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2월 26일 사순 제1주일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마르코 1,12-15).
The Spirit drove Jesus out into the desert,
and he remained in the desert for forty days,
tempted by Satan.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노아와 그 자손들과 계약을 세우신다. 하느님께서는 다시는 사람 때문에 홍수를 일으켜 생명을 파멸시키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 때문에 고난을 겪으셨다. 죄 없으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 때문에 목숨을 바치신 것이다. 노아가 물로 구원받았듯이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의 물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시작 전 사십 일 동안 광야에 머무르시는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예수님의 공생활 전체가 유혹과 악의 싸움임을 미리 보여 주는 것이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시어 하느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을 전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시작부터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 십자가 위에서도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마르 15,30)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유혹과 시련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시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혹에 넘어가셨다면 우리 또한 예수님을 따라서 남을 지배하는 길, 명예를 드러내는 길, 특권을 남용하는 길을 따라갔을 것입니다.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에게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유혹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부를 통해, 어떤 사람은 가난을 통해 유혹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유한 이는 가난한 이에게 아낌없이 베푸는지, 가난한 이는 그 가난을 원망하지 않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견뎌 내고 있는지를 보고 계십니다.”
과학의 발달과 현대화가 전개되면서 개인주의와 상대주의, 물질주의가 우리의 삶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 있습니다. 개인주의는 자신을 절대화함으로써 사람들과 나누는 친교와 사랑의 공간을 앗아 갔습니다. 절대적 가치는 없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하는 상대주의는 가치와 의미의 상실을 가져왔습니다. 물질주의는 인간을 끝없는 탐욕과 쾌락으로 이끌고 급기야는 인간을 돈의 노예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날마다 욕심, 쾌락, 돈의 유혹 속에서 살아가며 우리의 생활은 이러한 유혹과 싸우는 영적인 전쟁터와 같습니다. 영적인 전쟁에서 지지 않으려면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늘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길을 고독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의 끝에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사십 일 동안 유혹했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짐작할 뿐입니다. ‘당신은 왜 사서 고생하려 하는가?’ ‘막강한 하늘의 힘을 지닌 당신이 허약한 척한다고 누가 믿겠는가?’ ‘어찌하여 쉬운 길을 제쳐 두고 그토록 황당한 길을 가려 하는가?’ 아마도 이런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분처럼 우리도 유혹을 느낍니다. 예수님을 충동질한 사탄이 우리라고 그냥 둘 리 없습니다. 그분께서 유혹받으셨기에 모든 유혹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기 싫다는 생각이나 참지 말고 기분대로 하고 싶은 느낌은 자연스러운 유혹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물리치셨습니다. 사순 시기 동안 십자가를 묵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삶의 불공평’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어진 시련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첫 행동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첫걸음입니다.
사순 시기 동안 우리는 삶의 ‘어두웠던 체험’을 묵상합니다. 잘나가던 때보다 힘들었던 때를 되새겨 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로 주어진 것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봅니다. 그리하여 ‘내 인생 속에’ 깊이 들어와 계시는 주님의 손길을 바라봅니다. 뜻깊은 사순 시기를 지내게 될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했습니다. 열 명의 의인이 없었던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도 대홍수 속에 구원된 사람은 여덟 명뿐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 의인 열 명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그 몫을 담당하겠습니까? 교회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상의 구원을 위한 성사’,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 몫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행복해지고 싶은 유혹
-서광석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40일 동안 광야에 계시면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다. 그 후 갈릴래아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하고 말씀하신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악마에게서 유혹을 받으셨다고만 기록됐으나, 마태오복음(4,1-11)과 루카복음(4,1-13)에서는 예수님이 받으신 세 가지 유혹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밤낮 동안 단식기도를 하신 후 몹시 허기지셨을 때 악마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라고 했다. 이어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하고 말했다. 그리고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예수님께 보여주며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들을 당신께 주겠소"하며 예수님을 유혹했다.
첫째 유혹은 예수님이 시장하셨을 때 돌로 빵을 만들어 배부르게 하라는 것이다. 둘째로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 위대한 능력을 유다인들에게 보여 달라고 했다.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쉽게 믿고 따름으로 명성을 얻을 것이라는 유혹이다. 셋째 유혹은 하느님 뜻을 따르지 않고 악마에게 굴하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악마는 재물과 명예, 권력으로 예수님을 유혹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이 재물과 명예, 권력이 중요한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들을 얻으려 애쓴다.
한 왕이 있었다. 그는 늘 불행하다고 느꼈고 행복을 원했다. 어느 날 세상 이치를 알고 어떠한 어려운 문제도 해결해 줄 도인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왕은 그를 찾아가서 "행복해지고 싶습니다"하고 하소연했다. 그러자 도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를 찾아가 그의 속옷을 얻어 입으시오"하고 답했다. 왕은 길을 떠났다. 그러나 사람들의 말을 들을수록 누구에게나 불행한 점이 있었다.
몇 년을 헛되이 떠돌아다니다가 드디어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그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왕은 기대에 부풀어 숲 속에서 수행하는 사람을 찾아갔다. 왕은 그에게 "당신의 속옷을 주십시오. 그 옷만이 나에게 행복을 줄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행복한 사람은 껄껄 웃으며 옷을 들추어 보였다. 누더기 옷 안에는 속옷이 없는 맨살 뿐이었다.
우리는 물질의 풍요로움이 곧 행복이라는 믿음을 마음 한 구석에 갖고 있다. 그 믿음 끝에는 정신적 황폐만 있을 뿐이다. 황금과 권력보다 더 고차원적 선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만드신 신은 창조목적에 따라 자연 질서를 부여했고, 특히 인간에게는 그들이 지키며 더불어 살아가야 할 윤리 도덕을 주셨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곧 인격체라는 것은 자기의 고유한 이성을 소유하고, 고유한 사고 판단을 하며, 거기서 고유한 행위를 하고,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임을 뜻한다. 인간은 유혹에 넘어질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이 인간적이다. 그러나 그 유혹에 머무르려는 것은 악령의 역할이며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성령의 역사다.
악령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윤리적으로 부도덕한 것 또는 범죄 행위를 하도록 유혹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능력을 그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당신 자신을 위해 그 능력을 활용하지 않으시고 하느님 뜻을 이루기 위해서만 쓰셨다. 이것이 곧 악령의 패배이다.
세상에서 행복하기 위해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헛된 수고이다. 인간은 이웃과 진정한 사랑을 나눌 때 참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이 영원한 행복은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것이며 우리가 미리 앞당겨 체험할 뿐이다.
부귀영화와 권력을 가진 왕은 불행했지만 이런 것들을 다 놓고 피안(彼岸)의 세계와 닿은 도인은 오히려 행복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물은 그 쓰임새에 따라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 소인은 이(利)에 빠르고 군자는 의(義)에 빠르다는 말이 있듯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는 하느님 사랑과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소유한 달란트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선을 위해 나에게 위탁된 것이다. 그것을 자신만을 위해 활용할 때 나는 악마에게 패하게 되는 것이다.
믿음의 셈법을 공부합시다
-장재봉 신부-
하느님 향한 순박한 믿음
가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우리네 삶을 부러워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때문에 태중의 아기로 오시어 알콩달콩 부모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로 자라며 땀흘려 노동하는 평민의 삶을 ‘체험’하신 것이라 감히 헤아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성령께 내몰려 광야에서 “들짐승”과 함께 지내신 ‘마흔 날’을 노아가 방주에서 온갖 짐승들과 생활했던 한 해에 빗대어 봅니다.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시어 사탄에게 유혹 당하게 하신 성령께서는 그날 노아가 방주에 들어서는 순간, 손수 문을 닫아주신 그분이십니다(창세 7,16 참조). 이리 생각하니 오늘 우리의 퍽퍽한 세상살이도 모두 그분께서 작정하고 ‘보내신’ 곳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사실, 노아가 독특한 방주살이를 겪어야 했던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의 삶을 “의롭다”고 평하신 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광야로 내몰린 시기도 세례를 받고 하늘로부터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축복의 말씀을 들으신 이후였습니다. 이리 따지니 하느님 보시기에 사랑스럽고 의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죄다’ 외롭고 힘들고 벅찬 광야생활을 겪었던 사실이 깊이 다가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예감하게 됩니다.
