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충주시 직동 석종사. 동(洞)이라는 행정구역이 무색할 정도로 외진 곳에 자리 잡은 이곳은 몇 해 전만 해도 온통 능금 밭이었다. 그렇기에 쓰러져가는 오래된 고탑 하나에서 신라, 고려시대 이곳이 대가람이었다는 옛 명성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혜국 스님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분위기는 확 바뀌어갔다. 800평에서 시작된 불사가 불과 몇 년 만에 대웅전을 시작으로 금봉암, 오화각, 조실채, 금봉선원, 안양원, 소소원, 감로각, 천척루, 회명당, 원흥료, 범종루, 보월당 등 10여 채가 넘는 10만평의 대가람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혜국 스님의 말마따나 법문을 나갔다가 가락국수 한 그릇 사먹고 싶어도 참아가며 땅 한 평 더 산 노력의 결실이었고, 많은 불자들이 여법한 수행도량을 세워야겠다는 원력이 모인 결과였다.
현재 이곳 석종사는 눈 푸른 납자들과 재가 수행자들이 견성의 문고리를 틀어쥐기 위해 살과 뼈를 깎아내는 선불장(選佛場)이다. 많은 이들이 혜국 스님의 지도로 화두에 온 몸을 내던지는 가행정진과 용맹정진을 반복하며 '언어 이전의 언어(聲前一句)'를 깨치려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2007년 동안거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선승이자 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혜국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옛 어른들의 공부를 지도하던 얘기를 비롯해 불교계가 대의명분을 갖고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지동설도 천동설도 잘못됐다, 승가는 스님들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서울시를 봉헌하겠다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절대 안 된다, 간화선이 동네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위빠사나 수행의 한계가 있으며 결국은 화두로 깨칠 수밖에 없다는 등 거침없는 사자후를 토해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 전문
▷동안거 해제를 맞는 스님의 느낌은?
“해제 때마다 마음이 허전하다. 지금까지 수십 번도 넘게 했던 일인데. 이곳 금봉선원에는 방부를 들이기가 쉽지 않다. 이번 동안거 때 정진했던 스님들 대부분이 다음 철에도 이곳에서 정진했다고 방부를 들인 상태다.”
▷보통 절에서 재가자가 안거를 할 수 있도록 한 곳이 적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이렇게 재가자 선방을 운영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불교가 흥하라면 재가자들이 먼저 수행 좋다는 걸 알아야 한다. 재가자들이 수행을 외면하면 다음 생에는 선방이 빈다. 저 사람들이 죽어 다음 생에 선방 차지하려고 오기 때문이다. 승가라고 하는 것은 스님들만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자유를 찾아 나선 사람들을 승가라 했고, 그것이 바로 비구, 비구니, 남자신도, 여자신도 사부대중이었다. 따라서 스님들이 재가자들을 지도하는 것은 승가를 위한 의무다.”
호통 치고 욕하는 것도 지극한 자비
▷스님께서는 수좌 스님들은 물론 일반 재가 수행자들에게도 대단히 엄격하고 호통도 많이 치시는 것 같다. 이유가 있으신가?
“옛날 성철 큰스님이나 전강 조실 스님 모시고 살 때는 더했다. 지금 사회나 절이나 싫은 소리를 안 한다. 인심을 잃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이 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속에서 그릇이 커진다. 나는 지금도 영어를 잘하고 수학을 잘하고 그런 것이 실력이 아니라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그릇의 넓이가 실력이라고 본다. 특히 참선은 스승이 욕을 할 때 그 욕을 못 받아들이면 그릇을 못 키운다. 처음에 호통을 듣고 서운할 수도 있지만 지나면 다시는 그런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는다. 스승 또한 평상시 욕을 해 줄 수 있어야 공부가 빗나가 정말 호통이 필요할 때에도 해 줄 수 있다. 자비심과 부처님 은혜 갚는다는 생각이 없으면 어렵다. 수행인들의 인욕을 위해서라도 당분간 내가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현재 한국 간화선에는 점검이 없다는 비판이 많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점검을 해주시나?
