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11월 27일 대림 제1주일
대림 시기
대림 시기는 ‘예수 성탄 대축일’ 전의 4주간을 말한다. ‘대림’(待臨)이란 ‘오시기를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이 용어는 ‘도착’을 뜻하는 라틴 말 ‘아벤투스’(Adventus)를 번역한 것이다. 오실 분은 물론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그분은 이미 이천 년 전에 이 세상에 오셨던 분이시다. 교회는 전례를 통하여 그분의 탄생을 새롭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대림 첫 주일부터 ‘한 해의 전례주년’이 시작된다. 교회 달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니 올해의 대림 시기에도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열망하며 기다리던 그 마음으로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한편 대림 시기에는 종말에 오실 예수님을 묵상하며 기다린다. 이런 분위기는 대림 첫 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의 전례에 많이 나타난다. 성경 말씀도 ‘깨어 기다리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12월 17일부터 성탄 전야인 12월 24일까지는 예수님의 탄생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렇듯 대림 시기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 오심’을 기념하는 성탄절의 준비와 ‘두 번째 오심’인 종말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대림 시기에는 ‘대영광송’은 노래하지 않지만 ‘알렐루야’는 노래한다. 대림 시기 역시 회개와 보속의 시기지만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전례 때 사제는 속죄를 뜻하는 보라(자주)색 제의를 입는다. 그러나 대림 제3주일에는 기쁨을 나타내는 장미색 제의를 입기도 한다.
☆☆☆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마르코 13,33-37)
Be watchful! Be alert!!
You do not know when the time will come.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 자비의 기도를 바친다. 주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우리를 다스릴 분이심을 고백한다. 우리 인간은 주님 앞에 진흙덩이일 뿐이며 당신 손으로 빚어내신 작품일 뿐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가 튼튼하게 자리 잡아 가고 있음을 감사하며 교회 공동체 신자들을 격려한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하시려고 신자들을 부르셨다(제2독서).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깨어 살아야 한다. 깨어 사는 삶은 주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으로 기도하며 순간순간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교회 전례력으로 오늘부터 대림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은 구세주의 오심을 기쁨과 희망 속에서 기다리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렸듯이, 우리도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지요? 또 그 의미는 무엇인지요? 그저 성탄이라는 성대한 미사를 지내는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시는 것인지요?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성대하고 감동적인 성탄 축제인지요? 교회가 해마다 대림 시기를 마련해 놓고 끊임없이 기다림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기다림’은 다른 말로 ‘그리움’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가 그립기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그리움은 행복했던 추억의 시간도, 떠나보낸 아름다운 연인도, 미래에 다가올 멋진 인생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실제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예수님의 초상’을 그리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그리움의 뿌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에 닿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 강생의 사건은 하느님의 얼굴을 이 땅에서 보여 주신 사건입니다. 그 얼굴은 먼 곳에 있지 않고 바로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 안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그리움은 ‘하느님을 닮은 나’, ‘때 묻지 않은 본래의 순결하고 맑은 나’, ‘온전하고 충만한 나’를 향한 그리움입니다. 해마다 대림 시기를 보내는 까닭은 우리의 진정한 기다림의 목적지를 깨닫고 그 본래의 순수한 나, 완전한 나를 찾아 길을 떠나는 데 있습니다
☆☆☆
위령 성월이 끝나면 대림 시기가 시작됩니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이 대림 시기인 셈입니다. 저승과 이승이 하느님 안에선 아무것도 아님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니 걱정을 내려놓고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분을 기다리면서 세상 걱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한다면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일 년 내내 기다렸습니다. 자기들이 살아 있는 동안 오실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기다림과 함께 죽어 갔습니다. 재림의 준비는 그대로 죽음의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끝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예수님을 ‘먼저 가서 만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저승으로 건너가는 다리로 봤던 것이지요.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그렇게 대림 시기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이것이 대림 시기의 교훈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준비로 “깨어 있어라.”고 하십니다.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부지런한 문지기’처럼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과 연결된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매일의 기도와 매일의 선행을 점검하는 일입니다. 기도와 선행을 실천해야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바뀝니다. 시련과 고통을 만나도 쉽게 하느님을 향하게 됩니다. 금년 대림 시기에도 ‘기쁨의 신앙생활’을 체험하며 지내야겠습니다.
깨어 있어라
-서광석 신부-
오늘 복음은 먼 길을 떠나는 주인이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내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이는 너희 모두에게 하는 말이니 깨어 있어라" 하시는 말씀이다.
복음이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며, 우리는 '그 사랑'을 모실 준비를 해야 하는 대림시기에 있다.
「대지」(大地) 작가 펄벅 여사는 세계적 문학가이며 동시에 위대한 어머니이다. 여사는 「어머니 한탄하지 마셔요」라는 책에서 장애가 있는 딸에 대해 쓴다. 장애가 있는 어린 딸은 어느 사이에 지능 발달을 멈추고 더는 성장할 수 없게 된다.
여사는 곧 딸의 행복에 관해 고민을 한다. 그리고 한 글자라도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문장을 외우고 쓰며 숫자를 셈하는 것을 딸에게 강제로 반복시킨다. 그러던 어느 날 연필을 쥔 딸의 손이 땀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깨닫는다. 아이가 고통스럽지만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유롭게 놀고 있을 때 딸의 동작이 훨씬 생동적이고 즐거워 보이는 것을. 그 후 여사는 딸이 갈 수 있는 학교를 거의 다 방문하며 딸에게 가장 맞는 학교를 찾는다.
나는 대림절이면 펄벅 여사와 딸의 관계를 묵상한다. 모녀는 일상의 사소한 모든 것에서 서로에게 향한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이 모녀 사이에서 잘 드러난다. 더 나아가 이 둘은 인격적 일치의 상태이다.
'깨어 있어라'는 것은 인간 자신의 진정한 인격 회복이다. 자신이 '하느님의 모상', '사랑의 모상'으로 창조됐음을 인식하는 것이며 하느님이 인간을 향해 계시듯 인간 또한 그분을 향하는 것이다. 즉 '깨어 있으라'는 인간이 자신의 창조주를 향한 전인적 전환함을 뜻한다.
하느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향하고 계신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에 방향을 고정해 둔 듯 돌아 앉아 있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성을 망각하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삶을 계획해 그 목표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그럼 일상의 삶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향하는 것일까?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하고 예수님은 복음에서 인간이 하느님을 향하는 올바른 길을 제시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을 향하는 사랑과 나의 이웃을 향하는 사랑이 일치함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인간을 향한 이 사랑은 인본주의와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휴머니즘은 모든 인류의 공존과 복지가 바로 이 지상에서 실현될 것을 지향하는 현세 지상주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신앙의 삶은 이 세상에 한시적으로 머무는 것일 뿐, 그 궁극적 목적은 영원하신 하느님께로 귀환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비롯해 이웃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러한 사랑의 확장을 원하신다. 하느님과 나와의 사랑 관계는 그분과 나 이외의 인격적 관계를 필수적으로 수용한다. 이것은 내가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남으로써 부모의 다른 자녀들과 형제자매가 되는 숙명과도 같다.
그러므로 내가 형제에게 한 행위는 나와 형제들만의 관계를 넘어 하느님과의 관계로 확장되는 것이다. 보잘 것 없는 형제의 인격을 모독함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그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께 사랑을 드리는 것이 된다.
주기적으로 맞는 전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형적인 행사로 여겨져 형식적 신앙생활로 빠지게 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전례 본연의 목적은 우리가 하느님 말씀대로 복음적 삶을 충실하게 사는지 반성하고 점검하는 데 있다.
신앙생활은 지식으로 하는 사상이 아니라 우리 온 삶을 사랑으로 사는 행위이다. "인간은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하는 것이다"하는 말처럼 현실의 삶을 사는 행위이다.
'깨어있어라'는 우리가 이웃 형제들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 자신 전부를 항상 열어둔 상태이다. 대림절을 맞아 이웃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도록 그들을 향한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의식 없는 중환자처럼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영적 혼수상태에서 숨만 쉬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어느 병원 중환자실 침대 위에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자식을 지켜보며 깨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어머니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깨어나기' 만을 바라며 애태우고 계시지 않겠는가?
주님, 가난한 마음에 어서 오소서
-최인각신부-
촛불 들고 기다립니다.
전례력으로 새해를 알리는 대림 첫 주일니다.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설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빠르게 흐르는 시간 앞에서, 그리고 이어지는 사건과 사고들로 말미암아 왠지 무덤덤해지는 쓸쓸함도 있습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될 것만 같은 마음, 누군가 다가와 한 자루 초의 불빛으로 어두웠던 마음을 비춰주고 손잡아 일으켜주며 따스한 말 한마디를 들려주었으면 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아팠던 몸과 마음도, 원인 모를 엉김도 그로 말미암아 치유받고 정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4000년 동안 ‘그 누군가’이신 메시아, 구원자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분이 오시어 어둡고 혼란스러우며, 아프고 찌든 삶에서 자신들을 구해 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귀를 기울이소서. 광채와 함께 나타나소서. 당신 권능을 떨치시어 저희를 도우러 오소서.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고 이 포도나무를 찾아오소서. 당신 오른손이 심으신 나뭇가지를, 당신 위해 키우신 아들을 찾아오소서”라고 도움과 구원의 기도를 외쳤습니다. 하느님은 이 외침을 들으시고 그때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응답해주셨고, 이끌어 주시며, 살아갈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모든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이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지 200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그분을 기다리며 찾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오늘 제1독서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 어찌하여 저희를 당신 길에서 벗어나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희 마음이 굳어져 당신을 경외할 줄 모르게 만드십니까? 당신 종들을 생각하시어, 당신의 재산인 이 지파들을 생각하시어 돌아오소서.” 이 기도내용을 살펴보면, 자신들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은 자신들의 잘못이나 죄가 아니라, 하느님의 탓이며 잘못이라고 하느님을 몰아붙입니다. 이들은 분명히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면서도, 자신들의 잘못이나 죄는 바라보지 않고 하느님을 탓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하느님의 도움이나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경배드리는 자가 없고, 하느님 손에 맡기지 않으며, 하느님을 외면하고 죄에 휩쓸려 다니는데, 하느님께서 마음 편히 도움의 손길을 펼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고 있자니, 주님을 못 만났다고, 체험하지 못했다고, 도움을 못 받았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바라보고 주님께로 돌아와 당신을 만나라는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나는 너희를 용서하고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너희의 생각과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나를 만나 은총과 사랑을 받으며 풍요롭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나는 너희가 아무런 부족함 없이 튼튼하고 행복하고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돌아와 내 안에 머물러라. 너희가 돌아오는 시간이 저녁이거나, 한밤중이거나, 닭이 울 때이거나 새벽일지라도 나는 관계없다. 나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너희를 위해 깨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내게 돌아오너라.” 우리를 기다리는 그 얼마나 간절한 말씀입니까? 불쌍하고 불쌍한 우리가 주님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주님이 우리를 더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며, 우리 가운데 머무르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옷깃을 여밉니다.