세상은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이리 불공평하냐고 투덜댑니다.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면 왜 세상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느냐고 항의합니다. 뭐든지 맘대로 할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 무슨 이유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처참한 꼴을 당했겠느냐고 따집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인들마저 복음을 살아가는 일이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럽다고 넌덜머리를 냅니다. 당장 덜어달라고 하소연하고 없애주지 않는다고 원망합니다. ‘믿음이 뭔 소용이냐’며 그분께 토라지고 의심하기까지 합니다. 난감한 모습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들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무섭고 두려운 광야에서 노아가 지켜냈던 믿음을 기억하며 기운을 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히브 5,8)을 배우셨던 인간이시니, 틀림없이 그러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의인 노아의 삶을 공부하고 배워 익히는 일이야말로 그분을 닮을 모습이라 확신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노아가 겪은 방주생활은 엄청난 유혹과 시련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두렵고 막막한 상황에서 무조건 ‘예’라고 답하는 일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끝을 모르면서도 매양 ‘믿습니다’라고 의탁하는 일은 큰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방주살이는 땅에서 악인들과 섞여 살아가기보다 훨씬 깊고 난해한 의문과 의혹에 휩싸이게 했던 시험의 때였을 것이 분명하다는 얘깁니다. 어쩌면 방주의 삼백칠십다섯 밤은 방주를 짓기 위해서 땀 흘리고 수고했던 한 세기의 노동보다 훨씬 큰 고난도의 믿음을 필요로 했을 것이라 짚어집니다. 이 때문에 사방이 꽉 막힌 곳에 갇혀 지내면서도 몸소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차별하지 않고 돌본 사실 하나 만으로 그분께 보여드릴 확실한 ‘의인의 증표’를 취득했을 것이라 싶어집니다. 매일 매끼 때마다 먹은 만큼 식량이 줄어드는 걸 뻔히 알면서도 “부정한 짐승”들까지 두루두루 먹이고 살폈던 아량이야말로 ‘곧이 곧대로’ ‘있는 그대로’ ‘더하지도 빼지도 않는’ 하느님을 향한 순박한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노아의 믿음은 얄팍한 인간의 계산이 아닌, 믿음의 셈법임을 깊이 새깁니다.
그날 성령께서는 그분을 광야로 몰아내어 들짐승과 함께 지내도록 하시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결코 낙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넌지시 일깨워 주신 것이 아닐까요. 세상은 들짐승처럼 험한 사람들이 있는 거친 곳임을 분명히 깨우쳐 주려 하신 것이 아닐까요. 들짐승 같은 사람들과 섞여 지낼지라도 꼭 ‘의인’의 믿음을 지키라고 당부하신 것은 아닐까요? 좋은 사람, 마음에 드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넘어 들짐승 같은 “부정한” 존재들까지도 살뜰히 살피고 돌보라는 명령은 아닐까요?
사순, 광야 같은 내 마음에 심어주신 복음을 되새기며 ‘믿음의 셈법’을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내게 맡기신 복음을 “불의한 자들”과도 넉넉히 나누려 마음 폭을 넓히는 때입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셈법에 익숙해져서 그분께 힘을 드리는 자녀이기를 기도합니다.
유혹을 이기는 믿음의 기도
-허영엽신부-
보좌 신부 시절 성당 근처에 한 원로 신부님이 사셨습
니다. 그 신부님은 오랫동안 중풍으로 고생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매달 봉성체를 하러 그 신부님을 방문했는
데 신부님은 그때마다 저에게 고해성사를 보셨습니다.
손자뻘 되는 젊은 후배 사제에게 신부님은 몸이 불편하
신데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시고 고백을 하셨습니
다. 신부님의 고해를 듣고 짧게라도 훈계를 해야 하는 것
이 저에게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신
부님은 제 훈계를 열심히 들으셨습니다. 고해성사를 드
린 후에는 나도 항상 그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보았습
니다. 지금도 재미있는 것은 신부님은 내가 먼저 드린 보
속을 늘 저에게 똑같이 주셨습니다.
어느 날, 신부님께서는 봉성체 후에 저를 앉히고는 말
씀을 하셨습니다. “난 요즘 들어 밤에 너무 고통이 심해
서 하느님을 많이 원망해. 고통이 심해지면 하느님께 대
한 믿음을 버리고 싶은 유혹이 너무 심하게 나를 괴롭혀.
내가 진짜 무서운 건 죽음이 아니라 혹시라도 고통 때문
에 내 믿음을 버릴까 봐 두려워.” 그리고는 나에게 머리
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기를 부탁하셨습니다. 내가 일어
나 신부님의 머리에 손을 얹자마자 신부님은 “주님! 죄
송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하면서 어린애처럼 엉엉
우셨습니다. 나도 신부님과 같이 한참을 울었습니다. 얼
마 후 신부님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신부님께서 유
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를 해달라고 하시던 모습이 많은
시간이 흘러간 지금도 제 기억 속에 생생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
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유혹이란 이 세상,
육체, 악마로부터 옵니다. “유혹은 아름다운 여인처럼
다가온다.”는 말처럼 늘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죽는 순
간까지도 악의 세력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일반적으로
유혹은 설득으로 또는 어떤 쾌락을 제공함으로써 사람을
죄의 길로 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약한 우리 인간에게 마음의
위로가 많이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끊임없이
유혹을 받습니다. 세상에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
습니다. 특히 사탄이 권력과 재물이란 거부하기 힘든 매
력으로 다가오면 더 그렇습니다.
우리가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직 은총의 도움에 의해
서만 모든 유혹에 견디어낼 수 있습니다. 많은 성인(聖
人)들도 예외 없이 많은 악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들도
겸손하고 열정적 기도로 그 많은 유혹의 손길들을 물리
치셨습니다. 유혹은 눈 한번 질끈 감고 자신의 말을 들으
라고 손짓을 합니다. 때로 우리는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때마다 다시 한 번
일어서 주님께 다가가는 믿음의 용기입니다. 그러면 주
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고 “내 아들, 딸아 얼마나
힘들었니? 잘 돌아왔다.” 하시며 우리를 꼭 안아주실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반명순 수녀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오늘 제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 Lectio )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성령이 내려오시고, 하느님의 아들이란 당신의 정체성을 확인받으신 전前 문맥 ( 마르 1,911 )에 이어 오늘 말씀은 ‘광야의 유혹과 복음 선포’ 라는 두 가지 주제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본디 사명은 갈등과 유혹 그리고 논쟁을 불러옵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의해 광야로 내보내 지십니다.( 12절 ) 광야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삭막함과 두려움, 삶의 조건이 결핍된 장소로 떠오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를 사탄과 적대세력이 주둔하는, 곧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원초적인 혼돈의 장소로 인식해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 13ㄱ절 ) 40일은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생활 40년 ( 민수 32,13; 신명 8,2 )과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지낸 40일 ( 탈출 34,28 ) 그리고 엘리야가 호렙산을 향해 걸었던 40일 ( 1열왕 19,1 – 8 )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런 상황들은 40이란 상징적인 숫자와 함께 하느님의 부재중에 초래되는 위기를 암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충실성은 시험과 고통 속에서 실현됩니다.( 히브 5,8 참조 )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은 40일이 지난 후에 유혹을 받지만 ( 마태 4,2 ) 마르코복음에서는 광야 40일이 유혹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스어로 ‘유혹과 시련’ 은 한 단어입니다. 마태오와 루카는 세 가지 유혹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면 마르코는 40일에 걸쳐 행해진 ‘시련’ 을 강조합니다. 비록 광야가 시련의 장소일지라도 “들짐승과 함께 …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 마르 1,13ㄴ절 )는 것은 메시아의 통치 아래 이루어질 조화로운 세상과, 예수님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시련을 이겨낸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시편 91,11 – 13; 이사 11,6 – 8; 65,25 참조 ) 하지만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서 악마는 예수님을 유혹하는데 실패한 후 떠나가지만 ( 마태 4,11; 루카 4,13 ) 마르코복음에서 사탄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활 전반에 걸쳐 계속 유혹합니다.( 마르 8,11; 10,2; 12,15 참조 ) 이처럼 광야는 어느 일정 기간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애에 겪었던 모든 갈등과 유혹을 함축하여 보여주는 장소인 만큼, 우리가 서야 할 자리이며 우리의 소명을 이루어가야 할 자리일 것입니다.
