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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27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오 25,31-46)
Amen, I say to you, whatever you did
for one of these least brothers of mine,
you did for me.'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거룩한 사람은 자신의 동족을 정의롭게 대하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와 나그네, 병든 이와 감옥에 갇힌 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으며, 우리는 그들에게 해 준 것을 가지고 장차 하느님 앞에서 셈을 바치게 될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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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이제는 고인이 된 프랑스의 아베 피에르 신부는 평생을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여, 살아 있을 때 이미 ‘살아 있는 성자’로 불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구분은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구분은 ‘홀로 족한 자’와 ‘공감하는 자’, 곧 ‘타인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자’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바라는 자’ 사이에 있다. 어떤 ‘신자’들은 ‘홀로 족한 자’들이며, 어떤 ‘비신자’들은 ‘공감하는 자’들이다.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사르트르는 말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반대라고 확신한다. 타인들과 단절된 자기 자신이야말로 지옥이다. 그와 반대로 천국은 무한한 공감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곳은 하느님의 빛에 에워싸인 채 나누고 교환하는 데서 오는 기쁨을 누리는 곳이다.”
이어서 그는 영생과 심판에 관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영생은 죽음 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타인의 기쁨과 고통에 공감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에 만족한 채 매일매일을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함으로써 지금 이 순간, 바로 현재의 삶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실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 ? 微?만든 자기 자신의 모습, 곧 홀로 족한 자인가 아니면 공감하는 자인가를 보게 되는 광명의 순간이 바로 심판이 될 것이다. 인간은 이미 자기 자신의 심판관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단순한 기쁨』에서).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굶주린 사람, 헐벗고 목마른 사람, 병든 사람, 나그네와 감옥에 갇힌 사람으로 나에게 다가오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해 준 것이 주님께 해 드린 것이며,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주님께 해 드리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서 심판받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살아 온 모든 것, 곧 홀로 만족하며 살았는지, 남과 나누면서 살았는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모두 꿈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죽은 뒤에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장 작은 이들을 통해서 지금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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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말씀입니다. 우리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이’가 바로 ‘당신’이시라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없이 지나쳤던 가난한 이들이 예수님 당신 모습이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힘을 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도와드려야 할 분이 되셨습니다. 아무런 힘도, 영향력도 없는, 헐벗고 굶주린 이가 바로 당신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의 수많은 성인들이 바로 이 말씀 때문에, 가난한 이들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깨닫고 일생을 바쳤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온전히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자신이 모시고 사는 ‘주님’이 우리 삶 안에 계셔야 합니다. 방에 십자고상만 있다고 주님을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주님을 부르며 기도한다고 해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보다 못한 작은 이들과 친구가 되어 줄 때 비로소 주님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가난한 사람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으로도 부족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섬겨야만 그들이 내가 모시고 사는 ‘주님’이 됩니다.
우리는 삶에서 주로 누구를 만나고 있는지요? 그리고 왜 그들을 만나는지요? 그 만남에서 우리 자신이 섬기는 가난한 이웃은 얼마나 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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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그날’은 선택의 날입니다. 임금님은 자신의 오른쪽과 왼쪽에 사람들을 갈라 세웁니다. 준비된 나라로 함께 갈 사람들과 선택에서 제외되는 이들입니다. 기준은 단순합니다. 이웃을 어떻게 대했느냐는 것입니다. 이웃의 ‘작은 이들’에게 어떤 처신을 했느냐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었습니다.
‘작은 이’는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가족이든 이웃이든 내가 책임질 사람입니다. 그들을 ‘모른 체했으니’ 나도 너를 모른 체한다는 게 주님의 말씀입니다. 굶주리고 목마른 ‘작은 이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사는 것이 두려운 이들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것이 될는지요? 희망 외에 대안은 없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의 말과 희망의 몸짓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감옥에 갇힌 ‘작은 이’는 부정적 시각에 사로잡힌 이들입니다. 먼저 그 대상이 ‘내 자신’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스스로를 편견과 열등의식의 감옥에 가두고 있다면 빨리 그곳에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완성은 주님께서 도와주셔야 가능합니다. 종말의 구원 역시 그분께서 허락하셔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언제라도 사랑하며 사는 일입니다. 내가 책임져야 할 ‘나의 작은 이들’을 그분처럼 사랑하며 사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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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 우리가 어떠한 죄와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헤아리시기보다는, 우리가 타인을 위해 얼마나 도움을 주었고 또 얼마나 이해타산 없이 온전한 마음으로 선행을 베풀었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짓지 않아 용서를 청할 일을 하지 않는 것에 인생의 의미를 둘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이웃을 위하고 또 얼마나 진정한 마음으로 선행을 하는지에 그 가치를 두어야 하겠습니다.
