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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19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오 5,43~48)
So be perfect,
just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말씀의 초대
엘리야 예언자는 나봇이 살해된 다음, 아합 임금에게 그가 지은 죄가 결코 작은 죄가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벌하시겠다는 사실을 전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욕하는 것에는 입을 다무실 수 있지만, 자기 형제자매에게 피해를 끼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는 참을 수 없는 분이시다. 그렇지만 아합이 참회하자, 그에게 내리신 선고를 늦추어 집행하기로 결정하신다(제1독서). 여섯 가지 대당 명제 가운데 여섯 번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쳐 놓은 갖가지 울타리를 넘어서, 온 인류를 포괄하는 인간관계의 전망을 열어 놓으신다.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에서 절정을 이룬다. 하느님의 자녀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느님은 모든 이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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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말씀을 하십니다. 말씀이라기보다 “원수를 사랑하여라.”고 아주 강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그 원수가 나에게 해로운 인물로 보이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원수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로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것, 해, 달, 별, 동식물들,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지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닮아 가려는 자녀들의 목표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실 때까지 우리를 용서하시고 마침내 당신 부활에 초대하셨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결코 이웃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웃과 맺는 관계에서, 서로 원수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에게는 언제나 가능한 일입니다. 서로 마음이 안 맞고, 볼수록 미움이 쌓여 간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자신과 눈높이를 낮추어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서로 통하게 해야 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성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으며,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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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는지요? 미운 짓을 한 사람을 밉게 보지 말라는 말입니까? 미움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경험합니다. 남이 볼 때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본인에게는 ‘마음의 문을 닫을 만큼’ 큰 상처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조건 용서해야 하는 것인지요?
미움은 한순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미움이라도 그렇게 되기까지는 원인과 시간이 있습니다. 세월 속에서 미움은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 용서도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만큼이 아니라면 ‘그 반만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순간에 용서하려 듭니다. 마음먹으면 용서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용서에 대한 무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라도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우리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받아 주십니다. 그러니 용서가 힘들 때에는 주님의 선하심을 기억하며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착한 사람만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모두를 자녀로 생각하십니다. 그러니 용서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용서하는 이에게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주어지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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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에 대한 사랑은 참으로 알아듣기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정의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옛날이야기에는 산속에서 무술을 닦고 돌아와 하나하나 복수를 해야 하는 원수들이 나옵니다만 과연 자신에게 그렇게 죽여 없애야 할 원수들이 있는지 따져 보면 대부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분명 미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웬수’입니다.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본디 친한 친구였거나, 사랑하던 애인이었거나, 또는 가까웠던 가족이나 친척들이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이 어느 날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웬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미워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워하는 나 자신만 잃는 게 많을 따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웬수’를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미움을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상처로 친구가 원수가 되었다면, 그 원수는 사랑으로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기도하기
- 한창현 신부-
여러분은 원수가 있습니까 ? 정말 미워하고 꼴보기 싫은 원수가 있습니까 ? 또 여러분한테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대상이 있습니까 ? 목숨까지 바칠 사랑하는 그 대상이 있습니까 ?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향하는 마음을 원수에게도 보낼 수 있는지요. 사랑의 최고점은 바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는데 ….
두 사람이 사막을 걸어갑니다. 가는 길에 어떤 문제로 서로 다투게 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모래 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가장 친한 친구가 내 뺨을 때렸다 !”
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그들은 물을 마시기도 하고 목욕을 합니다. 뺨을 맞은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늪에 빠지자 때린 친구가 구해 줍니다. 늪에서 빠져나온 친구가 이번에는 다음과 같이 돌에 새겼습니다. “오늘 가장 친한 친구가 내 생명을 구해 주었다 !”
친구가 의아해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 위에 적었는데, 너를 구해 주었을 땐 왜 돌에다 새겼니 ?” 글을 쓴 친구가 말했습니다. “누군가 괴롭혔을 때 우리는 모래에 그 사실을 적어야 하지 않을까 ?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지워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 좋은 일을 해주었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돌에 새겨야 할 거야 ! 그래야 바람이 불어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
내가 오늘 만나는 사람이 원수가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
원수 사랑
-김훈일 신부-
살아가면서 마음에 쏙 드는 사람만 만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쁘고 선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상처 주고 상처 받지 않고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서로 상처 주고 미워하다가 죽기를 바라는 원수가
생기기도 합니다. 죽도록 미운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이고 원수만 좋아지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용서라는 것은 결코 원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용서했다고 또는 안 했다고 해서 원수에게는 어떤 이익이나
손해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 원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복수와 증오심으로 자신의 삶을 황폐화시키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자신의 죄악을 돌아보라는 말씀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셨으니 죄악이 우리를 해치기 전에
주님이 내미신 용서의 손길을 잡고 이웃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용서할 때 우리의 삶은
진정 아름다워집니다. 용서가 가장 큰 승리입니다.
완벽주의, 잘못인가?
-전삼용신부-
가만히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완벽해야한다는 것과 완벽해지려하는 것은 비인간적이 된다는 시각 사이에서 갈등을 해 온 것 같습니다. 또 사회에서는 정말 완벽주의란 말이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일반대학 다닐 때 한 여자후배와 함께 걸을 때 후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빠는 빈틈이 없어.”
그래서 자신이 들어 올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때 그 말을 듣고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에게 완벽주의가 있어서 사람들이 다가오기 쉽지 않나?’
그래서 일부러라도 빈틈을 많이 보이려 노력했습니다. 본래 말도 안 하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고 농담도 많이 하며 전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걸 원하는 건가?’
신학교에 들어와서는 이런 말도 들었습니다.
“형은 혼자는 잘 살지만 나중에 하느님께 가서 하느님이, ‘왜 너 혼자 왔니? 쓰러져가는 네 형제들은 왜 함께 데려오지 않았니?’하면 어떻게 할 거야? 쓰러질 땐 함께 쓰러지며 같이 가야되는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먼저 완전해지면 주위 사람들도 함께 좋은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 형제들을 신경 쓰지 못했던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왜들 쓰러지고 그래?’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또 함께 쓰러져보기로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함께 울고 아파하고 싶었습니다.
