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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29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루가 10,21-24)
I give you praise,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for although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the learned
you have revealed them to the childlike.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영으로 충만한 평화의 왕국에 대하여 예언한다. 다윗 위에 머무른 주님의 영은 지혜, 슬기, 경륜, 용맹, 지식, 경외심이다. 이것은 뒷날 자비의 영이 더해져서 교회 안에서 성령의 일곱 은사로 표현된다(제1독서). 파견되었던 제자들이 저마다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오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볼 수 있고 깨달은 사람은 행복하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인체 구상 조각을 하는 작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의 인체를 조각한다는 것은 어쩌면 다른 조각보다 더 어려운 작업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날마다 보고 느끼는 사람의 몸을 흙덩어리로 빚어서 살아 있듯 생명과 아름다움이 느껴지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작가에게는 멋진 모델이나 훌륭한 손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눈입니다. 작가가 사람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깊을수록 배불뚝이 아저씨는 물론, 균형을 잃은 몸을 가진 장애인의 모습도 인간의 육체가 지닌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처럼, 예술가도 결국은 살아 있는 사랑으로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가졌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귀를 가졌습니다. 향기가 나지 않는 곳에서 향기를 맡을 수 있고, 소리가 없는 곳에서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손이 없어도 만질 수 있고, 발이 없어도 천 리에 가닿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가진 사람만이 보이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고, 들리지 않는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한 줌 흙에도 생명과 아름다움을 불어넣는 조각가처럼 신앙인 또한 ‘사랑의 눈’으로 삶을 조각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해 내고 그 생명과 아름다움을 드러내 주는 예술가입니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사랑 가득한 신앙인은 매우 행복합니다.
☆☆☆
유다인들은 하느님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로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명령까지 내리셨습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로 고백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살고 있는지요?
눈 덮인 산길을 버스가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반드시 넘어야 할 고개입니다. 눈발은 여전히 휘날립니다. 사람들은 운전기사를 쳐다봅니다. 그 역시 긴장하고 있습니다. 여차하면 산 아래로 미끄러집니다. 차 안에는 적막이 감돕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코를 골며 자는 소리를 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둘 돌아봤습니다. 열두 살 정도 된 사내아이가 자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고개를 넘었습니다. 차 안의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며 비로소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아직도 자고 있는 소년을 깨웠습니다. “얘야, 우리는 엄청난 고개를 넘어왔단다.” “알고 있어요. 여차하면 큰일 나지요.” “너도 알고 있었구나. 그런데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었니?”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이 차의 운전기사는 제 아버지랍니다.” 소년은 아버지의 운전 실력을 믿고 있었기에 태평스럽게 잘 수 있었습니다.
인생 역시 산길을 넘어가는 곡예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이신 주님께서 이끌고 계십니다. 맡기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
철부지 마음
- 강헌철 신부-
언젠가 외국 여행을 하면서 유채꽃밭을 지나간 적이 잇다. 노란색 꽃이 흐드러지게 핀 길을 달리면서 처음에는 ‘와! 예쁘다.’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 길이 30분 이상 이어지자 ‘노란색만 쳐다보니까 어지럽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렇게 흐드러지게 핀 유채꽃밭을 봤으니 제주도의 유채꽃밭을 보고는 별 감흥이 들지 않았다. ‘뭐 이런 걸 가지고 관광 상품까지 만드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 앞에 서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소롭다는 식으로 쳐다보았다. 그때 함께 간 사람들이 “신부님은 유채꽃이 예쁘지 않으세요?”라고 물었고, 나는 “뭘 이정도 가지고 그러냐?”는 식으로 대답을 했다. 그렇다. 나는 한 번 본 것이 최고인 양 여겼고, 함께한 사람들과는 어울리지도 않았다. 빨리 그곳을 떠났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사람은 그런가보다. 자기가 본 것이 최고이고, 자신의 경험이 최고의 경험이며, 자신의 생각이 옳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을 받는 길이기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기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기쁘지 않은 사람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렇게 기도하고 싶다. ‘아버지! 지혜와 슬기를 가졌다고 착각하는 저에게 철부지처럼 아버지께만 의탁하는 단순함을 주소서. 아멘.’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기
-정찬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구세주 그리스도요, 참 하느님으로 알아볼 수 있는 눈은 철부지와 제자들에게만 허락되어 있습니다. 이 ``영적인 바라봄``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대승불교를 집성한 나가르주나는 ``견이불견見而不見``, 즉 ``보아도 봄이 없음``을 말했습니다(<중론中論> 제3품 중). 인간의 감각에서 비롯되는 집착과 탐욕을 벗어날 때 비로소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그리스도적으로 해석하면, "자기를 비우고, 그 자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채우는 것"이 아닐까 싶습ㄴ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철부지와 제자들의 ``영적인 바라봄``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바라봄의 모범을 데레사 수녀님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1946년 9월, 데레사 수녀님은 ``계시의 날``이라 불리는 이때의 특별한 체험을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르심 안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저는 로레토 수녀회 안에서 무척 행복했지만, 그 행복마저 포기하고 거리로 나가서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들을 섬기라는 부르심이었습니다. ... 저는 그것이 주님의 뜻이며, 제가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데레사 수녀님은 가난한 이들에게서 그들의 비참한 몰골을 본 것이 아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목마름을 본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서 예수님의 목마름을 바라보는 것, 이는 훗날 ``사랑의 선교회``가 탄생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 마음 자리에
-김찬선신부-
저는 지금 Workshop 발표를 위해 지방에 내려와 있습니다.
어제 버스를 타고 내려오는데 뒷좌석에 아이가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는 내내 이 아이는 끊임없이 엄마에게 물어대는 것입니다.
