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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생명관과 탈핵
-무상법현(불교생명윤리협회 공동집행위원장,열린선원 원장)
1.불교의 생명(평화)관
붓다의 가르침은 생명을 사랑하고 위하며, 평화를 추구하는 가르침이 아주 많아서 특정한 구절을 통해 알아보기 보다는 전체의 부분으로서의 가르침이라 생각하며 살펴본다. 긴 길이의 경전 묶음인 『디가 니까야』의 「차카바티시하난다 숫따」에서는 생명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본성과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활동이 건전한 것이라고 설한다. 불자들의 행동지침인 계율 속에 생명을 사랑하는 계율들이 담겨있으니 그 계율을 지키지 않고 나쁜 짓을 하면 삶의 질이 떨어지고 자신의 수명까지 짧아진다고 경계하고 있다.
“ 모든 생명체는 고통을 싫어하고 행복을 추구하며 삶을 보전하기 원한다.
모든 건전한 활동은 자신과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다.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계율을 지키지 않고 야만적 본능을 따라 나쁜 짓을 하면 자신의 삶의 질이 떨어지고 수명이 짧아진다.“
기본적으로 생명체는 그 무엇이나 행복을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존재의 행복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사고이다. 그리고 현재 또는 행복하게 생각되는 삶이나 불 완전하드라도 주어진 삶 자체를 해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과 남을 해치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그것은 ‘내’ 속에 나를 감싸고 있는 자연과 ‘너’가 있기 때문이다.
“ 슬기로운 이는 자신(남, 자신과 남)을 해치려 하지 않으며, 자신(남, 자신과 남)을 위하여 이익 되게 하는 마음을 낸다. 이와 같은 사람을 위대한 이라고 한다.”
그렇게 나(남, 자신과 남)를 제대로 위하는 위대한 이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지키고 실천할 덕목이 있다. 무엇보다도 나(남, 자신과 남)를 제대로 아는 노력이 우선하여야 한다. 그것은 바로 나를 둘러싼 생태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생태는 태어난 모습, 살아있는 모습, 생명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평화의 모습이다.
나를 보기로 들어서 설명하자면 나의 정신(마음)을 둘러싸고 있는 몸과 몸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를 바로 알고 함께 생태를 유지하여야 한다. 그것은 비록 모여서 이루어지고 그랬기 때문에 흩어지고 무너지게 되어있으나 자연스러운 변이과정을 빼놓고 인위적으로 변이를 시켜서 힘들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루어진 흙, 물, 불, 바람의 상태가 억지로 달라지게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나와 함께 행복하여야 한다. 이것이 『앙굿따라니까야』경문에서 제시하는 생명,평화의 정신이다.
나(우리)의 몸 생태, 정신생태, 주위생태가 떨어진 별개의 낱 생태가 아니라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는 온 생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존재 하나하나의 몸 생태가 바로 몸 생태와 주위생태이며 거기에 깃든 마음(정신)이 정신생태이므로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몸 생태와 주위생태와 연결되어 있는데 거기에 정신생태가 연결되면서 바람직한 행(行,sankara) 즉 하려고 하는 마음, 마음이 꾀하는 바, 의도라고 번역되는 마음의 행동이 작용하게 된다. 하려고 하는 마음이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행동하면 바람직한 결과가 이끌어질 것이다. 즉 모든 생태가 공유하는 최대한의 행복(幸福,sukkha)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려고 하는 마음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행동하면 그 반대의 결과가 얻어질 것이다. 그것은 모든 생태에게 괴로움(苦,dukkha)를 가져다 줄 것이다.
