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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11일 월요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그 집에 들어갈 때에는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릴 만하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내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평화는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마태오 10,7-13)
As you enter a house, wish it peace.
If the house is worthy, let your peace come upon it;
if not, let your peace return to you.
말씀의 초대
스테파노 순교 후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제자들을 매우 심하게 박해하여 흩어졌던 사람들이 안티오키아에서 복음을 전하자 수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된다. 이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는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파견한다. 안티오키아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를 때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고 하신다. 오로지 주님께 의탁하며 가는 곳마다 평화를 빌어 주고 하늘 나라를 선포하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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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등산을 준비할 때면 늘 어떻게 하면 짐을 줄일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산이 높고 산행 기간이 길수록 이런 고민은 더 깊어집니다. 힘든 산행일수록 목적하는 산을 잘 오르려면 무엇보다 등짐 무게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성 산악인 남난희 씨는 한겨울에 태백산맥을 혼자 종주할 때 칫솔의 손잡이까지도 잘라냈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험난하고 오랜 산행을 할 때는 작은 무게도 견뎌 내기 어렵습니다.
영성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데 가장 큰 적은 많은 것을 안고 살 때입니다. 가진 것이 많고 얽힌 것이 복잡해질수록 우리의 영성 생활은 거꾸로 갑니다. 하느님을 향한 오롯한 마음이 없어지고 마음이 산란해지고 맙니다.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우리 인간의 영혼은 잡다한 피조물에 포로가 되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영혼이 세상의 온갖 무게에 짓눌려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우리 영혼에 무엇을 자꾸 덧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영혼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온갖 불순물들을 떼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더 갖고, 더 많은 인연을 만들어야 삶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버리고 삶을 단순화시켜야 중심이 잡히고 평화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빈 몸으로 떠나라고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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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그러시면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많이 가지면 망설임도 많아집니다. 이것도 아닌 듯하고 저것도 아닌 듯합니다. 가진 것이 적으면 분명 유혹도 적어집니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으면 어떻게 활동할 수 있을는지요? 사도들에게는 주님께서 주신 능력이 있었습니다. 병자를 낫게 하고 마귀를 물리치는 능력입니다. 기적의 힘과 함께 살았기에 그들은 버틸 수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으면’ 불안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을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 봅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서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유롭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삶이 ‘자유로운 삶’인지 잘 모릅니다. 스승님의 말씀에서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이라고 묵상해 봅니다.
하늘 나라를 선포하려면 먼저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질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사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소유’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만 언제나 자유롭게 살려는 자세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 복음의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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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는 하느님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권능과 사랑을 알리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없기에 주님의 힘이 함께하십니다. 온전히 비어 있기에 주님께서 채워 주십니다.
누구나 자신이 체험한 일을 말할 때에는 힘이 생깁니다. 또한 체험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을 더 감동하게 만듭니다. 진실한 이야기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만난 하느님을 전해야 상대방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그랬습니다. 자신들이 체험한 하느님을 전하려 했으므로 성령께서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믿음을 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기쁘게 하지 않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자신은 긴가민가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확신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선교에 앞서 신앙생활을 기쁘게 해 나가기로 다짐합시다. 너무 많이 가지려는 마음 때문에 믿음의 기쁨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욕심에서 조금만 자유로워져도 성령께서 함께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차를 바꾸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설문 조사와 결과를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요.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3위는 아이들이 커서, 2위는 돈을 많이 벌어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1위는 무엇일까요? 대망의 1위는 옆집이 사서 차를 바꾼다고 하네요.
남들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들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을 놓치면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의 부족함을 자주 체험하게 됩니다.
요즘 기름 값이 많이 인상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기름 값에 유난히 관심을 갖습니다. 기왕이면 기름 값이 싼 주유소를 찾아다닙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있는 답동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주유를 하고 온 적도 있었지요. 그런데 문득 그 차이가 얼마나 날까 싶었습니다. 주요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많이 차이 나봐야 리터 당 3~40원입니다. 그렇다면 제 차로 따지면 기껏 해봐야 1~2,000원 차이 나는 것인데, 이것 때문에 시간과 힘을 쏟고 있더라는 것이지요.
또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저는 책을 많이 사서 봅니다. 요즘 책값이 보통 만원 넘습니다. 비싸서 주저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만원이면 요즘 한 끼 식사 값 정도 되지요(잘 먹을 경우). 한 끼 식사 값과 이 책을 쓰기까지 노력한 작가의 정성을 비교한다면, 만원이면 무척 싸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중요한 것을 향해 나아가는 나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을 보기 때문에, 특히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중요한 것을 쫓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할 것을 명하십니다. 그러면서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낼 수 있도록 해주시지요. 제자들을 통해서 이러한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어떠할까 싶습니다. 아마 너무나도 기쁘고 고마워서, 어떠한 대가라도 치루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받아서는 안 됨을,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시지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제자들도 나름 노력을 했으니, 당연한 대가를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대가를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받았음을 이야기하시지요. 숨을 쉬고 있으며, 세상 안에서 기쁨을 체험하는 것, 그 밖의 모든 것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거저 받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거저 받은 은총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지금 내가 행한 사랑의 실천에 대해 대가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과 행동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처럼 거저 줄 수 있을 때, 우리들은 주님으로부터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거저 받게 될 것입니다.
조그마한 친절과 한마디 사랑의 말이 저 위의 하늘나라처럼 이 땅을 즐거운 곳으로 만든다.(J.F.카네이)
부르심과 은총
-안승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돈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라는 사명을 주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에게 ‘무소유’를 당부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또 그들을 사도로 파견하실 때에는 언제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들과 함께 일하심을 체험하게 해 주십니다. 그 어떤 인간적인 재능이나 준비로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끄심과 도움, 섭리로 우리는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마태 10,10)는 말씀처럼,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공동체를 통해서 마련해 주시는 주님 은총을 우리는
체험하면서 살아갑니다. 세상적인 소유가 아닌 주님을 우리 중심에 모시고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떠올리며 우리 모두를 불러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묵상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믿음
- 이자희수녀-
프랑스 농촌지역을 다니며 전교하는 한 선교단체에게 빈첸시오 성인은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우리가 전교를 나가면 어디서 묵을 것인지 또는 무엇을 할 것인지 전혀 모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자주 우리 계획을 뒤집어놓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에 적응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뿐 아니라 피정하는 신자들, 신학교 학생들, 전과자와 죄수들에 대한 봉사 속에서도 극기가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 만일 우리가 극기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10절)
우리가 어디로 선교를 가든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선교를 하는 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때 그때 마련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성 빈첸시오도 “하느님께서 자주 우리의 계획을 뒤집어 놓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에 적응해야 한다.” 고 했습니다.
