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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29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8,51-59)
"Amen, amen, I say to you,
whoever keeps my word
will never see death."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신다. 하느님께서 이름을 바꾸어 주셨다는 것은 하느님의 선택을 나타내는 특별한 표지이다. 아브라함은 이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후손들에게 믿음의 조상이 될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어 하느님을 잘 알고 계신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고정 관념과 편견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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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신원에 관해 예수님과 유다인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유다인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여겼고 신앙의 모범인 아브라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유다인들에게 아직 쉰 살도 안 된 사람이 아브라함 이전부터 있었다는 말을 하니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을 모욕했다고 생각했고, 더욱이 유다교 신봉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며 돌을 들어 던지려고 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유다인들과 하느님의 관점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과는 대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갖는 권위는 인간적인 권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권위는 하느님의 권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유다인들은 세속적인 권위에 압도되어 장님이 되었고 그 때문에 자신들 앞에 계신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보고 듣고 만질 수 없는 저 너머까지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음의 눈으로 볼 때 존재의 깊은 영혼까지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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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수녀님이 친구 수녀 어머니의 장례 미사에 참석하고 전한 이야기입니다. 그 친구 어머니는 한평생을 아름답게 사시다가 여든아홉의 연세로 선종하셨습니다. 평소 고인의 뜻대로 시신까지 기증한 터라 묘지까지 갈 필요도 없이 장례 미사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너무 짧게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나서 한편으로 허망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수녀님은 삶과 죽음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과 유다인들이 계속해서 갈등합니다. 유다인들은 삶과 죽음을 분리해서 이해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로 보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유다인들 눈에는 자신들의 믿음의 조상들이 죽음과 함께 사라진 존재로 보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모두 하느님 안에 살아 있는 존재로 보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삶과 죽음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 하나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원성 안에는 시간도 공간도 삶도 죽음도 하나입니다.
따라서 주님 안에서 삶과 죽음을 분리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로마 14,8)이라고 고백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분리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보면 우리의 두려움과 슬픔이 훨씬 줄어듭니다. 나이가 들수록 죽음을 자신의 삶에 초대해서 함께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살아 있을 때 주님 안에 살면 죽음은 슬픈 현실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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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들은 예수님과 엇박자를 놓고 있습니다. 말씀의 의미보다는 꼬투리를 잡으려 합니다. 대화가 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마음이 통할 리 없습니다. 그러기에 과격한 발언을 날립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당신이 우리 조상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너무 지나친 말입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마귀 들렸다는 표현은 ‘해서는 안 될’ 표현입니다. 열심인 사람들이 가끔 그런 실수를 합니다. ‘건강한 열심’이 아닌 탓입니다. 신앙도 상식 위에서 뿌리를 내립니다. 그러므로 상식이 건전해야 신앙도 건전해집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지적하십니다. 유다인들도 하느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율법의 주님만을 기억했고, ‘벌주시는 주님’을 먼저 가르쳤습니다. 결과는 독선입니다. 나와 다른 믿음은 무시하고 비난하는 어리석음입니다.
‘벌주시는 하느님’에서 ‘사랑의 하느님’으로 건너와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로운 믿음이 됩니다. 건강한 신앙이 됩니다. ‘자비의 주님’을 깨닫지 못하면 여전히 하느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유다인의 모습으로 남는 것이지요. ‘신앙생활’에서 꼬투리를 잡으려는 말은 언제나 피해야 합니다. 아무리 합당한 이유라도 불평 속에는 은총이 자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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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합니다. 아브라함을 모독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하느님보다 아브라함을 더 신뢰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자이지 그 이상은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성인일지라도 안내자 이상은 아닙니다. 이것을 망각하면 잘못에 빠지게 됩니다. 유다인들이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부심 때문에 예수님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보다 위대한 분은 나타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아브라함을 올바로 보지 못한 결과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바칠 만큼 철저하게 순명한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는 제쳐 두고 엉뚱한 것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본모습을 일러 주는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합니다.
교회 내의 교육이나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본정신을 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심을 엉뚱한 곳으로 몰고 간다면 예수님께 돌을 던지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
- 이연수-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두고 예수님과 설전을 벌입니다.
또한 그들은 인간적 차원에서 영원한 생명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초월적 차원에서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셨다면, 유다인들은 역사적
차원에서 몸이 죽지 않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이해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해석을 달리한 것이지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이에게는 영원히 죽지 않는 구원이 약속됩니다(5,24). ‘지키는’것은 ‘듣는’것 이상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계명을 지키는 일은 요한계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14,21.23-24; 15,20; 17,6; 1요한 2,5),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야말로
당신 가르침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계명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따라 지키며 마음에 새기고, 말씀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으로 옮길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저들이 아브라함과 예언자들을 들먹이는 것은
자신들의 조상도 죽음을 맛보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영원히 살고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과 동등하다고 자처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자세로 실천해야 할까 ?
- 김정택 목사-
저는 지금 강화도에 있는 산마을대안고등학교 이사로 있습니다. 이사가 된 까닭이 희한합니다. 산마을대안고등학교의 전 이사장이신 김의중 씨가 어느 날 저를 찾아 와 ‘이사가 되어주십시오. 그리고 지금 모든 이사를 바꿔 대안교육을 실현해 주실 분들로 채워주십시오. 저는 재산을 좀 내는 시늉이나 할 수 있지 대안교육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 이사장님은 학교를 떠났을 뿐만 아니라 아예 강화도를 떠났습니다. 본인이 그대로 있으면 이사와 교사, 학부모들이 합심해 대안교육을 일구는 데 방해된다고 하시며 깨끗하게 떠나버린 것이지요. 자신의 영광은 추구하지 않는 확실한 표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며칠 전에는 텔레비전에서 <울지마 톤즈>를 보았습니다. 주인공 이태석 신부님이 만난 수단은 남북으로 갈려 오랫동안 전쟁을 하고, 청소년들은 전쟁에 차출되어 죽고, 어린이들은 굶주리고 교육받을 기회가 전혀 제공되지 않는 처참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남수단 톤즈에서 봉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신부님은 자주 질문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당신은 왜 톤즈에 그토록 헌신하십니까 ?’ 하는 물음이었겠지요. 신부님은 글쎄 하면서 ‘너희는 내가 굶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 는 예수님 말씀과 함께 톤즈의 아이들, 주민들이 그리스도로 다가왔다고 했습니다.
혼인과 공동 소유
-전삼용신부-
며칠 전에 오랜만에 예전에 교사하던 한 자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유치원 교사를 하고 있는데 일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넋두리를 하였습니다. 저는 남의 돈 갖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고 하면서 부잣집 아들을 사귀라고 농담으로 말 해 주었습니다.
물론 농담이지만 그리고 결혼을 돈을 보고 해서도 안 되지만 그 안에도 신비한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가난한 자매일지라도 부잣집 아들과 혼인하면 그 남편의 재산은 또한 아내의 것이 됩니다.
각자 재산을 따로 소유하게 될 때는 이미 부부로서의 한 몸은 아닌 것입니다.