잘못된 정보 가운데 중요한 하나가 바로 나와 생태 그리고 정신 즉 몸 생태와 정신생태 및 주위생태를 구분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 생태를 행복하게 한다면서 주위생태를 불행하고 괴롭게 하여 결국은 몸생 태와 정신생태도 괴롭게 만드는 결과가 된다. 마찬가지로 원자(핵)력의 개발과 활용이 몸, 정신, 주위 생태를 있는 그대로의 생태, 평화를 유지하도록 돕느냐, 아니면 생태, 평화를 방해하느냐를 분석하고 판단해야 바람직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2. 원자(핵)력과 생명(평화)
1) 힘들의 경쟁
그리스나 고대 인도의 철학, 사상가들은 모든 것들이 가장 작은 단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흙(地),물(水),불(火),바람(風)이라고 생각하였다고 이해들 한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흙(물,불,바람)이 아니라 흙같은 성질을 가진 작은 것이라는 뜻으로 보았다라고 이해해야 바른 것이다. 아무튼 그런 사고들이 자연과학의 이론과 실험 및 관찰기구를 만나면서 정비되기 시작하여 원자설,분자설,전자설,이온설,중성자설,핵설 등으로 발전, 변화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돌턴으로부터 시작한 원자설은 멘델레이에프가 주기율표를 만들면서 더욱 활성화 되고 관찰 가능한 상태까지 되어 103 종 원소 또는 110종 원소로까지 발전한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이 작용하면 자연을 그르치게 되어왔다.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진 유일신을 믿는 종교체계를 가진 이들은 가장 작은 입자는 하나이거나 하나에서 출발하거나 하나가 다른 것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쳐서 그로부터 우주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가설을 주장하였다. 그것이 바로 얼마 전에 발견되었다고 크게 떠든 힉스의 신의 입자설이다. ‘기본 입자’나 ‘질량 전달입자’라는 이름 정도면 충분한 개념을 신학적으로 이해한 잘못이 있다.
물론, 자연 상태로 있는 것은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원자번호 92번인 우라늄까지이며 그 이후로는 만든 것이다. 그런데, 그를 쪼개는 데도 힘이 들고 에너지가 발생한다. 붙이는 데도 또한 힘이 들고 에너지가 발생한다. 이러한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 인간은 속도를 알 수 없고 방향과 도착지점을 알기 어려운 여행을 하게 되었다. 기본적인 붙고 떨어지는데 작용하는 힘들은 자연계에서는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이라고 한다. 그리고 같은 종류끼리 붙는 힘은 부착력, 다른 성질끼리 붙는 힘은 응집력이라 한다. 밀어내는 힘은 척력이다. 바깥으로 향하는 것은 원심력, 안으로 향하는 것은 구심력이다. 그들의 힘 사이에 작용하는 힘들을 활용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 것이 입자가속기, 회전기, 회전가속기 등이 있고, 떼어 내서 에너지를 얻는 분열(폭발)기, 붙여서 에너지를 얻는 융합기 등의 방법들이 있다.
어느 것이나 세밀하게 쪼개 들어가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 특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그것을 인위적인 힘을 가해 쪼개서 본디의 것이 특성이 없어질 때까지 작용해서 얻는 것이 분열에너지이다. 그리고 인위적인 힘을 가해서 둘 이상의 다른 것이 특성이 없어지게 하는 것이 융합에너지이다. 분열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우라늄 등 방사성 동위원소이다. 융합을 통해 얻어진 힘을 활용하는 것이 수소폭탄이다. 다만, 그 위력이 가공하여 활용하지 않고 있다.
현재로는 융합에너지가 가장 크고 좋은 것이라 하지만 융합을 하는데 엄청난 에너지가 들고 그 에너지를 안전하게 담는 장치가 없기 때문에 활발하게 사용되지 않고 있다. 분열할 때 나오는 에너지가 대부분인데 원자에너지를 제외한 다른 화석 에너지는 비교적 에너지의 양도 적지만 그 피해도 적다. 원자에너지는 에너지의 양이 많아서 선호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실수나 인공 또는 자연의 재해와 함께 발생하는 피해가 있을 경우 그 정도가 엄청나기 때문에 전 인류의 관심사요 화두가 된 것이다.
2)원자(핵)력의 활용
원자력은 핵을 쪼개 나오는 열을 이용하여 전기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 때 열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생명에 해가되는 방사선도 같이 나온다. 원자핵이 변환을 일으키며 에너지를 방출하는 원자의 전이과정을 방사능이라 한다. 방사능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한다. 하나는 원자핵이 자연적으로 방사선을 배출하여 다른 원자핵으로 변환하는 성질(능력)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1초당 붕괴수(dps : disintegration per second)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이는 방사능의 세기라고 한다. 이때 방출되는 에너지는 전자파 또는 알파, 베타, 감마입자 같은 입자에 의해 운반된다. 이 에너지를 가진 전자파 또는 알파, 베타, 감마 입자 등을 방사선이라 한다. 방사선은 원칙적으로 1붕괴에 대하여 1개의 입자가 방출되기 때문에 방사능의 세기는 1초당 방출되는 방사선의 수(입자방출률)이다.