갈릴래아 선교의 시작을 알리는 마르코복음 1장 14 – 15절은 전반부에 이어지는 전도여행의 지리적 여정을 준비하는 한편, 예수님의 복음 선포 전체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와 사도 바오로가 처음 사용했던 용어 ‘복음’ 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내용으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깊이 개입하셨기에 ‘하느님의 복음’ 이라 했습니다.( 1테살 2,2.8 – 9; 2코린 11,7; 로마 1,1 ) 마르코는 이 용어를 빌려와 예수님께서 전하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을 ‘하느님의 복음’ 이라고 합니다.( 이사 52,7; 61,1 )
하느님의 복음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는 선포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는 요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르 1,15 ) ‘때가 찼다.’ 는 것은 이스라엘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온 구원의 새롭고 결정적인 시대가 예수님의 출현과 더불어 동터왔다는 것입니다.( 2,21 – 22 참조 )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이 잡힌 뒤에” 시작한 갈릴래아 선교는 연대기적인 의미보다 예수님과 요한의 활약을 구분 짓는 신학적 의미로서 예수님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나타냅니다.( 14ㄱ절 )
하느님 나라 자체이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 ( 1,1 )께서 그분의 뜻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열어 가실 것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의 자세가 ‘회개’ 와 ‘믿음’ 입니다. 회개가 자기중심에서 하느님중심으로 돌아서는 삶의 전환이라면, 믿음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는 기쁜 소식을 수락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 해도 세상의 것만 추구하는 사람한테 하느님 나라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비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후 後 문맥으로 소명사화가 이어지는데 ( 1,16 – 20) , 이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15ㄷ절 ) 라는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소리쳐 깨우지만, 일어서서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는지요 ?
묵상 ( Meditatio )
광야와 회개 그리고 복음이란 단어가 마음을 꽉 메워옵니다. 풍요가 넘쳐 부족함과 고요함을 찾을 수 없는 우리네 삶의 자리, 어느 자락이 그리스도께서 머무시는 광야일까요 ? ‘주 ! 찬미’ 를 외치면서도 이웃의 빈곤을 외면하고, 고통과 시련이 두려워 진실을 피해 가며, 세상의 가치에 순명하는 그 자리가 오늘날 우리의 죄는 아닐는지요 ? 그 무엇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회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고 외치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우리네 가슴에 반향되지 않을까요 ?
기도 ( Oratio )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시편 130,5 )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을 받은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양승국신부-
<걱정되는 복음>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심판하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마다 떠오르는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제가 부제 때의 일입니다. 미사주례를 하시던 원장 신부님 옆에서 부제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날 복음이 바로 오늘 ‘양과 염소’ 복음이었습니다.
복음 낭독이 끝나고 신부님께서 강론을 하시는데, 온 성당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동시에 큰 제스처로 오른손을 펼치시며 “그 날이 오면, 선행을 많이 한 착한 사람들은 오른쪽에” 하는데, 그가 오른쪽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성씨가 ‘양’씨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살아생전 착한 일이라곤 손톱만큼도 안한 그 나쁜 **들은 왼쪽에!” 하고 왼편을 가리켰는데, 하필 그날따라 왼쪽에 우리 ‘염신부님’이 앉아계셨습니다. 더구나 그 ‘염신부님’은 얼굴도 까무잡잡한데다가, 수염까지 길러 둘도 없는 ‘염소’였습니다.
다른 일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흑염소가 몸에 좋다고 해서 수도원 뒷마당에서 길렀습니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큰 개도 한 마리 기르고 있었는데, 둘이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개도 개지만 염소도 성격이 만만치 않더군요.
한번은 동물 담당 형제가 개밥을 주려다보니 개밥그릇이 너무 지저분해서, 허리를 굽혀 개밥그릇을 씻고 있었습니다. 바로 뒤쪽에 묶여있던 흑염소 녀석이 자기에게는 신경 안 써준다고 화가 엄청났습니다. 항의표시였는지 염소 특유의 모션, 상체를 한번 번쩍 들어 무게가 실리게 한 다음 날카로운 뿔로 우리 수사님 허리를 내리 찍었습니다. 얼마나 아팠던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쁜 녀석’의 비유 때 드실 정도로 염소는 상당히 공격적이고 충동적입니다. 쉽게 분노하고 그 분노를 함부로 표출합니다.
그 결과는 불타는 지옥입니다. 그 다음날 바로 그 흑염소는 흑염소탕 집으로 끌려갔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쉽게 분노하고, 쉽게 흥분하고, 여차하면 공격하고, 틈만 나면 따져들고, 그러면 내면에 평화가 전혀 없습니다. 소화도 잘 안되고, 신진대사도 원활하지 않습니다. 쉽게 병에 노출됩니다. 마음고생, 몸고생이 끊이지 않습니다. 살아서 벌써 지옥을 겪는 것입니다.
반대로 양들을 보십시오. 웬만해서는 흥분하지 않습니다. 고분고분 순종적이고 차분합니다. 꽤 많은 숫자의 양들을 키우던 사람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염소 한 마리를 도축하려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길길이 뛰고 난리법석이랍니다.
반대로 양들은 칼이 목에 들어와도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답니다. 좀 반항하고, 길길이 뛰고 그래야 도축하는 기분이 느껴지는데, 칼을 가까이 갖다 대도 가만히 있으니, 오히려 섬뜩하고 잡을 마음이 안 생기더랍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입장하는 사람들을 양 무리로 비유하셨는데, 다 그 까닭이 있습니다. 양처럼 온순하고,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이고, 내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의지에, 최종적으로 하느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의 내면은 잔잔한 호수의 표면처럼 평온합니다. 마음이 늘 평화롭습니다. 관계도 편안합니다. 그런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곧 천국을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라는 주제의 오늘 복음은 꽤 두려움을 주는 복음입니다. 평소에 교정사목 봉사나 무료급식 봉사에 열심했던 분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계시겠지요.
상선벌악(賞善罰惡)! 천주교 4대 교리 가운데 하나인 상선벌악,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상선벌악의 의미는 이 세상의 삶을 우리가 마칠 때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행동을 보시고 선하게 살았던 사람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신다는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너무나 공평하신 처사,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요?
그러나 꼭 이 잣대만을 들이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하느님은 전자계산기 같은 하느님, 엄격한 재판관으로서의 하느님만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별로 그런 봉사활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고, 지금은 또 봉사 좀 하려고 해도 몸도 성치 않고, 어떻게 할 줄도 모르는데, 어떡하나, 나는 100% 불붙는 지옥인가?” 하며 두려워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절대로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하느님은 무한히 자비하신 분, 우리를 향한 사랑이 지극하신 분,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나태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존재 자체로 행복해하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 하느님 자비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는 나,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비록 일이 꼬이고 잘 안 풀려 실패했지만 나름대로 그간 한번 잘 살아보겠노라고 ‘쌩고생’ 했던 지난 우리 나날을 기쁘게 생각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광야에서
오늘 주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십니다.
광야는 아무도 없는 곳.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곳.
하여
광야에서 예수님은 외로우십니다.
이 광야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겪으실 고독을 앞서 체험하십니다.
당신을 따랐던 그 수많은 사람들과 제자들도 떠나고
당신이 그렇게 아끼는 세 제자도 쿨쿨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당신 곁에 없습니다.
아무도 당신을 위로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괴롭다 해도 아무도 당신 마음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정한 외로움은 누가 옆에 없어서가 아닙니다.