이런 마음으로 대림환에 꾸며진 초에 정성껏 불을 붙여봅니다. 참으로 숙연한 시간입니다. 그동안의 부족함과 나약함, 죄스러움을 뉘우치며 새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며 내면 깊은 곳에 마련한 초에 불을 붙입니다. 주님을 다시금 찾고자 하는 마음, 주님께 대한 사랑에 불을 지피고자 하는 마음, 묻어두었던 선한 마음, 크고 작은 상처로 말미암은 응어리를 풀고자 하는 마음, 상처 준 이를 찾아가 용서의 손길을 내밀고자 하는 마음, 재물과 관련해 어려움을 주었던 사건과 사람을 정리하고 엮인 매듭을 풀고자 하는 마음, 가까운 가족·친척·친구들과 다시금 화해하며 웃고 지내고 싶은 마음에 용서와 화해와 사랑의 불을 붙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모든 것을 버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려는 주님을 기꺼이 맞이하며, 그분의 소원을 채워 드리기 위해 노력하는 대림 시기를 지내시길 바랍니다. 그 방법의 하나는 정성껏 고해성사를 보고, 희생과 봉사를 통해 하느님과 이웃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그러한 은총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허영엽신부-
벌써 25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 보좌신부 시절, 당시 주임 신부님과 대화한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 무엇인가를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늘 자신과 주변에 깨어 있어야겠지.” “그런데 우문(愚問) 같지만 젊어서 너무 일찍 자신과 세상을 깨달으면 세상사는 게 너무 재미없지 않을까요?” 그때 주임 신부님은 입가에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일찍 깨달을 수만 있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거야.” 지금 생각하면 선문답 같은 대화였습니다. 이해를 다하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더는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신부님의 말씀이 인생의 묵상 주제처럼 떠오르곤 합니다. 우리 인생은 무엇을 바르게 깨달아야 진정한 삶이될 수 있을까요?
러시아의 유명한 문호(文豪) 톨스토이는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삶의 본질은 육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그는 부유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한 시골의 초라한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객사하기까지 우여곡절의 치열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인생의 의미란 오직 ‘선에 대한 끝없는 희구’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선은 오직 진리(眞理)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가치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물론 인간의 모든 사회적 죄악에 대한 속죄를 기본 전제로 말입니다. 그래서 임종을 맞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진리를… 나는 영원히 사랑한다.”라고 합니다.
다시 대림절을 맞이한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 우리말에 ‘조심하다’는 잘못이나 실수가 없도록 말이나 행동에 마음을 쓰는 것과 마음에 새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깨어 있다’도 온전한 정신 상태로 돌아오고 생각이나 지혜 따위가 사리를 가릴 수 있게 되며 잠, 꿈 따위에서 벗어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특히 대림절에 강조하는 ‘깨어 있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작정 미래를 기다리고, 지나간 과거에 연연한 것도 결코 아닐 것입니다. 깨어 있음은 오히려 현재의 순간에 최선을 다해 머무는 것이 아닐까요? “조심하고 깨어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거룩하고 위대한 기다림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지금 상태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아닐까요? 지금 내가 보는 것, 느끼는 것, 깨닫는 것, 가진 것, 그것이 결코 전부가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이야말로 바르게 깨어 있음의 시작이 됩니다. 세상의 것에 너무 기대하지 않고 영원한 삶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혹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깨어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으십시오. 설사 그것이 나 자신이 되더라도 말입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양승국신부-
<순도 높은 기다림>
또 다시 기다림의 때, 대림시기가 다가왔습니다. 대림절을 맞이하면서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가장 절박하게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기다렸던 때는 언제였던가?
아무래도 군대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얼마나 힘겨웠던지, 얼마나 길었던지, 또 얼마나 지루했던지 눈만 뜨면 ‘이제 얼마 남았지?’ 하고 꼬박꼬박 날짜를 지워나가며 제대 날짜를 기다렸습니다.
잠깐 동안 유학생활을 할 때의 기억도 끔찍합니다. 외국어, 그까이꺼, 일단 나가면 적당히 되겠지, 했었는데, 생각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어학연수 시절, 하늘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만 봐도, 저게 KAL기인가, 저거 타고 그만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 두 번이었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팍팍하던지, 빨리 논문 끝내고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꽤 오래전, 갑작스런 발병으로 한밤중에 응급실 신세를 진 적이 있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조여 오는 죽음의 공포에 떨며 혼미한 가운데서도 뭔가 신속한 조치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 제 간절한 기대와는 달리 전혀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듯한 새파란 ‘왕초보’ 의사들만 번갈아가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제대로 된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아침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점점 증폭되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발 빨리 아침이 와라. 제대로 진료할 수 있는 의사 선생님, 제발 빨리 출근 좀 하세요!”
또 다시 도래한 이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가 지닌 ‘기다림’의 질은 어떻습니까? 강도나 수준은 어떻습니까?
이 대림시기, 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보다 열렬히, 보다 순도 높게 주님을 기다릴 일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저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는 일이 절대 아니겠지요. 기다린다는 것,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는 것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운다는 것이리라 믿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나 자신 안에 있는 깊은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 중지되었던 주님과의 영적 여정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겠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자기중심적 삶을 탈피한다는 것, 내 지난 삶에 대한 대대적인 성찰과 쇄신작업을 시작한다는 것을 뜻하겠지요.
이 대림시기, 우리도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지만 주님께서는 더 간절히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아줌마의 주님 기다리기
-김찬선신부-
전례력으로 어느덧 한 해가 가고 새 해가 왔습니다.
한 해가 가고 새 해가 오는 이 시점에서 제 마음이 착잡합니다.
그리고 대림절을 맞이하는 저의 마음은 더욱 착잡합니다.
새 해가 올 것을 기다려 기꺼이 새 해를 맞이해야 하는데
한 해가 가니 어쩔 수 없이 밀려서 새 해를 맞이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노처녀가 신랑도 없는데 나이만 자꾸 먹는 것과 같은 심정이랄까요.
이렇게 얘기하면 반발할 노처녀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구 많은 비유 중에
왜 노처녀 비유를 드느냐 따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좀 더 논리적이고 당당하게
비유의 부 적절성을 따지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우선 왜 내가 노처녀냐고 따질 것입니다.
나는 노처녀가 아니라 한 여자이고
여자이기에 앞서 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굳이 여자임을 강조한다고 해도 나는 처녀가 아니고
노처녀는 더더욱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처녀는 결혼을 전제로 결혼하지 여자를 일컫고
결혼 상대자인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지요.
그중에서 노처녀는 기다리는 남자를 못 만나
아직도 기다리는 처량한 여자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처량하기는 하지만 노처녀입니다.
노처녀라고 하는 것이 너무 거북하면
오늘 복음에 비유처럼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아무튼 저는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제가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라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고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신랑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새해를 맞이하지 않고
주님이 오실 것을 대비하는 종의 마음으로
대림절을 맞이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제가, 비유하자면,
노처녀가 아니고 아줌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줌마는 이미 결혼을 한 사람입니다.
이미 신랑을 만나 같이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만나야 할 신랑을 기다릴 필요는 없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이미 만났으니 정말 기다릴 필요가 없을까요?
그러면 신랑은
만나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처녀에게로 가지 않을까요?
들은 얘기지만
결혼한 남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서방이 돌아올 때 아내가 기다리지 않는 것이랍니다.
잠자다가 운동복 차림의 부스스한 모습으로 맞이하는 것이지요.
진하게 화장하고 화려한 의상을 차려 입고 맞이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오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다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성숙한 사랑은 참으로 기묘한 줄타기이고 조화입니다.
새 옷을 입듯이 맞선을 보듯이 편치 않아서도 아니 되고
종이나 아랫사람 대하듯이 아무래도 되고 막 대해서도 아니 됩니다.
이미 만났고
이미 서로에게 익숙하고 편안하면서도
늘 기다리고
늘 새롭게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남편이면서 아직도 연인이고
친구이면서도 주인이게 하는 것,
이것이 성숙한 사랑의 관계이고
이것이 ‘이미 벌써,
그러나 아직 아니(already but not yet)'의 기다림입니다.
우리와 주님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2천 년 전에 이미 오셨고
그래서 우리는 이미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만남을 위해
아직 아니 만난 사람처럼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주님을 새롭게 만납니다.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그 이름
-배광하 신부-
기다림, 그 영원한 설레임
주님 오시기를 깨어 기다려야 하는 설레임의 대림시기가 시작 되었습니다. 진정 환희와 찬미의 마음으로 전례력의 새해를 맞으며 아름다운 시 한편으로 글을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아침, 그대를 맞으며… 조희선
살아간다는 것은 기쁨이야 / 하루를 산다는 건 / 그물을 싣고 바다를 향해 떠나는 싱싱한 희망이야 / 어젯밤의 졸린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건 싫어 / 지난날의 어둔 습성으로 아침 창을 여는 건 싫어 / 살아간다는 건 설렘이야 / 하루를 산다는 건 / 인연을 따라 운명을 건져 올리는 황홀한 만남이야’
집없는 사람들을 돕기위한 <엠마우스>운동의 창시자이신 프랑스의 ‘아베 피에르(1912~ )’신부님은 ‘죽음’에 대한 당신 일생의 명상을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죽음과 관련해서 이별을 말한다. 남겨진 이들에게 죽음이 이별로 경험된다면 죽는 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 죽음이란 모든 상상을 뛰어 넘는 환상적인 만남이 주는 눈부신 순간이다. 하느님과, 천사들과, 이 땅에 살았던 무수한 사람들과의 만남! 그렇다. 죽음은 우리네 삶에서 황홀한 순간일 수 있다. 점점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게 여겨지기 시작한다- 인생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것이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절대로 망쳐서는 안 되는 그 두 가지 일은 사랑하는 것과 죽는 것이다.”
