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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13일 부활 제6주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요한 15,9-17)
"As the Father loves me,
so I also love you.
Remain in my love.
말씀의 초대
코르넬리우스는 로마 군인으로 장교였다. 그는 신심 깊은 사람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다. 천사는 환시를 통해 베드로를 만날 것을 알려 준다. 코르넬리우스는 베드로를 만나자 엎드려 절한다. 베드로는 설교를 통해 모든 민족들에게 내려진 주님의 구원을 전하고 있다(제1독서).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하느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제2독서).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주님의 기쁨이 함께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사랑하려 애써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 역시 사랑하려 노력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예수님을 닮을 수 있다(복음).
☆☆☆
오늘의 묵상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십자가의 길을 걸었듯이 너희도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성격이 다르고 감정이 다른 인간입니다. 삶의 자세가 틀리고 자라난 배경 역시 다릅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는지요? 어떻게 평생 이해하며 살아갈 수 있을는지요?
실망과 좌절은 당연한 과정입니다. 억울함의 고통을 참지 않으면 사랑의 관계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단서를 다셨습니다. 그분께서도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답답함을 이해하셨고, 세상의 불공평을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수난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세상은 앞만 보게 만듭니다. 우리 역시 앞만 보며 살고 있습니다. 눈뜨면 당연한 듯 새날을 맞고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지냅니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와 ‘힘’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는지요? 사랑뿐입니다. 더불어 사는 이와 주고받는 애정이 없으면 세상은 금세 사막이 됩니다. 부활의 삶 역시 까마득한 것이 되고 맙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생명력을 주듯이 너희도 그렇게 ‘힘을 주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한 번이라도 실천한다면 그만큼 삶이 달라지는 말씀입니다.
지금, 서로 사랑하십시오
-배광하신부-
▤차별하지 않는 사랑
물이 수증기가 되려면 섭씨 100도가 되어야 합니다. 0도의 물이건 99도의 물이건 끓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차이가 무려 99도라 하여도 결국 1도가 부족하면 물은 끓지 않습니다. 하나가 더 있어야 물은 수증기를 내뿜으면서 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00마리의 양 중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그토록 애간장 끓이는 관심을 쏟으신 까닭은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물을 끓게 하는 1도나,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은 어쩌면 우리 가족에게서, 우리 단체에서, 우리 구역에서, 이웃에게서 여러 이유로 따돌림 당하고 있는 형제자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있어야 우리는 천국으로의 비상을 꿈꿀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사람을 차별하여 왔습니다.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나라가 같지 않아, 사상이 다르기 때문에, 믿는 종교가 같지 않기에, 고향이 틀리기 때문에, 출신 학교가 같지 않다는 등등의 이유로 쉽게 남을 배척하였습니다. 공평하지 못한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평하지 못하고 차별 대우하여도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이들을 받아들이시고 사랑하십니다. 이를 드디어 깨달은 베드로 사도는 오늘 이방인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이같이 설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십니다”(사도 10, 34-35).
진정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이들을 당신 품안에 다 받아들이신다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설교 도중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고 사도행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농사철에 경운기 등 농기계를 쓰지만 예전에는 논밭을 갈 때 소를 부렸습니다. 대부분 소 한 마리를 부렸으나 험한 밭이나 땅을 깊게 팔 때에는 두 마리의 소를 부렸다고 합니다. 한 마리 소를 부리는 것을 ‘호릿소’, 두 마리의 소를 부리는 것을 ‘겨릿소’라 불렀다고 합니다. 농부가 두 마리 소를 부릴 때에는 오른쪽은 일 잘하는 소인 ‘안소’를, 왼쪽은 일이 서툰 소인 ‘마릿소’를 세워 일 못하는 소가 일을 잘하는 소를 따라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합니다. 소도 하물며 이러할 진데,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진정 부족한 이들, 나와 다른 이들을 틀렸다 할 것이 아니라 배우도록 일깨우며 함께 가야 합니다.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기도는 가끔 폭소를 자아내게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여자 어린이가 강아지를 잃어 버렸는데, 어린이미사 기도 중에 눈물을 흘리며 강아지가 돌아오지 않아도 좋으니 보신탕집에 끌려가지 않게 해 달라고 하여 곁에 있는 아이들도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편지를 소개합니다. 동심의 마음으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하느님,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대라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하느님은 여동생이 눈을 찌르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느님, 저번 주에는 비가 3일 동안 계속 내렸어요. 노아 방주처럼 될까봐 걱정했어요. 하느님은 노아의 방주 안에 무슨 동물이든지 두 마리씩만 넣으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우리 집에는 고양이가 세 마리나 있어요.”
어찌 이 같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세월 따라 늘어가는 것은 나이만이 아니라 죄와 잔꾀와 거짓으로 얼룩진 흉물스러움입니다. 이 꼴 보기 싫은 죄 많은 어른들까지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죄인인 우리를 친구처럼 생각하시어 당신의 목숨을 다 내어 놓으시는 사랑의 완성을 보이시겠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을 따라 살자고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 4,7).