성인은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시는 사랑의 원천이신 예수님께 전적인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난한 사람과 동일하게 여기셨던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었던 성 빈첸시오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면 저절로 하느님을 신뢰하게 되고, 믿음이 생겨나 모든 일을 그분께 맡기게 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성 빈첸시오처럼 기도와 함께 일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참 사랑은....
-김찬선신부-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착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소극적으로는 남에게 나쁜 짓 하지 않는 사람이요,
적극적으로는 남에게 선을 끼치는 사람이겠지요.
제 생각에 요즘처럼 악한 세상에 이런 사람 많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런 사람은 꽤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에게 복을 빌어주는 착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미운 짓을 골라서 하고,
배은망덕하기까지 하여 저주를 퍼부어도 시원치 않을 사람에게
그래도 복을 빌어주는 사람,
어떤 면에서 바보 같은 사람 말입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 잘 해주는 것,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정말 착한 사람인지,
누군가를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인지는
멀리 있는 사람, 나와 무관한 사람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가까이에서 나에게 아주 고약한 짓을 하는 그에게
내가 복을 빌어주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르나바가 착한 사람이라고 할 때
아마 이런 의미에서 착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을 얘기하는 것은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착하고 좋은 사람을 넘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으로서
복을 빌어줄 뿐 아니라 복음을 가져다 준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제가 새터민들을 위해 일을 하면서 성찰하는 것은,
정말 새터민들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입니다.
그들에게 장학금 얼마를 지급하는 것이 진정 그들을 위한 것이고,
이것이 충분하고도 궁극적인 것인가?
도와주면 무조건 그냥 순수하게 도와야지
조금 도와주면서 믿음을 강요한다고 개신교를 비판하는 소리도 있는데,
그렇다면 믿음생활을 권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바르나바처럼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면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돈보다 더 좋은 것이 신앙이고 복음이라는 확신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돈보다도 하느님을 알게 하려는 하느님 사랑의 이웃 사랑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가 그들을 돕는 궁극적인 목적이고,
그것이 정말 그들을 위한 것이라는 목적의식 말입니다.
그리스도인, 관대하게 포용하는 사람들
-이준석 신부-
바르나바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함께 이방 세계에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한
파트너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타협을 모르는 곧은 성품의 소유자였다면
바르나바 사도는 관대하고 개방적인 분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울(바오로)에 대해 거부감을 지니고 있을 때
그를 받아들인 사람이 바르나바입니다. 이 바오로 사도와 함께 이방인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유다교식 관습, 이를테면 ‘할례’를
강요하던 몇몇 유다계 그리스도교 형제들에게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촉구한 이도 바르나바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들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보인 베드로 사도를 비판했을 때에도 베드로 사도를 감싼 이가
바르나바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첫 전도여행에서 중도에 전도를 포기한 요한
마르코를 비겁한 사람이라 여겨 그를 두 번째 전도여행에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했을 때 마르코를 자신의 여정에 동행시킨 이도 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복음 선포에는 불같은
열정과 과감한 결단력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넓게 포용하는 너그러운 마음,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도 필요합니다. 이것이 그의 가르침입니다.
거룩한 동행
- 임순연 수녀-
거룩한 동행
우리는 매일 길을 나섭니다.
길 위에서 여러 가지 상황과 사람을 만납니다.
때로 앓는 이를 만나고,
때로 우리가 앓기도 하면서 길을 갑니다.
길을 가는 목적은 하느님 나라를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길은 하느님께로 뻗어 있고
길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향해 있습니다.
길 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걷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게 거저 주어진 신앙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닌 것과 내가 아는 것과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조용히 걷지만 큰 울림을 지니며 선포합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나의 하느님은 당신도 사랑하십니다.
누가 먼저 줄까?
-김찬선신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카자흐스탄에 선교 나가 계시는 형제님께서 여러 차례 하신 말씀.
그곳에서 작은 병원과 빈민 식당을 하시는데
빈민 식당 옆에 온실을 만들어 상추를 비롯해 채소를 가꾸신답니다.
그곳 한인 신자들에게 선행을 하는 기회도 주고
빈민 식당 운영에 보탬도 되게 채소를 싼값에 팔았답니다.
그러다 너무 번거롭기도 하고 모양새도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아
어느 날부터 그냥 드렸답니다.
그랬더니 한인 신자들이 팔 때보다 훨씬 더 많이 성금을 내시더랍니다.
작은 사랑의 기적이고 사랑의 이치입니다.
주고받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거래 형태와 사랑의 형태입니다.
그런데 어떠합니까?
거래는 정확히, 사랑은 후하게 아닙니까?
이것이 우리의 심리입니다.
그리고 거래는 주고받은 것이 물건뿐인데
사랑은 물건에 더 하여 사랑까지 주고받습니다.
받을 때 물건에 사랑을 더 하여 받았기에
줄 때도 물건에 사랑을 더 하여 줍니다.
누가 먼저 이렇게 거저 주기만 하면
아무도 그냥 입을 싹 닦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저의 믿음입니다.
받는 사람도 반드시 사랑을 더 하여 되돌려줍니다.
그런데 누가 먼저 이렇게 거저 줄까요?
먼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은 사람.
먼저 사랑을 받아 먼저 이 사랑의 이치를 안 사람입니다.
먼저 이 사랑의 이치를 알아 먼저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이 너무 충만하여 다른 사람에게 나누지 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바르나바 사도와 같은 사람입니다.
오늘도 제 주변에서 저는 이런 사람을 많이 봅니다.
남쪽 사람이건 북쪽 사람이건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크게든 적게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은총의 통로
-전삼용신부-
요즘 ‘노다매 깐따빌레’라는 일본 드라마를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지휘를 하고 싶어 하는 한 천재 피아니스트와 그 남자를 좋아하는 역시 천재적 소질을 지닌 피아니스트지만 어렸을 때의 아픈 기억으로 자신의 소질을 개발하지 못하고 평범하게 사는 노다매라는 여자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어떤 사람도 사랑과 관계를 벗어나서는 온전해 질 수 없다는 것을 주제로 내용이 전개됩니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천재 지휘자는 천재인 만큼 남들이 잘하지 못하는 것을 그냥 넘어가지 못합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너무 요구만 하여서 단원들이 갈라지고 좋은 음악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도 뭐라 해서 단원 한 명이 울며 뛰쳐나갑니다. 이것을 본 주인공의 스승은 단원 한 명을 울렸기 때문에 지휘할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 이전에 그들 한명 한명을 존경하고 관심을 가져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음악 이전에 사람을 존경해야 하고 내가 먼저 존경하면 그것이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교훈을 남깁니다.