“엄마, 저거 뭐야?”
자기 눈에 들어오는 거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묻습니다.
모르는 것을 묻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기가 아는 것이 있으면 자기가 아는 것을 확인합니다.
“저건 무어다”
그러니 알건 모르건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본다는 얘기입니다.
저와는 대조적입니다.
차를 타면 이내 어떤 생각에 깊이 잠기거나
창밖을 보며 여수를 즐기려고 해도 이내 잠이 들어버리는 저입니다.
생각에 잠기거나 깊이 잠들거나
밖의 사물이 내 안에 들어오지 않음은 마찬가지입니다.
사물들은 밖에 있고 내 안에는 나의 상념뿐입니다.
밖에 있는 것은 밖에 있고 안에 있는 것은 안에 있습니다.
차창 밖으로 수많은 풍경들이 다가오고 멀어져도
그것이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분명 잠이 들지 않아 나의 눈은 보는 작용을 계속 하고 있는데도
그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나의 생각 가운데 들어오지 못하고
나의 마음 안으로도 들어오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본다는 것은 결코 물리적인 눈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 나의 것이 없는,
비어있는 나의 마음의 눈이 보는 것이요,
영적인 눈이 보는 것입니다.
心眼, 慧眼, 靈眼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다는 사람, 똑똑하다는 사람의 눈은 보지 못하고
철부지 어린 아이의 눈이 보는 것입니다.
드나들 수 있도록 열려 있는 사람,
들어와 있을 수 있도록 마음자리가 비어있는 사람,
이렇게 자기가 비어있고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에게만
사물이 눈 안으로 들어오고.
사람이 마음 안으로 들어오며
성령께서 나의 영혼 안으로 들어옵니다.
오늘 이사야서가 얘기하듯
이런 사람 위에 주님의 영,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과 주님의 경외하는 영이 내려와 머무십니다.
이 대림절,
오시는 주님의 영을 마음으로 모십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전삼용신부-
제가 박사논문을 쓰려고 준비하는 것은 폰 발타살의 사상 안에 나타난 ‘마리아/교회, 말씀의 신부’라는 제목입니다. 발타살은 추기경까지 오른 독일의 정통적인 신학자이고 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추기경 서품을 며칠 남겨놓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은 다른 큰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분량의 책을 쓰시고 신학 전 분야에 걸쳐 뛰어나고 광범위한 분량의 이론을 펼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마지막으로 쓴 것은 위대한 어떤 신학적인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성탄카드를 아는 사람들에게 쓰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그 성탄카드마다 이런 말을 써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것을 끝까지도 쓰지 못하셨습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이것이 위대한 신학자가 평생 수많은 글을 쓴 뒤 마지막으로 쓰려던 말입니다. 신학자란 진리를 학문적으로 깨우치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진리를 아는 가장 위대한 방법이 바로 어린이처럼 되는 것임을 마지막에 더욱 절실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진리는 철부지 어린이들에게만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많은 공부를 하는 것보다 어린이처럼 되는 것이 진리를 더 빨리 깨닫는 방법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어린이처럼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리가 무엇일까요? 왜 신학자들은 진리란 것을 깨우치려고 그리 노력했을까요?
예수님을 심판했던 빌라도도 진리에 대해 묻습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 하고 대답하셨다. 빌라도는 예수께 ‘진리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요한 18, 37-38)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인지 묻지만 꾸준히 묻지는 않습니다. 한 번 묻고 지나쳐버립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진리를 증언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도 빌라도는 ‘진리’에 대해 큰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진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말씀해 주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아들에게 넘겨주셨다.’는 뜻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알려주셨다는 뜻과 같습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이고 모든 것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아버지의 모든 것은 당신의 신성인데 그 중간의 성령님을 통해 아들에게 당신의 신적 본질을 하나도 남김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이 알고계신 아버지를 알려주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까지 넘겨주셨습니다.
바로 이 삼위일체의 ‘사랑’이 진리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상 하느님을 모르면 사랑을 모르는 것이고 그래서 완전하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 사랑도 알고 그래서 참 사랑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결국 하느님을 더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진리’를 이 세상에 알려주려 오신 이유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행복하신 것처럼 우리도 행복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랑해야 행복할 수 있는데, 우리는 좀처럼 하느님에 대해 알려고 달려들지도 않고 어떻게 해야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하느님을 더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느님을 알기 위해 평생 책속에 파묻혀 살았던 발타살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따라서 주님의 나라, 즉 온전한 행복, 완전한 사랑에 이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어린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진리를 참 쉽게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십니다. 배웠다는 율법학자나 사제, 바리사이들은 좀처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그랬듯이 그들이 보기에 무식하다고 여겼던 사람들은 그 모든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머리가 복잡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어린이들을 보고 우리와 다른 점이 무엇이 있는지 관찰해보시면 잘 알게 되실 것입니다. 단순하고 깨끗하여 길게 설명해주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믿을 줄 압니다. 어린이를 스승으로 삼읍시다. 그러면 우리가 진리를 찾는 사람에서 진리를 증거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김현태 신부-
옛적에 희랍인들은 지혜를 찾았습니다. 현명한 사람들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들이 추구한 지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세상을 넘지 못하는, 그저 세상에
만족하는 내재적(內在的) 지혜였기 때문입니다.