유명한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도 예전에 인디아니존스에 출연했던 배우와 재혼하기 위해 전 처와 이혼할 때 자신 재산의 반을 전 처에게 위자료로 주어야했습니다. 비록 아내가 직접 번 돈은 아니었지만 부부라면 반씩 나누어야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재산을 각자 소유하게 된다는 것은 더 이상 부부가 아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부부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어떤 누구도 죽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결국 예수님을 마귀 들린 미친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과 죽음은 육체적인 뜻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입니다. 예수님께 육체적인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도 울고 있는 여인들에게 그 아니는 ‘잠자고 있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또 라자로를 살리러 올라가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도 ‘잠자고 있는 라자로를 깨우러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죽은 이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라라.”하시며 당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살아있더라도 죽은 사람 취급을 하십니다. 진정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육적으로 살아있더라도 죽은 것입니다.
죽음은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이 과일을 따먹으면 너희는 반드시 죽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죄로 인한 ‘생명’인 하느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와의 결합으로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우리 공동소유로 다시 되돌려주시기 전까지는 모두가 죽은 목숨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하시며 당신이 참 “생명나무”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뜻은 한 몸이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할 때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분의 영원한 생명을 공동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혼인을 통한 구원입니다.
사실 모든 것은 아버지 것입니다. 생명까지도 아버지의 것이고 아들은 아버지와의 일치를 통해 그 생명을 받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아버지와 한 몸을 이루고 아버지는 당신 유산을 공유하십니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아버지께서 성령 안에서 아들과 한 몸이 되듯, 우리도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룹니다. 아들이 비록 죽음을 당했을지라도 아버지께서 다시 살리셨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죽음을 당할지라도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리십니다. 아니, 죄를 짓지 않는 한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혼인이 그렇듯, 서로간의 신의를 지키지 않으면 부부관계는 깨어지게 되고 그 공동소유도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혼인 서약을 깨는 행위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 즉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착한 우리의 신랑은 당신을 떠난 신부가 다시 돌아와 당신과 영원한 생명을 공유할 때까지 끝까지 기다립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공유하기 위해 그 분과 한 몸을 이룹시다.
참된 예수님 상
-정명숙 수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당신이 누구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
나는 위에서 왔다. …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
“내가 나”(요한 8,24)라고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의심과 회의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닫힌 마음은 열릴 줄을 모릅니다.
그들 안에 고정된 하느님 상 때문에 예수님께서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과 사람을 살리는 행동 모두를 그들은
걸림돌로 생각합니다. 이들의 깊은 ‘거부의 병’은 예수님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갑니다. 잠시 우리 신앙 공동체를 바라봅니다.
너도나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각자 자기 입맛에 맞는 예수님 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 또한
적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를 많이 해도 과거의
내 습관에서 벗어나 ‘새 사람’으로 내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우리가 자신의 말과 행동과 내면의 객관적인 모습을 들여다볼 시간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병든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누구신지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아셨기에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길을 걸으시며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할 수 있으셨습니다.
따름 = 영원한 생명
- 진병섭 신부-
얼마 전, 급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부고 소식이었습니다. 전에 있던 본당에서 가깝게 지내던 할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정정하셨고 얼마 전에도, 조만간에 만나자는 통화가 있었기에 믿기 어려웠습니다. 장례식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더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돌아가셨다는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전화 통화를 잘못한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로 잘못 들은 것입니다.
할머니는 평소 주변 사람들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 당신의 정성을 쏟으셨고, 물질적 도움뿐 아니라 기도로 함께하셨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한 할머님 덕에 많은 교우가 연도로 할아버지가 가시는 길을 편안하게 도와드렸고, 할아버지의 장례미사도 저를 포함한 네 명의 사제가 공동 주례했으며, 본당 안은 교우들로 가득 찼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께 영원한 생명을 주시도록 청했습니다. 분명 할아버지는 하느님 나라에 가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은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아버지께 이끌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라고 강조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재의 수요일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은 흘러 사순 시기도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이때 우리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순 시기!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에 동참하며 우리를 정화하는 이때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실천했는지 물어야 합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우를 범하지 말자
-김찬선신부-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오늘 주님의 말씀입니다.
요 며칠 계속되는 요한복음의 말씀은 정말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 복음을 읽으면서 뭔가 답답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말을 계속 하시고
뜬구름 잡는 듯한 말만 하십니다.
결국 사람들의 입에서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맙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계실 자리가 나에게 없다는 것을 안다면
나는 주님 말씀의 자리를 마련할 터인데
나는 주님 말씀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한다면
나는 겸손하게 배움의 자세를 견지할 텐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이 마귀 들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 자리가 내게 없다는 것.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능력이 내게 없다는 것.
이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출발을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우리의 모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알기를 출발해야 하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분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말도 안 돼는 마귀소리야 하고 주님의 말씀을 묵살하고
마침내는 주님을 죽이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 조명연신부
어제 미사 전 고해소에서 있었던 일을 나누고자 합니다. 어떤 자매님께서 할아버지를 이끌고 고해소로 들어오셨습니다. 아마도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의 고해성사를 돕기 위해서 함께 들어오신 것 같더군요. 그리고 자세히 설명도 해주십니다.
“할아버지! 먼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라고 말씀하시구여, ‘고해성사 본 지 얼마 되었습니다.’ 라고 말씀하세요. 그리고 죄 고백하시면 되어요. 알았죠?”
이렇게 설명하신 뒤에는 고해소 밖으로 나가시더군요. 저는 ‘냉담하신 할아버지를 모시고 오신 열심한 자매님이시구나.’라고 생각하고서는 할아버지의 고백을 듣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이 할아버지는 귀가 어두워서 잘 듣지를 못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계속해서 큰 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잘 들리시지 않는다고 하니까 짧게 훈화를 마치고, 사죄경을 외우려하는데 고해소의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니겠어요? 저는 그 순간 말했지요.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아마도 제 목소리가 끊어져서 고해성사가 끝났다고 생각하셨나봐요. 그런데 문제는 할아버지께 계속해서 크게 말을 하다 보니, 문을 여신 분께 했던 말도 마치 화가 나서 말하는 것처럼 엄청나게 큰소리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도 큰 목소리인데, 목소리를 높여 말한 그 소리가 얼마나 컸을까요? 아마 그 큰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고 또 무서우셨을 것입니다.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상대방에게 아픔과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잘못이 없어,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없어.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돼.’ 등의 말은 철저히 위선적이고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 다른 사람으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을 특별히 책벌하지 않으시지요. 오히려 그들의 병을 치유해주시고 좋은 말로 큰 위로와 힘을 주시는 등, 더 큰 은총과 사랑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죄 없다고 말하는 사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주 ‘위선자야!!’라고 꾸짖으셨으며,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결국 그들 곁을 떠나시고 맙니다.
스스로 죄 없다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죄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사람을 더욱 더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부류에 속할까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자신은 죄가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 문제를 돌리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죄를 겸손되이 반성하고 주님 앞에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일까요?