그 이후로 주인공은 조금씩 바뀝니다. 불완전 자체인 노다매를 이해하려고 하면서부터 다른 이들의 불완전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제대로 연주도 못하는 가난한 학생으로부터 한명 한명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이해합니다. 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연주해 달라고 독촉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연주하도록 하고 음악을 즐기자고 합니다. 이 때 비로소 아름다운 화음이 나오게 됩니다. 음악 안에 그들의 이해와 우정이 녹아들어 간 것입니다. 이 음악은 듣는 모든 다른 사람들도 감동시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사제로서의 제 자신을 뒤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본당에서 볼 때도 단체들이 화합도 안 되고 일처리도 답답하여 좀 더 잘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가졌었습니다. 어쩌면 겉으로는 주일학교나 청년회를 활성화하여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겠다는 마음이 있었겠지만, 무의식 속에는 나 자신의 만족감이나 다른 사람의 좋은 평가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일꾼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능력을 뽐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고 가지고 있는 능력들은 양들을 잘 이끌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거저로 주신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나의 능력으로 그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양들을 잘 이끌도록 나에게 능력까지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갈릴래아 호수는 물을 계속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물을 품고 있지 않고 계속 요르단 강을 통해 내보냅니다. 물이 이렇게 흐르니 호수는 썩지 않고 물고기와 생명이 풍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해는 받아들이기만 하고 내보내지는 않으니 그 안에서 썩고 온통 소금으로 절여져서 어떤 생명도 살지 못하고 주위의 생명도 자라나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의 사도들은 은총의 통로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은총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은총의 통로역할을 하지 않고 자신 안에 쌓아놓으려 한다면 그 은총은 오히려 해가 됩니다. 은총은 흐르기 때문에 내 안에도 항상 새로운 은총으로 다시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도구는 도구로써 쓰여지는 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해해야 합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주님의 제자는 자신을 위해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고 모든 것을 주는 사람이기에 예수님은 아무 것도 지니고 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미래를 걱정하면 돈을 모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저는 아직도 내어 놓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와 물 한 방울까지도 내어 놓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피 한 방울까지 내어놓아 가난해져야 합니다. 숨을 내 쉬어야 다시 들이 쉴 수 있는 것처럼 내 주어야 내 안에 새로운 것이 채워지게 됩니다. 물론 그런 의도로 내어놓아서는 안 되겠지만, 결국 내가 내어 놓는 것으로 다른 이들도 풍성해 질 것이고, 우리가 주님의 은총으로 다시 주님께 영광을 드리듯, 우리가 내어 놓은 것이 다시 우리에게 축복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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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저 사는 인생
-오상선신부-
<너희는 거저받았으니 거저주어라.>
바르나바 사도 축일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선교사적 자세는 바로 이것이다.
선교사는 자신의 공로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무상의 선물과 은총을 받았음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것을 나누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바르나바 사도는
그래서 착한 사람이고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이런 착한 심성과 믿음과 영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거저받았음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어떤가?
내 노력의 결실로서 지금의 내가 있다고 여기는가,
아니면 오로지 그분의 은총으로
오늘의 내가 있다고 여기는가?
성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기도한다.
"오로지 당신의 은총으로만
지존하신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바르나바의 이러한 자세는
바오로를 타르수스에서 데려와서
안티오키아 복음화의 공동사목자로 키울 뿐만 아니라
안티오키아 신자들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게 만들었다.
이러한 큰 성과에 연연해 하지 않고
주님께서 파견하시는 다른 곳으로
<거저 주기 위해> 기꺼이 또 순례의 길을 떠난다.
이러한 자세가
오늘날 수도자, 선교사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아닐까?
함께 일할 줄 알고
거저 받았으니 거저 베풀줄 알고
성과에 연연해 하지 않고
언제나 순례의 길을 의연히 떠날 줄 아는
착하고 믿음과 영으로 충만한 그런 사람이 되는 것...
사도 바르나바,
저희 수도자들을 위해 빌으소서.
선교사들을 위해 빌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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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나바 축일
-김찬선신부-
바르나바는 열 두 사도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바오로와 마찬가지로 복음 선포에 열정적이었기에 사도라 불립니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서 본명이 요셉인 바르나바는
다른 사람을 너무도 잘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인지
‘바르나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받습니다.
위로를 잘 한다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굳이 능력이라고 한다면 동감하는 능력일 것입니다.
바르나바는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은 다음
소유하고 있던 밭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의 발치에 놓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고
하느님으로 충분한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일이고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을 오늘 입당송과 사도행전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착한 사람이라고 바르나바에 대해 얘기합니다.
사랑과 자선은 넘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충만하지 않으면 억지로 하려 해도 아까워하며 시늉만 낼 것입니다.
그러나 충만함으로 바르나바가 나눠준 것은 돈만이 아닙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는 것도 착한 일이지만
더 훌륭한 일은 복음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리는 복음의 참 행복을 다른 사람들도 누리게 하기 위해
바르나바는 바오로와 함께 열정적으로 선교하였습니다.
이러한 바르나바였지만 흠 없이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약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두려워 베드로처럼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 바르나바였습니다.
그리고 사촌 마르코를 선교에 동행케 하는 것을 놓고
바오로와 심하게 다투고 갈라져서 선교를 한 바르나바였습니다.
