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1월 24일 화요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코 3, 33-35)
And looking around at those who sat there he said,
"Here are my mother and my brothers.
Whoever does the will of God is brother
and sister and mother to me."
말씀의 초대
다윗은 빼앗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주님의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다. 다윗은 기쁨에 겨워 온 힘을 다해 주님 앞에서 춤을 춘다(제1독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찾아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의 형제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적인 혈연관계보다 하느님 안에서 보편적인 사랑의 관계가 그 무엇보다도 앞선다는 말씀이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저는 매달 한 번 월요일이면 양로원을 방문하여 미사도 드리고 할머니들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그렇게 지낸 지가 15년이 됩니다. 할머니들이 양로원에 들어오게 된 사연은 매우 다양하고 저마다 다릅니다. 자식이 없는 분들이 대부분이며, 자식이 있어도 불화로 가족을 떠나 양로원에 와서 한 가족이 된 분들도 있습니다. 더러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도 있습니다. 하나의 양로원이 운영되는 데는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양로원은 출발부터 후원자들의 자발적인 기부금으로 운영되어 왔습니다.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데 회원들이 그동안 보여 준 희생과 사랑은 참으로 눈물겨울 정도였습니다.
한 번 양로원에 들어오신 할머니들은 가족이 되어 오래도록 인연을 이어갑니다. 양로원을 운영하면서 신앙의 규칙을 정하여 생활하도록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할머니들은 자발적으로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양로원 분위기가 화목하다는 뜻입니다. 이제 할머니들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은 과거의 슬픈 삶에 얽매이기보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고 남은 삶을 잘 정리하며 날마다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혈육의 끈을 넘어 모두 신앙의 한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양로원의 후원자들과 할머니들이 바로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사는 분들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
한 청년이 집을 잃었다며 길에서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노인이 묻습니다. “젊은 그대가 어찌 집을 잃었다 하는가? 그리고 설사 그렇더라도 어찌 이리 철없이 우는가?” 청년이 답합니다. “저는 다섯 살 때 눈이 멀어 지금까지 스무 해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해 뜰 무렵 집을 나섰는데 갑자기 만물이 밝게 보였습니다. 놀라 사방을 둘러보니 길이 보이고 낯선 집들이 보였습니다.” 노인은 놀랍니다. 눈뜬 소경을 만난 겁니다.
“좋아서 한낮을 걸어 다녔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사방으로 뻗은 길이 여러 갈래요, 대문도 비슷해서 도저히 저의 집을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울고 있습니다.” 노인이 답합니다. “이제 내가 네 집을 찾는 방법을 가르쳐 주마. 네가 눈을 도로 감는다면 집으로 가는 길이 보이고, 너는 그 길에 익숙해질 것이다.” 청년은 노인이 시키는 대로 눈을 도로 감습니다. 그러고는 예전처럼 지팡이를 두드리며 발길 가는 대로 걷습니다. 얼마 뒤 그는 집에 도착했고, 눈을 뜨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의 글에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를 그분께서는 가족으로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우리는 그분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야겠습니다.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어제는 강원도 횡성에 다녀왔습니다. 우리 본당 학생들이 스키캠프를 마치는 날이었거든요. 따라서 좀 먼 거리이지만, 얼마나 재미있게 노는지 그리고 내년에도 할 만한 프로그램인지를 보기 위해서 직접 운전을 해서 강원도 횡성에 있는 스키장까지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처음 가보는 스키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지도 한 번 보지 않고도 헤매지 않고 잘 찾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불과 몇 년 전 만 해도 지도책을 보면서 찾아가면서도 엄청나게 길을 헤매는 길치가 바로 저이거든요. 그렇다면 제가 길 눈이 밝아서 그럴까요? 바로 내비게이션 때문입니다. 내비게이션이 운전대 바로 옆에서 왼쪽으로 가라, 오른쪽으로 가라를 말해주다 보니 걱정 없이 원하는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것이지요.