누가 있다 해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당신의 십자가 고통 앞에서 너무도 고독하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자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는 혼자 져야 합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어머니도 이 십자가는 대신 질 수 없습니다.
허나
예수님께서는 이 절대 고독에서 하느님과 대면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절대 고독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이 되고
이 절대 고독이 기도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없는 광야의 고독 가운데서
하느님께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는 동안 광야의 고독을 수없이 체험합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 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중요한 문제에 대해 혼자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어
혼자 벙어리 냉가슴 알 듯 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위로 올라갈수록 더합니다.
이런 면에서 집안에서는 가장이 가장 고독하고,
직장에서는 최고 경영자가 가장 고독하고,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는 장상이 가장 고독하고,
더 올라가면 하느님께서 가장 고독하십니다.
제가 관구장을 할 때입니다.
형제들은 힘들다는 하소연을 저에게 쏟아놓습니다.
형제들은 불만도 저에게 다 쏟아놓습니다.
저희 수도회 여러 문제들을 저의 잘못이라 비난하며
해결책을 내 놓으라 합니다.
저 또한 같은 인간이고
그래서 힘들고 하소연하고 싶고 불만을 터뜨릴 데가 있으면 좋겠는데
형제들은 이런 저에게 온갖 것을 쏟아 붓고
저는 달리 터뜨릴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바로 이 때
누구 의지할 데를 찾기보다 홀로서기를 해야 했고
절대 고독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쓰레기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모든 쓰레기를 쓰레기통이 받아들이는 덕분에 방이 깨끗하지요.
만일 쓰레기통이 쓰레기 받아들이기를 싫다하면
온 방이 지저분하겠지요.
‘그래 내가 형제들의 쓰레기통이 되어 주자!’
‘그리고 가장 큰 쓰레기통인 하느님께 쏟아버리자!’
‘나는 그래도 하느님이 계시니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니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 찾아가 하소연하지 않고 하느님께 하소연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한탄하지 않고 하느님께 한탄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힘을 얻지 않고 하느님께 힘을 얻는 것.
이것이 우리의 기도이고, 사순절 우리의 기도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김 수환 추기경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느끼셨던 고독은
우리에게 교훈적입니다.
“나는 요즘 정말 힘든 고독을 느끼고 있네.
86년 동안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절대고독이라네.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는데도 모두가 다 떨어져 나가는 듯하고,
하느님마저 의심되는 고독 말일세.
모든 것이 끊어져 나가고
나는 아주 깜깜한 우주 공간에 떠다니는 느낌일세.
세상의 모든 것이 끊어지면
오직 하느님만이 남는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주시려고 그러시나봐.
하느님 당신을 더 사랑하게 하려고 그러시겠지?”
두 번째로 광야에서 예수님은 배고프십니다.
광야에는 돌덩이밖에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하여 사탄이 다가와 예수님께 유혹을 합니다.
깜짝 놀랄 일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시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깜짝 놀라는 것도 잠시,
우리는 이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안심도 하게 됩니다.
유혹을 받으시기까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과 똑같이 되심에 감사드리고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시니 수없이 유혹받는 우리도
유혹 자체가 죄가 아님에 안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심하고 감사만 드리고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유혹의 본질을 깨닫고
유혹을 통하여 하느님 아들로 성장해야 합니다.
유혹은 배고픈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배부른 사람은 식욕이 없고
식욕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는 법이지요.
이것은 비단 먹는 것 뿐 아닙니다.
없을 때 소유욕이 생기고 소유욕이 있을 때 유혹을 받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자가 하는 짓은
뱀이 하와에게 부족한 것, 없는 것을 일깨우듯
없는 것을 일깨워 소유욕을 불러일으키고 가지라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도 돌을 내밀며
당신은 빵은 없고 돌밖에 없으니
당신의 능력으로 빵을 만들어 식욕을 채우라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빵은 없어도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
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대답하십니다.
우리 삶에도 유혹자가 많습니다.
명품을 걸치고 와서 내게 명품이 없음을 일깨우고
소유욕을 부추기며 유혹합니다.
갖가지 없음을 일깨우고 욕심을 부추기며 유혹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아직도 배고프다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음에도
뱀이 가지지 못한 것 하나를 일깨우니 못 가진 것만 보고
가진 것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못 가져서 불쌍하고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못보고 못 누리기에 불쌍하고 불행한 것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 불쌍하고 불행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욕심내는 것을 못 가져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많이 가지고 있어도 여전히 배고프고 궁핍하기에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빵에 대한 욕구를 단식을 통하여
말씀에 대한 욕구로 바꾸십니다.
아니 하느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빵에 대한 욕구를 잠재웁니다.
우리도 사순절 단식으로 우리의 온갖 욕구를 영적인 갈망으로 바꾸고
하느님 말씀, 즉 복음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님께서는
광야를 나와 세상 가운데로 들어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기도와 단식으로 복음을 소유한 행복을 당신 혼자 소유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과 그 복음, 그 행복을 나누십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나도 행복하니,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김 추기경의 말씀과 같습니다.
나누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왠 줄 아십니까?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줄 수 없는 법이지요.
같은 이치로 행복이 없는 사람은 행복을 나누지 못할 것이고
나눌 마음이 없는 사랑이 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진짜 행복한 사람은 자기 혼자 행복한 것을 미안해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사랑하는 행복한 사람은
많은 것을 주고도 나누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 행복한 우리는
기도와 단식으로 우리 시대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 불행한 사람에게
우리의 행복을 나누어야 하고
미안하고 죄송스런 마음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자선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이겨야 하는 이유
-전삼용신부-
초등학교 때 들었던 이야기인데, 세상에는 크게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 째는 베짱이와 같은 사람, 즉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부류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자신만 좋으면 된다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개미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들이랍니다. 일은 열심히 하지만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베짱이가 배고픈 것은 그들이 일을 하지 않은 탓이라 하며 나누기를 거부합니다. 사회에서 있거나 없거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 꿀벌과 같은 부류입니다. 이들은 세상에 꼭 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일을 열심히 해서 꿀을 만들지만 꿀을 먹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일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주님이 창조하신 모습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초등학생에게나 적합할 이 이야기를 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 이유는 비유가 단순하지만 옳은 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모든 인간이 이 세 단계의 과정을 차례로 거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을 위해서 일하지도 않고 부모로부터 받기만 합니다. 그 어린아이들은 세상에 큰 도움을 줄 수 없고 오히려 다른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는 베짱이와 같은 단계입니다.
조금 크면 공부를 하고 일도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직장을 얻고 집 사고 결혼하기 위한 개인적인 목적이 강합니다. ‘공부해서 남 주느냐?’, 뭐 그런 삶이죠. 이것이 바로 개미의 삶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성숙하면 슈바이처나 마더 데레사 등과 같이 남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단계까지 다다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모든 위인들은 바로 꿀벌과 같은 삶을 사신 분들입니다.
사실 세상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꼭 필요한 삶을 사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비길 만큼 세상에 좋은 것을 남기고 떠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생명을 남겨주시고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짧은 삶 안에서도 베짱이-개미-꿀벌로의 삶의 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완전하신 분이셨지만 인간이 거쳐야하는 이 단계를 무작정 뛰어넘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렸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베짱이의 삶을 사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예수님 때문에 베들레헴의 다른 많은 아이들이 몰살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이란 이름만으로 세상에 피해를 준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헤로데를 피해 이집트 땅에 가서 숨어 살게 됩니다. 부모까지 고생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인식을 치르러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는 혼자 사라져서 부모가 삼일 밤낮을 찾아 헤매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때는 정말 세상에 피해만 주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인식을 거치고 서른이 되기까지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면서 집에서 조용히 지냅니다. 아마 아버지 요셉의 일을 도와서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나올만하게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한 것은 없습니다. 일은 열심히 하셨지만 자신과 가정을 위해 사신 것입니다. 나이가 서른이 될 때까지 당신과 가정에 충실한 개미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꿀벌의 삶을 사셨던 것인 불과 3년이 되지 않습니다. 가정을 떠나서 세례를 받을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온전하게 꿀벌의 삶을 사셨습니다.
