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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4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마태 5,17-19)
Whoever breaks one of the least of these commandments
and teaches others to do so
will be called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말씀의 초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고 실천해야 할 규정과 법규들을 가르쳐 주며,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후손들에게도 알려 주도록 명령한다. 하느님께서 주신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는 것이 이스라엘이 살 길이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들을 완성하시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라는 새 법으로 율법과 예언서들을 완성시키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공동 설립자로서 관상 수도회의 기둥 가운데에 한 사람입니다. 그는 가르멜 수도회를 엄격하게 개혁하였으며 철저하게 수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투옥과 오해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를 적대하는 사람들은 거짓과 악의적인 고발로 그를 수도회에서 내쫓으려고까지 하였습니다. 말년에 그는 감옥보다도 못한 독방에서 홀로 지내면서 참기 어려운 학대와 모욕에 시달렸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고 결국 그는 육신의 고통과 형제들의 무관심 속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심지어 장상들은 아무도 그에게 그들 수도회의 설립자라는 명예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자신이 겪는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길이라고 믿고, 어떤 모욕과 고통도 받아들였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그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십자가를 졌습니다. 혹독한 고독과 고통 속에서도 자신은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의 옷을 입히고 사랑의 신발을 신기도록 할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받은 고통과 모욕을 증오와 복수 대신에 사랑으로 갚겠다는 뜻입니다. 그는 끝까지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세상의 지혜를 이긴다고 믿었습니다.
선과 악, 진실과 거짓, 겸손과 오만 사이에는 중간이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편에 서지 않으면 악의 세력에 지배당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하느님의 편에 서 계셨기에 거짓과 악을 이기실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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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몸은 움직여도 마음은 따라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동과 감격이 있어야 몸과 마음도 ‘함께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규칙과 법규가 많은 조직은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자율과 투명성이 앞서야 ‘살아 움직이는’ 조직이 됩니다.
율법의 근본은 사랑입니다. 율법은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님을 천명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율법에 매달리는 행위를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매달리면 폐쇄적인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찌 율법뿐일는지요? 무엇이든 거기에 ‘목을 매고’ 살아가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계율이고, 사람을 위한 계명입니다. 이것을 망각했기에 엉뚱한 방향으로 갔습니다. 유다인 역시 몰랐기에 율법을 ‘글자 그대로만’ 지키려 했습니다. 숲을 못 보고 나무만 본 셈입니다. 어떤 법이든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사람을 법에 ‘옭아맨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조직이든 단체든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은 언제나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려고 단체에 가입했는데, 그 안에서 ‘상처를 받는다면’ 곤란한 일입니다. 더구나 규칙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주고 있다면 바리사이의 조직과 다를 바 없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거짓 율법’과 ‘참된 율법’을 구별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거짓 율법은 인간이 만든 것을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처럼 꾸며 놓은 것입니다. 당연히 사람을 옭아매고 못살게 굽니다.
그렇지만 참된 율법은 해방과 자유를 줍니다. 기쁨과 편안함을 제공합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사랑의 계명’이라 하셨습니다.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합니다. 소극적인 율법 준수를 ‘적극적인 실천’으로 바꾸라는 것이 말씀의 의도입니다. ‘하지 말라’는 율법을 ‘하라’는 계명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일상사에도 ‘하지 말라’는 지시가 너무 많습니다. 그 많은 ‘금지 사항’이 있음에도 현실은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다가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1서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천사의 언어를 말하고 예언의 능력을 지니며 재산의 전부를 나누어 준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장 참조).
그러니 사랑을 가슴에 담아야 합니다. ‘하지 않는’ 사랑이 아니라 ‘하는’ 사랑입니다. 자녀들에게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하라’는 말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러면 부모의 사랑이 아이들에게 쉽게 전달됩니다. 사랑을 받아들이면 아이들은 금방 환하게 바뀝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은 확실하게 묵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네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의 깊은 의미를 올바르게 제대로 알아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묵상은 대충 어느 정도 생각을 하면서 기도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약간의 위안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만, 영적 위안을 얻는 수준까지 이르고자 한다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알아듣고 있던 것보다 한 뼘 더 깊이 파고들어 알아듣는 게 없다면 영적 충만을 기대하기 어려우니까요.
예수님은 안식일 규정을 어떻게 준수하느냐를 놓고 논쟁을 곧잘 벌이시고, 적어도 외형상으론 그 규정을 어기곤 하셨습니다. 이러다 보니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모두 폐지하려고 오신 줄로 오해되기 쉬웠습니다. 이 점에 대해 예수님은 경고하고 계시며, 당신의 말씀과 행동을 제대로 알아듣도록 촉구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어떻게 알아듣고 있는지 보면, 바로 그 사람의 존재 깊이와 바닥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초등학생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과 대학생이 이해하는 것 그리고 인생의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이 이해하는 것은 그 깊이와 넓이와 농도에 있어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도 우리 각자는 자신의 존재 수준만큼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해의 폭과 깊이에 있어 차이가 있다는 것이지 초등학생 차원의 이해는 틀렸고 대학생 차원의 것은 맞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는 예수님에 대한 현재의 이해 수준을 바탕으로 조금씩 더 나아가고 깊여 나가야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 나라의 가장 뚜렷한 징표는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추어의 눈
-김효준신부-
미술시간이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교탁 위에
올려놓은 화분과 꽃을 열심히 그렸습니다. 색칠까지 모두 마친 후에 ‘완성된’
그림을 보니 뿌듯했고 만족스러웠습니다. 곁에서 유심히 그림을 보던
선생님은 잘 그렸다는 칭찬과 함께 붓을 들더니 그림의 거의 대부분을
수정하고, 색깔 대부분을 바꾸어 입혔습니다. 나는 처음에 무척 당황했습니다.
완성된 내 작품을 선생님이 다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수정 작업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내 그림은 ‘완성된’ 그림이 되었습니다. 처음의 그림은
내게만 완성된 그림이었을 뿐, 선생님에게는 미완의 그림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손을 거치고 나서야 내 그림은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전문가에게는 보이지만 비전문가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전문가들이 말하는 ‘완성’과 비전문가들이 말하는 ‘완성’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이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마추어인 내 눈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붓을 들어 내 삶을 수정해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완성을 위한 과정입니다. 그러니 섣불리 짜증내고
불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구사항
-김찬선신부-
주님과 우리 사이에 누가 더 요구사항이 많을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많을까,
우리가 주님께 요구하는 것이 많을까?
저를 돌아봤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로 요구하는 것은 많은데
저 자신을 위해 주님께 요구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주님께서 요구할 필요도 없게 미리 다 주신 것이겠지요.
왜냐면 제가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요구사항이 없겠습니까?