사제가 되어서도 그런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신부님은 답답하다느니, 인간미가 없다느니,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안 산다느니, 사는 것이 군인 같다느니, 자신은 완벽주의적인 사람은 싫다느니 하는 등의 참 많은 충고를 들었습니다. 저는 전혀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주위 사람들은 여전히 그런 시선으로 보나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말에 이제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도 여러 번 그런 충고대로 되어보려고 했었지만 결국 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저에게도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함께 넘어지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혹 옆에 흔들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기대어 버틸 수 있도록 흔들림 없이 곧바로 서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주위 사람을 위해서도 더 좋습니다. 자존심이 있어서 나에게 기대려 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이젠 완전해지려고 하는 것이 절대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의 이 생각에 힘을 주는 가장 큰 말씀이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과연 불완전한 것이 인간적일까요?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기 때문에 사람을 완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 스스로 불완전해진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 인간답다는 의미는 완전한 인간을 두고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처럼 완전할 수 없어.”라고 하며 자신의 불완전을 정당화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체성사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고 하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불완전한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처럼 완전하게 된다는 말은 ‘완전한 사랑’이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완전하다는 의미를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라.’라고 풀이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똑같이 미워한다면 하느님나라에서 칭찬받을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완벽주의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그건 옳지 않은 것이지만 하느님의 모습대로 더 완전하게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주눅들 필요 없습니다.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봅니다. 우리도 완전한 사랑을 바라보며 그 사랑을 닮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태양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가 닮도록 원하시는 완전한 사랑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짧은 묵상>>
오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요?
물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할 가리옷 유다를 끝까지 감싸주시고 사랑하셨고 또한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모범에서 정말 원수를 사랑하시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라 그것이 가능하셨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책과 영화로 유명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실제 모델이 되었던 사형수들의 어머니 조성애 수녀님이 대법원에서 사형제도의 합헌이 결정되자, 사형수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가식’이라고 하였고, 그렇게 똑같이 당해보지 않아서 그런 인간 같지도 않은 범죄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유영철에게 4대 독자인 아들, 아내, 그리고 어머니까지 무참히 살해당한 고정원씨가 유영철을 용서한다고 할 때 같이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은 물론 그 분의 딸까지도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당연한 인간적인 감정을 넘어서지 않으면 하느님께 칭찬받을 것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넘어선다는 것은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들이 가식으로 보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씨앗이 따스한 햇살과 수분이 있는 흙 안에 있어야 자신의 딱딱한 껍질을 뚫고 새싹이 나올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자신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하며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변화되면 될수록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그분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으로는 용서나 사랑이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의지만 있으면 됩니다. 기도는 이미 감정을 뛰어넘는 초자연적 은총의 힘을 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워지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기 싫은 것입니다.
기도는 은총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고 그 초자연적 은총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저도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술집 여자와 눈이 맞아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간 남편을 위해 매일같이 기도하니 기적적으로 회개하고 돌아와 다시 재시작하는 가정을 보았고, 또 바람피우는 남편을 위해 기도하니 남편이 밉기보다는 불쌍해 보여 가끔 집에 돌아오는 남편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잘 대해준다는 자매님도 만났습니다. 기도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기적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반사적으로 따를 줄 알아야겠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나에게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원수로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김기현신부-
학부 2학년 땐가 중세 철학사 시간이었습니다. 교수 신부님이 아오스딩의 어떤 이론에 대해서 물어보셨는데, 제가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저희 반이 제출한 리포트 중에 제 것을 찾아 확인해 보셨습니다. 르네상스에 관해 쓰는 것이었는데, 다른 친구들은 4~5장씩 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 장 썼었습니다. 신부님은 그것을 보더니, 공부도 안 하고 성실하지도 않다면서 저의 리포트를 찢어 버리고 ‘넌 재수강이야~’ 라고 말씀하시고 수업을 끝내셨습니다.
제가 잘못한 일이었지만, 마음은 아팠습니다. 그래서 은밀한 장소(?)에 숨어서 많이 울었는데, 그 사이 동기 몇몇이 신부님을 찾아갔던 것 같습니다. 저에 대한 벌이 조금 가벼워지기를 바라며, 저에 대해 이것저것 좋은 이야기를 해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후 늦게 신부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신부님은 왜 공부를 안 하는지, 요즘 생활이 어떤지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 대답을 했고, 신부님은 다시 열심히 해 보라며 벌을 조금 낮춰서 재시험을 보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시험을 못 보신 다른 두 수사님과 재시험을 봤는데, 다행히 셋 다 통과 했습니다.
그리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3년간 휴학을 했고, 다시 3학년으로 복학했습니다. 그 때 다시 그 신부님 과목을 듣게 되었습니다. 형이상학이라는 과목이었는데, 마지막 철학 과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신을 못 차렸는지, 그 과목을 또 소홀히 했던 것 같습니다. 기말 시험을 봤는데, 결과는 재수강이었습니다. 4학년 때 그 수업을 다시 듣지는 않았지만, 신부님이 내 주신 과제를 해야 했고, 시험을 다시 봐야 했습니다. 그렇게 과제를 하고 시험을 다시 준비하면서 제 삶에 전체적으로 부족했던 ‘성실함’을 조금씩 배워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께 감사합니다. 당시에는 ‘신부님이 나를 싫어하시나, 내가 찍혔나...’ 라는 생각과 함께 부정적인 마음도 많았지만, 그 때 신부님이 나의 불성실함을 강하게 지적해 주지 않으셨다면, 변화된 모습은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아합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하느님의 길을 알려주는 엘리야가 없었더라면, 회개하여 변화된 삶을 살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엘리야가 방문하자, 왕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 왔소?
우상숭배와 죄와 교만함에 빠져있던 왕은 엘리야의 말이 듣기 싫었던 겁니다. 자기를 괴롭힌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의 말이 하느님의 말이 아니라 원수의 말로 들렸던 겁니다. 그런 그가 오늘 독서에서야 엘리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변화된 모습을 보입니다. 이에 하느님은 당신의 진노를 거두시고, 그를 살려주십니다.
오늘 독서를 읽으며, 두 가지를 생각 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는 ‘아합 왕처럼 나의 잘못을 들춰내고 바른 길을 제시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엘리야처럼 바른 말을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 끈기 있고 성실했는지’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의지, 원수 사랑의 마중물
-김찬선신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오늘 복음은 너무도 심오하기에
여러 각도에서 묵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원수 사랑과 기도의 차원에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말씀이 눈에 뗬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가능한 것일까요?
아무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도
원수가 원수인 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원수란 사랑할 수 없고, 복수하고픈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지금 원수인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까지 원수였지만 이제부터는 적어도 원수가 아닌,
나아가서는 사랑의 대상인 사람이 되게 하라는 말씀이겠습니다.
