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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31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 11,45-56)
“You know nothing,
nor do you consider that it is better for you
that one man should die instead of the people,
so that the whole nation may not perish.”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바빌론으로 유배 간 이스라엘 자손들을 다시 데려오시고, 남과 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 백성을 한 민족으로 모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다시 맺고 그 계약은 영원할 것이라고 예고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칠 고난과 죽음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발걸음을 광야로 돌리신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회상하고 기억하며 당신의 소명을 다시 확인하실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도랑이나 하천가 양지바른 곳에 어김없이 자라는 풀이 ‘고마리’라는 풀입니다. 오염된 시궁창이나 도랑에 난 이 풀을 쓸모없는 잡초쯤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고마리’는 수질 정화 능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물의 오염이 심할수록 그 뿌리가 발달해서 더욱 잘 자라나고 물을 정화시키는 힘도 그만큼 커집니다. 오염되어 악취가 진동하는 곳에서 자라나 흘러가는 물을 맑게 해 주는 이 풀은 참으로 고마운 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풀을 ‘고마운 풀’로 불렀는데 그 말이 변해서 지금의 ‘고마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으로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키시려고 스스로 수렁으로 들어서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염된 시궁창을 맑게 해 주는 ‘고마리’와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 신앙인도 ‘고마리’처럼 살아서 세상을 맑게 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고마리’가 되려면 악취 나고 오염된 수렁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탐욕과 이기심의 수렁에 나눔과 공생의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미움과 폭력의 도랑에서 사랑과 평화의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를 비우고 죽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
어느 시대나 ‘희생양’은 있습니다. 죄와는 무관하게 사라진 이들은 역사 안에 수없이 많습니다. 유다인들은 그런 희생양으로 예수님을 선택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은 주님의 이끄심이었습니다. 다음 말은 ‘카야파’ 대사제의 발언입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예수님께서 백성을 선동하시어 로마에 반기를 들까 봐 우려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되면 ‘로마 군인들’이 성전에 쳐들어와 성전을 파괴한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핑계입니다. 유다인의 최고 의회였던 ‘산헤드린’의 재가를 얻으려는 설득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전통’을 과감하게 비판하시는 예수님이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살다 보면 희생양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제는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받아들이려 애써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닮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 희생은 은총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상황의 반전’을 만나게 하십니다. 당신의 부활을 체험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희생은 언제나 또 다른 축복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닮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억울함을 당하고 불평등을 체험하게 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지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끝은 언제나 부활입니다. 우리는 ‘그 부활’을 희망하며 살고 있습니다.
☆☆☆
복음에 나오는 ‘최고 의회’는 유다인들의 ‘산헤드린’을 번역한 말입니다. 모세는 광야 생활을 하면서 협조자들을 뽑았습니다. 열두 지파에서 70명가량을 선별한 뒤 자신을 돕게 했습니다. 이 조직이 훗날의 산헤드린으로 발전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사제들과 율법 학자와 지방 유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산헤드린’을 인정했고, 종교 문제에 관해서는 그들의 판단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서서히 로마의 비위를 맞추는 조직으로 바뀐 이유입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이곳의 결정으로 빌라도에게 넘겨졌습니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와 바오로 사도 역시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로마와의 충돌을 두려워했습니다. 사람들이 봉기를 일으키면 로마의 개입이 시작되고, 그러면 ‘돌이킬 수 없는 불행’에 직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활동을 불순하게 보았고, 민중을 선동하는 일로 판단했던 것입니다.
카야파 대사제는 ‘민족의 멸망보다는 한 사람의 죽음이 더 낫다.’는 논리를 폅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모습이 여전히 ‘민중의 선동자’입니다. 고정 관념을 바꾸지 않았던 것이지요. 마음을 비우지 못한 결과입니다. 선입관을 극복해야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 구인회-
질병과 죽음의 고통은 인간 삶에 빠질 수 없는 한 요소이며, 유한한 인간으로서 반드시 겪어야 하는 보편적 경험이다. 사는 동안 인간은 고통스런 현실에 저항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죽음에 굴복하고 만다. 현실적으로 죽음은 피할 길 없다. 아무리 치료를 통해 필사적으로 도망친 해도 결국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순간순간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평화롭게 죽음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용기야말로 인간에게 선사된 자유의 정점을 이룬다. 예수님은 이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십자가를 받아들이셨다.
우리가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로써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지 못한다면, 결국 두려움과 공포에 굴복하게 될 것이다.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아 구원하기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희망을 두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가 갈 길이다.
손에 쥔 권력
-오민환-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시자 많은 유다인들은 눈이 열려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는 아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같은 일을 보고도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수난사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에게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일러 바쳤습니다. 곧바로 최고 의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뿐 아니라 행적으로 많은 이들이 돌아섰습니다.