저는 한 끼라도 못 먹으면 벌써 요구사항이 생기고,
몸이 조금 불편해도 요구사항이 생깁니다.
하느님께서 채워주시지 않으면 결핍 투성인 존재이니
말로만 요구하지 않았을 뿐이지 존재 자체가 요구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저도 말로서 요구사항을 많이 얘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 먹어 결핍이 많이 느껴질 그때도
그것을 결핍으로 생각지 않는 무욕의 상태가 저이기를 바라고
욕구가 있더라도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주님께 요구하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거듭 얘기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저의 요구사항이 없는 것이 아니고 많은 것입니다.
반면 우리 인간에게 대한 하느님의 요구사항은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요구사항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하느님의 요구사항은 없기도 하고 많기도 합니다.
하느님 당신 자신을 위한 요구사항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을 것이며
당신을 위해 우리 인간에게 무엇을 바라시겠습니까?
自滿自足하시는 분이신데 우리에게 무얼 바라시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사실은 참으로 많으십니다.
어떤 때는 그 요구사항이 너무도 많아서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복음을 보면 이래라저래라 하라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듣기 싫어하고 귀찮아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밥 먹으라는 것과 같고
길을 갈 때 조심하라는 것과 같고
이웃하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의 경우 제가 보살펴 드려야 하는 높은 연세인데도
늘 아침 밥 거르지 말고 잘 먹으라는 잔소리를 하십니다.
전에는 그것을 무척 귀찮게 여기는데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면 그런 잔소리 해 줄 사람도 없을 것 생각하고
요즘은 ‘알았습니다, 잘 먹겠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구약에서는 규정과 법규들이고 복음에서는 복음적 권고입니다.
이것은 다 우리를 잘 살게 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신명기는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할 것이다.”고 얘기하고
복음은 율법의 작은 계명까지도 충실히 지키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많기도 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요구를 더 많이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요구사항이 얼마나 많고 까다롭습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의 요구에 늘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말하자면, 하느님은 늘 우리의 요구에 'Stand by'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양승국신부-
<참된 관상가의 모습>
요즘 많은 분들이 추구하고 갈구하는 바가 있습니다. 깊이 있는 기도생활입니다. 깊은 내면으로의 여행입니다. 결국 진지한 영성생활, 다시 말해서 관상기도입니다.
관상생활에 몰입하게 될 때 얻게 되는 은총은 놀랍습니다. 참 하느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일상적으로 대면하는 결과 그의 영혼은 마치 잔잔한 호수 같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그의 존재를 가득 채우기에 그 어떤 외부환경에도 동요되지 않고 참 평화를 누립니다.
관상생활은 반복되는 단순화 작업의 결실입니다. 지속적인 가지치기의 결과입니다. 복잡다단했던 나의 삶을 단순화 하고 또 단순화하고, 더덕더덕 거추장스러웠던 내 생활을 가지치고 또 가지 칠 때, 결국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기도요 묵상, 하느님이요, 나인 것입니다.
이렇게 관상이란 세상을 향해 드리웠던 내 영혼의 닻을 거두어 하느님께로 내려놓는 작업입니다. 관상이란 내 마음 깊숙이 들어가는 여행입니다. 내 영혼 깊숙이 자리하고 계시는 참 보물인 하느님을 찾아나서는 여정입니다.
실상 필요한 것은 단 한가지 뿐, 그 한 가지만이 나를 충만케 하고, 그 한 가지만이 나를 행복하게 하기에, 그 한 가지만으로 만족하는 생활이 결국 관상생활입니다.
다행스런 것은 더 이상 이토록 아름답고 소중한 관상생활이 더 이상 심산유곡에 자리한 관상수도회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관상기도에로 초대됩니다.
인간이 정말 위대한 이유는 내공이 제대로 쌓인다면, 영혼이 샘물처럼 맑다면, 혼잡한 세상 한 가운데서도 충만한 영성생활, 만족한 관상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정말 대단한 이유는 내면이 충실하다면, 그의 영혼이 하느님 현존으로 가득하다면 최악의 외부적 상황 속에서도 충분히 당당하고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 특별히 관상하는 사람들이 더욱 필요합니다. 침묵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가난한 이웃들의 필요성에 응답할 줄 아는 사람, 고통 받는 이웃들의 울부짖음을 식별할 줄 아는 사람...
참된 관상가는 더 이상 인적이 드믄 산꼭대기에 홀로 머물지 않습니다. 관상생활을 깊이 하면 할수록 이웃과의 유대가 깊어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멍에가 곧 내 멍에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곧 내 고통이 되어야 합니다.
사순절은 관상가가 되는 시기입니다. 외부로 향했던 시선을 거두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기입니다. 내 영혼 깊은 곳에 머물고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시기입니다.
세상 한 가운데서 관상기도에 전념할 때, 내면으로의 여행을 계속할 때, 나를 비우고 또 비울 때, 내 삶을 단순화시키고 또 단순화시킬 때, 작은 계명 하나 하나 역시 아주 의미 있는 계명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사소하고 하찮은 일들 역시 중요한 일들로 변화될 것입니다.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전삼용신부-
제가 처음 유학 나와서 윤리 시험을 볼 때였습니다. 대죄, 소죄를 구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대죄가 되려면 자신이 죄를 짓고 있는지를 알아야하고 또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어야하며 그 죄를 짓는 대상이 무거운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이태리 말을 잘 못할 때이기 때문에 교수님은 쉽게 질문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차를 훔쳤어, 그게 대죄야 소죄야?”
저는 그 때도 대죄와 소죄를 구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당연하다는 듯이 “대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예상한대로 “어떤 사람이 100원을 훔쳤다면 그건 대죄야, 소죄야?”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또 당연하다는 듯이 또 “대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교수님은 놀라서 아주 작은 것을 훔쳤는데 어떻게 대죄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당돌하게, “만약 교수님께서 100원을 훔쳤다면 대죄에요, 소죄에요?”라고 물었더니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지...” 하시며 대답을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죄, 소죄를 구분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죄는 지으면 안 되지만 소죄는 지어도 괜찮은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주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거나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취급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생각보다 큰 것일 경우가 있고 그 반대일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무슨 큰일을 해 드려야 그 분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하느님은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것들을 더 좋아하십니다. 어쩌면 큰일을 하려는 것은 하느님이 아닌 자신을 위한 일일 수 있습니다.