세례란 죽고 다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개미처럼 자신만을 위하는 삶을 죽이고 꿀벌처럼 사랑을 자신의 밖으로 향하게 하는 이타적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깨달음이 있어야합니다. 베짱이로 살던 개미로 살던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은 이웃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자신에게마저 피해를 준다는 것입니다.
아주 어리석인 예가 될 수 있겠지만 하나 들자면, 제가 어렸을 때 한 친구가 사탕을 먹으면서 약을 올리기에 저도 좀 달라고 했는데 그 아이가 저에게 나누어주지 않아서 제가 울면서 집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워낙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동네에는 사탕을 사 먹을 가게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는 사탕 하나가 가장 큰 보물일 수도 있었습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치아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거의 모든 치아가 다 썩어서 한 번에 열 몇 개의 치아를 치료해야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어렸을 적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생 어린이처럼만 사셨다면, 또 당신 가정을 위해서만 사셨다면 하느님나라 문은 지금까지 꼭꼭 닫혀있을 것이고 예수님도 어떠한 기쁨과 영광도 받으실 이유가 없으실 것입니다.
세상과 자신을 망치는 사람들은 바로 자신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뭐 예로 들고 싶지 않지만 굳이 들자면 연쇄 살인범 강호순을 보면 쉽기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종교도 자신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자신에 대해 통제 불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들도 원하지 않는 일을 스스로 하고 있을 때가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몸이 말을 안 듣는 것을 자주 경험하기도 합니다.
세례는 사람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자녀로 살겠다는 결심입니다.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지만 그것으로 끝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40일간 광야에서 교만과 육체와 욕심과 싸웠습니다. 그 무기는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단식하셨습니다. 이렇게 육신을 괴롭힌 이유가 무엇일까요? 베짱이의 이기적인 마음은 모든 사람의 세포 안에 남아 있기 때문에 육체를 죽이다시피 하지 않으면 베짱이의 욕망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세상에 필요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기도와 단식으로 자신을 죽인 이후에야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실 수 있는 힘이 생기셨습니다. 이 말은 이제 이기적인 인간형에서 이타적인 인간형으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유혹은 자꾸 배짱이와 개미형 인간으로 만들어 이기적인 사람이 되도록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참다운 자유이고 온전한 자아실현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단식과 기도로 자신과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나서야 사람들에게 복음은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 복음이란 바로 당신 자신이 체험하신 자유와 행복이 이 세상에서 이미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당신처럼 자신을 이기고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하느님나라라고 선포하시는 것이 복음입니다.
사순은 바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 예수님처럼 40일간 광야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새로 부활한 우리의 모습은 우리 안에 감추어져있는 참 사랑일 것입니다. 다만 나의 욕망 가운데 단 하나라도 이번 사순 기간 동안 싸워 이기도록 합시다. 그러면 그만큼 덜 이기적이 되고 더 사랑할 수 있게 되고 더 필요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배광하신부-
무지개를 세워라
유혹의 시작
인간이 지은 첫 번째 죄인 원죄를 창세기에서는 하와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 원죄의 이야기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의문을 가집니다. 그리고 “왜, 하느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셨을까?” “선악과가 없었다면 죄를 짓지 않았을텐데…” 등의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에덴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를 먹어도 좋다고 하셨고 다만 동산 가운데 선과 악을 아는 그 나무 열매만 먹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저의 묵상은 이러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시골의 어느 아들이 공부를 잘해 아버지께서 아들을 도회지로 학교를 보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을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유학까지 다녀옵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아버지는 아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줍니다. 땅을 팔고 소를 팔아 아들의 뒷바라지를 합니다. 아들은 유학을 다녀와 대학 교수가 됩니다. 그리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립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크고 더 큰 집으로 이사 가기 위하여 시골 아버지에게 내려가 하나 밖에 없는 땅을 팔아 달라고 떼를 씁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주었으나 그 땅 만큼은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받고도 자신이 원하는 마지막 남은 땅을 갖지 못하게 되자 화가 난 아들은 아버지를 살해합니다. 비정하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끔찍한 일이 에덴 동산의 원죄와 너무도 닮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아버지 하느님과 마지막 열매까지 먹어 치우려는 인간의 욕심, 그것이 원죄의 시작이었습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에덴 동산을, 그 축복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그 욕망의 원죄가 우리 스스로 인간이기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아메리카 크리족 인디언 추장은 마지막 남은 모든 것까지도 해치우고 먹어치우려는 게걸스런 백인의 야만을 향하여 이 같은 분노의 말을 남깁니다.
“마지막 나무가 베어져나가고, 마지막 강이 더럽혀지고,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그대들은 깨달으리라. 돈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의 욕망에 의해 포기했던 축복의 무지개를 오늘 하느님께서는 다시 세워주십니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창세 9, 13).
축복의 시작인 회개
우리는 축복의 무지개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끝없는 욕망의 포기와 하느님께로 향한 회개가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 참다운 회개의 신앙, 세례를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자세를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1베드 3, 21).
이것이 회개의 삶입니다. 언제나 바른 양심으로 사는 것, 자신의 양심에 부끄러운 삶이 아닌 모든 것을 뉘우치는 것이 회개입니다. 진정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는 깊은 감동을 받고 많이 애송하지만 낭송할 때마다 마음 한켠으로 부담과 짐스러운 느낌을 받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는 회개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우리가 진정 부끄러워해야 할 참다운 회개는 나의 오만, 편견, 욕망, 욕심, 이기심, 교만 등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같은 세속의 무게로는 결코 날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 같은 얼룩으로는 그 은총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비록 실천적인 삶의 모습은 어렵지만, 인간으로서 부끄러워 할 줄은 알아야합니다. 인간이 진정 인간으로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삶, 그것이 회개입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사순시기, 오늘 우리는 사순의 장막을 열며 깨우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지상에서의 비움, 나눔, 회개의 삶, 그것은 결코 그냥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 속에서 우리가 바뀌어야 할 변화된 모습, 참된 회개의 삶을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격려하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사순을 넘어 부활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 하느님의 나라가 바로 우리 곁에 왔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 삶에 회개가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럴 때 우리는 진정 기쁜 소식인 복음의 행복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이기양신부-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큰일을 하기 전에 천주신명께 빌며 기도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보통 100일 기도를 드립니다. 100일 동안 기도를 위해 먼저 과거의 부정한 것을 씻으려 목욕재계를 하고 정한수를 떠놓고 정성껏 빌고 빕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은 100일간이 아니라 40일간 기도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그 관습에 따라 천주교회는 부활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머리에 재를 얹는 재의 수요일부터 40일간 회개 기간을 설정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사순 제1주일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회개란 완전히 방향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아, 그거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이것 역시 회개가 아닙니다.
그것은 반성이고 후회이지 진정한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회개란 가고 있던 방향에서 완전히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대전에서 서울을 가려고 서울행 기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보니 내가 탄 기차가 서울행이 아니고 부산행인 겁니다. "아이고, 이거 잘못 탔구나. 어찌하면 좋은가?"
기차 안에서 발을 구르며 안달한다고 가는 방향이 바뀌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음 역에서 내려 서울 가는 기차로 갈아타야 합니다. 그래야 서울로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이런 것입니다. 가던 길에서 완전히 되돌아서 방향을 바꿔 가는 것, 지금까지 삶을 접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인도 성자로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의 어렸을 적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친구들과 놀던 간디가 근처 가게에서 구워 파는 양고기가 어찌나 먹고 싶었던지 궁리 끝에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아버지 침실로 몰래 들어가 장롱을 뒤져 동전 몇 푼을 꺼내들고 상점으로 달려가 양고기를 사서 맛있게 먹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어찌나 맛있었던지 단번에 먹어치우기는 했지만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온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한동안 이불 속에서 뜬 눈으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고통스럽게 밤을 지새우기보다는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늦은 밤에 아버지께 직접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서 작은 종이에 몇 줄을 적어서 그것을 돌돌 말아 가지고 아버지의 침실 문 열쇠 구멍에 끼워 넣고 돌아오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튿날 그는 잠에서 깨자마자 아버지의 침실로 향했습니다. 가서 보니 열쇠구멍에 꽂혔던 종이는 없어졌고 그 구멍을 통해 방안을 살피니 아버지께서 그 종이를 읽으시며 눈물을 훔치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는 더 지체할 수가 없어서 방문을 열고 들어가 그의 잘못을 고백했고, 아버지는 그를 꼭 껴안아 뜨거운 사랑을 표시했습니다.
