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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6월25일 연중 제12주간월요일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마태오 7,1-5)
For as you judge,
so will you be judged,
and the measure with which you measure
will be measured out to you.
말씀의 초대
북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게 함락되어 결정적으로 멸망한다. 멸망의 근본 원인은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이방인의 풍습을 따르면서 살아서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고 하신다. 하느님의 판단과 인간의 판단은 다르다. 이웃을 가혹하게 판단하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며, 더없이 약한 존재임을 모르는 사람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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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주님께서 말씀하신 유명한 황금률이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그러나 이 말씀대로 실천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에게 해 주더라도, 남을 판단하여 그대로 해 줍니다. 그래서 도와주고도 욕을 먹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남을 존중하고, 남이 무엇을 바라는지 신중하고도 정확하게 이해해 도와주어야 “고맙다.”라는 인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물며 남을 잘못 판단해 모든 허물이나 탓을 그에게 돌려야 할 경우에는 얼마나 더 신중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자칫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억울한 사람 등을 너무 쉽게 판단해 그들을 더 슬프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들 편에 서 계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에 눈을 돌리고, 남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우선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타인이 잘못했을 경우, 즉각 그를 심판할 것이 아니라, 우선 그를 위해 기도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을 배려하는 데에는 더디고, 남을 판단하는 데에는 얼마나 빠른지 모릅니다. 우리는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들어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고 하는 교만한 사람일 수도 있음을 언제나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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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알고 싶어 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지.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왕은 은수자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은수자는 왕을 보고도 하던 일을 계속합니다. 왕은 그가 일을 빨리 마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거들어 줍니다.
숲 속에서 부상자가 비틀거리며 나왔습니다. 왕은 그를 돌보아 주었고, 다음날 부상자가 자신의 정적임을 알게 되자 화해합니다.
은수자와 지내면서 왕은 스스로 깨닫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그에게 착한 일을 하는 것이구나.’ 톨스토이의 예화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멀리 있는 사람을 탓하지 않습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을 탓합니다. 모르는 사람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잘 아는 사람을 심판합니다. 서먹한 사람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친한 사람을 몰아붙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사랑하는 이의 허물을 덮어 주어야 사랑이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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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참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하려면 많은 정보와 자료가 필요합니다. 그것으로도 그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사형수들의 대부였던 김홍섭 판사는 자신의 판결이 항상 100점이라고 할 수 없으며 70점일 때도 있고 60점일 때도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잘못된 재판을 종종 봅니다. 예수님 역시 빌라도의 오판으로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아테네의 시민 법정에서 잘못된 재판으로 사형이 언도되었습니다. 잘못된 판단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우리가 아무런 죄가 없는데 죄인이 된다고 합시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주님께서는 그런 뜻에서 판단하지 않기를 당부하십니다. 판단은 하느님께서만 정확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
- 남궁영미 수녀-
노벨문학상을 받은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사람들은 갑자기 앞을 볼 수 없는 전염병에 걸리고 수용소에 격리됩니다. 이 소설은 권력과 폭력에 둘러싸여 무력하기 짝이 없는 개인과 사회를 은유적으로 백색 실명 상태에 빠진 눈먼 자들에 비유합니다. 이를 통해 현대 사회의 인간됨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는 한편, 인간성에 대한 긍정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현실도 「눈먼 자들의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먹고 입고 더 성취할 것에 열중하는 세상, 이웃에 대해 냉담하고 미지근한 사회적 분위기와 그 이면에 감추어진 사람들의 두려움은 서로의 진실에 눈을 감게 하고, 온갖 부조리와 끊임없는 경쟁과 이기적인 삶으로 빚어진 혼돈의 세상을 살기 위해 억지 판단을 하게 합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오늘 예수님은 ‘우리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 뚜렷이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눈의 들보를 빼내고 눈을 뜰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이중성을 극복하라는 초대일지도 모릅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공동체와 민주화,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의 역사를 살아왔습니다. 그 시절 우리의 투쟁 대상은 뚜렷했습니다. 그래서 그 지난한 싸움은 역설적이게도 지금보다 더 쉬웠습니다. 지금은 대상화해 투쟁하던 시절과는 다른 세상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개인이 모여 시민의 힘으로 응집되어야 할 때입니다. 이는 자기 안의 이중성을 극복하라는 도전이며 초대이기도 합니다. 관행으로 묵인되는 사회적 모순과 타협하는 나의 모순은 겉으로 드러난 사회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우리의 진정성을 살려내는 일이야말로 이중성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터무니 없는 전쟁과 속임수와 폭력으로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현실 속에서 내 속의 들보를 빼내고 참으로 눈을 뜬다는 것은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말처럼 ‘위대한 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천만 사람이 그르다 해도 옳은 것은 끝내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온 세계 인구가 압도적 다수결로 신?(神)?이 없다 해도 신은 살아 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주위 사람들이 모두 돈, 돈 하며 돌고 돌아 마침내 미쳐간다 해도 홀로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이현주 글,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선집」?을 내면서 중에서)이 되는 것입니다.