소화 데레사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크게 빛나는 별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어떤 큰일을 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저 죄인들의 회개를 지향으로 기도 시간에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지 않는다든지, 기침하는 수녀님의 옆에 앉아 그것을 참아낸다든지, 빨래할 때 물이 튀는 것을 피하지 않고 맞는다든지 하는 작은 희생들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희생들이 그 분을 성녀로 만들었고 전교의 수호성녀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수난 당하실 때 사람들로부터 많은 조롱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을 가리고 뺨을 때리며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혀보라고 놀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얼굴에 오물을 던지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계신 그 분께 하느님의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고 조롱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은혜를 입었음에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과연 군중 속에 속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만 소리친 사람들은 더 큰 고통을 준 다른 사람들보다 가벼운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모르고 예수님을 괴롭히는 이들보다 많은 은혜를 받고도 예수님을 배신한 군중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까요? 어떤 때는 작은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작은 잘못은 나와 먼 관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큰 잘못보다 자신을 더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영성지도를 받다보니 어떤 신부님들은 너무 엄격하시고 또 어떤 신부님들은 너무 자상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사실 극단적은 것은 다 좋지 않습니다. 특히 자상한 모습으로 “그런 것들은 괜찮아!”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더 조심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고 작은 것까지도 다 지키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신자분들이 많은 선물을 주시지만 받는 사람은 그 물질적 가치로 받지만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할머니의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 지폐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주 작은 것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겉보기엔 크지만 속은 비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작은 것을 크게 여길 줄 알아야 하느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작은 것들을 무시하며 살아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릴수도 있지만, 반대로 일상에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오늘 하루의 작은 일들을 작지 않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 눈에 작고 의미 없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스스로 잘 지키고 또 그렇게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작은 것들에 더 집중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보기 싫은 사람에게 용서한다는 미소를 띄워주는 것 하나부터 성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양승국신부-
<방패막이>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남을 가르치며 사는 일이 얼마나 부담스런 것인지를 다시 한번 실감합니다. 가르치며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부담은 역시 언행의 불일치에서 오는 갈등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받는 스트레스 중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 역시 언행의 불일치로 인한 스트레스입니다. 가끔씩 특강이라도 한번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하느님 앞에 송구스러운지?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심한 우울증이 빠집니다. 다시는 강의 같은 것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다짐합니다.
왜 제게 그런 느낌이 다가오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언행일치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가르침 따로 삶 따로, 말 따로 행동 따로의 삶 때문이겠지요.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삶이 뒷받침되지 않다 보니 그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에 마음이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만큼은 달라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당신이 가르치신 바에 한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가신 것입니다.
복음서 그 어디를 봐도 예수님께서 말씀 따로 삶 따로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복음서 그 어디를 봐도 예수님께서 속보이는 모습, 뭔가 미심쩍은 모습을 보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한 초대형 국제 행사의 조직위원장을 맡으셨던 분의 이야기입니다. 이분 삶의 모토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모든 영광은 함께 일하는 스텝들과 후배들에게" "나는 그저 소리 없이 발로 뛰는 심부름꾼" "나의 역할은 숨은 해결사"라는 모토 아래 불철주야 열심히 뛰어다니셨습니다.
첫 번째 행사이다 보니 모든 것을 제로 상태에서 시작해야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협조를 구해야 했습니다. 이분의 활동 방침은 "발로 뛴다" "현장주의"였습니다.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곳 저곳 스폰서들을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행사 장소나 일정을 잡기 위해서 관계 공무원들을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너무도 갈곳이 많았고 몸이 하나인 게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갈곳은 많고 길은 엄청 막혔습니다.
그래서 낸 아이디어가 퀵서비스 직원 한 사람을 전세 낸 것입니다. 택배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아서 기동력 있게 여기저기 만나야 될 사람들을 만나고 스텝들을 격려하였습니다.
후배들에게 골치 아픈 일이 있으면 즉시 나서서 해결사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동반자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궂은 일, 골치 아픈 일을 다 도맡았습니다.
참된 지도자의 모습이 어떠해야하는지를 잘 보여주셨습니다. 참된 지도자는 뒷전에 앉아서 모든 일을 지시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직접 발로 뛰는 사람, 가장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 아랫사람의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사람, 모든 영광은 자신에게가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돌리는 사람입니다.
오랜 친구가 좋은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 앞에서는 바보가 되어도 좋기 때문이다.(랄프 왈도 에머슨)
영적인 철저함
-남상근 신부-
더 중요한 것, 덜 중요한 것을 따져서 더 중요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시간을 할애하고 노력을 쏟는 것이 사람 사는 이치입니다.
별 볼일 없는 시시한 것을 우선시 하면 일을 그르치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일의 경중을 잘 헤아리는
사람을 판단력이 좋고 현명한 사람으로 여기고 그렇게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말씀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말씀이 따로 있고 덜 중요하고 사소한
말씀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내 취향과 내 생각과 내 처지에 따라
선택하고 싶은 말씀과 모른 척하고 싶은 말씀으로 나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부 중요한 것이고, 전부 거룩한 것이고, 전부
가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말씀과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말씀의
모든 부분을 소홀히 여기지 않도록 초대하십니다. 하늘에서 큰 사람은
오히려 작은 것 하나에까지 전심을 다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끔 어떤 기업에서 생산한 제품들이 리콜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엄청난 하자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대개는 아주 사소한 부품 하나, 눈에 띄지도 않는 기능 하나가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작다고 여기는 것들이 우리 삶을
좌우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작은 것이 사실은 작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소죄?
-전삼용신부-
제가 유학 처음 나와서 윤리 시험을 볼 때였습니다. 대죄, 소죄를 구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대죄가 되려면 자신이 죄를 짓고 있는지를 알아야하고 또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어야하며 그 죄를 짓는 대상이 무거운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말을 잘 못할 때이기 때문에 교수님은 쉽게 질문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차를 훔쳤어, 그게 대죄야 소죄야?”
저는 그 때도 대죄와 소죄를 구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당연하다는 듯이 “대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예상한대로 “어떤 사람이 100원을 훔쳤다면 그건 대죄야, 소죄야?”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또 당연하다는 듯이 “대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교수님은 놀라서 아주 작은 것을 훔쳤는데 어떻게 대죄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당돌하게, “만약 교수님께서 100원을 훔쳤다면 대죄에요, 소죄에요?”라고 물었더니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지...” 하시며 대답을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죄, 소죄를 구분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죄는 지으면 안 되지만 소죄는 지어도 괜찮은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생각보다 큰 것일 경우가 있고 그 반대일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무슨 큰일을 해 드려야 그 분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하느님은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것들을 더 좋아하십니다.