선행이야말로 악행을 이겨 내고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악행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그 마음의 초점이 늘 악행에만 머무르기 때문에 평생 악행과 싸우는 데 소중한 시간을 허비합니다. 그러나 선행을 베풀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자신의 온 삶이 선을 쌓으려는 의지로 향하기 때문에 어느덧 자신의 삶이 긍정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삶의 마지막 심판 때에 하느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악을 피하려는 것보다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에 있음을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하게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
-양승국신부-
<구체적인 나눔과 도움이 필요한 순간>
태국에서 개최된 국제 모임에 참석했다가 함께 참석한 일본 살레시오 회원으로부터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점점 커져만 가는 인명 피해, 매스컴을 통해 전해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현실 앞에 어떻게 위로의 말을 해줘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들과 너무나 가까운 이웃인 우리들이기에, 안됐다, 딱하다, 혀만 차며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을 일이 절대 아닌 것 같습니다. 먼 나라 일로만 여길 일도 아니고, 늑장 부릴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들 바로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슬픈 현실에 동참하고 위로하기 위한 범국민적 차원, 범교회적 차원의 발 빠른 대응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지난해 상영된 ‘해운대’라는 영화에서처럼 범람한 바닷물로 인해 순식간에 큰 건물들이 산산조각 나고, 수많은 차량들과 사람들이 둥둥 떠내려갔습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어린 아들을 급류에 떠나보낸 아버지들, 엄마를 잃고 울부짖는 딸들, 생사조차 알길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현실 앞에 할 말을 잃습니다. 너무나 혹독한 천재지변의 결과 앞에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지금 이 참혹한 현실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 이 엄청난 재앙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오늘 복음은 명확하게 답을 주고 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들에게 마실 물을 건네는 것입니다. 집을 잃은 사람에게 집을 지어주는 것입니다.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옷을 주는 것입니다.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은 바로 하느님께 바치는 노력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반복해서 강조하고 계십니다. 또한 그런 구체적은 노력은 하느님 나라에 들기 위한 가장 필요한 요소임을 되풀이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행히도 국가적 차원에서, 또 민간 차원에서, 이웃을 돕기 위한 발 빠른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포착되고 있습니다.
복음 정신에 따른다면 이런 참혹한 현실 앞에 우리 교회가 가장 먼저 움직여야 마땅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먼저 나서야 마땅합니다. 그들을 위한 우리 각자의 구체적인 큰 나눔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신앙인의 마음
-권태문 신부-
저는 지난 성탄절을 대만의 타오유엔시에서 베트남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보냈습니다. 그곳은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한 이들과 사고로 손목이 잘려 나가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이들이 거주하는 일종의 보호센터 같은 곳입니다.
함께 성탄 전야미사를 드리고, 흥겨운 파티를 열었습니다. 선배신부님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선물을 마련하셨습니다. 그 시간을 즐기던
그들의 환한 얼굴은 저로 하여금 따뜻함을 느끼게 해 주었고, 제가 그들로부터
초대받았다는 사실이 참 기뻤습니다. 그러나 사고로 손목이 잘려 나간 이들을
보는 건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특히 한 여성은 잘려 나간 손 부위를
스웨터로 둘둘 말고 있어, 그의 상처가 얼마나 큰지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파티가 끝나갈 무렵 친근함과 따뜻함 그리고 연민과 아픔으로 그들과 일치를
이루고 있는 저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상처 입은 그들을 보면서 함께 아파하는 마음은 주님께서 주신 사랑의 마음임을 느끼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약한 이들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데에 쓰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약한 이들과 삶을 나눌 때는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 주신 사랑에 감사하며, 이를 보답하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1년 동안 60여 차례 선포한 복음
- 노성호 신부-
그 화제의 복음이 바로 오늘 말씀이다. 장례미사 때마다 선포되는 이 복음을 나는 첫 보좌신부 생활을 하면서 60여 차례나 선포했다. 2004년 10월 1일 첫 본당에 부임해 처음 주례한 미사가 장례미사더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곳에 있던 1년 동안 60여 명의 교우분이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그 가운데는 가수 인순이 씨의 어머니 장례도 있었는데, 무대 위의 화려했던 인순이 씨가 비통함에 쌓여 굵은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장례미사를 봉헌하면서 처음에는 ‘내가 와서 다들 돌아가시는 것인가 ?’ 하면서 모두 내 잘못인 것 같아 의기소침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교우가 다가와서 “힘드시지요 ?” 라며 “새 신부님이 해주시는 장례미사를 받고 싶어서 다들 앞다투어 가시나 보네요.” 라고 말해 주었는데, 그 말씀이 어찌나 고맙던지. 그래서 힘을 얻어 더욱 정성껏 그분들의 영혼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고, 열심히 기도해 드렸던 기억도 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죽음 앞에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지, 하느님께서는 왜 소중한 가족한테 헤어짐의 아픔을 주시는지, 그리고 나의 죽음은 어떤 모습일지 묵상하며 기도했던 날이 참 많았다. 그렇게 묵상하고 기도하며 이 복음을 선포했는데, 놀랍게도 매번 새롭고 신비로운 영감 속에서 주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을 교우들께 전할 수 있었다. 오른쪽, 바로 그 자리에 들기 위해 항상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더욱 작은 이가 되어 함께 사셨던 예수님을 말이다.
하느님의 작은 신들!
-김찬선신부-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은 환멸의 과정입니다.