감정이 격해지면
감정조차 죽이지 못하는(사도15,39) 약한 사람이었지만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바르나바였습니다(사도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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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사도 바르나바
-김선오 신부-
오늘은 바르나바 사도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그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르나바는
바오로가 회심한 것을 알고 그에게 사도가 될 기회를 달라고 예루살렘 교회에
간청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바오로에 대한 ‘선입관’을 깨고 그가
회심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하느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없는 장점을 바오로가 갖고 있다고 판단하고는 바오로를 만나러 멀리
타르수스로 찾아가서 함께 일하자고 청할 정도로 적극적이고 겸손한 사람이
었습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와 힘을 합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공식 명칭을
처음으로 생기게 할 만큼 안티오키아를 큰 공동체로 만들어 놓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당연히 따르는 사람도 많았겠지만 그는 주님께서 원하신다고 하니
두말없이 어디론가 떠났습니다. 그는 제자인 우리에게 삶으로써 참된 제자상을
가르쳐줍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예수님을 따르고 증거해야 하는 소명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는 오늘 사람에 대한 선입관에서 자유로운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인가?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그분께서 원하신다면’ 다 놓고 ‘떠날 수 있는가?’를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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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나누는 일
-박혜원-
산에 미친 사람이 있다. 그분은 틈만 나면 여행을 떠난다. 길에 나설 때는 눈썹조차 떼어놓고 싶다고 한다. 여행 중에는 지니고 있는 물건이 짐스럽다. 그래서 여행길엔 가진 것을 나누게 된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오는 순간, 우리는 다시 치졸할 정도로 내 것을 움켜쥐고 쌓아두려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하다. 그런데 이런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아름다운 글을 본 적이 있다.
“저도 무언가 드리고 싶은데 별로 가진 것이 없습니다. 무얼 내놓을까 궁리하다가 가장 쉬운 것을 생각했습니다. 제가 가끔 돈 백만 원이 없어 가슴 졸이며 애태울 때가 있었는데 혹시 급하게 그 정도의 돈이 필요하신 분이 있으면 빌려드리겠습니다. 빌려드리긴 하겠지만 갚으라는 말씀은 한 번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드리는 것이니까요.”
‘주식회사 드림’이라는 카페에 실린 글이다. 자본의 힘으로 움직이는 주식(株式)회사가 아니라, 주님의 방식으로 운영되는 주식(主式)회사다. ‘드림’을 주제로 삼아, 지금 내게 맡겨진 것을 어떻게 하면 본디 주인에게 잘 돌려드릴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고, 그 생각을 실천하고자 하는 회사다. 그저 나누는 모임이다. 책도 나누고 물건도 나누고 돈도 나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댓글 중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의 글이다.
“돌던 돈이 멈추면 그땐 제가 내놓을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누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속된 우리로서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나의 것이라고는 전혀 없이 떠돌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소유에 대한 꿈조차 꿀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뒤돌아보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그때가 진정 자유로웠던 것 같다. 아예 ‘내 것은 없다.’는 생각 자체가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를 누리게 했다.
인생은 잠시 머물렀다 가는 여행길인 것을…. 그럼에도 우리 인간은 변화하는 덧없는 것에서 영원한 것을 찾으려 든다. 그러나 이 땅 위에 내 것은 없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주인일 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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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저는 지금 가톨릭 신문의 ‘신앙상담’ 코너를 격주로 담당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 스스로도 남의 고민을 들어주고 풀어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보다 연륜도 많으시고, 학식이 높은 지혜로운 신부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이 제안을 받았을 때, 말도 되지 않는다면서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그 코너를 부탁한 기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더군요. 2주에 한번만 글을 쓰면 되고, 제 스타일대로 일상의 이야기를 가지고 부담 없이 글을 써 나가면 된다는 말에 ‘그럼 빠른 시일 내에 다른 훌륭한 신부님으로 얼른 바꿔주세요’라는 조건을 걸고서 ‘신앙상담’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신앙상담을 작년 10월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8개월째 접어드는군요. 아마 많은 이들이 제가 다른 이의 상담을 해줌으로 인해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신앙상담 글을 작성하면서 제가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이의 고민을 풀어주는 코너인데, 제가 미처 몰랐던 것들 그리고 심지어는 저의 고민까지도 해결될 때가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신문에 나오는 것이니까 보통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제 생각만 적을 수도 없는 것이고, 공적으로 글을 써야 하는 관계로 각종 서적을 보면서 공부를 한 뒤에야 글을 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남을 가르칠 때 가장 많이 배운다고 하지요. 정말로 맞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이 ‘신앙상담’을 통해서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많이 고민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저의 체험을 통해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한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파견한 것 같지만, 그보다는 제자들의 발전을 위해서 그래서 당신께서 없을 때에도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시는 것이 아닐까요?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를 어디를 보낼 때이면 이것저것 챙겨주지요. 그곳에 가서 고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무나도 부족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할 때 무척이나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돈, 보따리, 옷, 신발, 지팡이 등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떠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제자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즉, 그들이 하루빨리 당신을 철저히 따르는 제자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을 주님께서는 세상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래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사람들에게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과정 안에서 우리들은 때로는 각종 어려움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 대한 회의도 생길 수 있고,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에 대한 큰 유혹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이겨냈을 때, 주님을 더욱 더 깊이 느낄 수 있고 그래서 주님께 더욱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그 과정 안에서 더 많은 은총을 받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세상에 주님의 소식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오늘을 만드세요.
사람들에게 직,간접으로 주님을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해보세요.
빠다킹신부
하늘 나라 선포
-박영봉 신부-
모든 사람이 하늘 나라로 들어가도록 불림을 받았습니다.
이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나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당신의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마태 5,3)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고 하시며,
죄인들을 하늘 나라의 식탁에 초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그들에게 회개를 호소하시며,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루카 15,7)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유에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셨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과 궁핍을 겪으셨으며,
더 나아가 여러 가난한 사람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시고,
그들에 대한 실천적 사랑을 당신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삼으셨습니다.
누구를 위한 당부한가?
-곽용승 신부-
어릴 적 부모님한테서 자주 들었던 당부가 있었습니다. “착하게 살아라. 열심히 공부하고 사회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당부가 그때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소중하고 무게 있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모님이 으레 하는 잔소리로 여겼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이 당부에는 부모님의 사랑과 나의 장래에 대한 비전과 희망이 담겨 있었음을 이제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당부는 알게 모르게 제 삶에 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열두 제자를 향한 예수님의 당부가 있습니다. 이는 당신의 뜻을 세상에 전할 제자들에게 하신 당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하시는 당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당부는 하늘나라 선포, 병자 치유와 죽은 이들을 일으켜 줌 그리고 마귀를 쫓아내라는 제자의 역할에 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당부는 주님의 제자이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을 짚어주는 말씀입니다.