대림시기가 시작되는 오늘, 교회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대한 복음을 읽습니다. 자못 심각하며 두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종말은 다시 오시겠노라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재림인 것이며, 교회는 2000년 동안 그 약속을 기다리며 구세주께서 빨리 오시도록 노래 하였습니다.
때문에 종말이 오게되면, 예수님의 재림이 오게되면 맨발로 뛰어나가 환희로 맞이해야 하는 신앙을 지니고 있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러나 구세주의 재림을 그토록 환희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아베 피에르신부님의 말씀에 귀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황홀한 주님과의 만남을 위하여 인생에 있어서 절대로 망쳐서는 안되는 두 가지 일, 즉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하는것과 아낌없는 사랑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예수님 말씀처럼 사는 것입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마르 13,33-35)
거지 구유
전 세계의 모든 성당에서는 이즈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뉘일 구유를 만들기 위해 부산한 움직임들이 벌어지리라 생각됩니다.
저 자신은 본당 주임신부가 되면 꼭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가 성탄 구유를 좀더 아기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은 것으로 만들어 보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주임신부가 되자 곧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교우들에게 만약 우리 마을에 아기 예수님께서 오시면, 어느 집에 오실까를 생각해 보게 하였습니다.
2천 년전 집도 없이 짐승 마굿간에 초라하게 탄생하셨던 예수님, 마지막 죽음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헐벗고,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의 벗이셨던 예수님, 그분이 이제 우리 마을에 오신다면 어느 가정에 오실지 생각하여, 우리 주변 이웃 중 가장 헐벗고 고통스러운 이웃, 큰 슬픔 중에 있는 이웃을 찾아가 작은 성탄 선물을 드리고, 혹은 위로와 말벗이 되어 주고, 그 가정을 나올 때 버려진 물건을 가져와 구유를 꾸미자고 제안 하였습니다.
매번 수많은 자금과 몇 사람의 수고로 만들어지는 구유가 아닌, 전 교우들의 사랑과 정성이 깃든 구유를 꾸미는 일이었습니다. 교우들은 잘 실천해 주었고, 저 또한 그 일에 동참하였습니다. 대림 1주일부터 온갖 쓰레기(?)들이 성당에 쌓였고 그것으로 지저분한 거지 구유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성탄 자정 미사때 아기 예수님을 그 거지 구유에 안치하던 저는 아기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리라 굳게 믿었습니다. 비록 초라하여도 전 교우들의 사랑의 실천이 깃든 구유, 모두가 동참하여 함께 만든 사랑의 구유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 성바오로의 말씀대로 그것이 대림 준비입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어떠한 말에서나 어떠한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에 튼튼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1코린 1,4-7)
거룩한 성탄을 사랑으로 준비하는 대림시기이길 저 또한 기도 드립니다.............◆
주님 안에 깨어있음이 진정한 깨어 있음이다.
-유영봉 몬시뇰-
묵상길잡이 : 기다림은 희망을 전제한다. 희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기다림을 할 수 없다. 그리고 희망이 있을 때 기다림은 고통이기보다 즐거움일 수 있다. 그리스도 신자는 참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진 사람이다. 미래 희망에 대한 확신이 강할수록 기쁨에 찬 기다림이 될 것이다.
1. 기다림과 희망의 관계
대림시기의 주제는 “깨어 기다려라.”는 것이다. 기다림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사형이 확정된 사람이 형 집행을 기다리는 그런 기다림도 있고, 결혼 날을 잡아놓고 혼인을 기다리는 기다림도 있고, 입학시험을 기다리는 입시생의 기다림도 있고, 사업적인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상대를 기다리는 기다림도 있을 것이다. 신앙인은 주님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사실 우리는 매일 매일 죽음에로 다가서고 있기에 주님의 심판대 앞에 나설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알고 또 믿기에 그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 주님의 재림은 심판의 날이 아니라, 참 생명이 시작되는 희망의 날인 것이다. 희망이 없는 기다림은 두렵고 힘겨운 그리고 지루한 기다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희망에 찬, 기대에 부푼 기다림은 그 기다림 자체가 기쁨일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상의 여정을 마치고 주님 앞에서는 날, 그 날은 두려운 심판의 날이기도 하지만, 또한 하느님께서 당신을 믿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하신 영원한 참 생명을 선물로 받는 날이기도 한 것이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없는 신앙은 죽은 믿음이다.
2. 현대의 무(無)신앙적인 흐름
우리 시대의 일반적인 흐름은 돈벌이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많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모두 찬밥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대학에서도 철학, 신학, 역사학, 고고학, 문학 등등의 순수학문 분야의 학과는 강의실이 텅텅 비고,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다. 이러한 형편이다 보니, 현대의 자연과학적인 교육을 받아 온 이들은 하느님, 부활, 후세, 천국, 지옥, 천사, 악령 등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믿음도 없는 것이 보통이다. “비싼 밥 먹고 그런 허무 맹랑한 것에 마음 쓰며 살 시간이 어디 있나?” 하는 태도이다.
성당에 열심히 나온다고 모두 부활을 믿고 저 세상을 믿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자녀 교육상 좋기 때문에 성당에 나오는 사람도 있고, “출장이 잦으니까 마누라가 바람이라도 날까봐서 성당에 나온다.”고 고백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어떤 수녀는 “하느님이 계시는지, 부활이 있는지 어떤지 확신은 없지만, 이왕이면 멋있게 살려고 수녀가 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통계상으로 보면, 하느님의 살아 계심을 참으로 믿는 목사님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어린 여학생들은 ‘원조교제’를 하면서 용돈을 넉넉히 주는 아버지 같은 사람들에게 몸을 내 맡기기를 예사롭게 생각하고, 수입이 좋은 아르바이트쯤으로 생각한다. 세상의 흐름이 의미를 찾는 삶은 퇴색되고, 그냥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성적인 가치만 팽배해 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정신적 현주소가 되고 있는 것이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3. 진정한 깨어있음은 무엇인가?
오늘 복음은 “집주인이 돌아 올 시간이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혹은 이른 아침일지 알 수 없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마르꼬13,24) 고 경고하신다.
'늘 깨어 있는 삶'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흔히 “바쁘게 사는 것이 알차게 사는 삶”이라는 착각을 한다. 그러나 바쁘게 허둥대는 삶 치고 알찬 삶은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또 세속적으로 용이 주도하게, 빈틈없이 산다고 그것이 깨어있는 삶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참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진정으로 미래를 대비하는 사람이며 참으로 깨어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늘에 보화를 쌓는',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데는 무관심한 채, 세속적으로 악착같이 열심히 사는 것이 참으로 깨어있는 삶은 아니다.
하느님 앞에 자신을 매일 되돌아보고, 매사를 하느님 보시기에 어떤지를 성찰하며, 영원한 삶을 향하는 여정답게 그분과 함께 하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깨어있는 삶이란 것을 잊지 말자. 기도하지 않을 때 깨어있을 수 없다................◆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완전한 개방
-조욱현신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뒤에는 우리가 기다려야 할 다른 어떤 새로운 것은 없다”라고 성 이레네오는 말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의 모든 기다림의 시간은 ‘대림’이다. 여기서 대림을 잘 준비한다는 것은 그분의 진실에, 그분의 요청에, 그분의 부르심에 그리고 매순간 그분의 메시지에 대한 완전한 개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대림은 우리 신앙구조의 본질적인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다. 오늘 전례에서 크리스챤적 대림의 의미가 잘 표현되고 있다.
제1독서: 이사 63,16b-17; 64,1.3b-8: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소서
이사야는 고통스럽지만 믿음의 자세로 하느님의 능력과 구원의 새로운 어떤 움직임의 기다림을 묘사하고 있다. 그 기다림은 아주 강렬하고 하느님의 개입이 야기할 놀라움과 경이를 말해주고 있다. 즉 하느님이 개입하시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구원될 수 없으며, 더구나 그 스스로는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63,16-17; 64,1 참조). 여기서 이스라엘은 회개하여 마음의 치유를 받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의 불충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는 이유는 그분 없이는 인간의 마음이 조금도 새롭게 변모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변화 없이 예루살렘의 재건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흙’(8절)의 의미는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새롭게 하는 재형성의 작업을 상징하고 있다. 즉 하느님의 임재는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오심은 구원을 위한 것이다. 구원적 도래라고 할 수 있다. 성탄을 잘 준비하는 의미가 이것이다. 우리가 성탄에 다시 태어나지 못하면,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는 표지가 되고 말 것이다.
복음: 마르 13,33-37: 조심해서 항상 깨어있어라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기 전,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13,32)라고 하시고, ‘깨어있음’에로 초대하신다. 즉 깨어있음으로써만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항상 준비하고 있을 수 있다. 오늘 복음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 ‘깨어있어야 할’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깨어있음’의 개념은 세 번(33.35.37절)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고, ‘문지기에게 깨어있으라고 분부한’(34절)데서 한번 더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마태 25,14-30의 ‘달란트의 비유’와 루가 19,12-27의 ‘금화의 비유’에서 더 발전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더 예리하게 기다림의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집주인의 돌아옴은 불확정적이어서 갑작스레 들이닥치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네 번에 걸쳐 깨어 기다림을 상기시킨다. 그 때가 저녁, 한밤중, 닭이 울 때, 이른 아침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오심의 이러한 불확실성에 근거한 ‘깨어 기다림’은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정신을 차려 깨어있어야 할 책임성 있는 태도를 가르쳐 터득케 하려는 것이다. 책임 있게 깨어 기다리는 것은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미래를 꿈꾸는 묵시적 열광이라든지 현실에 대한 무감각이나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진정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우리 자신을 개방하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삶을 의미한다. 그래서 언제라도 들이닥칠 수 있는 주인에게 문을 열어줄 수 있는 깨어있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이어야 함을 말해 준다.