잘 모를 때에는 어떤 한 사람이 꽤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알아갈수록 그의 추잡하고 추악함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사람을 많이 겪어본 사람,
사람에 대해서 많이 안다는 사람,
그래서 도사연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고 얘기하고
사람에 대한 환상을 가지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저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지 말라고.
그러면 당연히 실망하게 되고
자기의 실망 때문에 공연히 그를 미워하게 될 것이라고
제법 그럴 듯하게 충고를 합니다.
이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틀렸습니다.
사람을 더 깊이 알면 사람이 곧 하느님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는 사람을 알면 알수록 환멸을 느끼게 되지만,
어디서부터는 사람을 알면 알수록 사람이 곧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수운 최 제우 선생은 人乃天이라고 하였고,
부처님은 梵我一如라고 하였으며,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이 곧 당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하느님처럼 좋은 사람이어서
하느님처럼 나를 만족시키는 사람이기를 바란다면,
그때 그는 하느님이 아니고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처럼 그를 사랑할 때
그는 곧 하느님입니다.
어제는 수도원에서도 하루 종일 일본 지진 피해 얘기를 했습니다.
일본이 이렇게 재앙을 당한 것에 대해
일본이 나쁜 짓을 많이 하여 벌을 받았다고 하는 형제들이 없었습니다.
역시 수도자들, 그것도 프란치스코의 제자들다웠습니다.
다들 너무도 안타까워했고,
일본이 해일을 막아줬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일본 덕을 봤다고 했고,
조난자를 구하기 위해 헬기 100대를 빨리 보내지 않고 뭐하냐고 하며
우리 정부의 미흡한 구조 노력을 질타하는 형제도 있었습니다.
일본이 과거에 한 추악한 짓을 보면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이때만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봤던 것입니다.
하늘을 보며 구름도 봅니다.
구름을 보며 하늘도 봅니다.
그러나 구름만 보는 사람은 하늘을 보지 못합니다.
구름만 보고 참 하늘이 어둡다고 얘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보는 사람은 반드시 하늘의 구름들도 보고,
하늘을 이루는 구름들을 봅니다.
참으로 신기합니다.
사랑, 그것도 하느님 사랑에 가까운 사랑일수록
사람을 하느님의 작은 신들로 보게 합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눈이 헷가닥 가게 만듭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그 사람은 화장실도 안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그 사람을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한갓 인간임에 실망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 실망에서부터 점프하여 하느님 사랑으로 올라가면
이제 다시,
아니 이제 비로소 완전하게 인간이 하느님의 작은 신들임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작은 신들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나도 비로소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됩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서 좋게 이야기하라.(괴테)
최후 심판
-류충희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모든 민족들”, 곧 유다인들과 이방인들,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을 가릴 것 없이 온 인류가 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심판관이신 사람의 아들은 옥좌에 앉아서 양들은
오른편에 염소들은 왼편에 세우는데, 이때 양과 염소를 나누는
기준은 신분이나 성분 그리고 신앙이 아니라 살아생전
불행한 사람들에게 베푼 자비와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갖춘 이들에게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고 말씀하시며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굶주리고 목마르며, 나그네 되고 헐벗으며,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한 선한 행동이 곧 예수님께 한 행동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때때로 형식과 제도에 얽매여 미사참여
여부와 고해성사, 묵주기도 횟수와 단체가입 등으로 신앙생활을
판단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이런 판단을 뒤엎는
파격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한 개인이나 공동체가 지금 여기에서
보여주는 삶의 자세, 곧 이웃들에 대한 자세와 감정이 어떠한지가
구원과 멸망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 형제!
-김찬선신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따라 예수님의 말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하여
오늘 우리 공동체의 가장 보잘 것 없는 ㄱ 형제를,
오늘 우리 공동체의 가장 말썽꾸러기 ㄴ 형제를,
오늘 우리 공동체의 가장 천덕꾸러기 ㄷ 형제를,
오늘 우리 공동체의 가장 밉살스러운 ㄹ 형제를,
오늘 우리 공동체의 가장 고민 많은 ㅁ 형제를,
오늘 우리 공동체의 가장 지쳐 있는 ㅂ 형제를,
오늘 우리 공동체의 가장 기죽어 있는 ㅅ 형제를,
그저 말로만 형제라고 하지 않고
마음으로 진정 내 형제라 부르고
더 나아가 예수님으로 모셔야겠다.
주님, 저희가 언제
- 배미애 수녀-
우리는 무언가 변명할 때 “내가 언제?”라는 말을 곧잘 쓴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싶을 때, 특히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 흔히 쓰는 말이다. 또한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선의로 했던 행위에도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상당히 다르다. 전자는 따지는 듯한 반응이고, 후자는 언제 내가 그런 일을 했느냐는 겸양의 태도에서 나온 반응이다.
최후의 심판은 결국 우리 가까이에 있는 가장 작은 이웃을 사랑했는가에 대한 심판이다. 그 사람은 길거리의 걸인이나 장애자를 뜻할 수 있지만 아내나 남편, 수도 공동체의 가장 연로한 이들, 자녀, 남 앞에 내세우기가 부끄러운 형제 또는 나와 믿음 생활을 달리하는 타종교인일 수 있다.