굳이 지금 원수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저절로 우러나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의지로 하는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저절로 우러나는 기도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의지로 바치는 기도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억지”이지요.
저는 고백성사를 주면서 이런 억지를 보속으로 요구합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덧붙여 하는 말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미워하고 원수에게 저주를 쏟는 내가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는 내가 되도록 은총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빼면 원수 사랑의 의지는 억지이고
원수 사랑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이 억지, 곧 원수 사랑의 의지가 하느님 은총의 마중물입니다.
아, 그러나 이 말도 조심해서 이해해야겠습니다.
원수 사랑의 의지가 없으면 원수를 사랑케 하는
하느님의 은총도 없다는 뜻이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보다는 알량한 자기 사랑으로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를 쓰지 말고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하느님 사랑을 받아 사랑해야 하는데
이 사랑의 의지가 하느님 사랑을 갈망하기에
하느님 은총의 마중물이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양승국신부-
<극복되어야 할 ‘끼리끼리’ 문화>
잠시라도 집단적인 따돌림을 당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공동체로부터 배척받고 울며 돌아선 적이 있으십니까? 그도 아니라면 어떤 장소에 갔었는데, 군중속의 철저한 고독을 맛본 적은 없으십니까? 그곳에 있는 그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는 가운데, 그 누구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상황에서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려본 적이 있으십니까?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 탓에 저는 그런 체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려니 하고 마음 느긋하게 먹어보지만, 참으로 잊고 싶은 기억들입니다.
사실 인간사회에서 ‘끼리끼리’ 문화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친분이 있는 사람, 안면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 만만하고 격의 없는 사람과 같은 식탁에 앉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겠지요.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라야지 지나치면 꼴불견이 되고 맙니다. 최근까지 학교 안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왕따 현상’ 그것처럼 비인간적이고 끔찍한 일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집단 따돌림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몇몇 청소년들과 자녀들 못지않은 충격으로 괴로워하시는 부모님들을 만나면서 ‘이건 정말 아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아이들이 평생 가슴에 안고 가게 될 그 쓰라림, 그 악몽 같던 순간의 느낌, 그 상처가 떠올라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보다 폭넓은 사랑, 큰 사랑, 관대한 마음을 지닐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늘 열린 마음으로, 깨어있는 자세로, 큰마음으로 주변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혹시라도 우리 가운데 그 누군가가 철저한 소외감에 피 눈물 흘리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 그 누군가가 아무하고도 못 어울리고 혼자서 그 서먹서먹함을 힘겨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기 위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람을 발견할 줄 아는 눈을 지닌 사람입니다. 기꺼이 그런 사람에게 다가설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제 겨우 16세의 나이에 노인들이 주로 걸리는 루게릭병(근육이 서서히 마비되어가는)에 걸려 절망 속에 살아가던 한 소년과 그를 끔찍이도 챙기는 천사 같은 친구의 아름다운 사연을 읽었습니다.
천사 같은 친구는 루게릭병으로 움직임이 불편한 친구의 손발이 되어주기 위해 학년 초만 되면 교무실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간곡히 부탁했다고 합니다. 제발 친구와 같은 반이 되게 해달라고. 정말 착한 친구이지요. 피보다 진한 우정에 감동된 선생님들께서는 흔쾌히 청을 들어주어 둘은 3년간 단짝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고 하는군요. 3년 내내 화장실 출입은 물론 급식, 수업준비 등 모든 것을 도와준 친구의 모습에서 예수님 사랑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 때로 너무 멀리 계신 듯 여겨지지만, 의외로 가까이 자리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가까운 이웃들 안에 계십니다. 특히 배우자 안에, 자녀들 안에, 친구들 안에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십니다. 매 순간 처리해야할 지긋지긋한 일상의 일들 안에, 별 일도 아닌데 견디기 힘든 굴욕감을 주는 사소한 사건 안에, 원치도 않은 병치레 안에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세상만사 안에, 가장 가까운 이웃들안에 현존해계시는 우리의 하느님을 만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오늘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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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와 기도
-김선오 신부-
상식적으로는 원수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삶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보니 “왜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없지?” 하는 불평 또한
자주 하게 되는데 그런 고민에 빠져 있으면 세상은 무척 어둡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의
대화’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왜 이런 시련을 저에게 주십니까? 혹은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여쭈어볼 때 그분께서는 언제나 답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첫 번째 방법 또한 ‘기도’입니다.
‘신앙의 힘’을 빌어서 우리는 원수를 내가 먼저 친구로 대하고
박해하는 사람에게 내가 먼저 호의적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과 원수는 상호적입니다. 사랑을 먼저 주면 사랑으로 돌아오고,
원수를 갚으면 또 다시 원수를 갚으러 돌아오는 법입니다.
누군가 먼저 원수의 고리를 끊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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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나라의 역설적 사랑
- 박혜원-
그리스 메테오라에서 산상 미사를 드린 적이 있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나의 삿된 욕망과 집착이 사라지길 바라며 하느님의 위엄과 영광만을 생각했다. 막 미사를 시작하려는데 스테파노 수도원에서 수녀님 두 분이 오셨다. 그리고 가이드에게 뭔가 이야기를 했는데, 뜻밖에도 ‘이곳에서 미사를 드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신성한 산, 메테오라에서는 그리스 정교식 미사만 허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 정교식이 아닌, 다른 형식의 마지막 산상 미사를 드린 셈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로서는 400여 년간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데 수도사들의 역할이 컸던 호국 그리스 정교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왠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다수 인간 사회는 자기 집단에 대한 사랑은 고취시키면서 외부인한테는 폐쇄적이다. 적개심마저 드러낸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까운 사람이나 먼 사람이나 구별을 없애고 사랑하라고 하신다. 인간적 차원에서는 미워하는 사람에게조차 똑같은 해가 뜨고 비가 내린다는 사실이 용납될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일이고 하느님의 계획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이란 아무리 종교적으로 자신을 승화시키려 노력해도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는 유한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때론 내가 미워하는 사람조차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이율배반적 감정에 빠지게 하지만, 하늘나라는 우리를 초월하는, 참으로 신비롭고 아름다운 나라일 것이다. 또한 그 믿음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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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단상(II)
-김찬선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 그렇게 쩨쩨하게 굴거니?'
‘제가 무슨 쩨쩨한 짓을?’하고 여쭈면
‘너는 그렇게 꼭 너에게 잘 해준 사람에게만 잘 해 줄거니?