참 지혜는 위로부터 주어집니다. 인간 지혜는 이런 하강적(下降的) 지혜와
만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이성은 필히 신앙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사는 인간의 지성과 의지로 모두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문제에
부딪힐 때가 바로 그 극단적인 경우에 해당합니다. 제 아무리 용을 써도
무자비하게 생을 짓밟는 저승사자 앞에서 만큼은 모두가 무력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참된 지혜인 그리스도는 지혜를 찾고 찾아도 목말라하는
이승 사람들에게 동아줄처럼 위에서 뚝 떨어진 분이십니다. 그것을 잡고 오르면
구원에 도달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세상의 지혜를 알고 깨달은 사람, 그런 지혜의 한계를 인정하며
천상 지혜를 가감 없이 수용하는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신앙의 눈에 비친
그런 사람은 권력의 자리에서 힘으로 타인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세력가가 아닌
그저 철도 들지 않은 어린애와 같은 존재들인 것입니다
유리잔과 불자동차
- 최용진 신부-
집안에 남자 형제만 있어선지 조카들이 오면 귀여워서 귀찮아 하지 않고 잘 돌봐주었습니다. 그래서 친척들이 모이면 아이들 돌보는 건 항상 제 전담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주는 건 잘할 수 있는데, 떼를 쓸 때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기도 합니다.
어느 날 집에 놀러 온 한 살 된 아이가 한 손에는 인형을 들고 다른 손에는 유리잔을 들고 있었습니다. 전 아이의 손에 들린 유리잔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힘으로 하자니 아이가 울 것 같고, 내버려 두자니 위험하고. 그때 어머니가 구석에 있던 불자동차를 가지고 오셔서 아이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번쩍번쩍하는 불자동차를 본 아이는 그때서야 유리잔을 내려놓고 그 자동차를 잡았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아이들은 양손에 가지고 있는 것만 자기 것으로 느낀다고 합니다. 따라서 다른 것을 갖고 싶으면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다른 것을 가진다고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 수 있고, 더 빨리 가질 수 있고, 덜 손해 볼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는 방법은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내려놓고 손해 보고 희생하는 방법은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악이라고까지 합니다. 아무 손해나 희생 없이 더 많이 가질수록 세상은 훌륭하다고 하고 존경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것을 다 가질 수 있다 하더라도 주님이 주시는 마음의 평화와 행복과 기쁨은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받으려면 아이처럼 먼저 내려놓고 손해 보고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 손해 없이 무엇인가를 갖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우둔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오히려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심’을 감사드린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즐거워하시는 예수
구경꾼
-장재봉신부-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햇순,
그 뿌리에서 움튼 새싹위에 머무르는 주님의 영’.......
오늘 이사야 예언자가 들려주는
하느님 나라는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선명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천국을 구경하니
그리스도인의 행복과 축복이 한껏 느껴져
마음이 벅찹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자존심을 갖는 일에서 비롯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은
힘과 능력만 구하는 오염된 기도를 치우게 합니다.
하느님을 뵙는 깨끗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마음이 깨끗해지면
감사할 상황에서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마음 안에 계신
그분께서
하느님께 감사를 올리는 일을 구경하게 됩니다.
내 생각과 마음 안에서
먼저 하느님의 뜻을 행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모습을 구경하듯
즐기며 살아가니
편안하고 평안하지 않을 까닭이 없습니다.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을 믿는 이의 삶을 세상에 드러내 보여줄 수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처럼
세상에게
천국을 구경시켜줄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구경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에게 공정하신 하느님께서는
세상에서 지혜로운 일쯤은
세상에서 슬기롭다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추어주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 철부지들이 최고라 하시는 그분을 뵙습니다.
더욱이 어느 예언자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임금도 모르게
숨겨두었던
그 복된 것을 보는 사람이라고 이르십니다.
하느님께서 최고라 하셨으니
이는 참입니다.
예수님께서 추켜 주셨으니 누구도 깍아 내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은
그분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일에서 비롯됩니다.
이 존귀함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힘이며 자랑입니다.
내 안에 계신 그분께
전부를 맡겨드린 철부지가 되어
그분께서 이루시는 사랑을
내내
구경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이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새벽을 열며
어떤 책에서 읽은 내용 중에 ‘우산을 잃어버리지 않는 방법’이라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좀 덤벙되어서 우산을 자주 잃어버리거든요. 그래서 유심히 그 글을 보았지요. 그 방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산의 가격이 50만원이면 결코 우산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뭐 이런 답이 어디 있어?’라고 말하면서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지만,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는 말 같습니다.
사실 50만 원짜리 우산이라면 함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맑은 날씨라 할지라도 그 우산을 꼭 들고 다닐 것입니다. 이는 지금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펴보면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문득 ‘주님을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져 봅니다. 과연 주님께 세속적인 가치를 매긴다면 얼마나 매길 수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있는 우리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보다는 내 안에 갇혀서 세속적인 욕심만을 추구하고 있는 우리들은 아니었을까요? 바로 주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우리들의 큰 잘못들인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자들은 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당신께서 직접 뽑은 제자들은 어부나 혁명당원, 세리 등 어딘가 몇 % 부족한 사람들이었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일 정도로 인기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 능력 있고 재주 있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어서 그렇게 형편없어 보이는 제자들을 뽑았을까요?
그들은 분명히 철부지 어린이처럼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변화되더라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 것이 중요하다고 살았던 이들이 이제는 주님을 귀하게 여기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던 것이지요.
이제 우리들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과연 어떤 기도를 바치실지 생각해보세요. 주님을 귀하게 여기기보다는 이 세상의 지식과 재물을 더 귀하게 여기는 우리들을 보면서 과연 감사의 기도를 바치실까요?
이제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주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그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기세요.
빠다킹신부
감사의 마음
-조명연 신부-
결혼한 지 20년 만에야 첫 아이를 가진 부부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많이 기뻐했고,
드디어 아이가 태어났지요. 하지만 이 아기는 정상적인 사람처럼
살 수 없이 허약한 몸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아내는 크게 상심하여 펑펑 울었습니다.
그러자 울고 있는 아내를 안고 남편은 말했어요.
