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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29일 부활 제4주일
성소 주일
오늘은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도 하는 ‘성소 주일’이다. ‘성소’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은 특별히 사제성소의 증진을 위한 주일이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라는 말씀에 따라, 교회는 사제성소의 증진을 위한 더 많은 기도와 노력을 당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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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요한 10,11-18)
"I am the Good Shepherd"
A good shepherd lays down his life
for the sheep.
말씀의 초대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베풀었음을 선언하고 있다. 그분의 힘으로 병자들을 낫게 하고 마귀를 몰아낸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놀란다. 베드로는 예수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음을 외치고 있다(제1독서). 주님께서 큰 사랑을 주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 먼 훗날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될 것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라고 하신다. 실제로 그분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간다. 착한 목자께서는 모든 이의 구원을 원하신다. 믿음과 신뢰로 다가가면 누구라도 그분을 만날 수 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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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누구에게나 ‘운명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부부의 만남, 부모와 자식과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입니다. 모두가 주님께서 연출하신 것이지요. 그러기에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건강한 목숨이 될 수 없습니다. 목숨을 운전한다는 것이 ‘운명’(運命)이라는 말의 ‘숨은 뜻’입니다.
어떻게 이 만남을 가꾸며 살아갈 수 있을는지요? 복음 말씀에 열쇠가 있습니다. ‘착한 마음’입니다. 착한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착하면 바보라고 생각합니다. 할 말도 못하고 남에게 당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는지요? 그러나 착한 마음 뒤에는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분께서 작심하시고 지켜 주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착한 마음은 ‘참을 줄 아는’ 마음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알면서도 ‘모르는 듯’ 덮어 주는 마음입니다. 성질대로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칙대로 하는 것이 늘 옳은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어린이의 모습일 뿐입니다. 우리 곁에는, 몸은 어른이지만 생각과 행동은 여전히 어린이인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만남은 꽃입니다. 꽃이 싱싱하고 아름다우려면 보이지 않는 뿌리가 튼튼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뿌리는 이렇듯 ‘상대를 참아 주고’ 그를 위해 기도하며 선행을 베푸는 일입니다. 만남의 연출자는 주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분께서 지금의 만남을 주선하셨다면 앞으로의 만남에도 개입하실 것은 분명합니다. 미래를 그분께 맡기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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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한때 ‘공주병’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남자들에게는 ‘왕자병’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유행병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며 짐짓 자신만 잘난 체하는 풍토를 형성하였습니다. 오늘 요한 서간 저자에 따르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의 왕자들이요 공주들입니다. 그러나 공주병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공주병은 자신만 공주라고 생각하는 병입니다. 오늘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누구도 예외 없이 하느님의 소중한 공주들이요, 왕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바로 그렇게, 하느님께 사랑받은 소중한 자녀들이 되도록 만드신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착한 목자이십니다.
개인소명과 공통소명
-전삼용신부-
산에 오르는 길은 하나가 아닙니다. 여러 갈래의 길이 있고 저마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길을 택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하나하나 너무 잘 아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맞는 길이 무엇인지 아시고 그 길을 가도록 초대하십니다.
이것을 성소라고 합니다. 성소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거북이와 오리와 캥거루가 함께 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치타였습니다.
거북이는 수영을 잘하고 오리는 수영과 날기를 캥거루는 높이뛰기를 잘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가장 중요한 것은 빨리 달리는 것이니까 달리기를 먼저 배워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거북이는 손과 발이 다 갈라지면서까지 연습을 했지만 빨리 달릴 수가 없었고 무능력한 열등아로 남았습니다. 오리는 날개를 사용하지 못하여 날지도 못하게 되었고 다리 근육이 붙어 조금 빨리 뛸 수 있게 되었으나 물갈퀴가 찢어져 수영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캥거루는 높이 뛰지 못하고 달리는 것만을 강요받았기 때문에 높이 뛰면서 달리면 더 빠르다는 것을 잊고 뒤뚱뒤뚱 달리게 되었지만 그래도 조금 빠른 편이라고 칭찬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각자는 자신들의 독특한 능력을 잃고 적당히 빨리 달리는 칭찬받는 학생들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삶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치를 하고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하고 어떤 사람은 주부가 되고 어떤 사람은 수녀님이나 사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요즘 아이들의 꿈 중 가장 많은 것이 연예인이 되는 것입니다. 인기도 있고 돈도 많이 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연예인이 될 수 없고 연예인이라고 해서 다 부자이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각자에 맞는 길을 찾아야합니다. 무조건 공부만 시킨다고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자매님이 저에게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딸이 명문대 의대를 졸업했는데 병원에 취직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딸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부만 시키는 것보다는 인성적인 면에도 신경을 썼어야 했을 것이라며 후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 하느님께서 나의 자녀에게 다른 무엇을 원하고 있는데 부모님들이 자녀를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되도록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합니다. 부모님들은 돈 많이 벌고 결혼해서 좋은 가정을 꾸려야 행복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생각을 틀릴 수 있습니다.
신자들 또한 그나마 자녀가 사제가 되겠다면 잘 받아들이지만 수녀님이 되겠다고 하면 반대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너무 부자유스럽고 구속받아 힘들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의 수녀님들이 다시 태어나도 수녀님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결혼한 자매들이 다시 태어나도 남편과 다시 결혼하겠다고 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을 것을 자신합니다.
사제 성소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 길이 가장 행복하여 주님께서 불러주셨음에 감사해해야하고 결혼 성소로 불러주셨으면 그것에 감사하며 살면 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나를 주님께서 어떤 길로 불러주시는지 잘 깨닫고 그것을 깨달았다면 믿고 그 길에서 행복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불러주시는 길은 다르지만 목적지는 유일하게 하나입니다. 이것이 공통성소입니다. 공통적으로 한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란 하느님나라, 즉 행복입니다.
어느 날 한 애벌레는 배춧잎을 열심히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마리의 나비가 훨훨 날며 그들 곁을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는 그 광경에 너무나 매료되어 그만 넋을 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모습이 너무 보기 흉하고 처량함에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잠시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가 이내 쓴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먹던 잎을 마저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날아가던 그 나비가 다시 돌아와 그에게 인사하였습니다. 추한 털북숭이 벌레에게 관심을 보이는 나비에게 그도 부끄럽게 인사했습니다. 그러나 그 눈부신 모습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서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습니다. 그 나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땐 나도 너와 같은 애벌레였어.” 애벌레는 농담하는 줄 알고 웃으며 자신도 농담으로 되받아쳤습니다. “그럼 너와 같이 아름다운 나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 그 나비는 믿지 못하는 애벌레가 조금은 슬픈 듯이,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네 안에 나비가 있다는 것을 믿으면 돼!” 애벌레는 피식 웃고는 먹던 배춧잎을 계속 먹기 시작하였고 나비는 어깨를 으쓱하며 꿀을 먹으러 날아갔습니다.
