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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18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하시고
사람들을 향하여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하고 말씀하셨다
(마르3,1-6)
Jesus said to the man with the paralyzed hand,
"Stand here in the center." Then he asked them,
"What does the Law allow us to do on the Sabbath?
To do good or to do harm? To save life or to kill?"
But they were silent.
Then Jesus looked around at them
with anger and deep sadness
because they had closed their minds.
And he said to the man, "Stretch out your hand."
He stretched it out and his hand was healed.
말씀의 초대
소년 다윗은 필리스티아의 전사와 맞서 싸운다. 어린 다윗의 손에 들린 것은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였지만 다윗은 그를 무찌른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굳게 믿은 다윗의 믿음이 그를 이긴 것이다(제1독서).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고발하려고 지켜보는 사람들 앞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신다. 이는 안식일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하고 질문하신다. 율법의 근본정신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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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사람은 살아가면서 적어도 두 가지 이상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결단의 순간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되면 다른 하나를 희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솔로몬의 재판에 나오는 두 여인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1열왕 3,16-28 참조). 진짜 어머니는 아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참으로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아들을 포기하겠다고 말합니다. 가짜 어머니는 칼로 아이를 잘라 아이가 죽더라도 반쪽만이라도 챙기겠다고 말합니다. 참된 선택의 기준은 사랑에 있고 그 사랑은 희생입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는지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진퇴양난의 고비를 어떻게 맞으시는지 보고 싶었으며, 예수님을 고발할 적당한 구실도 찾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면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위반한 것이 되고, 안식일 법을 지키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율법이냐? 사랑이냐?” 이 두 가지가 서로 상충될 때 어느 결단을 내려야 하는지가 문제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위의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인 선택의 때에 행동 방침을 주시지 않고 근본 규범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행동한 것, 또는 행하려고 하는 것의 근본 동기가 무엇이냐?” 하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맞습니다.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결단하는 것이 식별입니다. 그런데 식별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모든 선함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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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평생 십자가를 안고 살아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그들의 불편함을 잘 모릅니다. 여간해서는 그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손가락을 조금만 다쳐도 일상이 헝클어짐을 경험해 본 우리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손이 불편한 그를 자유롭게 해 주시려 합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엉뚱한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의료 행위도 못 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참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노기 띤 눈빛으로 그들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예수님께서는 좋은 일을 하시지만, 바리사이들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입을 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곳을 떠나시면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습니다. 안식일이라고 그를 낫게 하시지 않는다면, 그는 영영 ‘불편한 손’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이용해 예수님을 공격할 구실을 찾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위한 율법이고, ‘사람을 위한 안식일’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최우선으로 여기라는 가르침입니다. 말씀을 따르면 주님께서는 도와주십니다. 모르는 새에 기적을 통해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오그라들’ 때 바로잡아 주십니다. 참으로 좋으신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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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나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들어도 시큰둥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선한 행동은 깎아내리고, 착한 행동에는 토를 답니다. 칭찬은 하지 않으면서 따지기는 무척 좋아합니다. 부정적 시각이 늘 우세한 사람들입니다. 복음의 바리사이들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려 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실제로 고쳐 주실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언제 예수님을 다시 만날지 모릅니다. 그는 애절하고 비장한 눈빛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실눈을 뜨고 있습니다. 고쳐 주시기만 하면 눈을 크게 뜨고 외칠 겁니다. 안식일에 ‘의료 행위’를 했다고 따질 참입니다. 바리사이 역시 신심 깊은 신앙인들입니다. 그런데도 평생을 ‘오그라든 손’으로 살아야 하는 이웃의 아픔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믿음에 사랑이 빠지면 자신만이 옳다는 ‘독선’으로 가기 쉽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웃을 해치는 폭력’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삶의 에너지’를 충족시켜 줍니다. 오그라든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돌아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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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한 마리가 붙잡혀 쇠사슬에 묶였습니다. 사슬을 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는 일입니다. 독수리의 매서운 눈과 날카로운 부리가 부르르 떨었지만 사슬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매일 힘을 써 봤지만 마찬가지입니다. 점차 독수리는 체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흘렀습니다. 독수리도 힘이 떨어졌지만 쇠사슬도 녹이 슬었습니다. 이제 단 한 번 독수리가 안간힘을 쓴다면, 온몸으로 날갯짓을 한다면 사슬은 끊어지겠건만, 독수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체념 때문입니다. 그는 포기와 좌절이라는 또 다른 사슬에 묶인 겁니다. 날기를 포기한 독수리는 동물원에서 죽습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매서운 눈과 날카로운 촉각으로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줄지 지켜보고 있는 겁니다. 그때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반대자들이 보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기적을 여러 번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한 번이라도 기적을 보고 마음을 열었더라면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들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대자들에게 질문합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그들은 답이 없습니다. 기적을 보고도 도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갈 곳은 어디입니까? 파멸입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강구합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 유시찬 신부-
잘 알다시피 안식일을 둘러싼 논쟁은 복음서 도처에서 보입니다. 오늘 복음도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을 놓고,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회중과의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같은 친숙한 장면을 대할 때는 오히려 조심했으면 합니다. 형식에 사로잡힌 바리사이들의 태도는 잘못되었고, 생명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좋은 분이라는 식으로 간단히 정리해 버리고, 그에 비춰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나 하면서 끝내면 기도가 죽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도 자유롭게 영을 풀어놓는 가운데 관상에 임하는 것이 더더욱 중요해지겠지요.
먼저 회당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잘 살펴보세요. 어떤 사람들이 와 있는지, 예수님은 어디쯤 어떤 모습으로 계시는지, 바리사이들은 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이런 모든 것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와 기운들도 어떤지를 더듬어 보세요.
그러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어떻게 고쳐주시는지 보십시오. 예수님의 표정·말씀·몸짓을 살펴보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표정과 태도도 보고, 주위 사람들의 모습도 살펴보십시오.
이때 한 장면은 예수님께서 노기를 띠고 그들을 둘러보셨다는 내용인데요, 사실 다른 공관복음에는 이런 내용이 탈락되고 없습니다. 예수님은 화 같은 것은 내지 않는 분이라는, 다소 고지식한 전통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에겐 약간의 걸림돌이 될지 모르지만, 사실 이런 부분이 실마리가 되어 중요한 것을 낚아챌 수 있을지도 모르죠.