이어서 예수님께서도 또다시 우리가 잃었던 사랑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은 사랑할 수 있는 시간도, 만남의 세월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빠른 세월의 흐름 속에 우리는 행복을 만들 수도, 사랑할 수도 있는 시간과 기회들을 얼마나 헛되이 흘려보냈는지 모릅니다. 이제와 후회하면 이미 때는 늦은 것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시작의 때인 것입니다. 지금 당장 화해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기회는 영영 오지 않는 법입니다. 죄 많은 우리에게 사랑의 주님은 오늘 또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정애경 수녀-
오늘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는 사랑을 잃어버린 데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랑이 없는 가정·교회·사회·나라는 분열되고 맙니다. 사랑의 시작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 4,7) 사랑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이자 표지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인생을 돌아볼 때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사랑하지 않은 것이고 가장 의미 있고 행복했던 것은 사랑한 일이고 앞으로 남은 것은 사랑하는 것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듣고 싶어합니다.
톨스토이는 “사람이 음식을 먹지 못하면 몸이 괴로운 것처럼 영혼도 사랑을 받지 못하면 고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은 건강합니다. 내가 사랑을 받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올바른 사랑을 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받을 줄도 알고 줄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고 했듯이 성경에 나타난 하느님은 모든 것을 사랑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마무리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당신 모상으로 빚어 만드신 것은 사람을 사랑할 대상, 사랑받을 대상으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함이 없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지만 당신의 속성인 사랑을 주고받을 대상을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강제적인 사랑이나 어쩔 수 없는 사랑, 비인격적인 사랑, 마음이 없는 사랑을 원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없는 사랑은 아무리 받아도 사랑의 가치와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어떤 조건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받아도 가슴속에 빈 자리가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랑 그대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먼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는데, 그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고, 아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우리가 받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그냥 알게 하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사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고 세상과 더불어 죄를 먹고 마시며 살던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인도에서 빈민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마더 데레사는(1910-1997) 1979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때, 영국의 한 방송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서 일생 동안 살아왔는데,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데레사 수녀는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일입니다. 진심으로 그들을 보살펴 주는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 있는 몇 시간만이라도 그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것, 이것이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하느님이 예수님을 사랑한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느님한테서 사랑이 흘러나와 예수님을 거쳐 우리에게 왔습니다. 이 사랑은 다시 우리를 거쳐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거저 받았습니다. 거저 받았기에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나와 예수님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며, 이 관계에서 맺어지는 열매 또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5,12)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15,10 참조) 선택사항이 아니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달려 있는 가지가 되려면 하느님의 속성인 사랑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물과 기름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사랑이신데 내가 미움의 삶을 살아간다면 당연히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없고,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달려 있는 가지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인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려면 나 역시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나의 사랑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1코린 13,3.7-8)라고 사랑의 찬가를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맺어야 할 열매는 바로 사랑이고, 우리가 청해야 할 것 역시 사랑입니다. 사랑은 인생의 어려운 방정식을 푸는 열쇠와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우리 모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 하느님의 사람이 되면 필연적으로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사랑할 때 하느님과 가장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은혜를 청합시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기양신부-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예수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사랑하기를 원하고, 또 사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의 대부분은 사랑을 주제로 하여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중가요는 그 주제가 '사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지, 사랑과 이별의 세세한 감정들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를 노래한 가수가 있는가 하면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를 외치고, '밤비 내리는 영동교'에서도, '제3한강교'에서도 한결같이 사랑을 노래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사랑을 하고 또 받기를 원하며, 사랑이라는 말 앞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설렘과 수줍음으로 반응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 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대상은 아름답고 멋있고 나보다 잘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대상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 나보다 못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 가난한 사람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일생은 아프고 병들고 소외되고 도저히 사랑을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의 삶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25장에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들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 돌봐 주는 구체적인 사랑, 형제 중에 가장 작은이에게 해주는 사랑,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랑을 우리에게 실천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 가족이나 친척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보다 나은 사람을 사랑하기는 쉬워도 내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 나보다 못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부터 내키지 않으니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외면하고 지내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헌신적 사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그것이 우리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내주신 숙제이며 최후 심판의 기준인 것입니다. 안 되면 의도적으로라도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옛날 알렉산더 대왕이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를 찾았습니다. 한 화가가 왕 앞에 나타나자 알렉산더는 자신의 얼굴 전체가 나오도록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령했습니다. 화가는 매우 난처했습니다. 왜냐하면 왕의 오른쪽 뺨에는 칼로 인해 생긴 끔찍한 흉터가 깊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심한 끝에 화가는 왕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왕을 테이블 앞에 앉게 하고 손으로 턱을 받치게 하였습니다. 그는 왕의 손가락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그 흉터를 감쪽같이 감추고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상대방 입장에 서서 먼저 생각하고 상대방 약점을 감싸주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감정을 뛰어넘는 헌신적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우리는 예수님께 받은 큰사랑을 생각하며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담고 살 때 우리는 인간 본연의 욕망을 뛰어넘는 참사랑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를 칭찬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그와는 차원이 다르게 나를 외면하고 반대하며 심지어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 선택이 아닌 의무이며 하늘에 보화를 쌓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모든 이웃을 배려하는 이러한 우리 노력이 하늘에서는 열매가 되고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실천하시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행복의 문턱
-전삼용신부-
저의 어릴 적 첫 기억은 조부모님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컸습니다. 조금만 아파도 중병인줄 알고 엄살을 부렸습니다.