“하느님이 너무 약한 아기를 만드시고, 이 아이를 어디에 보낼까
고민하시다가 우리처럼 아기를 원하던 곳으로 보내면 많이
사랑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고 약하지만 귀한 천사를 우리에게
보내신 거야. 특별히 우리를 더 사랑하셔서 말이야.”
이러한 마음만 갖는다면 이 세상에 감사하지 않을 일이 없지요.
사실 이 ‘감사’라는 단어는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떤가요? 혹시 감사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우리의 마음이 황폐해 있는 것은 아닌지요? 감사라는 단어를 잊으며
산 지가 너무나 오래된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늘 눈앞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 불평과 원망만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는데, 우리는 얼마나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감사와 행복
-김인숙 수녀-
중국 북경은 연평균 강우량이 겨우 50∼150밀리미터가 고작이다. 특히 여름철에는 소낙비 한줄기 구경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은 웬 비가 그칠 기세를 보이지 않아 밤 11시 출발예정이었던 비행기는 다음날 새벽 4시로, 또다시 6시로 변경되었다. 우리는 정말 비행기가 뜰까 걱정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북경 사람들은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라고 인사를 나눈다는데 우리는 그럴 수가 없었다.
비는 간신히 그쳤다. 개찰구를 통과해 기내에 앉으니 ‘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할 정도의 흥분은 아니었으나 그저 앉아 있다는 게 정말 감사했다. 늦은 밤, 무사히 터키 이스탄불에 비행기가 착륙하여 서서히 멈출 때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그 후 우리는 비행기가 착륙할 때마다 박수를 쳤다. 그 흔한 비행기의 이륙과 착륙이 그저 감사하기만 했다.
대림절은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다. 누구를 기다린다는 것은 행복이다. 기다릴 때의 보고픈 마음과 만났을 때의 기쁨 때문이다. 만일 오시는 그분이 두렵고 싫다면 왜 기다리겠는가? 피할 것이다. 기다리는 대림절이 되기 위해서는 올 한 해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신 일들을 찾아보고 깨닫는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 있을 때 그분이 오시는 날을 진심으로 기다리게 될 것이다. 믿음의 시각으로 되돌아보자. 지난 1년 동안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신 흔적이 어디 한 조각도 없겠는가.
나이가 들수록 나는 행복한 수녀로 살고 싶다. 아마 하느님도 내 생각과 같을 것이다. 행복의 정도는 감사의 정도와 비례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의식적으로 감사를 연습한다. 차 한 잔을 함께 마실 때도 자연스럽게 상대방에게 ‘행복을 위하여!’ 하면서 건배를 청한다. 어제는 저녁을 준비하다가 그만 칼질이 어긋나 왼쪽 검지손톱이 달아났다. 그 순간 속이 상하기 전에 얼른 ‘아, 다행이다. 귀퉁이만 나갔잖아. 감사합니다.’라고 나에게 입력시켰다. 충치 때문에 치과를 다니고 있다. 한 달 정도를 한쪽으로만 음식을 씹다 보니 잇몸이 헐고 쥐가 난 것처럼 감각이 둔하다. 그러나 나는 좋은 쪽으로 생각을 돌린다. 훌륭한 의사 선생님을 만난 것도 참 복이라고. 마음의 표현인 감사도 의식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연습이 반복으로 이어져 습관으로 몸에 익숙해지면 나는 지금보다 더 감사하면서 행복한 수녀로 살아가리라 믿는다.
자신을 조금씩 덜어내는 일
-양승국신부-
나이가 조금 더 들면 하고 싶은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선호하는 기술 한 가지 확실하게 익혀 하루 온종일 아이들 곁에서 보내고 싶은 바램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한적한 바닷가에 아이들 집 하나 마련해서 머리 쓰기 싫어하는 아이들만 따로 골라 함께 살며 밥해주는 일입니다. 함께 밭을 일구고 함께 낚시를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추억을 쌓아주는 일이 제 꿈입니다.
살면 살수록 단순한 삶이 얼마나 은혜로운 삶인가를 실감합니다. 비록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매일의 노동이 기다리고 있고, 그래서 매일 땀흘려 일하다보면 하루해가 짧은 소박한 삶이 진정 행복한 삶입니다.
너무 머리 쓰지도 않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 한적한 자연 속의 삶이 별 가치 없어 보이는 삶 같지만 사실 본래 인간 본연의 삶이었고, 정상적인 삶이었습니다.
지나치게 복잡하고 세분화된 사회구조와 인간관계의 틀 안에서 잠시의 여유도 없이 빡빡하게 돌아가는 우리들의 일상입니다. 잠시의 여유라도 있으면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의아심이 들 정도입니다. 할머니들도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일일이 스케줄을 확인하시는 세상입니다. 바쁜 사람이 잘 사는 사람, 유능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에 살다보니 한적함, 단순함, 소박함, 겸손함, 천진함, 동심, 비움, 버림, 떠남과도 같은 단어들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너무도 어색한 단어, 별세계에서나 사용되는 단어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눈만 떴다하면 머리를 회전시키고, 밥만 먹었다하면 복잡한 문명의 바다로 우리의 온몸을 던져버리니 철저하게도 영적인 존재인 하느님을 체험할 여유가 참으로 부족합니다.
이런 우리 앞에 예수님께서는 보란 듯이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기도를 드리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보다 단순하게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보다 여유 있고, 보다 자연스럽게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우리 삶의 여백에, 우리 삶의 주변 어디든 자리잡고 계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조금이나마 인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도록 말입니다.