질서와 안정을 책임진 이들에게 예수님은 위협적인 인물입니다. 그들은 손에 쥔
권력이 생각났습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게 낫다는 현명한 정치적 판단을 내립니다. 가야파의 말은 사실 예수님의
죽음은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 하느님의 자녀를 하나로 모으려는
대속적 죽음임을 예언한 셈입니다. 의회의 결정 이후 예수님은 이제 공개적으로
“유다인들 가운데로”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에프라임에 머무시면서 파스카
축제를 기다리십니다. 그 축제는 예수님의 ‘죽음의 파스카’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지 않는 동안, 그분의 부재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벌써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께 관심을 갖고 있고 그분께 동의한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백성들의 환호를 짐작케 합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은밀히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예수님을 죽이려 서두릅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
-김찬선신부-
“나 이제,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한 민족으로 만들겠다.”
“예수님께서는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셨다.”
교회란 하느님 백성의 모임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인 것이지요.
그런데 모임이란 말은 흩어짐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모인다는 것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니
모임이란 흩어짐과 흩어져 있음을 전제 또는 내포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흩어진 사람들을 하느님을 중심으로 다시 모으려면
왜 흩어졌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고,
왜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이지 않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찾아서 떠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유익을 찾지 않고
세상이 주는 이익을 찾아서 떠난 것입니다.
영적인 유익이 세상의 이익보다 더 유익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하는 데에 교회가 실패한 것입니다.
세상의 이익을 영적인 유익보다 더 찾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영적인 유익을 주지 못하는 교회도 문제입니다.
성당 가서 얻는 것은 별로 없고 뺏기기만 하니
시간 뺏기고 돈 뺏기기 싫어서 성당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영적인 유익을 주는 것은 포기하고
그래도 사람들을 자기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세상의 이익을 주고받는 장바닥이 되어버렸습니다.
둘째로 사람들은 자기만족을 찾아 떠난 것입니다.
인간은 예외 없이 만족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만족을 주는 것들이 세상에 널려있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찾아 떠나간 것입니다.
교회가 그 부질없는 만족보다 더 큰 만족을 주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작 한다는 것이 세상이 줄 수 있는 만족을
성당에서도 따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람들은 갈라져 나간 것입니다.
다름을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념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출신이 다르고,
세대가 다르고,
배움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이렇게 여러 가지로 다른 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데 실패하고
다름을 받아들여 사랑으로 나아가는데 실패하고
다른 여럿을 하나로 만드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마저 이 다름을 극복하지 못하여 갈라져있습니다.
다 “자기”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익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고,
자기 만족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고,
자기 생각, 주장, 종교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버려야 할 자기는 “자기만”의 “자기”이지
“우리”의 “자기”는 아닙니다.
“자기”없이 “우리”도 없고
“우리”는 각각의 “자기”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나의 하느님이요 너의 하느님인, 우리의 하느님이시지
나만의 하느님은 아니십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하고 기도할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기도합니다.
제가 북한 일을 하며
모임의 이름을 “한우리”로 한 것이 바로 이 뜻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진정 공동의 아버지로 고백할 때만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될 것입니다.
나는 들으려고 하는가?
-전삼용신부-
저의 꿈은 어렸을 때부터 돈 많이 벌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행복이 돈으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닌데 우선은 돈이 행복의 중요한 조건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때부터 경영학과에 가야겠다고 결심을 했고 그 이후로는 생각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공부도 곧잘 하여서 시골에서 수원으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에서도 성적이 괜찮게 나왔습니다. 괜찮은 대학의 경영학과에 들어갈 수 있는 정도는 되었습니다.
그런데 3학년 2학기 때부터 성적이 급강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시간 정도의 통학 왕복 시간 때문이었는지, 혹은 공부 방법이 잘못 되었는지 점점 성적은 떨어져갔고 심지어 입학시험 2달 전부터는 정신과에서 주는 약을 시험이 끝나는 날까지 먹어야 했습니다. 그 멀리 학교를 다니며 고생을 했음에도 보람이 없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도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대학에 들어갔는데 3학년부터는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돈 몇 푼 더 벌려고 저렇게까지 아옹다옹 발버둥 쳐가며 살아야하는지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평생 바라왔던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주님께서 저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다만 나의 계획이 무너지고 있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럴 때 동시에 ‘지금까지의 나의 계획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바라보지 않았던 사제의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싫어져서 사제의 길이 보였는지 사제의 길이 보여서 그런 삶이 갑자기 싫어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일은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다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때가 나의 가장 위기였고 동시에 나의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은총의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어떠한 상황에서건, 그것이 가장 안 좋아 보이는 상황일지라도 나에게 말을 걸고 계심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자연을 통해서, 이웃을 통해서, 또 사건들을 통해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다만 우리의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기 때문에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죽은 라자로까지 살리신 예수님의 인기가 너무 올라가기 때문에 기득권들이 회의를 소집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사실 이들이 걱정하는 것은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기는 것이지 백성들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겉으로는 백성을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을 걱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마음이 정해지면 그것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은 매우 쉽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예수님이 반란을 일으키실 분은 아니셨음에도 불구하고 없는 사실들로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정당한 이유를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것은 대사자 가야파가 한 그 해의 예언입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는 것이 낫다는 말을 자신의 입으로 하면서 바로 그런 분이 예언서에 계시된 ‘메시아’이심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에는 하느님의 종이 세상에 와서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대신 죽게 되리라는 예언이 나와 있습니다. 