대신 하나의 꿈이 있었습니다. 바로 ‘행복’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니, 어차피 한 번 죽는 것, 행복하지도 못하면 정말 억울할 것 같았습니다.
죽음이라는 어쩔 수 없는 운명 때문에 살아있을 때 행복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그것을 목적으로 살았지만, 행복에 이르려면 오히려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친 것은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저는 행복하기 위해 먼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부터도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면 짜릿한 무엇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제일 큰 행복을 느낄 때가 언제일까?’
저는 서로의 사랑이 확인 될 때였던 것 같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확신하지 못해 안절부절 하다가,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고 있음을 알고 서로 사랑을 확인 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참 행복’임을 깨달았고, 이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에 참 ‘행복’을 누리시는 것을 보아도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사랑 때문에 행복해진다면 더 완전한 사랑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인간적인 사랑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보기로 하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똑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과연 언제가 가장 행복하셨을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어느 순간에 가장 행복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하실 때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생은 온통,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루기 전까지는 결코 마음이 편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세상에 오신 사명을 마치시고 ‘다 이루었다.’라고 하실 때 얼마나 큰 행복을 느끼셨겠습니까?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가장 고통스럽고, 굴욕스러운 죽음의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녀 사이의 사랑도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도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더 큰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인한 고통도 그만큼 더 크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난을 통하여 당신의 잃었던 애인인 교회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아니 해산의 고통으로 새로운 교회를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바로 새로 태어난 교회와 한 몸을 이루는 사랑을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하느님께서 처음에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담이 외로워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도와줄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를 깊은 잠에 빠지게 하고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빼내어 하와를 만듭니다. 아담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만나게 된 하와는 아담에게 한없는 기쁨을 주었습니다. 남자가 여자가 없으면 더 이상 남자인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아담도 자신의 살에서 나온 살이고 뼈에서 나온 뼈인 하와를 보면서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 되고 온전한 행복을 느꼈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의 짝인 교회가 없었다면 인간으로의 예수님의 강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아버지와 하나 되는 사랑을 교회와 하고 싶어서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즉, 아버지와 아들이 한 몸이 되는 삼위일체의 사랑을, 아들은 그대로 교회와 이루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느님을 떠나서 제 멋대로 놀아나고 있었고 참 사랑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세상에 참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두 번째 아담을 십자가에서 깊은 잠에 빠뜨리십니다. 당신 아들의 옆구리를 찢어도 아프지 않도록 깊은 잠, 즉 죽음의 잠에 빠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론지노의 창에 그리스도의 옆구리가 열립니다.
그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는데, ‘피’는 인간의 ‘죄를 씻는 희생’이고 ‘물’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 ‘피와 물’이 바로 모든 ‘성사’의 원천이고 교회의 탄생입니다. 교회는 성사와 함께 탄생한 것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도 죄가 용서되고 성령님이 오시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성령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인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하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지 않고서는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두 번째 아담의 옆구리에선 ‘피와 물’을 통한 새로운 하와의 탄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생명을 바치심으로써 교회를 탄생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을 주실 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의 의미는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 보여주듯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즉 ‘생명’까지도 내어주는 사랑을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당신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실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끼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인류와 당신과의 사랑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이 하와가 태어나는 순간이요, 당신의 짝을 만나는 순간이기에 가장 행복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말씀의 목적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즉, 십자가의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행복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다운 행복은 바로,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의 사랑을 할 수 있을 때 얻게 됩니다. 사랑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줌으로써 죽음까지 이르게 될 때 신적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행복하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우리 자신들도 못 박히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예수님 당신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온전한 신적 행복을 누리는 것처럼, 우리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당신의 계명을 지켜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이민신부-
아름다운 정원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주인이 물과 거름을 주며 정성스레 가꾸었습니다. 그 결과 두 나무에 아름다운 꽃이 피고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 나무를 구경하기 위해서 몰려왔고, 주인에게 나무를 잘 키웠다며 칭찬을 하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후, 한 나무가 불평을 터뜨리며 말했습니다. ‘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 내가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사람들에게 이로운 열매를 맺어서 제공하는데, 왜 나에게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주인에게 칭찬을 하는 것일까? 나는 앞으로 주인에게서 완전히 자립해서 사람들이 나를 칭송하게 만들거야!’ 그때부터 그 나무는 주인이 주는 물과 거름을 먹지 않고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고,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화창한 날이 되어, 정원에 사람들이 많이 놀러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 나무에게 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간간히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이야기뿐이었습니다. ‘저 나무 몇 년 전에는 이 나무처럼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많이 맺었었는데, 지금은 볼품없이 변했다.’ 그제야 깨닫고 후회했습니다. “주인님의 사랑과 정성이 내가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힘이었고, 내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이었구나!”