그것은 셈이 밝은 세리들도 하고,
아니 세리들이나 하는 짓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거 다 그런 것 아닌가요?’하고 다시 여쭈면
‘다 그런다고 내 제자가 될 너도 그럴래?
내가 아버지 닮아 완전한 것처럼 너도 아버지 닮아 완전해야지.
당장 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도전은 해야지.’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완전한 것입니까?’하고 다시 여쭈면
‘선하거나 악하거나 똑 같이 비와 햇빛을 내리시는 주님을 닮아
원수까지 사랑해야지.
원수까지 사랑하려는 도전을 해야지 나의 제자지.’하고 말씀하십니다.
불완전할 때 우리는
우리는 조건에 의해 사랑합니다.
훌륭하면 더 사랑하고
잘 해주면 더 사랑하고
예쁘면 더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러다 거지같은 작자를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내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긴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완전한 사랑은 조건을 초월합니다.
그가 어떠하건
그가 나에게 어떠했건 무조건 사랑하는 것이지요.
자기 사랑의 원리와
자기 사랑의 원의에 따라 사랑하는 것이지요.
사랑은 본래 그런 것입니다.
조건에 따라 사랑하면 그것은 셈이 밝은 세리나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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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
하느님께서는 나봇의 억울한 죽음과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가 저지른 죄를 보셨다. 그리고 엘리야를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아합에게 전하도록 하신다. 엘리야는 하느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아합은 죽어 그 피를 개가 핥을 것이며, 이즈르엘 성 밖에서 개들이 이세벨을 찢을 것이며, 그의 후손들도 비참한 죽음을 당하리라고 예언한다.
아합의 죄로 인하여 그 가문에까지 벌이 내릴 것을 예언한 것이다. 이에 아합은 자신에게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들인다. 굵은 베옷을 입고 단식을 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친다. 아합이 그처럼 자신의 죄를 뉘우치자 하느님께서는 그에 대한 벌을 늦추셨다.
하느님께서는 무고한 이들의 죽음을 모른체하지 않으신다. 그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죄인일지라도 당신께 의탁하는 이를 거절하지 않으신다.
창세기 4장에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인 카인과 아벨은 친형제로서 카인은 농부였고, 아벨은 목자였다. 형제는 각각 자신의 소출로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제사를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아들이셨다.
그러자 카인은 화가 나서 아벨을 죽였다. 이에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나타나시어 그 죄를 물으신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땅이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네 손에서 받았다. 너는 저주를 받은 몸이니 이 땅에서 물러나야 한다. 네가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 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다.”(창세 4,10-12) 하고 카인을 벌하신다.
이에 카인이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아주 쫓아내시니,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창세 4,14) 하고 하느님께 자신의 처지를 아뢰니,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해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만들지 않으셨지만 죄를 짓는 사람을 만드셨다. 그래서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사람, 당신의 모습대로 만드신 사람을 너무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에 당신을 거스르고 떠나간 사람까지도 사랑을 주시기 위하여 끊임없이 부르신다.
“이스라엘의 후손들아, 돌아오너라! 극악한 반역자들아, 하느님께로 돌아오너라.”(이사 31,6) “야훼께 돌아오너라. 자비롭게 맞아 주시리라. 우리의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리라.”(이사 55,7) 하고 부르신다.
“오라, 와서 나와 시비를 가리자.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8) “나는 너의 악행을 먹구름처럼 흩어 버렸고 너의 죄를 뜬구름처럼 날려 보냈다. 나에게 돌아오너라. 내가 너를 구해 내었다.”(이사 44,22) 하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 “너의 죄를 나의 기억에서 말끔히 씻어 버리리라.”(이사 43,25) “지난 일은 기억에서 사라져 생각나지도 아니하리라.”(이사 65,17) 하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려 하신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사람의 죄까지도 덮어두시고 잊으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그처럼 사랑이 크시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받으려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받을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가 지닌 자유의지까지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면, 사랑을 거부하는 자유의지까지도 하느님은 받아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면 받을 수가 없다.
아합은 무고한 나봇을 죽여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 하느님께서는 나봇의 무고한 죽음을 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합의 뉘우침을 거절하지도 않으셨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사랑과 자비가 크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항상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신앙인,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바라는 신앙인,
죄에 빠졌을 때라도 하느님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돌아서는 신앙인,
하느님의 사랑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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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자아를 능가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자세
-윤용선 신부-
우리는 오늘 ‘참된 행복의 선언’으로 시작한 마태오 복음 5장의 마지막 부분을 듣게 됩니다. 산상설교의 내용으로 꾸며진 5장의 말씀은 오늘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 교훈이 극도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악인과 의롭지 못한 이들에게는 해를 비추지 마시고 비도 내리지 마셔야 공평한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이미 우리들을 이용해 덕 볼 것 다 본 사람들 아닙니까?’ 이렇게 불평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치밀어 오르는 울화와 분노로 내 마음조차 가누지 못하는데 그들을 사랑하라고 하시다니...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멈추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사랑의 실천을 계속 명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도 아니고, 내가 아는 사람만도 아니고,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처럼, 갇히지 않는, 막히지 않는 사랑을, 그러한 완전한 사랑을 나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우리 주변에서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성격이 고상하고 정직한 사람은 원수에게도 인간적인 이해심을 가지면서 부드럽게 관용을 베풀고 신사답게 불화를 씻을 줄도 아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은 도량이 매우 큰 자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되기도 실상 대단히 힘이 들텐데, 오늘의 복음말씀은 더욱 철저하고 무제한적인 마음의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상의 것, 즉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과 자세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 외의 것은 ‘이방인들도’ 행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분이 요구하시는 사랑은 감상적인 감동 같은 사랑이 아니라 진지한 박애정신에서 비롯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지극한 사랑을 먼저 자신의 지상 삶과 죽음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받는 극심한 반대를 받으셨고 갖은 수단과 온갖 잔인한 파괴 방법을 다 이용하는 적의와 증오에 찬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원수들을 용서해 주시기 위한 기도를 하셨을 뿐 아니라 구원의 행위를 통해 원수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악이 사랑에 의해 선으로 승화된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증오의 힘을 위대한 사랑의 힘으로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스승께서는 우리에게 모범을 먼저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사랑은 자신의 ‘자아’를 능가하는 사랑입니다. 인간의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하느님 안에서 볼 때만 얻을 수 있는 바로 그 사랑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옳고 그름이 일방적인 편견을 떠나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투쟁의 대상이 되던 중대한 사물들이 이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의 정신은 나 인간의 정신과는 격차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나의 정신이 하느님의 정신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신 안에서 우리가 자라고, 옹색함을 벗어나 광활함으로 나아가며,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이기심에서 사랑으로 나아갈 때, 바로 나의 원수를 내가 사랑하는 일 또한 실현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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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김웅태 신부-
