가 참 많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할 수도 있는 것이죠.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입니다.
용서는 미움이나 증오라는 마음속 불편한 감정을 스스로 억누르거나 없는 척
무시하지 않으면서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의지입니다. 나아가 하느님을 믿는
우리 신앙인들의 용서는 내 의지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하느님의
용서가 나를 통해 상대에게 전해진다는 믿음을 갖고 실천하는 덕목입니다. 나의 불편한 감정 때문에 또다시 상대가 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리를 끊을 수 있는 힘이 바로 용서인 것입니다. 용서가 불가능할 것 같은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용서할 수 있는 건, 용서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그런 일들도 애초에는 아주 작은 믿음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렇다. 할 수 있다는, 될 수 있다는 것은 겨자씨 한 알보다 작은 믿음에서 비롯된 일이다. 하면 된다는 믿음이 공중으로 길을 내고, 섬과 섬을 잇고, 불모지를 생활터전으로 바꾼 기적을 만든 것이다.
딸아! 너도 어느새 어른이 되어 무한경쟁 사회 속에 살고 있구나. 지금 우리 사회에는 학력·경력 위조는 물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남을 제치고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하지만 아무리 살벌한 세상일지라도 신앙인인 우리는 남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구나. ‘스스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남도 죄짓지 않게 배려하라’, ‘혹시 너희에게 죄를 짓는 사람이 있더라도 수없이 용서해 주어라.’
그런 일도 바다에 나무를 심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너는 말하겠지? 맞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일은 어쩌면 그보다 더 힘든 일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앞서도 말했잖니? 결코 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일들도 애초에는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시작되었다고. 그런데 그 작디작은 믿음조차도 우리 안에서는 저절로 우러나올 수 없는 것이기에 믿음을 더해 달라고 청해야 한다는 거다. 혹시 아니? 우리 각자가 청해 받은 겨자씨 한 알보다 작은 믿음이 모여 이 각박한 세상이 살맛 나게 변화될 수 있다면, 하루에 일곱 번인들 왜 아니 청하겠니? 믿지 않는 사람들도 불가사의한 일을 이뤄낼 수 있다면, 더구나 우리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분을 믿는 신앙인이 아니더냐?
-경훈모 신부-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용서는 ‘위대한 용기’라고 들 합니다. 그 만큼 용서하는 일이 어렵다는 뜻입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미움의 극복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미움을 극복하는 일은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잘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미움 극복을 위해서는 용서의 왕이신 주님께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12장 9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주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일이니 내가 갚아 주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 내십시오.”... 주님께서 대신 복수해 주시겠다는 말씀은 미움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우리들에게 참으로 평안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께서 복수해 주실 때까지 그분만 믿고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에 그리도 집요하던 미움이 조금씩 사라져 갑니다. 이제 그 얼굴이 떠올라도 소름끼치는 일이 차츰 없어집니다. 그러다가 상대를 미워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로 생각됩니다.
어느 사이엔지 주님께서 약속하신 복수도 잊혀져 갑니다. 그리고 어느 날 홀연히 깨닫습니다. 내가 소름이 끼칠 만큼 미워했던 그 사람이 주님께서 나를 당신 안에 불러들이기 위해 내게 보낸 심부름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도리어 그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복수란 상대방을 묵사발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을 바꾸어 유일한 용서자 이신 주님께 상대방(원수)을 맡길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 미움에 얽매여 자신을 힘들게 하지 않고 자유로워지는 것, 미움에서 해방되어 주님 주시는 평화 되찾는 것! 바로 이것이 주님의 복수 방식이었습니다.
「미운 사람 죽이는 방법」알려 드릴까요? 여기 미운 사람 죽이는 아주 틀림없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게다가 죽이고도 절대로 쇠고랑 차지 않는 안전한 방법입니다.
옛날에 시어머니가 너무 고약하게 굴어서 정말이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사사건건 트집이고 하도 야단을 쳐서 나중에는 시어머니 음성이나 얼굴을 생각만 해도 속이 답답하고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게다가 신자였으니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겠습니까?
급기야 시어머니가 죽지 않으면 자신이 먼저 죽을 것 같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이 며느리는 본당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하소연이라도 하면 좀 낫겠지 해서 갔는데, 뜻밖에도 비법이 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연륜이 높으신 신부님은 시키는 대로만 하라며, 시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며느리는 ‘인절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앞으로 백일동안 단 하루도 빠뜨리지 말고 인절미를 새로 만들어서 매일 3번씩 드리라 했습니다.
그러면 시어머니가 죽을 거라고 했습니다. 며느리는 신이 나서 돌아오자마자 정성껏 맛있게 인절미를 만들어 시어머니께 드렸습니다. 처음에는 왜 안하던 짓을 하냐고 또 구박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보기 싫던 며느리가 매일 따끈한 인절미를 해다 바치자 며느리에 대한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두 달이 지나자 시어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는 며느리의 정성에 감동되어 며느리 욕하던 입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며느리 자랑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석 달이 다되어 가면서 며느리는 사람들에게 자기 칭찬을 하고 다니는 시어머니를 죽이려고 한 자신이 무서워졌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가 백 일째 정말로 죽을까봐 덜컥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는 신부님께 달려가 정말 잘못 생각했으니 제발 시어머니가 죽지 않게 해달라고, 살릴 방도만 있으면 뭐든지 하겠다며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그제사 신부님은 빙긋 웃으며 말했습니다.