어제는 인천의 불로동 성당에서 미사를 성소후원회 육성을 위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런데 미사 전, 제의방에서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저는 복사를 서는 아이들에게 “커서 신부님 되고 싶은 사람?”하고 질문을 던졌지요. 네 명 중에서 한 명만이 조용히 손을 듭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친구들에게는 “신부님 되기 싫어? 신부님 되면 얼마나 좋은데?”라고 말하면서 신부님 되라고 꼬시기(?) 시작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한참을 듣던 복사 중 한 명이 큰 인심을 쓰듯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신부님, 저는 요. 이것저것 하다가 정 안 되면 그때 가서 신부님 되려고요.”
솔직히 좀 화가 났습니다. 아마 이 아이가 판단하기에 신부는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고, 이것저것 하다가 정 안 되면 그때 가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제가 이제까지 살아온 바로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길입니다.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먼저 선택해야 할 길이고,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도 소중한 길이 바로 성직자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판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맞다고 확신하며 말했던 그 판단들이 과연 정말로 맞는 것일까요? 유한하고 부족한 존재인 내가 생각하고 판단했던 그 모든 것들이 과연 진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한 번 더 생각한 뒤에 말하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섣부르게 판단해서 실수를 저지르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남에 대한 섣부른 판단은 금물입니다. 특히 남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은 절대로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섣부른 판단은 부메랑처럼 다시 내게 되돌아와 나에게 아픔과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렇게 부정적인 판단을 말하고자 할 때에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그 부정적인 판단을 듣게 된다면 과연 어떨지를 말입니다.
남을 비판하기는 쉬워도 칭찬해주고 격려해주기는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한마디를 하더라도 책임 있게, 그리고 가능하면 사랑을 담아 전할 줄 아는 사람이 그리운 요즘이 아닐까 싶네요.
카멜레온적 인간
-김민수 신부-
변신의 귀재 카멜레온은 피부색을 환경에 따라 변화시킵니다. 주변 환경과
비슷한 색으로 피부색을 바꿔 자신을 천적에게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살아남기 위한 기술이지요. 인간 세계에도 수많은 카멜레온이 존재합니다.
자신을 합리화시키거나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을 위장합니다.
자신에게 이롭게 변신하는 위선자는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감추거나
깨닫지 못하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를 보고 빼겠다고 합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식입니다. 자기 잣대를 절대화시키는
사람은 남을 쉽게 심판하고 죄인으로 단죄하는 우를 범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웃을 동반자가 아닌 경쟁자나 적대자로 여깁니다. 신앙인은 위선자가 되기
쉽습니다. 특히 기도와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일수록 위선의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습니다. 매 순간 자신을 상대화하고 꾸준히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만이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기 성찰은 자기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깨닫고 그것을 제거시켜 눈을 맑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이웃을 통해 자신의 삶을 들여다볼 때
하느님의 은총 안에 살고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며 이웃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욕심의 되, 사랑의 되
-김찬선신부-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손해 봤다고 느낍니다.
나는 많이 주었는데 적게 받았다고.
그런데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지만
욕심에 의한 錯感 현상도 있습니다.
錯感 현상.
제가 만들어낸 말입니다.
착각(錯覺)이나 착시(錯視)처럼 느낌에도 착감(錯感)이 있습니다.