<구원을 위한 세 가지 당부>
-양승국신부-
언젠가 운동하다가 오른팔을 다쳐 한 달 정도 깁스를 하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정말 불편하더군요. 여름에 그랬었는데, 다른 무엇보다도 깁스한 부위가 가려울 때 정말 미칠 뻔 했습니다. 너무 가려운 나머지 드릴로 구멍을 내고, 그 구멍으로 막대기를 넣어 긁기도 했습니다.
불편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쓰는 것, 밥 먹는 것, 물건 드는 것... 등등. 또 한 가지 불편한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반가움의 표시로 많은 분들이 악수를 청합니다. 깁스를 하게 되니 인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불편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겪은 여러 불편 가운데 가장 큰 불편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제가 생각할 때 육체적 불편은 그나마 견딜만했을 것입니다. 가장 큰 불편은 정신적, 심리적 불편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합니다.
손이 오그라듦으로 인해 그는 다양한 소외감을 겪었을 것입니다. 우선 오그라든 손이 눈에 띄니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시선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함께 놀이할 때나 일할 때나 그 어떤 것을 할 때도 오그라든 손으로 인해 늘 제약을 받아왔고,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열등감, 소외감, 우울함, 고독감에 사로잡혀 힘겹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 세상 그 누구로부터도 받지 못했던 큰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전해 듣습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손을 뻗어라.”
일어나라: 오그라든 손으로 인해 한 평생 의기소침해서 제대로 한번 당당하게 일어서보지 못한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이제 훌훌 털고, 안심하고, 나를 믿고 일어서라고 초대하십니다.
오늘도 죄와 병고와 상처로 인해 일어나 앉아있을 힘조차 없어 드러누워만 있는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외치고 계십니다.
“일어나라!”
가운데로 나와라: 그는 오그라든 손으로 인해 한평생 주변인으로 살아왔습니다. 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을 이 세상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몰아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데, 스스로를 자학하며 괴롭히며 왕따로 만든 그에게 가운데로 나오라고 당부하십니다.
오늘도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스스로를 철저하게도 삶의 외곽으로 밀쳐내며, 자신이 만든 감옥에 갇혀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너는 네 인생의 주인공이니 당당하게 이 세상의 중심으로 나오라는 의미로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가운데로 나와라!”
손을 뻗어라: 오그라든 손으로 인해 인생마저 왜곡된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손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포함해서 새롭게 시작하라는 의미에서 손을 뻗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용서하지 못하는 꽁한 마음, 그 누군가가 던진 상처로 인해 굳어진 마음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이제 원래 하느님께서 주신 첫 마음을 회복하라, 보다 자유로워져서 자비하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라, 평화롭게 살아가라는 당부로서 이렇게 외치십니다.
“손을 뻗어라!
사랑이 앞선 정의
-김광태-
하필이면 종교적 열성이 투철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과 갈등을 빚고 있다는 게 정말 가슴 아프게 느껴집니다. 그 땅을 점령하고 있던 로마인들이나 신앙생활에 무관심한 사람들과의 갈등이라면 오히려 위로가 될 뻔했습니다. 어린아이 수준으로 한번 질문해봅니다.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이 과연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었을까요? 복음서에 부정적으로 묘사된 바가 없지 않지만, 제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그들에게 종교적 열성이 없었으면 예수님과 갈등을 빚을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열성이 문제입니까? 그것도 ‘아니오’입니다. 이왕 믿으려면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울을 선택하셨던 것도 그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정도로 율법에 대한 열성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근원적인 오류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의의 하느님, 심판관이신 하느님만 섬겼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동시에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이 빠진 정의는 쉽게 다른 사람을 단죄하고 죽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사랑이 앞서면 아무도 단죄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합니다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며
-김찬선신부-
삶을 잘 살려면 삶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지식이 아니라 지혜가 늘어나야 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늘어야 할 삶의 지혜란
신 김치를 버리지 않고 먹는, 그런 살림의 지혜도 있지만
그보다는 삶을 성공적으로 사는,
적어도 실패하지 않고 사는 지혜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이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삶의 지혜 중 하나는 큰 문제를 잘 해결할 줄 아는 것입니다.
저의 인생 경험에서 깨달은 것은 “그 까짓것”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작은 문제를 큰 문제로 생각하며 끙끙댑니다.
“이거 큰 문제야!”하는 순간,
그는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문제는 이미 그가 해결할 수 없는
큰 문제로 커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커지면서 더불어 문제도 커진 것입니다.
우리는 군대에서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보초를 설 때 무슨 소리가 나 그것을 두려움 가운데 보고 있으면
점점 그 물체가 커지고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 어른들이 도깨비와 밤새 싸웠는데
아침에 깨어보면 빗자루와 밤새 씨름을 했다는 얘기와 같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의 다윗처럼 큰 문제도 “까짓 것”하며
작은 문제로 만들어버려야 합니다.
실상 큰 문제들이라고 하는 것들이 죽는 것보다 큰 문제없고
죽는 것은 또한 사는 것보다 큰 문제가 아니니
그 무엇을 가지고 우리가 한 숨 푹푹 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더 더군다나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계시기에 안 되는 것 없이 되는 것만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오그라든 손도 펴실 것이고
죽어가는 것도 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큰 문제가 있어도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믿음을 갖고 희망을 보며 삶을 사랑합니다.
삶의 두 번째 지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참사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관구의 문제들을 보며 새로운 미래를 설계합니다.
그런데 종종 문제가 골리앗처럼 커 보이고
그래서 도저히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가 너무 커 보여 미래의 희망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힘만으로 그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면
그 까짓 것들 아무 것도 아니고 희망이 있습니다.
문제들 해결할 수 있고
희망의 싹들은 많습니다.
그러므로 참사회의를 하는 우리
실망과 절망의 싹은 자르고 희망의 싹을 틔우며,
부정의 힘은 누르고 긍정의 힘은 키우며,
죽음의 문화는 죽여 버리고 긍정의 문화를 살리며,
우리의 삶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합시다.
미워하지 않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낫듯이
문제에 더 많이 매달리기보다 우리의 가능성들을 더 많이 보는,
그런 긍정과 창의와 열정의 참사회의가 되기를 이 아침 기도합시다.