가야파는 대사제이면서 또 대사제로서 예언을 하면서도 자신의 예언을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하느님께서는 가장 악한 사람에게서까지 예언을 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놀라운 교훈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죽이려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유다 종교의 지도자라는 이유만으로 예언을 하게 하셨다면 우리는 교회의 말을 얼마나 잘 따라야 하겠습니까? 교회는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하느님을 바라보려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시려는 말씀을 절대로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가장 악한 사람에게서까지 당신 뜻을 드러내보이듯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에게 하는 모든 말들 안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이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잘 알아듣고 또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임을 확신하여 그대로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물론 그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그 확신을 더하기 위해 피땀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만약 저도 그 때 주님의 부르심을 알아듣지 못했더라면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선택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고 그 길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주님의 목소리를 그냥 넘겨가며 살지 않도록 항상 ‘오늘은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까?’하고 주님께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 날부터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양승국신부-
<기적의 고해소>
오늘도 저는 좁디좁은 고해소 안에서 세 시간 동안 앉아있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은총을 부여받는 성사가 고백성사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자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고백사제수, 그리고 일년에 두 번 판공성사때 집중되는 신자들의 엄청난 행렬 앞에 사제들은 은근히 기가 질리곤 합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고해소에 한 두 시간만 앉아있으면 좀이 쑤시고, 어떤 때는 슬슬 부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차라리 어디 가서 노가다 한판 뛰는 것이 더 낫지 도저히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끝나면 빨리 돌아가서 아이들과 볼이나 신나게 한번 차야지"하는 생각뿐입니다.
이렇게 철없는 제게 한 동료 신부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나는 고해소에 앉아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네. 고해소 안에서 얼마나 많은 하느님의 은총과 손길을 체험하는지 몰라! 그리고 우리 사제들, 신자들의 고백성사 인내롭게 들어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의 보속이려니 생각해야지"
참으로 저를 부끄럽게 하는 말씀이었고,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고해소는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선택함으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찾아와서 예수님께 불평불만을 털어놓고 하소연하는 장소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선택함으로 인해 받아온 고통과 상처, 갈등과 방황, 회의와 번민을 털어놓는 곳이 고해소입니다.
어찌 보면 걸림돌 중에 걸림돌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세상의 이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껄끄러운 존재가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 때문에, 그분이 남겨주신 복음 때문에, 그분이 몸으로 보여주신 모범 때문에 마음이 찔려 가슴을 치며 찾아오는 곳이 고해소입니다.
가끔씩 고해소 안에서 갖게 되는 소중한 체험인데, 연륜에서 오는 풍부한 경험과 해박한 지식, 탁월한 지혜를 지닌 대학자들, 아무 아쉬울 것 없는 명망가들마저도 고해소 안에서만큼은 겸손 되이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가슴을 치며 자신의 부족함을 부족한 사제 앞에서 뉘우칩니다.
예수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손해보기를 각오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선택하겠다는 것은 예수님 그분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의 십자가를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신기루를 쫓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봉사와 헌신, 나눔, 십자가의 삶을 살겠다는 표현이 예수님을 선택한다는 것의 전부입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도 모릅니까?"
-양승국신부-
<모든 것이 다 제 불찰입니다>
가난한 지역에 위치한 한 중학교에 끔찍이도 아이들을 사랑하시던 선생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얼마나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셨고, 아이들을 따뜻이 보듬어주셨는지 하루종일 아이들은 선생님 주변을 떠날 줄 몰랐습니다.
한번은 상습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던 반 아이 한 명이 된통 크게 사고를 쳐서 경찰서에 있다고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아이의 집에는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서 학교로 전화를 한 것입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즉시 경찰서로 출동한 선생님은 이런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번 건수는 워낙 금액도 크고 피해자가 만만치 않은 사람이어서 아무래도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아이가 그 모양이 되기까지 자녀교육에 무관심했던 부모의 탓이 가장 컸겠지요. 또한 열악한 학교 교육제도의 탓도 클 것입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주변환경의 탓도 무시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아이의 잘못을 오로지 자신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선생님은 경찰관 앞에서 오직 이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모든 것이 제 잘못입니다. 제가 이 아이를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제가 아이의 담임으로서 역할을 소홀히 했습니다. 다시 한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우연히 담임을 맞게되어 만나게 된 한 사고뭉치가 저지른 잘못을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선생님 앞에서 경찰서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숙연해졌습니다.
경찰서에 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은 무죄고 모든 것이 상대방 탓이라고 우겨대는 것이 보통인데,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선생님 앞에 사람들은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가 저지른 모든 잘못들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선생님의 삶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속죄양" "희생양"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저지른 모든 죄와 악습과 우상숭배를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 청하시기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한평생은 오로지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한 속죄양으로서의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자식들의 그릇된 삶, 결정적인 실수, 크고 작은 잘못들을 자신의 부덕(不德)으로 여길 때 우리는 또 다른 속죄양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부족함과 비행과 버릇없음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는 선생님의 삶은 진정한 희생양으로서의 삶입니다.