소화 데레사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크게 빛나는 별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어떤 큰일을 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지 않는다든지, 기침하는 수녀님의 옆에 앉아 그것을 참아낸다든지, 빨래할 때 물이 튀는 것을 피하지 않고 맞는다든지 하는 작은 희생들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희생들이 하느님께는 성당을 몇 개 짓는 것보다 수많은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가장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거나 어기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하느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취급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수난 당하실 때 사람들로부터 많은 조롱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을 가리고 뺨을 때리며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혀보라고 놀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얼굴에 오물을 던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계신 그 분께 하느님의 아들이면 내려와보라고 조롱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은혜를 입었음에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과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만 소리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가벼운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모르고 예수님을 괴롭히는 이들보다 많은 은혜를 받고도 예수님을 배신한 군중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까요? 어떤 때는 작은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작은 잘못은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의 큰 잘못보다 자신을 더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영성지도를 받다보니 어떤 신부님들은 너무 엄격하시고 또 어떤 신부님들은 너무 자상하신 분들도 만나게 됩니다. 사실 극단적은 것은 다 좋지 않습니다. 특히 자상한 모습으로 “그런 것들은 괜찮아!”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더 조심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고 작은 것까지도 다 지키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신자분들이 많은 선물을 주시지만 받는 사람은 그 물질적 가치로 받지만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할머니의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 지폐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주 작은 것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겉보기엔 크지만 속은 비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작은 것을 크게 여길 줄 알아야 하느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작은 것들을 무시하며 살아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릴수도 있지만, 반대로 일상에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오늘 하루의 작은 일들을 작지 않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 눈에 작고 의미 없는 것이 없습니다. 소화 데레사처럼 작은 것을 크게 볼 줄 아는 사랑의 마음을 갖고 오늘 하루도 일상의 작은 봉헌을 주님께 드리도록 합시다.
가장 작은 사람
-김찬선신부-
미성숙한 사람과 성숙한 사람.
힘 있고 높은 사람에게는 꼼짝 못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함부로 하는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
힘 있고 높은 사람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도 공손하고 존중하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
독재 권력 아래서는 진실에 어긋나도 말 한마디 못하고
자율적인 상황에서는 법을 함부로 어기는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
독재 권력 아래서건 자율적인 상황에서건
자기 진실에 입각하여 법을 지키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
그런데 이런 미성숙보다도 더 잘못 된 막 되어 먹은 무뢰배가 있습니다.
인자한 사랑을 우습게 여기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오냐 오냐 하니까 할아버지 수염까지 잡아당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사랑과 인자로움을
손자가 존경과 순종으로 응답하지 않고
방자함과 불순명으로 응답하는 막되어 먹음을 얘기하는 말입니다.
오늘 1독서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복음은 또 얘기합니다.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인자하고 친밀하게 가까이 대해 주시니
주님의 계명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데,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즉 가장 모자란 사람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되지 않으려면
- 이정배 목사-
흔히 마태오복음서는 유다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쓰여진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루카복음서가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것과 선명하게 대조되는 부분이지요. 헬라적 문체와 사고방식으로 집필된 요한복음과 비교해 보아도 마태오복음의 독특성은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오복음서의 그런 일면을 잘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께서 율법을 부정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잡수셨고 병자를 고치셨으며 창녀와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신 일 등은 분명 당시의 율법적 기준으로 보면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부정한 자로 여겼고 그로써 하느님을 부정한 죄목을 씌워 그분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케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비단 마태오복음이 아니더라도 성경 도처에 깔려있는 기본 생각이기도 하지요. 정의를 완성시키는 일이 사랑임을 안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율법 중의 율법이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받은 십계명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광야 40년간의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유다 공동체가 유지되었던 것은 실로 이 십계명 때문이었지요. 십계명 속에는 한 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한 인간 상호간의 약속과 여러 조건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익히 알고 있듯이 예수께서는 이 십계명의 정신을 요약하여 다음과 같은 두 명제로 요약해 주셨지요.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마르 12,33)”입니다. 위대한 교부 성 아우구스티노도 이 정신에 입각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는 말을 한 바 있습니다. 문자로서 율법이 아니라 정신으로서 율법을 실천하는 예수님은 말로만 살던 당시 성직자들에게 위험한 존재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율법주의의 폐해는 오늘날에 우리 교회 안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율법이 부정적으로 이해된 것은 문자주의적 특성과 함께 보상원리로 이해되었기 때문이지요. 율법은 본래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자신들도 문자주의에 빠져 교회 내 일체의 행위가 보상을 바라는 일로 전락하지는 않은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헌금을 바치고 봉사를 하는 일이 자신의 업적으로 치부되고 보상을 바라는 일이 된다면 우리 교회는 그 옛날 예수님께서 싫어했던 율법주의와 다름이 없겠지요. 율법의 정신을 살고 있지 못한 우리에게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될 것이란 예수님의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새벽을 열며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사실 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마셔도 얼굴을 비롯해서 온 몸이 새빨갛게 변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또한 불편해서 술 마시는 것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술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술이 맛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술 맛 좋다’라고 하시는데, 저는 이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술 맛이야 항상 쓰지 어떻게 좋은지……. 물론 달콤한 과실주가 있기는 하지만, 저는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단 맛을 내는 술이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저에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어제 점심 식사를 하면서 매운탕을 먹게 되었는데 바로 순간, 술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너무나 신기하고 이러한 저의 모습이 우습기도 했습니다.
본당에 와서 교우들과 어울리면서 저녁마다 술잔을 기울이다보니, 이제는 술을 제가 먼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된 것입니다. ‘술도 자주 그리고 많이 마시면 는다.’라는 이야기가 거짓은 아닌가 봅니다. 하긴 어떤 것도 노력해서 늘지 않는 것이 있을까요? 문제는 내가 늘 수 없다고 스스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술을 감정하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명 감정사가 되었을까요? 오랜 세월을 두고 매일 조금씩 감정을 하다가 술이 혀끝에만 닿아도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또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모든 악기의 음을 정확하게 구별하는 것은 하루 이틀의 노력으로 얻은 능력일까요? 아니지요. 끊임없이 듣고 들어서 정확하게 음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체험하는 것도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주님을 체험하게 해달라는 것은 마치 아무런 연습 없이 명선수 혹은 명연주자가 되어 보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작은 계명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바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비록 오늘 복음 말씀에는 나오지 않지만, 바로 뒤를 이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악~~’ 소리를 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열심한 사람들이 바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들보다도 더 능가해야지만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요?