후에 성인이 되어 이때 경험을 회고하면서 간디는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하느님의 인자하신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순시기는 회개와 은총 시기입니다. 과거 잘못된 길에서 회개하고 새로운 길을 가는 곳에는 용서와 사랑 그리고 희망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잘못임을 알면서도 그 길을 고집한다면 죄의식과 불안 그리고 언젠가는 더 큰 벌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사순 시기에는 천당문이 활짝 열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회개와 기도 그리고 예수님 수난 은총으로 활짝 열렸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시기에 돌아가시면 '직 천당'이라는 말을 하며 사순시기에 돌아가신 것을 성스럽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세상 번잡함과 욕망으로 세례의 은총으로 정화된 삶이 얼룩져 있다면 회개의 삶을 통해 처음 모습을 회복하는 은총의 사순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
-허영엽신부-
나이 지긋한 한 자매가 사순절 피정중에 곰곰이 생각
했습니다.‘ 내가 회개를 하고 용서를 청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그는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습
니다. 그런데 자꾸만 한집에 살고 있는 큰 며느리가 마음
에 걸렸습니다. 물론 그는 며느리와 대놓고 불편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예의를 깍듯하
게 지켰고 서로에게 책잡힐 행동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마음의 거리는 너무 멀었고 큰 장벽이 있었습
니다. 이 자매는 기도 중에 문득 자신이 며느리를 마음 깊
은 곳에서 미워하고 배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며느리와 화해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다음날 아
침 시어머니는 허리를 굽혀 출근하는 며느리의 구두를 정
성껏 닦았습니다. 며느리는 순간 당황했습니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라며 황급히 시어머니를 말렸습니다. 손을
잡은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를 높게 가로막았
던 마음의 장벽이 한 번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후 두 사
람에게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사사건건 마음에 안 들던 상
대의 평소 행동이 더 이상 밉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이 주님께서 이루시는 작은 기적 아닐까요?
우리가 매일 추구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어디입니까? 진
실과 정의, 기쁨과 평화, 진정한 사랑과 행복이 있는 곳이
면 바로 거기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
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
르 1,15). 회개란 무엇입니까? 단순하게 죄를 뉘우치고 반
성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란 마음의 변화, 정
신의 변화를 말합니다. 곧 자기 중심인 삶에서 벗어나 그리
스도 중심인 삶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또한 실천이 함께해
야 진정한 회개의 삶이 됩니다. 거창한 실천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화살기도 바치기,
다른 사람 도와주기, 미소 짓기, 손잡아주기, 부드러운 말
하기, 작은 희생 같은 것 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의 부르심을 받아 지상의 삶을 마칠 때까지 꾸준하게 노력
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를 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 안에
살게 되어 기쁘고 행복하게 됩니다.
사순절은 어쩌면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기다림의 시간
은 우리에게 가장 희망적이고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요? 왜
냐하면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는 주님과 만나기를 기다
리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가슴 쿵쿵 뛰는 기다림
을 느껴보면 어떨까요? 기도와 묵상, 희생과 보속을 통한
기다림이 간절할수록 주님 부활을 맞는 기쁨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언제나 같은 시간에 오는 게 더 좋아. 이를테면 네가 오
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시간이 지
날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
부절못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알게 될
거야. 아무 때나 오면 몇 시에 마음을 곱게 단장해야 하는
지 모르잖아. 기다림이 필요하거든”
유혹에 맞서 싸우는 법
-김명철신부-
우리들의 삶을 뒤돌아보면 그 순간의 쾌락을 인내하지 못해 유혹에 넘어가 죄에 떨어지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는 유혹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은 유혹이 우리의 영혼을 더럽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는 유혹 그 자체가 죄인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유혹은 유혹일 따름,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 자신의 내적인 동의가 있을 때 유혹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유혹은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해 줍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혹이란 수건을 비비는 비누와 같습니다. 비누가 수건을 더럽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깨끗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우리가 유혹과 만나게 되었을 때 유혹에 맞서 싸워 이긴다면 이것은 훌륭한 덕행을 쌓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연이 하늘을 높이 날기 위해서는 바람이 있어야 합니다.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연은 더욱 높이 올라갑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도 하느님과 일치해 있는 영혼일수록 유혹은 더 크고 심한 것입니다. 시편 9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환난 중에 그와 함께 있다.” 유혹을 받게 된다는 것은 지금 내가 하느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혹이 없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인간이 받아야 할 유혹을 체험하시고 극복함으로써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 성령께서 내보내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늘 성령과 함께 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기도하시며 성령과 함께 하셨습니다. 사탄은 호시탐탐 우리 영혼을 앗아가려 넘보고 있습니다. 우리도 기도를 통해 우리 영혼을 성령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셨습니다. 단식은 자신을 비워내어 더욱 거룩하고 깨끗한 영혼을 갖게 합니다. 사탄은 깨끗한 영혼을 더럽히려고 달려들지만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단식, 절제, 희생의 삶은 나 자신을 비워냄과 동시에 하느님으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유혹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떠한 유혹이 오더라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도, 단식, 절제, 희생이라는 영적인 무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은총의 사순시기를 보내면서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아 기도와 단식으로 유혹에 맞서 싸우며 더 깨끗해지고 더 높이 날아오르는 영혼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정애경 수녀-
광야는 시험의 장소인 동시에 유혹의 장소입니다. 시험은 하느님한테서 오는 것으로 우리 영혼에 유익이 되지만 유혹은 사탄이 달콤하게 찾아와서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신명 8,2)라고 하셨듯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창세 22,1-2 참조)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믿음과 순종을 단련하시기 위해 때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하느님의 시험은 우리의 충성과 불충, 믿음과 불신을 있는 그대로 알고자 하시는 것이지 악의 유인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를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기 위해 달콤하게 유혹합니다. 간교한 뱀은 하와를 찾아와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사실이냐고 물으면서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느님께 불평하도록 유혹을 합니다. (창세 3,1-7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마태 26,41) 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히브 2,18)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마르 1,9 참조) 예수님 위에 방금 내려온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1,12 참조) 성령께서는 세례를 받자마자 예수님을 하느님과 함께 있도록 고독 속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제 더 이상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1)라는 하늘의 소리가 아니고 유혹의 소리를 듣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 사탄의 유혹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사탄의 유혹을 직접 경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육신적으로 가장 연약할 때가 예수님을 유혹하기에 가장 적합한 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때를 이용해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사탄은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확신을 받은 우리에게 찾아와 “네가 정말 하느님의 자녀라면 왜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가? 하느님께서 정말 그대를 사랑한다면 어찌 고통 중에 내버려 둘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유혹을 합니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죄와 타협하거나 양심을 거스르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우리도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던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사탄의 온갖 유혹을 이겨낼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헤로데 왕의 비행을 책망하다가 붙잡혔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희망의 빛이 꺼지고 절망과 좌절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5)고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준비하거나 이룰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실 때를 정하셨고 그를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손에 달린 문제가 아니며 오직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복음을 믿느냐 회개하지 않고 복음과 상관없이 사느냐는 우리가 결정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때맞춰 선포하셨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 책임입니다.