우리는 성질이 까다롭고 마음이 편하지 못한 이는 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찾고, 부르는 하느님의 마음은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누구나 대할 수 있습니다.오늘 복음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수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사랑" 하면 : 상대가 누구냐?를 생각하게 되는데, 1) 부모 자녀간의 사랑을 생각할 수도 있겠고, 2) 남녀간의 사랑도 3) 혈연 관계를 떠나 서로가 친한 사이에 온후하고 부드러운 애정이 깃든 사랑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4) 그러나 오늘 복음이 가르키는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가페적 사랑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가페적 사랑이란? : 자신의 희생이 깃든,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비심이 깃든, 착한 마음의 사랑이라고 간단히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활하다 보면 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고 마음이 끌리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정에서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내게 상처를 준 원수를 사랑하자면, 정의 문제를 넘어서 의지에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히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인 사랑은 하느님 말씀 때문에 착한 마음을 가지고자 결의, 결단을 해야 하는 것이기에 자기 희생이 동반됩니다. 이러한 사랑은 자연적인 감정을 가지고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원수를, 미워하는 사람을 대하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러한 사랑을 통해서만이 사람인 우리가 하느님을 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심으로써, 모든 이를 당신의 자녀로 대하시며,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우리 중에 누구라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우리가 닮아야 하는 것에 우리 믿음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 : 26의 말씀대로 : ..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사람인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같은 아가페적 사랑을 가지고 원수까지도 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지적인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 함으로서만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를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용서하시며 나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 앞에서 어떤 사람을 계속 미워하면서 기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나를 마음 아프게 한 사람에 대한 미움을 확실하게 없애는 방법은 미운 그 사람을 위해서 진정한 기도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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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황래신부-
아이들이 넓은 성당 마당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데,
가끔은 티격태격 싸우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아이들에게 물어봅니다. ‘야들아, 너거 와 싸우노?’
그러면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다들 씩씩대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가만있는데 자가 먼저 그랬다 아잉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제에 이어 오늘도 계속해서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모든 범죄들은 자연스러운 창조 질서와 관계들을 깨뜨리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분명히 죄로 인해서 하느님의 창조 질서는 깨어지고,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모든 관계들은 불완전하게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주간 화요일 대부분의 분들이 ‘대한민국’이라고 하나된 목소리로
응원을 하며 함께 즐기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분명히 많은 분들이 기분 좋게 모여서 술자리도 더불어 가지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두가 기분 좋게 건배를 하다가 그만 유리컵이 부딪쳐서 깨져 버렸다고 합시다.
이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분명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깨진 유리를 빨리 치우고 그 기분을 계속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깨진 유리를 치울 생각은 않고, ‘니가 잘못해서 깼니, 원래 깨져 있었니,
주인아줌마가 컵을 잘못 갖다 줬니,’하며 계속해서 따지기만 한다면,
분명 누군가가 더 화가 나서 유리컵을 하나 더 깨뜨리게 될 것이고,
그것을 누가 지나가다가 밟기라도 하면 다치게 될 것이고,
이러한 악순환이 그 기분을 완전히 망쳐버리기 될 것입니다.
어제 이 시간을 통해서 ‘용서’라는 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얼굴을 헤아리다’,
또는 ‘얼굴을 밝게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누가 먼저 용서를 하지 않으면, 그 깨진 유리로 인해 일그러진 그 얼굴을 펴기 위해
먼저 노력하지 않는다면 한 번의 죄로 인해서 그 죄의 악순환이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분 좋게 함께 하기 위해서 모인 그 시간의 의미가 이 깨진 유리로 인해 순식간에 싹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처음부터 누구든지 깨진 유리를 먼저 치우고 다른 컵을 가져와서 함께하는 시간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면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불완전한 우리들에게 ‘용서’를 통해 ‘완전하게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용서’만이 죄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용서’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보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평화 방송 청취자 여러분, 깨진 컵, 우리가 먼저 치웠으면 좋겠습니다.
함께하는 이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예수님의 사랑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이 활짝 펴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우리는 불완전하기에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번 해 봅시다.
완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의 거룩한 몸으로
우리를 완전함으로 이끌어 주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도 우리 모두가 함께 마음 모아 받아 모신 예수님의 거룩한 몸은
우리 모두를 하느님의 완전함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두 기둥인 기도와 미사
-이봉하수사-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을 즐겨봅니다.
대초원에서 사는 동물들을 다룬 내용은 그 자체로서 재미있기도 하지만
우리와 또 다른 동물들의 세계를 통해서 지구는 결코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동물들의 세계를 잠시 들여다보면, 그들 안에도 낮은 단계의
공동체가 있고 사랑도 슬픔도 있는가 하면 ‘왕따’도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나 동물들은 사람만이 가지는 고차원적인 감정과 지각이 없기에 창조 이래
사람의 지배를 받고 있지요. 만약 유전자의 변형으로 네 발로 기는 동물에게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감정, 지각, 언어 등이 주어진다면 동물과 사람 간에 서로
우위와 지배를 위해 싸우며 지구촌은 그야말로 대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다행히도
하느님께서는 아직까지 사람 외에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사람과 같은 은총을
주시지 않으셨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한 사람이나 원수를 두고 ‘금수보다 못하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엔 사실 금수보다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만 있을 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조건은
간단합니다. 일상 안에서 회개하는 사람, 용서하는 사람, 자신뿐 아니라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해 불리움을 받은 것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김지영 신부-
◆프랑스 시인 알프레드 뮈세는 ‘5월의 밤’이라는 시로 유명하다. 이 아름다운 시 속에는 어미새 펠리칸이 등장한다. 어미새 펠리칸은 갓 낳은 굶주린 새끼새들을 해변에 놓아두고 먹이를 구하러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오랜 여행에도 어미새는 단 한줌의 먹이도 구하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만다. 여행에 지친 어미새 펠리칸이 저녁 안개 속에서 갈대 숲으로 돌아올 때 굶주린 새끼떼들은 어미새에게 몰려간다. 그러자 어미새는 목을 흔들면서 늘어진 날개 속으로 새끼들을 포옹한다. 다음 순간 어미새는 해변에 누운 채 자신의 심장을 새끼들의 먹이로 내놓는다. 어미새의 심장과 내장이 새끼들의 입으로 사라지기도 전에 어미새는 숨을 거두고 만다. 자신의 심장과 생명을 내주면서까지 또 하나의 생명을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모든 이에게 아낌없이, 남김없이 내주신 한없는 사랑. 그래서 성 토마스는 ‘성체찬미’에서 ‘주 예수, 사랑 깊은 펠리칸이여’라고 기도했는지 모른다. 원수까지도 받아들이는 사랑,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도 포용하는 사랑의 위대함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나에게 원수는 누구이며, 이방인은 누구인가?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나날인데 어리석게도 이웃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일에 내 힘을 전부 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자.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들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양승국신부-
<오늘 내 사랑이 비록 작고 초라할지라도>
오늘 저희 수도원에서는 한 평생 겸손했던 한 평수사님의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오현교 타대오 수사님, 형제들에게 위문편지나 축일 축하 편지를 쓰실 때면 늘 오소인(小人)이라고 즐겨 쓰시던 분, 형제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베풀면서도, 자신을 위한 식탁에는 멸치 한가지로 족했던 분, 한국 살레시오회 초창기 멤버셨기에 어쩔 수 없이 평생토록 수도원 내 굳은 일만 도맡아 해 오셨던 정녕 겸손했던 분이셨지요.