주님께서는 당신 앞에 무릎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당신의 따뜻한 품으로 받아주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을 향해 이러한 희망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전달해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아직 부활 판공성사를 보시지 않은 분, 꼭 보도록 하세요.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양승국신부-
<가지 말아야 할 길>
‘롤러코스트’(궤도열차)를 타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요즘 웬만한 놀이동산에 가면 다 설치되어있지요. 오르락내리락, 구불구불한 노선을 따라 초스피드로 달리는, 그래서 짜릿함이 느껴지는 놀이기구 말입니다.
아이들과 살다보면 자주 가게 됩니다. 너무 자주 가서 요즘은 멀찍이 떨어져서 아이들 타는 것 구경만 하는 편입니다.
롤러코스트의 백미는 아무래도 정점까지 올라갔다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그 맛일 것입니다. 아래로 ‘확’ 떨어지는 순간, 정말 섬뜩합니다. 충격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심장질환이 있는 분들은 가급적 안타시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 종류의 롤러코스트를 타면서 한 가지 느낀 점이 있습니다.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내려올 때 충격이 크다는 것입니다.
적당히 올라간다면, 혹은 아예 올라가지 않는다면, 그렇게 큰 충격은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너무나 큰 충격에 크게 상심한 분들을 만납니다. 배신감에 치를 떱니다. 분노로 밤잠조차 설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너무 기대가 커서 그렇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과도한 기대치가 큰 실망, 큰 고통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관계 안에서 지속적으로 마음에 평화를 얻고 싶다면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서로에게 걸고 있는 지나친 기대를 거두어야 합니다. 지나친 자기중심적 사고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롭고 행복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유대인들, 참으로 불쌍하기 그지없습니다. 사랑으로 오신, 선물로 오신 메시아 예수님을 끝까지 이해 못합니다. 끝까지 화해하지 못합니다.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향해 던지기 위해 돌까지 집어 손에 듭니다.
그들이 이처럼 눈이 멀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자신들의 코앞까지 다가온 구원을 내팽개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의 메시아에 대한 과도한 기대, 그릇된 환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고상한 메시아를 꿈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실적인 요구를 모두 충족시켜줄 해결사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은 그런 차원 낮은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그려온 자신들만의 메시아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지나친 선민의식, 지적 우월감에 빠진 유대인들은 오직 학문적, 관습적, 의지적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관찰했습니다. 공부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받아들이거나, 가슴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이 따지는 말들을 보십시오. 한심합니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결국 그들은 인간적 울타리를 벗어나 하느님의 영역으로 들어서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분임을 그들은 간과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 인간적 혈연관계를 초월하시는 분, 국경을 초월하시는 분임을 망각했습니다.
그 결과 끝끝내 그들은 가지 말아야 할 길로부터 돌아서지 못했습니다.
삶과 죽음
-김종기신부-
사람이면 누구나 고통을 싫어하고,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죽어야 하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힘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언제나 새로운 힘이 솟아납니다.
얼마 전 고등학교 후배가 갑자기 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입원한 지 한 시간이 지난 후에 그 후배를 만나게 되었는데,
처음 암 진단을 받은 후, 그의 아내는 충격이 너무나 커서 마음의 안정을 잃고
줄곧 눈물만 흘렸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후배는 비록 신장암이 많이 진행되긴 했지만 조기에 발견된 것을 알고
감사해했고, 그의 아내 역시 저와의 대화와 기도를 통해 남편이 생명을 잃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안정을 되찾았을 수 있었습니다.
그 부부는 무엇보다도 두려움과 고통 중에 주님을 믿고 의탁함으로써
예수님은 언제나 사랑으로 생명을 살리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처럼 삶의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하는 힘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는 더 이상 죽음이
존재하지 않고 삶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맙시다.
진짜 예수
-서효경 수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정체성을 두고 유다인들과 논전을 벌이신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셨다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하였다. 유다인들의 반응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면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구원의 진리에 대한 확신은 예수님을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해주었다. 예수께서는 지금 당신의 죽음 너머에 계신다. 자신에 대한 보호본능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에 대한 신념이 확실하다면 바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분명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 곧 진리를 증언하고 계신다. 온갖 박해와 수치·모욕·극도의 고통과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 영원한 진리를 지금 말씀하신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8,51), 곧 영원을 산다는 것은 지상의 모든 것을 초월한 최고의 가치를 최우선적으로 선택하는 삶, 그 가치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며 필요하다면 죽음도 불사하는 삶을 말한다.
10여 년 전 삼풍백화점 붕괴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을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분을 만난 적이 있다. 날마다 출근해서 아침기도와 묵주기도를 바쳤다는 그 자매는 붕괴된 건물 속에 갇혔을 때 조용히 묵주기도를 바치며 성모님의 망토 속에 있는 것처럼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이대로 죽으면 주님을 뵈올 것이니 감사한 일이요, 만일 살아난다면 자식들을 볼 것이니 그것 또한 감사한 일이라며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살아났으니 남은 생명은 오직 주님을 위해 봉사할 거라고 했다. 죽음의 위기에서 그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야말로 하느님의 영원성을 증거하는 것이리라.
세상의 평가와 이목과 자애심을 초월해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가치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가치가 우선되어야 한다. 진짜 하느님을 섬기는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오늘도 세상은 진통을 겪고 있다.
물러섬 - 부활의 길
-오상선신부-
살다보면
때로 맞대응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피해야 할 때가 있다.
때로 말도 되지 않는 억지춘향인 사람과 한바탕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그냥 피해야 할 때도 있단 말이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모함하여 돌로 치려고 한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기만 하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그때마다 예수님의 대응은 그 자리를 피하신다.
물론 그들에게 정확하게 가르치고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먼저 따지신다.
내가 사랑을 베푼 것이 그리도 배가 아프냐 말이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이 그리도 질투심을 유발했단 말이냐?
사람은 누가 잘 되는 꼴을 못봐주는가 보다.
남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영적으로 힘을 발휘하면
그것 때문에 하느님께 함께 감사드리고 찬미드리기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하면 깎아 내릴까 궁리하는가 보다.
그리하여 함께 성장할 기회를
함께 퇴보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자신의 취약함을 보상받으려는지도 모른다.
그럼 이러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예수님이 그 모범이시다.
먼저, 예수님은 그들과 맞대응하신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물어보신다.
내가 사랑을 베풀었는데도 그게 문제가 되냐고...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잘난 체 했다는 것이 문제냐고...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꼭 신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기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뿐이라고
해명까지 하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이다.
보통 그래도 사람들은 한번 모함하고 내치기 시작하면
끝을 봐야만 직성이 풀린다.
아무리 해명을 해도 자기 논리에 갇혀 버린다.
그래도 계속해서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할 수 없다.
피하는 도리밖에...
같이 맞대응해 봤자 어거지 논리와 싸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예수는 피하는 것이다.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속말로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다.
비겁해서가 아니라 함께 추잡해지지 않기 위해서 피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는 악인들의 끈질긴 모함 앞에 무릎을 꿇는 듯이 보이지만
그분은 승리하였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부활이 아닌가?
형제들이여,
예수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모함과 몰이해 앞에 지는 듯이 물러섬이...
아무 힘없는 약자처럼 무릎을 꿇음이...
때론 속에서 천불이 나지만
때려 주고 싶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일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들과 똑같은 추잡함에 사로잡힘이요
지는 듯 물러섬이
아프지만 예수의 고통에 동참하는 길이요
그래서 부활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함께 부활합시다!