그 사랑은 바로 지금 여기, 현실과 역사 안에서 가장 가난한 이에 대한 애덕의 실천을 요구한다. 그러나 사랑의 실천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만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뜻한 눈빛, 격려하는 말 한마디, 함께 있어준 시간, 기억해 주고 기도해 주는 사랑의 마음도 훌륭한 애덕 실천이 될 것이다.
오늘도 최후 심판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은 계속된다.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보이는 반응에도 차이가 있다. “제가 언제?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요?” 하는 것처럼 말이다. 주위에 가장 가난한 이들을 주님으로 알아보고 기꺼이 맞아들이면서 “제가 언제 당신께 해드렸습니까?” 하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하늘나라를 사는 행복한 사람이다.
양과 염소
-전삼용신부-
저와 함께 사시는 한 신부님이 사기를 맞을 뻔 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 신부님은 지금 유학 1년차이기 때문에 로마에 사기꾼이 얼마나 많은지 잘 모르셨던 것 같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옆에 차가 서더랍니다. 젊잖게 생긴 청년이 밀라노로 가기 위해 고속도로로 빠지는 길을 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유명한 모 의류회사의 디자이너로 근무한다고 하고 자신이 디자인한 가죽코트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동차 연료 게이지를 보여주며 연료가 다 떨어졌는데 연료 넣을 돈을 조금만 빌려줄 수 없느냐고 했습니다. 자신이 이용하는 신용카드가 작동이 안 되어서 돈도 뽑을 수 없다고 하며 답례로 그 코트를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신부님은 도와주고는 싶지만 지갑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보여주었던 코트를 바로 집어넣으며 싹 가버리더랍니다.
저는 이런 사례를 이전에 들어 본 일이 있어서 같은 수법의 사기꾼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나중엔 연료 값 외에 코트 재료비라도 조금 달라고 해서 그것까지 받아내곤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비슷한 사기를 당해 보았습니다. 그들 모두는 정말 친절하게 다가오고 큰 호의를 베푸는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사기인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 자체가 그 사람을 판단해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의도가 정말 순수한 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오시어 모든 사람을 양들과 염소들로 나누는 심판을 내리신다고 합니다. 양들은 자신들이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들에게 해 준 것들이 바로 그리스도께 한 일인지 모르고, 염소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그들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그리스도께 해 주지 않은 것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모두 “우리가 언제 그런 일을 했습니까?”라고 하며 그리스도께 되묻기 때문입니다.
이는 두 부류 모두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베푼 것이 곧 그리스도께 해 준 것”임을 모르고 선행을 행했든 그렇지 않았든 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양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베풀었으니 그들의 사랑에는 어떠한 의도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이미 심판을 받기 전에 양과 염소로 나뉘어져있습니다. 양은 이미 세상에서 양대로 살아왔고 염소는 또 염소로 살아왔을 뿐입니다. 심판은 이미 그들이 하늘나라 들어가기 위해 한 행위보다 그들이 어떤 존재이냐에 따라 이 세상에서부터 결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느님나라 들어가기를 원한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고 합시다. 그들의 자선이 분명 하느님나라에 기록되겠지만 그렇다고 염소가 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연말만 되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해 자선을 하고 사진을 찍는 장면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그 행동으로 그들이 모두 양이란 근거는 없다는 것입니다.
두 여인이 절구질을 하고 있으면 한 여인은 데려가고 한 여인은 남겨 놓으신다고 하고 또 둘이 같이 밭을 갈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 놓으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본질이 행동보다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행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물론입니다.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 믿음은 이미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행동도 의도가 섞여 불순할 수 있음에도 그런 행동으로 자신들이 이미 양들이 되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양은 자신이 착한 행동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냥 사는 것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믿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또 믿는 것을 실천하는 것보다는 내 자신이 어떤 본질을 지니고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참 믿음은 결국 그 사람의 본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원숭이가 사람 흉내 낸다고 사람이 아닌 것처럼 행동으로 만족하지 말고 진정 우리 자신의 본질이 양인지 염소인지 먼저 살피고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어떤 중년 부부가 함께 등산에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아내에게 “나 좀 업어줘!”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부인은 생각지도 못한 남편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며 “그러지 뭐”하였는데, 뚱뚱한 남편이 정말로 자신의 등에 업히자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몇 걸음 가면 내릴 줄 알았는데 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어때 무겁지?”하고 묻는 것이었어요. 순간 부인은 장난스럽게 말을 받았지요.
“응,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댕이는 부었지……. 여간 무거운 게 아닌데!”
이 말을 들은 남편은 “야~ 내려. 무거운 남편 업다가 돌아가시겠다.”하면서 삐쳐서는 혼자 앞서서 걸어갑니다. 부인은 ‘좀 심했나?’ 하는 생각에 화해하려는 마음으로 “여보, 이제 나도 좀 업어줘!”하고 애교스럽게 말했습니다. 남편이 시큰둥하게 부인을 업고 몇 걸음 갔을 때 부인이 물었어요.