사도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임무는 하늘나라 선포입니다. 이를 통해 하늘나라 선포가 나머지 당부의 내용을 풀 수 있는 열쇠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선포는 곧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선포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말하고, 예수께서 행하신 바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병자에게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선사할 것이며, 죽음을 맞이한 이들에게 부활의 삶을 안겨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 편에 서 있음으로 마귀의 권세를 부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당부는 분명 예전에 우리가 들었던 부모님의 당부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곧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는 당부이며, 인간의 온전한 행복을 누리게 하는 당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당부인 하늘나라의 선포에 온 힘을 바친 성 바르나바 사도를 본받아 이제 우리가 나설 때입니다.
<독서> : ‘나’에서 벗어나 주님을 살아가는 사도 바르나바
-경규봉 신부-
성 바르나바(위로의 아들이라는 뜻)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으로 극찬을 받을 만큼 신심 깊은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키프로스 태생으로서 본 이름은 요셉인데,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자기 재산을 팔아 공동체에 봉헌할 정도로 믿음과 열정이 대단했다(사도 4,37).
이러한 그의 믿음과 열정을 보고 사도들은 그에게 바르나바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비록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12사도는 아니지만 사도로서 인정해주었다.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초기 교우들과 함께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생활했다.
사도 바울로가 회심한 후 그는 그 공동체를 설득하여 바울로를 제자로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교회에 파견되어 지도하였으며, 다르소에서 활동하던 바울로를 데리고 와서 교회를 이끌었다.
그리하여 안티오키아 교우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사도 11,22-26). 그는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공동체에 안티오키아의 기부금을 전달하기도 하였으며, 안티오키아 교회의 목자로서 오랫동안 활동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에서도 전교하였고, 키프로스 교회의 설립자로 인정받으며, 61년경에 살라미스에서 돌을 맞고 순교하였다고 한다. 바르나바의 편지라는 위경이 그에게 헌정되었고, 그 외에도 바르나바의 복음서, 바르나바의 행전이 있을 정도로 그는 교회에서 존경받는 위대한 신앙인이며 목자였다.
사도 바르나바는 세상 것에서 자유로운 신앙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모두 예루살렘 공동체를 위하여 내어 놓았다.
주님을 체험한 그에게는 세상 것에서 아무런 기쁨이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상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 버리고, 자신이 무엇을 행하고 이룬다는 것도 다 헛된 것이며, 업적이라는 것도 결국 자신을 내세우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헛된 것이며, 오직 주님만이 남는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던 것이다. 자신은 주님의 도구이며, 주님의 도구로서 살아가기 위하여서는 세상 것들이 오히려 장애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아낌없이 공동체를 위해 봉헌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세상 것이나 자신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 1,21)라는 말씀대로 오직 주님만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며,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도 ‘나’와 ‘세상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기력이 쇠함을 느끼고, 늙는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도 ‘나와 세상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설사 중병으로 죽음이 가까웠음을 느끼면서도 결코 자신만은 죽지 않는다고 애써 부인하려고 하면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죽음으로 인하여 ‘나와 세상 것’에서 작별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나’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늙고 쇠하도록 만드셨고, 죽도록 만드셨다. 세상에 왔다가 세상에서 떠나가도록 만드셨다. 늙고 쇠함에 따라 세상과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렇게 창조하셨다.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과 세상에서의 삶을 벗어나야만 가능하도록 그렇게 창조하셨다. 늙음을 통해서 이를 깨닫도록 그렇게 창조하셨다.
사도 바르나바는 주님을 체험함으로써 주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진리를 일찍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나와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일찍 벗어난 것이다. 오직 주님만을 바람으로써 주님과 함께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바르나바 축일을 보내면서 ‘나와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 오직 주님만이 영원하심을 깨달아, 주님을 바라고 주님을 모시며, 주님을 전하는 신앙인이 되자...........◆
-김찬주신부-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듣는다. “너의 소명은 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네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용서와 치유와 화해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순종해야 한다. 사람들은 너의 한계, 부정적 모습을 보고 하느님이 너를 통하여 하시는 말씀을 부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은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복음을 세상에 전하라는 소명을 주셨다.
그러므로 네 영혼이 상처받았지만 네 안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이 말씀하시도록 하지 않고 상처받은 네 영혼이 울부짖도록 내버려두고 싶은 유혹을 자주 느끼게 될 것이다. 물론 너도 위로와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너의 소리와 하느님의 말씀을 구분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소명에 충실할수록 하느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것도 그만큼 쉬워진다. 너의 욕구와 결함이나 한계, 원죄 등을 지적하면서 너를 통하여 하시는 말씀을 부인할지도 모른다. 절망하지 말라. 사람들이 바라보는 모습이 네 모습이라고 믿고 자기 연민에 빠지려는 유혹도 받을 것이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열매를 맺을 소명을 실천할 준비를 하라. 너의 소명은 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이 말씀에 귀기울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여라
-기정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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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란 작고 순박한 마음의 봉사에서 부터 시작
미사 봉헌을 위해 사제관을 나서면 제일 먼저 성당 마당이 눈에 들어옵니다. 매일 많은 교우들이 기도와 미사 봉헌을 위해 찾는 성당이라 누가 오던 성당 입구에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성당 마당은 깨끗합니다. 분명 버려진 쓰레기를 줍고, 떨어진 오물을 치우는 누군가의 봉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성당 계단을 오르면서도 성당을 들어가면서도 오로지 주님만을 생각하고 만날 수 있는 분위기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누군가의 봉사와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사가 봉헌되는 동안 신자들은 아무 불편 없이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삶의 양식을 섭취하고, 주님의 성체와 온전히 하나를 이룹니다. 이 모든 아름다운 신비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각자가 받은 능력과 사랑을 하느님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 이웃을 위해 거저 내어놓는 봉헌과 사랑의 실천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작은 그리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이루어지는 잔잔하고 순박한 마음의 봉사는 바로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된 이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무공해의 삶"
-이수철신부-
사도들의 삶, 그대로 무소유, 무공해의 삶이었습니다.
안팎으로 비워 가볍기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았습니다.
새는 물론이고 사람을 제외한 모든 동물들
말 그대로 무소유, 무공해의 삶으로
쓰레기들 전혀 내지 않는 삶입니다.
지구 파괴의 주범은 온갖 쓰레기를 양산하는 사람들입니다.
옛날 쓰레기로 나가는 것이 거의 없었던
무공해의 시골 삶이 그립습니다.
사도들의 삶, 얼마나 박진감 넘치는 지요!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이 해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늘나라의 복음 선포의 결과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사람들입니다.
안팎으로 텅 비워진 존재 안에
가득 차는 하느님의 권능이요,
이 하느님의 힘이
인간을 치유하고 해방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집에 들어가면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사도들의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의 내적 힘은
이런 안팎의 비움에서 비롯됩니다.