모욕과 몰이해와 모함과 질투를
꿋꿋이 참아받고
끝까지 맞대응하기보다 인내심을 갖고 물러섬으로써
그분과 함께 수난하고
그분과 함께 부활합시다!
독서강론 : 믿음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아브라함
-경규봉 신부-
아브람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림으로써 하느님께 지극한 경외의 자세를 취한다. 그는 모든 잘못을 회개하며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린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와 새 계약을 맺으시며 새 이름을 주신다. 일반적으로 히브리인들은 할례를 받을 때 이름을 지어준다(21,3-4; 루가 1,59-60; 2,21). 아브람 역시 할례를 받기 전에 새 이름을 받음으로써(9-14,) 하느님과 새 계약을 맺었음을 상징한다.
구약에서 자손이 번성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 중 하나이다(시편 127,3-5)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많은 민족을 이루고, 그의 후손 가운데 뛰어난 통치자와 왕들이 많이 배출될 것과 그들이 정착할 땅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하느님께서 맺으신 계약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영원히 지속되며(13,15-16), 영적으로 하느님께서 택하신 모든 자녀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계약을 맺은 사람에게 많은 은총을 베푸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신다. 그러나 이를 위하여 이스라엘은 믿음과 순종으로 계약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계약을 맺으셨다. 이는 아브라함이 하느님 앞에 뛰어난 공로가 있거나 자랑할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하느님 앞에 내세우거나 자랑할 것이 전혀 없었다(로마 4,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뽑으시고 그와 계약을 맺으셨다. 이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만을 사랑하시고 그에게만 은총을 베푸신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로마 4,11).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세상을 물려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켰다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이다.”(로마 4,13)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자비와 은총을 베푸시지만, 이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뽑힌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는 믿음을 통해서 전달된다.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며 하느님께 지극한 예배를 드린다. 이는 지극한 경외의 자세일 뿐만 아니라 ‘통회, 속죄, 봉헌, 겸손’의 자세이다. 즉 자신의 모든 잘못과 죄를 하느님 앞에 드러내놓고 뉘우치며 회개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겸손한 자세이다. 아브라함은 그만큼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하느님께 간구하는 신앙인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인하여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갈라 3,6)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 믿지 못하는 사람과는 약속할 수 없다. 약속은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느님과의 관계 역시 믿음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거나 모독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슬러 모독한 죄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1)라고 말씀하셨는데, 성령을 거슬러 모독한 죄란 곧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슬러 하느님을 거역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믿지 못하며 거부하는 죄를 가리키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방인들도 믿기만 하면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해주시리라는 것을 성서는 미리 내다보았습니다.”(갈라 3,7-8)라고 말했다.
믿음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전달해주는 통로이며 길이다. 사람은 믿음을 통해서만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며, 약속의 유산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약속의 유산을 물려받는 신앙인이 되자...............◆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정필종 신부-
이제는 제법 날씨가 따사로워지고, 낮으로는 덥다는 생각조차 듭니다. 꽃놀이나 한 번 다녀들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어린 제가 '늙는다는 것'에 대해서 잠시 아브라함의 도움을 받아서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대체적으로 우리네들의 모임을 가만히 살펴보면, 나이를 가지고 다투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소위 '위세'를 부리는데도, 단체 안에서도 나이가 한 살 많고, 적음에 광분할 때도 많습니다. 그것이 다툼으로 발전해서 온통 난리가 나고, 한 살이라고 어린 사람은 그 앞에서 속이야 어떻든 찍소리도 못하고 그 위세를 다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면, 나이를 따지는 것이 대체로는 내세울 것이 없을 때, 말로는 당할 수 없을 때, 나이를 들먹여서 상대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듯 합니다. 정말 나이가 많다는 이유 하나가 상대방을 윽박지를 수 있는 뭐라도 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특별히 창세기에 보면(창세기에 나오는 족보들을 보십시오. 예를 들어 창세 5,1-32; 11,10-26 등),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참 나이도 많이들 잡수시고 살다가 돌아간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주신 천수(天壽)를 다 누리고 살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에녹의 경우에는 365년을 살았다고 창세기는 전해줍니다. 아마 일년 365일을 가르키는 듯 한데, 하느님과 늘 함께 살았다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죽을 때 직접 데려가신 것일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한 번 만나보십시오. 그가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떠났을 때가 일흔 다섯 살이었습니다(창세 12,1-9). 그리고 후에 약속하신 아들 이사악이 태어난 때는 그가 백살 되던 해였습니다(창세 21, 1-7). 이쯤 되면 어떤 분들은 부럽기도 할 것입니다. 그 절륜한 정력(?)에 말입니다.
왜 성서는 하느님께서 그런 늙은 사람을 자신이 하시는 일에 일꾼으로 세우셨음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한 번쯤 의문을 가져봄직 하지 않습니까?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참인간 부족'이라는 원주민들은 생일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본인이 생각해서 자신이 다른 날보다 변화되었다면, 그 날 다른 사람을 초대하여 그 변화 내지 진보된 사실을 공표하고 축하한다고 합니다. 멋진 생각이 아닙니까?
어르신들이 화를 내실런지도 모르지만, '늙는다는 것'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삶의 체험 속에서 자신이 변화하고 있음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싶습니다.
제가 사목하는 웅상지역에는 양로원이 세 군데가 있습니다. 간혹 방문을 해보면, 참 재미난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 작은 양로원에 한 세상이 들어앉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왜인고 하니, 한 번은 새로 들어오신 분이 있다고 해서, 방문을 했는데, 다른 분들이 신입생을 교육시키고 있더라니까요. 여기가 군대도, 소위 감방도 아닌데, 그런데 더 웃긴 것은 군기반장하시는 분이 자기도 들어오신 지 얼마 안되는 할머니가 그러고 계시더라구요.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서는 아마도 늙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전면에 내세워서, 지금부터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도록 만들려고 했나 봅니다.
제가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잘은 모르겠지만, 늙는다는 것이 하느님의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늘 다른 하루를 맞이하는 삶, 아브라함처럼 늘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런지요?.............◆
죽음
-배미애 수녀 -
꽤 오래전 우리나라 최초로 자신의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 박사의 생애를 그린 방송을 본 적이 있다. 그 당시 유한양행의 설립 기념일에 모인 직원들과 가족들이 그분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회고하는 것을 감명 깊게 보았다. 그분이 돌아가신 지 몇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들은 그분의 선행을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 복음에서 하신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육체의 불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요한복음 사가가 일찍이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는 것을 두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자기 선언인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말씀 안에는 자신이 살아가야 할 자기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 속엔 정체성을 분명하게 밝힌 이의 자유로움이 있다. 그것은 교만이나 자랑, 허영이 아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나다. 나는 다른 이들이 말하는 내가 아니다. 그리고 나의 현존 자체가 나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계신 듯하다. 거룩함의 첫걸음인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은 우리 모두 하느님께 왔고 그분께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우리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감동과 영감을 주는 분들은 자신의 관계를 하느님 안에서 찾고, 하느님께 받은 것을 자신의 영광에 돌리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쓰신 분들로, 이미 육신으로는 죽었으나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다음 세대로 그 정신을 넘겨주고 있다.