이 고마운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문득 ‘참 착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안내해주는 길로 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때 “안내해 주는 대로 왜 못가니? 운전을 고따위밖에 못해? 너 바보 아냐?” 식의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화 한 번 내지 않고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다시 안내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안내를 시작해주지요.
그리고 이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사랑의 길과 정반대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뭐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인간들처럼 “이 바보야. 내가 몇 번을 말해야 하겠어? 너 한 대 맞아야 정신 차리겠니?”식의 윽박지르고 화를 내지 않으십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다시 한 번 제자리로 스스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항상 내 자신을 기준으로 활동하십니다. 마치 내비게이션이 지금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안내를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 역시 이 모습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화를 내고 윽박지르기 보다는, 예수님처럼 다시 기회를 주고 사랑으로써 감싸 안는 모습. 이 모습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서운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을 이들이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고 반문하시지요. 그러나 이들을 문전박대하기 위함이 아님을 곧바로 이어지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선언을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남들이 화를 낸다고 나 역시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사람들이 남을 미워하고 판단하고 단죄한다고 해서 나 역시 똑같은 모습을 취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모습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일까요? 즉,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실행하고 있을까요? 내 이웃의 어떠한 행동에도, 말없이 참아주면서 다시 기회를 주고 사랑으로 감싸 안는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 이웃의 어떠한 행동에도 화내지 말고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세요.
말씀에 머물 때
-구경국 신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요한 사도에게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어머니로 맞아들일
것을 부탁하실 정도로 효자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입에서 어머니와 친척들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의미의 말이 나왔다는 사실은 매우 의아하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상황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생각에 그를 붙잡으러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곳으로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과 군중이
함께 있는 곳, 즉 하느님의 말씀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
머뭅니다. 하느님의 말씀 바깥에 있으므로 당연히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예수님을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끌어내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거부하신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어느 본당 공동체에 가든지
그곳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선행과 봉사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들 사이에서 가끔 불협화음이
들려오곤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하느님 말씀의 바깥에 머물러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같이 그들 중 누군가가, 아니면 모두가 봉사의 근본을
하느님의 말씀에 두고 있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이 함께할 때 하느님의 뜻을 바로 알아 실행할 수 있고, 말씀에 충실히
머물 때 한 가족이 되어 함께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이인가?
-김현숙 수녀(노틀담수녀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이인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때만 하느님 나라의 비밀이 알려지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 어머니는 어린 자식을 들쳐 업고 보따리 장사를 다니는 아주머니가 오시면 아이를 내려놓고 물 한 모금 마시고 쉬었다 가라고 하셨다. 아이도 좀 놀릴 겸. 그런데 그 꼬마가 내 책에 낙서를 한 적이 있었다. 화를 내는 내게 어머니는 “나에게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고 내 자식을 돌봐준 사람들이 있었다. 내 자식 코 한번 닦아준 은공을 평생 못 잊는 법이다.”라며 싫은 내색을 하지 못하게 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이인가?
큰언니는 목욕탕에서 혼자 씻고 계신 할머니를 보면 다가가 등을 밀어드린다고 했다. 내가 모르는 할머니의 등을 밀어드리면 누군가 우리 어머니한테도 친절을 베풀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이인가?
언젠가 몸이 아픈 후배 수녀님을 위해 죽을 끓여주었다. 정말 입맛이 없었던지 한 숟가락 들더니 “이렇게밖에 끓일 줄 몰라요?” 하며 숟가락을 놓고 투정을 했다. 그의 옷을 세탁해 널어주고 죽을 끓여주는 것이 남을 배려하는 데 인색하고 둔한 나에게는 보기 드문 이변이었다. 그런 나의 호의에 퇴박이라니!