문제는 엄청난 양의 열과 함께 방사선이 인체와 생명에 해가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원자력을 무서워하고 반대할 이유가 없다. 산업계와 정치계를 이끄는 많은 주도 세력이 열에너지와 방사선을 좋은 쪽으로 이용하면 된다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고 실제로 원자핵 폭탄과 원자핵발전소 가동과 설립을 주도하고 있다. 핵 마피아라고 별도의 개념으로 말하지만 경제, 정치적으로 상류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이며 그들도 사회의 구성원이라서 함께 살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욕구는 끝 간 데를 모르는 것이라서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나쁘게 쓸 수 있지만 경제적으로도 나쁘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인류사에서 여러 경우로 우리는 경험을 해왔고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할 것이다.
따라서 원전 폐기물에서 나오는 생명을 죽이는 방사선과 방사능 문제를 인류가 안전하게 해결하는 것이 아직까지는 인류의 영원한 화두이다. 안전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원전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3)원자(핵)력의 미래
가장 좋은 것은 원전을 안전하게 해체하여 탈핵으로 가야한다. 그러나 원전의 도입과 기술개발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으로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원전의 안전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초기 원자력이 개발될 당시 핵연료는 핵주기라고 하는 사이클을 이루어 사용 후 연료를 추가적인 에너지원으로 사용가능할 것으로 예상해 발전소 안에 임시 저장하여 왔다. 사용 후 연료를 추가적인 에너지원으로 사용이 가능한 것인가? 그 기술은 개발되었는가? 현재까지로 보면 답은 “아니오”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개발이 가능할 것인가? 역시 “아니오” 또는 “예측 불가능”이다. 그렇다면 현재 21기가 가동 중인 국내 원전을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관리할 것인가가 핵심이다. 후쿠시마 사태를 교훈으로 하여 살펴보면 국내 발전소 내에 임시로 조밀하게 초기 설계용량을 2배로 확장해서 저장하고 있는 사용 후 연료가 언제 우리에게 대 재앙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원전에 임시보관하고 있는 사용 후 연료는 하루빨리 안전한 곳으로 치워야 한다. 핵 소멸 처리를 통한 원상회복 수준의 폐기물관리 기술을 집중적으로 개발하는 것도 아니다. 학계에서 주장하는 파이로프로세싱(pyroprocessing) 기술을 개발해서 핵연료의 상당부분을 재활용하고 폐기물 량도 대폭 줄이는 기술을 집중 개발하겠다고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파이로프로세싱 기술은 정책적으로 핵주기 사이클을 완성하는 단계로 고려하고 있으나 재사용을 위해서는 4세대 원자로인 고속증식로가 필요하다. 이 고속 증식로는 현재에도 완성된 기술이 아니며 일본에서 개발된 몬쥬(Monju.文殊) 고속증식로는 다 지어놓고 3개월 정도 운전하다가 몇 번 사고 후 가동을 완전 포기하였다. 그리고 현재 없앨 수도 없는 이 설비에 매년 수 천 억 원씩 관리비만 무한정 투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용후 핵연료봉(used nuclear fuel rod)이 식어가도록 해주어야 하는데 현재까지 제대로 식히는 방법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여러 가지로 문제를 유발할 가능성이 많으며 현재는 존재자체가 위험성이 매우 크며, 현재 상태로 유지하는 데만도 엄청난 재화가 소용되는 재앙덩어리인 것이다.
3. 원자력(핵)발전에 관한 바른 견해(正見)와 바른 생활(正命)
1)핵을 바르게 이해하는 바른 견해(正見)
붓다는 문제해결의 방정식을 사성제(四聖諦) 즉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형식으로 제시했다. 아니 스스로의 문제해결을 사성제로 풀이하고 같은 방식으로 제자들에게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문제의 실상을 살피고(苦聖諦), 실상이 전개된 원인을 파악하여(集聖諦),해결된 상태 또는 목표(滅聖諦),문제를 해결해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道聖諦)을 말한다. 이는 어느 종교지도자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지만 오로지 붓다에게만 있었던 독특한 문제해결 방법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해결의 방법론으로서의 여덟 가지 바른 길은 붓다만의 방법이며 오늘날의 여러 문제 특히 핵문제 해결의 방법론으로서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붓다의 문제해결 방법인 사성제의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바른 길은 여덟 가지로 제시한다. 여덟 가지의 첫 번째가 바로 바른 견해(正見)이다. 그런데 근래의 학자 가운데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증가의 법칙을 사회학으로 풀이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던 제레미리프킨은 그의 저서에서 대단히 중요한 지적을 한다.