-장용진 신부 -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깜짝 놀랄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라고 말입니다. 선재그리스도론은 그 당시 사람들이 돌 던질만한 그런 내용의 말씀이지만 사실 저도 예수님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재사제론. 그러니깐 사제직은 나의 운명, 나의 천직이라고 생각하기에 혹시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사제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제 착각인데, 어떻습니까? 이런 착각, 많이 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전 어릴 적부터 신부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무용을 하셨던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아서 그런지,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잠시 발레리노가 되는 것이 꿈이기도 했고, 지휘자가 되고 싶기도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마음 한 구석에는, 신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나가고 있었습니다. 학교 가는 것은 정말 싫어했던 저였지만 반대로 성당 가는 것은 너무도 좋아했었기에 ‘매일매일, 토요일이었으면~’할 정도로, 그렇게 성당 다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저의 매일 매일을 마치 토요일처럼 성당에서 지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삶에는 제 꿈과 더불어 ‘사제직은 내 운명, 내 천직’이라는 믿음을 키울 수 있게 해준 몇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저의 형도 한때는 신부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중학교 들어가면서 여학생 친구가 생겨서인지 그 꿈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제 경우엔 형과는 반대로 포기한 것은, 아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꿈이 아니라 여자친구였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성탄절, 친구하자던 같은 또래 여학생의 크리스마스카드가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잘못 전달되었고, 이런 사실을 신학교 들어가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피식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고 ‘너는 내 운명이 아니구나’라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성검사나 적성검사, MBTI같은 성격유형검사를 하면 언제나 소개되는 직업군에는 성직자가 있었습니다. 아마 신부되라고 미리 정해진 것처럼 말입니다. 더 신기한 것은 93년 신학교 4학년 때, 소풍을 대전 엑스포로 갔었는데, 그 곳엔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기계가 있었습니다. 어떤 기계인지도 모른체 그저 호기심에, 남들 따라 줄을 섰는데 알고 보니 그 기계는 손금 보는 기계였습니다. 그런데 절 웃게 만든 것은 제 손금을 해석한 내용이었는데, 글쎄 제가 '중'될 팔자라는 것이었습니다.ㅎㅎㅎㅎ 뭐~사실 따지고 보면 신부도 중, 그러니까 '서양중'인 셈이니까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 없지만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전 이때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사제직은 내 운명, 내 천직이다’라고 말하고 싶고 ‘나는 사제로서 태어나기 전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라고 믿고 살렵니다. 설사 이것이 제 착각이라고 할지라도 이 정도의 착각 괜찮지 않을까요? 설사 제가 착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현재! 내가 신부로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말씀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게 하신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또한 사제로서의 이런 삶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수난받으셨던 예수님을 돕는 길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귀한 선물을 주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이렇게 가까이서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행복한 일입니까? 설사 이것도 제 착각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너희의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
-이기양신부-
어느 성당에서 본당 신부님이 강론을 하다가 불쑥 신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천국에 가기를 원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보세요."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손을 들고 신부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한 발짝 앞으로 나온 신부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지금 당장 가고 싶으신 분 손들어 보세요."
그러자 신자들은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세상을 믿어도 이 세상이 그토록 좋은가 봅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천국, 즉 영원한 생명을 믿습니다. 이 세상의 종교는 모두 영원한 생명을 제시하며, 우리의 삶이 이 세상으로만 끝나지 않고 죽은 후에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영원한 세상을 믿고 사는 사람과 하느님과 영원한 삶을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지요. 죽은 후의 영원한 세상을 믿는 사람과 죽은 후에는 아무 것도 없고 이 세상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삶이 어떻게 같겠습니까?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는 사람은 영원한 세상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이 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흐름을 끌어가는 수많은 정치인과 경제인들, 또 방송과 신문 잡지를 포함한 언론매체들은 이 세상이 모두인 것처럼 가르치고 광고하며 사람들을 끌고 갑니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재물과 건강과 자녀의 성공에 집중되어 삶의 중심이 점점 보여지는 것과 부의 축적으로 기울고 있지요.
이러한 관점으로 방송이 진행되고 여러 물건의 구매를 폭발시키는 세상의 흐름이 영원한 세상을 믿고 바라는 신자들에게는 큰 유혹이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이 영원한 세상에 대한 희망보다는 이 세상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에 더 관심을 갖게 하고,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흐름에 따라 살도록 유혹을 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고 하지만 깨어 있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과 별 차이가 없는 삶을 살아가기 쉬운 세태에 우리는 밀려와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조사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영원한 세상을 믿는 천주교와 개신교, 그리고 불교 신자들이 사회 구성원의 70%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흐름은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사람의 흐름이 아니라 얼마 되지 않는 영원한 세상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흐름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소수의 믿지 않는 자들에 의해서 다수의 믿는 자들이 끌려가고 있는 것일까요?
영원한 세상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재물에 애착을 갖고 건강과 자녀 교육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요. 외모를 가꾸고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신자들이 따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영원한 세상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행동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이 다인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고 쉬지 않고 달려온 결과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졌는가 하고 묻는다면 답은 부정적입니다. 역사이래 지금처럼 혼란스럽고 각박하며 갈증으로 허덕이는 시대를 찾아보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오히려 박해 시대의 우리 조상들의 삶이 훨씬 더 풍요롭고 자유로웠던 것 같습니다. 참혹한 박해로 세상살이는 험난했어도 영원한 세상에 대한 확신과 하느님 안에서의 평화는 그 무엇과 바꿀 수 없이 크고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이 모두인 것처럼 살아가는 유다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8,51)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즉각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지요.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요한 8,52-53)
못 믿고 거부하지요. 영원한 세상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은 삶의 방향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세상은 그저 믿기만 한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갖겠다고 욕심을 부려서 얻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고 말씀을 실천할 때 가능한 것이지요.
하느님을 모르고 영원한 세상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은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요, 견디기 힘든 공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가 않습니다. 죽은 후의 영원한 삶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며, 일생을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고 나서는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루카2,29-31)하고 노래한 시메온처럼 평화롭고 거룩하게 하느님께로 가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지금 나의 실제 행동들은 영원한 세상을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까? 또 믿지 않는 사람과는 무엇이 어떻게 다르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다음은 실제로 제가 겪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나이 지긋한 어느 노인 한 분이 성당을 찾아와 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낯선 분이라 우리 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어떻게 오셨습니까?"하고 말을 건네자 노인은 허리가 땅에 닿게 고개를 숙이며 말할 수 없이 겸손하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신부님, 안녕하십니까? 제 자식놈 때문에 이렇게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 젊은 청년이 노인의 뒤에 숨듯이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직장 때문에 서울로 올라 온 저 자식놈이 직장 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신앙 생활을 소홀히 하지 뭡니까! 그래서 제가 오늘은 이놈을 잡아서 이렇게 끌고 왔습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믿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자식에 대해서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공부를 잘 하는지, 세상에서 성공은 할 수 있을지가 늘 걱정스럽고 시험 때가 되면 성당에 안 가려고 하는 아이를 슬그머니 방관하기도 합니다. 이는 영원한 세상을 믿는 부모의 모습이 아닙니다. 정말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세상을 소망한다면 제대로 가르쳐야지요. 저는 어렸을 때 주일 미사를 한 번만 빠져도 밥을 굶어야 했습니다. 하느님 섬길 줄도 모르는 놈이 무슨 밥을 먹으려고 하느냐는 불호령이 어김없이 떨어졌었지요. 우리 신자 중에도 판공성사를 안 보면 밥을 굶기라고 가르치는 분이 계십니다. 하느님에 대한 확신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지요.