이 일을 수녀원 생활에 호기심 많은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한테 들려주었더니 깔깔거리며 웃었다. 우리 서로 형제 자매라면 허물없이 퇴박하기도 하고 또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오늘도 나는 후배 음악선생 수녀에게 “피아노 좀 잘 쳐봐! 잘 칠 때까지 계속 쳐요.” 하며 애꿎은 핀잔을 주고 서로 깔깔거리며 웃는다. ‘이 사람들이 바로 나의 어머니요 형제요 누이’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양승국신부-
<인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모님 입장에서 봤을 때 참으로 야속하고 몰인정한 한 마디 말씀을 던지십니다. 기껏 걱정이 되어 수소문 끝에 찾아갔더니 문밖에도 나와 보지 않고 한다는 말이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라는 말이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어떻게 보면 참으로 가슴 아픈 말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인류구원과 해방을 위한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작은 시냇물, 잔잔한 강물에 머물기를 포기하는 결연함이 엿보이는 말씀입니다.
한평생 예수님을 낳아 기르시느라 고생하신 성모님께는 참으로 송구스런 말씀이지만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육적인 인연을 뛰어넘으십니다. 보다 큰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보다 넓은 세상에로 투신하기 위해 인연에 연연치 않는 영적인 삶을 선택하십니다.
한 사제의 어머니로 산다는 것, 참으로 기쁜 삶이기도 하지만 무척 고달픈 삶이기도 합니다. 기쁨도 많겠지만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으로 점철된 생활, 늘 조심스럽게 처신해야하는 생활이 사제 어머니로서의 삶입니다.
한 사제의 어머님을 알고 지냅니다. 여간해서는 아들이 몸담고 있는 본당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십니다. 아들 신부에게 털끝만치도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이겠지요.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가까이서 살고 싶겠습니까? 얼마나 보고 싶겠습니까? 얼마나 챙겨주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조금이라도 누가 될까봐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끊임없이 묵주만 돌리는 어머님의 모습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워 보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에게 부여된 사제직을 완수하기 위해 소중한 인연들은 물론, 혈육의 정마저 단호하게 뛰어넘으십니다. 이런 예수님 앞에 성모님 역시 "내 아들"이라고 고집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고이 간직해왔던 메시아를 세상 앞에 내어놓으십니다.
갓 사제로 서품된 돈보스코에게 어머니 말가리다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아, 드디어 네가 사제가 되었구나. 이 한 가지만 꼭 기억하길 바란다. 한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고통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단다. 요한아, 내가 살던지 죽든지, 네가 나를 위해 기도해줄 것임을 굳게 믿는다. 그것으로 충분하단다. 지금부터 너는 오직 영혼 구원만을 생각 하거라. 결코 내 걱정을 절대 하지 말거라."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공동체
-이중섭 신부님-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을 형제, 누이,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근거로 예수님이 성모님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은 성모님을 더욱 들어 높이신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실행한 분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루카 1,38 참조). 그런데 마르코 복음 3장 35절에서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없는 공동체를 구상하신 것 같습니다.
같은 내용을 전하는 마태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복음서 어디를 보아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아버지다’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하느님 한 분으로 족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마태 23,9)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부장 제도는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인류역사를 보더라도
가부장 제도는 많은 여성의 존엄성과 재능을 박탈했습니다. 19세기 독일의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이 파니 멘델스존과 20세기 아인슈타인의 아내
밀레바 마리치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
-최연석 목사(전남 여수시 중부교회)-
복음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은 크게 나누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나는 구경꾼들이고, 둘은 적대자들이며, 셋은 ‘따르는 자들’이다. 이 따르는 자들을 일컬어 제자라고 부른다. 그것도 그냥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며’ 따르는 자들을 제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분류는 누구한테는 조금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주님을 따른다고 했는데 구경꾼으로 분류된 경우도 있고, 적대자로 찍힌 경우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나는 그분과 같은 고향 출신인데, 나는 친척뻘인데 하면서 구경꾼이나 적대자로 분류된 것을 억울해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기준을 분명히 이렇게 제시한다. 그것은 “나를 따르는 ‘손발’이 있느냐는 것이고 나와 마음을 같이할 ‘가슴’이 있느냐”는 것이다. 핏줄·머리·학벌·점수는 따지지 않지만 ‘손발’과 ‘가슴’은 따지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한다는,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조건은 분명히 하셨기 때문이다.