사랑의 노력은 아무리 해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열심한 사람들이라고 지칭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겉으로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의 실천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현재를 사는 내 자신은 과연 어느 쪽일까요? 겉으로도 열심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예수님의 말씀도 제대로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율법을 강조하는 이유
-허찬란 신부-
마태오 복음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복음서이면서 이스라엘 사람이 썼기 때문에
이스라엘 풍속, 더 자세히 말해 유다이즘을 모르면 복음을 읽어나가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특히 오늘 대목은 율법의 완성자 예수 그리스도란 제목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율법학자를 욕하는데 오히려 예수님은 율법의 실천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의
한 사람이 성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루카, 요한 복음에서는 가당치 않은
공식입니다. 왜 율법을 강조하면서 썼을까요? 그것은 복음서의 저자인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성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조상 제사 문제를 놓고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저희 집안은 바티칸 공의회 이전부터 천주교를 믿어서 제사상에 음식을
올리지 않습니다. 그냥 조상님 사진과 초와 기도서가 전부입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 다른 신부님에게 여쭈었더니 당신네도 당연히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입교를 그 이후에 하신 분들은 제사상에 음식을 올리고
연도를 바칩니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율법은 모세가 받은 계명입니다. 이를 가장 잘
이행하시고 또 완성하신 분이 예수님임을 마태오 복음 저자는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복음 속의 예수님은 늘 공동체 안에서 생각되어집니다.
법을 지키는 의로움, 법을 완성하는 의로움
-최성기 신부-
우리는 많은 부분 법의 지배를 받고 있다. 태어나는 일도 만만치 않아서 출생신고니 호적등재니 여러 가지 법적 절차를 거치게 된다. 죽는 일도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사망신고니 사망진단서니 하는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한다. 사는 동안에도 장사를 하든 사업을 하든 법의 테두리가 정해져 있고, 병원에 가는 일, 아이를 낳는 일, 누군가를 만나 가정을 꾸미는 일에도 보이지 않는 법 절차가 있고, 이를 따라야 제대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매일같이 우리 삶의 과정을 규정하고 기준을 정하는 법은 우리가 그 법에 동의하건 않건 간에 사회에 의로움을 담기 위한 우리 모두의 몸짓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도 어디선가 새로운 법을 쓰고 또 고치고, 다시 쓰고 고치는 일을 반복하는지도 모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율법을 지키는 데서 오는 의로움과 율법을 완성하는 데서 오는 의로움이 있음을 구분하신다. 바리사이의 의로움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의로움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법을 지키는 의로움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해당된다. 곧 종교적 계명이 있는 그대로 지켜지는가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래서 안식일에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의 목록이 만들어지고, 그 목록의 준수 여부가 한 사람의 의로움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법을 완성하는 의로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의로움이다. 계명을 지키되 계명 안에 담겨 있는 진실을 놓치지 않는 자세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현하는 율법 준수다.
사실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리사이의 의로움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 매주 성당에 나오고, 고해성사를 꼬박꼬박 보고, 선을 넘지 않는 생활로도 충분히 의롭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한 발짝 더 나아가기를 요구하신다. 율법 준수뿐 아니라 실제로 율법에 담긴 정신을 살아갈 것을.
완성하러 왔다.
-김건일-
완성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어떤 예언을 ‘이루다’, 어떤 분량을 ‘채우다’라는 뜻이다. 오늘 복음은 두번째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통해서 예언자들의 말씀이 ‘단순히’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는 의미이다. 그보다는 더욱 적극적으로, 그 말씀들을 완성으로 이끌어 율법에 참뜻을 부여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단어는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하여 율법이 근원적인 완성에 이르고 또 애초의 단순성을 다시 찾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규율이나 법률, 혹은 회칙 등을 충실하게 지킨다는 뜻은 그것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하나하나 따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기면 작은 자가 되고, 지키면 큰 자가 된다고 한 것은 여러 가지 행위의 잘잘못을 가리기 위한 의도이지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그런 태도는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체제를 만들어 낼 뿐이다. 인간이 생명을 누리게 하고, 더욱 형제애를 나누는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율법에 정의와 자비를 불어넣어야 한다는 초대다.
복음을 묵상할 때마다 느끼는 한계는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상당히 작의적으로 해석하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이다. 내가 살아야 할 율법에 대한 부담감과 다른 이를 판단하기 위한 잣대 구실을 하고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 율법이 생명을 주는 것이 되기 위해서 율법을 살고 전하는 내가 지녀야 할 태도는 하지 말라는 것에 매여 예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무시한 채 율법을 지키는 데만 열중할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완성하고 싶은지를 아는 것이 그 첫걸음임을 깨닫는다. ...........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양승국신부-
<결국 사랑입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 규칙만큼은, 이 조항만은 꼭 필요하다"며 법을 제정하지만 다들 나중에 후회하기 마련입니다. 최초에는 서로의 편의를 위해, 서로의 유익을 위해 만들어진 내규가 언젠가 두통거리로 남게 되는 것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체나 공동체, 집단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서, 더욱이 특정한 목표를 지닌 공동체라면 함께 살아가기 위한 규칙을 만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희 수도 공동체도 기존에 만들어졌던 생활지침서를 바탕으로 현 시대 상황을 반영해서 새로이 작성했습니다. 새로운 생활지침서를 작성해나가면서 저는 진심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후배들이 어떻게 하면 보다 의미 있는 수도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까? 보다 수도자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고민 고민하면서 겨우 개정작업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후배들에게 와 닿는 느낌은 또 그게 아니었던가 봅니다. 너무나 구체적이고 세밀한 내용들,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것들이어서 어린애 취급받는 느낌도 받았던가 봅니다.
제정자의 마음, 의도를 헤아려보면 모든 규칙들은 한마디 한마디 모두 타당하고 옳은 말씀들이지만, 그 규칙을 실천해야할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언제나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것들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법이나 규칙을 대하는 자세도 천태만상입니다. "큰 일" 나는 것이 아니라면 은근슬쩍 적당 적당히 넘어가는 저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규칙과 위반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번 정해진 규칙이라면 비록 그 법이 조금 미흡하다할지라도 목숨 걸고 지켜나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이왕 지킬 계명이라면 "왜, 하필 이 따위 계명을 다 만들어 사람 괴롭히지?" 등등의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고 확실히 계명을 준수합니다. 계명을 확실히 준수하는 가운데, 그 계명 안에 깃들어있는 진정한 의미, 교훈을 깨닫습니다. 계명 안에 살아계시는 하느님과 형제의 얼굴을 찾아나갑니다.
이런 사람은 진정 규칙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틀 안에 들어가 틀을 깨고 나오는 사람입니다. 법 안에 들어가 법의 틀을 깨고 나오는 사람입니다.
규칙을 지켜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한평생 규칙으로 인해 스트레스 받고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기보다는 차라리 규칙 안으로 들어가 확실히 규칙을 지킴으로서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규칙을 모두 합하면 단 한가지의 규칙이 남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의 규칙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계명을 모두 합하면 단 한 가지 계명이 남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결국 구약의 모든 율법 조항들은 사랑의 계명을 기본 토대로 하고 있으며, 그 목적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을 준수하면서, 안식일 계명을 지키면서, 금육을 지키면서 단지 규칙을 지켜내야만 한다는 의무감에서 준수하게 되면 그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습니다. 결국 사랑이 필요하며 사랑만이 모든 율법의 기본이기에 사랑으로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작은 것이 작은 것이 아니다.