죽이는 것이 옳으냐?
-전삼용신부-
우리나라에서 재판을 받던 한 고등학생이 합의금과 신변문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이 학생은 2007년 인터넷 리니지 게임을 하던 중 상대 게이머인 서울의 김모 변호사에게 욕설을 했다는 이유로 서울중앙지법에서 재판을 받다 천만 원 정도의 합의금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경찰은 학생이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고민하다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미국에서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건너가 세탁업을 하던 정씨 부부가 5400만 달러의 소송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소송을 건 사람은 피어슨이라는 판사입니다. 그가 2005년 첫 판사로서의 출근을 위해 맡긴 바지를 정씨 부부가 분실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찾기는 하였지만 정시에 주지 못했고, 또 정신적인 피해와 우리가 알 수 없는 이것저것을 법으로 적용하여 5400만 달러의 피해액을 산출해 내었고 재판에서는 자신이 직접 검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물론 재판에서는 정씨 부부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몇 년 동안 재판을 받느라 정씨 부부는 돈은 돈대로 버리고 신경을 써서 눈은 거의 실명을 할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법은 사람을 살리라고 있는 것인데 평생 법을 공부해서 판검사 변호사까지 하는 사람들이 결국 그 법을 통해서 사람을 죽이려고까지 할 수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사춘기 학생이 욕을 한 번 한 것이 법적으로 따져 천만 원에 해당한다면 그것 때문에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아픔은 과연 얼마나 되고 누가 보상해 주어야 할까요? 또 바지를 잃어버려 제 때에 손님에게 주지 못한 과실이 5400만 달러라고 한다면 그것을 빌미로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어 실명할 정도까지 만드는 것은 과연 얼마의 과실일까요? 그것이 과연 평생 법을 공부한 사람의 정의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예수님은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 그 분이 병을 고쳐주시는지 안 고쳐주시는지, 즉 안식일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든, 남을 해치는 일을 하든, 목숨을 구하든, 죽이든 관심도 없고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어기신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살린 것뿐입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규정까지도 빼놓지 않고 지키는 바리사이들에게는 자신들에 대한 일종의 모욕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사실 예수님은 참 사랑의 정신을 잃은 법을 바로잡으려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법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완전할 수 없습니다. 법이 참 의미를 잃고 특권층만을 보호하는 것이 되어버렸다면 그 특권을 누리는 이들은 참 정신보다는 법을 더 중요시하게 되어 위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법과 권력에 저항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권력도 하느님께서 주셨으니 있는 것입니다. 모든 법은 사랑과 정의에서 나와야합니다. 만약 법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면 나의 신념대로 나아갈 줄도 알아야겠습니다.
만약 광주민주항쟁 때, ‘내가 군인이고 나에게 만약 시민을 쏘라는 명령이 내렸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정해봅시다. 명령을 어기면 내가 죽고, 명령을 따르자니 무고한 시민이 죽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할까요? 또 예수님은 어떠한 결정을 내리셨을까요?
거인 골리앗을 무찌르는 신앙
-경규봉 신부 -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골리앗은 어릴 때부터 싸움으로 몸을 단련해온 사람이다. 그가 입은 갑옷만도 55kg이 넘을 정도로 힘이 센 장사였다. 사람들이 보기만 해도 겁을 먹을 정도로 거인이며, 그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큼 컸다. 더욱이 그는 부하를 거느린 장수로서 힘과 지혜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당시 최고의 무기라 할 수 있는 칼과 창으로 무장하고 온몸을 갑옷으로 감싸고 있었다.
이에 비해 다윗은 양치기 목동이고, 전투에 참여하기에 너무 어린아이였다. 무기도 갑옷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는 개울가에서 주은 자갈 다섯 개와 양을 칠 때 사용했던 막대기만 가지고 골리앗과 맞섰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다윗은 골리앗을 맞이하여 도저히 싸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골리앗과 싸웠고, 승리했다. 다윗이 단 한 번 던진 돌멩이가 골리앗의 이마에 꼽혔으며, 쓰러진 상대를 상대의 칼을 뽑아 상대의 목을 베었다. 인간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불가능한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어떻게 그러한 기적이 일어났을까? 그것은 오직 하느님의 힘이었다. 다윗은 인간적인 것에 전혀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이름을 믿고, 하느님과 함께 골리앗과 맞섰다. 다윗은 사울이 입혀준 갑옷과 투구를 벗어던졌고, 사울이 준 칼도 버렸다.
그는 인간의 힘과 능력에 결코 의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오직 하느님께만 의지했다. 그랬기에 그가 단 한 번 던진 돌멩이가 온몸을 갑옷으로 감싼 -인간의 모든 수고와 기술로 감싼 골리앗의 이마를 정통으로 맞추어 쓰러뜨리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단순히 하느님을 의지한다 하여 자신의 일을 등한시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다윗은 책임감이 강했다. 맹수가 양을 물어갈 때 끝까지 양을 쫒아갈 정도로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자나 곰을 두려워하는 겁쟁이가 아니라, 싸워 이길 수 있는 용맹함과 투지를 가지고 있는 사나이다운 아이였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충실히 하면서도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 하느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신다. 적과 맞서 싸우려는 불타는 투지를 갖고 있을 때, 하느님께 충성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신다.
성서에 나오는 골리앗은 단순히 필리스티아(블레셋)의 장수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골리앗은 우리를 위협하는 커다란 악이요, 유혹이며 곧 사탄이다. 하느님을 대적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위협하고 무너뜨리려는 악마를 의미한다. 다윗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과 함께 그 악과 악마를 무찌른 것이다. 다윗은 예수님을 미리 보여준 것이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빵과 권력과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을 때, 오직 하느님의 말씀으로 악마를 무찌르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써 모든 악의 권세를 물리치셨고, 다윗은 그러한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는 하나의 표였다.
오늘 우리도 수많은 악과 유혹이라는 골리앗과 싸워야 한다. 이 때, 우리 자신을 믿고 자신의 힘만으로 싸우려 해서는 안된다. 또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긴다는 핑계로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해서도 안된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힘으로 이기겠다는 믿음으로 싸워야 한다.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하느님께 충실함으로 싸워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나아가야 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양승국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러 회당에 들어가셨다가 손이 심하게 오그라든 사람을 만나십니다. 오그라든 손 때문에 한 평생동안 그가 겪었던 갖은 고초와 서러움을 눈여겨보십니다.