가족이나 이웃들의 실수나 부족함 앞에서 손가락질하거나 책망하지 않고 "다 내탓이다. 내가 도와주지 않았기에, 내가 기도하지 않았기에, 내가 함께 하지 않았기에 그런거다"하는 마음, "내탓이요!"하는 마음이야말로 희생양이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사람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왔습니다. 이것은 내일부터 행복하게 살라는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행복하게 살라는 뜻입니다. 순간이 이어져 영원이 됩니다.(쇼펜하우어)
참된 예수님 상
- 정명숙 수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당신이 누구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
나는 위에서 왔다. …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
“내가 나”(요한 8,24)라고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의심과 회의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닫힌 마음은 열릴 줄을 모릅니다.
그들 안에 고정된 하느님 상 때문에 예수님께서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과 사람을 살리는 행동 모두를 그들은
걸림돌로 생각합니다. 이들의 깊은 ‘거부의 병’은 예수님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갑니다. 잠시 우리 신앙 공동체를 바라봅니다.
너도나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각자 자기 입맛에 맞는 예수님 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 또한
적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를 많이 해도 과거의
내 습관에서 벗어나 ‘새 사람’으로 내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우리가 자신의 말과 행동과 내면의 객관적인 모습을 들여다볼 시간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병든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누구신지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아셨기에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길을 걸으시며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할 수 있으셨습니다.
꼬리 자르기
-진병섭 신부-
도마뱀은 위기에 처하면 꼬리를 자른다고 합니다. 꼬리를 내줌으로써 위기를 극복한다는 말이지요. 요즘 뉴스를 보면 자주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꼬리 자르기’입니다. 여론의 폭풍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꼬리를 잘라냄으로써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요즘에만 보는 양상이 아닙니다. 역사상 모든 독재자에게 위기란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더없이 좋은 구실이었습니다. 말이 좋아서 극복이지 그 본질을 보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며 사건을 덮으려는 또 하나의 폭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카야파의 말이 떠오릅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 카야파 편에서 보자면,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잠재우는 좋은 수단이 되고,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하는 데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본 것입니다. 관점을 달리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인간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 죽음은 ‘꼬리 자르기’란 이름으로 치부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그 십자가는 2000년 전 끝난 사건이 아니라 해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현재의 사건이며, 우리에게 “너희도 그렇게 살아라.”라고 하는 모범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내일부터 예수님 수난의 절정인 성주간으로 들어갑니다. 당신 것을 철저히 내려 놓으셨던 예수님의 십자가는 권력자들 편의 ‘꼬리 자르기’가 아니라 인간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모범이 되어, 너희도 그렇게 살라는 초대입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삶을 철저하게 보여주신 예수님을 보며 우리 또한 그분의 삶을 닮아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참다운 명예
-전삼용신부-
이번에 수원교구 교구장님이 바뀌시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최 바오로 주교님의 은퇴를 교황님이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최 주교님은 이제 환갑을 맞은 연세이십니다. 남들은 이제 주교직을 시작하는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주교님으로서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물러나려고 하시는 이유는 당신의 건강 때문입니다.
다행히 암이 조기에 발견이 되어 치료를 받으신 상태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여러 번 교구청을 비우셔야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법상 건강상의 이유로 교구장직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때 빠른 시일 내에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아시고는 은퇴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명예욕, 성욕, 소유욕이 세포 하나하나에 박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명예욕이라고 합니다.
돈도 벌 수 있을 만큼 번 사람들이 정치에 뛰어드는 이유가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본다면 이번 주교님의 결정은 어쩌면 어리석게도 보일 수 있습니다. 교구장이라는 자리는 누가보아도 존경받고 대접받는 위치이기 때문입니다.
연세가 지긋한 시장이나 국회의원이 와서 젊은 사제인 저에게도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데 주교님이야 얼마나 큰 대우를 받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는 역시 예수님의 행동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특별히 기득권층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많은 인기를 얻으시자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이번에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죽은 라자로까지 살리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긴급회의를 소집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사실 이들이 걱정하는 것은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기는 것이지 백성들을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백성을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사제 가야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사제로서 그 해의 예언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즉,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에 퍼져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죄를 보속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셔서 그 한 분의 죽음으로 우리 모두가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권력을 빼앗으러 오신 줄 알고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권력이나 명예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도 자신들처럼 그런 권력욕이나 명예욕이 있을 것이라 판단을 하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이유로 유다인들을 선동하여 그 분을 죄인으로 몰아붙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간 것인데 그에게는 예수님께서 유다의 왕으로 자처했다고 하며 로마 황제에 대한 반란의 주동자로 몰아붙여 결국 사형을 언도받게 만든 것입니다.