-강영구신부-
예수님, 당신은 이 땅에 가장 작은 자로 오셨습니다. 눈에 보일 듯 말 듯 겨자씨 한 알(마태 13,31-32)처럼 작은 자로 이 땅에 오신 당신은 인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 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 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17,20)
믿음에 크고 작음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처럼 작은 믿음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큰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도 이렇게 판결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 당신입니다.
작은 자로 이 땅에 오신 당신은 큰 것보다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의 시작입니다. 작은 것이 모여서 큰 것이 됩니다. 넓고 큰 강도 작은 개울이 모여서 만들어지고 대해大海도 한 방울의 물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큰일을 할 자격과 능력이 있고, 작은 것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큰 것도 소홀히 하게 마련입니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계명誡命에는 크고 작음이 없습니다. 작은 계명 안에 하느님의 큰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작은 사랑의 실천이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받는 길입니다.
예수님, 오늘 저희가 크고 화려하고 대단하고 엄청나고 사치스러운 것보다 작고 소박한 것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작은 사람 안에서 당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사랑하게 하소서.(一明)
† 가르치는 자는 먼저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
-박상대 신부 -
기원전 1250년경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탈출시켰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대장정의 길에 올랐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초하룻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 이곳 시나이 산에서 모세는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내려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의 백성으로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과 율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출애급기 19장-24장이 담고 있다. 구약(舊約)에 의한 모든 율법은 예수님 당대에 이르러 248개의 행령(하라는 법)과 365개의 금령(말라는 법)으로 발전되었다. 이제 새로운 계약을 앞두고 구약과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이 밝혀진다. 예수께서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글자그대로 꼭 지켜야 할' 율법을 내려 받던 입장과는 달리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입법자(立法者)의 입장에서 율법의 정신과 참뜻을 밝히려 하신다. 이것이 바로 마태오복음에 나타나는 예수 가르침의 진수인 산상설교(5장-7장)이다.
산상설교의 권두에서 참된 행복의 길을 가르치시고(5,3-12), 제자들더러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건실히 유지하고 밝히는 는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신(5,13-16) 예수께서는 이제부터 진정한 율법완성의 길을 보여주실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17-18절) 이로써 예수의 구약율법에 대한 태도는 명확하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율법을 통하여 이미 준비되고, 시작된 하느님의 원초적인, 동시에 결코 곡해되지 말아야 할 의지를 성취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율법 속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본질적인 정신과 의지가 무엇인지는 차후 6개의 대당명제와 이를 결론짓는 황금률(7,12)로 선포된다.
산상설교의 가르침은 결국 예수께서 주시는 새로운 계명과도 같다. 그분은 새로운 계명을 통하여 구약의 율법 하나 하나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정신과 그 참뜻을 밝혀 주신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하나도 없애지 않고 완성하는 길이다. 율법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예수께서는 율법의 일 점이나 일 획에 집착하지 않고 이를 심화시키시고, 때로는 과감하게 이를 폐기시키기도 하실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시는 새로운 계명과 율법의 정신을 먼저 지키고 행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행하도록 가르치는 일이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두 구절(19-20절)은 마태오복음이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기본노선을 산상설교 첫 부분에 언급하고 있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마태오복음서의 독자가 대부분 유대교 출신의 그리스도인이거나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신자라는 사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바이다. 동시에 이 사실은 마태오복음 공동체 안에 구약의 율법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이 있었다는 사실도 말해준다.
예를 들면, ① 구약의 율법이 종말에 이르기까지 유효하다는 입장, ② 유다교 율법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 또는 ③ 예수께서 주시는 새로운 계명만이 오직 유효하다는 입장 등이 그런 것이다. 물론 마태오복음이 견지하는 입장은 세 번째의 지론이다. 그렇다고 다른 입장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의 계명을 지키면서 스스로 구약의 율법을 어기고, 또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 들기는 하되,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게 된다는 결론이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우리들의 자세를 돌아보면 오늘 복음의 마지막 두 구절이 참으로 마음에 와 닿는다. 사순시기는 분명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음식과 언행을 삼가며 부정을 멀리하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하는 일로서 다가올 부활축제를 준비하는 재계(齋戒)의 시기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금육(禁肉)이 규정된 금요일에 '몰랐다', '외식(外食)이라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된다', 더러는 '괜찮다', '재계의 뜻과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등등의 핑계를 운운하며 금육을 쉽게 파기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나부터가 그렇다. 진정한 재계는 정신이나 마음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재계에는 필히 육신의 수행이 따라야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20)
-유 광수신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시다. 어떻게 감히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까지 말씀하실 수 있는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율법이나 예언서는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감히 누가 이렇다 저렇다 하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지켜야할 것이었다. 율법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지켜야하고 그것을 잘 지키는 것이 곧 하느님께 충성하는 것이요, 의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감히 율법에 대해서 폐지 운운한다거나 완성하러 왔다고 말하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그것은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며 율법과 예언서에서 말했던 것들이 이제 이루워지게 되었음을 알리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럼으로써 더 이상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게 하고자 하신 것이며 예언서에 기록되었던 것을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이제는 그것이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 중에서 무엇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것인가?
율법은 지켜야할 계명들이 많이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한다는 등 사람들이 지켜야할 여러 가지 계명들을 너무나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빠져 나갈 구멍이 없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 계명이라고 해서 그것을 다 지킬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지만 그 계명을 지키고자 해도 상황이 여의치 못해서 일을 해야하는 경우도 있고, 또 인간이 나약하기 때문에 남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고, 더러는 도둑질을 하거나 간음할 수도 있다. 그런데 율법은 이런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죄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는 하지만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해야 용서를 받을 수 있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어떤 해답이 없는 것이 율법의 한계이다. 또 동정녀에게서 아들을 낳으리라는 예언이 있는데 그 예언을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뿐이시지 인간이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예언은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완성된 것이다. 이렇듯이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고 이제 그것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율법이나 예언서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신약 시대 즉 예수님이 오신 이 후에 사는 우리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들이다. 유럽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이제는 완성시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마태 13, 16-17)라고 하셨다. 정말 우리는 은혜가 충만한 시대에 살고 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직접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충만한 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행복한 이들이다. 우리가 죄를 짓고 용서를 청하면 언제든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율법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지만 지금은 얼마든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율법을 완성시키러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묵상할 수 있는가?