줄려는 마음, 곧 사랑이 알량할 때는
조금 주고도 많이 주었다고 느껴집니다.
줄 마음이 없는데도 주었으니 많이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받고 싶은 나의 욕심이 크고 많으면
알량한 그의 사랑에 비하면 정녕 큰 사랑을 내게 주었는데도
내 욕심만하지 않은 그의 사랑에 적게 받았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이 주고 적게 받았다고 느끼는데
사실은 오늘 주님 말씀대로 되질해주는 그 되로 받습니다.
이것이 사랑 없는 욕심의 되입니다.
그런데 욕심이 적고 사랑이 많으면
주는 것은 적고 받는 것은 많다고 느껴집니다.
주는 것은 적고 받는 것은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욕심 없는 사랑의 되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더 주고 싶기에 많이 주고도 적게 주었다고 생각하고
자녀의 작은 사랑으로도 크게 충만합니다.
그래서 역시 되질해주는 그만큼 사랑도 많이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자기 되 이상으로 줄 수도 없고
자기 되 이상으로 받을 수도 없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전삼용신부-
어느 날 나귀가 등에 짐을 잔뜩 지고 가다가 그만 개울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나귀는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때 개울을 건너던 개구리고 허우적거리는 나귀를 보며 소리쳤습니다.
“아, 시끄러워, 이 바보 같은 녀석아, 개울에 빠졌다고 왜 그리 호들갑이야. 날 봐, 난 너보다 힘도 없고 몸집도 엄청 작지만 그래도 헤엄쳐서 잘 건너잖아. 그렇게 소리 지를 시간에 헤엄을 치려고 노력을 해 봐.”
사람은 대부분 이 개구리처럼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 다 못해도 내가 하나 잘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남을 판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그 판단은 반드시 나에게 돌아옵니다.
저도 어렸을 때 강냉이 장수 아저씨가 공자로 강냉이를 나누어준다고 했을 때 빈손으로 나갔습니다. 그 아저씨를 그렇게 자비롭게 판단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는 내 자신이 자비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 기준으로 그 아저씨가 내 손 가득히 강냉이를 주어도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밥그릇부터 시작하여 큰 대야까지 가지고 나왔습니다. 처음에 저는 그들을 비웃었지만 그 아저씨는 각자 가져나온 그릇에다 강냉이를 하나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저는 겨우 손바닥에 조금만 담아올 수 있었습니다. 각자 그 아저씨를 평가한 대로 되돌려 받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고 하시며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심판하는 잣대로 하느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내가 남을 거짓말쟁이라고 심판했다면 하느님 앞에서 정말 완전히 거짓이 없는 한 나도 거짓말쟁이라고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나의 심판 기준으로 나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완전하게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울 수 있다면 내가 어떤 죄를 지었든 하느님도 나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판단 잣대를 내가 버려서 하느님께서 나를 어떤 잣대로 심판해야 할지 모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잣대로 하느님만 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 잣대로 심판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판단은 나에게 그대로 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터지기 몇 해 전, 오하이오주의 큰 농장에 한 초라한 소년이 찾아와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주인은 일손이 모자랄 때라 소년을 채용했습니다. 그런데 3년 뒤 이 ‘머슴’이 자기 딸과 사귀는 것을 알고 내쫓았습니다. 그로부터 30년 뒤 주인은 낡은 창고를 수리하다 그 소년의 짐을 발견하고 내용물을 살피던 중 소년의 이름이 제임스 A 가필드라는 것과 현직 20대 미합중국 대통령과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농장 주인은 대통령 사위를 맞을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인들도 단점이 아주 많습니다. 노아도 술주정꾼이었고 모세는 말더듬이에 용기 없는 사람이었고 삼손은 호색가였으며, 다윗은 호색가에 살인자였고 그의 아들 솔로몬은 호색가에 우상 숭배자였으며 우리의 첫 교황님인 베드로는 하루에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 사람이고 바오로도 교회의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구원 역사의 큰 획을 그으신 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대한 인물로 세우셨는데 우리가 어찌 그들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심판자는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노상강도의 이야기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란 이름은 ‘늘리는 자’란 뜻입니다. 그는 앗티카라는 지방에 살면서 자기 영지를 지나가는 나그네를 잡아 쇠 침대 위에 누이고 결박했습니다. 그래서 여행자의 키가 침대보다 짧으면 몸을 잡아 늘여 침대 길이에 맞추고, 반대로 길이가 침대보다 길면 긴만큼 잘라버려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테세우스라는 영웅이 이 프로크루스테스를 잡아 그가 여행자들에게 했던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라는 말은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융통성이 없다는 뜻의 관용구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 마음 안에 그런 침대가 있다면 빨리 버립시다. 언젠가 그 침대 위에 내가 누이게 될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조: 한태환, 예화포커스)