처음에는 오그라든 손으로 인한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차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견디는 법을 배운다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불편함은 그런 대로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오그라든 손을 바라보면서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오그라든 손을 주신 이유를 끊임없이 캐묻게 되었습니다. 생각을 더할수록 점점 억울해졌습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었는가? 내가 무슨 못할 짓을 했었던가? 도대체 왜?"라는 질문을 끝없이 되풀이하면서 가슴 한 구석에는 하느님과 세상에 대한 분노와 원망, 불신이 점점 쌓여만 갔습니다.
예수님은 내면을 바라보시는 분이지 않습니까? 오그라든 손을 따라 점점 오그라들어가는 그의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자기 폐쇄를 통한 죽음으로 가는 그의 영혼을 안타깝게 보신 것입니다.
오그라든 손은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들의 오그라든 마음을 지칭합니다. 오그라든 마음은 또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그라든 사고방식, 철저한 자기 폐쇄로 인한 극단적인 이기심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기대는 전혀 뒷전이고 나 혼자 100% 이 일을 다해내고야 말겠다는 완벽주의가 오그라든 마음입니다. 절대로 양보하지 않고 죽어도 물러서지 않는 지기 싫어하는 삶이 오그라든 손입니다.
한편 오그라든 손은 호시탐탐 예수님으로부터 꼬투리를 찾아 고발하려고 혈안이 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을 지칭합니다.
제 마음 안에서, 우리 수도자나 사제들 안에 "오그라든 손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권위중독(Poweraholic)"증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적으로 근심이 있고, 불안하고, 미숙한 사람이 한 공동체의 지도자 위치에 있게 되면 "권위 중독"의 증상을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감이 없는 지도자는 권위와 영향력을 내세우는 일에 지나치게 집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확신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세운 "계획"에 따라서만 일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고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위적인 태도는 다른 사람들은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권위 중독에 빠진 지도자는 구원자가 되고 싶어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곧 이런 지도자는 다른 사람을 치유하고, 통제하고, 충고하고, 도덕적인 훈계를 하고, 후견인으로 행동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런 지도자는 세례성사로 받은 성령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권위중독에서 벗어나기, 토머스 모건 참조).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시오!
-상지종신부-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시오
당신의 자리는 거기가 아닙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시오
당신에게는 모든 이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누가 당신더러 그곳에 있으라고 했습니까
누가 당신더러 아무 시선 없는 곳에 숨으라고 했습니까
당신의 오그라든 손이 보기 싫어 숨으셨습니까
당신의 오그라든 손이 보기 싫다고 없어지라고 했습니까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시오
당당하게
주저하지 말고
당신이 있어야 할 곳
내가 초대하는 곳으로 기쁘게 나오시오
더이상 자신을 숨기지 마십시오
더이상 자신을 숨기면 안됩니다
더이상 다른 이들의 시선에 무릎 꿇지 마십시오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시오
예수님의 말씀은 숨죽어 지내야 했던 이들에게 한 줄기 빛과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누군가를 숨죽이게 했던 이들에게 한 줄기 빛과 희망입니다. 숨죽어 지내야 했던 이들과 숨죽이게 했던 이들 모두 어둠 속에서 절망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어둠인지 무엇이 희망 없는 삶인지도 모른 채 말입니다.
문득 지난 시절 참으로 가슴 쓰라리게 담아 놓아던 이야기가 다시 마음을 저며옵니다.
이렇게 사는 저희 모습이 그렇게도 눈에 거슬립니까?
제대로 갖추어 놓지 못하고 가난하게 사는 저희가 보기 싫습니까?
이런 저희를 외국인이 볼까봐 창피하고 두렵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무자비하게 우리의 삶의 터전을 짓밟습니까?
이렇게 내쫗지 말고, 차라리 우리 동네에 높이 담을 두르십시오.
밖에서 아무도 보지 못하게 말입니다.
답답하다고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당신들이 쳐놓은 그 담벼락 안에서 우리 오손도손 살 수 있습니다.
참으로 행복하게...
그러니 제발 이곳에서 나가라는 말만은 말아주십시오. 제발
88올림픽을 몇해 앞두고 도시미관을 헤친다고 빈민지역을 무작정 철거할 당시의 어느 이름 모를 철거민의 피맺힌 절규입니다. 그분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계신지 모릅니다. 끊임없이 숨어지낼 것만을 강요당하며 오늘은 이리로 내일은 저리로 쫓겨가고, 갈 때까지 가다가 갈 곳이 없으면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하는 현실이 과연 지나간 과거만의 것인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더욱 아픕니다.
눈에 거슬리면 없애버리고, 입장이 다르면 적으로 몰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비난하고 나서는 오만한 편의주의가 아름다운 인간 세상을 더럽히고 있음을, 나 역시 알게 모르고 오염의 주범이 되었음을 주님께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언제부터인가 한편으로 밀어놓았던 소중한 이들을 다시금 삶의 중심 자리로 초대해야 합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십시오! 어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라고.
그리고 힘없이 이들을, 가난한 이들을, 돌봄이 필요한 이들을 오히려 끊임없이 내치는 이들을 향해 더욱 큰소리로 외쳐야 합니다. "당장 그 죽음의 굿판을 치워버려라! 너희가 가진 더러움 싹쓸어버리고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으로 나오너라!" 라고.
예수님의 초대에 이 작은 한 몸 온전히 함께 하고픈 시간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화살은 결코 돌에 꽂히지 않으며 때로는 그것을 쏜 사람에게 도로 튀어 간다.(제롬)
덫
-김연희 수녀-
한 월간지를 창간호부터 19년째 구독하고 있습니다. 매일 한 장씩 읽으면서
잡지의 이름처럼 좋은 생각과 따뜻한 삶의 나눔에 늘 고마움을 지닙니다.