그 때부터 애벌레는 자신의 안에 나비가 자라고 있는 꿈을 자주 꾸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다가도 어느 샌가 자신의 추한 몰골을 보고는 이내 현실로 돌아와 버리곤 하였습니다. 가끔 친구들에게 “우리도 나비처럼 날 수 있을까?”하고 물어 보았지만 모두 헛된 꿈을 꾸는 애벌레를 빨리 정신 차리라는 듯이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어른이 된 그는 자신의 몸에서 이상한 물질이 나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애벌레들은 다 쓸모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나오는 대로 뽑아버리곤 하였습니다. 애벌레는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나비의 말을 떠올렸고 그 믿음으로 나비가 되어 날 수 있다는 말을 조금씩 더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다른 애벌레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기도 했고 한 편으로는 그 믿음이라는 실이 자신을 죽일 것 같아 두렵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기어 다니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훨훨 나는 나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자신에게서 나오는 믿음의 줄로 자신의 몸을 칭칭 감았습니다. 그는 그 속에 갇혀 버렸고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다른 애벌레들은 모두 그가 미쳤다거나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달 밝은 밤에 그는 나비로 다시 태어났고 높은 하늘의 공기를 맡고 꽃을 찾아다니며 그들이 주는 꿀을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그의 말을 믿었고 어떤 친구들은 계속 배춧잎만 뜯어먹을 뿐이었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 내용을 나름대로 꾸며 본 것입니다. 이 책은 뒤늦게나마 저의 성소를 결정하는데 큰 힘은 주었습니다.
누구나 나비가 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을 믿고 참된 자유와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나비가 되어 살 수 있고 믿지 못하는 사람은 끝내 나비가 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은 단 한명도 예외 없이 불림을 받은 산의 유일한 정상입니다.
사제성소를 받았다고 해서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하시고 그 사람에게 가장 행복한 길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부르심을 받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어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목숨을 바치지 않으셨다면 부활하지도 승천하지도 못하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성소에 목숨을 걸 수 있을 때 나비가 될 수 있고 본질을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의 본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였고 다른 형제들로부터 시기를 받았습니다. 형제들은 처음엔 그를 죽이려고 하다가 이집트로 가는 상인에게 팔아넘겼습니다. 그는 한 부잣집의 종들 중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지만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꿈을 해석하여 다시 파라오의 신임을 받고 재정담당 장관이 됩니다. 그러나 기근으로 자신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그들이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그의 가족 전체를 덕분에 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온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요셉에게 그 많은 고통을 겪게 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도 어떤 소명을 띠고 태어났습니다. 그 소명은 나의 운명일수도 있지만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그 삶을 받아들이면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소명은 나의 참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온전한 나를 실현시키는 부르심입니다
성소주일
-김찬선신부-
착한 목자 주일, 그래서 성소주일인 오늘
착한 목자를 생각하며 영화 ‘워낭소리’의 할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이 영화를 보고 저는 보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이 영화는 참으로 聖事的이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성사적인 영화(Sacramental Movie)라 함은
이 영화가 하느님을 떠올리고 만나게 하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통해 착한 목자인 예수님을 떠올리고 만났습니다.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장면 하나.
(영화를 보기는 했으나 줄거리 앞뒤가 정확한 지는 자신할 수 없음.)
40살이나 먹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어 젊은 소를 들이고
자식들은 늙은 소를 팔라고 성화를 합니다.
소 때문에 아버지가 너무 고생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료를 먹이면 편한데 할아버지는 당신의 몸조차 건사키 힘들어도
평생 하던 대로 꼴에다 건강에 좋은 것을 섞어 먹입니다.
소에게 꼴을 먹이려니 농약을 칠 수가 없고
농약을 치지 않으니 소출이 적을 뿐 아니라
일일이 김매기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보통 15년 사는 소를 40살이 넘어 살게 하였지만
이제 늙어 일도 못하게 되니 할아버지는 소를 팔러 장에 갑니다.
가는 길에 광우병 의심 소고기수입을 반대하는 시위현장을 지나갑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입니다.
광우병 의심 소는 바로 잘못된 사료를 먹이기 때문인데,
그런 사료를 먹이는 미국의 축산업자나
이런 소고기를 수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하는 사람이나
다 자기 이익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이런 것 다 모르고 광우병이 뭔지도 모릅니다.
우시장에 도착하여 흥정이 시작되는데
값을 묻는 사람들에게 할아버지는 500만 원을 달라고 합니다.
60만 원밖에 줄 수 없는 소를 500만 원을 달라고 하니
사람들이 다 웃습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끝까지 500만 원을 고집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 소가 60만 원의 값어치일지 모르지만
할아버지에게는 500만 원, 아니 500만 원 그 이상입니다.
아니 팔 생각이 아예 없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에게 소는 돈벌이를 위한 것 이상의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돈벌이의 대상이 아닙니다.
할아버지는 한 평생 온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소도 그러합니다.
둘은 이런 일꾼의 일생을 같이 가는 동반자입니다.
소가 그러하듯이 일과 할아버지 사이에는
원망이나 불평이나 다른 것에 대한 곁눈질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둘 사이는 어떤 것도 낄 수 없는 완전한 일치입니다.
할머니는 소처럼 노상 일만 하는 인생에 대해 불평과 푸념을 하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일 사이를 파고 들 수도
둘 사이를 갈라놓을 수도 없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일은 자기 전부를 바치는 것, 사랑입니다.
온 몸이 부서져라 일한다는 말 그대로
자녀를 위해 온 몸이 부서지는 줄 모르고 일한 부모들에게
일은 聖事요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자신을 착한 목자라 하십니다.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시기 때문입니다.
나쁜 목자는 양들을 돈벌이 삼고 학대하고 필요 없으면 버려버리는데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길 잃은 양을 찾아옵니다.
이 착한 목자 주일,
이 목자직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기도하고
저를 포함하여 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그 부르심과 직분에 충실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닮은 목자 더 필요한 세상
-배광하신부-
◎착한 목자
인도 독립의 아버지인 ‘마하트마 간디’(1869-1948)는 자신이 만난 예수님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였습니다.
“신약성경과 산상설교를 읽게 되면서 나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별히 산상설교는 내가 어린 시절에 배운 것을 연상시켰고, 내 존재의 한 부분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주었으며,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원칙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이 가르침은 악에 대한 비 보복, 또는 무저항입니다. 내가 읽은 모든 글 중에서 내 마음에 영원히 남아 있는 글은 예수님께서 주신 새로운 법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즉 하느님을 경외하면서 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수록,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산상설교가 그리스도교의 전부임을 보았습니다. 바로 산상설교로 인하여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간디의 이 같은 고백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행일치라는 점입니다. 말과 행동이 같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당신을 착한 목자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양들인 우리는 그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목자의 말과 행동이 다르다면 양들이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르겠습니까? 예수님 안에 한 양이었던 간디는 비록 예수님의 말씀처럼 당신의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이었지만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었습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처럼 지상의 삶을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 15).