“형제 여러분,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자기 형제를 헐뜯거나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헐뜯고 율법을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율법을 심판하면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심판자가 됩니다. 그러나 율법을 정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이기에 이웃을 심판한단 말입니까?” (야고4,11-12)
<<짧은 묵상>>
저는 신학생 때 성경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의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로마에서는 박사학위를 하려면 석사 때 학과시험, 종합시험, 논문의 점수를 종합하여 평균 90점이 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논문 점수를 너무 낮게 받아 성경으로 계속 박사학위를 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사제가 되고 다시 유학 나와서는 교의신학으로 바꾸어 석사부터 다시 해야 했던 것입니다.
사실 저는 처음에 성경을 공부하면 그리스도에 대해 더 많이 알 것 같아서 남들이 어려워 꺼리는 성경을 공부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부하다보니 성경은 신학보다는 수학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성경신학 내에서는 성모님의 원죄 없으심이나 승천과 같은 교리에 대해서는 언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쓰여 있는 문자에서 벗어나는 해석을 하면 너무 비약한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식의 공부는 저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느끼고 박사학위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마음먹은 대로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논문을 제출할 때 논문지도 교수님이 저에게 대단히 화가 난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그 신부님은 제가 박사학위를 이어 쓰려는 줄 알고 지도해 줬는데 저는 한국 들어가서 서품 받겠다고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은 서품 받고 바로 나와서 논문을 이어서 쓰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너무 지쳐서 더 이상 공부를 계속할 수 없을 것 같고 일단 한국에 들어가서 서품 받고 보좌생활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너무 지쳐있었기에 약간 짜증 섞인 반응을 보였고 신부님은 논문발표 때 당신이 어떻게 하는지 한 번 보라고 하셨습니다.
어차피 논문은 제출한 것이니 학위는 딸 수 있는 것이고 그러면 서품 받는 것도 문제없고, 그리고 논문 점수가 낮으면 굳이 주교님께 공부 못하겠다고 변명을 대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유학을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논문발표는 지도 교수님과 다른 두 분의 교수님이 함께 들어오십니다. 제가 논문의 줄거리를 발표하자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답하기도 이전에 논문 지도 교수님은 “이거 다 베껴 쓴 거야.”라고 두 교수에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논문에서 베껴 쓴다는 것은 일종의 도둑질이고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두 명의 교수의 눈빛이 갑자기 바뀌며 지도교수와 한 몸이 되어서 저를 나쁘게 판단하였고 그렇게 통과는 되었지만 박사를 계속할 수 없는 점수를 주었습니다.
사람의 판단이 얼마나 부적절하고 정의롭지 못한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담당 교수는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다고 당신이 직접 교정해 준 것까지도 모두 남의 것을 베껴서 쓴 것이라고 말했고 또 다른 교수들은 학생의 말은 들어볼 생각도 안하고 지도 교수의 말만 듣고 학생을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좋게 판단 받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좋게 판단해주지 않는다고 슬퍼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유일한 심판자이신 하느님께만 정의롭게 판단 받으면 그만입니다. 사람은 하느님까지도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판단하면서 저지르는 큰 잘못은 남들을 심판하면서 자신이 하느님의 지위에 오르는 교만을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심판관이 되면 그만큼 완전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기에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그 잣대로 자신도 심판을 받고 그러면 죄인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예수님은 남에게 되질하는 바로 그대로 너희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남을 항상 좋게 평가하고 좋은 면만을 보면 남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도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을 평가한다는 것은 그만큼 교만해 있다는 것이고 남을 높인다는 것은 그만큼 겸손해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실 때 가장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래서 낮아지면 높아질 것이고 높아지려하면 낮아질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저희 집에는 현미경이 있었습니다. 이 현미경은 참으로 신기했지요.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현미경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한 것들이 움직이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지요. 어린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었습니다. 왜 직접 보는 것과 현미경으로 보는 것은 이렇게 차이가 나냐고 말이지요. 제 형이 이렇게 말해주었지요.