“여보, 나는 날씬해서 가볍지?”
남편도 장난삼아 이렇게 말합니다.
“가볍지. 가볍고말고. 머리 비었지, 양심 없지, 허파에 바람 들었지, 버릇없지, 싸기지 않지……. 엄청나게 가볍구먼?”
분위기를 바꾸려고 업어달라고 했던 부인은, 이 남편의 말에 화가 나서 혼자 산을 내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부부는 한동안 서로에게 말을 건네지 않고 필요한 말만 쪽지에 적어서 대화를 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부인에게 ‘내일 아침에 중요한 회의가 있으니까 다섯 시에 깨워!’라는 쪽지를 건넸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남편이 일어나니 일곱 시가 넘은 것이었어요. 남편은 버럭 화를 냈지요. 그 순간 아내가 “당신 머리맡에 가봐요.”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이 침대의 베개 위를 보자 그 곳에는 다음과 같은 쪽지가 있었습니다.
“여보! 다섯 시야. 일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관계를 나 편한 대로만 맺으려고 하고 있지요. 나는 남들에게 화를 내면서도 상대방은 나에게 친절하기를 바라고, 자신은 상대방에게 욕을 하면서도 남들에게는 칭찬 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서로 큰소리를 치면서 싸우고는 항상 상대가 자신에게 너무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관계가 바로 하늘나라에서도 이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최후의 심판 때에 ‘너희가 내 형제들은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세상에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하늘나라에서의 삶은 생각도 하지 않고 지금의 내 삶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최후의 심판 자리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나는 과연 주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지…….
나 편한 대로만 생각하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보세요.
빠다킹신부
우리 모두가 소중한 사람
-이정호신부-
예전에 강원도에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수도원이 공사 중이라 작업복 차림으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삽질을 해야만 했지요. 어느 여름 날 땀을 뻘뻘 흘리며
자매님들이 공사 현장을 찾아오셨습니다. 길이 안 좋아 고갯길을 한참 걸어야
수도원에 닿을 수 있어서 숨이 턱까지 찬 자매님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방수작업을 하고 있던 수사님들을 한참 바라보며 이런저런 불평을 하면서
“아저씨, 여기 신부님 안 계세요?”라고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물어보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신부인데요” 하고 대답했더니 안색이 달라지며
“진작 말씀하시지요. 몰랐습니다” 하며 민망해하셨습니다.
존중해야 할 사람, 대접받아야 할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가
사랑받고 대접받아야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내가 힘들거나 막상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볼품없어 보이거나 도움이 안 될 사람으로 여겨지면 함부로 대하는 것이
우리네 마음이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한
사람이며 당신이 사랑받는 것처럼 사랑받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십니다.
‘주님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변명하지만
우리 모두가 소중한 사람이며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주님을
만나는 길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깁니다.
이주민 예수님
-정순옥 수녀-
지난 10월, 여자수도자장상연합회 주최 이주사목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예수회 안 신부님이 ‘수도자들이 이주사목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에 대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1996년, 인천교구 상담소에서 2년간 실습했을 때 들은 이야기를 나누어주셨는데, 그 말씀은 오늘날 예수님이 이주 노동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1990년 성탄절에 받은 은사인데, 오늘까지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 계기가 있습니다. 성탄전야 미사에 내 앞쪽에 5명의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방인인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사 후 그들을 수녀원에 초대하여 나눔의 시간을 가졌는데 바로 이주 노동자 사목의 가능성을 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내 삶의 가치이고 목적입니다. 사람을 섬기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질문은 우리 삶의 가치와 의미를 밝히고 드러나게 하고 확신을 갖게 해줍니다. 자원 봉사자 토머스 모어 형제님은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하는 일에 지치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섬기고 싶은데 그분은 오늘 이주 노동자의 모습으로 나에게 오신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주변의 작은 자들과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이주민 노동자와 결혼한 여성들에게 따뜻한 웃음으로 다가가 환영하고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을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양승국신부-
<명 설교보다 따뜻한 떡라면 한 그릇이>
신 새벽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도시에 홀로 내려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그래서 오라는 사람도 없는 낯선 도시에서의 새벽, 참으로 막막합니다.
여행을 좋아했던 저는 젊은 시절 혼자서 이 도시 저 도시 많이도 쏘아 다녔는데, 새벽녘에 도착하면 숙소를 잡기도 그렇고, 날이 샐 때 까지 그저 서성댑니다. 때로 역 대합실에서 잔뜩 웅크린 채 새우잠을 자기도 많이 했었는데, 당시의 그 스산함, 처량함이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시간이 그리도 더디 갈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첫차가 출발할 때까지 목이 빠지게 기다리곤 했습니다.
그때 저는 조금은 맛보았습니다. 일정한 거처가 없는 분들, 머리 눕힐 곳 없는 분들의 고초를. 어딜 가도 오라는 사람이 없는 분들, 어딜 가도 반기는 사람 없는 분들, 다음 끼니가 보장되지 않는 분들의 서러움과 막막함을.