영원한 생명을 믿고 하느님을 믿는다고 입으로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원한 세상은 꿈도 안 꾸고 이 세상이 다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과 별 차이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숫자가 많기 에 이 세상이 이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지요. 70% 이상의 영원한 세상을 믿는 사람들이 30%도 안 되는 이 세상만을 믿는 사람들의 흐름에 끌려가고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입으로만 믿은 결과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8,51)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누군가가 운명을 달리하면 '죽었다'고 하지 않고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갔고 우리가 가야 할 본고향을 의식하며, 하느님이 계신 영원한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 것을 표현하는 것이지요.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말씀을 두고서도 마치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찾아 헤매었던 것처럼 없는 것을 찾아 안간힘을 다하는 어리석은 모습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어제 들은 복음 말씀입니다. 신앙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리고 삶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면 자유로워지지요. 하느님의 말씀과 영원한 생명을 담고 사는, 진리 안에 자유로운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
-허찬란 신부-
오늘 요한 복음은 선재(先在)사상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어 오셨지만 이미 그전부터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브라함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액면 그대로
쉰 살도 안 된 사람이 어떻게 아브라함을 보았냐고 따집니다. 예수님의 말을
도무지 알아듣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감정이
격해진 채로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이에 대해 믿음은 반드시 필요한
신앙의 요소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묵상과 성찰을 하다보면 그분을 알고 있는
내가 얼마나 고귀한 분을 알고 있는지, 그분에게서 얼마나 많은 은총을 받고
사는지를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처음부터
계셨듯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늘 나라를 지금 여기서부터 미리
맛보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비록 복음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느님 나라를 완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이
가르쳐주고 인도해주시는 삶을 믿고 따르면 행복은 절로 오는 것입니다.
개만도 못한 인생!
-정복례 수녀-
오늘 복음에 앞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인이라고 악담했다(요한 8,48 참조). 그런 까닭에 예수께 돌을 던지려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를 조금만 안다면 이 말이 얼마나 지독한 모욕인지 잘 알 것이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개만도 못하게 취급했다. 그런데 예수께 ‘당신은 사마리아인이오’라고 했으니 그들이 이런 말을 한 의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팔레스타인의 눈물」이라는 책을 보았는데 이 책은 고난의 땅, 삶의 최전선에서 지켜내는 인간의 존엄과 품위에 관한 생생한 기록을 담고 있었다. 이 책에 ‘개 같은 인생’이라는 글이 나오는데, 글쓴이는 팔레스타인 사람이고 그의 개는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려면 검문소에 팔레스타인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것도 검문하는 이스라엘 군인들의 기분에 따라 통과시켜 주면 가고 그렇지 않으면 갈 수가 없다. ‘왜’라는 질문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개는 예루살렘 여권이 있기 때문에, 개 덕분에 그의 주인은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먼지가 융단처럼 쌓인 검문소를 통과하고 나면 온몸이 그야말로 먼지로 목욕을 한 것 같다. 그들이 일상에서 당하는 모욕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이 살던 시대에도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혜롭게 그들을 피해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왜냐하면 아직은 당신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신 지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여전히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구세주가 태어나신 곳에서 정작 그들은 구세주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며 같은 인간을 개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으니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는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하느님, 우리 모두 평화의 건설자가 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소서.’
죽음
- 김훈일 신부-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접하는 사람들이 의사들입니다.
한 의사의 고백입니다. ‘가끔가다 보면 어떤 환자나 그 가족들은 마치 의사가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무한한
기대치를 가지면서 의지합니다. 반대로 어떤 의사는 자신이 무슨 병이든지
다 고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면서 환자나 가족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의사 생활을 수십 년 하고 나서야 의사는 환자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치유하시도록 다만 옆에서 치료가 잘 되도록 도와주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늦게 깨달았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생각과 계획을 넘어서
다가옵니다. 늙은 할머니가 어린 손자보다 꼭 먼저 죽는 법이 없습니다.
죽음은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결국 삶이란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을 소비하며 서서히 죽어가는 운명입니다.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은 반드시
무한한 하느님의 시간을 소유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애석한 것은 죽음을 이기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패배를 보았습니다. 죽음에서 승리하신 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우리의 죽음이 언제 닥치더라도 부활의 영광이 우리의 삶을 떠나지 않도록 늘 준비합시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양승국신부-
<조롱과 모욕의 돌팔매 사이를 뚫고>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인간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받는 수난의 메시아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느끼셨을 엄청난 통증과 처절한 고독을 손에 잡힐 듯 가깝게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으십니까?
“당신, 행동하는 것 보니, 뭔가 이상해. 내 생각에 몹쓸 악령이 들린 것 같아. 당신 눈을 한번 들여다 봐. 정말 이상하잖아. 틀림없이 더러운 귀신이 옮아붙었나봐.”
이런 말 들었다면 정말 펄쩍 뛰겠지요. 세상 살맛 안 나겠지요. 마귀 들렸다는 말, 아무에게나 하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심각한 말이고, 충격적인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유다인들은 공공연하게 예수님께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공개석상에서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사람들이 둘러서서 나를 향해 손가락질 하고 비아냥거리는 그 한 가운데 홀로 서 계신 체험을 해보셨습니까?
유다인들은 불경스럽게도 예수님을 둘러싸고 놀려댑니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이 말은 ‘아직 나이도 어린 것이, 새파란 것이, 세상물정도 모르는 것이 그렇게 설쳐 대냐?’고 따지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사람들로부터 돌을 맞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어린 시절 장난으로 맞아본 돌이 아니라 정말 살기(殺氣)를 지니고 던지는 돌말입니다.
예수님을 둘러서 있던 사람들은 저마다 이미 손에 손에 커다란 돌을 하나씩 들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예수님을 돌로 처형하려고 마음먹고 거기 서 있었던 것입니다.
계속 다가오는 목숨의 위협, 거듭 조여 오는 유다인들의 올가미 앞에 홀로 온몸으로 맞서시는 서른세 살의 고독한 청년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따라 안쓰럽기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수난의 전조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천히 예정된 죽음을 향해 나아가십니다.