가난하게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가난하다는 말은 잃을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결국 가난한 사람은 소유의 상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에, 성낼 필요도 없게 됩니다. 결국 가난함으로 인해 자유를 느끼고 가난함으로 인해 영적인 눈이 뜨여 하느님의 손길을 보다 자주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버리면 버리는 만큼 진리와 자유에로 결국 하느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을 닦는 다는 것은 날마다 자신을 조금씩 덜어내는 일입니다.
쫓기듯이 살고 있는 한심한 나를 살피소서.
늘 바쁜 걸음을 천천히,
천천히 걷게 하시며,
추녀 끝의 풍경소리를 알아듣게 하시고
거미의 그물 짜는 마무리도 지켜보게 하소서.
꾹 다문 입술 위에 어린 날에 불렀던 동요를 얹어주시고
굳어있는 얼굴에는 소슬바람에도 어우러지는 풀밭 같은
부드러움을 허락하소서.
책 한 구절이 좋아 한참 하늘을 우러르게 하시고
차 한 잔에도 혀의 오랜 사색을 허락하소서.
돌 틈에서 피어난 민들레 꽃
한 송이에도 마음이 가게 하시고
기왓장의 이끼 한 낱에도 배움을 얻게 하소서.
기~일 게
-민경철 신부-
꼬마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친구! 아빠 전화번호 알아?”
몸을 비틀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신 있게 얘기했습니다.
“1… 기~일게….”
“뭐라고?”
못 알아들어 짜증이 났는지 몸을 좀 더 비틀더니 소리를 지르면서
“1… 길게에에에에~.”
그렇지요. 아빠 전화번호는 휴대폰의 1번을 길게 누르면 되는 것.
엄마 휴대폰에 ‘넘버 원’으로 저장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이와 같이 아빠 전화를 1번으로 알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에게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여긴다면 인간의 머리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지혜를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눈은 말도 안되어 보이는 하느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거든요. 기절초풍할 만한 하느님의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겸손되이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1 기~일게’와 닮아 있습니다.
정말 아릅답구나!
-신금재-
캘거리의 여름은 참 아름답다. 지난 여름에는 어린이집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강가로 갔다. 로키산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유유히 흘러내려오는 강가로 나가면 그 상쾌함이 각별하다. 아이들이 자연을 관찰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오리와 구스가 알을 낳아서 부화시키는 장면을 볼 수 있고, 강가에 댐을 만드는 비버도 자주 볼 수 있다. 떼를 지어 날아가는 구스떼를 바라보며 “정말 아름답구나!” 감탄사를 연발하고, 성가 ‘주 하느님 크시도다’를 흥얼거려 보기도 한다. 빌딩 안에 있을 때는 일에 쫓겨서인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다가 강가로 나오면 비로소 자연의 아름다움이 눈에 보인다. 길 옆으로 줄지어 가는 개미떼, 보라색 엉컹퀴꽃, 그리고 이제 막 싹이 터오는 이름 모를 나무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라고 보고드리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영들이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하고 말씀하신다. 나는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정말 기쁘고 감사하다.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주시고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심에도 또한 감사드린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아갈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대림 제1주간 화요일
- 김성한 신부 -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임마누엘이 곧 오시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합니다.
“그날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이사야, 예리미야, 즈가리아 같은 예언자들은 메시아를 ‘새싹’에 비유했습니다.
히브리어로 새싹은 ‘네제르’인데 가만히 보면 예수님과 마리아의 고향인‘나자렛’이라는 소리와 유사합니다. 새싹이 나자렛 사람 예수라면 이것은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불가능을 뜻하는 죽은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오듯 하느님은 겸손한 자위에 영을 내리십니다. 라틴어로 겸손의 어원은 땅입니다. 땅은 가장 많이 하느님을 닮은 자연이기에 겸손한 자의 기도는 구름을 뚫는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자들과 슬기롭다는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철부지들은 믿음을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그 믿음을 단순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뜻합니다. 그 단순성이야말로 예수님을 만나고 하느님나라를 알아보게 합니다. 지적 교만, 마음의 냉담, 그리고 의지의 완고성이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볼 수 없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지적인 교만을 어린이라는 단순성과 겸손에 대비시키십니다. 마음으로 겸손한 이들만이 참된 지혜와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나라에서 부유하고 지혜로운 사람, 또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이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인정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많은 재산이나 높은 지위, 또 지식 그 자체만 지니고 있어도 부러움을 받습니다만 하느님나라에서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거부되는 이유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거나 그분의 진리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안에 쌓아 놓은 교만때문입니다. 교만이 점점 자신을 크게 만들고 싶어하는 맘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받아들이는데 가장 큰 방해물인 것입니다.반면에 철부지 즉 겸손한 삶을 사는 이는 점점 하느님의 자리를 크게 만들며, 자기 자신의 자리는 오히려 작게 만들고 싶어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받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하느님을 알아보려면 하느님에 대한 나의 필요와 욕구, 그리고 기대치에 대한 전제들을 포기한 곧 자신을 온전히 비운 상태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듣는 자세가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권능은 나약함 안에서 드러납니다.
-한창현 신부-
생활하다보면 자신의 장점 때문에 힘든 경우가 있고, 또 반대로 나의 단점 때문에 오히려 도움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때문에 장점에 대해서 겸손할줄 알고 단점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셨는데 이들이 복음을 잘 선포하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 드리자 예수님이 기쁨에 넘쳐서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드리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 시대는 특별한 시대였습니다. 그 세대는 다른 어떤 세대에 비해 세상에 오신 구세주를 눈으로 직접 뵙고, 손으로 만지고, 그분 말씀을 듣는 특별한 은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푸셨고, 수많은 은혜와 기적도 베풀어주시며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느님 나라 신비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혜롭다는 사람들,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이것을 깨달을 수 없었고, 오히려 역설적으로 철부지 어린이 같은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지혜롭다는 사람들,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불행하다”고 선언했던 부유하고, 권력 있고, 많이 배운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상의 행복한 삶을 끊어버리기가 어렵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가진 재물과 권력과 지식과 명예가 자신들을 지켜주고 미래를 보장해 줄 거라고 믿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마지막까지 매달립니다.