저는 최 바오로 주교님의 은퇴 결정을 보면서 참으로 예수님과 닮은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위해서는 당신의 명예는 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직 아버지의 영광만을 위해 사셨다면 최 주교님께서는 당신의 유익이 아닌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실 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명예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만을 위해 사셨고 돌아가셨기에 아버지께서 그 분을 높이 들어 올리셨던 것처럼 자신의 명예를 포기하고 교회의 영광을 위할 줄 아시는 최 주교님도 높이 평가하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로!
-김찬선신부-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사람을 하나로 모으는 방법.
첫 번째, 공동의 적을 갖게 만든다.
외국, 특히 일본하고 축구 경기를 하면
경상도, 전라도가 없고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이 공동의 적을 대상으로 하나로 뭉친다.
이것이 하나로 모으고 뭉치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고
가장 강력하게 뭉치게 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 공동의 이익을 제시한다.
유해 시설이 들어오면 반대를 위해 하나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동의 이익이 된다면 이익을 위해 하나가 된다.
그러나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제시하기 쉽지 않고
공동의 이익이 되더라도 차등이 생길 경우 깨지기 쉽다.
세 번째, 동호회를 결성한다.
무엇을 같이 좋아하면 가장 자연스럽게 그것을 같이 하며 하나가 된다.
요즘 같은 감성의 시대에는 더더욱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것을 좋아하게 하기가 쉽지 않다.
네 번째, 대중의 우상을 만든다.
대중은 언제나 쏠리는 현상이 있다.
누군가 달려가면 호기심이 생기고
여러 사람이 달려가면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감이 생긴다.
그렇기에 연예인이든 종교인이든 우상이 될만한 사람을 띄어놓으면
그를 중심으로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런 하나 됨은 오래 가지 않고
횡적 고리가 약하여 모래알이다.
그러나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런 방법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아니 이런 방식을 초월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나로 모으는 방식을 얘기합니다.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사람을 하나로 모으는 것입니다.
이번 김 수환 추기경의 죽음으로
사랑도 바이러스처럼 전염된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래서 각막 기증자가 늘어났고
쉬는 신앙인들이 다시 성당으로 돌아오는가 하면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김 수환 추기경이 죽음은 깜짝 감동으로 곧 잊혀질지도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모을 것입니다.
오늘 에제키엘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고 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이기심과 증오를 정결케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여
당신을 중심으로 하느님 아래로 모으신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새벽을 열며
어제는 우리 성당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종교미술학부에 강의가 있는 날입니다. 그리고 강의가 끝난 뒤에는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서 근처의 본당으로 얼른 가야 하는 바쁜 날이었지요. 아무튼 어제 4시부터 종교미술학부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곧바로 판공성사 주러 가야만 했기 때문에 쉬는 시간도 없이 이어서 90분 강의를 했지요. 강의 후, 저녁식사 시간이 가까워서 그럴까요? 너무나 시장하더군요. 순간 갈등이 생깁니다.
“식사 시간이 가까웠는데 빵이라도 좀 먹을까? 아니야. 저녁식사 맛있게 해야지.”
이러한 갈등도 잠시, 저는 너무나 시장해서 빵 두 개를 먹고는 판공성사를 주러 옆 성당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저녁 식사하러 식당으로 오라고 합니다. 빵을 두 개나 먹어서 그런지 전혀 생각이 없었지만, 그래도 함께 한 신부님들과 자리를 같이 해야 하기에 식당으로 갔습니다.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싱싱한 회, 매운탕, 맛있는 반찬 등등이 식탁 위에 가득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입맛이 당기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식전에 먹었던 빵 때문인 것이지요.
사실 배고픈 것을 30분 참는다고 굶어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30분을 참았다면 아주 맛있는 저녁식사, 그것도 아주 잘 차려진 진수성찬을 맛보는 기분 좋은 식사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30분을 참지 못해서 저는 그저 그런 저녁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회의를 한 뒤에,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들이 죽일 음모를 꾸미는 것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좋은 말씀으로 위로를 해주시지만, 나자렛 출신의 초라한 직업을 가진 목수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직업도, 가문도, 부유함도 없는 예수님이시기에 사람들은 그런 분을 왕으로 모실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이었습니다.
이 고정관념 때문에 예수님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고 노력하는 시간을 전혀 갖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제거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내 자신을 다시금 바라봅니다. 30분도 참지 못해서 빵을 집어 먹는 어리석음처럼, 세상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것들을 첫째 자리에 위치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제 내일이면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성주간이 은총의 시간이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오늘 하루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사랑하면서 살았으면 합니다.
음식에 대한 욕심을 버립시다.
빠다킹신부
십자가
-허찬란 신부-
오늘 복음에 등장한 “한 사람의 희생이 모두를 대신한다”는 가야파의 예언은
참으로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리고 역설적입니다. 사목을 하면서
사제 개인의 일과 본당 공동체 일 사이에서 갈등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그래, 나 한 사람이 참으면 다 될 일을” 하고 넘기는데 속이 아픕니다.