지난 시절, 거리에서는 이런 노래가 많이 불러졌다.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귀먹은 하느님/우리 기도 들으소서 혀 짤린 하느님/얼굴을 돌리시는 화상당한 하느님/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이러한 탄식이 그치려면 우리의 손발이 필요하다. 우리의 따뜻한 가슴이 필요하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주님의 형제와 자매, 어머니가 필요하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누가 내 형제며 자매며 어머니냐’는 주님의 탄식을 그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손과 발은 못이 박혔고, 당신의 가슴은 창에 찢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중심지는?
-경규봉 신부-
계약의 궤는 아카시아나무로 만들어 금을 입힌 상자이다. 궤의 뚜껑은 속죄판으로서 금으로 새겨진 거룹 둘로 덮여 있다. 궤 안에는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돌판과 아론의 지팡이,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가 보관되어 있다.
하느님께서는 “거기에서 너를 만나, 속죄판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거룹 사이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하여 너에게 명할 모든 일들을 일러 주리라.”(출애 25,22) 하고 말씀하셨다.
이 궤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상징이며, 구원과 승리와 축복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이 궤를 정성껏 모셨으며, 전쟁을 할 때에는 이 궤를 앞세우고 나가곤 하였다.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왕궁을 짓고, 자신의 도성으로 삼았다. 이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중심지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12부족으로 이루어졌고, 부족 사이에 여러 가지 갈등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갈등을 잠재우기 위한 중심지가 되도록 예루살렘에 도성을 세웠다.
다윗은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정치적 중심지만이 아니라 종교적 중심지가 되고, 하느님께서 영원히 머무르시는 도시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그는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신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상징인 계약의 궤가 모셔지면, 예루살렘은 구원과 축복을 받고, 영원히 하느님의 도성이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제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도성으로 이스라엘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겪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구심점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다.
오늘 우리의 중심지는 어디인가?
우리가 겪는 여러 가지 문제와 어려움을 주님께 호소하고, 해결하는 중심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주님께 탄식하며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하는 중심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충실히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얻는 중심지,
우리 성전이, 성체가 모셔져 있는 성전, 말씀이 선포되는 성전이 바로 그 중심지임을 깨닫고,
성전 안에서 주님께 기도함으로써 위로를 받으며,
편안히 쉼으로써 안식을 얻고,
주님으로부터 삶의 힘과 용기를 얻음으로써,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인생의 길을 힘차고 꿋꿋이 걸어가자...............◆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노영찬 신부-
아직도 해외를 나가보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일본이나 중국에 비하면 여전히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처음에는 상대방의 부족한 지리 지식을 질타하다가도 나중에는 우리나라의 위상이 세계적 시각에서 갖는 한계를 인정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유엔 사무총장으로 한국인이 선출되는 사건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우리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해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포츠 경기에 비유하자면, 늘 아시아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한국 축구 대표팀이 처음으로 올림픽이나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것, 나아가서 거기서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두어 한국의 이름을 온 세상에 알린 것과 유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개인 이력 자체가 우리나라의 발전사를 요약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시골의 평범한 환경에서 시작하여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외교관의 길을 초지일관 걸어오면서 마침내 세계 최고의 외교무대에서 수장역할을 맡은 그분의 인생역정은 제대로 된 인간성숙의 과정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제대로 된 인간성숙’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제대로 된 인간성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겠지만, 결국 세상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인간성숙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건조한 선박이 온 세상의 바다를 다니면서 뛰어난 성능을 발휘한다고 할 때, 그 선박은 시공의 경계를 넘어서서 훌륭한 선박으로 평가되는 것처럼, 사람도 어느 시대를 살았든지, 피부색이 어떻고 사용하는 언어가 무엇이든 이른바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인격의 성숙도가 있는 법입니다.