이 비움은 주님의 평화로 가득하게 되고,
이 주님의 평화는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 됩니다.
오늘 1독서의 바르나바의 사도의 삶이 참 매력적입니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자기를 비운 텅 빈 자리에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했던 바르나바의 착한 삶 그 자체가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매력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마침 얼마 전 출간 기념으로
서양란과 동양란 두 개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크고 화려하나 향기 없어 왠지 공허한 서양란과는 반대로
향기 은은한 동양란에 계속 눈길이 가 즉시 써놓은 글입니다.
“몸은 떠나도
향기로 남아있는 이가
더욱 그리워지는 이가 있다.
방안 가득
은은한 향기에
가만히 뒤돌아보니
보일 듯 말듯
작고 소박한
동양란 꽃 몇 송이!
아마
겸손의 향기, 영혼의 향기
관상의 향기, 존재의 향기도
저러할 거다.”
자기를 비운
작고 소박한
무공해의 텅 빈 삶의 자리에서 풍겨나는
겸손의 향기,
영혼의 향기,
관상의 항기,
존재의 향기,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일 것입니다.
사도들은 물론
우리 수도자들과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들의
무공해의 텅 빈 삶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평화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텅 비운 우리를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무공해의 향기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양승국신부-
<세상에 지칠 때, 가슴 아픈 일이 생길 때>
지역주민들을 위해 제반 시설을 활짝 개방한 본당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문화행사를 별로 접하지 못하는 지역주민들(신자건 비신자건, 타종교인이든 따지지 않고)을 대상으로 성전의 여러 공간들을 기꺼이 내어놓는 시도는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때로 정말 귀찮은 일이고, 또 짜증나는 일도 많이 생기겠지만, 열린 교회, 열린 본당, 오늘 우리 교회가 추구해야 할 길입니다.
가톨릭 신자인 우리끼리만 잘 먹고 잘 지내고, 우리끼리만 오붓하게 둘러앉아 경건하게 미사 드리고, 우리끼리만 그렇게 천상행복을 맛보는 그런 교회는 잘 못 되도 크게 잘못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세상을 향해 언제나 개방되어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 한 가운데로, 가난한 이웃들 사이로 내려가야 하는 교회여야 합니다.
끼리끼리 문화를 조장하는 교회, 지나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교회, 우월감에 젖은 교회, 독버섯과도 같은 폐쇄성을 지닌 교회는 본질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본당 신자들 관리하는 업무며, 성무집행만 해도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판국에 어떻게 해서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아낌없이 가진 바를 나누려는 본당들의 모습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본당 내 유치원이나 공부방, 놀이방을 설치해서 맞벌이하는 부부들의 부담을 크게 덜어주기도 합니다. 무척 성가신 일일텐데, 본당 차원에서 독거노인들이나 행려자들을 위한 무료급식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이나 노인들을 직접 데리고 키우시는 스님이나 신부님, 수녀님들도 계십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입니다.
교회의 일 년 예산 가운데 과연 몇 퍼센트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자선사업에 할당되고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볼 일입니다. 한 초대형 교회의 일 년 예산 목록을 보고 그 액수가 커서 놀라기도 했지만, 자선사업에는 단 1%도 배정되지 않는 것에 더 놀랐습니다. 교세확장도 중요하고, 신자 재교육도 중요합니다. 전례활동을 위한 각종 설비 투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성상 자선사업은 그 어떤 다른 지출항목에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수도원이며, 우리가 소속된 본당이며, 운영하고 있는 각종 사업이며...곰곰이 따져보면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성직자나 수도자가 책임을 맡고 운영하고 있지만 절대로 그들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 때문에, 주님의 백성들 때문에 그들 손에 한시적으로 맡겨진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당연히 가진 바를 기꺼이 나눠야만 합니다. 주님으로 인해, 주님 때문에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니만큼 주님을 위해서, 세상 한 가운데 머물고 계시는 또 다른 주님인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과감하게 예산이 배정되고 아낌없이 집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타종교인이든 그 누구든 스스럼없이 교회를 찾아오길 바랍니다. 교회는 언제든 열린 마음으로 그들을 환대하길 바랍니다. 세상에 지칠 때, 가슴 아픈 일이 생길 때 언제든지 찾아와서 편히 쉬고 갈 수 있는 우리 교회, 부담 없이 차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는 교회, 그래서 그들이 다시금 힘을 얻고 힘차게 새 출발할 수 있도록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우리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 디아스포라 태생의 바르나바 사도
-박상대 신부-
오늘은 성 바르나바 사도의 축일(기념일)이다. 따라서 오늘은 연중주간의 복음보다는 사도의 축일에 맞는 복음(마태 10,7-13)을 미사의 복음으로 듣게된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바르나바 사도는 누구인가? 바르나바 사도의 이름은 신약성서에 모두 37번 등장하는데, 사도행전에 32번, 그 외는 바울로 사도의 서간들(1고린 9,6; 갈라 2,9.13; 골로 4,10)에 등장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바르나바의 이름이 거의 매번 사도 바울로와 함께 거명된다는 것이다. 그는 키프로스 태생의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이며, 원명(原名)은 요셉으로 레위 지파의 혈통을 이은 사람이다. 요셉이 "바르나바"(위로의 아들)로 불리게 된 이유는 그가 "위로하고 격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 하여 사도들이 붙여주었기 때문이었고, 그는 자기 밭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바쳤다.(사도 4,36-37) 사도행전은 바르나바를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한 훌륭한 사람"(사도 11,24)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12명의 사도단에 속하지는 않지만, 사도 바울로와 함께 복음선포에 앞장섰던 공을 인정하여 "사도"의 칭호(사도 14,4-6.14; 15,2 등)를 붙여주고 있다.
그랬다. 안티오키아 교회의 많은 지도급 인사들 중에서 바르나바와 바울로는 성령의 특별한 은총으로 뽑혀 복음선포의 임무를 받았으며, 여기서부터 바르나바 사도는 바울로 사도의 제1차 전도여행(사도 13,4-14,28)과 예루살렘 사도회의(사도 15,1-29)에 함께 하였다. 바울로의 제2차 전도여행을 앞두고 요한 마르코와의 동행문제 때문에 두 사도는 심한 언쟁을 벌이고 헤어지게 되면서, 바르나바 사도는 마르코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떠난다.(사도 15,37-39)
그 후로 바르나바 사도의 이름은 사도행전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바르나바 사도의 죽음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61년경 키프로스에서 선교하던 중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는 말도 있고, 밀라노 주교로 일하다 순교하였다는 말도 있다. 오늘날 이탈리아의 밀라노와 플로렌쯔는 성 바르나바 사도를 수호성인으로 공경한다. 위경(僞經)으로 "바르나바에 의한 복음서"도 전해오고 있다.