“(죽비를 꺼내 보이며) 이것 좀 봐라. 죽비가 조각조각 나지 않았나. 점검 받으러 온 사람을 두드려서 이렇게 된 거다. 나는 이런 걸로 때리지만 성철 큰스님은 물푸레 회초리로 몸이든 얼굴이든 사정을 보지 않았다. 그 때는 억울하고 이럴 수가 있는가 싶은데 나중에는 그게 자비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구산 스님도 주장자로 우리는 물론 외국인 제자들도 그렇게 팼다. 유명한 버클리대 로버트 버스웰 교수도 (송광사에서 정진할 때) 맞고 나와서 하는 소리가 ‘오늘 지금 자기를 두드려 팬 것만으로도 미국 같으면 징역 9년이다’라고 했을 정도다. 잘못이 있거나 대답을 못하면 나도 사정없이 때린다. 그건 자비다.”
▷반발하는 분들은 없나?
“예전에 서옹 방장 스님이 장군죽비로 때리니까 어떤 스님이 장군죽비를 빼앗아 분질러 버렸다. 그런 다음부터 다시는 점검을 해주지 않았다. 힘으로는 안 되니까. 내가 47년의 세월을 부처님께 고스란히 바쳤는데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스님은 성철 스님도 구산 스님도 아니고 지월 스님이었다. 스님께서는 해인사 유나를 오랫동안 맡으셨는데 누가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장군죽비로 때리지 않고 그걸 허리 뒤에다 세워놓고 가만히 고개를 세워놓고 가시고는 했다. 그런데 성철 스님 시봉을 했던 스님이 있었다. 하루는 그 스님이 벌떡 일어나더니만 (지월 스님의) 장군죽비를 확 분질러 버렸다. 그러니 그 많은 스님들 앞에서 어른 스님 체면이 말이 아니지 않은가. 내가 너무나 속상해서 그 스님하고 대판 싸웠다. 나는 점검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다음날 (지월 스님이 선방에) 안 오실 줄 알았는데 어디 가서 장군죽비를 구해왔는지 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서 나는 참으로 많을 것을 배웠다. 일어나서 장군죽비를 분지르거나 말거나 일어나서 또 하고 또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저게 어쩌면 어른의 모습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난 그게 아니다. 점검을 받으러 오면 이렇게 죽비가 깨지도록 두드린다. (이런 게 싫어) 그냥 가면 점검이 안 된다. 평소 욕을 듣던 사람은 이렇게 두드려도 그냥 받아들이지만 욕을 듣지 않은 사람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점검을 해주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받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점검은 안 해주는 것이 아니라 안 받고 있다는 말이다.”
생각 끊어진 자리 가려면 역시 ‘화두’
|
|
<사진설명>조각난 죽비를 들어보이는 혜국 스님. 다음 철에는 죽비 2개를 더 마련할 것이라고 스님은 말했다. |
|
▷요즘은 간화선 이외에도 위빠사나 등 많은 수행법이 소개되고 있다. 여러 수행법들이 모두 수승하다고 하는데 처음 수행을 접하는 재가자들의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나?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위빠사나 하는 미얀마를 직접 가봤고 스리랑카 캔디에 가서도 20일 수련 코스를 거쳐봤다. 그랬는데 나는 화두참선법에 익어서 그런지 오히려 화두참선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더욱 크게 와 닿았다. 위빠사나가 잘못됐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위빠사나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위빠사나에서는 관찰을 하라고 한다. 예를 들어 내 손이 죽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죽비가 손에 닿았다, 닿은 촉감이 약간 싸늘하다, 싸늘하다가 약간 따뜻해지고 있다, 그것이 올라오고 있다, 다시 내려가고 있다. 이렇듯 위빠사나는 내가 하는 모든 행위를 관찰하는 건데 그 생각이 일어난 다음 것을 관찰하는 것이냐, 아니면 생각이 일어나기 전 것을 관찰하는 것이냐를 놓고 볼 때 (위빠사나는) 생각이 일어난 다음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내가 잡는다, 잡았다, 싸늘하다는 것은 일초 전이라. 하지만 생각을 따라가는 한 생각은 끊어지질 않는다. 그 사람들도 인정한다. 그러면 부처님 당시에는 어떻게 했겠는가. 이 게 제법무아까지 간 거다. 제행무상, 제법무아까지 갔기 때문에 열반적정이지 제법무아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반면에 이 참선은 생각 끊어진 다음 것을 바로 들어가는 거고 이것은 그걸 관찰해서 익은 다음에 제법무아, 생각이 없는 자리, 생각이 끊어진 무심의 자리까지 가는 것이다. 따라서 언젠가는 생각이 끊어져야만 깨닫고,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 가려면 생각이 끊어져야 하는 화두를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기까지 가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는지 다 그쪽(위빠사나)으로 간다. 잘못된 법은 아니다. 그러나 깨달음에는 반드시 생각 끊어진 자리에 가야 하기 때문에 그 선에서만 멈추면 난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 건 꼭 내가 옳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한다는 얘기다.”