구독을 중단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 어느 순간에, 아름다운 사람들의
밝은 이야기를 정성스레 담아내는 발행인과 편집자들의 덫(?)에 꼼짝없이
걸려들었구나!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덫’ 하면, 인기척만 나도
날쌘 동작으로 쉽사리 달아나버리는 동물을 잡기 위해 만들어 놓은 덫이
먼저 생각납니다. 숨어서 겨냥하는 이들을 의식하면 섬뜩함이 들고
잔인함조차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시는 이 장면을 묵상할 때면 마치 그 분위기가 덫을 놓고
지켜보는 사냥꾼의 살기처럼 느껴져 살벌하고 무서움마저 엄습합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덫을 놓고서 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 적대자들로
둘러싸여 계시기 때문입니다. 은밀한 감시의 눈초리와 그들의 속셈을 아시고
과감하고 단호하게 맞서시는 예수님을 만나면 통쾌함과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생명을 살리기보다 조심스레 눈치 보며 규칙만을 따르는 완고한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께서 오히려 ‘정의의 올가미’, ‘사랑의 덫’을 씌우셨습니다.
마음이 오그라든 환자를 만나면
- 이창걸-
한 후두암 환자가 수술 후에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해 진찰실로 들어섰다. 60대 중반의 남성환자는 힘없는 표정으로 낙심에 차 있었다. 수술로 암은 제거했지만 목소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함께 온 딸이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 아버지가 교회 장로이신데 평소에는 찬양하고 기도를 인도하고 봉사도 열심이던 분이 수술하고 말을 못하게 되자 이제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고 집에만 계세요.” 환자의 오그라든 마음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밖에서 기다리는 다른 환자들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이 환자에게 말문을 열었다. “목소리가 없어져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지 충분히 이해됩니다. 하지만 차분하게 생각해 보면 기뻐해야할 것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진찰실 밖에 있는 많은 암환자를 생각해 본다면 저분들의 절반 이상은 말기 암으로 사망하게 될 운명에 있는 분들입니다. 아마 돈으로 생명을 산다면 집을 팔아서라도 사려 할 것이고, 1년 아니 6개월이라도 연장할 수 있으면 또 얼마라도 내겠다고 할 만큼 절박한 분들도 있습니다.
암이 뼈로 번져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거나 뇌와 척추로 번져 마비증세로 걷지도 못하고 누워만 계신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환자분은 목소리가 없어졌지만 우선 생명을 건졌고 눈으로 볼 수 있고 걸어 다니며, 가고 싶은 곳에 가거나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습니다. 5퍼센트만 부족할 뿐이지 95퍼센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 암에 걸렸다고, 말을 못한다고 집에만 계시지 마세요. 나가서 세상 사람들에게 나 아직 안 죽었다. 목소리는 없어졌지만 그 무서운 암을 이기고 이렇게 살아있다, 그리고 또 다른 암환자들에게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세요.”
다행히 환자는 6주간 치료가 끝날 무렵에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교회를 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후두로 소리를 내지 못해도 대신 식도를 이용하여 소리를 낼 수도 있고 인공성대장치를 목에 대면 로봇이 내는 듯한 소리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식도발성을 한 환자의 말을 내가 알아들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암환자한테서 암만 치료하는 것은 반쪽짜리 의사다. 그 사람의 마음과 삶의 질까지 회복시켜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진료대기가 많은 상황에서도 마음이 오그라든 환자를 만나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렇게 하고자 노력한다.
죽이는 것이 옳으냐?
-전삼용신부-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다보니 두 가지 씁쓸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재판을 받던 한 고등학생이 합의금과 신변문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경찰조사결과 이 학생은 2007년 인터넷 리니지 게임을 하던 중 상대 게이머인 서울의 김모 변호사에게 욕설을 했다는 이유로 서울중앙지법에서 재판을 받다 천만원 정도의 합의금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경찰은 학생이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고민하다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망 원인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용산 철거민 강제진압 중 5명이 사망하고 경찰과 철거민 20여명이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됐다는 소식입니다. 경찰은 철거민들이 화염병 등을 만들기 위해 건물 안에 두었던 시너에 불이 붙으면서 경찰과 철거민들이 화상을 입었다고 밝혔습니다. 경찰은 그 전날 이미 옥상에 시너통 70여병을 보관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어 그 전날부터 대형 참사가 일어날 것이 예견되어 있으면서도 진압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cyworld 뉴스)
누구나 이런 뉴스들을 접하면서 마음이 아파오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변호사가 더 잘못했다, 혹은 공권력이 더 잘못했다고만은 하지 않습니다. 학생도 어른에게 욕을 했으니 잘못이 있고 무력시위를 한 시민들도 작지 않은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욕을 하는 것도 잘못이고 무력으로 시위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러나 더 큰 잘못은 변호사에게 욕을 했다는 것과 공권력에 저항했다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바위이고 약한 자들은 계란에 불과합니다.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어리석은 행위를 한 것이 더 큰 잘못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나라의 법과 권력에 순종해야 한다고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위를 거역하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것을 거스르는 자가 되고 거스르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로마 13,1-2)
아마 이들은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권위에 복종하지 않았기에 그런 심판을 받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악법도 법이다.’ 하며 스스로 독극물을 마신 소크라테스가 그래서 더 위대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춘기 학생이 욕을 한 번 한 것이 법적으로 따져 천만원에 해당한다면 그것 때문에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아픔은 과연 얼마나 되고 누가 보상해 주어야 할까요? 그것이 과연 평생 법을 공부한 사람의 정의일까요?
또 당장 집을 잃고 살길이 막막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화염병을 준비했던 것이 목숨을 빼앗을 정도로 큰 죄였을까요? 누가 경찰 특공대에게 부모님과 같은 분들을 강제진압하게 만들고 또 그들이 던지는 벽돌에 상처를 입도록 만들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예수님은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 그 분이 병을 고쳐주시는지 안 고쳐주시는지, 즉 안식일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따라서 좋은 일을 하든, 남을 해치는 일을 하든, 목숨을 구하든, 죽이든 관심도 없고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지키는 것보다는, 그래서 세상에서 살아남기 보다는 그 법을 어기면서도 사람을 살리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길을 택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음의 길로 가시게 된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사실 예수님은 참 사랑의 정신을 잃은 법을 바로잡으려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법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완전할 수 없습니다. 법이 참 의미를 잃고 특권층만을 보호하는 것이 되어버렸다면 그 특권을 누리는 이들은 참 정신보다는 법을 더 중요시하게 되어 위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이 때 사람을 살리고 법대로 처리되어 죽는 쪽을 택해야 할 용기가 필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작년 시내의 어떤 미용실에서 이발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은 피곤했었는지 이발을 하면서 계속 눈이 감기는 것이었어요. 졸면 안 된다고 스스로 되뇌지만 제 뜻대로 되지 않더군요. 그런데 미용사가 처음에는 머리를 살짝 살짝 치면서 저를 깨우더니만, 나중에는 화를 내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발하는데 이렇게 잠자는 사람 처음 봤다고 하면서……. 하지만 어떻게요? 졸린 걸……. 아무튼 그 미용실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렇게 공개적으로 무안을 당하다보니 다시는 그곳에 가기 싫더군요.