“ 그런데 세상은 갈수록 혼돈의 와중으로 빠져들고 있다. 어떤 일도 제대로 되어가는 게 없어서 여기저기서 끝없는 수선과 짜깁기의 연속이다.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사건이 터진다.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 모두를 몰아붙여 탓해 보아도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기만 한다. 정치권의 리더나 누구 대단한 사상가라 할지라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된 문제를 풀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붕괴로 몰고 가는 냉혹한 기운이 세계를 잠식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세계관에 대해 냉철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세상을 병들게 하고 그 속의 모든 것을 오염시키는 주범은 바로 우리들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이는 붓다의 가르침과 정확히 일치한다. 붓다의 가르침도 바른 견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실적인 혹(惑)에 의한 업(業)을 발생하고, 업의 결과가 괴로움(苦)인데 이 괴로움(원인 포함)을 제대로 알고 괴로움을 벗어난 상태를 확실하게 알아야 벗어나는 길을 제대로 가게 된다는 가르침이 사성제(四聖諦)이다. 이 사성제의 결론적 방법론인 팔정도(八正道)의 출발이 바로 정견(正見)이다.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에서 강조하는 바가 바른 세계관이라는 점도 서로 통한다.
개발을 통한 생산성의 향상이 경제적 부가가치를 높여서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이리라는 기대는 이미 지나간 시대의 가치가 되었다. 아직도 과거의 가치개념에 사로잡혀 무조건적인 개발이 경제적 부가가치를 높인다는 생각에서 빚어낸 잘못된 정책의 피해가 정부와 자치단체 그리고 기업에 의해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생태의 보존이 가지는 경제가치가 개발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경제가치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즉 통합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제대로 된 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적은 범위에서 짧은 시기에 적은 사람들에게 이익이어도 많은 범위와 긴 시기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똑 같이 이익인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원자핵발전의 경우가 대표적인 오산(誤算)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원자력 발전론자들은 일정한 시기와 규모에는 청정성을 유지하고, 경제성도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기와 규모를 더 늘렸을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안전성은 말할 것도 없고 피해규모가 천문학적인 것이라서 청정성, 경제성을 말할 수가 없어짐을 후쿠시마사태에서 이미 확실하게 알았다.
사실, 이 문제는 이미 출발 당시부터 제기된 문제이다.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발견한 원자들 가운데 나눠지면서 막대한 에너지를 발생하는 원자들을 알아냈다. 인종차별적 정책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해치려한 나치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이나 페르미 등이 자발적으로 독일을 탈출, 미국으로 망명해 독일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한다는 잘못되었으나 소박한 믿음으로 원자폭탄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그 때는 제2차 세계 대전이 군사력이 아닌 경제력에 의해 결말이 나고 있었다., 미국의 중간 급유기지인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한 일본의 힘을 끝장내고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한국인을 포함한 수십만이 넘는 죄 없는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피해자가 수백만에 이르는 가공할 피해를 입는 것을 본 원자 연구학자들이 가슴을 치는 일로 전개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원자(핵)력을 평화적인 산업에만 활용하자는 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 특히 정치,경제적 욕심에 의해 그것도 무위로 끝나고, 산업활용도 끝내는 원자폭탄의 제조가 귀착점이 되어 지구촌 전체가 어려움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시대적 가치관에 편향된 사고를 가진 지도자들이 이끄는 정부에서는 아직도 존재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생태를 있는 그대로 두지 않는 일이 흔히 벌어지고 있다. 생명의 가치보다는 개발을 통한 경제가치 창출에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기 때문에 늘 생태와 전통문화의 보존이라는 지속가능한 발전 가치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그런 사회일수록 사회구성원간의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원자(핵)력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원자(핵)발전은 생명과 지구 구성원들의 기본성질인 흙, 물, 불, 바람성질의 생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며 그로 둘러싸인 몸생태와 주위생태를 교란하고 살상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신생태도 피폐하게 하거나 생명의 존재 자체를 상실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소통의 출발점은 억지로 조정하기 위해 존재형태를 변화시키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존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두고 보면서 편안하게 놓아두는 것 그것이 소통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생태적인 삶이요, 결국 생태위기를 해결하고 벗어나는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현재까지 경험한 세 차례의 원자력(핵)발전소 사고만으로도 우리 인류에게 충분히 경각심을 줄 만큼 경험을 한 것이다. 아직도 체르노빌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방사능낙진의 흔적이 관측되고 있으며,후쿠시마는 참상의 제거마저도 끝나지 않은 상황이다.