“현미경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물체나 미생물을 확대해서 보여주는 거야.”
아무튼 신기해서 하루 종일 이것저것을 현미경으로 바라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관찰을 하다가 문득 이러한 의문점이 생겼어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확대해서 보여준다면, 멀리 있는 것들을 망원경처럼 잘 보이게 하지 않을까?’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군요. 현미경은 가까이 있는 것들을 확대해서 보는 것이고, 망원경은 멀리 있는 것을 확대하여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현미경으로 곰팡이 같은 세균을 보는 것은 당연하지만, 망원경으로 세균을 보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망원경으로 세균을 보지 못한다고 이 망원경이 잘못되었다면서 따지면 어떨까요? 아마 이게 무슨 억지냐면서 무시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런 모습을 취할 때가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시선으로 이 세상을 보라고 하시는데, 우리들은 이 세상의 시선으로만 보고 있으면서 모든 것을 다 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기 뜻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남에 대한 판단과 단죄를 서슴지 않고 행하는 그 모습은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렇게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들을 향해서 주님께서는 이제 제대로 좀 보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통해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처럼, 이제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시선이 아닌 주님의 시선인 사랑으로 모든 것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시선만이 제대로 볼 수가 있으며, 주님의 뜻대로 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러한 말씀을 하셨지요.
“마음이 좁쌀만한 사람이 하느님을 믿으면 하느님의 크기도 좁쌀만 하고,
마음이 태산만한 사람이 하느님을 믿으면 하느님의 크기도 태산만하다.”
나는 과연 하느님을 좁쌀만한 분으로 만들고 있을까요? 아니면 태산만한 분으로 만들고 있을까요? 내 안에 있는 사랑의 마음만이 하느님을 크신 분으로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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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혹은 부정
-김대선 신부-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남의 이야기가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타인의 불행이나
잘못을 이야기합니다. 그 대상이 공인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결국 그러한
이야기들은 억측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상대에게 큰 상처를 남겨주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날 이러한 모습은 ‘댓글’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댓글은 누군가의 의견이나 사건에 대해 자신의 객관적인
입장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우리들의 인터넷 문화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부정적인 모습입니다. 그것은 내 얘기가 아니라 남의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언젠가는
나도 남의 심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나 자신을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긍정적일 때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긍정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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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하지 마라
- 전봉순 수녀-
어렸을 때 고향집에는 감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가을이면 어머니는 잘 익은 감을 읍내 시장에 가지고 가서 소매상인에게 내다 파셨다. 상인에게는 한 접(100개)씩 넘겼기 때문에 미리 숫자를 세어야 했다. 나는 감을 셀 때마다 신이 났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이제 그만 됐다.” 하실 때까지 몇 번이고 100개가 맞는지 세고 또 세었다.
