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만 하면 기회는 열려있다."
북한에서 40년간
신경외과 전문의로 일하다가
아내와 함께 한국행을 선택한 최석하씨. ...
한국에 정착한 직후인
2008년 12월 그의 현실은 암담했다.
의사 경력을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당장 먹고살 일을 찾아야 했다.
매일같이 새벽 인력시장에 나갔지만,
탈북자라는 편견 때문에
일거리도 제일 나중에야 돌아왔다.
도로의 보도블록 정비 등
어떤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소개 수수료에 교통비 빼고 나면
5만3000원 정도 손에 쥐었습니다.
적은 돈이었지만 그나마 살림에 보탤
돈을 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습니다."
다달이 수입이 있는 직업을 찾다가
집에서 수십키로 떨어진 골프연습장에서
매달 백만 원을 받으며 화장실 청소를 했다.
하지만 불투명한 미래는
항상 그를 불안하게 했다.
안정된 직업을 갖기 위해선
기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굴착기 운전사에 도전했다.
나이를 생각하면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마침내 2010년 1월
굴착기 업체에 취직했다.
신입사원 30여 명과 함께 받은
3개월 교육과정을 수석으로 마쳤다.
한국에 들어온 뒤 처음 맛본 성취였다.
도전은 계속됐다.
한국에서도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2만5000명이 넘는 탈북자 가운데
의료 경력이 있는 사람은 많았지만
이들 중 의사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그때까지 10여 명에 불과했다.
한국에서도 전문의가 되려면
먼저 의사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그길로 한국 의학 서적을 사서
용어도 낯선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오전 4시에 일어나 공부했다.
약 11평 남짓의 작은 집에서 그 시간에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은 화장실밖에 없었다.
동이 트면 낡은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40분 거리의 도서관에 가
오전 7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발을 헛디뎌 넘어질 때도 책을 봤습니다.
도시락 하나를 점심과 저녁으로 나눠서 먹었죠.
힘들었지만 식당 종업원 일을 하며 뒷바라지하는
아내를 생각하면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2010년 6월부터
공부한 지 한 달 만에
의료 경력이 있는 탈북자 대상
'의사고시 자격 면접시험'에 합격했다.
11월 실기시험에도 합격했지만
12월 필기시험에서 생소한
한국 의료법규 문제가 걸림돌이 됐다.
결국 탈락이었다.
포기하지 않았고 재수 끝에 합격했다.
그 날 그는 아내를 부둥켜안고
한국에서의 두 번째 눈물을 흘렸다.
그 뒤 지방의 보훈병원에서
6개월간 인턴생활을 자처했다.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은 아니었지만
한국 의료체계에 적응하기 위해서였다.
진료과목도 신경외과에서
정형외과로 새로운 도전을 했다.
이후 충북 진천 등에서
정형외과 의사로 일하다
홈페이지에 난 지금 병원의
제2원장 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해
200 대 1의 경쟁률을 뚫었다.
최 부원장의 진료시간은
매일 오전 8시 반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지만
1∼2시간 늦게 퇴근하는 경우가 많다.
환자마다 세심하게 진료하다 보니 그에게
진료 받고 싶어 하는 환자가 많아져서다.
점심을 거르는 날도 많아졌다.
"환자를 내 부모와 형제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하나라도 더 살펴보게 되죠."
그의 이런 노력 덕분에
3개월 만에 병원의 일일 진료환자가
250명에서 400여 명으로 늘었다.
"목적을 달성하는 데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 차이는 없습니다."
- 2014. 03. 27. 동아일보 기사 참조/ 플래닛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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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만 하면 기회는 열려있다
브리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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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16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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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제나 희망의 문은 열려있습니다....믿음으로 그 문을 두드립시다..
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