이제 원자(핵)력에 관한 집단 지성을 발휘하여 그것이 깨끗하지도, 안전하지도, 값싸지도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한 번 사고가 나서 오염이 되면 오염이 영향을 미치는 지역은 거의 전 지구라 할 만큼 방대하며, 피해가 지속되는 시간은 그 동위원소의 반감기만큼도 길게는 수백 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안전성은 이미 시스템의 문제, 인간의 능력과 방심 그리고 자연 재해와 테러, 전쟁 등에 아주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2)탈핵하는 바른 생활(正命)
붓다의 가르침인 팔정도의 실천도 가운데 몸가짐(생활)과 관련한 것들은 바른 말,바른 행동,바른 생활,바른 노력 등이 있다. 물론,이 가르침들은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최고의 행복 즉 지속 가능한 행복인 열반(涅槃.nibbana)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런데 지속 가능한 행복도 나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과 이 땅에 살고 있는 나와 우리들의 건강과 안전이 담보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얻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우리의 안전과 행복한 삶을 위하여 바른 생활을 해야 한다.
안전하지 않은 원전은 불교생명윤리의 원칙에 벗어나는 것이다. 바른 생활을 벗어나는 것이다. 바른 생활은 정견에 입각해서 이루어져야 하고 바른 말,바른 생활, 바른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불교도 개인 각자와 불교계에서 원자(핵)에 관한 바른 생활을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이 뒤따라야 한다. 우선 원자(핵)력을 이해하는 노력이 우선한다. 여러 가지 자료들과 불교생명윤리협회, 탈핵학교 등의 단체들과 연대해서 바르게 알아야 하고 가족과 친지 이웃들에게 전파해야 한다. 그리고 나와 우리의 안전을 추구하는데 나와 우리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실천해야 하며 필요한 만큼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
당장, 여름이나 겨울이 돌아오면 21세기 신자유주의의 피해자인 한편 수혜자이기도 한 우리들의 삶의 습관이 당장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는데 익숙해 있어서 전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조금이라도 알려질라치면 지래 겁부터 먹고 정견을 놓치고, 정명(正命)을 벗어나는 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다. 2012년 ,2013년 등 후쿠시마 이후 전력이 모자라는 상황이 도래했으며, 우리나라 전체 원자력 발전기의 절반에 가까운 기기들이 사정에 의해 가동을 중단했으나 산업과 생활 모두에서 큰 불편이 없이 지나갔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미 탈핵으로 방향을 선회해서 지구촌의 모범 사례가 된 독일 국민들은 섭씨 30도가 넘는 기온에서도 전차나 버스에서 에어컨을 켜지 않고 생활한다. 될 수 있으면 물과 전기 등을 가정에서부터 아끼는 노력을 하고 있음을 본받아야 한다. 후쿠시마 사태 때 정부기관과 언론에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상당수의 시민들이 불안한 가운데 생활의 불편함을 겪었다. 정말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기에 정보를 통제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막연한 불신감이 지나쳤다. 그래서 비가 조금만 와도 자녀의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등교를 막고, 한 달 이상분의 생필품을 사재기 하는 등의 일들이 벌어졌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으며 부정확한 것이었다. 물론, 원인은 국가와 기관 그리고 언론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서 발생한 것이다. 정보를 제공해야 할 곳에서는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해서 국민들의 신뢰를 얻고 국민들은 제대로 된 정보 속에서 바른 생활을 하도록 다짐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미 얻어진 자료에 의하면 분명하게 원자력(핵)발전은 위험하다. 더욱이 수명을 30년으로 해서 설계한 기기들을 10년 이상이나 수명을 연장해서 사용하려고 하는 노력들은 대단히 어리석고 따라서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후쿠시마 원자로들의 경우에서 이미 노후 원자로들이 먼저 반응해 피해를 입었고 정상 기기들도 자연재해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파손되어서 엄청난 피해를 겪었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원자력발전소 주변에 인구밀집도시가 있다는 것이 큰 위험요소이다. 우선, 수명이 다한 노후 기기의 가동을 제로로 하여야 한다. 그리고 새 발전소의 건설을 포기하여야 한다. 남아 있는 발전소를 대체할 대안에너지의 개발에 힘을 쏟아야 한다. 