제2독서: 1고린 1,3-9: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주님의 도래에 대한 주제를 다시 취하여 삶의 모든 순간에 확대하여 적용하고 있다. 주님께서 실제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오심을 항상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순간순간이 그분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드리는 만남의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의 선물들이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주님의 심판날을 맞이한다는 것은(8절) 우리가 그분의 은총의 빛 안에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된 왕국에서 결합시켜줄 그 친교는(9절)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즉 매일 매일 계속적으로 작은 ‘도래’, ‘임재’가 선행되지 않으면 그 ‘위대한 마지막 도래’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주님을 맞이하는 것은 어느 때고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결정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정적인 만남을 잘 하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순간순간의 삶을 통하여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그 순간마다 주님을 만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 만남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항상 깨어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순간순간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 때, 우리는 결정적인 만남, 우리의 죽음 혹은 주님의 재림도 기쁘게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계속적으로 살 수 있도록 깨어있도록 하여야 한다.
아,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 오십시오
-강길웅신부-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의 옷깃을 여미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아주 진정으로 기다리십니다. 따라서 지난 1년의 삶을 반성하면서 돌아가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주님을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지난 잘못을 반성하면서 하느님의 새로운 사랑과 축복을 기원하는 일종의 탄원 기도문입니다. 기도문 자체가 매우 고상하면서 감동적이고 그리고 내용이 아주 풍부합니다.
"아,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십시오."
이스라엘의 애절한 그리움과 진실한 뉘우침이 그 기도문에 새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일어설 수 없다는 절실한 믿음은 하나의 아름다운 꽃입니다. 실로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을 갖는 자만이 진정한 행복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늘 깨어 있어라.'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즉 그 때가 언제 올 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때가 무엇이냐?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주님이 찾아 오시는 때를 말합니다.
세상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사람들이 왜 사는지를 모르며 자기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그래도 거기엔 관심이 없이 그저 많이 벌어 잘살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10년, 20년 잘살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그래서 잘먹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허무밖에 없습니다. 눈물밖에 없습니다.
성찰을 통해서 자기 삶을 반성해 본다는 것은 물질적으로 잘 사는 것보다 훨씬 위대한 것입니다. 인생의 방향이 어딘 줄을 알고 올바르게 걸어가는 것은 백만장자가 되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때'가 언제인 줄을 알고 미리 준비하는 것은 가장 지혜로운 일입니다.
미국으로 이민가는 어떤 형제가 부모님 산소를 지키지 못하고 그냥 떠나기가 죄스러워서 묘지기를 돈으로 사서 부탁해 놓고는 안심하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고생을 하면서 5년 만에 제법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부모님 산소 생각이 났으며 고마운 묘지기 아들도 미국으로 불러 교육을 시켜 주리라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불쑥 서울에 갔습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그는 묘지기에게는 미리 연락을 못했습니다. 그냥 김포에서 내리자마자 산소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산소에 도착해 보니 부모님의 묘는 잡초로 아주 엉망이었습니다. 그렇게 부탁을 했고 그렇게 돈으로 베풀었건만 허사였습니다. 그는 대성통곡을 한 뒤에 묘지기에게 그랬습니다. “일 년에 서너 차례만 산소를 돌봤다면 당신에게 백 배 감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뭐냐?" 묘지기는 그 날로 집과 땅을 빼앗기고 쫓겨났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약삭빠르게 살려고 하다가 결국은 미련하게 사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하고 우 리가 조금만 깨우치기만 한다면 아무 탈이 없이 오히려 큰 상을 받을 것인데 바보같이 살기 때문에 좋은 세상을 아주 망치는 불행을 만들게 됩니다.
진정으로 잘사는 것은 사업을 잘하고 병 없이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진실하게 자신을 성찰해서 잘못되었으면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게 행복입니다. 아무리 재산을 많이 모으고 아무리 권력이 하늘까지 올랐다 해도 자기 성찰을 모르고 자기 잘못을 고치지 못한다면 그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진흙이요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코가 비뚤어졌다고 고백한다면 하느님께서 고쳐 주십니다. 우리 귀가 떨어졌다고 고백한다면 하느님께서 다시 붙여 주십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고작 잘못이지만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항상 새롭게 고쳐 주시는 사랑이십니다.
대림절은 은혜로운 시기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이며 또한 그분을 만나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선 우리보다 더 간절하게 기다리시며 우리보다 더 큰 애정으로 우리를 만나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고 주님 만날 채비를 하면서 그분을 기다립시다. "아,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십시오."
기다림 - 절망 속 희망 찾기
-박성칠신부-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오늘 제 1 독서에 나오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구원의 하느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살육의 현장 속에서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의 몸부림이 처절합니다. 구원의 하느님을 기다리는 마음은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것입니다. 믿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박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아! 하느님, 제발 하늘을 쪼개고 내려오십시오!”(공동번역)
교회는 하느님을 우리 인간을 찾아오시는 구원의 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믿음의 공동체는 이렇게 기원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사도신경에서 교회는 오시는 그리스도를 고백합니다.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신약성경은 오시는 분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으로 그 끝을 맺고 있습니다. “오소서. 주 예수여!”(묵시 22,20). 이 부르짖음은 C. 까레또의 표현을 빌면 그리스도께서 지상을 떠나신 이후에 하늘나라를 향해 바쳐진 뜨거운 모든 기도의 집약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주님께서 오신다는 희망을 떠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희망은 종종 절망 속에서 주님께서 빨리 오셔야 한다는 절절한 부르짖음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아! 하느님, 제발 하늘을 쪼개고 내려오십시오!”
이 부르짖음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곧 가겠습니다!”(묵시 22,20)
주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에도 같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습니다. 나는 떠났다가 기어이 여러분에게 다시 오겠습니다”(요한 14,18).
제자들이 한밤중에 호수 한가운데서 있는 힘을 다하여 집채만한 물결과 싸우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마르 6,50).
오늘부터 우리는 대림절을 지냅니다. 대림절은 우리에게 항상 새롭게 오시는 주님을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대림절은 그래서 기쁨의 시기요 설렘의 시기입니다. 우리는 이 시기를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은총의 시간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기다림은 그러나 언제나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것, 역사의 아픔 속에서 구원의 하느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처절한 몸부림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더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깨어 기다립니다. 오시는 주님으로 우리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아! 하느님, 하늘을 쪼개고 내려오십시오(破天降下 파천강하)!”
가장 인간적인 하느님 만나는 날 "
- 이기양 신부-
부활이 그리스도교의 핵심 축제임을 알면서도 신자들은 크리스마스를 더 기다리고 축제의 장으로 열광합니다. 왜 그럴까요?
"부활이 그리스도교 전례주년의 중심이라고 한다면 크리스마스는 믿음에 대한 최대 인간 축제일 것이다. 그것은 이날 우리가 하느님의 인간성을 가장 깊이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베네딕토 교황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마구간 구유의 아기 예수와 초라한 목동들의 벅찬 감동이 완벽한 찬미를 이룬 그날 밤은 하느님의 인간성이 절정을 이룬 날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대림절이 시작되는 오늘, 복음과 독서는 우리의 이러한 성향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온통 '깨어 있어라'고 경고합니다. 짧은 복음 말씀에서 깨어있으라는 구절이 네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삶이 깨어 있으면서 예수님 성탄을 준비하는 삶이겠습니까?
바로 이천 년 전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과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메시아를 기다렸던 율법학자, 바리사이, 사두가이는 바로 곁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 본 이들은 멀리 있었던 동방박사들과 하느님에 대해 무식하고 부정하다고 손가락질 받던 죄인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성경을 잘 알고, 메시아를 학수고대했던 이들이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이유는 그들의 모든 관심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현세적 욕심을 채우는 데만 맞춰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를 쳐부수고 제2의 모세가 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 자기들만을 일등국민으로 만들어 줄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을 만났고, 또 그분을 구세주로 고백했던 사람들은 동방박사들, 목동들, 제자들, 과부들과 병자들, 고아와 고통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던 순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번 성탄에도 어김없이 우리에게 오실 예수님을 우리는 제대로 알아 모실 수 있을까요? 대림시기 동안 내 이기적 마음을 정화시켜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랑과 평화, 감사의 마음을 간직한다면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링컨에게는 에드윈 스탠턴이라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스탠턴은 당시 가장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한 번은 두 사람이 함께 사건을 맡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법정에 앉아 있던 스탠턴은 링컨을 보자마자 자리에게 벌떡 일어나 "저 따위 시골뜨기와 어떻게 같이 일을 하라는 겁니까"하며 나가 버렸습니다. 이렇듯 스탠턴이 링컨을 얕잡아 보고 무례하게 행동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대통령이 된 링컨은 내각을 구성하면서 가장 중요한 국방장관 자리에 바로 스탠턴을 임명했습니다. 참모들은 이런 링컨의 결정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스탠턴이 "링컨이 대통령이 된 것은 국가적 재난"이라고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참모들이 재고를 건의하자 링컨은 "나를 수백 번 무시한들 어떻습니까? 그는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으로 국방부 장관을 하기에 충분합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스탠턴은 당신의 원수가 아닙니까? 원수를 없애버려야지요!"
참모들의 말에 링컨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수는 마음속에서 없애버려야지요! 그것은 '원수를 사랑으로 녹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링컨이 암살자의 총에 맞아 숨을 거뒀을 때 스탠턴은 링컨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예수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에 구원 복음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요구합니다. 깨어 있는 사람의 마음 안에는 어느덧 사랑이 샘솟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맺어졌던 아픈 과거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성탄보다도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축제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13장은 수난 이야기 앞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수난·죽음·부활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올리브 산에서 성전을 내려다보시며 종말에 관한 마지막 설교를 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고하시면서(13,1-2), 종말의 전조로 가짜 그리스도가 등장하고 전쟁과 기근, 지진과 교회 박해 등 작은 불행이(513절) 이어지다가 종말이 임박할수록 훨씬 더 큰 불행들이(14-23절) 밀어닥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결국 종말에는 사람의 아들이 구름에 싸여 내려와 온 세상의 선민들을 소집할 것입니다(24-27절).
예수님의 이 설교는 표현상 분명히 묵시문학적 색채를 띠고 있으나 내용은 묵시사상과 거리가 멉니다. 미래 사건을 들추어내기보다는 오히려 현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경고와 위로 가운데 회개와 믿음의 결단을 강하게 촉구하기 때문입니다.