우리는 주님의 정원 안에 있는 소중한 나무들입니다. 그러나 그저 그 정원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정원에서 받은 양분을 나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며 살아갈 때도 많습니다. 그 정원에 있기에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지,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으며 살고 있는지는 뒷전일 때도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께 많이 미안합니다. 당신의 말씀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당신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기에, 세상을 살아가며 당신 사랑의 열매를 맺기를 부족한 우리이기에 더욱 주님께 송구스럽습니다.
주님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당신의 양분을 잘 섭취해야 합니다. 당신의 양분을 잘 섭취하려면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고집과 욕심을 포기하고 당신의 양분의 섭취해야 합니다. 나의 열매가 아니라, 주님 양분의 힘으로 당신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야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사랑의 양분인 성체를 그저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래서 세상에서 내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라!”
오늘도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시간들 안에서 사랑의 꽃과 열매를 세상에서 맺으며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며 당신 사랑의 꽃을 피워 세상에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닫힌 마음을 열게 합니다.
-안병철신부-
구 약 성경에서 보면 하느님께서는 항시 먼저 당신의
사랑을 표명하십니다. 예언자 호세아로부터 시작
된 예언자 전승은 그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혼인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
의 사랑에 관해 말하면서 그분의 사랑을 받는 자는 누가 되
었든 간에 구체적인 행위로 응답해야 한다는 점을 한결같
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율법에서는 이웃을 자
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레위 19,18) 요
한 서간에서는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라고 말합니다
(1요한 4,8).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기까
지 인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예수
님을 따르는 자들은 그러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구
체적인 행위로써 그분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또
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하고 계신 것처럼
그렇게 서로 사랑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오늘의 전례는 주
님의 사랑을 살아가도록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수님은 인간적이고 종교적인 거센 반대와 위
협을 온몸으로 겪어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오만
과 계산된 논리가 빚어낸 인간 욕심의 결정체인 십자가는
역설적으로 하느님 사랑의 심오한 성격을 깨닫게 해주었
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 처형된 당신의 외아들을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세우심으로써 인간에 대한 당신의
무한한 사랑이 세상의 권세를 눌러 이기고 승리했음을 온
천하에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
의 사랑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셨을 뿐만 아
니라 죄악이 막아놓은 당신과 인간 사이의 두터운 담을 헐
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온몸으
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죽음마저도 무
력화시키신,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심
오한지를 마음속 깊이 새기게 됩니다.
문제는 과연 우리가 오늘의 현실 안에서 하느님께서 그
렇게 마련해 주신 삶의 공간을 사랑이 넘치는 행복의 자리
로 만들어 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형제들이 함께 모여
사는 것 자체를 행복하게 느낄 수 있는 세상이라야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세상
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 두터운 불
신과 뿌리 깊은 소통의 부재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
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조건 없이 진실한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그러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배려
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배려의 행위는 이웃을 향
하는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관심 어린 배려의 시선
속에는 사랑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이미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웃에게 다가가기 위한 몸짓이 이웃을
배려하는 모습으로 표출될 때만이 주님의 사랑을 나누기 위
한구체적인삶이시작되고있다고말할수있지않을까요?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박상대신부-
오늘 부활 제6주일의 복음은 지난 부활 제5주간 평일의 목요일과 금요일 복음을 합친 것이다. 따라서 지난 목요일과 금요일의 [복음의 향기]를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말씀(15,1-8)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계명이다. 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살아 있는 일치의 상징이다. 포도나무는 예수요, 가지는 제자들이며,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돌보고 가꾸어 주시는 분은 하느님 아버지이시다. 농부이신 아버지는 가지가 나무를 통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하신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바로 "사랑"을 의미한다. 잘 가꾸어진 나무가 가지에게 생명의 수액을 전해주듯이, 아버지의 사랑이 아들에게로 흘러가며, 아들의 사랑이 제자들에게로 흘러간다. 사랑의 수액을 전해 받은 가지들이 나무에 붙어 있는 한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든 것이 이렇게만 된다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셨고, 그 사랑으로 아들은 제자들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우리가 이 사랑을 받아들여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준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된다. 이것이 사실상의 복음이며, 우리 그리스도교적 삶의 핵심이다. 하지만 실제의 삶은 보통 핵심을 비켜간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통하여 청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벌써 이 땅에 임(臨)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달라졌는가? 우리의 실제적 삶은 그것과 너무 멀리 있다. 시기와 질투, 거짓과 부정, 굶주림과 질병, 폭력과 강탈 등이 우리 삶이 매일 접하는 일상(日常)이다. 그것은 우리가 말로만 사랑하고 실제로 사랑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말로만 사랑을 설교하지 않았다. 그분은 사랑을 살았고, 사랑에 옷을 입혔다. 그분은 사랑 때문에 자주 꼭 지켜야 할 안식일법도 버렸다. 그분은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절박한 사정을 내일로 미루지 않았다. 그분은 사랑 때문에 갖은 혈연, 가문, 지위 등을 벗어 던졌다. 예수님의 사랑은 엄격한 현실이며, 그 절정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다. 왜 우리의 세상이 이토록 더디게 변하고 있는 지를, 그리고 변하는 데 인색한 줄을 알겠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되풀이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상냥하고 친절한 미소를 짓는 것이나, 불평하지 않고, 남을 화나게 하지 않는 것이나 남이 나에게서 바라는 대로 행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만약에 예수께서 방금 언급한 정도로 살았다면 그리 대단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랬다면 남의 눈에 썩 띠지도 않았을 것이고 십자가 죽음을 면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오늘날 아무도 예수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이 모든 것을 능가하며 끝이 없다. 그분의 사랑은 어떤 상황과도 타협하지 않았고 어떤 단서를 달거나 조건을 붙이지 않았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의 공동체 안으로 다시 태어났다. 우리가 이 공동체 안에 늘 머무를 수 있는 원동력은 하느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주시는 사랑이며, 동시에 그 사랑에 열매를 맺음으로써 응답하는 우리의 사랑이다. 이 사랑 안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벗"으로 불러 주신다. "예수님의 벗"으로 산다는 것은 매일매일 그분을 조금씩 닮아 가는 것이다. 나의 것이 아닌 것을 받아들여 내가 그것으로 변한다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기회가 오면 주저하거나 미루지 말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결단하고 행동하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양승국신부-
<눈물로 쓴 편지>
많은 본당에서 오늘(24일) 저녁 성모의 밤 행사를 준비하셨을텐데...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와서 마음고생들이 많으셨지요?