저는 이렇게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인간성숙도의 기준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기준 중의 하나는 ‘개방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개방성이란 새가 공중을 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특성입니다. 물론 새장에 갇혀 주는 모이나 먹으며 사는 새도 새이기는 하지만, 새의 본성을 구현하지 못한 불행한 새인 것처럼, 개방성을 망각하고 사는 인생은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과의 교류능력을 갖지 못하는 자폐증이라는 정신질환이나, 북한과 같이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는 국가의 운명이 개방을 거부하는 태도의 결과를 말해줍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바로 참된 인간성숙을 위한 개방적 태도에 대해 떠올렸습니다. 마르꼬가 전하는 이 이야기는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서 사람을 보내어 만나자고 부르는데도 얼른 응하기는커녕 냉정하고 단호한 태도를 보입니다.
이 장면을 예수님을 중심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은 집 밖에 서 있고, 생면부지의 군중들은 예수님 둘레에 앉아 있습니다. 즉 밖에서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과 ‘앉아서 편안하게 얼굴을 맞대는 사람들’이 구별됩니다.
인간성숙의 측도인 개방성이 미약한 사람들에게는 ‘앉아서 편안하게 얼굴을 맞대는 사람들’의 범주에 혈연으로 엮어진 인물들이 자리 잡습니다. 가족, 친지 등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 범위를 벗어나 있으면, 다시 말하면 밖에서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제대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세상을 대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이런 사고방식과 행동양상이 다양한 형태의 인종차별을 낳고 지역감정을 만들고 문화적 충돌을 조장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인간 상호갈등의 최악의 형태인 전쟁은 숙명처럼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일그러진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이런 차별하는 마음, 닫힌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라고 하시면서 육친의 관계를 가리키지 않고 바로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 인간적 기준으로 가까움의 측도인 혈연으로는 남인 사람들을 보시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
사람이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삶의 경계를 넓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계란 내가 누리는 자유를 제한하는 선입니다. 사람은 이 자유를 더 많이 누리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소유권의 확대는 자유의 확대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좁은 방에 사는 것보다 넓은 방에 사는 것이 육체의 활동과 안락을 위해서는 더 좋은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물질적 소유와 나이가 많아지는 것에 반비례하여 마음과 정신의 경계는 더욱 좁아지는 모습을 흔히 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경향에 주의를 주십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인간이 그은 경계선이 보이지 않으며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로 창조된 귀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면, 바로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십자가라는 나무토막을 던져보세요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오늘 복음은 마치 예수님이 불효자식 같다는 인상을 우리에게 줍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쫒아낸다.?‘하고?“(마르3,22) 악의적인 소문을 내자 예수님이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님을 붙들러 나섰습니다.
많은 군중들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게 되자 이들은 밖에 와 서서 예수님을 불러달라고 사람을 들여보냅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마르3,32)
둘러앉은 군중이 전하자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3,33)하고 반문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5)
자기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당신의 사명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참된 가족이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을 찾아 나선 가족들에게는 어쩌면 섭섭하게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의 의도는 혈연에 따른 가족과 절연하겠다는 의사 표현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참 가족임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늘상 우리에게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27)고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지고 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많은 어려움들 속에서 드러나는 태도로써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믿지 않는 사람인지가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십자가와 부활도 믿지 않는 비신자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많은 어려움에 불평하고 불만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피해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물론 피해지지 않지요. 그것이 사람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오히려 그 시련이 은총이요, 자기 성숙의 계기임을 깨달으며 자신이 믿고 따르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주어진 삶의 무게, 십자가를 받아들이며 부활의 그 날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마치 이와 같습니다.