종말은 언제 있을 것인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묵시문학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오는 모습을 임금님의 행차처럼 묘사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묘사일 뿐 하느님 나라와 사람의 아들의 재림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루카도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장소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종말은 무화과나무의 새싹이 여름을 예고하듯이, 여러 가지 조짐 가운데 반드시 오고야 맙니다. 그러나 종말이 정확히 언제 도래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32절) 그때는 아들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때를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생명과 영광까지도 아버지께 맡기고 순종하십니다. 스승도 모르는 것을 제자들 역시 알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무화과나무로부터 그때가 가까웠음을 배울 따름입니다.(28절)
당시 초기 공동체는 예수님의 두 번째 오심을 눈앞에 닥친 사실로 고대하며 살았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예수 시대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올 것이라는 예고가 세 번 등장합니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23)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르 9,1)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13,30) 그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마르코는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날지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상기시킵니다.
사람의 아들은 늘 문 앞에 서서 우리가 당신을 맞아들이도록 문을 두드리십니다. 우리가 준비할 태도는 깨어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33절)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할지를 문지기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34절) 여기서 기약 없이 집을 떠나 여행길에 나서는 이 집주인은 죽음의 길을 가실 예수님을, 집으로 돌아올 주인은 재림하실 사람의 아들을 가리키며, 집은 교회 공동체를, 종들은 공동체에 책임을 맡은 제자들을 암시합니다.
문지기는 밤에도 깨어 있으면서 행여 돌아올 집주인을 기다립니다. 문지기는 집주인이 언제 올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35절) 그리스도가 밤에 재림하실지 모른다는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문지기가 할 일은 주인을 영접하기 위해 깨어 있는 일입니다.
제자들에게 기대하신 것도 깨어 있는 것이지 잠을 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힘겹게 기도하실 때도 제자들이 자신과 함께 깨어 있어 주길 바라셨지만 그들은 잠에 빠졌습니다.(14,32-42) 결국 제자들은 앞으로 닥칠 일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였습니다.
‘깨어 기다린다.’는 것은 ‘종말의 때’를 동경하면서 그때를 계산하는 따위의 열광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때를 기다리는 삶입니다. 종말은 해가 바뀌듯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 원하시는 방식으로 올 것입니다. 종말이 오히려 구원이 성취되는 때임은 분명합니다. 구원을 확신하고 고대한다면 그때를 알 수 없다 해도 깨어 기다리는 것이 힘겹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자기의 사명에 충실하면서 사람의 아들이 오실 것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갑자기 돌아오신 주님께 저마다 맡은 사명과 책임을 얼마나 충실히 수행했는지 보고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인은 문지기와도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많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잠을 자듯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깨어 있는 존재, 곧 기다리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한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실 분을 통해서 말입니다. 충실히 주인을 기다리는 마음이 없으면 구원 기회를 놓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의 문 앞에 오시어 고요를 깨울 것입니다. 겁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주인만을 고대하는 신앙 태도를 당부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문지기이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어오려고 문 앞에 서 있는 모든 생각에 대해, 그것이 우리에게 속한 생각인지, 유익한지 해로운지를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생각인지 오염된 세상에 안주하려는 생각인지는 깨어 있어야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깨어 기다리는 자에게는 종말이 희망의 시간입니다. 주인을 맞을 생각에 설레어 잠이 오지 않습니다. ●
새벽을 열며
오늘 일어난 시각이 새벽 1시랍니다. 이 시각에 새벽이라는 말이 붙는다는 것 자체가 어색할 정도로 너무나 이른 시각이지요? 1시에 일어난다는 것, 아마 상상하시기 힘들겠지요. 보통 사람들은 이때쯤 주무시니까요. 그런데 제가 이 시각에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답니다. 왜냐하면 어제 잠잔 시간이 9시가 채 되지 않았거든요. 아마 낮에 나무를 심느라 땅을 팠던 것이 피곤함을 가져다 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불도 피지 않고 그냥 방바닥에 널브러져 자고 있었네요.
사실 어제는 이렇게 일찍 자면 안 되었답니다. 왜냐하면 저녁에 저랑 전화 통화를 하자고 약속했던 분이 계셨었거든요. 그분께서는 저에게 한가한 시간을 물어보셨고, 저는 일을 모두 마치는 시간인 저녁 8시에서 10시 사이를 말씀드렸지요. 그랬더니 그분께서는 9시쯤 전화를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새벽 1시에 일어난 저는 이 분께서 왜 전화를 하지 않으셨을까 했습니다. 전화를 하셨으면 전화소리를 듣고서 제가 분명히 일어났을 테니까요. 더군다나 제 전화벨 소리는 무척 크거든요. 약속을 하시고 전화를 하지 않으신 그분에 대해 약간의 불쾌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혹시 내가 못 받은 것은 아닐까 싶었어요. 그리고 전화기의 수신정보를 확인하는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정확히 9시. 이분께서는 정확한 약속 시간에 전화하셨습니다. 이분께서는 전화 약속을 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그 약속을 어겼던 것이지요. 즉, 잠이 들어서 전화를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분께 너무나 죄송했습니다.
바로 깨어 있지 않아서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이렇지 않을까 싶네요. 즉, 깨어 있지 않기 때문에 주님과의 약속을 얼마나 자주 깨트리고 있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깨어 있어라’라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단 한 번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그마치 세 번씩이나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13,33)”, “그러니 깨어 있어라.(13,35)”, “깨어 있어라.(13,37)”
깨어 있지 않아서 매번 공수표를 남발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발 깨어 있어서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기 자신이 깨어 있지 않았기 때문인데도 불구하고, 주님 탓을 외쳤던 적이 또 얼마나 많았던지요? 마치 제가 자느라 전화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그분께서 전화를 하지 않았다고 불쾌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대림 제1주일을 맞이하는 오늘은 교회력으로 새해에 해당합니다. 일 년의 첫날을 맞이하는 오늘, 주님과의 약속은 꼭 지키겠다는 다짐을 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올 한 해 만큼은 깨어서 주님을 잘 준비하는 가장 멋진 해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약속은 꼭 지킵시다.
빠다킹 신부
깨어 있기
-백광현 신부 -
그믐날 집에서 가족들이 모이면 늘 늦게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잠들곤 했습니다.
막내였던 저는 가족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몰려오는 잠과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제게 잠이 들면 눈썹이 하얗게 쉰다고 오늘은
밤샘하는 날이라고 설명까지 덧붙여 주셨습니다. 아마 이날은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서 서로의 삶을 나누며 가족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날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견디다 못해 잠들어 버리고 아침에 있어나 제일 먼저 어머니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서 내 눈썹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어보면 어머니는 대답은
하지 않으시고 웃기만 하셨던 생각이 납니다.
신앙인으로서 깨어 사는 것은 우리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적어도 우리가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신앙인에게 하느님께서는 가장
후한 점수를 주십니다.
매일 하느님 안에서 깨어 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한다면 멋진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오 마리아 수녀(성심수녀회) -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첫 주일이다. 깨어 있는 자세로 세례 때의 첫 마음을 확인하고 새롭게 다짐했으면 한다. 어떤 사람이 단칸방에 살다가 돈을 벌어 20평짜리 집으로 이사하고, 다시 35평 집으로 이사했다. 새집은 넓고 좋았다. 마냥 행복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서 처음 이사할 때의 마음은 점점 퇴색되고 더 큰 집만 눈에 들어오며 불평이 커졌다고 한다. 우리의 생각과 시선도 이와 같지 않을까? 첫영성체를 할 때는 얼마나 감격스럽고 흥분되었던가. 그러던 것이 차차 아무 감정 없이 습관적으로 주님을 모신다. 또한 주님께 향한 열정이 차츰 사라지고 내 중심의 삶으로 옮아가면서 삶은 바빠지고 정신은 더욱 무뎌지고 있다. 가끔 우리 마음의 세탁이 필요하다.
“항상 조심해서 깨어 있어라.” 무엇에 깨어 있어야 하는가? 이는 주님의 기도에서 말하는 아버지의 뜻이 내 삶 안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삶의 깨어 있음을 의미한다. 아침·저녁기도로 내 삶의 중심을 주님께 둔다. 깨어 있지 않으면 아버지의 뜻보다는 내 뜻을 내세우게 된다. 우리가 믿는 것은 바로 내 뜻에서 아버지의 뜻으로 옮아감이다. 아버지의 뜻은 바로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오늘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갖추게 되었고, 특히 언변과 지식에 뛰어나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신앙의 삶이 되길 바란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깨어 기다리는 신앙인이 되자.
-경규봉신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말할 수 없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으며 낙심하고 좌절에 빠졌다.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버린 것 같았고, 자신들의 신앙이 응답받지 못한 것 같았으며, 도무지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한 그들이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절망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메시아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다. 언젠가 메시아가 오면 그들의 주권이 회복되고 그들이 다른 민족 위에 우뚝 서게 되리라는 희망이 그들로 하여금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주었다.
초대 교회 신도들도 계속된 박해와 환란으로 인하여 대단히 큰 고통을 당했다. 그런데 그들로 하여금 그 고통을 이겨내도록 한 것은 구세주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리라는 믿음이었다.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며, 재림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이 당한 고통의 대가를 낱낱이 갚아주시리라는 믿음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주었다.