어느 장날, 감을 팔러 시장에 가시는 어머니를 처음으로 따라 갔다. 어머니는 감을 소매상인에게 넘길 때마다 항상 몇 개를 더 가져가셨다. 그날도 다름없이 여유분을 가지고 가셨다. 나는 어머니가 후하셔서 소매상인에게 인정상 더 주시는 것이라 믿었다. 그날 나는 어머니의 시장주머니가 두툼해지는 것을 보면서 신이 났다. 게다가 우리 물건을 사 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았고 어른들이 거래하는 모습도 참 신기했다. 나는 소매상인이 어머니의 감을 셈하는 것도 유심히 지켜보았다. 내가 이미 세어놓은 것이기에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상인을 전혀 의심하지도 않았고 숫자를 헤아리는 데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 생각에 어머니는 그저 그 상인을 믿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상인은 다섯 개씩 헤아리면서 어떨 때는 큰 손으로 여섯 개를 쥐고도 다섯이라고 했다. 나는 어린 마음에 너무 화가 났다. 속임수라는 것을 그 상인한테서 처음 경험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어머니가 속고 있으면서 그것을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억울했다. 어머니는 “내가 잘못 헤아렸나?” 하시고는, 그 상인이 말하는 대로 확인해 보지도 않고 여유분으로 가지고 온 것을 더 주셨다. 나는 어린 마음에 꽤 억울하기도 하고, 상인의 정직하지 못한 태도에 실망해서 내가 본 사실을 그 자리에서도 나중에도 말씀드리지 못했다. 어머니가 속았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속상하실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새로운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항상 여분의 농작물을 넉넉히 가지고 가시면서 속임수를 당할 때마다 그냥 말없이 채워주신다는 것을. 어머니가 사실을 알면서 그렇게 하셨는지, 아니면 정말 모르고 그렇게 하셨는지 나는 지금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일이 가끔 떠오르는 것을 보면, 그 상인의 속임수를 보고 어린 내가 느낀 분노가 꽤 컸던 모양이다. 그 이후로도 나는 어머니께서 항상 개수는 넉넉하게, 곡식 되는 넘치게 되시던 것을 보았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오늘 내가 복음을 사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따지지 않고 후하게 베풀고 그저 너그럽게 대하는 것! 그것이 ‘남을 심판하지 않는’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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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기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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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사람 되게 하시는
- 경규봉 신부-
기원전 722년, 북부 이스라엘(사마리아)은 아시리아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다. 아시리아는 북부 이스라엘의 영토를 자신들의 지방 영토에 편입시키고,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데려갔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이는 곧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몰아내신 것이며, 하느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는가? 북 이스라엘의 백성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다는 점에 대해 절망하고, 하느님을 원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고통을 통하여 자신들이 멸망한 까닭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무기력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 하느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들을 섬김으로써 야훼 하느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임을 깨달은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법을 지키도록 수없이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며, 우상을 섬겼다.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다.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5단계의 심리적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병과 상황에 대하여 부정하는 부정의 단계이다. 다음으로 하필 자신이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분노의 단계이다. 이어서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원하며 절대자와 타협하려는 단계, 그리고 자신의 상황이 절망적임을 알고 느끼는 우울의 단계를 지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단계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심리적 상태는 극도의 고통과 시련을 당하는 이들도 똑같이 경험하곤 한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커다란 고통과 시련을 당할 때에 하느님께 부르짖으며 하느님을 원망하고 저주하기도 한다.
“도대체 왜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고통과 시련을 주실까? 내가 어떤 잘못과 죄를 지었기에 이처럼 혹독한 고통과 시련을 주실까? 도대체 그런 하느님은 정말 계신가?” 하는 등의 질문을 던진다. 때로는 자신의 상황을 부정하려 하고 분노하며, 극심한 우울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단계에 이르는데, 이 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의 참된 자리를 찾게 된다. 사람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흙이요 먼지에 불과한(창세 3,19)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인간은 흙이요 먼지이다. 젊고 활력이 넘칠 때에는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라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을 과시하지만, 늙고 힘이 빠졌을 때 비로소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된다. 성공가도를 달릴 때에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실패했을 때 인간은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된다.
인간의 욕심과 생각은 무한하지만 인간의 몸은 결코 욕심과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부족하고 나약한 흙이며 먼지에 불과하다. 인간의 정신과 영혼은 하느님을 지향하지만, 인간의 육신은 죽어서 땅에 묻혀 썩어 없어질 존재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늙고 병들었을 때, 처절한 실패의 쓰라림을 맛보았을 때에, 시련과 고통을 당할 때에 참 자신을 보고, 알고, 그리하여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련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며,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으로 변화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하느님의 법과 말씀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나라를 잃고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포로 생활의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의 참 모습을 보았으며,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더욱 굳게 믿게 되었다. 시련과 고통은 그들을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고통과 시련, 그것은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고, 없어져야 할 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사람은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비로소 참 사람이 되며, 참 신앙인이 된다. 즉,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도 우리를 사람이 되게 하고 당신께로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그처럼 좋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하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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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의 기준
-최성우신부-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오늘의 복음 말씀은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듯이 자신에게도 그런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자신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또 다른 표현이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겸손한 양 자신을 비하시키기가 쉽다.