그러나 철부지 어린이 같은 이들은 예수님이 “행복하다”고 선언했던 하느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이들, 박해받는 이들, 슬퍼하는 이들 입니다. 이들은 지상의 것 너머 영원한 하느님의 가치가 있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가진 것에 매달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또 매달릴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단점으로 알고 있던 것이 하느님의 신비를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국 지혜롭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려는 사람들 입니다.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달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신비를 감추십니다. 그러나 철부지 어린이 같은 사람들은 자기의 구원을 하느님께 맡긴 겸손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십니다.
우리도 가끔 ‘내가 모든 것을 이루어 내겠다’, ‘내가 마지막까지 다하겠다’, ‘내 능력으로 구원을 쟁취해 내겠다’는 유혹에 쉽게 떨어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권능은 나약함 안에서 드러납니다.
겸손은 우리가 하느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맡겨드릴 때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우리 안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면 보입니다.
- 이기양 신부-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 주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서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두 가지를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값진 것은 무엇이며 어떤 것을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과,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볼 수 있는 ??눈?‘에 관해서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10,21)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고 게십니다. 하느님의 판단과 인간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많이 배우고, 많이 소유하고, 권력이 높은 사람들이 대접을 받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런 것에 익숙해져 있고 또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가끔 신자들이 이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신부님도 있는 사람을 좋아하고 없는 사람을 불편해 하는 우리들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런 태도는 마치 세례자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미쳤다고 하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먹고 마시기만 한다고 했던 유다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들입니다. 신부들이 검소하게 지내면, 어떤 사람들은 궁상을 떤다고 말하고 조금 센스 있게 지내면 또 사치스럽다고 말합니다. 모두가 자기들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권력이 높거나, 재산이 많거나,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보고 우러러 보는 것이 이 세상 풍조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짜 부유하고 풍요로운 사람은 제대로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또 이웃을 위해서 나눌 줄 아는 사람이 정말로 부유한 사람이고 제가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쥐고 있어도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인색한 사람이지요. 그에 비해서 풍요롭지는 않지만 이웃과 함께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중에 누가 더 부유한 사람이겠습니까? 이웃을 위해 쓸 줄 아는 사람이지요. 하느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여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을 신부가 더 좋아하고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있어서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또 없어서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쓸 줄 알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도 이런 사람을 좋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제가 사람을 대하는 기준은 세상과는 좀 다르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도 똑같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부유하고 지혜로운 사람, 또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이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만이 인정을 받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는 많은 재산이나 높은 지위, 또 지식 그 자체만 지니고 있어도 우러름을 받습니다만 하느님 나라에서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는 순간 모든 것을 다 놔두고 떠납니다. 오로지 남는 것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얼마나 나누고 얼마나 함께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정말 가치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로지 자기와 또 가족만을 위해서만 쓸 줄 알고 꽁꽁 싸 두었다가 그대로 다 놓고 죽어 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어서, 가난하기 때문에 나눌 수가 없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가진 것이 별반 없다 하더라도 그에 맞는 나눔을 실천하고자 노력할 때 오히려 하느님 보시기에는 가장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10,23-24)
중요한 것은 볼 줄 아는 ??눈?‘입니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습니다. 요즈음 제 눈에는 성탄 트리 장식이 제일 많이 보입니다. 이번 구유와 성탄 장식에 대한 구상이 거의 마무리 되어갑니다만 관심이 있으니까 자꾸 눈에 뜨이는군요. 관심이 있으면 보입니다. 관심이 없으면 그냥 스쳐지나가겠지요. 사랑하면 보입니다. 관심이란 사랑의 다른 이름인 것입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루카10,24)
그렇습니다. 옛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가 오시기를 수천 년을 기다렸으나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시대는 하느님께서 오셔야지 볼 수 있는 시대였으므로 예수님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 그 시대에 태어났다고 해도 알아볼 줄 모르고 깨닫지 못하였다면 똑같이 불행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수천 년을 기다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메시아를 알아 본 유다인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제로 아기 예수님의 곁에는 목동 몇 사람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말씀을 전하셨을 때에도 그토록 간절히 하느님 나라를 기다렸던 사람들은 알아듣지도 못하고 알아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입장에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는 이런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자기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늘에서 내린 메시아가 아니라 자기들이 바라고 생각하는 메시아만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욕망에 가득 차고 이기심에 부풀어서 메시아를 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눈이 가리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옆에 와 계신 예수님도 볼 수가 없었는데 이것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에서도 똑같이 해당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본당에서도 똑같습니다.
사목자로서 신자들을 대하면 이 분은 이런 것 때문에 눈이 가려져 있구나 하는 것이 다 보입니다. 미사 중에 성체 분배를 아무리 빨리 해도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느낌이 그대로 다 오는데 그것은 마치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의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그 식구의 기분을 알아맞히는 여러분과 흡사한 것입니다. 성체 분배를 17년간이나 해 왔는데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다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으며, 왜 사목자의 흐름을 따라오지 못하는지 대충 파악이 되지요.
예수님을 보고 만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져도 만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은 각자 개개인의 장벽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의 시기는 언제든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단지 나의 욕심과 굳은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뿐입니다.