새까만 후배들이 줄줄이 버티고 있음에도 언제나 가장 먼저 공동체 경당에 도착하셔서 이것 저 것 미사 도구며 준비물을 챙기시던 분, 자그마한 체구의 수사님께서 등치가 산만한 후배들의 고민을 자상하게 들어주시고, 일일이 등을 두드려주시던 수사님은 진정 저희 한국 살레시오회의 거목이셨습니다.
한 평생에 걸친 과로와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었던지 5년 전 위암이 발병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일을 해오셨으면서, 그만하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수도회를 위해 할 일이 많이 남았다’면서 수사님은 열심히 투병생활에 임하셨습니다.
항암제 기운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호전되면 어떻게 해서든 수도회에 도움이 되어보겠다고 이런 일, 저런 일에 뛰어드시던 수사님은 정말 저희 후배들의 귀감이셨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 드러눕기도 앉아있기도 힘겨워서 어정쩡한 자세로 허리를 수그리고 계시던 수사님, 그 와중에도 미사나 기도를 꼭꼭 챙기시던 수사님, 그 고통 속에서도 수도회의 일치를 위해 눈물로 호소하시던 수사님이셨습니다.
어젯밤 그런 수사님의 영정 앞에 백여 명의 저희 후배들이 모였습니다. 한 목소리로 연도를 드렸습니다.
연도를 드리고 있는데, 수사님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빙긋이 웃으시던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툭툭 등을 두드려주시던 손길도 느껴졌습니다.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목소리로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어이, 양 신부, 잘 되고 있어? 별 일 없고? 몸은 괜찮냐? 쉬어가며 천천히 해!”
저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특히 수사님과 함께 동고동락하셨던 분들, 수녀님...많은 분들이 마치 사랑하는 삼촌이라도 여읜 듯 슬픔을 감추지 못하셨습니다.
수사님께서는 온화한 성품과 친화력, 들을 줄 아는 ‘큰 귀’를 바탕으로 공동체나 사업체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의견이 분분할 때, 불화의 조짐이 보일 때, 그로 인해 공동체 일치가 흐트러질 기미가 보이면 백방으로 뛰어다니시면서 중재를 서시곤 하셨지요. 부드러움, 편안함, 상대방에 대한 배려 등으로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떠나신 수사님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보통 사람’들의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들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통념적인 사랑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사랑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겠지요.
예쁜 아이들, 귀여워해주는 것은 누구나 가능한 일입니다.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고, 성적 좋은 아이들,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내게 인사 잘 하는 사람, 내 비유를 잘 맞춰주는 사람, 내게 뭔가 하나라도 챙겨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환대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그런 사랑을 뛰어넘어서야만 합니다. 갈 때 까지 간 아이들, 반평균 점수 다 깎아먹는 아이들, 마구잡이로 대드는 아이들조차도 품에 안아줄 줄 아는 사랑입니다. ‘행동 하나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왠지 밉상인 사람, 그저 보기만 봐도 껄끄러운 사람조차도 그러려니 하고 함께 걸어가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우리 사랑에 대한 기대치가 아주 높은 분이십니다. 우리를 향한 욕심이 많으신 분입니다. 우리 사랑이 계속 성장해서 언젠가 당신이 지니셨던 그 큰 사랑 가까이 따라오도록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지닌 사랑이 한없이 작고 초라하고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꾸준히 키워나가길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큰 사랑, 완전한 사람은 힘들지라도, 좀 더 큰 사랑, 좀 더 나은 인간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길 바랍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강영구신부-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대에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제 편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적대적(敵對的) 공생관계(共生關係)’에 있으면 원수를 사랑하게 됩니다. 원수가 있어야 비로소 적개심으로 가득 찬 나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대적 공생관계는 썩 좋지 않은 방법입니다. 지옥을 만들고 공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원수니 벗이니 하는 구별자체를 없애는 것입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 눈에 원수니 벗이니, 악한 사람이니 선한 사람이니, 옳은 사람이니 옳지 않은 사람 따위의 구별이 있을까요?
원수와 벗,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옳은 사람과 옳지 못한 사람 따위의 구별은 옹졸한 인간들이 편 가르기 하려고 만들어 놓은 구별입니다. 편을 갈라야 자신들의 권력욕과 탐욕을 충족시킬 수 있고 이득을 챙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느님의 눈에는 모든 존재가 당신의 사랑과 용서, 축복을 받아야 할 사랑스러운 자녀일 뿐입니다.
당신 가슴에서 미움과 증오, 적개심을 버리십시오.
사랑과 자비와 용서만 남겨 놓으십시오.
당신의 머리에서 원수니 적이니 하는 말 자체를 지워버리십시오.