어제 이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또 계속 졸기 시작했답니다. 의자에 앉자마자……. 사실 이발하는데 졸면 안 되지요. 미용사가 제대로 깎을 수 없는 것은 물론, 결국 저만 손해일 것입니다. 하지만 졸음을 뿌리치기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이렇게 졸고 있는 저를 향해서 미용사는 화를 낼만도 한데, 제가 졸고 있는 방향을 이용해서 이발을 해주더군요. 그리고 마지막 마무리 할 때쯤 제가 깨었는데, 미용사는 이렇게 말씀하세요.
“손님, 피곤하신가 봐요.”
화를 낼 수도 상황인데도 오히려 저를 염려해 주는듯한 말을 해주니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동안 나의 말과 생각만 옳다면서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말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음에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바리사이들의 위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든 제거하는데 혈안이 되고 있지요. 그래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는 모든 의료 행위가 금지되어 있으니까요. 일주일이라는 7일 중에서 치유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날이 6일이나 있습니다. 더군다나 평생 동안 손이 오그라들어있던 사람이 하루 더 오그라들어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그를 치유해주십니다. 바로 완고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치유 기적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바라본다면 절대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졌던 것이지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이 분명히 맞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제거할 모의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역시 이런 모습을 취할 때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어떻게든 나의 옳음만을 주장한다면 그리고 그로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전한다면, 우리는 이천년 전의 바리사이들처럼 또다시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모의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하는데 최선을 다해 보세요.
계명의 참 의미
-구경국 신부-
“구루가 저녁 예배를 드리고 앉았을라치면 번번이 아슈람 고양이가 끼어들어
예배자들의 마음을 산란케 하곤 했다. 그래서 구루는 저녁 예배 동안 고양이를
매어 두도록 했다. 구루가 죽고 나서도 오랫동안 저녁 예배 때면 고양이가 묶여
있었다. 그런데 그 고양이도 죽자, 또 다른 고양이가 아슈람에 붙들려 오게 됐다
-저녁 예배 동안 격식에 맞게 매여 있게시리.” 율법주의의 위험을 우회적으로
경고하는 것 같아 인용해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가
당신의 말씀에 자구에 맞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가를 시험하기 위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우리 인간이 잘되게 하기 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계명을
실천할 때에는 기계적으로 말마디에서 벗어나지 않게 노력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계명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숙고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중요한 것을 찾아 합리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안식일에 대한 계명뿐 아니라 다른 모든 계명을 실천하는 데에 있어서 예외 없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율법주의에 빠져 계명의 참된 의미를 잊고,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계명을 잘 따르기 위하여 실제로 행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며, 단지 계명의 말마디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리사이들처럼 이웃을 함부로 판단하여 비판하거나 이웃에게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녹슨 분노
-김현숙 수녀-
올해 우리 학교에 특수학급이 개설되어 여섯 명의 학생이 공부를 시작했다. 교사들과 모든 학생의 관심 속에 한 학기를 마쳐갈 무렵이었다. 특수반 학생 중 한 명이 ‘둘리’(만화 영화 주제곡) 노래만 들으면 화를 내고 공격성을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이 노래 때문에 받은 상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한 2학년 학생 두 명이 점심식사 시간에 그 친구 옆에 가서 둘리 노래를 반복해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자 특수반 친구가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소리 지르며 발로 차고 때렸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둘리 노래를 불렀다는 학생들에게 전후 상황이나 변명을 들을 여지도 없이 화를 냈다. “너희들은 인간도 아니다. 도둑도 지나가다 넘어진 아이를 보면 일으켜 세워주는데 특수반 친구를 데리고 장난친 너희는 야단맞을 가치도 없는 인간이다.” 내가 그토록 크게 화를 낸 것을 처음 본 학생들은 놀란 나머지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화를 내고도 진정하지 못했다.
내가 어렸을 때, 병약한 오빠를 치료하기 위해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아 도봉산 자락으로 이사한 적이 있었다. 이사 와서 얼마 안 되었을 때 동네 아이들이 텃세를 부리며 철길 밑 개울에서 오빠를 때린다는 소리를 들었다. 어머니와 나는 한숨에 달려갔다. 남자 아이들 대여섯 명이 오빠를 둘러싸고 있었다. 어머니는 오빠를 감싸 안고 악동들을 설득시켰다. “아픈 아이란다. 건강한 아이라면 함께 싸우기도 하면서 놀겠지만 이 아이는 너희와 싸울 힘이 없는 아픈 아이란다.” 심술궂어 보이던 아이들은 어머니의 애조 띤 호소 때문인지 그 이후로 아픈 오빠에게 텃세를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오빠를 보호해 주기까지 했다. 그중에는 오빠가 하늘나라 간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어머니를 찾아오는 이가 있다.
하지만 그 시절 아무 힘이 없었던 어린 내 가슴에 새겨진 옹이가 마음 한켠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에 대한 녹슨 분노가 침전되어 있다가 이 사건을 통해 가슴 밑바닥에서 용트림하듯 분출된 것 같다. 사노라면 누구나 오그라든 마음 한구석이 있을 텐데, 왜 받아주지 못했을까? 아픈 사람, 아픈 자식, 오그라든 손`…. 누구나 얽힘과 섞임 속에서 풀지 못해 굳은살이 되어버린 부분이 있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삐딱하게 튕겨져 버린 오그라진 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손을 펴라!
-오상선신부-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상상해 본다.
손이 한쪽이 장애이지만
사실 그는 그 하나 때문에
사람 취급 못받기가 일수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다.