이스라엘 백성과 초대교회 신도들의 이러한 믿음을 본받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도록 하는 기간이 곧 대림절이다. 따라서 대림절은 신망애 삼덕 중에서 망덕의 절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대림의 시기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기다림이란 막연히 앉아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피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기다림이며 준비이다. 우리나라 속담처럼 감나무 아래에서 입을 벌리고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기다림이 아니다.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려고 노력하는 것, 장대를 휘두르고 돌멩이를 던져서 감이 떨어지도록 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기다림이다. 하느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막연히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고 실현해 나가는 적극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 적극적인 기다림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먼저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늘 조심하고 깨어 지켜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항상 깨어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당신이 오시는 때를 비밀로 하셨다.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는 정확한 시간을 알지 못하므로 늘 깨어 기다려야 한다. 주님의 오심에 대한 신앙을 방해하고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복잡하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조심하며,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언제 오시더라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다는 것은 자신을 정확히 보고 깨닫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자리와 처한 현실을 정확히 보고 깨닫는 것이다. 현세란 지나가 없어지는 것임을 정확히 보고 깨닫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현세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뜻한다. 현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언제 생을 마감할지라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자세를 갖추는 것을 뜻한다. 사실 우리의 인생은 깊은 밤과 같다. 우리는 밤 몇 시경에 주님께서 오실는지 알 수 없다. 젊은 날에 오실지 중년에 오실지 노년에 오실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언제 오시더라도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있는 자세, 죽음을 향하여 살아가며,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늘 조심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또한 깨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과 정신을 흐리게 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우리로 하여금 깨어있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많이 있다. 우리를 취하게 만들고,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며,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들이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술과 마약류와 같은 것들이다. 많은 이들이 술에 취해 산다. 청소년들도 본드 등 마약을 흡입하며 산다. 취함으로써 현실의 어려움을 잊으려고 한다. 그러나 취한다고 하여 현실의 어려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현실의 고통을 잊을 따름이다. 그래서 취한 상태에서 벗어나면 현실의 고통과 아픔은 그대로 남아 있고, 이를 잊기 위해서 다시 취하곤 하며, 그래서 취하는 상태가 반복된다. 중요한 것은 현실을 도피하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고통의 근원적인 문제를 찾아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의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일을 하도록 우리에게 당신의 권한을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앓는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마태 10,8)고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주셨다. 당신께서 가지신 권한을 당신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주인이 멀리 떠나가면서 종들에게 각각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겼듯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권한을 나누어주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일을 하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병을 병원에서 고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병원에서 대부분의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병원에서 병을 고치는 것은 전체의 23%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병원에서 병을 고치는 것보다 병원 밖에서 병을 고치는 것이 더 많다. 사실 기도를 통하여 병을 고치는 예가 아주 많다. 기적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치유는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더욱이 마음의 병과 같은 종류는 기도를 통해서 고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또한 악령의 작용도 많은데, 실제로 악령 들린 사람도 있고, 설사 악령이 들리지 않았다 할지라도 악의 영향을 받아 마음이 분노와 증오, 괴로움과 근심, 탐욕과 정욕 등으로 가득 찬 사람도 많다. 이러한 이들로부터 악령을 쫓아내고 악의 영향을 물리치도록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권한을 주셨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구원의 기쁨을 갖고 살도록 해주라고 우리에게 당신의 권한을 주셨다.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고, 지켜주시며 구원하신다는 믿음을 가짐으로써 현실을 기쁘고 복되게 살아가도록 해주라고 우리에게 권한을 주신 것이다. 우리가 받은 권한을 잘 사용하여 우리 자신도 구원의 기쁨으로 살아갈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악의 영향을 물리치고 사람들이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현실을 복되게 살아가도록 해주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며, 그것이 곧 대림을 살아가는 삶의 자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이 일을 맡기셨다. 우리는 가정, 사회, 교회 안에서 그와 같은 일을 하도록 주님께로부터 각자의 소명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곧 기다림의 삶을 충실히 사는 것이다.
교회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오늘 대림 제 1주일에 우리 모두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현세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늘 깨어 있는 삶을 살자.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쫒아내며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자. 그럼으로써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신앙인이 되자.
축제의 날, 주님의 날
-양승국신부-
기도에 아주 열심인 한 평신도의 고백은 수도자인 저를 얼마나 부끄럽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대림절을 맞아 늘 깨어 기도하며 지내고 싶다는 염원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잠자는 시간도 아깝습니다. 잠든 시간에도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또 다른 자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전부입니다. 사랑은 모든 문제의 답입니다. 우리 삶 그 자체가 사랑이어야 합니다.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전부입니다."
매일 주님의 날을 준비했던 아타나시오 성인은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성인들에게 하루하루는 축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들 전 생애는 축제의 나날이었습니다."
오늘은 교회 전례력으로 첫날인 대림 제1주일입니다. 이제 교회는 성탄이란 전례력의 한 정점을 향한 한 달간 여행길을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기치 않았던 순간, 섬광처럼 다가올 주님의 날을 잘 준비하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매일 매일을 열심히 살아 주님의 날이 언제 오든지 당황하지 말고, 놀라지도 않고, 의연하게 그 날을 맞이하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주님의 날은 절대로 두려워할 날이 아닙니다.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 날도 아닙니다. 주님 은총 안에 달릴 곳을 힘차게 달린 사람으로서 주님의 날은 기쁨의 날입니다. 그날은 주님께서 수여하실 영광의 월계관을 받아쓸 날입니다. 그날은 영원한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로 들어서는 가슴 설레는 날입니다. 그날은 너무 기쁜 나머지 춤을 추면서 행복해야 할 축복의 날입니다. 첫 축제에 참석하는 새내기 대학생처럼, 수학여행을 떠나는 여고생들처럼, 그렇게 기쁘고 행복한 표정으로 맞이해야 할 축제 날입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순환하는 자연에서 많은 교훈을 얻게 됩니다. 기온이 뚝 떨어지고 세찬 바람이 불어오니, 나무들은 미련 없이 오랫동안 함께 몸 붙여 살았던 잎사귀들과 작별인사를 합니다.
지난 가을, 붉게 물든 단풍 낙엽을 하나 주웠습니다. 한 여름에 보았던 파란 빛깔의 이파리도 볼 만했지만, 빨갛게 스스로를 탈바꿈한 낙엽은 더 볼 만했습니다. 일출도 아름답지만 황혼은 또 다른 정취와 멋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마지막 날, 우리가 맞이할 주님의 날, 우리 노년도 그렇게 고상했으면 좋겠습니다. 추하지 않고 적당히 품위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최후, 담담한 죽음, 장엄한 마지막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겠지요. 철저한 준비는 필수입니다.
하루하루를 허송세월하지 말고 불꽃처럼 살아가야겠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느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리라 확신합니다.
언젠가 다가올 우리의 마지막 날, 더 노력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이웃들에게 더 친절하게 대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지 않도록, 더 기쁘게 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도록, 오늘 우리 자신의 삶을 늘 돌아봐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 역시 아무에게나 그저 주어지는 것이 절대 아닐 것입니다. 나약한 우리 인간들은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하느님 본성에 긴밀히 참여할 수 있습니다. 부족한 우리들은 인내하고 또 인내해야 하느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아야 영혼의 온전한 아름다움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또 다시 맞이한 은총의 시기 대림절, 휘황찬란한 성탄장식이나 상업주의에 정신이 쏠리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길 바랍니다. 진지하게 우리의 지난 삶을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간 잔뜩 쌓아온 잡동사니들 가운데 정리정돈해야 할 것들은 어떤 것인지 챙겨보도록 합시다. 어떻게 해서든 그분을 맞아들일 공간을 확보하도록 버리고 또 버리는 '비움의 대림절'이 되길 바랍니다.
그 날과 그 시간
-김영수 신부 -
“십자가, 잠든 영혼 깨우는 입맞춤”
깨어있음의 의미
신앙인으로서는 새해의 첫날인 오늘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고 당부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잠든 우리의 영혼을 두드려 깨웁니다. 어렸을 적부터 아침잠이 많은 저는 어머니의 애절한 외침이 들려도 눈을 뜨지 못하고 마침내 어머니께서 이불을 걷어 올리고 나서야 아직도 덜 깬 잠 속에서 하루를 맞이하곤 했습니다. 그런 날은 책가방 챙기는 일도 허둥대고 학교 가는 길도 멀기만 해서 교문 앞에서 저승사자처럼 지각생을 기다리시던 교련선생님과 선도부의 얼차려로 고된 하루를 시작해야했던 기억이 납니다.
잠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이고 신비스러운 요소이지만 두 가지의 다른 양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잠은 인간을 재생시키는 휴식이 되기도 하고, 어둠과 무의식 속으로 빠져 들게 하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잠은 삶의 원천이며 죽음의 형태로서 서로 다른 은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영적인 생활에서 잠은 영적 무감각과 나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잠은 죄를 야기하는 죽음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런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회개의 상징이요, 생명에로의 복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결국 두 가지 철학이 있을 뿐이다. 첫째 철학은 우선 먹고 마시며 축제를 즐기다가 숙취로 끝나는 삶이 그것이고, 다른 철학은 먼저 단식 하다가 나중에 잔치의 기쁨을 맛보는 삶이 그것이다. 희생을 통해 나중에 얻게 된 기쁨이야말로 언제나 비할 데 없이 감미롭고 더 오래 남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환희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패배로 시작한다. 정신적 희열로 시작하는 환희의 종교들은 흔히 환멸과 실망으로 끝난다.”
이 시대의 영성가이며 위대한 가톨릭 저술가로 존경받는 풀톤 쉰(Fulton J. Sheen) 주교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대림절을 시작합니다. 우리를 빚으신 분이 하느님이심을 잊지 않는 삶만이 우리를 하느님의 길로 향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길을 떠나면 우리의 삶은 목적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가 잘못하였기 때문에 주님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능력만이 우리를 참다운 삶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믿음이 죄 속에 잠든 우리를 깨울 수 있다고 외칩니다.