모든 사람이 사랑스러운 형제자매가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용서하는 일은 죽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오늘이 사랑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이기양 신부-
제1독서 : 1열왕 21,17-29 (너는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
복 음 : 마태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 남기신 말씀 중에 대표적인 말씀이 오늘 말씀이지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5,44)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이 말씀이 예수님의 대표적인 말씀인 이유는 단지 말씀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삶 자체가 그 말씀의 실천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신자 비신자나 할 것 없이 기억하고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지요.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5,43)하시면서 큰 계명을 주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5,44-45)
신자들은 비신자들과는 삶이 달라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이어서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5,46-47)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또 자기와 친한 사람과는 인사를 하며 지냅니다. 우리가 여기에 머무른다면 신자로서 비신자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여기에 머무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을 좋아하고 또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나 친하지 않은 사람과는 인사조차 건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삶이라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해당되는 것이지요. 세리나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특히 사랑에 있어서는 대상을 구분하지 말고 모두를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는 말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올바른 율법 해석에 힘입어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할 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의롭게 되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무관하게 살아왔다면 어렵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수정해야 합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이 말씀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실천하라고 주신 말씀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두 사람이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행 중에 문제가 생겨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뺨을 때렸다.?
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그곳에서 목욕을 하기로 했습니다. 뺨을 맞았던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늪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때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늪에서 빠져 나왔을 때 이번에는 돌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그를 때렸고 또한 구해 준 친구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에다가 적었는데, 왜 너를 구해 준 후에는 돌에다가 적었지??
친구는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괴롭혔을 때 우리는 모래에 그 사실을 적어야 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지요. 미움은 모래에 새겨서 용서의 바람으로 빨리 지우고 은혜는 돌에 새겨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거꾸로 할 때가 많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은혜는 물에 새겨 금방 잊어버리고, 마음에서 버려야 할 원수는 돌에 새겨 두고두고 기억하는 것이지요. 다치고 힘겨워지는 사람은 미움을 새겨 놓는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지요. 프란시스 베인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복수할 때 인간은 그 원수와 같은 수준이 된다. 그러나 용서할 때 그는 그 원수보다 위에 서 있다.?
더 큰 사람은 보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용서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오며 결국 악순환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고 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실천의 삶이 우리 신자들의 삶이어야 하며, 그럴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완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좀 다른 사람도 기꺼이 인사하고 받아들이며 친교를 맺고 미움은 용서의 바람으로 빨리 지우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모습이지요.
오늘 하루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 완전한 사랑은 거룩함이다.
-박상대 신부 -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 대당명제를 가르친다. 오늘의 기본명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는 것이며,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반명제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것이다. 이로써 여섯 가지 대당명제가 모두 선포되었다.
이를 다시금 정리하자면, 예수께서는 "더 옳게" 사는 방법을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제시하셨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된 것이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이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록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져 율법의 참된 정신을 곡해하긴 했지만 세부적인 규정에 이르는 모든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는 점은 인정하셨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느님나라에 들기는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 요구되고, "더 옳게" 산다는 것은 율법의 세부규정을 더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밝혀주신 것이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선포된 6개의 대당명제는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보복하라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기본명제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전반부는 구약의 율법조문이지만(레위 19,18), "원수를 미워하라"는 후반부는 구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계명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오히려 원수에 대한 사랑을 높이 평가한 부분은 있다. 그것은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되려 살려주는 대목에서 사울이 "원수를 만나서 고스란히 돌려보낼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데도 네가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을 해 주었으니 야훼께서 너에게 상을 주시기를 바란다"(1사무 24,20)라고 말한 곳이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명제에 대하여 성서학자들은 반명제를 위해서 사해(死海) 근처에 모여 살았던 꿈란 공동체의 규범 중에서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아들들을 미워할지니, 그들은 자신의 죄과(罪過)대로 하느님의 보복을 받을 것이다"는 대목을 마태오가 빌어와 가필(加筆)한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 예수님의 요구는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웃과 원수의 구별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가 내 이웃이며, 누가 내 원수인가?"라는 물음에 머물러 있다면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새로운 의(義)를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의 새로운 의로움에 따르면, 우리가 내 이웃이 아닌 사람들을 원수로 규정하고 내 이웃만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랑하는 이웃끼리 인사하고 잘 지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세리들과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따라서 거기엔 어떠한 상(償)도 더 나음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내 이웃이나 원수에게 똑같이 대해주시기 때문이다.(45절) 세상 사람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模像)을 따라 빚어졌기 때문이다.(창세 1,26) 어떤 원수라도 그가 사랑을 받는다면 그는 원수가 아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는 어떤 원수도 없다.
이로써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대당명제의 깊은 의도와 의중이 모두 드러났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는 것 안에 있다. 완전(完全)하다는 것은 "온전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이다"는 것이며,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시지만 인간은 그렇지가 못하다. 우리는 늘 혼란스럽고 갈라지며 그 마음 또한 조석(朝夕)으로 변한다. 굳은 결심으로 시작한 하루가 그 마감시간에는 깨지고 흩어진 마음을 주워 모아야 하는 아픔으로 반복된다. 속으로는 한결같은 마음을 먹지만 마주 대하는 상대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우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을 배우고 익히도록 요구된다.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은 그분이 인간에 대한 어떤 차별도 없이 수행하시는 사랑에서 드러난다. 하느님 사랑의 방법에 있다는 말이다. 이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곧 완전하게 되는 길이다.
오늘은 적어도 왜 하느님께서 선인(善人)에게 바로 상(償)을 주지 않으시고, 악인(惡人)에게 바로 벌(罰)을 내리지 않으시냐고 말하지 말자. 그래서 하느님은 오늘도 침묵(沈默)만 하고 계신다고 말하지 말자. 그것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똑같이 비를 주시는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에서 우러나는 창조적이고 거룩한 사랑인 것이다.......◆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유광수 신부-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면, 너희가 남보다 잘 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장차 나는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가? 내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누구나 다 한번뿐인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인생의 목표가 있을 것이다. 정치인은 대통령이 되는 것일 것이요, 운동 선수는 세계 챔피온이 되는 것이요, 기업인은 세계 일류가 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수도생활을 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면서 많은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다. 도대체 수도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사제생활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러나 얼른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해답은 수도생활과 사제 생활을 한참 한 후에야 찾을 수 있었다.
그럼 그 해답이 무엇일까? 그 해답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내 삶의 목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나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내 삶의 목표요, 수도생활과 사제 생활의 목표이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을 "완덕(完德)"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완덕으로 나아가는 길", "완덕의 생활"이라는 책이 있었다. 그러나 제 2차 바티칸 공의의회 이후부터는 "완덕"이라는 말 대신에 "聖德"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왜 그랬는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하늘의 아버지를 닮으라는 말이다.
왜 아버지를 닮아야 하는가? 하늘의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아버지란 어떤 분이신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스스로 거룩하게 행동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야 한다."(레위 11,44-45)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거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즉 인간은 하느님을 닮게 창조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원형이신 하느님의 모습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거룩해야 한다.
