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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최대 규모 ‘이불병립 마애불’ | ||||||||
왕과 왕비인가, 미륵불과 미륵보살인가 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있는 파주 용미리마애불(보물 제93호)은 장지산 중턱의 거대한 바위 면에 조성되어 있다. 자연 암벽을 이용한 까닭에 전체적인 신체 비례가 잘 맞지 않고, 생략된 부분도 많으나 바위 자체의 괴량감에 힘입어 전체적으로 위풍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도 있다. 무교적(巫敎的)인 바위 신앙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지금까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955년에 불상에 새겨진 명문이 발견되어 조선시대에 조성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원형 보관-남자상, 방형 보관은 여자상 표현 연꽃줄기 든 ‘중생중품’.‘합장’ 手印도 흥미 오른쪽 불상은 왼쪽 불상의 ‘협시불’일수도…
용미리마애불은 이불병립 형식으로 조성된 불상이다. 두 불상은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이나 대조사석조미륵보살입상처럼 모두 이마보다 턱 부분이 거의 방형에 가까운 얼굴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정면에서 보아 왼쪽에 있는 불상은 위에서 예로 든 두 불상과 비교하면, 손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이 비슷하다. 이런 형태의 수인은 이 불상이 미륵보살로 조성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낳게 하는데, 앞으로 언급되겠지만 불상에 새겨져 있는 “來彌勒如來(내미륵여래)”라는 명문도 이 불상이 미륵불일 가능성을 높여 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두 불상과 관련해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시대 선종이 자식이 없어 걱정하던 차에 후궁인 원신궁주(元信宮主)가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다.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사는 사람들인데 매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말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에서 깬 궁주가 이상히 여겨 왕께 고하자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 사실을 알아보게 하니,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두개가 나란히 서 있다는 보고가 왔다. 이에 왕은 즉시 이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설에는 두 불상이 왕과 왕비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고, 미륵불과 미륵보살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나라 마애불을 보면 암벽이 가진 자연적 조건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가능한 한 인공의 수고를 더는 방향으로 작업한 흔적이 많이 눈에 띈다. 그러나 용미리 불상의 경우 합장한 손 모양을 표현하기 위해 손 부분만 남기고 주변의 나머지 부분을 모두 파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서까지 합장인을 구현하려 했던 이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어떤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이 불상의 조성 연대는 앞서 말한 대로 고려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판단의 근거는 이 불상이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된 마애불 또는 석조 거불(巨佛), 예컨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대조사 석조미륵보살 입상 등과 유사한 양식을 보이고 있고, 또 이 마애불상과 원신궁주, 그리고 그의 아들 한산후(漢山候)에 얽힌 기자(祈子) 전설의 시대 배경이 고려의 선종 대라는 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1995년에 불상의 몸체와 뒤편 바위에서 명문이 발견되면서 이 마애불이 조선시대불상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명문은 세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제1명문에 “世祖大王往生淨土 來彌勒如來”라고 적혀 있었고, 제3명문에는 성화(成化)1년(1465)7월에 태인군 부인 이씨, 대비구니 도명, 정경부인 이씨, 전(前) 중흥사 주지대사 등의 이름이 보이는 발원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마애불의 조성연대가 조선 세조 11년이라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2004년 불교미술사학회에서 발표 된 한 논문에서도 ‘조선시대 조성설’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이 논문에서는 명문에 기록된 연대를 ‘성화7년(成化七年)’으로 판독하고 있다. 이렇게 두 논문에서 밝힌 연도가 서로 다른 것은 ‘七’자의 제2획이 마멸되어 ‘一’자처럼 보였거나 ‘一’자가 ‘七’처럼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된다. 어찌되었건 이 연대를 기준으로 한다면 이 불상의 만들어진 시기가 조선시대가 된다. 불상의 조성시기를 조선시대로 보는 또 하나의 이유로서, 서울과 개경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있는 이 거불(巨佛)에 대한 기록이 조선 후기 문헌에만 나타날 뿐 그 이전에 발간된 각종 지리서나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마애불이 무속적인 바위신앙과 관련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바위신앙은 자연의 바위 그 자체, 또는 사람이 손질을 한 바위를 신격화하여 숭앙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용미리마애불은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바위의 불변하는 영속성, 단단한 겉모양, 내재된 거대한 힘과 드높은 위의(威儀)에 의탁하여 현실적 기원을 성취하려고 한 바위신앙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적지 않게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의지나 소망을 담은 글자나 문양을 바위에 새겨 넣는 행위의 저변에는 바위가 가지고 있는 주술적인 힘에 의해 소망이 성취된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용미리마애불과 그 주변에 새겨진 ‘世祖大王往生淨土’, ‘來彌勒如來’라는 명문은 세조 대왕의 극락왕생과 더불어 미륵불의 하강을 바라는 불교적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런 기원을 담은 글을 바위에 새겨 성취되기를 바라는 행위 자체는 무속적 바위신앙의 색채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 무속의 바위신앙은 선사시대의 고인돌이나 선돌 같은 삶터에 조상한 거석문화에서도 그 전통을 엿볼 수 있다. 선돌은 구체적인 인물 형상의 이미지를 새겨 넣은 장승이나 벅수로 변하기도 했고, 남성의 성기모양인 성석(性石)이 되기도 했다. 또 부처의 모습을 한 민불(民佛)의 사례도 있고, 돌미륵, 미륵님 등으로 부르면서 자연석의 선돌에 미륵의 불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용미리마애불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 불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허 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불교신문 2250호/ 8월2일자] 2006-07-29 11:29 / 송고 |
첫댓글 따로 올려놓은 바위(머리부분)가 어찌 비바람 긴 풍상에도 넘어지지 않고 저리도 꿋꿋할꼬. 자료 잘 읽었습니다. 부지런도 하시지...
저도 감사!
보충자료,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