사람은 잠을 자고 있어도 정신은 말짱하게 깨어 있을 수도 있고, 깨어 있을 지라도 쓸데없는 데에 정신을 팔게 되면 잠든 것과 같은 상태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일에 분주하여 신앙의 길을 소홀히 하게 되고, 삶의 중심을 잃어버린 채 헛된 욕망을 쫓아 살아가고 있다면 깨어 있어도 잠든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스승의 기도에 따라왔다가 잠든 제자들에게 애절한 목소리로 호소하십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르 14, 37~39)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하는 우리의 나약함이 깨어있으나 잠든 것과 같은 처지에서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참다운 소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잠자고 있어도 영혼은 늘 깨어 있습니다. 소풍가기 전날 저녁에 아침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맞이하는 사람이 새벽을 기다리는 것처럼, 좋은 것을 기다리는 사람은 ‘잠자리에 들었어도 정신은 말짱하게 깨어 있는 것입니다.’(아가 5, 2)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 중에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마법에 걸려 백 년 동안이나 숲속에서 잠에 빠져있었던 오로라 공주가 필립 왕자의 진정한 사랑이 담긴 입맞춤으로 잠에서 깨어나 사랑을 이루게 된다는 이야기는 잠든 우리를 깨우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를 잠에 빠져들게 하는 마법은 무엇일까? 인생의 길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삶의 무게일 수도 있고, 변화를 포기한 채 하루하루를 견디어내는 무기력한 삶일 수도 있고, 공허한 마음을 헛된 것으로 채우려는 결핍일 수도 있고, 영혼을 짓누르는 죄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는 도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삶은 우리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게 합니다. 그래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상태 - 죽음의 잠 속에 우리를 가두어 둡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잠든 우리를 깨우러 오셨습니다. 당신의 목숨을 바쳐서 우리를 깨우시러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십자가는 잠든 우리의 영혼을 깨우는 사랑의 입맞춤입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1고린 1, 9)
-서공석 신부-
아름답던 단풍이 낙엽 되어 떨어지고, 산과 들에 생명의 빛이 사라져가기 시작하는 이 계절이 오면, 우리는 대림절(待臨節)을 맞이합니다. 한 해가 다 기울어가고 새해가 가까웠다는 사실을 예고하는 계절입니다. 대림절은 글자 그대로 임하실 것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가깝게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날을 기념하는 성탄축일이 다가오고 있는 계절이고, 멀리는 우리 삶의 종말에 하느님을 대면할 것을 생각하게 하는 계절입니다. 죽음을 넘어서 하느님이 우리 안에 이루실 은혜로운 일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계절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조심하고 깨어 있으시오...집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삶의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종말은 하느님과의 대면이라는 말입니다. 신약성서에는 세상 종말에 대한 말들이 여러 곳에 다양하게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세상의 종말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기원전 2세기부터 유행한 유대인들의 묵시문학 저서들은 가까운 미래에 닥칠 종말에 대해 묘사합니다. 종말에 대한 그런 표현들은 신약성서 안에도 적지 않게 흘러들어 왔습니다.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이 떨어진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 ‘죽은 이들을 부활시켜서 심판하신다.’ 이런 표현들이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에서 온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그 날과 시간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마태 24,26)고 말씀하셨지만, 세상의 종말이 멀지 않은 장래에 올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하였기에, 유대인의 한 사람인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습니다. 수백 년 동안 이민족(異民族)의 지배를 받아온 유대 민족이었습니다. 강대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처절하게 체험한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그들은 대망(待望)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류 역사의 미래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비 그리스도인보다 인류의 미래에 대해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초기교회의 언어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 언어에 준해서 자기의 삶을 다시 보는 사람입니다. 그 언어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며 즐기고, 많이 가지고 출세하여 남을 지배하는 것보다, 더 고귀한 것이 우리의 삶 안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시오...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시오”(마태 6,31.33).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 안에 숨겨져 있고, 그것을 찾아서 살았을 때 우리의 삶이 더 아름답고 더 자유로워진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가 실천하여 인간 생명을 살릴 때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일을 우리가 실천할 때에 있고, 그 실천이 인간 생명을 살릴 때 하느님의 의로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있어서 세상에 생명들이 태어납니다.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이 실천하는 자비가 있어서 인간 생명이 자랍니다. 자비는 인간 생명을 존재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힘으로 인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비를 우리 실천의 동기로 삼지 않습니다. 자비는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해 주고 우리 주변에 생명을 살게 하고 풍요롭게 합니다. 그와 반대로 미움과 복수는 악의 악순환에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그 악순환에 빠져 자유를 잃었을 때 발생합니다. 미움과 복수는 인간 생명을 위축시키고 죽입니다. 그러나 자비는 우리를 그 악순환에서 해방시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자유로운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만든 세상의 질서는 인과응보(因果應報) 혹은 상선벌악(賞善罰惡)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질서에서 인간 생명은 부정당하고 짓밟힙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만든 그 인과응보 질서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습니다. 인과응보의 질서에서는 죄가 많은 곳에 벌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우리 생명의 근본을 이루는 질서가 아닙니다. 바울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죄가 많아진 거기에 은총이 더욱 넘쳐흘렀습니다”(로마 5,20). 이것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고, 우리가 그분의 의로움을 실천할 때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이 세상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큰 나무 아래 있는 작은 나무는 햇볕도 영양도 다 빼앗기고 결국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맹수 가까이에 있는 힘없는 동물들은 맹수의 먹거리로 자기 생명을 바치고 맙니다. 원시인들의 추장이나 미개한 나라의 왕은 약자의 것을 빼앗아서 자기 스스로를 풍요롭게 합니다. 이 약육강식의 질서는 오늘도 인간 상호간, 기업체간, 또한 국가 간에 살아 있습니다. 약자는 항상 강자에게 빼앗기고 그 생존을 위협 당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은 그런 질서를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의로움을 실천하며 살라고 권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분으로 말미암은 질서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용서를 선포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그 의로움을 실천하셨습니다. 그것은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율법은 잘 지켜서 그 보상으로 상을 받아야 하고, 병을 비롯한 불행은 인간의 죄에 대해 분노하신 하느님의 보복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가르치면서 죄의 용서를 선포하는 예수님은 그들이 보기에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깨어 있으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이었습니다. 계절은 바뀌고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갑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세상의 질서 따라 무심하게 흐르지만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생각하고 깨어 있어서 그분의 질서 안에서 그분의 일을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삶의 종말에 대면할 하느님은 자비와 용서와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을 당신의 실천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그분의 일을 지금부터 실천하며 삽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그 의로움은 우리의 삶 안에 겨자씨와 같이 숨겨져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살아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찾고 실천하여 하느님이 지배하시는 삶을 지금부터 살라는 복음 말씀입니다. ◆
늘 깨어 지켜라
-최득수 신부-
오늘은 교회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대림 시기를 시작하면서 교회는 오늘 우리에게 "늘 깨어 지켜라"는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지켜라. 그 때가 언제 올 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을 하면서 늘 깨어 지키라고 합니다. 늘 깨어 지킨다는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깨어 지킨다는 이 말은 한 잠도 자지 않고 늘 깨어 지키는 것을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늘 깨어 지킨다는 것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 즉 늘 주님께 마음을 두며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산행 도중에 산삼을 발견하게 된다면 산삼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삼이 자기 가까이 있어도 그것이 산삼인지 알아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산삼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설사 지식이 있다하더라도 산삼에 대하여 평소에 별 관심 없이 지내오고 있었다면 산삼을 지나치고 있어도 그 보물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에게 누군가가 산삼을 알아 볼 수 있는 눈이 있느냐? 그리고 산삼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물어 온다면, 나 자신 역시 산삼을 알아보지 못할 것 같고 또 바로 곁을 지나치게 될 때라도 발견하지 못할 것 같다는 대답을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깨어 지킨다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깨어 있다"는 이 말이 밤이고 낮이고 잠을 자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또 밤낮 없이 주님만 생각하고 늘 기도만하며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따라서 항상 깨어 지키며 산다는 이 말은, 늘 주님을 염두에 두며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나의 삶이 송두리째 내가 추구하는 그 목적을 향한 삶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며 살고, 그 날을 준비하며 사는 삶이라고 해서 현재를 희생시키는 그런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늘 깨어 있다는 것은, 미래가 현재 안에 현존하는 삶이고, 주인이 오기 전이지만 이미 주인이 도착했을 때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그 날의 기쁨을 늘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림절을 시작하면서, 또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삶도 늘 주님을 향한 삶이 되고, 그 날에 대한 일들을 늘 염두에 두며 살아가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날에 대한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깨어 있어야 하고, 지혜롭게 늘 그 날에 대한 준비를 한 상태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날이 와도 두려움 없이 그때를 맞이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삶은 기쁨으로 그 날을 기다리는 삶이 될 것입니다.
망부석
-이찬홍 신부-
망부석 전설을 아십니까?
신라시대 박제상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눌지왕이 오랫동안 근심을 하자 찾아가 그 이유를 묻습니다.
왕은 자신은 이렇게 행복하고 편하게 살고 있는데,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동생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프다며, 그 이유를 말합니다.
왕의 말을 들은 박제상은 ‘제가 가서 폐하의 동생 분을 구출해 내겠습니다.’ 라고 말한 뒤, 집에도 들리지 않은 채, 바로 일본으로 갑니다. 일본에 가서는 신라왕을 피해 이곳으로 망명 왔다며, 자신의 속마음을 숨깁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박제상은 왕의 동생을 탈출시키기 위해 바닷가로 여행을 갑니다. 왕의 동생에게 자신이 일본에 온 이유를 밝히고, 왕의 동생을 탈출시킵니다.
‘함께 가자’는 권유에, ‘함께 가면 들통이 나 바로 잡힐 수 있으니, 혼자만 가십시오, 저는 다음에 가겠습니다.’ 라며 자신의 소임을 다합니다.
왕의 동생이 일본을 탈출한 사실이 밝혀지자, 박제상은 많은 고초를 겪게 됩니다. 박제상의 충심을 알아본 일본 관리들은 그 충심에 감탄하며, 일본의 신하가 되기를 권합니다. 그러나, 박제상은 ‘차라리 신라(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일본의 충신이 될 수 없다.’며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러는 동안, 박제상의 부인은 매일 일본이 보이는 바닷가에 나와 남편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끝내 남편은 오지 않고, 부인은 바닷가에서 죽어서 돌이 되어버립니다. 남편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돌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바로 망부석 전설입니다. 예화가 길었습니다.
복음에 예수님께서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르니,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종들에게 ‘집을 떠난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주인이 올 때를 깨어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복음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대림 시기는 회개와 보속을 통해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삶이요, 오시는 예수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우리 삶이 어떻게 변하고, 그 무엇이 달라지기에 그토록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독서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빚어 만드신 분이요, 우리는 모두 진흙으로서 하느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오스딩 성인의 말씀처럼, 곧 “하느님 당신 위해 우리를 내시었으니, 당신 나라에 가기 까지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이 없나이다.” 라는 말씀처럼, 하느님 안에 우리의 참된 행복, 기쁨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 늘 깨어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사실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점은, 우리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역시 우리가 당신께로 나아가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늘 마음을 돌이켜, 삶의 전화를 이루어 당신께로 되돌아오기를... 회개하기를 촉구하시는 분이십니다.