저희 수도원에서도 오늘 저녁 아이들과 함께 조촐한 성모의 밤 행사를 가졌습니다. 다행히 저희는 미리 일기 예보를 확인했었기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무난히 잘 마쳤습니다.
준비한 편지글, 성가, 연극, 연주 등으로 다들 성모님께 기쁨을 드리고자 노력했지요. 저는 맨 앞줄에 앉아서 성모님을 향한 아이들과 수사님들의 정성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았습니다. 성모님 역시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흐뭇해하셨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여러 순서 중에서 가장 제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것은 한 아이의 "성모님께 드리는 편지"였습니다. 내용이 얼마나 마음을 안쓰럽게 하던지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요즘 저도 슬슬 갱년기에 접어드는지 전에 없던 눈물방울이 눈에 맺혔습니다.
"성모님, 저는 어머니가 안 계십니다. 어디에 계시는 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가 너무도 미웠고, <내 앞에 나타나더라도 반겨주지 않을 것이다>라는 결심을 할 정도로 어머니라는 존재를 증오했습니다. 크면서 어머니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놀림도 많이 받았지요. 그렇게 많은 아픔을 가지고 저는 이곳 살레시오에 왔습니다.
하지만 신부님, 수사님들을 만나면서 저는 하느님과 성모님을 알게 되었고, 점차 아픔을 치료해 나갔습니다.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었고, 저는 <마음의 어머니>가 계셨다는 것을 점차 느끼게 되었습니다. 바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모님 당신이십니다.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면서부터 그 동안 혼자서 아파하고 있던 슬픔들이 하나 둘씩 없어졌습니다. 성모님께 저의 어려움과 슬픔을 말씀드릴 때마다 성모님은 저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성모님을 저의 어머니로 모시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가슴아픈 아이의 고백을 들으면서 엄마의 부재, 엄마의 결핍으로 인해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우리 아이들을 성모님께서 당신의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져주시기를 진심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오늘 부활 제6주일이자 청소년주일입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 청소년들이 마음 편한 하루, 기분 좋은 하루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우리 부모님들,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 청소년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하루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시면 좋겠습니다.
한국 청소년들의 현실은 암담하기만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도 팍팍하지요. 한국 청소년들의 삶이 팍팍하다는 것은 세계가 다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언젠가 유럽의 한 방송국에서 "세상이 이런 일이 다"라는 프로그램에서 한국의 고3 청소년들의 일과를 소개했다고 하지요.
다음의 청소년과 관련된 설문조사를 참고하셔서 오늘 하루 우리 청소년들에게 기분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청소년들이 부모에게 듣는 말 중에서 가장 자존심 상하는 말들
1위: **반만큼만 해봐라(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
2위: 넌 누굴 닮아서 그러니?
3위: 미친*, 병신, 식충이 등과 같은 심한 욕설
4위: 학교 때려치우고 공장이나 가라
5위: 자식이 아니라 웬수
청소년들이 부모로부터 가장 듣고 싶은 말들
1위: 우리 **최고야
2위: 우리 **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것 알지?
3위: 누가 뭐래도 나는 널 믿어
4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5위: 공부하느라 힘들지?
성장기에 있는 자녀들을 두신 부모님들, 이 한가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의 첫째가는 소원은 미우나 고우나 엄마가 늘 집에 있는 것이랍니다.
