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풍금이 울릴 때
박남준 시인의 ‘우리 시대 편지론’
| 제25호 | 20070902 입력 l중앙 SUNDAY
편지가 사라지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는 이 시대에 편지 얘기를 합니다. 편지는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그래도 마지막 남아있는 사다리 같은 것이라고.
중앙SUNDAY가 우정사업본부와 함께 만든 우편엽서 여섯 종. 중앙SUNDAY의 문화섹션 MAGAZINE 표지에 실렸던 구본창 사진작가의 작품을 담았다.
맴맴, 가을 하늘이 동그랗고 파란 것은요, 고추잠자리가 빨간 고추를 먹고 너무너무 새파랗게 매워서 맴맴, 그 하늘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죠, 뭐.
맴맴,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빨랫줄에 앉았다. 내가 다가가다 발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보니 그 큰 눈망울을 띠리릭 띠릭 굴리며 갸우뚱거린다. 고추잠자리가 묻는다.
“너 아주 옛날에 키가 나처럼 작은 고추만 할 때 할머니의 헌 대나무 광주리 살을 슬쩍 빼내어 잠자리채를 만들고 거미줄을 걸쳐 나를 잡으러 쫓아다녔던 개구쟁이 그 아이 맞지. 아직도 날 잡고 싶은 거야? 꽁무니에 보릿대를 밀어넣거나 실을 묶어 가지고 놀고 싶은 것이니?”
그때 어린 날의 잠자리들에게 사과하고 싶다. 이제 나는 그 여름날의 풀밭 위를 뛰어놀던 아이의 시절을 훌쩍 넘겼다. 나는 바람 부는 언덕 위 나이테가 중년의 똥배처럼 늘어난 나무이거나, 서리를 맞은 억새처럼 서걱대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들을 기다리는 쪽에 훨씬 가깝다. 그리하여 가을이 오는 길목 풀잎처럼 엎드려 편지를 쓴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대의 곤한 날개 여기 잠시 쉬어요
흔들렸으나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작은 풀잎이 속삭였다
어쩌면 고추잠자리는 그 한마디에
온통 몸이 붉게 물들었는지 모른다
처서가 지나면 극성스럽던 모기도 입이 비뚤어져서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더위가 한풀 꺾이고 물러간다는 처서가 지나고 밤사이 그 내린 이슬이 맑은 가을아침 햇살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는 백로가 멀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날이 무덥다.
그러나 비록 덥기는 하지만 세상에 어느 누가 있어 어찌 계절이 오고가는 대자연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집 뒤 밤나무 숲에서는 지난여름 알을 품고 새끼들을 키우던 새들의 날갯짓이 저마다 분주하다.
저것들, 꾀꼬리와 파랑새 무리들, 가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겨울이 오기 전 따뜻한 남쪽을 향하여 머나먼 길을 떠나기 위해서 으쌰으쌰 푸르릉 푸르륵 어린 날개들이 힘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강남으로 돌아가기 위한 고된 비행훈련을 하다가 쉬는 시간이면 앞마당 전깃줄 위에는 제비들이 앉아서 재잘재잘 이야기꽃을 피우는 소리도 자못 요란하다.
그래 가을이야. 벌써 가을꽃들이 환한 창문을 열어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개미취가 연보랏빛 치마를 꺼내 입고 배시시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오늘 아침 자주색 옷고름을 슬쩍 풀며 국화꽃 한 송이 파란 하늘을 열고 있다. 그 파란 하늘 아래 곧 눈송이처럼 하얀 억새들이 피어날 것이다.