둘째는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자녀는 아버지를 닮는 법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자녀인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그래서 성 바오로도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음탕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데살 전 4, 3. 7)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완덕"이라는 말 대신에 성덕(聖德)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 "성화 되는 길"이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목표는 또 모든 신앙인의 목표는 聖人이 되는 것이다. 나라 대통령도 아니요, 재벌가도 아닌 성인이 되는 것, 그것이 나의 인생의 목표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표이다.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를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부르시는 것이다.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따라서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의 성소(聖召)이다. 이를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성화 성소의 보편성"이라고 한다. 조금 더 이 부분에 대해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인용하겠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은 여러분이 거룩하게 되는 그것입니다."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교회 안에서 성직계에 속하는 사람이나 성직계의 사목을 받는 사람이나 모두 다 성화(聖化)의 성소를 받는 것이다. 교회의 이 거룩함은 성령이 신도들 안에서 맺어주시는 은총의 열매로써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이며 또 나타나야 할 것이다.
모든 완덕의 천상 스승이시며 모범이신 주 예수께서 친히 거룩한 생활의 원천이시요, 완성자로서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제자들에게 생활의 성화를 요구하시며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시듯이 완전한 사람들이 되십시오."(마태 5, 48)하시었다....
따라서 신분과 계급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크리스챤들이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완성과 사랑의 완덕을 실현하도록 불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일이며, 이 성덕은 현세 사회에 있어서도 보다 인간다운 생활 양식의 촉진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완덕에 도달하기 위하여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받은 힘을 다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의 모습을 닮아 모든 일에 있어서 성부의 뜻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에 대한 봉사에 헌신해야 하겠다. 이렇게 하느님 백성의 성덕은 교회사에 있어서 많은 성인 성녀들의 생활이 빛나는 증거를 보여 준 것처럼 풍부한 결실을 맺을 것이다. (계시 헌장 5장 39.40항 참조)
성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내가 성인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 또한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신다.(요한1,4,16)"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신다. 그러므로 가장 필요한 첫째 은혜는 사랑이며 이 사랑으로써 우리는 만유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랑이 영혼 안에서 좋은 씨같이 자라서 결실하기 위해서는 각 신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기꺼이 듣고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하느님의 듯을 행동으로 채워 드릴 것이며, 성사들, 특히 성체성사와 거룩한 전례 행위에 자주 참여할 것이며, 기도와 자아 포기와 행동으로서의 형제적 봉사와 모든 덕행 실천에 항구할 것이다.
완덕의 끈이며 율법의 완성인 사랑은 모든 성화 수단을 지배하고 힘있게 하며 목적을 달성케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특징지어진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생명을 바치심으로써 당신 사랑을 드러내셨으므로, 주님과 형제들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있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고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성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가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나도 아버지를 닮아 성인이 되어야 한다. 성인이 되려면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말씀중심)> : † 하늘에 계신 아버지†
산상수훈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주님께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산상수훈은 주님이 우리가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바로 하느님이 아버지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1.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 “천부”가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이 집중적으로 사용된 성서의 다른 본문은 없습니다. 산상수훈 전체에서 18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5장에서 세 번(16,45,48절) 그리고 6장은 무려 13번(1,4,6,6 8,9,13,14,15,18,18,26,32절) 그리고 7장에는 두 번(26,32절)이 나옵니다.
반면에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5장에서 5번(8,9,34,35,45), 6장에서 3번(8,24,30절)만 나올 뿐입니다. 더욱이 6,8의 하느님은 “너희 아버지”라고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일상적인 대인관계에서 호칭은 관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나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에 대하여 관계에 따라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을 아무한테나 사용할 수 없으며 아무에게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허용할 사람도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빠”라고 부를 때 그 관계는 사랑과 신뢰이듯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도 그렇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님은 특히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습니까? 이것은 큰 복입니다. 이렇게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느님과 어떤 관계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올바른 자식이 되어 그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습니까? 가출 또는 미아가 되어 아버지 품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돌아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자연스레 “아버지”로 불려질 수 있기를..........
2. 누가 아들다운 사람입니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진정 아들다운 삶일까요?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이 내용을 매우 중요하게 그리고 비중있게 다루셨습니다.
5,9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5,43-45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6,14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위 3개의 성귀에서 보듯이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전제는 5,9의 평화와 5,43-45의 사랑과 6,14의 용서입니다. 이런 기본전제에서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 분은 이 평화와 사랑 그리고 용서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복음에는 세리와 이방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아들과 대립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자기에게 문안하는 사람에게만 문안하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도 즉, 세리와 이방인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라면 원수라고 사랑해야하고 박해하는 자까지도 그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아들이 될 수 있는 속성(품성)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합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이런 품성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분명히 우리 삶에 하느님을 닮은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48절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다시말하면 하느님 아버지를 완전히 닮은 아들다운 모습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3. 아들이 받는 특권은 무엇입니까?
첫째, 마태 6,9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에서 보듯이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둘째, 마태 7,7-11입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에서 보듯이 아들과 아버지를 비유로 사용하시면서 우리가 구하는 것이야말로 아들 됨의 특권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며 좋은 것으로 채우십니다. 기도는 자녀 된 사람들의 가장 큰 특권입니다. 자녀이기에 아버지에게 때로는 무리한 요구도 합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구할 특권이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기도에 대해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시어 말씀을 주시고 계심에 주목하십시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의미는 이 땅의 아버지와의 차별화입니다. 땅의 아버지, 즉 육신의 아버지가 안 계셔 외로운 사람에게도 하늘의 아버지는 계시며 땅의 아버지가 무능력하여 모든 것을 만족하게 못해주더라도 하늘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책임지실 수 있습니다. 군대 보내면 옆에 있을 수 없고 출가시킨 후 아무리 사랑하는 아버지도 옆에 늘 붙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아버지는 그 자녀 되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모든 것에 전능하신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마태 6,8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본받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또 6,32에서는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복음의 묵상마무리는 기도로 하겠습니다.
이 땅에 아버지 된 분들, 아버지 될 분들이여,
우리 자녀들이 아버지를 생각할 때 좋은 느낌이 들게 합시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우리 자녀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든든하고 기뿐 좋은 느낌을 심어주므로 우리 자녀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큰복인지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이런 좋은 관계로 살아가게 하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삶이 되도록 허락해 주시고, 하늘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며 아버지의 아들된 특권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자 되게 하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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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