프란시스코 성인이 고향에 있을 때, 하루는 자기 집 하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인은 물을 길을 때마다 한 가지 이상한 행동을 했습니다. 큰 물통을 내려 물을 가득히 담은 후 끌어올릴 때 항상 조그마한 나무토막 하나를 그 물통 안에 던져 넣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프란시스코 성인은 하인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하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도련님, 제가 물을 퍼 올릴 때 이 나무토막을 물통 안에 넣으면 물이 요동치지 않게 되어 물이 밖으로 흘러 넘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어요. 나무토막을 안 넣으면 물이 제 마음대로 출렁거려서 나중에 반 통 밖에 안 될 때가 많거든요.?“
하인의 이 설명을 들은 프란시스코 성인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후에 자기 친구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흔들리는 마음의 물통을 가지고 있는가!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마음, 고통으로 심하게 요동하는 마음, 절망으로 부서지는 마음... 이것은 마치 심하게 흔들리고 출렁거리는 물통과 같은 것이네. 그러나 거기에 십자가라는 나무토막을 던져보게나. 그러면 곧 마음의 물통이 안정될 걸세.?“
그렇습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편지처럼 두려움과 고통, 절망으로 출렁거리는 마음의 동요를 십자가라는 나무토막을 넣음으로써 진정시킬 수가 있고 부활에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나의 이웃을 위해서 고통스럽지만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이고 형제들입니다.
사제는 신자들을 ?’형제자매 여러분!?“하고 호칭합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많은 시련과 아픔을 예수님께서 지셨듯이, 삶이 주는 여러 시련들을 은총의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부활을 희망하면서 살아가는 신자들이 모두 한 가족임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질 때,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들이 바로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因緣을 뛰어넘어
-강영구신부-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밖에서 찾으십니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시고 둘러앉은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3,32-35)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 부족하고 어리석은 저희들은 혈연血緣과 지연地緣과 학연學緣의 동아리를 만들고 편 가르기를 하거나 힘겨루기를 일삼습니다. 어디엔가 속하지 아니하면 불안한 나머지 하다못해 동갑계同甲契라도 만들어 들어야 안심할 수 있는 처지입니다.
이 땅 위에 전쟁이 멈추지 않는 이유도, 갖가지 분쟁으로 서로 싸우고 다투고 죽이는 이유도 인류가 혈연과 지연과 학연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갖가지 인연因緣으로 서로를 얽어매어 편을 가르는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중심으로 편을 가르는 것은 기본이고, 한 나라 안에서도 지방을 중심으로 호남이니 영남이니 TK, BK, SK 따위로 편을 가릅니다. 출신학교 별로 편을 가르기도 하고, 이해利害관계에 따라서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기도 합니다. 근로자는 노조勞組로 동아리를 만들고 사업주는 경영단체로 동아리를 만들어서 힘겨루기를 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예수님을 따른다는 그리스도인들마저도 각종 종파를 만들어서 편을 가릅니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다른 점을 인정해주기 위해서 편을 가른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힘겨루기에서 이기기 위해서 편을 가르거나 상대방을 능가하는 힘으로 군림하고 지배하기 위해서 편을 가릅니다.
온 세상은 국경과 민족, 언어와 이념, 사상과 종교, 이해관계로 얽혀서 편을 가르고, 지배하기 위해서 혹은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 싸우고 다투고 죽입니다. 여기가 지옥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편 가르기로 갈가리 찢겨진 인류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당신은 나자렛을 떠나 出家하여 血緣과 地緣 굴레를 벗어던졌습니다. 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한 당신은 처음부터 학연學緣과는 무관하신 분입니다.
저희가 당신처럼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 하늘의 뜻(天命)에 따라 서로 사랑하면 혈연과 지연과 학연을 뛰어넘어서 한 형제자매 될 수 있습니다. 온 인류가 하느님 안에 한 가족이 되게 축복하소서. 오늘 하루만이라도 편 가르지 않고 서로 사랑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一明)
예수의 새로운 가족
-박상대신부-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의 집(3,20)에서 음식을 드실 겨를도 없이 모여든 군중을 가르치시고, 돌보시는 동안에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들은 친척들이 그를 붙들러 나섰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정면으로 예수와 맞섰다.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베엘제불(파리의 신)이나 다른 더러운 악령에게 사로잡혔거나, 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 구마기적을 행한다고 비방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비방하는 율법학자들에게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그 죄는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3,29)고 못을 박았다. 이는 곧 예수께서 모든 일을 성령의 능력으로 하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밝힌 것이다.