3년 전에 저는 성경 쓰기를 하는 우리 신자분들에게서 이런 소리를 내내 들어왔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너무나 편안했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성경 말씀이 죽어있는 말씀인 것으로 알았는데 써 보니까 살아 계신 말씀이었으며 그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나를 움직이신다는 것을 감격에 겨워 써 내려간 <성경 쓰기> 후기담을 피정하는 마음으로 보아왔습니다.
이렇게 <성경 쓰기> 안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누누이 말씀드리고 독려하였지만 실제로 여기에 참여한 신자분은 한 30% 정도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도 마음과 생각이 내 방식대로 굳어져 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이지요. 차라리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이라면 따라 하면서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으며 참 하느님 나라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길이 있을 때 참여하여 그 분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제대로 행하지 않고 불평만 하며 이런 기회를 적대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 가치 있는 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것이며, 그것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의 조건인 것이지요.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마음의 문을 열고 함께 동참하며 기꺼이 최선을 다해 노력할 때 분명 우리가 원하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을 기억하고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보는 눈
-이수철신부-
단순한 삶에 단순한 마음, 단순한 눈입니다.
삶의 깊이는 마음의 깊이이자 눈의 깊이입니다.
삶이 복잡하고 혼란하면 마음도 복잡하고 혼란해져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마음 따라 보는 눈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최소한의 단순하고 소박한 의식주의 삶이 그토록 긴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은,
시간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다만 욕심만이 무한할 뿐입니다.
사실 볼 것 다보고, 들을 것 다 듣고,
읽을 것 다 읽고, 말할 것 다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능력도 시간도 유한하기에 꼭 볼 것만 보고, 꼭 들을 것만 듣고,
꼭 읽을 것만 읽고, 꼭 말할 것만 말하는 게 정작 큰 지혜입니다.
아낀 시간과 정력은 하느님 공부에 쏟는 것입니다.
미사시간,
성무일도시간,
성경독서시간 등 집중적인 하느님 공부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 관상(觀想)에서 흘러나오는 활동(活動)이어야
올바른 삶의 순리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
마음의 눈이 깨끗할 때 하느님을 보고,
삶의 신비도 봅니다.
온갖 욕심이나 잡다한 지식들,
그리고 편견들로 가득할 때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보기는 불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나 독서에서의 이사야의 눈은
하느님의 신비에 활짝 열린 시인(詩人)의 눈이자 신비가(神秘家)의 눈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마음 순수한 철부지들에게 계시되는 하늘나라의 신비입니다.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계시되는 메시아 도래 때의 천상낙원의 비전은
얼마나 아름답고 고무적인지요!
누구나의 눈에 계시되는 이런 천상 낙원의 비전이 아니라
이사야 예언자처럼 하느님의 영에 충만한 순수한 이들에게 계시되는
천상낙원의 비전임을 깨닫습니다.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 깨끗하고 단순할 때 계시되는 천상비전에 행복한 삶입니다.
이런 비전을 지녀야 어둡고 험한 세상 속에서도 별처럼,
꽃처럼 아름답게 살 수 있습니다.
매일 복된 미사를 통해 천상낙원의 비전을 보여주시고,
실현시켜주시는 참 좋으신 주님이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 중에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이들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주님의 시대에 정의가 꽃피게 하소서.
큰 평화가 영원히 꽃피게 하소서.”(시편72,7참조).
아멘.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강영구 신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대에게
저는 한 달에 한 번 “천사들의 어머니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폐아(自閉兒)를 천사(天使)라고 부릅니다.
천사가 어쩌다 길을 잃어 인간 세상에 떨어졌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지식도 쌓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세상살이에 적응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람들과도 어울리지 못합니다.
천사이기 때문에 생존경쟁에 뛰어들지 못하고 영악한 인간들의 무리에 들지도 못합니다.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천사들을 바라봅니다.
모습은 사람이지만 하는 행동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천사의 사고(思考)와 행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천사들의 사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천사들에게는 천사의 길이 있고 천사가 사는 방법이 따로 있습니다.
천사들의 세계는 인간 세상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천사는 천사로서 아름답습니다.
저는 천사들의 어머니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당신들의 가정에 찾아온 천사를 영악한 인간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천사를 천사로 대접하면 천사가 받는 상을 받습니다.(마태오10.40-42)
천사를 낳고 천사와 함께 사는 어머니들은 행복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철부지들 안에 있습니다.(一明)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
-백광현 신부 -
가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혜 앞에서 위대함과 무색함의 두 측면을 보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혜 때문에 갖게 되는 한계를 만나게 됩니다. 어리석고
순수하고 단순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가끔은 자기 논리와 주장이 확실하며,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가는 지식층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편견의 벽을 무안하게
하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웰컴 투 동막골’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린이처럼 순수하고 단순한 동막골 사람들이 안에 평화와 친교가
있었고 나눔이 있었고 용서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환대를 받았습니다. 이들의 단순한 삶이 분노와 적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내고 그 상처를 치유시키면서 새로운 인간, 사랑하는 인간,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바꾸고 그들 안에 참된 평화와 화해를 찾아 주는 것은 힘도 아니었고
이데올로기도 아니었습니다. 순수하고 단순한 인간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이 사랑을 가장 아름답고 단순하게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양승국신부-
<설화(雪花)>
겸손한 사람에게 있어 한 분야의 통달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겸손한 자세로 또 다른 분야에 대한 탐구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무한한 인간의 능력도 발휘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철저한 인간의 한계도 체험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오묘하심과 헤아릴 수 없는 광대함 앞에 승복합니다.
제대로 뜻을 이룬 대학자나 대영성가들이 걸어갔던 깨우침의 길이 그러했습니다.