직장을 가질 수도 없다.
오늘날 같으면 의수(倚手)라도 끼울 수 있어
능력만 있다면 나름대로 사회생활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은 있다.
이 사람은 바로 이 한가지만 똑바로 펴게 되면
온전히 성한 사람이 된다.
이 한가지 장애가 사람 구실을 못하게 한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온전한 사람으로 서지 못하는 것도
큰 이유 때문이 아닐 수 있다.
바로 한 가지 장애 때문에 그분 앞에 서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어딘지 오그라져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내 속에 왜곡되어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 왜곡되어 있는 부분을 정확히 찾아내고
그것을 치유할 수만 있다면
나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
내가 온전히 성하지 못한 것은
내 안에 있는 다른 자잘한 잘잘못들이 문제가 아니다.
왜곡되어 있는 단 한 가지가 문제다.
그걸 오늘 한번 찾아보자.
그리고
그것을 주님께 내어드리고
치유해 주십사 청하자.
아니 그분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조용히 성체 앞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자비하신 그분은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오늘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치유시켜 주시듯
그렇게 나를 치유시켜 주실 것이다.
온전히 성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
뻗어라!,
곧게 펴라!
짧고도 단호하게 외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되리라.
아, 주님!
연중 제2주간 수요일
- 이동진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시려 하십니다. 그렇지만 바리사이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고발하려 합니다.
안식일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적대적일까요?
복음이 쓰여질 당시 상황에서 유대 율법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것을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목숨이 위험에 처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어떤 일도 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라고 하시며 자신의 뜻을 펼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반 병자를 고쳐주는 선행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라 하십니다. 곧 안식일법보다 사람을 더 아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남에게 착한 일을 해 준다는 것이 안식일에 쉬는 규정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을 쉬시며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내리신 날입니다(창세 2,2-3). 이러한 안식일을 예수님께서는 본래대로 되돌려 놓으시려고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즉, 안식일의 참 뜻인 거룩함과 복됨을 회복하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거룩함과 복됨의 의미를 지니고 주일을 지내는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바리사이들처럼 자신들이 정한 잣대로 상대방을 바라보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웃사랑으로 서로를 바라보는지, 아니면 법과 규정으로 또는 자신만의 시각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종합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마음으로 주일을 지내고, 또한 하느님을 받아들이며 이웃을 사랑하며 지내는지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살아 나갑시다.
선한 뜻
-이철구신부-
선한 뜻을 가지고 일을 할 때와 선하지 못한 뜻을 가지고 일을 할 때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또 마음을 비우고 이웃을 바라볼 때와 욕심과 이기심으로 이웃을 바라볼 때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얼마 전 드라마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고 했으나 결국 결과가 좋지 않아 낭패를 본 사람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착한 사마리아인 법에 따라 그 사람을 처벌할 수도 없고 처벌 받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불의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선한 동기에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했다면 그 결과에서 오는 불편함이나 오해까지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면 고발하기 위해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의지는 결코 선한 것일 수 없고 세상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될 수 없는 선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느님을 마음의 중심으로 삼아 세상에서 선한 몫을 택해야 하겠습니다. 길을 지나다 불쌍한 사람을 만난다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한 가지라도 채워 줍시다.
화, 제대로 내기
-이중섭 신부-
오늘 복음은 안식일 논쟁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한지 아닌지를 두고 유다인들과 논쟁하셨습니다.
대답은 분명하므로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노기를 띠고 그들을 둘러보신 다음,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대목을 보며, 예수님은 화를 제대로 내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적대적인 세상에서 자신을 방어하려면 어느 정도 분노의 감정을 느껴야 하므로 화를 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화를 내면서 죄의식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화, 제대로 내기>의 저자 버트 게찌는 화는 근본적으로 좋은 감정이며, 적절하게 다루고 표현할 수만 있다면 덕목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그는 화를 진정시키는 3단계를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억누르지 마라(화를 내라).
둘째, 올바르게 표현하라(죄를 짓지 마라).
셋째, 빨리 안정시켜라(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화라는 감정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화를 제대로 내야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손을 뻗어라"
-문화순 수녀-
수녀원 성소담당 소임을 할 때 한 성소자 가정을 방문했는데, 그 집에는 결혼한 지 몇 달 만에 6·25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큰어머니가 계셨다.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는 순간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하고 온몸이 오그라붙은 큰어머니는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어서지도 눕지도 못한 채 굳어버린 몸으로 살고 있었다. 신혼의 단꿈에서 깨기도 전에 남편과 헤어졌고,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몇 개월 만에 재가 되어 돌아왔으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그렇게 주저앉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남편 몫까지 살 각오로 다시 일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넋이 나간 채 평생을 자기 안에만 갇혀 지내는 슬픈 모습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내내 발자국마다 슬픔이 찍혔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말씀처럼 ‘내’가 아니고 ‘너’다. 그분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고발하려고 기다리는 사람들 앞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은 병신 취급을 받으며 사람들의 뒤편에서 곁눈질로 살았던 그 사람의 처지를 보시고 당신 사랑을 주신 것이다. 햇빛을 받지 못하는 식물은 꽃을 피우지 못하고 줄기도 약해 자칫 건드렸다가 부러지는 경우가 있다. 사람도 삶이 밝지 못하고 남의 그늘에 있으면 약간의 어려움에도 좌절하고 넘어지며 마음까지 오그라붙어 바른 삶을 살 수가 없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도 역시 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오그라붙어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를 사람들 앞으로 불러내어 이제는 그만 그늘에 숨고 밝고 따뜻한 곳으로 나와 당당히 살도록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인정해 주신 것이다. “손을 뻗어라.” 우리의 오그라든 마음을 뻗고 비뚤어진 심보를 바르게 펴고, 남을 판단하는 시선을 사랑으로 바꾸라는 말씀이 아닐까?
예수께서는 세상의 온갖 악으로 굳어버린 인간을 향하여, 또한 자기 속에 달팽이마냥 들어가 앉아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자신의 손을 밖으로 뻗어라’고 하시며 가진 것을 나누고 몸과 마음을 이웃을 향해 활짝 열어두도록 하신다.