이제 예수의 어머니와 그 형제들이 집 앞에 와서 사람을 시켜 예수를 불러달라고 청한다. 여기서 미리 알아두어야 할 점은 ’형제’라는 단어가 히브리 및 그리스 문화권에서 아주 폭넓게 사용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방계혈족의 2촌만을 형제라 하지 않고 조부, 증조부, 고조부 등 아버지와 1촌의 관계를 갖는 모든 혈족을 관계상 ’형제’간이라고 한다. 이 점을 무시하면 성모 마리아에 관한 ’평생동정교리(平生童貞敎理)’에 하자(瑕疵)가 발생한다. 아무튼 예수를 만나려 하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를 붙잡으려고 찾아 나선 바로 그 친척들을(3,21) 말하는 것인가? 이 대목은 정확히 말하기가 힘든 부분이다. 형제들만 왔다면 몰라도 예수의 어머니가 끼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한편 다른 학자들은 그 친척들과 오늘의 가족들은 별개의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전자(前者)가 맞다면 예수가 미쳤다거나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를 붙잡으러 찾아 나선 예수의 친척들 중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후자(後者)를 따르자면 왜 갑자기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나타나 예수를 만나려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묻다보면 결국은 예수가 미쳤다는 생각은 않는다 하더라도 예수를 걱정하여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 온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논의의 초점은 예수님의 말씀에 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33절) 예수께서는 둘러 앉아있던 사람들을 보시며 말씀하신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34절) 무슨 날벼락 같은 말씀인가? 이 말씀이 허공을 가르며 외쳐지던 순간, 어머니와 형제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나마 문밖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피는 물보다도 진하다’고 했는데, 낳아준 어머니와, 같은 조상을 두고 함께 자란 형제들을 무시하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두고 어머니며 형제들이라니! 정말 예수는 정신이 나간 사람인가? 말이 나왔으니 예수는 사실상 미친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본의(本意)는 그 다음 말씀에 있다. 즉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35절)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관계를 선포하신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면 모두가 다 예수의 형제자매요, 어머니이다. 예수께서는 혈연적이고 세속적인 가족보다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족공동체를 택하신 것이다. 이 가족공동체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의 집합이 아니라, 예수님을 포함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예수께서는 자신도 하느님을 뜻을 행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고 계신다.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의 등장이 더 큰 의미를 가진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자신마저도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면 우리자신은 물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자기들이 하느님을 뜻을 행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 당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지적하신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피로 맺어지는 혈연은 한번으로 영원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관계를 허물어버리셨다. 이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가족공동체가 설정되었다. 그 소속기준은 하느님의 뜻을 언제나 행하는 것이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마르 3,31-35)
-유 광수신부-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게십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나서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
우리는 어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일치할 수 있는 길은 각자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서로 공통된 점을 찾아야한다고 말했다. 그 기준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에 대한 해답이 오늘 복음에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신 다음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즉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당신 주위에" 앉아서 말씀을 들을 때 알 수 있다. 하느님의 뜻은 애매 모호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느님의 뜻을 알려 주셨고 그것이 복음에 기록되어 오늘 우리들이 언제든지 들을 수 있게 해주셨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행하려며 다른 데에 가지 말고 복음을 들으면 된다. 결국 우리들이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일을 하더라도 먼저 복음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를 보고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할 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된다.