예전 개신교 목사 한 분이 미국에 가서 “불교를 믿는 국가들이 잘 사는 것을 보았습니까? 전부 가난한 나라들뿐입니다”라는 말을 하여 국민의 분노를 산 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불자들은 격노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말씀을 거꾸로 이야기하는 모순을 범하였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 20) 그와 같은 복음적 논리가 아닌 경쟁과 경제의 논리로 반 복음적 메시지를 전한다면 어떤 양들이 그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진정 당신의 말씀대로 가난을 사셨고 양들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때문에 그분이 진정 착한 목자이신 것입니다.
◎그분의 양 떼
오늘 요한은 넘치는 하느님 사랑을 감격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1요한 3, 1).
피조물이며 유한의 존재인 우리가 창조주이시며 무한의 존재이신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 그래서 그 놀라우신 분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은 진정 그리스도교의 신비입니다. 이 같은 감격의 은총은 예수님의 강생과 수난, 그리고 부활로 말미암아 분명히 밝혀졌습니다. 이제까지 하느님은 심판자, 징벌자이신 두려움의 상징이었는데, 예수님의 말씀처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목자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가 받게 된 구원에 관하여 이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 12).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면, 자녀로서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착한 자녀들은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그분 뜻에 따라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마지막 음성, 그 뜻은 이것이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 19-20).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같은 당신의 뜻을 또다시 사랑의 걱정 어린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요한 10, 16).
해마다 교회는 오늘 부활 제4주일을 착한 목자 주일로 보내고 있습니다. 이는 양떼들인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들었으면, 그분의 뜻을 따르고자 결심을 갖자는 것입니다. 진정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아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그 목소리를 들려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큰 목소리로 외칠 참된 사도들이 많이 나오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닮은 착한 목자를 더욱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성소주일인 목자의 간절한 목소리입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 바치는 착한 목자
-허영엽 신부-
“나 는 허락할 수 없다.”신학교에 가고 싶다는 내 말
에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장남이 신학
생인데 둘째 아들마저 신학교를 가는 것은 안 된다는 말씀
이셨다. 아버지의 굳은 표정에 나는 한마디도 못하고 밖으
로 나왔다. 안방에서 나와 부엌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데 어
머니가 따라 들어오셨다. 어머니는 행여 아버지가 들으실
까작은소리로말씀하셨다.“ 네가잘생각해서원하는대
로 하려무나…”결국엔 어머니의 그 말씀으로 내 인생의
행로를 정할 수 있었다. 그날 밤 하느님께서 어머니를 통해
서 나를 부르셨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시기
얼마전이렇게말씀하셨다.“ 사제로사는것은너무힘든
일이다. 그래서 신학교에 가겠다는 너를 말린 것이었다.
그러니 오해는 말아라.”그제야 나는 아버지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부족한 내가 지금까지 사제 생활을 할
수 있는 건 모두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은인들 덕분이다.
특히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신다고 굳게 믿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착한 목자’
라고 소개하신다. 착한 목자는 자신의 품삯만을 위해 일하
는 삯꾼들과는 다르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
숨까지도 내놓는다.
성소란 무엇인가? 성소란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거룩한 부르심을 말한다. 사제, 수도자로 이끄시는 하느님
의 특별한 부르심도 있지만,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어 사는
삶도 성소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특별히 사제와 수도자를 위해 기도하는 성소주
일이다. 우리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님께
수확할 일꾼을 보내 주십사고 청해야 한다(마태 9,37-38 참
조). 그러나 단순히 성소자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보다 중요
한 것은“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를 지닌 사제와 수도
자가 많아지는 것이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삶을 충실하게 따르기 위해서 일생
을 오로지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바친 사람이다. 그래서 사제
는 예수 그리스도처럼“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 9,22)이
되기 위해‘착한 목자’처럼 어떠한 위협 앞에서도 목숨을
바칠 각오로 앞장서야 한다. 이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사제
는 바로 착한 목자이다. 그러나 사제도 나약한 인간의 속성
을 그대로 안고 있다. 그래서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신자들
의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또한 교회는 오늘날도 하느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더욱
더 내어놓을 젊은이들을 필요로 한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성소자 숫자가 점점 줄어들 것으로 생각된다. 교회 전체가
성소 계발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때이다. 그러나 성소
계발은 단순히 교회의 몫만이 아니다. 가정 안에서부터 자
녀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기꺼이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본당에서는 매년 한 명 이상의 젊은이를
성소자로 계발하는 것을 목표로 세우면 어떨까? 물론 신부
님들의 많은 관심과 협조는 절대적이다. 신부님들이 성소
자 계발에 관심이 있는 만큼 그 열매를 거둘 수 있기 때문
이다.
성소주일- 나는 착한 목자다 "
-이기양신부-
"어린이 여러분! 신부님이 부자처럼 보여요? 가난한 것처럼 보여요?"
어린이 미사 때 질문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한 80%가 넘는 어린 친구들이 부자처럼 보인다고 손을 번쩍 드는 겁니다. "수녀님도 부자처럼 보이나요?" "네"하고 대답이 즉시 나왔습니다. 또 물었지요. "신부님, 수녀님은 재산도 없고, 직위도 높지 않은데 왜 부자처럼 보일까요?" 한 어린이가 대답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기 때문에요!"
기가 막힌 대답이지요? 그렇습니다. 성직자들은 하느님과 함께 살기에 재산이 많은 사람이 부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우러러 보이지도 않습니다.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그 도가 지나치게 되면 그것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게 됩니다. 돈에 집착하는 사람은 돈 많은 사람 앞에 가면 주눅이 들고, 직위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면 자기보다 더 높은 직위 사람 앞에서 편안하기가 쉽지 않지요.
성직자들은 하느님과 신자들을 위해 인간적인 모든 욕망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자유롭게 하느님과 신자들을 위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완전한 사람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를 아시지요? 결정적 순간에 모순투성이 인간적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 수제자로서 초대교회 기둥이 돼 하느님 사람으로 일생을 헌신할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절대적 신뢰와 사랑의 힘이 거듭된 잘못에도 그를 감싸준 까닭입니다. 그래서 큰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끊임없는 노력과 주변의 도움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뉴욕대교구 한 신부가 로마 어느 성당에 기도하러 가다가 입구에서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를 얼핏 바라보던 그 신부는 그가 자신과 같은 날 사제가 된 신학교 친구임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가 믿음과 소명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듣게 됐습니다. 사제는 몹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음 날 신부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개인 미사에 참례할 기회를 가졌고 미사 말미에 교황에게 인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차례가 되어 교황 앞에 무릎을 꿇은 그는 자신의 옛 신학교 동료를 위해 기도를 청하고 싶은 마음에 그간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하루가 지나 바티칸에서 교황과 저녁 식사에 그 거지를 데리고 함께 참석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신부는 그를 설득해 씻기고 옷을 갈아 입혀 교황 앞에 데려갔습니다. 저녁 식사 후 교황은 거지와 둘만 있게 해 달라고 사제에게 부탁했습니다. 교황은 그에게 자신의 고해성사를 부탁했습니다. 그는 놀라서 자신은 지금 사제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교황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한 번 사제이면 영원한 사제입니다."