반대로 ‘날라리’, ‘설익은’ 사람들의 과정은 요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쌓여가는 나이, 알량한 경험, 축척된 나름대로의 전문성, 쌓아올린 업적...이런 것들이 얼마나 그들을 교만하게 하고, 경직되고 완고한 삶에로 이끄는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역설적인 한 말씀을 우리에게 던지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들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문제의 핵심은 ‘롭다는’에 있는 듯합니다.
‘롭다는’ 이라는 의미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 한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혜롭다는 자’들은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지혜와 슬기를 갖춘 사람이 아니라 자칭 ‘지혜롭다는 사람, 슬기롭다는 사람’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자칭 지혜롭다는 사람, 슬기롭다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늘 ‘하느님에 관해서’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직접적인 하느님 체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머리로서, 생각으로서, ‘다른 사람의 지식’을 통해서 연구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연구한 하느님은 단지 연구의 산물일 뿐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하느님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하느님은 신앙의 대상으로서, 따뜻한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책속에 계시는, 상상 속에만 자리 잡고 계시는 너무나 먼 하느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칭 지혜롭다는 사람’에 대한 대구가 되는 단어로 ‘철부지’라는 단어를 쓰시고 계십니다.
철부지의 사전적 의미는 ‘철이 들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눈치도 없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와 ‘슬기’를 전혀 갖추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완전히 반대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합니다.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과 이웃, 세상을 계산적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들 에게는 가식이 없습니다. 그런 그들이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스펀지에 물 스며들듯이 100% 고스란히 그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듭니다.
지복직관(至福直觀)하는 일,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뵙는 일, 메시아를 직접 대면하고 그분이 선포하는 말씀을 직접 듣는 일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늘 꿈꾸어오던 일이었습니다. 조상들에게 있어서도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더 불행한 일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이제 그 오랜 숙원이었던 메시아께서 바로 그들 눈 앞에 생생하게 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묘하게도 그분의 메시아성을 제대로 파악한 사람들은 어린이들이었습니다. 바보취급 당할 정도로 순수하고 정직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들이었습니다. 창녀들이었습니다. 최하층 천민들이었습니다.
결국 지복직관하기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은 영혼의 순수함입니다. 가식을 떨쳐버린 투명한 시선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늘 맑고 투명한 시심(詩心)을 잃지 않으시는 존경하는 오세영 시인께서 최근 새로운 시집을 내셨습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눈꽃처럼 순수한 언어, 순수한 표현, 순수한 사랑을 역설하시는 그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꽃나무만 꽃을 피우지 않는다는 것은
겨울의 마른 나뭇가지에 핀 설화를 보면 안다.
누구나 한 생애를 건너
뜨거운 피를 맑게 승화시키면
마침내 꽃이 되는 법”
(‘설화’ 참조)
“지상에 떨어진 별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더러는 불 타 허공에 사라지고
더러는 죽어 운석으로 묻히지만
나는 안다.
어디엔가 살아있는 별들도 있다는 것을.
깊은 산속 구름 호젓하게 머물다간 자리에
아아,
날개 상해 떨어진 별들이
한 무더기 도라지꽃으로 피어있구나.”
-시집 <꽃피는 처녀들의 그늘아래서> 고요아침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하신 예수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기쁨과 감사기도, 계시말씀, 그리고 제자들에 대한 행복선언으로 짜여져 있다.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뻐하시면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이유를 복음서의 앞선 부분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오늘 복음의 서두가 말하는 "바로 그때"(21절)란 예수님으로부터 둘씩 짝지어 파견된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 각자의 선교활동에 대한 보고를 드리던 때였다.(루가 10,1-20)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악마들이 자기들에게 복종하였던 것에 대하여 기뻐하고 있었다.(17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것보다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것을 더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19절)
예수님의 기쁨과 감사는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곳에 있다. 예수님의 기쁨은 우선 당신께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루가는 예수께서 성령을 받았다고 표현하지만 이는 곧 예수께서 하느님 성령으로 충만하여 계심을 알고 계시다는 것이며, 동시에 하느님 성령으로 충만한 자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오늘 독서가 선포하는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를 통하여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날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주님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주님을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내린다. 그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아, 겉만 보고 재판하지 아니하고 말만 듣고 시비를 가리지 아니하리라. 가난한 자들의 재판을 정당하게 해 주고, 흙에 묻혀 사는 천민의 시비를 바로 가려 주리라. 그의 말은 몽치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의 입김은 무도한 자를 죽이리라.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이고 성실로 띠를 띠리라."(이사 11,1-5)
이사야는 장차 올 메시아가 하느님의 영을 받아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킬 것을 내다보고 있으며, 메시아의 통치는 곧 하느님 성령의 일곱 가지 정신에 기초를 두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하느님 성령의 일곱 가지 정신은 우리가 "성령칠은"이라고 부르는 선물이다: ① 슬기(sapientia/wisdom), ② 통달(intellectus/understanding), ③ 의견(prudentia/counsel), ④ 굳셈(fortitudo/power), ⑤ 지식(scientia/knowledge), ⑥ 효경(respectus/respect), ⑦ 두려움(timor/fear) 이사야는 하느님 성령으로 충만한 예수께서는 정의와 성실로써, 자비와 평화로써 만물이 서로 화해하는 새로운 조화와 질서의 세상을 세우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만물이 화해하는 조화와 질서의 새로운 세상은 어떤 무엇도 아닌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새로운 세상은 이 세상 사람들이 머리에서 짜내 만든 지혜나 책에서 얻어낸 똑똑함이 아닌, 그래서 안하무인이요 오만하며 근시안적이요 자만함이 아닌,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나는 슬기와 효경 같은 하느님의 영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든 계시와 세상구원적 행위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 예수는 제자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분이며, 이미 오셨고, 또 오실 분이시다. 우리도 오늘 바로 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기도드릴 수 있음을 기뻐하며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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