그래서 때로 수백 번의 명설교보다도 따뜻한 떡라면 한 그릇이 훨씬 복음적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따뜻한 관심 한번, 작은 배려 한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저는 자주 체험합니다. 때로 단 한 번의 환한 미소가 죽음을 향해가는 한 형제를 살려낼 수 있음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행이 확정된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천국행 티켓을 확보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란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주변은 살펴보면 천사의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얼굴 뵙기만 해도 마음이 안쓰러워지는 말기암환자들, 선뜻 찾아뵙기가 망설여지는 임종 직전의 형제들을 줄기차게 찾아가는 호스피스 봉사자들,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을텐데, 얼굴은 언제나 천사 같습니다. 마치도 친부모 간병하듯 지극정성입니다.
돈 되는 일도 아닌데, 누가 칭찬해주는 일도 아닌데, 주말마다 갇힌 형제들을 찾아가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남들 다가는 꽃구경 한번 안가십니다. 가족들의 싸늘한 시선을 견디는 일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 전혀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사시사철 쓸쓸하고 허전한 영혼들을 어루만져주러 꾸준히 담장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친부모, 친형제보다 더 낫습니다.
노숙자들을 위해 하루 온종일 지지고 볶는 분들도 계십니다. 자식들한테도 잘 해주지 않는 ‘산해진미’를 산더미처럼 만들어 추위와 배고픔에 떠는 노숙자들에게로 달려가십니다. ‘우리한테 반만이라도 해봐라’는 자식들의 원성이 자자함에도 불구하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그 일을 계속 하십니다.
제대로 봉사하시는 분들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한번 시작했다하면 여간해서 그만두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티끌만큼의 대가도 바라지 않으십니다. 한 가지 더, 나타나셨나 하면 어느새 ‘휘리릭’ 사라지십니다.
왜 그분들은 저리도 ‘쓰잘데 없는’ 일들을 하고 계실까요?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심장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또 다른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소리 없이 가난한 형제들을 찾아가시는 분들, 언젠가 하느님께서 주실 상급이 클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가난한 형제들을 찾아가지 못하시는 분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지? 우리는 바로 지옥행이네!’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는 몸이 아파서 가난한 형제들을 찾아가기는커녕 평생 도움만 받고 살았는데, 나는 이제 어떻게 되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 걱정하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이웃들에게 봉사할 기회를 제공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평생 십자가를 잘 지고 오셨지 않습니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반드시 당신 오른편에 ‘좋은 자리’ 하나 마련해주실 것입니다.
‘가난한 형제들을 찾아가고픈 마음은 굴뚝같았는데,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내 코가 석자라서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하는 분들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비록 뜻한 바를 실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지니고 있는 선한 의지, 좋은 지향들을 눈여겨보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아직도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이렇게 나이가 들어 몸도 성치 않은데, 기도 밖에 할 것이 없는데’ 하시는 분들도 전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매일 와 닿은 고통과 십자가를 잘 견디는 것,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꾸준히 기도하시는 것, 그것은 봉사 못지않게 중요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제물입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가 어떠하든 상관하지 말길 바랍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기뻐하고 감사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하느님 나라를 구하길 바랍니다. 천국을 살길 바랍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
-정욱신부-
천국이 어떻게 생겼을지 지옥이 어떻게 생겼을지를 정확히 알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누가 그랬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많지만 직접 다녀와본 적이 없으니 있다는 것을 믿을 뿐 그 곳에 사정은 영 캄캄합니다. 아는 것이라고는 천국은 그저 행복한 곳이라는 상상의 나래와 지옥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다고 전해들은 게 다 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천국과 지옥에 관한 조금은 다른 짐작을 가능케 합니다.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에겐 우리가 어떻게 주님과 함께 이 시기를 잘 살아 천국을 미리 맛볼 수 있는지, 혹은 지옥을 피할 수 있는지를 알려 줍니다.
주님은 먼저 천국에 들어갈 사람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도대체 영문을 모르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이렇게 풀이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지옥에 들어가게 될 사람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들 역시 영문을 모르자 주님은 이렇게 풀이해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천국의 모습과 지옥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누가 천국과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사람과 해 주지 않는 사람이 그들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저는 천국과 지옥을 우리가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아도 천국을 알겠고 지옥을 알겠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는 굳이 뭐가 있을 필요가 없을 듯 보입니다. 세상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데 그 나라에 도대체 뭐가 있어야 하겠습니까? 누구나 도와주고 누구나 해방시켜주고 누구나 위로해주려는 이들이 모여 사는데 그곳이 금은보화가 무슨 소용이며 맛난 음식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그곳은 오히려 우리가 사는 세상보다 더 소담하다 해도 행복이 절로 느껴집니다. 그들의 삶을 입에, 그리고 머리에 옮기는 순간 부터 말입니다.
지옥에는 불보다 더 무서운 사람들이 사는 곳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오히려 꺼지지 않는 불보다 그들의 눈초리에 불안감에 초조함에 더 못살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지옥을 머리에 그리는 것보다 같이 살아야 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옥의 고통이란 말 안해도 알 것 같습니다.
