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동은 철의 사나이다. 11월 9일 현재 통산 425경기 출전으로 K리그 필드 플레이어 가운데 최다 출전이다.(사진 선원익)
포항 스틸러스의 미드필더 김기동(35)은 4월 29일 포항스틸야드에서 K리그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이날 대구 FC와 K리그 8라운드에 뛰어 통산 402경기 출전으로 신태용(37, 전 성남)의 최다경기 출전 기록(401경기)을 깼다. 앞서 김병지(37, 465경기)가 최다 출전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러나 김병지는 체력 부담이 적은 골키퍼로 특수 포지션이다. 경기마다 10km가 넘는 거리를 뛰어 다녀야 하는 김기동에게는 의미 있는 기록이었다. 김기동은 이날 0-1로 뒤진 전반 29분 황진성(23)의 패스를 받아 골을 넣으며 기록 달성을 자축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난 뒤 ‘기록의 사나이’답지 않게 김기동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포항이 후반 들어 이근호(22)에게 연속골을 내주며 대구에 1-3으로 졌기 때문이다. 4월 4일 전북 현대에게 1-3으로 패한 뒤 8경기(3무5패)째 승리를 맛보지 못했다. 정신력 강화를 위해 기나긴 합숙이 이어졌지만 이날도 무승의 사슬을 끊지 못했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렇지만 6개월여 뒤 최악의 부진을 겪던 포항은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섰다. 플레이오프에서 울산 현대, 수원 삼성 등이 포항에 무릎을 꿇었다. 철저한 상대팀 분석과 뛰어난 용병술을 발휘한 세르지오 파리아스(40) 감독의 지도력이 높게 평가됐다. 여기에 흔들리던 포항의 중심을 잡은 ‘맏형’ 김기동의 힘도 배어 있다. 포항 선수들도 “포항의 오름세에는 감독님의 역량 못지않게 (김)기동이 형의 힘이 컸다”고 입을 모았다.
그제서야 김기동의 입가에도 미소가 살며시 떠올랐다. 특유의 넉살도 되살아나며 만족스러운 눈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그렇지만 김기동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게 서른 중반을 넘어선 노장의 말이다.
1991년 김기동과 2003년 김기동
“아직도 날 잘 몰라 보는 팬들이 있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낫다. 프로 데뷔 땐 김기동이 누군지 아무도 몰랐으니까.” 김기동은 1991년 충남 당진 신평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이 아닌 프로의 길을 택했다.
이제는 고교 출신 선수들의 프로행이 일반화됐지만 당시에는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최문식(36), 박철우(42) 외에는 대부분이 대학 졸업 선수였다. 더구나 신평고는 축구 명문고가 아니었다. 김기동이 창단 멤버인 신생팀이었다. 김기동은 철저한 무명 선수였다.
당시 프로팀에 입단하기 위해서는 신인드래프트를 거치거나 테스트를 통과해야 했다. 김기동은 후자의 길을 걸었다. 5순위 대접으로 포항의 유니폼을 입었다. 손에 쥔 계약금은 1천만 원이었다. 1순위였던 박태하(39)의 계약금이 3천만 원이었다. 2천만 원 차이는 컸다. 4살 이상 차이가 나는 선배들과의 경쟁은 쉽지 않았다. 1군에 김기동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결국 김기동은 2군에 소속했다. 당시 포항의 1,2군은 현재 K리그 팀들의 1,2군과 차이가 크다. 재능 있는 어린 선수들의 잠재력을 키워 1군에 올리기 위한 곳이 아니었다. 1군에 오를 수 있다는 기약도 없었다. 2년 동안 구슬땀을 흘렸으나 아무 것도 나아진 게 없었다. 1군 경기 출전 기록은 없었다.
1992년 포항이 K리그 정상에 올랐다. 박태하와 홍명보(38)가 우승의 주역이었다. 홍명보는 시즌 최우수선수상을 받았고 박태하는 시즌 베스트11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그 자리에 김기동은 없었다. 그리고 기쁨도 없었다. 김기동은 “함께 운동하지 않는 등 2개의 팀이 따로 운영됐다. 1,2군 선수들 사이에는 동료 의식이 없었다. 다른 팀 선수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솔직히 우승에 대한 감흥이 있을 리 없었다”고 말했다.