자녀교육 성공의 첫 번째 비결은 아이가 등교할 때 한번 꼭 안아주면서 "잘 다녀 오라"고 먼저 인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비결은 학교를 마친 아이가 집 앞에 와서 초인종을 누를 때 반가운 목소리로 출입문을 열어주는 일입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 청소년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하루, 그래서 그들 특유의 천진난만함과 기쁨을 회복하는 하루가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어제 저녁 사무실 게시판을 본 순간 한숨부터 나왔답니다. 게시판에 도대체 무엇이 적혀 있기에 제가 한숨을 지었을까요? 저희 사무실 게시판에는 성지순례 오시는 공동체와 그 숫자가 적혀 있답니다. 이렇게 미리 성지에 알려주셔야 그 숫자에 맞게 야외에서(순례객 수가 많으면) 또는 경당에서(순례객 수가 적으면) 미사를 하거든요. 그런데 오늘 오시는 순례객 수가 자그마치 600명 정도가 쓰여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말씀하십니다.
“순례객들이 많아지면 좋지 않아요? 헌금도 많이 걷힐 테고, 성지 물건도 많이 팔릴테니까…….”
그럴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사실 제가 지향하는 성지는 기도하는 성지이지, 돈 버는 성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서 주님을 더욱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성지가 될 수 있도록 성지 설명도 그런 식으로 유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아지면, 특히 단체로 오면 거의 야유회 수준으로 변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성지에는 직원이 저를 포함해봐야 모두 4명뿐입니다. 그런데 600명이 원하는 것이 모두 같을까요? 그리고 그분들의 바램들을 모두 충족시켜 줄 수 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이것을 해달라고, 또 다른 분들은 저것을 해달라고 하다보면, 성지 직원의 수가 적기 때문에 결국 서로 상처만 입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오늘은 첫영성체 대상인 어린이들까지 방문을 한다고 합니다. 어린이들. 개개인으로 봤을 때에는 너무나 예쁘지요. 하지만 단체로 왔을 때 제일 통제하기 힘든 대상이 바로 이 어린이랍니다. 어른 대상으로 준비한 성지 설명이 아이들에게 맞을 리가 없으니, 그 시간에 아이들은 온갖 장난은 다 칩니다. 따라서 제가 주의집중을 해서 성지 설명을 제대로 할 수도 없겠지요.
이 새벽에 기도하면서 또 다시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복음을 읽으니 바로 이곳 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되네요.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저는 사랑의 마음이 전혀 없이 우선 걱정부터 했던 것입니다. 사랑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괜히 걱정하고 한숨만 내쉬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저만 사랑을 베푸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오늘 오시는 순례객 600명 중에서 많은 분들이 예수님 안에서 이 사랑을 가지고서 순례를 하실 것이랍니다. 따라서 이 사랑 안에서 서로 배려하며 하루를 보낸다면 분명히 주님을 더욱 더 뜨겁게 체험하는 은총의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정말로 우리들은 많은 걱정을 뒤집어쓰고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랑만 있다면, 그리고 그 마음을 가지고 기도만 한다면 우리들에게 그 걱정거리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강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만이 나의 걱정을 없애는 비결입니다.
빠다킹 신부
네버 엔딩 스토리
-노성호 신부-
‘포도나무의 비유’는 가톨릭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인 친교와
일치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포도나무를 예수 그리스도로, 그 가지들을
우리 신앙인으로, 그리고 포도나무를 가꾸는 농부를 하느님 아버지로 비유하고
있는 이 말씀은,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들이 그 나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신앙인들이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는 신앙적인 고백과 대비해서 너무도 적절하게 표현하신 예수님의
걸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농부와 포도나무, 그리고 그 가지들이
이루는 삼위일체의 조화와 친교,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 공동체적인
모습이 담겨 있고, 이를 우리 모든 신앙인들이 본받고 살아가길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운명 공동체를 이루는 관계
안에는 반드시 전폭적인 믿음과 사랑, 즉 농부는 포도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아낌없는 관심과 사랑을 쏟을 것이고, 포도나무는 열심히 열매를 맺도록
노력할 것이며, 가지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나무를 떠나지 않으면서 붙어
있을 것이라는 다짐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이야기처럼 세상 끝날까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이것은 그분께서
우리 모두에게 들려주시는 결코 끝나지 않을 이야기입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최근자-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시고 실천하시고 완성하시려고 말씀이 육화되어 이 세상에 오신 주님. 당신 아버지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당신의 본래 위치를 떠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당신의 목숨까지 바치시는 주님.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은 어떻게 하는 건지 그리고 사랑의 열매가 무엇인지 알려주신다. 사랑에는 흔히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육체적인 만족을 가져오는 육적인 사랑, 친구와의 서로 돕고 나누는 우정의 사랑, 그리고 자신을 버리는 봉사와 헌신의 사랑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을 봉사와 헌신의 사랑이라고만 생각할 때 사랑이란 단어는 더욱 어렵게 느껴지며 피하게 된다. 사랑이란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스쳐지나가는 인연의 열매들이기 때문이다. 남편과의 사랑, 아이들과의 사랑, 친구들과의 사랑, 길 지나가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과의 사랑. 뒷마당에 피어 있는 아기자기한 꽃들을 바라볼 때 느끼는 아름다움, 밤하늘의 별들과의 대화 속에 떠오르는 소중한 생각들.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하고 하느님이 얼마나 중요하고 고마운 존재임을 알려주는 대자연 모두가 사랑의 씨앗이며 이러한 사랑의 씨앗을 통하여 나는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
사랑의 원천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을 떠나서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존재가 사랑이기에 그의 존재를 느낄 때 사랑을 체험하고, 창조물들을 만나고 스쳐지나갈 때 사랑을 나누며 열매를 맺는다. 그뿐 아니라 이 사랑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때 나는 하느님 안에 존재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더 큰 봉사와 헌신을 할 수 있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2)
-이기양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누구나 사랑하기를 원하고, 또 사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경우는 거의 드물지요. 누구나 사랑하고 사랑 받고 싶어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문화의 대부분이 사랑을 주제로 하여 여러 가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대중가요는 그 주제가 ?사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지, 사랑과 이별의 세세한 감정들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했던가?를 노래한 가수가 있는가 하면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를 외치고, ?밤비 내리는 영동교?에서도, ?제3한강교?에서도 한결같이 사랑을 노래합니다. 이렇게 남녀노소 구분 없이 사랑을 하고 또 받기를 원하며, 사랑이라는 말 앞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사랑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 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대상은 아름답고 멋있고 나보다 잘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사랑을 원해도 사랑만큼 아름답고 슬프고 보람되고 허탈하고 복잡한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종류도 남녀간의 사랑, 부모 자식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등등 다양하지만 사색의 천재라고 불리던 그리스 사람들은 사랑을 세 부류로 요약했습니다.