이 말씀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개인적으로 또는 공동체적으로 지켜 오고 있는 율법이 있을 것이다. 즉 공동체는 공동체가 유지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규칙이나 틀이 있을 것이고, 개인은 개인적으로 자신을 지탱해오고 있는 생각이나 습관 또는 고정관념 등이 있을 것이다. 즉 자기 나름대로 자기 인생관이 있고 그것에 의해 말하고 행동하고 계획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나는 반드시 이런 저런 것을 해야한다. 또는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 된다. 우리 공동체는 이런 공동체이니까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 등 여러 가지 지켜야할 율법들이 있을 것이고 계획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것들이 필요하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규칙도 또는 생각도 완전한 것은 없다. 시대에 따라서 또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항상 변화되어야 하고 새롭게 발전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그런 부족한 면을 채워주고 완성시켜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는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만든 규칙이나 개인적인 생각이나 계획들은 완전하지 못하다. 이런 부족한 면을 완성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뿐이시다.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라는 말씀이 있듯이 말씀에서 빛을 받아야 올바른 계획을 세울 수 있고 올바른 생각이나 규칙을 만들 수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완전하지 못하고 완전한 것은 오직 말씀뿐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완성시켜주는 말씀을 통해서 재해석되어야 하고 재검토되어야 한다. 나의 생각도, 계획도, 공동체의 규칙이나 전통, 관습 등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시켜져야 한다. 완성시키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삶의 기준은 예수님이 완성시키신 계명에 준해야 한다. 그것은 비록 작은 계명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이지만 아무리 나의 생각과 계획이 그리고 공동체의 계획과 규칙이 좋은 것이고 위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이 제시한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면 그것은 버려야 하고 지키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완성시켜야 할 것들이다. 완성시킨다는 것은 새로운 계명 즉 말씀에 의해 재해석되고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에 맞지 않는 것은 복음적으로 돌려 놓아야 하고 복음적인 것이 아닌 것은 폐지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은 매일 매일 복음의 빛으로 재조명해보고 부족한 것은 채우고 완성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완성시키러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복음을 묵상해야 한다. 나의 낡은 관습이나 고정관념 또는 나의 잘못된 생각들을 복음의 빛으로 완성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것이 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낡은 사고나 계획들 또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오늘도 완성시키러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매일 매일 완성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매일 매일 우리는 완전한 자 되어 가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시간은 완성하라고 주신 시간이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일과 만나는 사람은 나를 완성하라고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나의 부족함을 우리의 공동의 부족함을 완성하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하느님 율법의 완전성과 사람이 만든 율법의 불완전성 †
- 두올
우리는 이미 산상설교에서 주님을 통해 시작된 하늘나라 백성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에 대해서 학습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 산상의 8복 설교를 통해서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필요성과 당위성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설교는 위대한 새로운 국가의 통치자가 위대한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하느님의 이름을 가진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아버지의 이름과 성품에 합당한 자녀가 되기를 부탁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산상설교이며 8복의 핵심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연이어 그렇게 새롭게 태어난 하느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천국 백성이 부패해 가는 세상을 썩지 않게 하며, 진리를 잃고 방황하는 어두운 세상에 진리와 영원한 생명의 빛을 비추는 사람이 되기 원하셨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나라에 대한 비젼과 백성들의 권리 의무를 선포하시고 나서, 오늘복음에서 나오는 율법에 관련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럼, 지금부터 오늘복음을 함께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I. 나는 율법을 폐지하러 오지 않았다.
주님은 새로운 하느님 나라 백성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신 후에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복음(마태 5,17-20)은 앞으로 다루게 될 이러한 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내용의 기본 원칙이 되는 두 가지 주제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로 주님의 교훈이 구약 성서의 내용과 일치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17-18). 당시 주님의 가르침은 여러 가지 점에서 새로운 내용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구약 성경의 가르침을 폐지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가르침은 구약 성경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일치되는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둘째로 주님의 가르침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20). 주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이 여러 가지 점에서 성서의 기본정신에서 떠나 있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러한 그릇된 가르침을 교정하고 성경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주제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주님은 율법을 없애러 오지 않았다.
첫째로 주님의 가르침은 구약성경과 모든 면에서 완전히 일치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주님은 17절에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율법과 예언서"는 구약성서 전체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인들은 구약을 2부분 또는 3부분으로 구분했습니다. 구약 성경을 두 부분으로 구분하는 경우는 오늘 본문에 언급된 것처럼 "율법", 즉 모세 오경과, "예언서"들, 즉 그 나머지 책들로 구분했습니다. 유다인들이 역사서나 시가서를 예언자의 글로 간주한 이유는 그들이 여호수아를 비롯해서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을 에언자로 간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태오복음 22,40을 보면 주님은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가리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라는 말은 구약 성서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말한 것입니다. 또한 유다인들은 구약 성서를 세 부분으로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선예언서 외에 거룩한 문서들(성문서 또는 시가서)이라 부르는 문서들을 구분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거룩한 문서들은 시가서와 에즈라, 느헤미야, 역대기 그리고 다니엘서와 같은 책을 말합니다.
루가복음 24,36 이하를 보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에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두려워했으며 그때에 주님은 그들 앞에서 생선 한 토막을 잡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루가복음 24,44를 보면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부활 사건이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글과 시편에 기록된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구약 성서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글과 시편으로 구분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율법이나 예언서, 즉 구약 성서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공동번역성서에서 "없애다"고 번역된 말은 "카타루사이"라는 말로서 이 말은 "뒤집어엎다, 파괴한다, 무너뜨린다, ㅍㅖ한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구약 성서를 뒤집어엎거나, 파괴하거나, 무너뜨리려거나,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다인들은 주님께서 구약 성서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전통적인 율법학자가 아니었으며, 그들이 교육받은 학교에 가서 정식적으로 교육을 받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단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일반 유다인들이 받는 평범한 교육만을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은 성인이 되어 세례자 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을 본 당시 사람들은 아마 주님이 세례자 요한의 제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많은 추종자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여러 곳에서 성서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은 당시 전통적인 종교 지도자였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가르침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정결 규례나 십일조'에 관련한 부분을 말씀하면서, 그들이 성서와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비난은 율법을 없애려고 하는 것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또한 주님은 유다인의 법에서 교제하지 못하도록 규정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교제하며 식사를 하셨고, 안식일에 금지된 규례를 어기고 병자를 치유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서 당시 종교인들은 주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 나자렛 선생은 구약 성서를 믿지 않는가?" "그는 구약 성경을 없애러 왔는가?" "그는 구약 성서와는 다른 새교훈을 가르치려고 하는가?"
2. 주님께서 없애고자 하신 것은 사람이 만든 법이다.