내 노래를 듣고 있나요
바람의 춤을 추며 손짓하는 억새들의 춤사위
당신을 위한 기다림으로 나를 온전히 피웠으니
들어 보아요
나 이제 새하얀 백발의 노래 당신께 드려요
비가 오는 날, 그런 날이면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드려 옛날을 불러내곤 했다. 사진첩의 빛바랜 기억들을 더듬어 보기도 했으며 닳고 낡은 편지뭉치들을 꺼내 아련한 안개 속을 몽유처럼 걷기도 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편지를 쓰고 싶은 사람이 있다. 부모님 전 상서, 이렇게 제목을 붙여 편지를 쓰던 날들이 있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청춘의 고통스러운 무게로 인해 날마다 유서를 쓰던 불면의 밤이 있었다. 언젠가는 돌아가신 아버지께, 외할머니께 편지를 써야겠다. 귀밑머리 희끗거리는 중년의 문장이 아닌, 어린아이처럼 징징거리며 떼를 쓰듯이 편지를 써야겠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편지를 쓰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내게 문학의 눈을 띄워주었던 법성포 중학교 2학년 때 국어선생님, 그리고 또한 내게 나무와 풀꽃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시던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 지금껏 내가 써왔던 편지들은 어쩌면 내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거기 내 정신의 한 지주가 되어 지금껏 떠나지 않은 한 사람이 있다.
내가 태어나 태를 묻고 자란 작은 바닷가마을 법성포, 거기 초등학교 3학년 김용문 담임선생님은 내게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은 나를 따로 불렀다. 선생님은 풍금을 치며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동요를 들려주었다.
내 기억 속에 선생님은 딱 일년 동안 법성포 초등학교에 계셨다. 3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고 내가 4학년으로 올라갔을 때 선생님이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가셨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안녕이라고 손을 흔들어 주지도 못했는데 그 후로 영영 만나 뵐 길이 없었다.
어디 계신지요. 선생님, 아마 선생님은 무수한 제자들이 있어서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제가 철이 들고 기타를 치며 팝송을 주절거리던 젊은 날이 지난 어느 때 동요를 혼자 웅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동요와 함께 까맣게 잊혀졌던 얼굴, 바로 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소라 껍데기에 귀를 대고 귀 기울이면 파도 소리가 철썩거리듯, 동요를 부르고 있으면 제 귀에는 선생님의 풍금소리가 지금도 들려옵니다. 환청인가? 그 소리는 너무도 생생하여 가끔은 노래를 부르다가 멈추고는 숨죽이며 그 소리를 따라가기도, 두리번거리기도 합니다.
사실은 환청일지도 모릅니다. 언제부터인가 제 귓속에 누가 들어와서 들려주고 있는지 풍금 소리나 첼로 소리가 끊임없는, 알 수 없는 이명현상이 좀 있거든요. 그리고 또 고백하건대 저는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술을 어느 정도 마시고 취기가 도도해져야만 노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 환청 같은 소리가 술 때문인가 했습니다만, 술이 취하지 않았을 때도 또렷이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 어린 날에도 남들 앞에 나서면 얼굴이 빨개지고 말을 더듬거리던 습관은 아직도 남아서 술이 취하지 않으면 좀처럼 노래를 부르는 일이 지금도 여간 쑥스럽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따라 부르게 하던 그 동요들을 부르면 거기 선녀들이 건너간 고운 무지개다리가 걸리고 모래성이 하나 둘 파도에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며 해당화가 곱게 핀 바닷가가 떠오릅니다.
그때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과 찍은 가을 소풍사진에는 선생님은 윗저고리 잠바를 벗어 왼쪽 어깨 뒤로 걸치고 저는 열중 쉬어 차렷 자세로 서서 웃음을 참느라 입을 합죽이처럼 합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을 보니 연예인들이 옛 친구를 찾거나 어린 시절 보고 싶은 선생님을 찾는 방송을 하는 프로그램이 있더군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나도 저런 프로에 출연하면 선생님을 찾을 수 있을 텐데 하고 말입니다.
참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몇 해 전인가 우체국 앞을 지나가다 본 현수막에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5월 스승의 날 무렵이었나 봅니다. 스승의 날 옛 선생님을 찾아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전화를 하고 연락을 기다렸습니다만 찾을 수 없다는 전화 한 통이 걸려왔을 뿐이었습니다.
보름 전쯤에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을 가서 헤어진 강창구라는 친구를 찾기도 했습니다. 그 친구도 제가 친구 찾기라는 우체국 앞 현수막을 보고 연락을 했었는데 찾을 수 없었던 무척이나 보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지리산 자락으로 찾아온 서울에 살고 있다는 친구를 무려 40여 년 만에 만났지만 만나는 순간 바로 알아보겠더군요.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똑같았습니다.