거지 사제가 "나는 이제 사제 권한이 없습니다"라고 고집했으나 교황은 "나는 로마 주교입니다. 이제 내가 그 사제 권한을 수여합니다"하며 고집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황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는 몹시 흐느껴 울며 이제는 자신의 고백을 들어달라고 교황께 청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에게 어떤 교구에서 구걸을 하는지 묻고는 그를 그 교구의 보좌신부로 임명하고 거지들을 돌보는 일을 맡겼습니다.
놀랍지요. 교황님은 깊은 상처를 입은 사제에게 완전히 새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교황님 못지않게 따뜻했던 목자 한 분이 계셨지요. '바보'라고 불리기를 희망했던 고 김수환 추기경님이 바로 그분입니다. 추기경님은 영명축일을 맞이하는 신부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주셨습니다. 설마 추기경님이 전화를 하셨으랴 싶어, 전화를 받는 신부 중에는 "네가 추기경이면 나는 교황이다"하고 전화를 끊었다가 앞서 온 전화가 진짜 추기경님 전화라는 사실을 알고는 곤혹스러워 했다는 이야기가 시중에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김 추기경님은 '너희와 모두를 위하여' 언제나 가슴으로 기도했던 착한 목자셨습니다.
오늘은 착한 목자 주일인 성소주일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또 성직자들이 한 평생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기도하고 후원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생명이 그리고 성소가
-백현신부-
‘생로병사의 비밀’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조기사망 위험진단’이라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도 답을 해보십시오. 첫째, 진정으로 나를 배려해주는
사람이 있다 / 없다. 둘째,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 없다. 셋째, 기꺼이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 / 없다. 넷째, 비밀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 / 없다.
만약 해당 사항이 하나도 없다면 조기 사망 위험이 5배 이상이랍니다. 이런 질문도
했습니다. “아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표현합니까?”배우자의 사랑이 콜레스테롤과
혈압 등의 위험 요인을 완화시켜준다면서 했던 질문입니다. 친밀감과 사랑은 우리
에게 생명력을 더해줍니다. 장수비결이지요.
아무래도 저는 오래 살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이 사랑고백이라는 사실을 사람들
이 알고 있을까요. 한참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영혼이 떨려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 14~15). 복음
을 통해 전해지는 주님의 사랑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양들은 그런 목자의 마음을 조
금씩 알아갑니다. 목자와 양 사이에는 생명이 자라고 자라 둘 사이에 영원이라는 강
이 흐르게 됩니다. 참 생명을 사는 영적인 장수랄까요.
아주 부러운 녀석이 있었습니다. 5살짜리 꼬마 녀석이었는데 매일같이 엄마 아빠
손잡고 아주 열심히 성당 미사에 나왔습니다. 언제나 생글생글 인사도 잘합니다. 그
런데 그렇게 인사하고 성당에 들어오면, 이내 의자에 누워 잠들어 버립니다. 미사
내내 거의 한 번도 깨지 않고 그냥 잡니다. 영성체 때 아이들은 성체를 모시는 대신
안수를 해줬는데, 이 녀석은 대부분 잠결에 안수를 받습니다. 그러고는 미사가 끝나
면 어느새 일어나서 생글생글 인사하고 엄마아빠 손 붙잡고 집으로 갑니다. 녀석이
성당에 와서 하는 일은 잠자는 일뿐입니다. 그런데 녀석이 참 부러웠습니다. 성당에
서 엄마 품에 안겨 자고 있을 때면 그 모습에서 사랑이 느껴집니다. 엄마의 사랑,
아빠의 사랑,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 그 순간은 목자 품에 안겨 있는 양처럼 그렇게
도 편안해 보일 수 없습니다. 녀석은 분명‘신부’가 될 것 같습니다. 어릴 적에 저
도 그랬거든요.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고 참 생명을 살게 합니다.
교구청에 있지만 가끔 본당에서 미사를 집전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꼭 그런
부러운 녀석들이 본당마다 있습니다.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마음 속으로 점찍어 놓
습니다. 장차 신부가 되고 수녀가 될 녀석들! 성소국장이지만 아직까지 저에게 성소
에 대한 걱정은 없습니다. 부르심은 사랑에서 시작되는데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
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착한 목자의 삶
-윤석희신부-
성소주일을 맞아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고 노력하는 모든 성소자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착한 목자에 대해 설명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자세히 나누어 묵상해 본다면, 총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목자와 삯꾼의 차이(11-13절), 둘째 착한 목자의 직무(14-15절), 셋째 우리 밖의 양들(16절), 넷째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권한(17-18절).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핵심은 “착한 목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삶은 개인이 겪은 수많은 일들이 이어져 만들어 낸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착한 목자의 삶’은 그의 직무와 연관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목자의 일은 무엇입니까? 복음에서는 바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일을 하면 흔히 그에 대한 대가로 인정을 받거나, 금전적인 이득, 영광 등을 바랍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일에 대한 대가로 권세와 권능, 영광을 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참 아이러니하게도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묵상하다보면, ‘과연 내가 그 길을 갈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과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특히 신학생일 때 더욱 그랬다는 생각이 듭니다.하지만 그러한 두려움과 의구심이 들었던 때는 더 강한 확신과 믿음으로 답하라고 주님께서 주신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들의 삶에서도 이러한 두려움과 불안함은 언제라도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그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살펴야 합니다.
‘착한 목자의 삶’을 묵상하며, 성소주일을 맞아 후배 신학생들과 또 각자의 삶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많은 신자분들을 위해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그분은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양들을 버려두지 않는 분이시며, 목숨을 던져서라도 양들을 살리고자 하는 분이시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착한 목자의 삶을 묵상하며, 부족하지만 우리도 함께 그분을 따라 걸을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았으면 합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정애경 수녀-
‘목자와 양의 비유’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비유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동물이 있다면 그중 하나가 ‘양’일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를 양으로 표현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양의 특징 때문일 것입니다. 양은 온순하고 순종적이며 어리석고 약한 동물입니다. 양은 시력이 나빠 몇 미터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습니다.