가정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한 사람은 멀쩡하게 다니는데 오히려
다른 가족들이 아픈 상처를 가지고 숨죽이며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눈을 돌려봅시다. 세상에는 무죄한 채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빈민가의 아이들, 에이즈로 고생하는 아프리카의 아이들,
기아로 허덕이는 어린이들, 오갈 데 없는 무주택자들, 장애와 고령으로
고통당하는 이들, 끝없는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제3세계 국가와 가정들,
전쟁 속의 이유없는 피해자들, 생각하면 할수록 끝이 없는 상황들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죄악이 가득한데 그 안에는 자기 탓 없이
의로운 채로 고통을 수반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가득합니다. 그런가 하면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오히려 대접받고 떳떳하게 활보하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닌가요? 이런 무죄한 의인의 고통이 비일비재하기에
예수님은 오늘도 세상의 죄를 짊어지신 채로 십자가를 지십니다.
중국 기세에 맞바람을!
-정복례 수녀-
친구의 권유로 엘빈 토플러의 「부의 미래」를 읽었다. 「제3의 물결」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이 저자는 이제 제4물결이라고 할 수 있는 첨단 지식과 속도에 대하여 말한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야말로 토플러의 제3물결을 제대로 잡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어서 제4물결 또한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 마지막 부분에 세계를 움직일 주역들을 제시했는데, 거기에는 중국과 한국도 있었다. 특히 중국이 눈에 띄게 부각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중국을 얕잡아 본 것이 사실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불성설이지만 중국경제협력기금이니 뭐니 해서 원조를 하지 않았던가. 중국에서 봤을 때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우리는 중국을 얼마나 몰랐던가. 옛날부터 중국을 대국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비단 땅덩이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민족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어쨌든 지금은 전세계가 중국을 주시하고 있으며, 중국을 배제한 세계 경제나 정치는 이제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지리적 여건을 백 퍼센트 활용하면 더불어 잘살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오늘 유다인들의 최고 지도자에 속하는 대사제가 예언을 한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그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지금까지도 그들의 후예는 진실을 모르고 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구세주라는 진리를!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우리 속담에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지 않던가? 유다인들은 그들 사이에 태어나고 자라고 살다 간 그리스도를 알아뵙지 못했다. 어디 그뿐인가. 그분을 하느님 모독죄로 사형에 처하지 않았던가. 인간이란 존재는 왜 이렇게 아둔할까? 가까이 있는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고 무지개를 쫓느라 평생을 허비하고 있으니. 예수님은 진리이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며 영생을 주는 분이시다. 사실 다른 것은 몰라도 상관없지만 예수님만은 알아보고 잘 섬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하느님 말씀인 성경을 꾸준히 읽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날 갑자기 사도들처럼 부쩍 자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대견스러워할 날이 반드시 오리라! ●
희생
-김훈일 신부-
오늘 복음 말씀에서 대사제 카야파는 자신도 모르게 주님의 수난과 고통의 의미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른 이를 위해서 희생한다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의 희생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어떤 생명도 다른 생명의 희생이 없이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희생 중에서
특별한 모습이 있습니다. 어떤 희생은 그 열매가 대단히 크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희생하면 자녀가 올바로 자라납니다.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희생하면 부모님이 아름다운 임종을 맞이합니다. 배우자를 위해서 희생하면
가정이 평화롭습니다. 이웃과 친구를 위해서 희생하면 어려운 일을 당해도
외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으로 희생하면 놀라운 일이 펼쳐집니다. 바로 이웃의 구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념과 사상으로 자기 목숨을 내놓으며
희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이념과 사상은 늘 변해 갑니다.
그러니 그의 신념이 얼마나 강했던 간에 결국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룩한 희생은 나와 이웃이 구원되고 다른 이들에게 계속해서
전해집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늘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맛括?위한 희생은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을 드러내고자 하실 때 기꺼이 그분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내놓읍시다.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갈 만큼>
-양승국신부-
언젠가 한 산골 농장에 들렀을 때의 일입니다. 농장 주인은 여러 종류의 가축들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젖소, 돼지, 닭, 꿩, 염소, 양, 오리, 토끼 등등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량으로 사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놈 몇 마리 저놈 몇 마리, 키우면서 가축들의 생태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가축을 키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는가를 연구하는 중인 듯 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짐승을 잡을 때의 반응들이 각각 다르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가장 특별한 녀석들은 아무래도 양이라고 했습니다. 양과 비슷한 염소의 경우 목에 칼을 들이대면 소리소리 지르고 길길이 날뛰는데 반해 양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저 조용히 서서 크고 맑은 눈으로 주인을 바라보고 있으니, 잡는 사람 입장에서 기분이 너무나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발버둥도 치고 난리를 부려야 짐승을 잡는 사람도 뭔가 기분이 나는데, 양만큼은 영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대사제 가야파가 전혀 생각 없이 엉겁결에 튀어나온 말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제물로 바쳐진 속죄양이 되셨습니다. 유다인 전체를 대신한 속죄양, 인류 전체를 대신한 속죄 제물, 오늘 우리들의 죄악을 대신한 대속물이 되신 것입니다.