늘 떠나간 탕자를 마을 어귀에서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하나의 회개를 더 기뻐하시는 마음으로... 그렇게 당신을 떠나 양한마리를 찾아 길을 떠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는 그만 방황하고, 그만 고민하고, 그만 마음아파하며 돌아오기를 애타게 촉구하시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바로 하느님 안에 참된 행복과 평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마음에 받아 안고 늘 간직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해 주시기 위해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당신께 돌아오기를 촉구하시는 하느님을 더 이상 망부석이 되지 않게 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아버지께 돌아가야 할 그 탕자가 바로 자신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 회개해야할 죄인 하나가... 길을 잃고 헤매는 그 양 한 마리가 바로 자신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주님을 기다림에 있어 스스로 망부석이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 내가 왔다. 네가 그토록 애타게 찾고 불렀던 내가 너에게 왔다.’ 라고 말씀하시는 그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그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그 하느님을 느끼지 못한 체, 계속 주님의 오심만을 기다리는 망부석인양 살아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말씀을 통해서, 성체를 통해서 이웃을 통해서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분을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 만큼 마음이 무디어지고 돌처럼 변해버렸다고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망부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주님을 망부석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 또한 망부석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은총의 대림시기에 이루어야 할 것은... 바로 외적인 재물, 봉헌이 아니라 내적인 회개입니다.
그 찢어지고 쓰라린... 안쓰러워하는 마음입니다. 아멘.
“깨어 있어라”
- 최승정 신부-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 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은 교회 전례력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 그리고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마지막으로 왕으로서 우리에게 재림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큰 틀이 공동체에 제시됩니다.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원대한 계획을 전례력이라는 1년 단위 시간으로 압축해 놓았습니다. 이제 한 해를 시작하며 교회 공동체는 떠들썩한 세상과는 대조적으로 숨죽이며 한 아기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의 묵시록’이라 불리는 마르코 복음 13장의 종결부입니다. 마르코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행적을 전합니다. 11장에서 예루살렘에 도착한 예수가 성전을 비판하고, 12장에서는 예수가 유대의 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이고 이제 13장에서 성전 파괴라는 예언과 함께 종말에 대해 경고합니다. 여기서 11장과 13장은 성전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예수의 모습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 14장부터는 예수의 수난에 대한 보도입니다. 즉 예수의 죽음은 그가 벌린 운동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구성된 헛된 권위와 갈등을 빚었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복음 13장의 대미를 장식하는 오늘 복음은 종말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깨어 있어라”는 요청으로 마무리합니다. 종말의 시간은 하느님 외에는 그 누구도, 인간뿐만 아니라 천사들과 하느님의 아들도 모르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그 시간은 한 처음에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온전히 속한 시간입니다. 시간을 창조하신 분이 하느님이시니 그것을 완성하시는 분 또한 그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중 제일 눈에 띄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깨어 있어라”입니다. 이 “깨어 있음”은 육신적 의미에서의 잠들지 않는 것을 뛰어넘어 하느님이 시작하신 구세사의 완성에 대해 온전히 집중하여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반대로 “잠들어 있음”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마치 하느님이 없는 듯이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미 성전에 대한 비판을 통해, 하느님 백성을 잠들어 있게 한 유다 지도자들에게 보낸 예수의 경고가 여기에서는 직접 모든 백성을 향하고 있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며 아기 예수를 숨죽여 기다리는 교회 공동체는 이렇듯 종말에 대해 “깨어 있어라”는 예수의 요청으로 그 첫 주간을 맞이합니다. 한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며 세상의 종말에 대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으로 비춰질 수 있겠지만, 마치 100미터 달리기 경주를 하는 선수가 호흡을 고르며 결승점을 주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직 뛰어야 할 시간은 아니지만 그 목적지를 주시하며 자신을 준비하는 “깨어 있음”이, 대림을 맞이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가장 올바른 영적 태도라고 오늘 복음은 간곡히 가르칩니다.
"깨어 있으라"
-성용규 신부 -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그분을 알아본 사람들은 몇 사람 되지 않았습니다. 제일 먼저 성모님과 요셉성인, 목동들과 동방박사, 그리고 예언자 시메온과 안나 등.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살고 있었지만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를 알아보고 그분을 맞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왜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분을 알아보았을까요?
이분들의 공통점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뵙기 위해서는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깨끗한 영혼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올 것이다(마태 5,8)”라고 이점을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20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오늘날도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기다릴 때 비로소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대림 시기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의 성탄을 깨어 기다리며,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실 수 있도록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준비의 핵심은 ‘회개’입니다.
대림절을 시작하는 첫 날 우리는 “깨어있으라(마르 13,37)”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깨어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미루지 말고 지금 바로 회개하라는 절박한 호소입니다. 진정한 마음의 회개 없이 맞는 성탄은 아무런 기쁨도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회개란 죄를 버리고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하느님께서는 진실하게 뉘우치는 마음을 보시면 한없이 기뻐하시며, 그 영혼을 찾아오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기쁨을 돌려주십니다. 이 순간 하느님께서는 애타게 기다리던 자식을 다시 찾은 감격으로 기뻐하시고, 죄를 용서받은 죄인은 한없이 자비하신 아버지를 다시 찾은 기쁨으로 감격하게 됩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기쁨이 흘러 넘치고, 땅에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들의 기쁨이 흘러 넘칠 때 성탄은 참으로 기쁜 축제가 될 것입니다. 대림절을 시작하면서 이제까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저지른 모든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며, 회개의 삶을 통해 깨끗한 영혼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잠 자지 마라?”
-신 필로-
어떤 사람이 오늘 복음을 들여다보더니 예수님 말씀이 참 어렵다고 합니다. 어떻게 된 것이 예수님이 사람들 보고 잠도 자지도 말고 깨어 있으라고 하니까 참 난감하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서 우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셨으니까 말 그대로 풀이하면 그렇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마는 그런 뜻은 아니지요. 그러면 어떤 뜻일까?
어렸을 때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집에 아버지가 밖에서 퇴근을 하시고 집에 늦게 들어오실 때가 가끔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일 가사일을 열심히 하신 어머니가 피곤해서 잠을 주무시거나, 잠이 묻은 얼굴로 아버지를 맞이하시면 별로 언짢아 하셨어요. 경상도 남자들 특유의 그런 말 있잖아요. ‘살림하는 여자가... 남편이 집에 오지도 않았는데 잠이나 자고...’ 뭐, 사실 살림하는 여자는 안피곤한가요? 아니잖아요. 아버지가 늦게 오니까 잠을 잘 수도 있는 노릇인데 아버지는 그게 그렇게 섭섭하셨는가봐요. 우리도 덩달아서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잘 안자는 버릇까지 생겼습니다.
제가 ‘아버지가 옳다’ ‘어머니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할 이야기가 한 가지 있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지 기다리는 사람이 오실 양반을 자다가 맞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머니 탓하는 것 절대 아닙니다. 오해하실 분 있을 것 같은데요..^^ 여기서 오실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또 여기서 잔다는 것은 예수님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다리며 반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기다리며 맞이하지 않는 이를 좋아하실 리가 만무합니다.
따라서 오실 분을 기다리며 맞이하는 첫 번째 조건은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깨어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복음 말씀에 보면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 종들한테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각자에게 할 일을 맡겼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도 우리한테 해당되는 말씀인데, 우리 각자가 맡은 일을 생각해보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 각자가 맡은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 각자의 역할이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기본적인 역할이 있습니다. 농사일이나 장사나 직장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자녀들을 키우고 돌보아야 하는 일이 있지요. 자녀들은 열심히 배워서 세상에 나갈 준비를 단단히 합니다.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주인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주인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앙’입니다. 죄 많은 우리가 구원되리라는 약속을 우리에게 하셨고, 그것을 믿고 살아가겠다는 다짐과 믿음을 우리는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맡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맡아 가지고 있는 이 신앙을 주인이 다시 오실 때까지 잘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지요. 이 신앙을 주인이 오실 때에 그대로 가지고 있지 않고 조금만 가지고 있거나 내버렸다면, 우리는 쿨쿨 자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2독서 코린토1서 말씀에서 사도 바오로께서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셨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도 주셨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주 예수님과 친분을 맺도록 우리를 불러주셨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것을 가지고만 있어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지도 잘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늘 새롭게 확인하고 굳세게 해야 합니다. 사실 새롭게 하자고 하고. 희망을 가지고 기쁘게 살자고 하지만 세상의 풍파에 부딪혀서 절망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대림시기를 맞아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신앙을 다시 살피고 점검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은총과 신앙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희망차게 기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살았을 때 우리에게 오실 예수님이 흐뭇하게 우리를 받아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인이신 예수님을 잘 깨어서 기다리는 공동체 되기를 바랍니다.
깨어있는 사람과 잠자는 사람
-강영구신부-
+깨어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대에게
당신은 인생의 삼분의 일을 잠으로 보낸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어떤 사람이 90년을 산다고 한다면 그는 적어도 30년을 잠으로 보냅니다.
그가 잠으로 보내는 30년은 허송세월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깨어있는 삶일까요.
잠으로 보내는 30년이 아깝다고 제대로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은
나머지 60년을 졸음으로 보내게 됩니다.
우리가 늘 깨어있기 위해서는
조신(調身), 조심(調心), 조식(調食), 조식(調息), 조수면(調睡眠) 해야 합니다.
이중 한 가지만 흐트러져도 깨어있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조수면(調睡眠)이 중요합니다.
밤에 잠을 깊고 평화롭게 자는 사람은 낮 시간의 삶도 활기차고 평온합니다.
그러나 잠자시는 시간이 아깝다고 밤을 새우는 사람은 낮 시간을 졸음으로 보내거나 흐린 정신으로 망쳐버리게 됩니다.
한 밤중에 갑자기 돌아올지도 모르는 주인을 기다린답시고
밤을 꼴깍 새우는 하인은 충실한 하인이 아닙니다.
주인이 한 밤중이 아니라 대낮에 온다면,
틀림없이 한 낮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한심한 하인의 꼴을 보게 됩니다.
주인이 하인들에게 바라는 것은 밤에는 잠을 잘 자고
낮에는 활기차게 자신이 맡은 일에 충실 하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자야 할 시간에 잠을 자는 사람이고
잠자는 사람은 자야할 시간에 자지 않고 깨어 있다가 소중한 낮 시간을 망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밤에 잠을 잘 때 꿈도 꾸지 말고 잠만 자는 사람이 되십시오.(一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