천국이 이 보다 더 좋고, 지옥이 이 보다 더 무서운 곳이라면 그건 생각조차 할 수 없으니 하느님께 맡길 일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제시된 이 천국의 길과 지옥의 길은 사실 세상을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니 우리가 사순절에 행해야 할 일들이 곧 천국의 길이되고 또 사는 방법이 되리라는 것을 알아듣는 것이 중요할 듯 싶습니다. 사순절 하루 하루가 고통이요 인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일 천국의 삶이라면 우리는 좀 더 행복하게 그 일들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 마저도 억지로라면 그것은 진심이 아닐테니 좀 생각해봐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참으로 남을 돕고 위로하고 사랑하는 것이 행복한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양과 염소는 주님이 가려내실테니 그것으로 고민하지 말고 지금 우리의 삶에 누군가를 천국으로 보내드릴 수 있도록 오늘도 노력하며 살아야겠습니다.
†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 †
-박상대 신부 -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으로서 최후의 심판에 관한 내용이다. 달리 보면 이는 가르침이라기보다 최후의 심판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이다.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태오복음 22장에 기록된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끝난다.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骨子)라는 것이다.(22,39-40)
그 다음부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준비하는 26장까지는 예언말씀이다. 예언말씀은 구체적인 데서 보편적인 것에로 확대하여 언급된다.(23-25장)
예수께서는 우선 '사랑의 이중계명'을 기준으로 놓고, 가르치고 말만하며 정작 행하지 않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탓하시고, 그들에게 7가지 불행을 선언하시며,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유다인들의 멸망을 예고하신다.(23,1-35)
그리고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세상의 종말과 종말의 징조들을 예언하신다.(23,37-24,28) 그 다음 부분은 ① 인자의 내림(來臨)에 대한 예언, ② 미정(未定)인 종말의 날의 시간에 대한 언급, ③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 ④ 열 처녀의 비유, ⑤ 달란트의 비유, 그리고 ⑥ 최후의 심판에 관한 예언으로 이어진다.(24,29-25,46)
번호를 매긴 이 부분의 대목들을 잘 살펴보면 ②~⑤를 빼고 ①과 ⑥을 직접 연결시킬 때 더 자연스러워 보임을 알 수 있다. 즉 ① 인자의 내림예언(24,29-31)과 ⑥ 최후의 심판예언(25,31-46) 사이에 ②~⑤의 말씀이 삽입되었다는 말이다. ①과 ⑥이 직접 연결될 수 있는 구절들을 읽어보자. ① "그러면 하늘에는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고 땅에서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을 것이다. 그 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어 그가 뽑은 사람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불러모을 것이다."(24,30-31)
여기에 오늘 복음의 시작부분을 직접 연결하여 보자. ⑥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들을 갈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25,31-33) 이렇게 두 대목이 매끄럽게 연결된다. 마태오도 복음을 집필할 때 처음에는 이 두 대목을 바로 연결하려고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기원후 70년에 실제로 있었던 예루살렘의 멸망이 곧바로 세상종말과 인자내림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곧 있을 것으로 믿었던 세상종말과 인자내림이 지체하게 되자 80년 이후 마태오가 복음서를 실제로 집필할 때 ②~⑤를 삽입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②~⑤의 대목이 보여주듯이 ① 인자의 내림과 ⑥ 최후의 심판을 대비하는 일이다. 이는 마태오복음 공동체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은 비중으로 적용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다가올 인자의 내림을 깨어 기다리고, 내림 하실 인자께서 주관하실 최후의 심판을 잘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최후심판을 잘 준비하는 것인가? 오늘 복음을 잘 살펴보자. 천사들을 거느리고 영광에 싸여 오신 인자가 왕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불러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두 부류로 나눈다. 이는 낮에 양과 염소가 들판에서 함께 풀을 뜯어먹다가 밤이 되면 각각의 우리에 드는 것과 같다.
양과 염소로 갈리는 기준은 사랑과 자비를 '행함'과 '행하지 않음'이다. 여기서 의미 있게 보아야 할 대목은, 인자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고, 갈려선 사람들은 이를 서로 다른 인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푼 의인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이웃이 '주님'인 줄을 몰랐다고 말하고 있으며, 사랑과 자비를 베푼 적이 없는 자들은 도움을 받아야 할 이웃이 '주님'이었다면 모른 체하지 않고 기꺼이 베풀었을 것이라며 변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양쪽의 말을 다 일축하고 각각의 경우를 '나에게 베푼 것'과 '나에게 베풀지 않은 것'으로 대별하신다. 결국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주님)에게 해 준 것이다"(40절)는 말이다.