호숫가에 모여든 군중
- 김홍태 신부-
1. 오늘의 루가 복음은 불쌍한 병자와 마귀들린 사람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었다고 전해 줍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자비로우신 손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엘리트층들이라 할 수 있는 바리새이들은 죄인, 창녀, 과부, 병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쿰란 공동체 수도자들의 회칙도 보면 그 당시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대했나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엔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자, 미친 자, 무지한 자, 마음이 헷갈리는 자, 눈먼 자, 절름발이, 앉은뱅이, 귀머거리, 철부지 등 이러한 자들은 그 누구도 공동체에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당시 소외되고 보잘것없는 인간들, 곧 죄인, 창녀, 세리, 과부, 병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셨고, 오늘 복음에서 들으신 바와 같이 이들이 당신께로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으심으로써 하느님 나라는 모든 이를 위한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정신은 예수님이 당신이 자라난 나자렛 마을의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에 적혀 있는 다음의 대목을 펴서 읽으신 데서도 잘 드러납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
2. 특히 예수님은 죄인들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새롭게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날 것을 원하십니다.
예1)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신도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저지른 과거의 오점은 영구히 지울 수 없는 것임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과거를 지워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잃었던 한 마리 양을 다시 찾아 기뻐하며 돌아오는 목자의 마음(루가 15,4-7), 잃었던 은전 한 닢을 되찾은 주인의 마음(루가 15,8-10),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의 마음(루가 15,11-32)은 주님께서 우리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3. 이러한 예수님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 죄인들을 위한 용서의 복음을 전해들은 군중들은 앞 다투어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따라 나서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예수님의 복음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복음을 전해도 어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는 뭘까요?
예2) 윌리엄 바클레이(영국의 성서학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신앙에 대한 이론, 곧 교리에 설복되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교회는 떠나게 되는 이유는 성경 내용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교인들의 불친절과 누추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옳은 말입니까?
여러분 중에 이미 영세를 받은 교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사랑의 표양을 보일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또 교우가 아닌 분도 비록 이미 영세 받은 교우들에게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더라도 어차피 예수님이 세우신 공동체는 처음부터 죄인들의 공동체였음을 이해하시어 주님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옳은 일과 살리는 일
-강영구신부(2004-01-21)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하시고 사람들을 향하여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하고 말씀하셨다.(마르3,3-5)
사랑하는 예수님, 당신은 안식일에 손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며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옳은 일이란 하늘의 뜻(天命)을 따름이요, 사람을 살리는 일이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옳은 일과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면 죽기를 마다하시지 않았습니다.
애당초 당신이 하늘을 버리고 죄 많은 인간들이 사는 이 땅을 선택하셨을 때도 그것이 옳은 일이며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30년 나자렛의 삶을 청산하시고 고향과 가족들을 떠나 출가出家하셔서 떠돌이 랍비가 되셨을 때도 그것이 옳은 일이며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을 친구로 맞아들이시고 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기를 즐기셨던 것도 그것이 옳은 일이며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기피하던 나병환자를 손으로 어루만져 치유하시고 그에게 새 삶을 주셨을 때도 그것이 옳은 일이며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돌로 치지 않고 용서하여 돌려보내셨을 때도 그것이 옳은 일이며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끝내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산을 오르신 것도,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조롱을 받으면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도 그것이 옳은 일이며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 저희들도 당신을 닮게 하소서.
저희들은 너무나 자주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일을 하다가 하늘의 뜻(天命)을 외면합니다. 이기심과 탐욕에 눈이 멀어서 형제 사랑하는 일을 소홀히 합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불행을 자초합니다. 저희들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시고 당신을 닮아서 하늘의 뜻을 따라 옳은 일을 하고 사랑함으로서 사람을 살리게 하소서. 오늘 하루도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옳은 일만 하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소서.(一明)
안식일은 창조의 완성이다.
-박상대신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일(창세 2,2-3; 출애 20,8-11)과 할례를 받는 일(창세 17,10-11)은 야훼께 대한 유다인들의 가장 중요한 신앙행위의 지침들이다. 동시에 이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신앙심을 저울질하는 종교적 기준이 되기도 한다. 앞서간 복음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르는 행동으로 안식일법을 어겼고, 오늘은 예수님 스스로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심으로써 안식일법을 어기셨다.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 편에서 보았을 때 치유의 행위가 범법(犯法)이 되나 예수님 편에서 볼 때는 는 아니다. 우리는 앞서간 복음을 통하여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법칙 두 가지를 발견하였다. 첫째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2,27)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의 아들이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2,28)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치유기적은 원래 따로 전해오던 것을 마르코가 의도적으로 이 자리에 배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예수와 그 반대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논쟁을 일단락 짓기 위해서이다. 물론 논쟁의 일단락은 예수에게 불리하게 진행된다. 반대자들이 예수를 제거하려고 결의하고 그 작업에 착수하겠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진행되더라도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와 뜻을 밝히려 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선포하신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법칙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려 하시는 것이다.
안식일법을 지킨다는 것은 이 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것을 이 날에 금지된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예수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문하신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은가?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은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은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옳은가? 이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도 하다.
혹자는 예수께서 굳이 안식일법을 어기지 말고, 안식일을 피해 다른 날을 택하여 좋은 일을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루가 13,14 참조) 그러나 꼭 알아두어야 할 점은 예수께 있어서 내일은 없고, ’지금’과 ’여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안식일과 좋은 일을, 안식일과 사람을 살리는 일을 서로 연결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엿새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모든 일에게 손을 떼고 쉬셨다(창세 1,2)고 해서 이렛날을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날로 생각하면 착각이다. 이 날은 창조의 완성을 의미하는 날이기에 거룩한 날이고 다른 날보다 복(福)이 많은 날이다. 이 날이 유다인들에게는 토요일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일(主日)이다. 따라서 이 날은 죽은 무행(無行)의 날이 아니라 살아있는 행위(行爲)의 날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사명의 핵심은 바로 ’생명을 주는 일’, ’사람을 살리는 일’에 있다. 이들 일은 안식일에 더욱 더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 생명만 챙기고 나만 살자고 하는 행위는 안식일의 정신에 어긋난다. 예수께서 자신은 스스로 죽임을 당할 줄을 내다보시면서 안식일에 다른 사람을 살리시는 뜻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너라>(마르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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