오늘 바르나바 사도의 축일을 맞이하여 그가 출생한 디아스포라(Diaspora)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자.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타인 외역(外域)에 살면서 유대적 종교규범과 생활관습을 유지하던 유대인, 또는 그들의 거주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디아스포라는 B.C 721년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아시리아제국에 멸망하면서부터 시작하여 B.C 587년 남쪽의 유다왕국마저 신바빌로니아제국에 의해 멸망하면서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이 고향을 떠나 해외로 이주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인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동경하면서 회당(Synagogue)을 지어 종교생활을 영위했다. 대표적인 디아스포라 지역은 바르티아,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유다,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프리기아, 밤필리아, 이집트, 키레네, 로마, 그레데, 아라비아 등이다.(사도 2,9-11) 디아스포라의 가장 큰 중심지는 로마제국의 3대도시에 속하는 로마,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였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극소수가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구사하였고 대부분이 그리스어를 상용(常用)하였고 라틴어를 쓰기도 하였다. 이점은 그들이 주위의 문화적 환경, 즉 헬레니즘(Hellenism)과 로마니즘(Romanism)에 상당히 개방적이었음을 의미하며, 나중에 반(反)유대교적 사상과 친(親)그리스도교적 사상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을 파견하는 예수님의 파견설교(10장)의 첫 부분이다. 파견설교에 앞서 예수께서는 12제자를 선발하시고(2-4절), 그리고 그들에게 구마(驅魔)와 치유(治癒)의 권능을 주시면서(1절) 이방인들도 사마리아인들도 아닌 오직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그들을 파견하신다(5-6절).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스승인 예수께서 해오시던 일과 같다.
우선 하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그 표지로 구마기적과 치유기적을 행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행하게 될 기적의 능력은 예수께서 거저 주신 것이므로 그들도 거저 베풀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아주 엄한 여장규칙(旅裝規則)을 제시하신다. 이 규칙에 의하면 어떠한 여벌의 것은 아무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의 철저한 청빈(淸貧)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의무도 암시하신다.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 자격은 철저히 복음선포에 메여있다. 복음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예수의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복음을 수용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선물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비는 평화의 인사는 단순한 예의의 표현이 아니라 복음의 수용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 선포자들에게는 구마의 능력도 치유의 능력도 없어 보인다.
무엇 때문일까? 여장규칙을 어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복음을 선포함에 있어서 어떠한 "여벌의 것"도 허용치 않은 스승의 당부를 빈말로 알아들은 때문일 것이다. 청빈(淸貧)의 뜻을 국어사전은 성정(性情)이 청렴(淸廉)하여 살림이 구차(苟且)하게 된 것이라 말한다.........◆
† 복음화의 목적 및 제자들의 자세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나그네의 길을 가고 있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선교교령, 2항)고 하였다.
말하자면 성부께서는 성자와 성령의 파견을 통하여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이 세상에 전하고자 하셨고, 이 목적을 위해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화'는 ‘교회의 첫째가는 사명'이 아니라, ’유일한 사명'이다. 이는 교회에는 ‘세상을 복음화하는 것'외에 제2, 제3의 다른 사명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조직과 인력과 힘은 복음화를 위해 있는 것이다.
오늘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꼐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가 사회에 해야 할 유일한 사명인 복음화 활동, 즉 전교활동을 시작하고 있다. 마치 군대의 교관처럼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행동수칙을 알려주신다. 그러면 우선 복음화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먼저 묵상해 보자
1. 복음 선교의 목적 : 인간의 한없는 갈망 충족
인간은 무언가와 함께해야 하는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철저히 고독을 느끼는 존재라고도 한다. 혼자서 있으면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가 보다. 상형문자인 한자에서도 보면 인(人)은 서로가 기대어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人의 모습이 아니고 'ㅣ, ㅡ'의 모습으로 인간이 있다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 ㅣ, ㅡ 모양 자체가 쓸쓸하게 보이지 않는가?
인간이 고독을 느끼는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이 자기 자신 안에 자기 자신이 채울 수 없는 결핍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상태가 바로 고독이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현혹시키는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생각이 깊어질수록 자신이 고독하다는 것을 더 깊이 느끼게 된다고 한다. 이 때 사람은 고독 속에서 자신 안에 자기가 채워줄 수 없는 굶주림이 있고, 자기가 풀어줄 수 없는 갈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이 결코 채울 수 없으면서도 채워지지 않으면 절망할 수밖에 없는 허무의 심연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이 허무의 심연에는 항상 무언가가 채워지기를 바라는 무한한 갈망이 내재하거나 솟아오르고 있다. 그러기에 인간은 유한한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무한한 갈망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이 갈망이 만족되지 않는 한,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그래서 이 갈망을 만족시켜줄 대상을 찾고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에 있는 것들 즉, 돈 명예 권력 향락 등을 더 많이 소유함으로써 이 갈망을 채우려 한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느냐로 행복의 척도로 삼는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유한하다는 것을 잠시 잊고 착각하는 삶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점점들면서 자기 혼자서 세상에 있는 것을 모두 다 소유한다 하더라도, 사람의 무한한 갈망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오직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은 불행한 것이다. 그 행복의 추구가 좌절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의 본질을 아는 사람들은 막연하지만 무언가 경외심이 드는 힘을 느끼게 된다. 그 느낌은 각각의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무한한 갈망의 정확한 이름을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라고 한다. 홀로 한없이 완전하신 하느님, 자신 안에 행복을 주는 모든 것을 완전히 소유하고 계시기에 스스로 한없는 만족을 누리시는 하느님만이 사람의 이 무한한 갈망을 채워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을 갈망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사랑에서 나오는 순수한 호의로 하느님의 한없이 행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기 위해 사람들을 창조하셨음을 알고 믿으며, 또한 하느님에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음으로써만 무한한 갈망이 완전히 채워지고 더 바랄 것이 없는 완전한 행복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생을 통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걸어 인생의 궁극 목적인 하느님께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무한하신 하느님은 인간을 한없이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인간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하느님 없이 인간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하느님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인간의 길을 비추시고 인도하신다.