“미운 시어머니는 벌써 죽었지?” 하더라는 얘깁니다. 신부님을 통해 주님께서 아주 멋진 복수를 해 주신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진정한 복수임을 주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에게 늘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오늘 그토록 어려웠던 용서 문제의 해답을 얻은 것에 기뻐하며 함께 기도 해 봅시다. “주님! 유일한 용서자 이신 주님께 상대방을 맡길 믿음을 주십시오. 믿음의 힘은 산을 옮길 만큼 굉장합니다. 부정적인 말과 행동은 좋지 않은 현실을 맞게 하는 반면에, 긍정과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음대로 이루게 됨을 깨우쳐 주십시오.
믿음은 주님의 힘과 사랑을 전해주는 통로임을 깨닫고, 주님께 의지해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도록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저희를 감싸 주십시오. 받은 은혜는 바위에 새겨 오래 기억하지만, 상처는 모래위에 써서 성령의 바람과 함께 날려 보낼 지혜를 주십시오. 아멘.”............◆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잘못하고 있는 이웃 때문에 마음 아파하면서 그가 잘못한 것들을 일일이 공책에 적었다. 그리고 자기도 얼마간 잘못한 느낌이 들어 자기 잘못도 써내려갔다. 그런데 상대방이 잘못한 것은 두 쪽밖에 안 되는데 자기 잘못은 세 쪽이나 되었다. 그래서 자기 잘못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를 쉽게 용서할 수 있었다.
용서하기 어려운 것은 상대방 잘못에 더 큰 비중을 두기 때문이며, 또 자기가 받은 상처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닮으려면 먼저 용서하라’는 말이 있다. 용서는 ‘신적 사랑’이기 때문이다.
용서는 자신에게 베푸는 자비요, 상처받은 자신을 사랑하는 치유 행위이다.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미움과 증오심을 갖게 되면 그로 인해 더 큰 상처만 생긴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우리도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고 기도한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평생 갚을 수 없는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이웃을 용서해야 하는 빚을 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이미 받은 하느님의 용서도 언제까지나 유보된 채 남아 있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순간마다 용서를 청하는 우리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을 보시고 너그러이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에 대해서 조건 없이 용서하는 사랑을 나누도록 하자.
그런데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회개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울화통이 터지다 못해 놀리는 것 같고, 회개를 장난처럼 여기는 것 같아 화를 낼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을 제대로 가르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대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 넘어지든 그것은 그 주인의 소관입니다”(로마 14,4)라고 제 못된 생각을 알아채신 주님께서 말씀하시네요. 제가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일들은 모조리 남을 꾸짖고 판단하는 일뿐인 것을 들켜버렸습니다. 겨자씨보다 작은 이 믿음도 꿰뚫어 보시는 시력 좋으신 예수님! 그 좋으신 눈으로 제 생각과 말과 행위를 지켜봐주십시오. 그래서 하루에 여덟 번 죄를 짓고도 여덟 번 돌아와 용서를 청하는 그 친구 안에 자리한 겸손과 참회를 기뻐할 수 있는 참 신앙을 살게 해주십시오. “불행하여라” 하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해주십시오. 예수님!
교리실에 오면 순한 양 같은 사람들이 술에 취하면 이성을 잃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으며 행패를 부리는 모습을 볼 때 그들의 힘든 삶을 이해하면서도 도대체 언제까지 그들을 참아주고 용서해야 하는지 주님께 묻곤 했다. 일주일 내내 술에 취해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던 한 형제가 요로결석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 걱정보다 이 형제가 병원에 계속 입원해 있으면 주변 사람들을 덜 괴롭힐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일주일 뒤 퇴원한 그 형제가 사람들과 화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진정한 화해가 되고, 주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제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형제들이 변화되어 새로운 자녀로 태어날 수 있도록 주님, 은총을 허락하소서.”
그대에게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돌들이 있습니다.
어떤 돌은 땅 속에 묻혀있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땅 밖으로 나오는 날, 많은 가능성이 열리게 됩니다.
어떤 돌은 유능한 조각가의 손을 거쳐서 비너스나 소년 다비드가 되어 다시 태어납니다.
유능한 건축가에게 선택된 어떤 돌은 큰 집의 초석이 되거나 모퉁이 돌이 되기도 합니다.
지위 높은 사람에게 선택된 어떤 돌은 노둣돌이 되어 말을 탈 때 발돋움으로 쓰입니다.
맷돌이 된 어떤 돌은 갖가지 곡식들을 잘게 빻는데 사용됩니다.
어떤 돌은 징검돌이 되어서 사람들이 그 돌을 밟고 개울을 건넙니다.
불행하게도 어떤 돌은 모질고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손에 들려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치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하고(요한 8,1-11),
어떤 돌은 스테파노를 쳐 죽이는데(사도7,58) 사용되기도 합니다.
어떤 돌은 길바닥에 뒹굴면서 길가는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이 됩니다.
저나 당신의 운명도 돌과 같습니다.
저는 사제(司祭)라는 이름의 돌입니다.
이웃과 형제들의 이마를 쳐서 피를 흘리게 할 수 있고,
길가는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교회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초석이 될 수도 있고,
훌륭하게 조각되거나 다듬어져서 모세상이나 피에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오늘 누구의 이마를 치는 일이 없기를, 그 누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기를...(一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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