▷조계종이 간화선의 사회화, 세계화, 대중화를 추진하는데 간화선이 이렇게 되기 위한 방안이 있다면?
“여러분은 지동설 믿는가. 나는 지동설 안 믿는다. 나도 과학 배우고 지리학 배운 사람이지만 지동설을 안 믿는다.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천동설을 얘기했다. 서양에서도 갈릴레오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가 나오기 전까지는 천동설이었다. 나는 천동설도 아니고 지동설도 아니고 제행무상에 의해 전체가 돌아가고 있다고 본다. 이것은 저것을 움직이고 저것은 이것을 움직이고, 이것은 저것에 의지해 있고 저것은 이것에 의지해 있어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하나도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달은 지구에 묶여서 지구의 힘에 의해 돌아가고 지구는 태양에 묶여서 돌아가고 있고 태양은 더 큰 은하계에 묶여서 돌아가고 있으니까 제행무상이고 연기인 것이다. 간화선은 땅덩어리 돌아가는 것을 볼 것이 아니라 땅덩어리가 왜 돌아가는가 하는 근본으로 돌아갈 것을 말한다. 근본은 아예 놔두고 천동설, 지동설 이렇게 못 박아버린 서구문명이 간화선을 세계화하고 일반화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현대 교육 방법이 우리 정신문명으로는 가지 못하도록 바리게이트를 쳐 놓은 것이 현대 교육이다. 학교 다닐 때 배웠던 벡터, 삼각함수를 지금도 기억하나?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머리에 기억했다가 잊어버리는 것이다. 학교 교육이 대부분 그렇다. 기억했다가 잊어버리는 그런 교육에 사람을 평생 밀어 넣는데 간화선이 세계화하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그러나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어렵다고 안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화선 세계화 하고 일상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대 교육의 부조리를 지적할 수 있는 지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현대 교육의 맹점을 지적하려면 자기가 직접 자기내면 세계를 직접 관찰해봐야 한다. 이 몸뚱이는 이 몸뚱이 맘대로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나를 움직이는 나가 분명히 있구나. 그걸 알려면 참선을 직접 해봐야지 체험을 안 거치고 귀로 들은 것으로는 결코 안 된다.”
간화선 함부로 비판하는 자는 되먹지 못한 놈
▷오조 홍인대사에게는 수많은 제자가 있었지만 오조께서는 ‘나는 육조 혜능 하나 건졌다’고 말씀을 하셨다는데 그 만큼 깨치기가 어렵다는 말로 이해된다. 그러면 이렇게 깨닫기 어려운 간화선의 대중화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홍인 스님뿐 아니라 마조 스님이고 누구고 그런 말씀을 많이들 했는데, 말에 다 속고 있는 것이다. 참선은 한 시간 하면 한 시간만큼 대중화되고 하루 하면 하루만큼 대중화 된다. ‘내가 너 하나 건졌다’는 말에는 심오한 철학이 들어있다. 세상의 학문은 글자가 표현하는 것 밖에 못 본다. 말, 글이라는 함정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말과 글이 만일 제도할 수 있다면 세계 유수 대학의 많은 책들은 무엇이고 또 그렇게 계속 나오는 이유가 없다. 책은 인생 문제 해결 못했다. 그러나 (참선은) 한 시간 한 사람은 한 시간 해결해 왔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간화선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인정하는 것을 정작 우리가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들 지나치게 외국 것 좋아한다. 영어 못하면 사람 취급 안한다. 나중에는 중국어를 몰라도 사람 취급 못 받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것 소중한 줄을 알아야 한다. 간화선법, 하루 하면 하루 깨닫는다. 이것은 몰라서 그렇지 엄청난 일이다. 알지도 못하면서 간화선을 함부로 비판하는데 그거 되먹지 못하는 놈들이다. 우리나라 보물 중의 보물인 간화선을 보호해 줘도 부족한데 간화선을 동네북으로 만들고 있다.”
▷교구본사 주지 스님이 구속되고 사찰의 공금횡령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이런 문제가 왜 생기고 어떻게 해야 없어질 수 있을까?