왜 예수님은 복음을 믿기 전에 먼저 ‘회개’하고 그 다음에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복음의 씨앗이 사람의 마음에 뿌려질 때 온갖 더럽고 추한 것으로 채워진 마음에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에 먼저 회개해 우리 마음 밭이 깨끗해져야만 말씀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기에 회개하지 않으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면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통상 회개는 지나간 일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생명을 유지하고 완성하실 하느님을 향해 영혼의 관심을 돌이키는 것이고 자기성취·자기만족· 자기업적에서 벗어나 생명의 신비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기성취·자기만족·자기업적을 추구하려는 이기적 경향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향해 우리 영혼의 진행 방향을 근본적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회개는 우리 관심의 중심이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되도록 하는 신앙의 태도이며 결단입니다. 하느님께 온통 마음을 기울이고 사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느님은 무조건 믿는다고 해서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게 간단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 안에 무언가 가득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마음을 비우는 게 관건인데 그것은 하느님께 돌아와야 가능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 우리는 결코 자신을 비울 수 없습니다. 생명의 영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할 때만 우리 욕망이 제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액 주스를 맛본 사람은 원액 10퍼센트에 불과한 음료수를 마시지 않는 것처럼 좋은 것을 아는 사람은 시시한 것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 법입니다. 하느님의 절대적인 생명을 사는 사람만이 자신을 비울 수 있습니다.
인생에 여러 가지 복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큰 복의 하나는 바로 ‘만남의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동업자를 만나는 것은 가장 큰 복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복된 만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남이고 이것이 인생 최고의 행복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변화됩니다. 마치 어둠이 빛이 되듯이 완전히 새로워집니다. 그러나 생활에 변화가 없다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빈껍데기와 같기에 회개의 결과는 삶의 변화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복음을 믿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며 아무런 의심 없이 하느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새벽을 열며
어떤 신부님께서 계셨는데 그 분은 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시는 분이었어요. 그래서 강론도 감사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많았는데요. 특히 강론의 시작은 이렇게 날씨에 대한 감사의 기도로 시작하셨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날씨를 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바로 이렇게 날씨의 대한 감사의 표현을 주님께 한 뒤에 강론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계속 좋은 날씨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표현을 계속 듣던 신자들은 의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다행히 그 지방의 날씨가 항상 좋아서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지만, 만약 나쁜 날씨라면 과연 어떻게 표현하실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드디어 사람들이 기다리던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이 온 것입니다. 교우들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과연 오늘 같은 악천 우에서도 신부님께서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날씨를 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합니다.”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렇게 날씨가 나쁜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신부님의 강론 시작이 궁금해서 구름같이 성당으로 몰려들었답니다.
드디어 미사가 시작되었고 신자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강론 시간이 되었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간직한 채 신자들은 신부님의 시작 감사의 기도를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늘 같은 날씨를 매일 같이 주시지 않음에 감사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옳은 모습일까요? 그른 모습일까요? 그 모습이 보기에 좋을까요? 아니면 보기 싫은 모습일까요? 감사하면서 산다면 우리들은 아주 작은 것을 통해서도 기쁨을 체험하면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감사하면서 사는 것을 옳은 모습이라고 그리고 보기에 좋은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사하면서 사는 모습은 우리들에게 무척이나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앞선 신부님의 경우를 보니, 감사함을 간직하면서 산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특별한 조건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했던 것이며, 내가 누리고 받는 모든 것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간직하기에 불평불만 속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로 나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전혀 없는 공간인 광야. 더군다나 그곳에서는 사탄의 유혹도 함께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전지전능하신 분이 왜 이곳을 당신이 직접 찾아갔을까요? 왜 고생을 사서 하실까요?
바로 우리들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들이 받을 유혹을 당신이 직접 체험하고 이기심으로써 우리들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유혹을 이기신 분께서 힘주어서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바로 우리를 위해서 유혹도 직접 당하셨습니다. 이것만 봐도 얼마나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까요? 그리고 내 삶의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분이시기에 매 순간 감사하면서 살 수 있는 이유는 충분히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께 감사하고 있나요? 오늘부터라도 그 감사의 표현을 해보면 어떨까요?
감사의 기도를 바칩시다.
빠다킹 신부
하느님의 때
-김훈일 신부-
습관처럼 타성에 젖어 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냥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믿는 우리들에게 시간은 의미 충만한 하느님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땅, 같은 시간을 살아도 그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이 사뭇 다릅니다.
어떤 이는 어려움 속에서 천국의 시간을 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풍족함 속에서 지옥의 시간을 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미신과
우상숭배를 통해서 점을 보고 부적을 써서 좋은 때를 찾으려 합니다.
행복한 시간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시간을 하느님의 시간으로 만들 때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기도와 미사입니다. 우리는 기도와 미사를 통해서 하루를
거룩하게 하고 일주일을 거룩하게 하고 한 해를 거룩하게 합니다.
우리는 기도와 미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때를 발견하게 되고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의 삶에서 시작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죽음과 종말이 언제 오든지
이제 그것은 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콤한 유혹
-양승국신부-
세월이 흐르면 좀 덜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유혹거리들은 왜 그리도 많아지고, 또 그 강도가 더해 가는지 놀랄 지경입니다. '좀 들러 즐기다 가라'는 곳은 얼마나 많은지요. '여기야말로 죽여주는 곳, 지상의 천국'이라고 손짓하는 곳은 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렇듯이 우리 일상은 꼭두새벽부터 늦은 밤 되기에 이르도록 하루 온종일 유혹의 연속입니다.
제게 있어 크게 다가오는 유혹들은 어떤 것인가 살펴봤습니다. 야행성인 관계로 새벽에 약한 저이기에 '몸 상태가 천근만근이고, 또 어제 늦게까지 일했으니 오늘 새벽은 푹 좀 자자. 미사, 기도는 나중에 하지'하는 유혹은 제게 있어 가장 큰 유혹입니다. 성당에서 식당으로 가는 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식욕도 없는데 밥은 무슨 밥!'하며 그냥 방으로 들어가고픈 유혹도 큽니다. 컴퓨터를 켜면 여기저기 현란한 색조, 강렬한 문구로 시선을 끌면서 '한번 클릭해보라'는 유혹도 큰 유혹입니다. '어느 저수지에 가니 토종붕어가 우글거린다던데'라는 유혹 앞에서는 맥을 못 춥니다. '이곳은 교통 경찰관도 없는 곳이고, 남들이 다 불법으로 유턴하는데, 괜찮아!'하는 종류의 유혹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외에도 숱하게 많은 유혹거리들이 강렬한 몸짓으로 나약한 우리들 시선을 시시각각으로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지나온 순간순간 돌아보니 삶의 모든 국면이 다 유혹과 연결된 순간들입니다. 때로 유혹이란 그 맛이 너무나 감미롭습니다. 또 아주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래서 유혹은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공들여 쌓아올렸던 탑을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트립니다. 결국 유혹의 끝자락에는 항상 강한 허탈감, 심한 공허함만이 우리를 비웃습니다.
오랜 침묵의 세월을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인 공생활에 앞서 광야로 나가십니다. 사십일 간의 황량한 광야 생활 중에 예수님께서도 사탄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지니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간적 한계와 나약함을 지니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둥 사탄의 유혹은 감미롭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겸손하신 예수님이셨기에, 언제나 자기중심적 삶을 탈피해서 하느님 중심적 삶을 추구하셨기에, 나자렛에서 오랜 수행생활로 내공을 든든히 쌓으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사탄의 강렬한 유혹을 의연히, 그리고 단호하게 물리치십니다.
또 다시 사순절입니다. 유혹도 많아지는 계절입니다. 나이나 위치에 상관없이, 신앙인으로서 연륜에 상관없이 폭풍처럼 강렬하게 우리를 자극하는 유혹입니다. 환한 얼굴로 고백소를 나오지만, 사흘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또 다시 똑같은 잘못으로 가슴을 칩니다. 철저한 비참함에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이번 사순절,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와 굳은 결속을 바탕으로, 겸손하고 열렬한 기도를 바탕으로 단호하게 모든 유혹에 맞서는 승리의 나날이 되면 좋겠습니다.
사막의 교부이자 모든 수도자들의 모범인 안토니오 아빠스 성인(聖人) 역시 셀 수도 없이 많은 사탄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안토니오는 겸손하고 열정적 기도로 그 많은 유혹의 손길들을 물리치고 주님께서 제시하신 그 좁은 길을 의연히 걸어가셨지요.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안토니오에게 있어 하느님 이외의 것들은 다 부차적인 것, 큰 의미가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자신을 찾아오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떠받들었지만 거기에 조금도 연연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겸손했던 안토니오였기에 유혹 앞에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안토니오의 주옥같은 권고 말씀이 이번 한주 우리들 삶의 영적 양식이 되길 바랍니다.