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도, 사랑의 표현이 무시당할 때도 자신을 비난하면 상처만 입을 뿐이다. 물론 다른 이에게 화살을 돌린다고 해도 남는 건 상처뿐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매번 경험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나 자신을 비난하거나 판단하는 건 어떤 면에선 상처받지 않으려는 방어에서 나오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방어를 하고 자신을 지킬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그렇게 한다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 아니다.
못났으면 못난 대로 독특한 무엇이 있음을 감사하고 자연스럽게 살 수 있었으면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한계를 인정하면 소유와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고 겉꾸미거나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자유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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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솔한 판단
-박영봉신부-
사람들의 명예를 존중하려면, 그들에게 부당한 손해를 끼칠 수 있는 모든 태도와 모든 말을 삼가야 합니다. 이웃의 도덕적인 결점을, 충분한 근거도 없이, 은연중에라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경솔한 판단의 죄를 짓습니다. 타인의 결점이나 과실을, 이를 모르는 사람에게 객관적으로 타당한 이유 없이 알리는 사람은 비방의 죄를 짓습니다. 허위로 다른 사람들의 명예를 해치고, 그들에 대해 그릇된 판단의 계기가 되는 사람은 중상의 죄를 짓습니다.
경솔한 판단을 피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이웃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가능한 대로 좋게 해석하도록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선량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웃의 주장을 비난하기보다는 그것을 선의로 이해하도록 더욱 마음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하여 자신을 하느님의 자비로운 심판에 맡김으로써, 이 지상의 삶이 끝날 때 받게 될 심판을 앞당겨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현세 생활에서 영원한 생명과 죽음에 대한 선택권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며, 대죄를 지은 채로는 들어갈 수 없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회개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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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날 때면 산책을 나가십시오
-양승국신부-
고령의 노인이 의사에게 건강 진단을 받았는데 아주 건강했습니다. 의사가 노인에게 건강하게 산 비결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이렇게 대답 했습니다.
“50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는데, 결혼 초에 아내와 이런 약속을 했지요. ‘내가 화나면 당신이 부엌으로 비켜주고, 당신이 화가 나면 내가 산책을 나가겠소.’ 라는 거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정말 산책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건강해진 거지요. 하하.”(‘부부로 산다는 것’, 이즈덤 하우스 참조)
신혼 초에 내렸던 두 분의 결정, 참으로 지혜롭고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슬픈 일이지만 결혼은 현실입니다. 보통 현실이 아니라 쓰디쓴 현실입니다. 서로 마주보기만 해도 스파크가 번쩍 번쩍 튀는 꿈같은 나날은 한 순간이지요. 결혼은 매일같이 ‘사랑에 밥 말아서’ 먹고 사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일 년, 이년, 삼년이 지나가면 아무리 외면하려고 기를 써도 배우자의 결함이 슬슬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그 결함은 주로 어떤 것들입니까? 돌아보면 너무나 사소한 것들이어서 웃음이 나옵니다. 마음 크게 먹으면 참아 넘길만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한두 번 조용히 말로 이야기할 때 마음에 안 드는 버릇 좀 고쳐주면 좋을 텐데, 죽어도 협조를 안 합니다. 별것도 아닌 걸로 속상하게 하니 더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이렇게 속으로 판단하고 분개하는 자신의 모습이 참으로 한심합니다. 한 평생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답답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마다 상대방을 마음속으로 심판하고, 단죄하고, 불같이 화를 내는 대신 밖으로 나가보십시오. 근처 공원을 거니십시오. 가까운 야산을 오르십시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과 접하십시오.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보십시오. 옹졸했던 마음이 씻은 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상대방을 판단하고, 미워하고, 단죄한 일이 떠오르면서 웃음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부분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습득해온 버릇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부분은 인내와 기도로만이 해결 가능한 것도 있습니다. 어떤 부분은 내 판단이 100% 잘못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심판, 단죄를 함부로 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어쩔 수 없는가봅니다. 우리는. 자기 코가 석자면서도 늘 상대방에 신경 엄청 씁니다. 자기 정리도 안 되는 사람이 이웃에 대해서는 어찌 그리 날카로운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는지 모릅니다.