하느님이셨지만, 철저하게도 인간이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어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예견된 죽음이 이 세상 그 누구도 체험해보지 못한 가장 비극적이고 끔찍한 죽음이 되겠기에 피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원하시니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던지는 조롱과 모욕의 돌팔매 그 사이를 뚫고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해결사 예수님
-이재욱 신부-
◆믿지 않는 남편이 성당에 다녀오는 열심한 아내가 못마땅하여 한마디 툭 내뱉는다. “구세주라는 예수가 이 땅에 온 지 2천 년이 넘었는데 왜 아직 고통받는 사람들이 저리도 많고, 그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왜 아직 죄 중에 사나?” 아내는 언뜻 할말이 없어 얼굴이 붉어진다. 상한 마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엌에 들어가려다가 보니 세숫비누가 눈에 띈다. 그러자 ‘옳거니!’ 하고 재치있게 남편을 향해 맞받아쳤다. “잘난 양반, 이것 좀 보세요! 저기 비누가 발명된 지 2천 년이 넘었는데 왜 아직도 때묻은 사람들이 그리도 많을까요? 그러고 보니 당신 옷에도 때가 많은 것 같네? 당신, 옷이나 갈아입고 목욕이나 하시지요!” 아내가 이렇게 일갈하자 남편은 할말을 잃고 허허 웃었다고 한다.
나는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러 온 것이 아니라 희망을 주러 오셨다고 생각한다. 그 희망은 단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당신 안에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희망이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 희망을 주시고자 하였으나 사람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 곧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영원히 죽지 않음을 강조하신다. 그 말씀은 다름아닌 예수님 자신이고, 곧 하느님의 사랑이다. 그분의 말씀이 담고 있는 진정한 사랑은 어떤 소유나 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존중을 바탕으로 한 인격적인 만남이며, 자신을 나누고 내어주는 온전한 사랑이다. 내가 부족하나마 그분 안에서 조금이라도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살아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사랑하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영원히 살 희망이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존재 방식 : 순수현재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그 동안 지속되어 온 예수님과 적대자들 사이에 벌어진 격렬한 논쟁(7-8장)의 마지막 부분이다. 초막절 축제를 맞아 예루살렘에 상경하신(7,10) 예수께서는 7일간의 축제기간 중간쯤 해서(7,14) 성전으로 올라가 가르치기 시작하셨고, 이 가르침은 바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8장 전체는 축제를 마감하는 제8일째 날에 거행된 ’등불을 끄는 예식’(사순 제5주간 다해 월요일 복음 참조)에서 있었던 긴 논쟁과 가르침을 담고 있다.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용서로 시작된 요한복음 8장의 가르침과 논쟁의 핵심은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라는 하느님 자기계시(출애 3,14)의 도식 안에서 선포되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이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의 신성과 같은 것이며,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가지는 신성이다. 따라서 예수 또한 아버지처럼 영원한 생명을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으며(51절), 아브라함이 태어나기도 전에 계셨던 분(58절)이시다. 이는 곧 예수께서도 영생(永生)을 주관하는 분이시며, 시간(時間)이 있기도 전에 존재해 온 분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 사실을 계시함에 있어서 "정말 잘 들어 두어라" 하고 말씀하시는 서두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200주년 신약성서에서는 이를 ’진실히 진실히 당신들에게 말합니다’ 라고 번역하였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51절), 그리고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58절)는 구절에서와 같이 예수께서는 특별히 자기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는 말씀에 이 서두를 붙임으로써 계시하시는 말씀의 내용을 한층 강조하고 계신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라는 서두말씀은 공관복음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유독 요한복음에서만 발견된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 서두를 아주 즐겨 사용하는데, 그것도 무려 25번이나 사용하고 있다.(1,51; 3,3; 3,5; 3,11; 5,19; 5,24; 5,25; 6,26; 6,32; 6,47; 6,53; 8,34; 8,51; 8,58; 10,1; 10,7; 12,24; 13,16; 13,20; 13,21; 13,38; 14,12; 16,20; 16,23; 21,18) 공관복음에서 이와 견줄만한 어법(語法)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마태 5,22.28.32.34.38.44; 19,9), 그리고 "나는 분명히 말한다"(마태 17,20; 19,23.28; 21,21.31; 마르 12,43; 루가 21,3)라고 하신 서두말씀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신성(神性)을 선포함에 있어서 하느님의 자기계시 방법인 ’에고 에이미’ 도식을 사용할 때는 하느님께서 본성상(本性上) 소유하시고 누리시는 모든 특성이 가감(加減) 없이 그대로 예수께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밝힐 때 ’나는 ~입니다’, ’나는 (누구, 무엇)입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이 진술하는 ’나는 (무엇)이다’라는 말은 사실상 ’나는 그(무엇)가 아니다’라는 말로 알아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그(무엇)’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그 무엇은 모두가 다 세상에 태어난 다음, 후천적(後天的)으로 습득한 것, 또는 후천적으로 맺어지는 관계에 의한 것이며 그 관계는 살아가면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삼은 김현철의 아버지다"는 진술을 예로 들면, 김영삼은 원래부터 아버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아버지이기 위해서는 보어(補語)로 사용된 김현철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김영삼이 아버지일 수 있는 이유는 아들인 김현철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아들 김현철이 없이는 아버지 김영삼도 없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 결혼한 남편으로서의 김영삼은 있다. ’나는 박상대 신부(神父)입니다’라는 진술을 예로 들어보자. 이 진술에서 ’박상대’는 별 의미 없는, 그렇게 불리는 글자나 이름에 불과하다. 나는 처음부터 신부가 아니었고 1988년 2월 6일 사제로 서품된 이후부터 신부이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신부일 수 있을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나는 신부입니다’라는 진술은 내가 애당초 아니었던 신부임을 지금 주장(主張)하는 것이며, 그래서 신부이며, 끝까지 신부로 있기를 원하는 의지(意志)를 표명하는 진술인 셈이다. 이는 곧 내가 신부인 근거와 이유가 내 안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애당초 신부는 물론 아무 것도 아닌 내가 현재 신부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적어도 예수님, 하느님, 신자(信者), 주교, 동료사제, 교회, 미사, 기도, 성사집행, 말씀선포, 봉사생활 등, 이들과의 관계 속에 있다. 결국 내가 이런 관계에서 비롯되는 일을 수행할 때 비로소 신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실존(實存)한다. 관계 없이는 실존할 수 없으며, 관계없이 있는 존재(存在)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인간은 늘 자신의 실존적 관계에 충실하여야 하며, 그 관계를 잘 가꾸고 지켜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다르다. 하느님께서 ’나는 (무엇)이다’ 라고 말씀하실 때, 어떤 ’무엇’이 술어(述語)로서 주어(主語)인 하느님을 설명하거나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바로 그 ’무엇’ 자체라는 말이 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사람인 내가 ’나는 (무엇)이다’ 라고 한다면, 나는 원래 그 ’무엇’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라는 술어(述語)는 주어(主語)인 나를 설명하거나 그 의미와 관계를 밝혀줄 뿐이다. 하느님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보어(補語)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면, 그분은 진실로 세상을 밝히는 빛이시며,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이시고, 진리요 생명 그 자체이시라는 말이 된다. 하느님만이 "나는 곧 나다"(출애 3,14; 요한 6,20)라는 분이시다. 하느님만이 ’그것일 수 있는’ 이유를 모두 자기 안에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빛이시오, 말씀이오, 진리요, 생명 그 자체이시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그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이며, 나아가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살게 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된다. 여기서 영원한 삶이란 지상에서 마냥 이어지는 ’지긋지긋할 수도 있는 그런 삶’이 아니라 죽은 후에 맞이하는 새로운 삶이다.(이 대목에서 1999년에 제작된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 로빈 윌리암스 주연의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Bicentennial Man》을 한 번 감상해 보시도록 추천하고 싶다.) 사실 영원한 생명의 삶이 지상과 연속된 삶이라면 오히려 불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생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전혀 다른 삶이 될 것이다. 유다인들의 눈에는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하느님의 예언자들도 다 죽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은 하느님 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루가 16,19-31/ 부자와 라자로 비유; 마태 17,1-8/ 예수의 거룩한 변모 참조.) 이 생명을 그들에게 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보다 훨씬 전인,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58절) 이러한 언명이 ’전(前) 실존적(實存的) 그리스도론’을 가능하게 한다. 아브라함은 태어났지만(기노마이, ginomai), 예수님은 처음부터 계시는 분이시다(에이나이, einai). 사실 시간(時間)이 하느님을 구속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 하느님께는 시간(時間)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있다면 하느님은 이를 초월하여 계신다. 하느님을 굳이 인간이 말하는 시간 영역, 즉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의 영역에로 끌어온다면, 하느님은 항상 현재에만 계신다. 시작이 없으시니 과거가 없고, 끝이 없으시니 미래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느님은 현재, 그것도 순수현재(pura praesentia)에 존재하신다. 따라서 하느님은 늘 산 자의 하느님이시다.(로마 14,9) 이로써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자기계시는 절정에 이르렀다. 동시에 유다인들의 불신과 인내심도 그 한계에 달하여 손에 돌을 거머쥐었다.(59절)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유광수 신부-
하느님은 우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영원히 행복하게 살라고 창조하셨지 죽으라고 창조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죽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지켜야할 계명이 있었다.