사람은 듣는대로 양성되어진다. 매일 나쁜 소리를 들으면 나쁜 생각을 하게되고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나쁜 소리로 양성되어졌기 때문이다. 반대로 좋은 소리를 들으면서 자라면 항상 좋은 것을 생각하게 되고 좋게 말하고 좋게 행동하게 된다. 왜냐하면 매일 좋은 소식를 들으면서 양성되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말만 듣고 자라면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인간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편 하느님의 말씀 즉 매일 복음을 듣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이 된다. 하느님이 생각하신 것을 생각하고 하느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하게 된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된다.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루 하루 겨자씨가 자라서 큰 열매를 맺듯이 매일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곧 예수님의 어머니 형제 누이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르타의 집에 가셨을 때에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고",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 그 때에 마르타가 예수님에게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일러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가 10,41-42)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 무조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선의의 지향을 가지고 한다고 하더라도 일의 우선 순위가 있고 때와 장소에 따라서 맞는 것이 있고 안 맞는 것이 있다. 무엇이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인가를 알고 가장 중요한 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한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를,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고 또 어떻게 봉사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어디로 가야 올바른 길로 가는 것인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 상황판단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능력 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한다.
마르타가 한 일도 중요하다. 자기 집에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그분을 시중드는 일이 얼마나 아름답고 중요한 일인가? 마르타는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을 위해서 해야할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고 마땅히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모든 가치 판단은 예수님께 시중 드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동생 마리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고 그녀를 보고서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예수님마저 미웠고 참다 참다 못해 드디어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 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불평을 터뜨렸던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르타의 생각이었지 예수님이나 마리아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모두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고 행동하였다. 마르타는 자기가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마르타에게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마리아를 칭찬하셨다. 마르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일을 했던 것인데 예수님은 "염려하고 걱정"이라고 말씀하셨고 오히려 마리아에게 "가장 좋은 몫"이라고 하셨다. 마르타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마르타는 듣는 것보다는 활동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활동도 중요하다. 그러나 활동하기 전에 먼저 듣는 것이다. 듣고 나서 활동하는 것이다. 듣지 않으면 무슨 활동을 해야하는지 모른다. 따라서 먼저 듣고 활동하는 것이 일의 순서요 그래야 올바른 활동을 할 수 있다. 우리도 바쁘게 활동을 한다. 활동은 열심히 하는데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소홀히 하기가 쉽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무엇보다 "당신 주위에 둘러 앉아야 한다." "둘러 앉다"라는 말은 서로 하나된다는 것이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가족으로서 형제, 자매, 누이, 어머니이지 높고 낮은 계급적인 관계로 모인 사람들이 아니다. 둘러 앉은 사람과 둘러 않지 않은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복음에서 둘러 앉은 사람을 "안의 사람" 즉 예수님의 가족이라고 하고 둘러 앉지 않은 사람을 "바깥 사람" 즉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 오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또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도록 노력하는 것이 영성생활이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늘 밖에 있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해서는 안 된다. 또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늘 같은 수준에 머무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영성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 주위에 둘러 앉아 잇는 자리는 모든 이에게 개방된 자리이며 모두가 안으로 들어와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둘러 앉아야 할 자리이다. 그 자리는 내가 얼마큼 안으로 들어와 앉느냐에 따라 내가 앉을 자리가 있을 것이고 또 그 옆에 앉아 있는 형제 자매가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 주위에 둘러 앉지만 모두가 같은 수준에 둘러앉는 것은 아니다. 앞줄에 둘러 앉을 자리가 있을 것이고 뒤에 둘로 앉을 자리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자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수준에 맞는 사람들끼리 둘러 앉을 것이다. 그러나 옆자리는 항상 개방되어있는 자리이다. 누구의 자리라고 정해진 자리가 아니라 누구나 와서 앉을 수 있는 자리이다. 아무나 앉으면 또 그가 또 나의 형제 자매가 될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자리, 그 무엇으로도 매여있거나 제한을 두지 않는 자리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고 말이 서로 통하는 사람들끼리 둘러 앉은 자리이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 모두가 형제, 자매요,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자리이다. 이 자리는 모든 사람들이 와서 앉아야할 자리이며 그곳에서 서로 친교를 나누며 형제 자매로 맺어져야할 자리이다.
예수님은 모든 이를 당신 가족으로 만들려고 오셨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가족으로 만들기 위해서 당신 주위에 둘러 앉기를 얼마나 원하셨는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다. "너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제 날개 밑으로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 37)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 주위에 둘러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부터 배우고 그런 자세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하자. 그래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