김기동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1993년 유공(현 제주 유나이티드)으로 이적했다. 그해 9월 18일 안양 LG(현 FC 서울)전에서 김기선(38)과 교체 투입돼 뒤늦게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그리고 1994년 10월 발레리 니폼니시(63) 감독을 만나면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윤정환(34), 윤정춘(34), 이을용(32) 등과 함께 황금 미드필드 라인을 구축했다. 축구 관계자들 사이에 살림꾼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유공 이적이 김기동에게 성공의 길을 열어 준 것이다.
10년 뒤 김기동은 포항으로 돌아왔다. 2003년 자유계약선수(FA) 신분을 얻은 김기동은 “도와달라”는 최순호(45) 감독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김기동은 “프로 입단 당시 최감독은 현역 막바지였다. 플레잉코치를 겸해 2군에서 친하게 지내 입단 제의를 뿌리칠 수 없었다. 포항에서의 2군 생활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었다. 정 때문에 돌아왔다”고 설명했다. 친정팀에 돌아온 김기동의 기량은 더욱 향상됐다. 김기동은 “부천에 있을 때보다 마음이 더 편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경기력도 더 좋아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기량뿐만 아니라 팀 내 입지도 12년 전과 완전히 달랐다. 주전 미드필더로 포항 전술의 중심에 섰다. 왼팔에는 주장 완장을 찼다. 막내에서 맏형이 됐다. 그리고 김기동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 김기동은 “이젠 포항 시내를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나를 알아본다. (이)창원이 등 후배들이 나랑 같이 밖에 나가야 자신들을 알아본다며 부러워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중년 장사 ‘지동’
축구 지도자들의 김기동에 대한 평가는 “팀 내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선수”“없어선 안 될 소금 같은 선수” 등 비슷비슷하다. 그리고 “꾸준한 플레이와 뛰어난 체력의 소유자”라는 평가가 뒤따른다. 김기동은 성실하다. 왼쪽 무릎 부상으로 4개월 동안 쉬었던 1997년 이후 해마다 25경기 이상 출전했다. 11월 9일 현재 올시즌 35경기를 뛰어 팀 내 최다 출전 선수이기도 하다.
팀 내 체력 테스트에서도 늘 상위권에 든다. 체력 테스트가 실시되는 날이면 김기동은 후배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대다수 선수들이 “(김)기동이 형만큼 뛰어야 하는데 큰일 났다”고 아우성이다. 박원재(23)는 “서른 중반인데도 뛰는 양에선 포항 선수단 가운데 가장 많다. 난 엄두도 못 낸다”고 말했다. 김기동은 이에 대해 “1등도 아닌데”라며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김기동이 선천적으로 체력이 좋은 건 아니었다. 신평고 시절에는 달리기도 제대로 못했다. 골키퍼와 달리기를 해도 질 정도였다. 체력과 지구력이 부족하다 보니 경기마다 다리에 쥐가 나 반경기밖에 소화하지 못했다. 반쪽짜리 선수였다. 당연히 포항에 입단했을 때도 달리기 꼴찌는 김기동이었다. 코칭스태프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프로선수 수준의 체력을 만들라는 지시였다. 팀 훈련 외에 포항 시내 산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르내렸다. 턱 밑까지 숨이 차는 힘겨운 나날이었다.
“이 고비를 못 넘기면 영원히 안 된다”는 굳은 의지로 버텼다. 효과는 있었다. 1년 뒤 체력 테스트에서 중위권에 오르더니 그 이듬해에는 가장 오랫동안 달리게 됐다. 김기동은 “꾸준히 운동을 하면서 체력을 유지하게 됐다. 어려운 시기가 와도 그 때를 떠올리며 버텨낸다”고 말했다.
김기동의 몸 관리는 K리거 가운데 최고다. 1997년과 2004년 왼쪽 무릎을 다친 이후 큰 부상도 없다. 몇몇 후배들은 “하루 두 경기는 거뜬히 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올시즌 주 2회의 살인적인 일정 속에서도 김기동은 아무 탈 없이 뛰었다. ‘무쇠 체력’ 김기동도 힘들 때가 있다.
김기동은 “경기를 뛰고 나면 누구나 다 힘들다. 회복 속도를 빨리 하는 게 중요하다. 경기 다음 날에도 운동할 수 있는 몸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나이가 많아 젊은 선수들보다 회복 속도가 처진다. 몸 관리에 더욱 신경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기동은 담배를 피운 적이 없다. 시즌 중에는 술을 가급적 입에 대지 않는다. 특별한 자리가 있어도 맥주 1,2잔을 넘기지 않는다. 그리고 매일 오후 10시 전에 잠자리에 들어 다음 날 오전 7시 30분 전에 일어난다.