첫째는 에로스(Eros)요, 둘째는 필리아(Philia)요, 셋째는 아가페(agape)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에로스는 남녀간의 이성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두 번째 필리아는 우정을 바탕으로 한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을 지칭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아가페는 헌신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 에로스와 필리아는 일반적으로 내가 좋아하고 나보다 좋아 보이는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에 비해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7)라는 말씀에서 ?아가페?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사랑하라는 말씀하시는 사랑은 에로스나 필리아기 보다는 아가페적인 사랑에 가까운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사랑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최후만찬 석상에서 당신의 몸과 피까지도 기꺼이 내어주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상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이렇게 전적인 헌신을 바탕으로 한 사랑이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2) 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 나보다 못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 가난한 사람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아프고 병들고 소외되고 되돌려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의 삶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25장에는 우리가 사랑해야할 대상들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는 구체적인 사랑, 형제 중에 가장 작은 이에게 해주는 사랑,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랑을 우리에게 실천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보다 나은 사람을 사랑하기는 쉬워도 내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 나보다 못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부터 내키지 않으니 사랑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래서 늘 잊고 지내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내주신 숙제입니다.
한 사람이 시한부 인생이 되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폐혈전증, 신부전증, 간경병증 등 무려 십여 가지도 넘는 병을 앓는 그 사람에게 의사는 이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환자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보람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끝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먼저 거리에 버려져 있는 환자들을 자기 집에 불러모았습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그 사람들을 목욕시키고 옷을 빨아 주며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잠도 함께 잤습니다. 그러자 환자들이 자꾸 불어났으며 식량도 부족했고 잠 잘 방도 모자랐습니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습니다.
과로로 인해서 여러 번 쓰러졌으나 그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병 때문에 일을 더 이상 계속해서는 안 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빚도 많이 졌고 설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생명이 다하는 시간까지 자기보다 어려운 환자들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그는 나이 서른에 죽었습니다.
그가 쓰러졌을 때 한국 가톨릭 평신도 협의회에서는 ?가톨릭 대상?이라는 큰상을 그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추기경님이 직접 주례한 장례미사에 신자들은 물론 많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참석해서 고인의 뜻에 추모의 정과 사랑을 드렸습니다. 그의 이름은 김근영이었고 본명은 안토니오였습니다.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는 놀랄만한 사랑을 우리는 봅니다. 이러한 사랑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하느님 안에 머물 때 가능합니다. 인간의 감정 안에서는 결코 쉽지 않지요. 그래서 밤낮으로 기도하며 말씀 안에 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부족한 우리들은 자신의 본능을 뛰어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랑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하기 위해서는 마음뿐만 아니라 사랑하기 위한 기술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옛날 알렉산더 대왕이 그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를 찾았습니다. 한 화가가 왕 앞에 나타나자 알렉산더는 자신의 얼굴 전체가 나오도록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령했습니다. 화가는 매우 난처했습니다. 왜냐하면 왕의 오른쪽 뺨에는 칼로 인해 생긴 끔찍한 흉터가 깊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심한 끝에 화가는 왕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왕을 테이블 앞에 앉게 하고 손으로 턱을 받치게 하였습니다. 그는 왕의 손가락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그 흉터를 감쪽같이 감추고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먼저 생각하고 상대방의 약점을 감싸주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감정을 뛰어넘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역시 기도와 말씀 안에서 예수님과 같은 사랑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사랑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서공석 신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지난주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는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부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님 사이에 흐르는 생명이 사랑이고,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서 삶을 배우는 그리스도 신앙인인 우리 안에 흐르는 생명도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은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관능적인 사랑도 있고, 이기적인 사랑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또 예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흐르는 사랑입니다. 오늘의 제2독서, 요한 제1서는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4,10)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흐른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은 죽기까지 스스로를 내어주신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이해 타산적입니다. 우리도 사랑할 때 관대하지만, 대단히 제한된 관대함입니다. 걸핏하면 철회되는 관대함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원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 인간 세상에 준해서 상상합니다. 인간은 불안할 때 하느님을 생각하였습니다. 인류가 세상에 살면서 발견한 대자연은 광활하고 고마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운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대자연은 갖가지 천재지변을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높고 강한 사람은 고마운 때도 있었지만, 두려운 때가 더 많았습니다. 