어디에 물이 있고 어디에 풀밭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양은 방어 능력이 없어 다른 동물들의 공격을 받으면 억울하게 물어뜯기고 잡아 먹힌다고 합니다. 고양이나 개는 혼자 살 수 있지만 양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양의 생명은 전적으로 목자에게 달렸기에 만일 양이 산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목자 없는 양은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양에겐 반드시 목자가 필요하기에 양은 목자를 의존하고 목자는 양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관계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가 바로 주님과 우리의 관계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기르고 인도하는 착한 목자 되시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르는 양입니다. 착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는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느냐 내놓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이 자기의 소유이므로 그 어떤 위험에 처하더라도 양들을 위해 목숨 내놓고 양을 지킵니다. 그러나 삯꾼은 목자도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요한 10,11-13 참조)
양들에겐 삯꾼과 달리 착한 목자가 있기에 먹을 것, 마실 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적들과 싸우지 않아도 됩니다. 만일 양들이 그런 일로 걱정한다면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양들은 철저하게 목자가 제공하는 환경에서 먹고 즐기며 젖을 만들고 털을 내주고 죽어서 고기를 남기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걱정하고 노력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은 물론이고 죽고 사는 문제도 우리 의지대로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구원 문제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중대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목자 없는 양”(마르 6,34)과 같다고 하시며 예수님 자신이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보통 양치기를 하는 목자들은 최선을 다해 양을 지키고 돌보는 일은 하지만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람들’인 우리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라고 말씀하셨는데, 또다시 ‘나는 착한 목자’라는 것을 강조하시며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10,14-15)라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의 소리만 들어도 알고, 멀리서 양의 모습만 보아도 자기 양을 구별합니다. 목자는 양의 체질이나 습관이 어떤지 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체험적인 앎입니다. 목자가 양을 아는 것처럼 양도 체험적으로 목자를 알아봅니다. 양은 목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기에, 특히 자기 목자의 음성을 기억하고 분간한다고 합니다. “뇌는 소리를 들으면 ‘청각 지도’를 만들어 냄으로써 아무리 많은 소음도 속여서 듣고 싶은 소리의 방향과 내용을 감지해 냅니다.”(경희대병원 이비인후과 심주섭 교수) 이처럼 밤중에 사람이 다가오면 그가 자기 목자인지 아닌지 눈으로 분간할 수는 없지만, 목자의 음성을 듣고 금방 알아챕니다. 자기 목자 음성 외에 짐승의 아름다운 소리나 낯선 사람의 소리까지 구별합니다. 자기 목자의 휘파람과 말소리를 그대로 알아듣고 따라옵니다. 양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자기 목자가 누구인지 목소리를 통해 알게 됩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체험적으로 알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지식으로 알기보다는 개인적으로 알고 체험적으로 압니다. 욥은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욥기 42,5)라고 귀로만 들었던 하느님을 체험으로 알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은 귀로만 들었던 하느님을 체험으로 알았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양인 우리를 마음으로 알고 삶을 통해서 압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내밀하게 나를 아신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되면, 다시 말해 내가 그분께 그렇게 내밀하게 ‘알려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비로소 우리 역시 그분을 참으로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우리의 인도자가 되시어 평화와 안식을 주시는 분, 삶의 모든 복을 가져다주며 우리를 돌보는 목자이심을 압니다. 목자는 양떼를 돌보는 일을 아버지 하느님한테서 위임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양들을 위해서 끝까지 돌보는 일을 감당하십니다.
우리는 양처럼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비록 부족한 것투성이지만 실망하지 않고 예수님께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내 약점으로 인해 종종 넘어지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예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같은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는 목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착한 목자의 마음을 아는 다윗은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 23,13)고 노래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나의 목자이시기에 주님과 함께 있으면 부족함이나 결핍이 없다고 만족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 놀랍고 엄청난 사랑의 은혜를 바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사랑의 목자가 되신 예수님을 우리는 세세무궁토록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벽을 열며
아주 간단한 그러나 풀기는 어려운 문제 하나를 내볼께요.
어린이 한 명, 잘생긴 남자 한 명, 못생긴 남자 한 명, 아름다운 여자 한 명, 이렇게 4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글쎄 우산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에요. 하지만 이들은 빗방울을 하나도 맞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우산을 썼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우산이 상당히 커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사람들이 작아서 그랬을까요? 그 어떤 것도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정답은 비가 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비가 전혀 오지 않으니 우산이 하나밖에 없다 하더라도 빗방울을 맞을 일이 없는 것이지요.
이 문제를 보면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조금만 바꿔서 생각하면 당연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고정관념 속에 빠져서 그 당연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힘들어하고 지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저는 종종 사제로 있는 제 자신을 바라보곤 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저를 부르셨을까요? 신학생 때 저는 ‘내가 과연 사제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의심을 너무나 많이 가졌습니다. 무엇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저였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을 이끄는 목자의 역할을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자주 말씀드렸지요.
‘주님, 왜 저를 이 자리에 부르셨습니까? 저는 당신의 일을 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완벽한 사람을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당신이 직접 뽑은 제자들 중에 완벽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요. 오히려 보통 사람과 비교했을 때 부족함이 더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를 부르신 이유는,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능력을 보고서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자체 때문에 선택하신 것입니다. 왜요? 사랑하시니까…….
우리 인간들도 서로 사랑할 때, 상대방의 능력만을 보고서 사랑하지 않습니다. 능력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보고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능력이라는 것은 단지 부수적인 한 부분일 뿐이지요. 이처럼 주님께서도 능력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그 자체를 보고서,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서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 우리들은 부활 제4주일인 동시에 성소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성소주일은 단순히 사제, 수도자 성소만을 기억하는 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들이 주님으로 받은 성소, 즉 주님의 일인 사랑을 이 세상에서 펼치라는 부르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는 날인 것입니다.
나는 그 부르심에 얼마나 응답하고 있나요? 혹시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그것은 다른 사람이 해야 할 몫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비겁한 모습을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부르심은 다른 사람이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당장 행해야 하는 현재 진행형의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만나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풉시다.
빠다킹신부
관리자와 지도자
-노성호 신부-
만일 관리자나 지도자가 될 기회를 얻게 된다면, 둘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저는 여러분 모두 ‘지도자’가 되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왜냐하면 관리자(manager)는 ‘올바르게 정해진 일을 하는 사람’이고,
지도자(leader)는 ‘어떤 일을 올바르게 만들어 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관리자는 올바르게 고정된 틀을 나름대로 마련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서도 신속 정확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지도자는
모난 부분을 찾아서 깎고 다듬어 주면서 이곳저곳 신경 써야 하기 때문에
관리자보다 일의 처리 면에서 약간 뒤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목숨까지도 내놓을 각오를 하면서 수하 사람들을 인도해 나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냉철하고 이성적인 관리자보다는 자상하고 인자하며 사랑 넘치는
지도자를 원할 것입니다. 지도자는 실패가 찾아오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설득하려 하고, 함께 잘 해 보려고 하고, 보다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협력하면서 그 단체를 이끌어 나갑니다. 물론 인간적인 결함을
지닌 사람도 있겠지만, 지도자에게는 그것이 그다지 중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지도자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니까요.
또한 지도자는 사랑과 평화의 울타리 안에서 더욱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기쁨과 행복을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당신을 ‘착한 목자’로, 세상 사람 모두를 ‘양떼’에 비유하신다. 특히 우리 신앙인을 당신께서 직접 먹이고 돌보며 구원의 샘과 초원으로 이끄시는 ‘내 양들’이라고 표현하시면서 당신 사랑으로 초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0,14).
-김정훈 신부-
예수님의 착한 목자에 대한 비유를 들 때마다 염소를 키우는 어느 축산업자가 라디오 방송에 보낸 사연이 떠오른다. 하루는 그가 우리를 청소하다가 어린 염소 한 마리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염소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염소에게 주인 대접을 받는다든지 섬김을 받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고, 오히려 주인이 하나에서 열까지 챙기고 보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축을 사랑으로 대하고 돌보는 축산업자의 마음이 ‘나는 착한 목자다’라고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았다고 본다.