그런 오해가 느끼신 주님은 자신이 구약 성서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유다 랍비들이 성서의 본 뜻과 다르게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규정들을 없애러 온 것이라는 취지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율법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 율법 외에 다른 규정들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율법을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울타리 법"이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울타리 법들을 모은 것을 "미쉬나"라고 불렀습니다. 성서에는 이것을 가리켜 "관습과 전통"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전통적인 가르침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에는 하느님의 말씀인 모세 오경과, 구전을 통해 전해준 미쉬나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미쉬나는 약 5세기 동안 장로들과 랍비들의 가르침을 모아놓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미쉬나는 안식일에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거리를 2000규빗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약 900m 정도 되는 거리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이 거리를 넘어 이동하는 것을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3km를 가기 위해서 800m씩 네 번에 나누어 가면 그것은 안식일을 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이와 같이 미쉬나는 여러 가지 점에서 성서의 정신을 벗어나 있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사례들을 부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모세 율법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벗어난 랍비의 규례들을 부정했던 것입니다.
II.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
앞에서 설명드린 부분을 다시한번 정리하면, 주님의 가르침에는 기존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른 점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일부 사람들은 주님께서 전통적인 종교와 다른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주님이 구약 성서를 없애고 새로운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고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하게 자신의 가르침이 구약 성서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반대하셨던 것은 구약 성서가 아니라 울사들과 바리사이들이 만든 법(규례)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서를 잘 지키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울타리 규정들을 만들었지만 오히려 이런 규정들이 지나치게 세분화되고 형식화되면서 오히려 성서의 정신을 해치는 폐단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성서의 정신을 해치는 이러한 인위적인 규정을 반대하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성서를 폐지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의 원래 정신으로 돌아가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1. 주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
주님은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성서에 "완성한다"고 번역된 말(플레로-사이)은 "완전케 한다, 성취한다, 온전히 순종한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오늘복음에서 이 말은 "끝마친다"(finish)는 뜻보다는, "온전히 수행하고 순종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구약 성서와 일치했으며, 주님은 그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고 또 실천하셨습니다. 주님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말한 성서와 다른 새로운 것을 가르치기보다, 그것을 온전케 하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전한 말씀 외에 새로운 것을 가르치지 않으셨으며,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해 이미 말씀하신 하느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은 철저하게 구약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셨으며, 또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그 예로 주님은 당신의 몸을 속죄 제물로 드림으로써 율법의 참뜻을 이루셨으며, 믿는 자를 구원하심으로 율법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믿음의 백성들이 스스로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모세와 모든 구약의 예언자들은 율법을 성취하실 메시아를 바라보며 기뻐했으며, 메시아가 오셔서 율법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구약 성서를 없애고 새로운 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문은 전혀 근거가 없는 유언비어에 불과했으며, 전적으로 오해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2. 완전한 율법의 효력
주님은 17절에서 당신의 가르침이 구약 성서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케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18절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폐지론자들은 은총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신약시대에는 율법이 필요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율법 중에 아무리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면 안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면 율법의 일 점 일획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룬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의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는 말은 하느님의 법은 "절대적이며 완전 무결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만드신 법이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도 부족함이나 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천지가 존재하는 한 이 법의 효력이 유지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일획은 히브리어에서 가장 작은 글자이며, 일 점은 히브리어 알파벳에서 가장 작은 점입니다. 주님은 천지가 없어진다면 몰라도 천지가 존재하는 한 아무리 작은 계명도 없어지지 않고 다 성취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분명히 말해두는데" 고 선언하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이 표현은 주님께서 매우 중대한 것을 선언할 때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진지하고 엄숙한 자세와 표현을 사용해서 성서의 완전성에 대해 선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모세와 예언자를 통해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완전히 성취될 때까지 그 효력이 지속될 것이라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뜻으로 "분명히 말해두는데..."라고 강력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율법과 예언자의 글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점을 이루고 있으며, 주님 안에서 온전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이러한 진술은 주님께서 선포하신 말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진술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구약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는 도장을 찍으셨습니다. 그 예로 주님은 구약 성서 전체를 설교에서 인용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구약 성서 전체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이셨습니다.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에는 성서 전체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인간이 만든 신화나 이야기, 그리고 시와 잠언 등의 편집물 정도로만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서에 나오는 기적 이야기를 꾸며낸 이야기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구약 성서 전체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며, 그 중 한 획이나 한 점도 모두 성취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35에서도 "성경 말씀은 영원히 참되시다."는 하느님의 분명한 말씀이 있습니다.그러므로 일부 자유주의 학자들과 같이 성서를 인간이 쓴 시나 전설, 신화나 소설, 윤리적 교훈 집, 또는 유다인의 법으로만 보는 일은 매우 위험합니다. 물론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와 같이 부족하고 나약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성령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오류 없이 전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전하고 기록한 성서는 가장 작은 항목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취될 것입니다. 주님의 선언과 같이 이 모든 말씀은 성취된 후에야 세상의 끝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성경 말씀은 영원히 참되시다."고 선언하신 것처럼 엄숙하게 성서 전체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III. 그리스도인과 율법
오늘복음의 묵상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주님은 구약성서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구약성서를 완전히 받아들이셨고, 또 순종하셨습니다. 주님은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구약의 메시아 예고는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서에 기록된 모든말씀에 순종하셨으며, 그 가운데 기록된 예언을 모두 성취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주님은 구약의 권위를 인정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하느님의 말씀임을 삶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구약 성서의 완전성에 대해 말씀하신 후에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구약 성서에 기록된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거나, 그와 같이 가르치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에서 지극히 작은 사람으로 대접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으며 그리고 반대로 작은 계명일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행하며,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와 같이 구약 성서에 기록된 사소한 것까지도 소홀히 여기거나 또 그렇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구약 성서를 신화나 이야기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주님의 경고를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약에 기록된 모든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할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이 곳에서 주님이 언급하신 율법은 도덕법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서에 기록된 율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율법에는 여러 가지 종교적 예식에 관해 규정한 의식 법이 있습니다. 이 법에는 각종 제사와 여러가지 종교적인 행사 규례가 포함됩니다. 이러한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완성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율법에는 민법이나 형사 소송법과 같은 사회법이 있습니다. 이 법은 모세 당시 이스라엘의 특수한 상황에 필요한 민사나 형사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규정된 법이었습니다. 이러한 법률들은 수천 년전에 신정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상황에 맞추어 제정된 법입니다. 그러므로 신정 국가가 아닌 나라에 살거나, 그때와 다른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법들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셋째로 율법에는 십계명과 같이 신앙이나 윤리적인 문제를 다룬 도덕법이 있습니다. 이 법에는 십계명과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여러 가지 규정들이 포함됩니다. 이러한 도덕법은 의식법이나 민법과는 달리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19절에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도덕법을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법 중에서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여기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작은 사람으로 대접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법 중에서 사소한 것까지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또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큰 자로 대접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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