크고 강한 모든 것은 인간에게 혜택이기도 하였지만, 또한 위협적이고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원시 시대부터 인류는 대자연을 지배하는 위대한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 천둥과 번개, 지진과 홍수 등은 하느님의 분노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로부터 시작된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체험은 하느님이 인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함께 계심은 축복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체험으로 하느님에게 의지하며 이스라엘을 이끌고 미움의 나라 이집트를 탈출하여 자유의 땅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체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두려움은 율법과 제사에 대한 노예적 자세, 곧 지켜야 한다, 바쳐야 한다는 그들의 마음가짐이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사랑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인간의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율법을 어기거나 제물 봉헌에 불충실하였던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고 믿으셨습니다.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그분을 죽여 제거할 때도 예수님은 그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믿고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죽어 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우리도 그 사랑 안에 머물 것을 권합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그리고 그 계명을 설명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리스도인은 성서가 전하는 말씀들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 지를 알아듣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이신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신뢰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신뢰로써 인류역사가 유산으로 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자비하시고, 축복하시기에 자기도 그 자비와 축복을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자기 주변 사람들을 위해 자비로운 마음, 축복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합니다.
성서 안에도 하느님에 대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표현들이 없지 않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던져진다.” “지옥에 던져진다.”(마르 10,43.45) 등의 표현입니다. 이 표현들은 불행하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 유대교 안에서 통용되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고 제자들도 유대인입니다. 초기 교회가 그들에게 친숙한 언어를 갖다 쓴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나타난 사랑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알아보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고 강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의 방식으로 전능하고 강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제압하고 압도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함께 계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욕구 충족을 찾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낮추어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느님은 말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하느님은 마치 계시지 않는 듯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겸손하게 함께 계십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겸손하게 있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크게 노출되지 않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비굴이 아닙니다. 주인의 눈치를 살피면서 처신하는 종은 겸손하지 않고 비굴합니다. 높은 사람의 마음에 들어서 더 큰 혜택을 얻어내기 위해 자기 소신을 버리고 스스로를 낮추는 것은 애완동물로 스스로를 비하하는 일입니다. 겸손은 낮추어야 할 이유가 없는 곳에 자기 스스로를 낮추는 마음입니다. 상대방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마음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랑은 일방적이고 상대를 지배합니다. 그것은 횡포일 수는 있어도 사랑은 아닙니다. 생명에 숨결이 있듯이, 사랑에 겸손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려면 예수님이 어떤 겸손이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세리, 죄인 등과 예수님은 어울리셨습니다. 상대방에 맞추어서 스스로를 낮추신 겸손입니다. 우리에게 겸손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처지를 외면하고 우리 자신을 긍정하고 과시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초라하지만,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듯이, 우리 이웃이 우리 앞에 초라하게 보여도 이웃과 함께 있고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주님의 제자
-허영업 신부-
제가 어머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돌아가신 다음날 염습을 할 때였습니다. 어머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반듯하게 누워 주무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입고 계신 알록달록한 몸빼바지(일본말의 ‘몬베’로, 일할 때 입는 바지)를 보자 목이 멨습니다. 평생 쉼 없이 일을 하시고 장사를 하셨던 어머니는 외출할 때를 제외하곤 늘 몸빼바지를 입으셨습니다. 저는 어릴 때 그런 어머니의 옷차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친구들 어머니는 멋지게 차려입는데 저희 어머니는 늘 같은 옷에 같은 머리 스타일로 다니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엄마, 좀 다른 옷 입으면 안 돼?” 하면 어머니는 늘 “ 난 이게 편하다”며 말머리를 자르곤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어머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도 여자인데 왜 멋지고 좋은 옷을 입고 싶지 않으셨겠습니까.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평생 입고 싶은 것, 드시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사셨던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다 똑같을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놓으실 분, 그분의 이름은 ‘어머니’입니다.
오늘 복음(요한 15,9-17)에서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 장황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사랑을 이해할 때 어머니의 사랑만큼 분명한 비유가 또 어디에 있을까요?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했지만(1요한 4,8) 우리는 “어머니는 사랑”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이 세상에서 우리의 어머니를 통해서 보여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느님 사랑의 화신은 우리들의 어머니가 아닐까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적당히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처럼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정도로 치열하게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입니까? 우리 마음에는 늘 거센 미움과 증오의 바람이 마구 이는데 사랑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주님처럼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고 늘 억울하고 손해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사랑하라,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의 가치를 의심하는 우리에게 사랑만이 승리하고 죽음까지도 이긴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시간은 사랑하는 데도 부족합니다. 우리 곁에는 사랑할 사람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야 말로 은총 속에 사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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