"한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은 편이 더 낫다는 것을 모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해서 돌아가심은 온전한 스스로의 선택이었습니다. 골고타 언덕에 도달하기 전까지 죽음을 피할 무수히 많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조금만 마음 바꿔먹었다면 얼마든지 편안할 수 있었던 인생,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고 인정받으면서 행복할 수 있었던 인생이 예수님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시로 다가오는 그런 안락함에로의 유혹, 포기에로의 유혹, 숨어버리고 싶은 유혹을 의연히 이겨내셨습니다.
때가 오면 유다 민족들과 조상들의 그 숱한 죄와 악행을 대신해서 죄를 뒤집어쓰고 쓸쓸히 홀로 골고타 산을 올라가야만 하는 자신의 사명을 한번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서 말씀처럼 악행을 저지른 것은 우리지만 오늘도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악행을 대신해서 죽음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토록 늠름했던 풍채도 멋진 모습도 더 이상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눈길을 끌만한 볼품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습니다.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습니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고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습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습니다.
그는 온갖 굴욕을 당하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았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이사야 53장 참조).2004-04-03
삶과 죽음
-강영구신부-
그 해의 대사제인 가야파가 그 자리에 와 있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그렇게도 아둔합니까?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도 모릅니까?” 이 말은 가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사제로서 예언을 한 셈이다. 그 예언은 예수께서 유다 민족을 대신해서 죽게 되리라는 것과 자기 민족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 죽는 다는 뜻이었다.(요한11,49-52)
예수님,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은 죽음으로 그 삶을 마감합니다. 죽음은 생명 현상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어떤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의 시작이 됩니다. 어떤 죽음은 수많은 생명을 살려내는 바탕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죽음은 그야말로 허망한 죽음으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날 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상인방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날 밤 하늘이 내리는 재앙이 온 이집트를 덮쳤습니다. 집집마다 맏아들이 죽고 짐승의 첫배에서 난 새끼들이 몰살당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집들은 하늘이 내리는 재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출애12,1-14). 재앙이 건너간 것입니다. 그 건너감을 파스카(Pascha, 過越)라고 합니다.
어린양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재앙과 죽음에서 건져내어 생명으로 건너가게 한 죽음입니다. 어린양의 죽음과 피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켰습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기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당신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온 백성을 살리는 죽음이자 대속代贖의 죽음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파스카(Pascha, 過越) 어린양입니다.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피 흘림으로 저희들은 죄와 죽음의 세계에서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가 되었습니다(過越). 당신의 죽음은 온 인류를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게 한 파스카(Pascha, 過越)죽음입니다. 당신의 죽음은 이미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며 부활입니다. 과연 당신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습니다. 저희도 당신처럼 살고 죽어서 영원히 살게 하소서.(一明)
그렇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 죽는 편이 낫다.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죽은 지 사흘이 지난 라자로를 소생시킨 표징사건(요한 11,1-44)을 전제한다. 죽은 라자로를 소생시킨 기적은 요한복음이 보도하는 예수님의 7개 표징사화 중 마지막 표징이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자신을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예고된 메시아요, 그들이 믿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과 같은 분이요, 하느님과 함께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님이심을 명백히 계시하셨다. 이제 더 이상 다른 계시는 없다. 있다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높이 달리시는 것과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는 일만 남았다. 라자로를 소생시킨 표징사화를 끝으로 예수님의 3년간 공생활은 사실상 끝났다고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3년간 공생활은 처음 1~2장에서 아주 완만하게 시작한다.(다음날/1,29; 다음날/1,35; 그 이튿날/1,43; 사흘째 되던 날/2,1) 그러다가 3장부터 11장까지에는 그 속도가 빨라져 단숨에 3년 정도의 공생활이 보도된다.(2번의 해방절)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의 죽음까지 마지막 7일간의 활동을 보도하고 있다. 12장 서두를 보면 예수께서 과월절을 엿새 앞두고 베다니아로 가셨다고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마지막 맞으시는 과월절(해방절)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성대하게 입성하실 것(12,12-19)이고, 과월절 하루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시면서 새계명과 함께 긴 고별사를 주실 것(13-17장)이다.
이제 예수께서 유다인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하실 일은 거의 마치셨다. 당신자신이 누구신지를 모두 밝혀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실 일을 다 하셨으니, 이제 선택은 사람들의 몫으로 남는다. 라자로의 소생기적은 분명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했다.(45절) 그러나 이 사건이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예수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마지막 결정적 요인이 되고 만다.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을 못마땅하게 여긴 유다인들이 돌로 예수님을 치려했던 행동(8,59; 10,31)은 그나마 즉흥적이고 충동적이었다. 사실 그들이 재판을 하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유다인들의 최고의회가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한다. 그 해의 대사제 가야파가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도 모릅니까?"(50절)라는 말로 예수님의 속죄죽음을 예고한다. 가야파의 태도는 거만하고 불손하기 이를 데 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대(大)를 위해 소(小)의 희생은 감수한다는 정치가들의 일관된 생각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위한 죽음, 즉 전 인류의 죄를 위한 속죄의 죽음이 될 것이다.