하지만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에겐 세속의 목자가 결코 닮을 수 없는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의 희생과 사랑이다. 세속의 목자는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가축을 키운다. 따라서 양들의 운명은 주인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반면에 착한 목자는 양들을 영원히 살리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신의 목숨마저도 내놓는다. 그러기에 양들은 목자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면서 어떤 위기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시편 23,4 참조).
예수께서는 당신과 양들(우리 신앙인들)의 이러한 관계를 ‘알다’라는 말로 묘사하신다(10,14). 성경 전통에서 ‘알다’라는 말은 사변적 지식보다는 상호 교환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한 체험적인 지식을 가리킨다. 특히 신앙의 차원에서는 하느님께서 섭리하시는 구원 역사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앎을 뜻한다. 곧 이스라엘이 역사 안에서 자신을 위해 구원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이신지 깨닫는 앎을 뜻한다(판관 2,10;1사무 3,7;이사 60,16 등 참조).
착한 목자와 양들의 관계도 그러하다. 곧 착한 목자는 당신 양들이 누구인지,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고 양들은 착한 목자가 자기네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것임을 알고 있다. 이러한 앎이 실현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다. 십자가를 통해 구원된 우리는 피조물을 위해 당신 생명을 희생하시는 하느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목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그분 생각만으로도 기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10,15ㄴ).
참 주인이 아닌 삯꾼은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에 대해 절대적인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10,12-13). 그렇기 때문에 맡겨진 양떼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일을 무모한 짓이라고 여길 것이다. 양떼의 생명보다는 자신의 생명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세상의 참된 주인이며 인류의 착한 목자이신 예수께서는 양들을 위해 존재하는 분이며 양들의 생명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다. 그래서 당신에게 맡겨진 세상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치실 것이며, 또 양떼를 위해 목숨을 다시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10,17-18).
예수께서는 당신이 그러한 착한 목자의 사명을 아버지께 받았으며(10,18ㄹ) 그 사명대로 당신의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요한 10,17ㄱ)고 말씀하신다. 아버지와 아들은 나뉠 수 없기 때문에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자기 내어 줌은 곧 하느님 아버지의 자기 내어 줌이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일은 분명 더없이 고귀한 희생이다. 더군다나 죄로 인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속전(贖錢)으로 내어 주신 예수님의 희생과 예수님을 통하여 당신을 함께 내어 주신 아버지의 희생은 고귀함을 넘어선 인류 구원의 원인이 되는 희생이다.
이러한 희생을 통해 믿는 이들 안에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었음에도 우리는 간혹 이 은총에 만족하지 못하고 현세적인 명예나 지위 또는 재산 따위를 청하기도 하며 그런 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은총을 받지 못한 듯 실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현세에서 잠시 즐겁고 행복한 삶보다는 영복(永福)을 주시고자 하시며, 이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 자신보다도 우리를 더 소중하게 여기시는 착한 목자 예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세속의 어떤 시련과 유혹에도 휘둘리지 않고 목자이신 당신만을 바라고 따르게 하시라고 기도해야 한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시편 23,1.4).
묵상과 기도
▷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손길(이끄심)을 체험한 적이 있는가?
▷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예수께 감사하는 삶은 어떤 것인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 저희는 당신 우리의 양들이지만 아직까지는 세상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기억해 주십시오. 저희가 때로 세상이 주는 시련과 유혹에 흔들릴지라도 그 허물을 사랑으로 씻어주시고, 마침내 당신 목장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저희는 당신의 사랑과 이끄심에 모든 것을 의탁하고 언제 어디서나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양들을 위해 희생하는 착한 목자
-허영엽 신부-
2차세계 대전중인 1941년 2월 폴란드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한 수도자가 독일 나치군에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됩니다. 어느 날 수용소에서 포로 한 명이 탈출을 하고, 그 벌로 독일군은 수용소에 수감된 이들 중에서 열 명을 뽑아 굶어 죽이는 형벌을 내립니다. 그 때 뽑힌 유다인 한 명이 자신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놓고 죽을 수 없다고 울부짖었습니다. 그 때 함께 수감된 수도자가 나서며 말했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대신해서 죽겠소.” 수도자의 행동은 독일군에게까지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한 사람을 위해 대신 형벌을 받고 죽어갔습니다. 그는 바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2년에 ‘사랑의 순교자’로 시성한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입니다. 이 성인은 한 사람의 생명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착한 목자의 모범이 됩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오늘 복음은 착한 목자인지를 가늠하는 척도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목자가 양들을 위해 얼마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가? 목자는 위험을 감수하고 끝까지 양들을 지킵니다. 양들이 위험할 때 도망가는 목자는 삯군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목자들은 풀을 따라 이동하다가 밤이 되면 들판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따라서 목자는 목숨을 내놓고 맹수들로부터 양을 지켜야 했습니다. 따라서 위험할 때 일수록 양들에게 더 가까이 가는 목자야말로 착한 목자입니다. 이 기준은 가정이나 사회,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험할 때 나만 살겠다고 뒷걸음친다면 분명 엉터리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와 양은 서로의 말을 잘 알아듣습니다. 서로를 잘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믿음을 의미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음성을 듣고 편안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음성을 잘 안다는 것은 믿음과 사랑을 전제로 합니다. 목자가 양을 잘 안다는 것은 양의 건강상태와 성격 등 모든 것을 꼼꼼하게 안다는 것입니다. 목자를 잘 알기에 양들은 믿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착한 목자 주일’인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란 하느님의 모든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히 사제와 수도자 성소를 위한 주일입니다. 혼탁한 오늘날의 세상은 더욱 더 착한 목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주님! 목자로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젊은이가 더 많게 하시고, 목자들이 더 착한 목자가 되도록 그들에게 은총을 내려 주소서.”
주님,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승국 신부-
돈보스코 성인의 3대 후계자인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1856~1931)의 전기 「사랑에 강요되어」 (피에트로 리날디 저, 돈보스코 미디어)를 읽고 있습니다. 단 하루라도 리날디 신부님과 살아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한목소리로 이렇게 증언했더군요.
"정말이지 저는 단 한번도 그분을 윗사람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제 행복을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않는 제 친아버지와도 같았습니다. 그분과 함께 했던 수도생활은 아기자기하고 화목한 가정생활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농부 출신의 나이 많은 요한이라는 신학생이 자신의 지적 무능력을 한탄하며 리날디 신부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신부님, 죄송합니다만 저는 결코 훌륭한 사제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만 두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신학생이 겪고 있던 고초뿐만 아니라, 그가 지니고 있던 많은 잠재력과 열정을 파악하고 있던 리날디 신부님은 그의 지친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이렇게 격려의 말을 건넸습니다.