선생님과 찍은 사진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마 선생님께서는 정년퇴직을 하시고 지금쯤 60대 후반쯤의 연세가 되셨겠지요. 저는 벌써 머리가 반백이 다 되었습니다.
선생님을 만나 뵈면 술도 한잔 나누고 싶고 무엇보다 선생님의 풍금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러보고 싶습니다. 노래를 부르다가 가끔은 틀렸다면서 제게 다시 노래를 들려주며 야단도 치시겠지요. 저도 두 손을 가슴 어름쯤 모은 채 옛날의 아이로 돌아가서 말입니다. 그 풍경을 그려보니 웃음이 나옵니다. 하하.
보고 싶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내 어릴 적 초등학교 3학년 김용문 선생님.
이 편지가 전해져 선생님을 만나 뵐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선생님이 이 편지를 못 보시더라도 누가 누가 선생님께 연락을 해주어서 이미 잊혀지고 가물거리는 옛 기억을 더듬어 아하- 그때 그런 아이가 있었지 하고 무릎을 치셨으면 좋겠다. 강을 건너 달려갈 텐데, 산을 넘어 뛰어갈 텐데, 새처럼 훨훨 꿈길처럼….
사랑은 어쩌면 닮아간다는 것
동그랗게 동그랗게 모나지 않는다는 것
안으로 안으로 깊어진다는 것
그리하여 가득 채웠으나 고집하지 않고
저를 온통 비워낸다는 것
당신을 향해 물들어 간다는 것이다
이다지 붉게도 익어간다는 것이다
작은 씨앗 하나가 자라 허공을 당겨 나아갔듯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여 간다는 것
처음처럼 맨 처음 씨앗의 그 간절한 마음처럼
내게 아직껏 티끌 먼지만큼의 동심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선생님이 내게 들려주던 풍금 소리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문밖은 가을 풀벌레 소리, 이 가을 내내 나는 뜰 앞을 지나는 바람 소리에도 혹시 행여 하고 가슴을 두근거릴 것이다.
박남준씨는 일찌감치 ‘돈을 쓰지 않는 삶을 선택하면,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는 한 소식을 깨친 시인입니다. 전주 모악산 자락에서 살다가 최근 지리산 골짜기 악양 동매마을로 이사해 여전히 ‘관값’이라 부르는 장례비 200만원만 지니고 ‘풀여치’처럼 삽니다. 시집 '풀여치의 노래''적막'산문집 '꽃이 진다 꽃이 핀다''박남준 산방 일기'를 펴냈습니다.
박남준 시인은
1957년 법성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고향은 강원도 횡성이고 어머니는 이북이다. 그때문인지 시인의 억양은 전라도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전주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1984년 『시인』 제2집에 「할메는 꽃신 신고 사랑노래 부르다가」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6년 뒤에 첫 시집을 나왔고, 시집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1990), 「풀여치의 노래」(1992),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1995),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2000) 등과 산문집 「쓸쓸한 날의 여행」(1993), 「작고 가벼워질 때까지」(1998), 「별의 안부를 묻는다」(2000), 「나비가 날아간 자리」(2001), 「꽃이 진다 꽃이 핀다」(2002) 등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전주사람들은 잘 알지만 타지역 독자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시인의 민주화 운동 이력이다. 전주에서는 ‘지역문화운동의 대부’로도 통하고 있다. 서울의 ‘괜찮은’ 직장에서 1년 정도 일하다가 잠시 쉴 요량으로 모악산 자락 빈 집에 이부자리를 폈다가 ‘참 좋아서’ 아예 둥지를 틀어버렸다.
최영미 시인은 박남준의 『그 숲에…』 시집을 소개한 발문에서 “(술집에서 박시인의 노래를 듣고 난 뒤)이건 거의 예술이로군, 감탄한 동시에 나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아, 이 인간이 여자께나 홀렸겠군. 순진한 사람 많이 잡았겠군.”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시·서·화에 능통하고 노래까지 잘 부르는 만능 시인이 박남준이었던 것이다.
원문보기 : 파란 지식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