유다인의 최고의회가 예수의 죽음을 결의하였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를 마음대로 죽일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때가 오면 스스로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실 것이고, 또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실 것이다. 그러나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도모하실 것이다. 그 때까지는 아직 일주일이 남았다. 교회는 오늘로써 사순시기의 재계를 마감하고 본격적인 수난시기로 돌입한다. 예수님의 본격적인 수난시기는 곧 성주간(聖週間)이다. 성주간에도 여전히 재계는 필요하다. 그러나 성주간에는 실제로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씩 함께 걸어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라자로의 소생사건을 통하여 믿음을 가진 자는 예수님과 함께 그 길을 갈 것이지만 백성의 지도부는 그 반대의 길을 갈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자는 그분과 함께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분은 죽임을 당하거나 마지못해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좇아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생명을 내어놓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이것이 곧 세상에 ’새 생명’을 선물하시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함께 하고, 그분과 함께 죽을 때만이 새 생명의 참 뜻을 깨닫게 될 것이다.2004-04-03
하나로 모으시기 위하여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에서 가야파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언을 한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그냥 죽는 죽음이 아니라 "민족을 위하여, 그리고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기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언이지만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비전이다. 즉 예수님은 그냥 살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의 큰 비전을 갖고 실으셨는데 그 비전이란 모든 인류를 구원하리라는 비전이다. 예수님은 이 비전을 위하여 사셨고 이 비전을 성취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비전이란 무엇인가?
첫째, 비전은 마음속의 구체적이고 분명한 그림이다. 지금은 존재하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는 실현되기를 원하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분명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마음 속에 그려져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런 비전을 품은 사람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그려 줄 수가 있다.
둘째, 비전은 가장 바람직한 미래의 모습이다. 비전은 미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 자신의 현실을 넘어서서 미래에 되고 싶은 가장 바람직한 모습과 관련이 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브11,1)라고 기록되어있는 것처럼 장차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들의 가장 바람직한 미래의 모습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 바로 그가 비전을 품은 사람이다.
셋째, 비전은 가장 가능성 있는 꿈을 꾸는 것이다. 사람들이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볼 때 미래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채 우리 앞에다가 온다. 바로 그 가능성을 보고 믿음으로 달려가는 삶이 비전을 품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이다.
넷째, 비전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거룩한 꿈의 다리이다. 몇 년 전 강남과 강북을 이어주던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많은 인명 피해 외에도 성수대교를 통해 등하교하던 학생과 직장인들, 그리고 성수대교 양쪽의 상인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과 어려움을 겪었던 적이 있다. 강남과 강북을 이어주는 다리가 끊어져서 사람들이 오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꿈이 없다면 절망 속에 살거나 현실에 안주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때로는 불만스럽고 힘이 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꿈이 있다면 희망을 갖고 살아 갈 수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로마5,1-5)
비전을 품은 자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가 품은 비전이다. 비전을 품은 자는 미래를 창조해 나갈 수 있다. 비전은 미래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나가는 신비스러운 힘이요, 머뭇거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비전은 우리의 불만족스러운 현실의 다리를 뛰어 넘어 내일을 꿈꾸며 살아가도록 하는 거룩한 꿈이고 열망이다. 우리에게 꿈과 비전을 품게 해주시는 주님은 어제의 꿈을 오늘의 비전이 되게 하시고, 내일에는 현실이 되어가게 하신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라는 비전을 제시해주러 오셨고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죽으신다.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기 위하여 죽는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비전이고 그것을 위하여 죽으실 것이다.
세네칼은 "사람은 죽는 것이 아니라 자살하고 있다."고 말했다. 누구나 죽는다. 인간은 죽는 것, 그것이 인간의 한계요, 운명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죽음을 없애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인간을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죽으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도록 제시해준 그 길을 걸어야 한다.
즉 우리는 죽음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것이 부활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오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길을 걷지 말고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구원이요 부활이라면 그것을 믿으면서도 그냥 죽음의 길을 걷고 있다면 그것이 곧 자살이다. 즉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어 가는 것이다. 분명히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명으로 넘어가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곧 자신의 목숨을 재촉하는 자살 행위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투신하는 것이다. 즉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겠다"는 당신의 죽음에 대한 비전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하는 것이요, 희생하는 것이다. 결코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자살행위가 아니다. 예수님의 이런 비전은 예수님 당신 자신이 세운 비전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이 제시해준 비전이다.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 비전을 자기의 비전으로 받아들이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사셨고 또 그 비전을 성취시키기 위해 죽으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제시해준 비전을 예수님이 자기의 비전으로 받아들이시고 그 비전을 성취시키기 위해 죽으셨듯이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이 제시해준 비전을 나의 비전으로 받아들이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죽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전을 자기의 비전으로 받아드리고 사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또 자기를 위해서 죽지 않는다.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사셨고 모든 이들을 위해 죽으셨듯이 이웃을 위해 살고 이웃의 구원을 위해 죽는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비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살하지 않고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를 위하여 살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 또 나는 누구를 위하여 죽고 무엇을 위하여 죽을 것인가? 우리는 사는 방법도 예수님한테 배워야 하고 죽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산 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로마1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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