“그건 부끄러워서 말 못한다. 그걸 변명하는 것은 수행자가 아니다. 다만 어째서 거기까지 갔는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바로 내 잘못이다.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내가 잘 사는 것으로 보충을 해 볼까 생각해야 한다.”
▷올해 대통령 선거가 있다. 불교계에서도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과 어느 한 쪽을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이 갈리고 있다. 스님께선 이번 대선에서 불교계가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보나?
“부처님 당시 인도에는 율장이 있었다. 여기에는 걸을 때 손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가 다섯 개나 분류된다. 이렇듯 사소하고 우습게 보이는 것이 많으니까 정작 중요한 것도 우습게 여기게 됐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청규로 그(계율) 정신을 살려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게 없었다. 율장대로라면 불교계가 대선에는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나 외도들은 불교가 망할 일이 있으면 손뼉치고 일어나 춤을 출 사람들이니까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동안에는 나는 적당하게 대의명분을 가지고 관여해야 한다. 국회에서 모든 종교정책이 좌지우지되고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부처님 법을 펴느냐 못 펴느냐가 결정되기에 나는 개입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판치는 동안에는 불교도 정치 참여해야
|
|
<사진설명>석종사 금봉선원에서 동안거를 마치고 떠나는 스님들. |
|
▷그럼 그 기준은 무엇인가?
“첫째 불교인이냐 기독교인이냐 하는 것보다 저 사람이 대통령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를 봐야 한다. 그러나 서울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망발을 하는 사람은 나는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이다, 절대로. 여기 온다는 것도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거꾸로 불자라도 만일 이 서울을 부처님께 바친다고 한다면 그 사람도 절대 안 된다. 대통령은 전체 국민의 대통령이다. 둘째는 이왕이면 그런 사람이 불자라면 더 좋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되면 불자가 아니라 대통령으로 살아야 한다. 서울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그런 망발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선에서는 ‘살불살조(殺佛殺祖)’라고 해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달마를 만나면 달마를 죽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일부 선승 중에는 신앙을 가볍게 보는 경향도 없지 않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관음신앙 등 염불을 중요시하고 어떤 수좌라도 예불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은 나도 자주 쓰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은 부처님을 최대한 살리는 길이다. 부처라는 아집, 부처라야 좋고 중생은 나쁘다는 망상을 깨뜨리기 전에 부처는 살아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부처를 최대한 받들고 조사 스님을 최대한 대접하는 말이다. 즉 그것은 신앙과 직결된 말로 부처님과 조사 스님께 무수한 절을 올려야 한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좋던 말이 조선시대 와서 배불정책로 인해 의미가 바뀐 것이 많다. 나한산의 나한을 뒤집어서 한라산, 아미리의 아미를 뒤집어서 미아리, 10년 공부 나무아미타불, 나도 10년 공부하면 아미타불처럼 된다는 것을 뒤집어서 10년 공부해봐야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식으로 바뀌었다. 살불살조도 마찬가지다. 이 말은 지극한 신심의 표현이다.”
선 것은 익게 하고 익은 것은 설게 하는 게 공부의 요체
▷수행자들에게 평소 강조하시는 말씀이 있다면? 또 힘들 때 어떻게 극복하라고 말씀하시나?
“‘선 것은 익게 하고 익은 것은 설게 하라(生處放敎熟 熟處放敎生)’라는 말을 자주 한다. 참선공부가 어려운 건 설기 때문에 그렇고 남의 말 하고 잡담하고 잠 많이 자는 것은 익어서 쉽다. 그렇기에 익은 것에는 시간을 줄이고 선 것에 시간을 늘려야 한다. 올라가는 길은 어렵다. 그러나 뿌듯한 보람이 따르고 내려가는 길은 쉽다. 그러나 한 맺힌 후회가 따른다. 참선이 나와 인연이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익혀 놓지 못해서 그럴 뿐이다. 그리고 언제가 익혀야 한다면 지금 바로 익혀야 한다. 그러려면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해야 한다. 가는 곳마다 어려움을 만나면 그것을 익혀 내 걸로 만들어야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이 세상이 썩었고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세상은 썩은 일이 없다. 신라 때 하늘이나 고려 때 하늘이나 지금 하늘이나 그대로다. 썩은 건 우리 마음이고 썩었다고 하는 그 마음이 썩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을 바꾸면 세상은 달라지지만 내 마음은 나두고 세상을 바꾸려면 영원히 가도 안 바뀐다.”
첫댓글 대통령은 전체 국민의 대통령이다... 서울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그런 망발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