그리고 남아있는 발전소의 안전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모든 부분은 단순한 조직과 단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므로 관련된 가족 기관과 단체 그리고 각 분야전문가들로 구성된 시민단체의 감시와 협력을 받아서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분명하게 얻어진 결론은 폐쇄적 운영을 선호하는 정부에 원전의 안전감시를 완전히 맡길 것이 아니다.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안전감시 기능이 대폭 강화되어 투명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체계적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시민사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동시에 민관 합동으로 적극적인 대안모색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탈핵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공적으로 핵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세계평화를 앞당기는 탈핵을 강력히 주장할 수 있는 기반도 아울러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하게 얻어진 결론은 탈핵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탈핵으로 가는 원칙을 정했는데 북한을 비롯한 핵보유국들의 억지력 기능논리는 억지인 것이다. 지구촌 전체를 살리고 자신과 자신의 국가와 국민을 살리는 길인 탈핵의 길에 나서야 한다.
4. 탈핵해야 생명(평화) 보존된다
원자(핵)력의 개발과 활용이 몸, 정신, 주위 생태를 있는 그대로의 생태, 평화를 유지하도록 돕느냐, 아니면 생태, 평화를 방해하느냐를 분석하고 판단해야 바람직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분열할 때 나오는 에너지가 대부분인데 원자에너지를 제외한 다른 화석 에너지는 비교적 에너지의 양도 적지만 그 피해도 적다. 하지만 원자에너지는 에너지의 양이 많아서 선호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지만 실수나 인공 또는 자연의 재해와 함께 발생하는 피해가 있을 경우 그 정도가 엄청나기 때문에 전 인류의 관심사요 화두가 된 것이다.
원전 폐기물에서 나오는 생명을 죽이는 방사선과 방사능 문제를 인류가 안전하게 해결하는 것이 아직까지는 인류의 영원한 화두이다. 안전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원전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원전을 안전하게 해체하여 탈핵으로 가야한다. 그러나 원전의 도입과 기술개발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으로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원전의 안전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원자(핵)력에 관한 집단 지성을 발휘하여 그것이 깨끗하지도, 안전하지도, 값싸지도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한 번 사고가 나서 오염이 되면 오염이 영향을 미치는 지역은 거의 전 지구라 할 만큼 방대하며, 피해가 지속되는 시간은 그 동위원소의 반감기만큼도 길게는 수백 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안전성은 이미 시스템의 문제, 인간의 능력과 방심 그리고 자연 재해와 테러, 전쟁 등에 아주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안전하지 않은 원전은 불교생명윤리의 원칙에 벗어나는 것이다. 바른 생활을 벗어나는 것이다. 바른 생활은 정견에 입각해서 이루어져야 하고 바른 말,바른 생활, 바른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불교도 개인 각자와 불교계에서 원자(핵)에 관한 바른 생활을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이 뒤따라야 한다. 우선 원자(핵)력을 이해하는 노력이 우선한다. 여러 가지 자료들과 불교생명윤리협회, 탈핵학교 등의 단체들과 연대해서 바르게 알아야 하고 가족과 친지 이웃들에게 전파해야 한다. 그리고 나와 우리의 안전을 추구하는데 나와 우리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실천해야 하며 필요한 만큼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
우리가 성공적으로 핵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세계평화를 앞당기는 탈핵을 강력히 주장할 수 있는 기반도 아울러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하게 얻어진 결론은 탈핵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탈핵으로 가는 원칙을 정했는데 북한을 비롯한 핵보유국들의 억지력 기능논리는 억지인 것이다. 지구촌 전체를 살리고 자신과 자신의 국가와 국민을 살리는 길인 탈핵의 길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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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불교생명윤리협회와 탈핵에너지교수협회 공동 연수회(8.7-9.직지사) 강연자료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