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협주곡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작곡가가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장르이자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었기에 많이 쓰여졌다.
모차르트가 빈에 머물 때의 협주곡들이 그 전형적인 예이며
베토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여러 작곡가들의 협주곡은 바로크 시대의 양식에서 벗어나
소나타 형식을 확립했으며, 이른바 고전파 협주곡의 틀 안에서 작곡되었다.
특히 1악장은 관현악으로 시작하여 그대로 제시부를 마치고, 이어서
피아노가 가세하여 독주 제시부로 들어갔다.
재현부와 코다 사이에는 피아노 독주에 의한 카덴차가 주어졌다.
카덴차는 즉흥적으로 연주하도록 독주자에게 맡겨져 있었다.
이런 구성은 베토벤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었으며, 여러 작곡가들은
이런 틀 안에서 자신의 음악을 펼치기 위해 고심했다.
그런데 베토벤이 이런 전통을 깼다.
우선 독주자에게 맡겼던 카덴차를 작곡자인 베토벤 자신이 직접 써 넣었다.
또한 1악장을 관현악 제시부로 시작하는 전통을 깨고 피아노를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도 초기의 협주곡에서부터 갑자기 혁신적인 서법을 보였던 것은 아니다.
1번과 2번 협주곡에 베토벤이 쓴 카덴차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독주자에게 그것을 반드시 연주하도록 했던 것은 아니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은 후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단순히 카덴차의 즉흥 연주를 폐지하고 피아노를 제시부에
도입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피아노 협주곡 4번 이후에 두드러진 관현악의 충실한
사용은 브람스를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에 의해 교향적 협주곡을 낳게 했다.
또한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에서 보이는 거장적인 피아노 연주
양식은 낭만파 시대에 이르러 한층 더 진척된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작품번호로는 2번보다 앞서지만
실제로는 2번이후에 작곡되었다.
좀 더 손보느라 2번의 악보 출판(1801년 12월)이 늦어지는 바람에
1번이 먼저 세상에 소개된 것이다(1801년 3월).
베토벤은 이 피아노 협주곡 1번에 자신만만하게 "대협주곡" 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그렇다고 이 명칭이 단순히 겉치레로 붙여진 것은 아닌 듯하다.
관현악 편성이 당시의 일반적인 협주곡보다 대규모여서
교향곡 규모라고까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이런 대편성의 관현악에 맞설 수 있는 피아노 사용법에서
이미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피아노 소나타 제4번" 과 "피아노 소나타 제7번" 의 세 곡의 피아노
소나타에서 기존 피아노에는 없었던 새로운 피아노 서법을 개척했고,
이 무렵 피아노의 대가로 인정받고 있었던 터였다.
이 곡은 베토벤이 빈에 체류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은 1794년경에
스케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1795년에 완성되었다.
초연 날짜는 확실하지 않으나, 1798년 세 번째 프라하 여행 때
콘빅트잘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작곡가 자신이 직접 연주했던 것이
초연으로 보인다.
이 곡은 바르바라 오데스칼키 후작부인에게 헌정되었다.
그녀는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연주
실력을 뽐냈다.
체르니에 의하면 베토벤은 그녀를 사랑했다고 한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형식적으로는 모차르트 양식의 고전 협주곡의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모차르트 이외의 선배 작곡가들에게 받은
영향도 보이기는 하지만, 베토벤의 특유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곡의 1악장을 위해 3종류의 카덴차를 남겼다.
그러나 이 카덴차는 초연 후에 한동안 연주되지 않았다.
카덴차의 최고음을 당시의 피아노가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