양과 염소처럼 갈려선 사람들은 누구도 이렇게 될 줄을 몰랐다. 오직 인자만이 그런 기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비유가 아니라 최후심판에 있을 실제상황이다. 최후심판의 실제상황에서 세상창조 때부터 마련된(34절) '영원한 생명의 나라'와 '영원히 벌받는 곳'의 구분은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점은 이 보상에 대한 결정이 최후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실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느냐 않느냐에 따라 이미 보상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 바로 종말에 왕좌에 앉아 최후의 심판을 주관하실 '주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原理)는 예수님의 공생활 중 가르침에서 이미 드러났다. 산상설교(5-7장)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예수께서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7,21)고 하신 말씀을 상기해 보라.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고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 쉬운 듯 하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 때 그가 '주님'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좋다. 그것은 단지 인자의 심판기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에서 주님은 '네가 자비를 베푼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그가 바로 나였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오늘 복음은 부활시기가 아닌 시기의 장례미사 복음으로 지정되어 있다. 물론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복음들도 있지만 이 복음의 '내용이 길다'는 이유로 집전자 측으로부터 선포가 거절되는 경우도 많다. 장례미사에 더러 비신자들이 참석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들에게 이 복음보다 더 좋은 가르침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되도록 오늘 복음이 장례미사의 복음으로 선포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마태 25, 31-46)
-유 광수신부-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 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대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대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이방인이었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하나는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 저주받은 사람들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최후심판 때이다.
오늘 복음에서 몇 가지를 묵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한테 선물로 받은 것이다. 즉 나의 생명, 시간, 능력, 이웃 등은 모두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할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것들을 잘 관리하는 것뿐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 인간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 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창세1,28) 하느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잘 관리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사명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창조하시어 인간에게 맡긴 모든 것을 잘 관리하여 번성하게 만드는 것이 복을 받는 일이다.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다. 창조주는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창조주는 하느님이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느님과 인간과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 내가 아니다. 나는 다만 하느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나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가장 작은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뿐이다.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것이 하느님이 나에게 명령하신 것이고 그 명령을 따라 내가 받은 것을 거저 나누어 주는 것이 오늘 나의 사명이요 복을 받는 일이다.
둘째, 하느님이 최후 심판을 내리실 때 사용한 동사는 현재이지만 심판을 내리시는 내용은 과거 동사를 사용하셨다. 즉 심판하실 때에는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는 현재 동사이고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라고 그가 한 행동은 모두 과거 동사를 사용하셨다. 그러니까 최후심판은 최후 심판 때에 가서 즉석으로 이루워 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그가 살았던 행적을 가지고 심판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후 심판은 먼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현재 내가 사용하는 시간을 통해서 이루워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 매 순간은 곧 나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실하게 살아야 할 시간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 오늘이다. 하느님이 나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미래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주시는 것이다. 내가 받아야할 하느님의 축복은 미래에 받을 것이 아니라 오늘 받아야 한다. 하느님은 오늘 복을 주시는 분이시지 마지막 날에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마지막 날에는 당신이 나에게 주셨던 그 복을 거두워 드리실 뿐이다. 따라서 마지막 날에 가서 복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것은 하느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나에게 달린 것이다. 오늘 하느님이 주시는 축복을 잘 받아들여서 축복 받는 삶을 살았으면 마지막 날에 가서 축복을 받을 것이오, 오늘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들이는 삶이 아니라 저주받는 삶을 살면 마지막 날에 가서 저주받게 될 것이다.
셋째,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삶은 어떤 삶이고 저주받은 사람은 어떤 삶인가? 하느님이 축복으로 나에게 주신 삶을 나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삶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오늘 내가 복을 받는 삶이란 가장 작은 이들이 굶주려 있을 때에 먹을 것을 주는 것이요,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것이요,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이요,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는 것이요, 감옥에 갇혀있는 이들을 찾아주는 것이다.
저주 받는 삶은 어떤 삶인가? 오늘 가장 작은 형제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는 것이요,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는 것이요, 이방인을 따듯이 맞아들이지 않는 것이요,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지 않는 것이요, 병든 이나 감옥에 갇힌 이들을 돌보아 주지 않는 것이다. 즉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나누어 주지 않는 것이 저주 받은 삶이요,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나누어 주는 것이 복을 받는 삶이다.
넷째, 내가 받은 것을 나누어 주어야할 "가장 작은 이들"이란 누구인가? 가장 작은 이들이란 내가 하느님 한테 받은 축복을 나누어 줄 대상이다. 그 대상이 부자도 아니요,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도 아니요, 지식인도 아니다. 가장 작은 이란 내가 언제나 만날 수 있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내가 무엇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그 어떤 댓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아무런 조건없이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나누어 주는 것을 겨우 받을 수 있을 정도의 가난한 사람이다. .
"가장 작은 이들"란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 나보다 더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다. 지금 현재 나의 상황이 어떻든 나는 "가장 작은 이들"보다는 나은 형편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주위에 그 어떤 사람도 나의 것을 나누어 주지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모든 이들이 다 내가 나누어 주어야할 대상들이다.
세네카는 "사람은 죽는 것이 아니라, 자살하고 있다."고 하였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생명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요 그것도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영원히 번성하면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오늘도 축복해주시고 그 축복으로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이 축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이 바로 자살하는 사람이다.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심는 것을 거둔다. 심지 않고는 거둘 수가 없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두는 법이다.
아버지께 축복을 받는 사람은 "세상 창조 때부터 나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요, 저주 받는 사람은 "나에게서 더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속으로 들어가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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