"매일 죽을 것처럼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날마다 일어나면서 저녁때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저녁에 잘 때면 아침까지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우리 생명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리 목숨은 하루하루 주님 손길에 맡겨져 있습니다."
"물고기가 마른 땅에 머물러 있으면 죽듯이 수도자들이 세상에 오래 머물게 되면 정신이 해이해집니다. 그러니 우리 수도자들은 물고기가 바다로 돌아가듯이 끊임없이 사막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서 부단히 산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1,13).
-김정훈 신부-
참된 회개
-김영수 신부-
-유영봉 신부-
묵상길잡이 : 초. 중. 고의 모든 교육이 궁극적으로 대학입시를 위한 과정이나 준비처럼 되어있듯이, 구약의 역사는 한마디로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고, 거기로 수렴되는 것이다. 긴 기다림 끝에 오신 메시아가 30여 년의 준비를 끝내고 드디어 세상을 향해 외친 말씀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것이었다.
1. 세상을 향한 메시아의 첫 외침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은 초. 중. 고등학교의 12년 교육 과정이 마치 대학입시를 위한 준비과정처럼 되어있다. 이와 비슷하게 이스라엘의 역사도 결국은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긴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의 활동은 결국 계시의 완성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한 준비에 그 의미를 두고있다고 하겠다.
오랜 기다림 끝에, 때가 차서“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이신 그 분께서 오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30여 년 동안의 숨은 생활을 마치시고“성령의 이끄심으로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하며 준비한 끝에”구세주로서의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셨다. 그 메시아께서 드디어 세상을 향해 처음으로 외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메시지다. 이 지극히 간단한 말씀은 참으로 오랜 준비와 기다림 끝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해 세상에 건네신 말씀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그만큼 중요하고 깊이 묵상해 봐야 할 말씀인 것이다.
2. 유혹을 받고 죄에 떨어지는 것은 인간의 조건이다.
인간이 하느님과 다른 점은 유혹과 죄를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유혹을 당하신 예수님을 전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는가? 어떤 때엔 예수님도 유혹을 당하셨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만일 예수님이 유혹을 받을 수 없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분이셨다면,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우리의 모법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도 피로하시고, 배고프시고, 목말라하시고, 화가 나기도 하고, 침통해 하고, 두려움에 쌓이기도 하시고, 죽도록 괴로워하시기도 하셨다. 한마디로 우리와 꼭 같은 인성(人性)을 지니셨던 것이다.
인간은 왜 유혹을 면할 수 없는가? 본능을 따라 사는 동물들에겐 자신의 본능이라는 한가지 행동양식밖에 없기 때문에 유혹을 받고 갈등을 느끼는 때가 없다. 즉 동물에겐 선택의 여지 즉 자유가 없다. 그러나 인간에겐 여러 가능성 앞에서 선택의 자유가 있기에 항상 갈등이 따르고, 유혹의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인간은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하는.”(로마7,15) 모순적 존재인 것이다. '나'는 하나인데 나 안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나'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에는 하느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善惡果)를 쳐다보니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따먹고 말았다는 기록이 있다.(창세기3,6) 이는 '따먹지 말라는 금기'와 '따먹어보고 싶은 유혹'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는 인간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천사와 동물의 중간인 인간은 항상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혹에 떨어지는 것, 자유를 잘못 사용하는 것, 이 바로 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느 누구도 죄와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요구 앞에서 “모두가 다 죄인이다”고 할 수밖에 없다.
3. 은총의 도움 없이 회개 할 수 없다
물과 기름처럼 하느님은 죄와 함께 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런데 인간은 죄와 무관할 수 없는 존재라면, 인간이 구원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길밖에 없다. 그래서 죄를 떠날 수 없는 인간은 끊임없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 없이 구원 없다”는 말은 항상 옳은 말이다. 사순절은 회개의 시기이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하여 나에게 돌아 오라”고 우리들을 부르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저런 악습에서 돌아서야 한다."고,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도 뜻대로 되지 않음을 자주 경험한다. 약한 우리에게 있어 회개는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회개할 수 없는 존재이다. “회개는 은총이다”고 단언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비추어 보고 내가 하느님 앞에 좀더 새로워지기 위해서 무엇을 던져버려야 할지, 벗어야 할 묵은 껍질이 무엇인지 알고 구태(舊態)를 벗기 위한 구체적인 결심을 세워야 할 것이다.
회개하고 나서야 우리는 참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하신다. 회개와 복음을 믿는 것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주님 저를 새롭게 해 주소서.”하며 회개의 은총을 겸손되이 청하자. 그리고 주님의 뜻만을 따르기로 결심하며 복음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자.
-서공석 신부-
-김성현 신부-
-김영남 신부-
-정재웅 신부-
우리는 지난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받고 사제에게서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 우리는 오늘 사순 제1주일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교회로부터 예수님으로부터 그 어느 곳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 받습니다. 어디로 돌아갈까요?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과연 어디인가요?
돌아감.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최초 우리가 떠났던 그 자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살라하셨던 바로 그 길, 바로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돌아감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자신의 길이 잘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길을 주장합니다. “어떻게든 되겠지”하고. 그 길이 끝없는 추락의 길임을 알면서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에게 이 사순시기를 통하여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아직 포기할 때가 되지 않았다. 다시 나에게 돌아오라!”그러면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돌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광야 체험.”
돌아감이란 지금 우리들의 있는 그대로의 죄에 물들어 있는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최초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셨던 순수한 원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다시 그 순수한 원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정화의 단계가 필요합니다. 순수했던 우리들의 모습이 죄로 말미암아 악에 물들게 되었다면 그 역의 길을 우리는 또한 걸어야 할 것입니다. “광야 체험” 예수님의 그 “광야 체험”은 단지 척박한 땅에서 고생하고 끝내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성경의 모든 예언자들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이 “사순시기”, “광야체험” 즉 “정화의 단계”를 통하여 다시 순수하게 될 것이고 그 순수함 안에서 다시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순시기. 40일간의 시간이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결코 쉬운 길은 아닐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분명 그 척박한 광야를 지나가야 할 것이기에.
여러분 모두를 이 광야체험에 초대합니다. 함께 동참하시겠습니까?
-조규식 신부-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르 1,13).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유혹을 받으신 사건을 비교적 간략하게 적고 있습니다. 유혹을 받으신 장소와 기간, 유혹자의 이름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가지 영적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유혹이란 원래 "남을 호리어 나쁜 길로 가도록 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크고 작은 유혹을 접하게 되는데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서는 올바른 길로 나갈 수 없습니다. 창세기는 원조 아담과 하와가 간교한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온갖 불행과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신 곳은 광야였습니다. 광야란 온 종일 뙤약볕만이 내려 쪼이는 불모지로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입니다. 성서에서 광야는 기도와 수행의 장소이며 시험의 장소, 악령이 활동하는 장소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한 곳에서 예수님은 40일 동안 유혹과 싸우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의 의미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8).
유혹을 이기신 예수님은 갈릴레아로 가셔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십니다.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는 기록을 예수님의 영적으로 유혹을 훌륭히 극복하시며 지내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첫 복음 선포의 말씀은 그만큼 더 성령으로 가득해서 힘 있고 권위를 더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우리는 오늘 사순 제1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사순시기는 교회안에서 전통적으로 기도와 희생, 자선과 같은 방법을 통하여 이웃 사랑을 실펀하고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더욱 노력하는 때입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유혹을 받으신 오늘 복음의 교훈을 되새기며 사순시기를 뜻 깊게 지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박상대신부-
사순 주일의 주제 성경말씀
사순 제1주일 :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사순 제2주일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사순 제3주일 :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사순 제4주일 :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5)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보내주셨다.”(요한 3,16)
사순 제5주일 :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요한 12,23)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