그 계명이란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2,16-17)라는 계명이었다.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이 아담의 손에 달려있었다. 하느님이 말씀하신 계명을 지킬 것인가 아닌가?는 전적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달려있었다. 그런데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고 자기들이 지켜야할 계명을 지키지 않았다. 유혹은 항상 달콤하다. 유혹은 인간의 정신을 흐리게 한다.
유혹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나무 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창세3,5)
하느님은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에게 "너는 아기를 낳을 때 몹시 고생하리라.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 남편이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고 여자에게 말씀하셨고
아담에게는 "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 먹지 말라고 내가 일찍이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 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 가리라."(창세3,16-19)고 말씀하셨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인간을 다시 행복하게 살게 해 주시고자 인간과 계약을 맺으신다. 그 계약이 곧 십계명이었다. 모세는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고 그들에게 일렀다.
"이스라엘은 들어라. 이것을 익히고 성심껏 지켜라.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감히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이든지 그 모습을 본따 새긴 우상을 모시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너희 하느님 야훼의 분부다. 그래야 너희는 오래 살 것이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시는 땅에서 잘 될 것이다. 살인하지 못한다.
간음하지 못한다. 도둑질하지 못한다.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못한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내리신 분부를 모두들 성심껏 지켜야 한다.
오른 쪽으로도 왼쪽으로도 치우치면 안 된다. 너희의 하느님 야훼께서 분부해 주신 길만 따라 가야 한다. 그래야 너희는 행복하게 살고 잘 될 것이며, 너희가 차지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신명5,1-33 참조)
라고 말씀하신 후
"이것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분부해 주신 계명에 딸린 규정이요 법령이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너희가 건너 가 차지할 땅에서 이것을 지키도록 너희를 가르치라고 하셨다. 이는 너희로 하여금 너희 하느님 야훼를 경외하며 내가 오늘 지시하는 그의 규정과 계명을 지키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너 이스라엘은 들어라. 성심껏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래야 너의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약속해 주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잘 되어 크게 번성하리라."(신명6,1-3)
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 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신명6,4-7)
고 당부하셨다. 그리고 나서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내가 오늘 내리는 너희 하느님 야훼의 명령을 순종하며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고 그가 지시하신 길을 걸으며 그의 계명과 규정과 법령을 지키면 너희는 복되게 살며 번성할 것이다.
너희가 들어 가 차지하려는 땅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내리시는 복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너희 마음이 변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느님께 추방당하여 다른 신들 앞에 엎드려 그것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오늘 나는 너희에게 일러 둔다. 그리되면 너희는 반드시 망하리라.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그것은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이 야훼께서 너희 선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자리잡고 오래 잘 사는 길이다."(신명30,15-20)
이토록 여러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인들은 이 계약을 지키지 않았다. 생명과 죽음을 내 놓고 택하라고 하였는데 그들은 죽음을 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신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마지막으로 당신의 아들이야 알아주겠지, 그의 말은 듣겠지하고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시면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시고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고 당부하셨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4-35)라고 새로운 계명을 주셨다.
이것은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계명이요,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게명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계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오늘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두 번이나 "진실로"라는 말을 사용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인생은 그냥 주어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것이 아니다. 또 누가 무어라 해도 내 인생 내가 하고 싶은 것이나 실컷하다가 가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인간을 만들지 않으셨다.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도록 만들지 않으셨다. 그렇게 아무런 목적도 되는대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지 않으셨다. 인간은 반드시 도달해야할 목적지가 있고 목적지에 이르는 길이 있고 방법이 있는 법이다.
그것이 바로 계명이다. 그 계명을 알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계명을 지키면서 사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길이요,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오늘 화답송에서 "주님의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 고하셨다.
세네칼은 "사람은 죽는 것이 아니라, 자살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느님이 제시해준 생명에 이르는 길을 걷지 않을 때 인간은 자살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정호신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나중에 꼭 이루고 싶어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이라 불리는 단계입니다. 구원은 여러 가지 말로 표현됩니다. 장소적인 표현으로 한다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그 곳의 주인을 중심으로 표현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렇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뽑히는 것을 ‘구원’이라 말하고, 그곳에서 사는 사람의 특징을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결국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 속에 들어 있는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우리는 믿지만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바로 코웃음을 치고 맙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 이 정녕 마귀 들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하니 그래 당신이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 오?”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그냥 한 사람에 불과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이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보통 사람과 같은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가 하는 말이 그리 대단한 영향을 가질 것이라고 짐작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귀가 들린 사람으로 내 몰리고 마십니다.
사람들의 불신에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증언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증언 속에 예수님의 말씀의 진실이 밝혀집니다.
“나는 그분을 알고 있으며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바로 증인이라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모든 삶은 당신이 알고 계신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기에 그분의 말씀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참된 열쇠라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당신의 뜻을 알려주신 때부터 하느님이 원하신 사람의 삶이 바로 이 말씀의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이요, 움직이는 모범이었기에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삶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꿈꿀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된 것은 그들에게 하느님 말씀은 지극히 높은 곳에 있어서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과 별다를 바 없는 사람의 말에 감동하기보다는 어이없이 생각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진실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람의 것이든 하느님 말씀에 합당한 삶이라면 그것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며 사랑이라 인정하지 못하면 그것은 앞을 못보는 것 보다 더 불행합니다. 열린 마음과 열린 눈과 귀로 사랑을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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