"요한, 중앙 제대 위 초들을 본적이 있는가? 어떤 것은 길고 어떤 것은 짧지. 하지만 모든 초가 주님께 봉사하기 위해 거기 서있는 것이라네. 사실 짧은 초가 긴 초보다 훨씬 유용할 때가 있다네. 동트기 전에 미사를 드릴 때, 긴 초들은 사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네. 반면에 짧은 초는 사제가 미사경본을 읽은 데 아주 큰 도움을 주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라네. 교회는 낮은 자리에서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할 '키 작은' 사제들을 더 필요로 한다네. 자네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될 거야."
리날디 신부님의 진한 부성애와 잔잔한 위로에 크게 감동을 받은 요한 신학생은 다시 책을 손에 들었습니다. 그는 후에 브라질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인디언들의 사도이자 또 다른 따뜻한 아버지로 살다가 그곳에 뼈를 묻게 됩니다.
저희 수도회에서 거의 성인(聖人)급으로 분류되는 할아버지 선교사 신부님께서 내한하셔서 잠시 동행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성인들 특징 중에 하나가 살아계실 때 이미 성성(聖性)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의 확연한 성성(聖性)을 신자들은 귀신같이 알아차리더군요. 그래서인지 신부님 주변에는 잠시도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여듭니다. 연세가 꽤 드셨음에도 언제나 인기가 절정입니다. 정녕 신부님은 신자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는 사목자요, 모든 사람들의 연인이셨습니다.
오늘 성소주일을 맞아서 제 머릿속에 몇몇 선배 신부님들이 떠올랐습니다. 저 같이 '덜떨어진' 사제는 그분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심각한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착한 목자로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친절한 모습, 어린이와 같이 천진난만하고 환한 미소, 세심한 배려, 인자함, 따뜻함, 섬세함, 편안함, 극진한 환대….
그 모든 덕행들을 종합하면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제 개인적으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온유와 겸손'.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부드럽고 온유하고 겸손하기만 해서는 곤란합니다. 때로 냉정함도 필요합니다. 더 큰 선(善)을 위해서 끊고 맺음도 필요합니다. 따끔한 매도 필요합니다. 엄격함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한 인간을 변화시키고, 감화시키고, 회심시키는 것은 결국 부드러움이었습니다. 착한 목자로서 갖추어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부성애더군요. 결국 온유와 겸손이 세상을 구원합니다. 부드러움이 인류를 구원합니다.
"주님, 오늘 저희에게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존재 그 자체로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목자, 고통과 번민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 구원의 향기를 퍼트리는 목자, 실의에 빠져 고통받고 있는 양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주는 목자, 그래서 삶의 이정표를 잃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금 새 출발 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그런 착한 목자들을 보내주십시오."
세상의 모든 사제들이 주님의 집에 피어난 푸르른 올리브처럼 순결한 착한 목자, 언제나 주님 자비에 의탁하는 겸손한 착한 목자, 아무리 짓눌려도 결코 찌부러지지 않는 강건한 착한 목자, 갖은 인간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힘차게 일어서는 착한 목자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예수님 사랑 믿고 기쁘게 살아가자” : 인정받은 사람
-김영수 신부 -
인본주의 심리학자 메슬로우(Maslaw)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이고 우선적인 세 가지 욕구는 생리적인 욕구, 안전에 대한 욕구, 그리고 소속감(사랑)에 대한 욕구입니다. 이 기본적인 욕구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면 사람은 남에게 인정(認定)을 받고 싶어 합니다. 인정의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자신의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게 되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생기는데 이를 창조적인 욕구라 했습니다.
인간의 욕구들 중에서 인정에 대한 욕구는 기본적인 욕구와 창조적인 욕구의 경계에 있는 욕구로서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에 인정의 욕구도 자연스럽게 발생하며 창조적인 욕구인 자아실현의 욕구도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모든 인간이 지닌 갈망입니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가꾼다.”(士爲知己者死 女爲說己者容)는 옛 말은 사람에게 있어서 인정받고 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이웃과 더불어 살면서 남에게 인정을 받고 산다는 것은 사는 보람을 누리는 길이고 살맛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인으로 부터의 인정을 받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줄 아는 용기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긍감이 부족한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망에 집착하거나, 타인의 인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사랑을 믿고 사는 사람은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에 집착하지 않으며, 타인을 잘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성소주일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통하여 착한 목자의 몫을 다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습니다. 늑대들로부터 양을 지키는 목자처럼 예수님도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을 믿는 이들을 지키며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양들을 지키시는 튼튼한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착한목자는 또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시며 각자의 이름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양들을 잘 알고 계신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십니다. 그리고 길을 잃고 헤매는 양들을 찾으시고 기뻐하십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흩어져 숨죽여 살아가는 우리를 찾아내시고 우리가 온전해지고 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잘 알고 계시고 그 양들을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주십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외로움과 소외감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착한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잘 알고 계시듯이 그분께 속한 양들도 목자의 목소리를 잘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일들 안에서 먼저 주님의 뜻을 찾는 삶은 목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를 따라가는 착한 양들의 삶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알고 계신 것처럼 그분의 양떼인 우리도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어야만 그분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알다’라는 말마디는 단순한 지식을 넘어서서 하나의 실존적 관계를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말하며 그 사람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친숙한 관계를 통하여 가까워짐을 뜻합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체험을 통하여 깨닫고 그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착한목자가 양들을 잘 알듯이 양들도 그 목자의 목소리를 잘 알고 있을 때 목자와 양은 깊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소‘(Vocation)는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본 제자들이 주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었듯이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쓰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쓰는 삶은 사는 일에 힘을 얻게 되고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힘으로 인생을 기쁘고 당당하게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평범하고 무식한 사람들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원로들은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놀라운 표징을 보고 그들을 통해 주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큰 사랑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게 되고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삶을 누리게 되어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착한 목자: 양들을 위한 목자의 깊은 사랑
- 조욱현 신부 -
오늘은 성소주일(聖召主日)이다. 오늘 복음에는 착한 목자가 양들을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강하게 묘사되고 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목자는 양의 무리에 대한 목자의 깊은 배려를 더 강조하고자 한다. 이 목자는 이사야의 "야훼의 종"과 비슷하게 묘사되고 있다. 오늘 복음은 네 가지의 기본 사상이 맥을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착한 목자'로 계시하신다는 점이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목자가 아닌 삯꾼은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쳐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는 뿔뿔이 흩어져버린다"(11-12절). 여기에 나오는 삯꾼은 참 목자의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참된 목자는 어떤 사람이냐? 그는 항상 이리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심이 없는 사랑을 지닌 목자이다. 요한복음의 "나는----이다"라는 표현은 아주 중요한 표현 형식이다. 이 표현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말해줄 뿐 아니라, 그분의 역할까지 계시해 주는 표현이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라고 현재형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 말씀은 그 역할의 계속성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오늘도 역시 그분은 우리를 위한 구원의 목자이시라는 것이다.