사람이 하느님을 버리면 그 길은 갈 수 없는 길이 된다. 불행하게도 사람은 하느님을 버렸고 그래서 길을 잃게 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을 등지고 떠나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버리고 악의 길을 선택한 이래 사람들의 인생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인생이 되었다. 이제 사람이 가는 인생의 길은 하느님께 도달할 수 없는 길이 되었다. 사람은 하느님께 도달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근본적인 불행이 있다.
하느님을 떠난 사람은 하느님을 잃어버린 상실감을 피조물을 통해서 채우려 하게된다. 그리고 사람이 이렇게 피조물에 집착하면 할수록 하느님으로부터 더 멀리 이탈하고 타락하게 된다. 즉 명예에 집착하면 할수록 교만을 키우게 되고, 재물에 집착하면 할수록 탐욕을 키우며, 감각적 쾌락에 집착하면 할수록 더 자극적인 쾌락을 원하게 된다.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더 깊이 자신을 타락시키게 되고 그 끝에서 만나는 것은 허무와 절망의 심연이다.
따라서 한없이 자비로우신 성부께서는 하느님을 떠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인간을 구원하라고 성자를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고 그 성자께서는 당신의 것을 모두 버리시고 한없이 당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악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일생을 통해 인간이 하느님께 도달하는 길을 가르치고 보여 주셨으며, 십자가의 길을 걸으심으로써 인간이 갈 수 없었던 길을 갈 수 있는 길로 만드셨다.
오늘복음은 그러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기쁜 소식이 인류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제자들을 세상에 내보내시어, 복음의 씨앗을 뿌리려고 하신다.
오늘 마태오복음을 성독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선교를 위해 떠나라고 명령을 주신다. 그러면서 지켜야 제자의 도리를 다시 다짐해 주신다. 그들은 이제 주님의 말씀대로 현장으로 복음선교를 떠난다. 그리고 그들의 그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 까지 연장되어, 이세상이 끝날 때까지 단 한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땅끝까지 갈 것이다. 이렇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들에게 맡기신 가장 중요한 사명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해야 할 의무보다 더 큰 의무는 없고 비신자들에게는 복음을 들어야 할 권리보다 더 큰 권리가 없다.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여기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마르 16,16).
2. 복음 선교 : 교회의 유일한 사명
이번에는 교회와 복음에 관한 내용이다. 먼저 교회는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라는 부분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이들이 교회는 의료사업, 교육사업, 사회사업을 하면서 성당을 지어 예비신자를 모아 교리를 가르치며 포교사업도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포교사업은 교회가 하는 여러가지 사업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서두에서 이미 언급한바 와같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의 파견을 통하여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이 세상에 전하고자 하셨고, 이 목적을 위해 교회를 세우셨다는 교령을 반포했다. 다시말하면 ’복음화'는 ‘교회의 첫째가는 사명'이 아니라, ’유일한 사명'이다. 이는 교회에는 ‘세상을 복음화하는 것'외에 제2, 제3의 다른 사명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조직과 인력과 힘은 복음화를 위해 있는 것이다.
(1) 복음화란 무엇인가?
그러면 교회의 유일한 사명인‘복음화(Evangelizatio)'란 무엇을 뜻하는가? 쉽게 말하자면, 복음화란 ’세상을 변화시켜 그리스도 안에 새롭게 질서 지우는 것'을 뜻한다, 세상의 모든 분야에 복음의 빛을 스며들게 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화에는 두 가지 갈래가 있다,
첫째는, 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주고 성사와 신앙교육 등 사목촬동을 통해 한사람 한사람을 변화시킴으로써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둘째는, 복음적 가치와 맞지 않는 제도, 조직, 구조 등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를 사회사목이라고 한다. 사회사목은 사회운동(농민사목, 노동자사목, 도시빈민사목 등)과 사회사업(고아원, 양로원, 정신지체장애아 시설 등의 복지사업)으로 나누어진다,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사회사업은 항상 의미있는 것으로 인정받아 왔으나, 사회운동은 깊은 이해를 받지 못한 때도 있었다. 어느 하나의 방법만으론 복음화를 이룩할 수 없다, 함께 병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사회도 신자 증가의 황금기는 끝났는가?
물론 세례를 주는 것만이 복음화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세례는 각자의 변화의 확실한 방법임이 사실이다. 한국교회사를 보면, 크게 신자가 증가했던 시기가 세번 있었다,
첫번째는, 1886년 한불 조약으로 신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난 후,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를 찾게 됨으로써 신자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두번째는, 6.25동란이 끝난 후였다. 전쟁의 비참함을 체험하고 난 뒤 새롭게 인생의 의미를 찾으면서 신앙을 찾은 것이 그 계기였다. 그리고 여기엔 외국의 구호물자도 교세확장에 기여하였다.
세번째는, 70-80년대 군사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교회가 벌인 인권운동과 민주화 투쟁에 힘입어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마지막 보루로 여기고 신앙의 길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수도성소나 사제성소뿐 아니라, 신자증가율도 현저히 둔화되고있는 실정이다. 이런 시점에서 서울대교구에서 앞으로 10년 안에 본당 200개를 증설하고 복음화 비율 18%까지 교세를 확장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혀, 교회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이것은 몇몇 본당의 사례를 보면 결코 황당한 계획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는 질문에 “천주교 신부"라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 그리고 어떤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앞으로 신앙을 갖게 되면 어떤 종교를 택하겠는가?"라는 질문을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천주교를 택하겠다"고 대답한다. 그런데도 신자 증가율은 예배당보다 못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신자들이 열심히 전교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전파에 무관심한 신자는 참 신자가 아니다, “교회 역사에서 선교 열은 언제나 교회 활력의 표지였으며, 반대로 선교 열의 감퇴는 신앙약화의 표지였다."(교회의 선교사명, 2항)
따라서“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은 기도, 고통의 봉헌, 삶의 증거를 통하여 선교활동에 협력하여야 할 것이다. 복음 선교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거나 주저앉는 것은 패배주의이고, 성령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새 순이 돋아나지 않는 가지는 죽은 가지임을 명심하자.
그리고 복음선교를 위해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교수칙을 다시 잘 되새김질해야 할 것이다.
3. 복음선교 수칙 : (자세한 내용은 위 야곱묵상 참조)
그때에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고장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거기에서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그 집에 들어갈 때에는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릴 만하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내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평화는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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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