음식도 가려 먹는다. 청량 음료와 과자는 절대 먹지 않는다. 경기 도중 갈증을 느낄 땐 아내가 만든 오미자차, 복분자차를 마신다. 그라운드에 김기동 전용 음료가 놓여 있다. 김기동은 “스스로 터득한 건 아니다. 2군에 있을 때 당시 주장이던 허태식(46) 선배를 보고 많이 배웠다. (허)태식 선배는 몸 관리를 정말 잘했다”고 기억했다.
김기동은 체력만 뛰어난 게 아니다. 그동안 윤정환과 따바레즈(24)에 가려졌으나 미드필더의 기본기인 패스에도 상당한 소질을 갖고 있다. 파리아스 감독이 김기동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보이는 건 김기동의 패스와 수비 때문이다. 박태하 코치는 “(파리아스 감독은)노장에 대한 예우 차원이 아닌 오로지 실력으로 평가해 (김기동을)경기에 내보낸다”고 설명했다.
포항의 올시즌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김기동의 패스는 돋보였다. 전방으로 찔러주는 패스는 간결하고 정확했다. 포항 공격의 출발점은 늘 김기동이었다. 10월 28일 울산과 치른 준플레이오프에서는 후반 31분 이광재(28)의 결승골을 도와 2-1 승리를 이끌었다. 울산의 오장은(22)과 박병규(25)가 순간적으로 내준 공간을 절묘하게 파고 든 스루 패스였다. 따바레즈는 김기동을 평소 “지동”이라고 부른다. 지동은 프랑스 출신 미드필더 지네딘 지단(36)과 김기동의 합성어다.
김기동은 “경기의 흐름을 타며 플레이를 하다 보니 패스가 더 잘 되는 것 같다. 패스는 미드필더로서 당연히 갖춰야 하는 기본기 아닌가”라며 겸손해 했다. 김기동의 날카로운 패스는 하루 아침에 완성된 건 아니다. 젊었을 때부터 해온 많은 훈련의 결실이다. 김기동은 평소 개인 훈련을 갖고 패스를 집중적으로 다듬었다. 거리를 벌려가며 벽을 향해 볼을 차고 재빠르게 볼을 키핑하는 훈련이다.
김기동(오른쪽)은 팀 내 궂은 일을 도맡아 한다. 수비뿐만 아니라 공격 재능도 있다. 최전방으로 연결하는 패스는 날카롭고 정확하다.(사진 선원익)
김병수(37) 포항 기술부장은 “국내에서 첫 번째 볼 터치가 가장 좋은 선수가 김기동이다. 볼 터치를 잘 하니 패스를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김기동의 패스는 깔끔하면서 날카로운 맛이 있다”고 평가했다.
이루고 싶은 꿈
김기동은 11월 9일 현재 통산 425경기에 출전했다. 필드 플레이어 가운데 1위다. 당분간 김기동의 기록은 깨지기 어려워 보인다. 뒤쫓는 선수 가운데 김현수(34, 383경기)와 최진철(36, 312경기)은 올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황연석(34, 348경기)과 이장관(33, 348경기), 이병근(34, 324경기), 김진우(32, 310경기)는 최근 들어 팀 내 주전 경쟁에서 밀려 출전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
김기동의 목표는 500경기 출전이다. 앞으로 3년 동안 해마다 25경기를 뛰어야 가능하다. 2010년이면 김기동은 38살이 된다. 또 올시즌을 끝으로 계약기간이 끝난다. 그렇지만 김기동의 팀 내 입지는 탄탄하다. 포항은 김기동의 팀 공헌도를 인정하고 있다. 김기동은 3년 계약 연장을 희망하고 있다. 김기동은 “처음엔 (신)태용이 형의 기록을 깨는 것을 목표로 달려왔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목표를 상향 조정해야겠다. (500경기 출전에)욕심이 생긴다”고 말했다.
김기동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는 팬이 있기도 하지만 반대로 후배들의 길을 막는다며 비판을 하는 팬도 있다. 김기동도 이를 모르는 바 아니다. 프로는 오로지 실력으로 겨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김기동은 “나에 관한 기사를 인터넷을 통해 자주 살펴 보는 편이다. 댓글을 보면 ‘혼자 다 해먹고 후배들에게 길을 안 열어준다’는 지적이 많다”며 “그렇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이가 많아 뛰는 게 아니라 감독이 내가 필요해 기용하는 것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나를 넘어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내가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보다 후배들이 노력해서 내 자리를 뺏어야 한다.”