둘째로, 목자와 양들이 서로 안다는 것이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14-15절). 요한계 문헌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인식이 아니라, 사랑과 체험으로써 아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양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고, 그 위에서 돌아가셨던 사랑이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죽음은, 목자가 그 양들을 먼저 알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15,16)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선택'에 응답할 가능성을 주셨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당신의 피로써 당신의 양떼를 이루신 것이다.
셋째로, 그분의 양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류를 위해 피를 흘리셨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내 음성을 알아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16절). 이 말씀은 종족과 종교의 모든 경계를 넘어 모든 인간을 포용한다. 그분의 구원업적을 인식하고 복음을 들을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분의 양떼가 되고 구원의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거절을 당하게 된다.
넷째는 예수께서 참 목자이시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스스로 봉헌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시 그 목숨을 얻게 될 것이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 (17-18절).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무상의 사랑이 더욱 빛나고 있다. 당신의 목숨을 스스로 바치는 것, 다시 얻는다는 것이 아버지의 명령이라고 하신다. 이 명령의 의미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명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순명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스스로 당신을 봉헌하는 것은 사랑과 권능의 최고행위로 나타나는 부활과 연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에 의해 잠시 찢겨진 아들을 영광 중에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입증해주는 사건이다.
제1독서: 사도 4,8-12: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다
불구자를 낫게 해주었다는 것 때문에 체포되어 법정에서 하는 설교의 내용에도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베드로는 육체적인 구원의 사실을 그리스도에 의한 영적 구원에 연결시키고 있다. 즉 부분적인 구원은 이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양떼에게 베풀어주시기로 약속하신 완전한 구원의 표징이고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즉 부활이 예수님에게서 보듯이 찢긴 그리스도의 육체를 회복시켜 전 우주를 근본적인 쇄신에로 이끌어주는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1고린 15,45)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제2독서: 1요한 3,1-2: 우리는 하느님의 참 모습을 뵈올 것입니다
이러한 완전한 구원의 모습이 현시점에서부터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1절). 그러나 이것은 장차 우리에게 일어날 일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뵙겠기 때문입니다"(2절). 이것이 바로 결정적인 부활이 될 것이다.
오늘은 성소주일이다. 우리의 성소를 다시 한번 생각하며, 이제 진정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목자로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주님을 묵상하고, 그 목자 아래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이것이 하느님께 부름을 받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삶이다. 이 미사 중에 충실히 우리의 성소를 따를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아버지께서는 내가 내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서공석 신부-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전기와 같은 형식으로 기록된 신앙 문서들입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맺음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들을 기록한 것은 여러분이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한 믿어서 그분 이름으로 생명을 얻기 위해서이다.”(20,31).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그분의 삶을 배워서 하느님 자녀의 생명을 얻게 하고자 복음서를 기록하여 남겼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목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목자와 양들의 관계에 비유한 것입니다. 초기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믿고 있던 바를 그분의 입을 빌려 말하는 양식으로 기록된 오늘의 복음입니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어놓는 것이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하느님 안에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초기 신앙인들의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해석입니다. 죽음은 부활에로 가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어놓으신 결과였습니다.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목자는 친숙한 인물입니다. 목자는 양떼의 길을 인도하며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함께 삽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목자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서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려오신 사실을 이렇게 말합니다. “목자처럼 당신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며, 새끼 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신다.”(40,11). 자상한 목자가 양들을 돌보듯,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하느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가로 부르는 시편은 말합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신다...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길이다.”(23, 1-3). 은혜로운 목자이신 하느님입니다.
초기 교회는 목자라는 호칭을 예수님에게 사용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살아 계신다고 믿는 신앙인들이 그분의 삶 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사용한 호칭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살아 계실 때 하느님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목자가 착한 것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기 때문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다가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한 것이 유대교 실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한 것입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회당에서 고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악한 일을 해야 합니까? 목숨을 구해야 합니까, 죽여야 합니까?”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께서 노기를 띠고 둘러보신 다음...그 사람에게 ‘손을 펴시오’ 하셨다.”(3,5)고 말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밖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도당과 함께 모의하여 예수를 없애 버리기로 했다.”는 말로 이 이야기는 끝납니다. 그분은 이렇게 사람을 살리는 선한 일을 행하다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착한 목자와 대조하여 말하는 것은 삯꾼입니다. 삯꾼은 양들의 안전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한 몸 살 궁리만 합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과 우리가 하는 일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준해서 하느님을 상상합니다. 그분은 엄하게 판단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찾는 분이라 상상합니다. 이런 하느님을 상상하면서, 교회 안에 봉사하는 사람들도 하느님을 배경으로 자기의 권위와 영광을 찾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자세는 삯꾼의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느님은 선하셔서 자상하게 사람들을 돌보아주시지만, 삯꾼의 근성을 지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소중히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의 위신과 영광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높으신 분, 두려운 분, 당신 영광을 찾는 분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하느님은 겸손하게 숨어 계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만물은 제 질서대로 존재합니다. 하느님은 횡포하지 않으시면서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착한 목자로 세상 안에 숨어 계십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이 소중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고, 우리가 행세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잘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전쟁과 각종 대량 학살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인류 역사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학대로 꾸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중국의 만리장성 같은 소위 위대하다는 문화유산을 보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권력자들이 그런 것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고, 수많은 민초들이 강제 동원되어, 뼈아프고 가슴 무너지는 사연들을 각자 가슴에 안고 그것을 위해 일하였습니다. 인류가 자랑하는 문화유산의 실상입니다. 우리는 구실만 있으면, 자신을 과시하고 이득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 특히 약자들을 이용합니다. 입으로는 봉사를 외치지만, 기회만 있으면 봉사를 받으려 합니다. 우리는 섬기는 분으로 우리 가운데 계셨던 예수님에 대해 말을 하지 않고, 왕이신 예수님, 심판자이신 예수님을 즐겨 부각시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봉사하는 우리는 신자들 위에 군림하는 삯꾼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그분의 선하심과 은혜로우심을 배워 구원되어야 하는 삯꾼들입니다.
교회는 오늘을 성소 주일로 정하고 신학교와 수도원이 있다는 사실을 홍보합니다. 성소 주일을 위해 교회가 오늘의 복음을 택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착한 목자’ 복음을 읽는 날을 성소 주일로 택하였습니다. 목숨을 내어 주신, 선하고 은혜로우신 한 분의 목자 밑에 목숨을 내어 주는 선하고 은혜로운 교직자와 수도자가 되라고 권고하는 주일입니다. 신앙인 모두는 가정에서, 일터에서, 사회에서 스스로를 내어 주고 봉사하여, 착하신 목자와 같이, 자상하고 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주일입니다. 삯꾼과 같이 자기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선하고 자상하신 하느님의 생명을 살도록 노력하자고 마음 다짐을 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내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자기 한 사람 잘 되고 명예를 누리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그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는 생명을 아버지께서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삯꾼은 이해타산을 앞세우고 자기 자신의 영광을 찾습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자기 스스로를 내어주어, 이웃을 살리고 섬기는 노력을 합니다. 그것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길입니다. 우리에게는 힘든 일이지만, 노력하면 조금씩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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