김기동은 이루고 싶은 꿈이 많다. 그동안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현역 K리거 가운데 프로 입단 후 가장 오랫동안 우승을 못 해본 선수다. 지난 2000년과 2004년 각각 부천과 포항 시절 준우승에 머물렀다. 김기동은 이에 대해 “‘올해엔 우승해야죠’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었다. 그렇지만 사실 난 K리그 우승 외에도 해보고 싶은 게 정말 많다”고 말했다.
프로 17년째인 김기동은 K리그에서만 활동했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무대는 꿈 같은 세계였다. 그렇지만 새로운 세계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포항은 K리그와 FA컵 모두 결승에 올라 있어 한 마리 토끼만 잡아도 내년에 아시아 무대를 누빌 수 있다. 김기동은 “한 번도 AFC 챔피언스리그 무대를 밟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나가고 싶다. 나아가 우승해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 월드컵에 출전해 세계 명문 클럽과 겨뤄보고 싶다”고 말했다.
상복도 없다. 2002년 전 경기(35경기) 무교체 출전으로 특별상을 받은 게 유일한 개인상이다. 시즌 베스트11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올시즌에는 최우수선수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 규정에 따라 팀당 1명의 후보만 나설 수 있어 따바레즈를 먼저 넘어야 한다. 김기동은 “내가 형인 데다 앞으로 뛸 날도 많지 않으니까 (따바레즈가)양보했으면 좋겠는데”라며 웃어 넘긴다.
“이 모든 꿈들을 포항에서 이루고 싶다”는 게 김기동의 소망이다. 선수 생명을 1,2년 더 연장하려고 다른 팀으로 떠나는 건 기록을 늘릴 수는 있어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김기동은 “다른 팀 이적보다는 포항과 재계약하고 싶다. 프로 첫 팀이라는 애착심이 있다. 3년 뒤 명예롭게 은퇴해 포항의 전설, 나아가 K리그의 전설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짧지만 강렬했던 태극 마크 경험
‘K리그 필드 플레이어 최다 출전 선수’ 김기동의 A매치 성적은 초라하다. 3경기 출전 무득점이다. 1997년 이후 10년 동안 태극 마크와 인연을 맺지 못하고 있다.
김기동은 1997년 9월 18일 국가대표팀에 처음 뽑혔다. 당시 차범근(54)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한국은 1998년 프랑스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각각 3-0, 2-1로 누르고 B조 1위에 올라 있었다. 그 무렵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 개최와 맞물려 월드컵 열풍이 불고 있었다. 이상윤(38), 이민성(34, 서울), 하석주(39)처럼 김기동도 스타 플레이어로 발돋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A매치 데뷔전은 무난했다. 10월 4일 아랍에미리트연합과 치른 4차전에 후반 38분 유상철(36)과 교체 투입돼 3-0 승리를 지켰다. 일주일 뒤 카자흐스탄 원정경기에서도 후반 32분 이상윤 대신 들어가 상대의 파상 공세를 잘 막아 1-1 무승부를 이끌었다. 그리고 11월 1일 첫 선발 출전의 기회가 주어졌다. 한일전이었다.
월드컵 본선 티켓은 일찌감치 확보했다. 10월 18일 우즈베키스탄과의 6차전에서 5-1 대승을 거둬 5승1무로 남은 경기 결과에 관계 없이 B조 1위를 확정했다. 한국은 무기력한 경기 끝에 일본에 0-2로 졌다. 패배에 대한 비난의 화살이 김기동에게 쏠렸다.
국제경기 경험이 부족한 김기동에게 미드필드를 맡긴 게 문제였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이날 경기가 김기동의 마지막 A매치였다. 김기동은 “모든 욕이 내게 돌아왔다. 기분 나빴다. 이미 선수들의 마음가짐이 풀어진 상태였다. 소속팀에 돌아오니 니폼니시 감독이 ‘네가 잘못한 건 없다. 가장 잘한 건 바로 너였다’고 위로했다.” 김기동의 생생한 기억이다.
김기동은 “(이후 대표팀에 뽑히지 않은 것에 대해)아쉬움은 없다. 고교 출신인 난 학연이나 지연이 없다. 잡초와 같다. 대표팀에 뽑혀 뛴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첫댓글 지동 ㅋㄷㅋㄷ 기동행님 현역 40세까지 고고싱!!!
김기동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