상대방이란 존재를 잘 견뎌내는 것, 이웃을 잘 참아내는 것은 덕 중에서 큰 덕입니다. 어쩔 수 없이 한 평생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우리들입니다.
때로 상대방도 나를 순교자적 인내로 참아가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하느님께서 배우자를, 가족을, 동료를, 형제를 우리에게 보내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완전함과 거룩함에로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존심 강하고 콧대 높은 우리의 스승으로 배우자, 가족, 동료, 형제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나날이 아무리 형편없어도, 우리의 생활이 아무리 부끄러워도 하느님께서는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끝없이 용서하십니다. 자비를 베푸십니다.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우리가 이웃들을 향해 할 일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그들을 단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끝없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새 출발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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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변화하는 순간
-이상영신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스스로 자기를 알 수 없게 하는 온갖 장애물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만들어낸 자신의 이미지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러는 것 처럼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이 아주 특별한 인간이며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해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똑바로 들여다보면 거기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거짓된 이미지들, 거짓된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 자신을 대단히 중히 여기는 등등의 생각들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바라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타인 역시 밖으로 드러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허구도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을 꿰뚫어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보더라도 그것은 부풀려집니다. 잘못되어 있거나 이상한 것은 언제나 상대방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편법을 사용해 왔습니다. 그 방법이란 다름 아니라 자신이 선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 속에서 모든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선해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선하게 존재하는 것과 상대적으로 선한 것, 두 가지 입니다. 상대적으로 선하다는 것은 곧 상대방이 잘못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신이 선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이야 말로 악한 자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현상입니다.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타인이 악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이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토록 쉬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악함을 과장시킬 수 있으며 우리가 과장시킨다 해도 그것을 막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과장되고 투영된 다른 사람의 악함 앞에서 우리는 마치 순진무구한 사람처럼 비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좋게 평가를 하면 우리는 입에 힘을 주면서 그 사실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독자적인 방식으로 많든 적든 소위 선한 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가 타인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누구나 타인을 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변화하는 순간 세계도 변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 속에 생명력으로 가득 찬 한 부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이 세상의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단순하게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그 변화는 우리가 허구를 떨쳐 버릴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만일 자신이 하찮은 존재임을 알게 되면, 우리가 만일 자신의 진실성 없는 삶을 알아차린다면 그런 허구들은 곧 떨어져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의 티를 빼내어 주겠다.'고 하겠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지 않겠느냐?"
우리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허구입니다. 우리는 사물들을 뚜렷하게 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희미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부터 그 들보를 들어내면 우리는 비로소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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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만을'을 버리면
-김찬선신부-
어제는 어떤 형제님이 저를 보고 더 건강해진 것 같고
행복해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남자들은 이런 표현을 잘 안 하는데 예사롭지 않아서 그랬는지
전에는 지나치던 그 말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정말 그런가?
더 건강해질 것은 없을 것 같고, 그러면
더 행복한가?
뭐 더 행복할 이유도 없는데.......
한 달 전에 비하면 별 차이가 없는 삶이지만, 그러나
옛날과 비하면 분명 저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흡했던 행복의 조건이 이제 충족되었기 때문도
외부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제가 서서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보이는 것이 온통 나쁜 것,
잘못된 것들뿐이었습니다.
남이든 저든 나쁜 것과 잘못된 것들만 보이고
그 잘못도 크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것이 서서히 바뀌더니 언제부턴가
좋은 점이,
잘하고 있는 것이,
애쓰는 것이,
예쁜 짓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최선만을 고집하지 않게 된 결과입니다.
남이든 저든 이렇게 긍정하고 칭찬하니
칭찬을 하면 고래도 춤을 춘다는 말처럼
사람들이 기쁘고 행복해지고
무엇보다도 제가 행복해졌습니다.
물론
여전히 나쁜 점이 많이 남아 있고
잘못하는 것은 여전히 잘못하고
또 그것을 보지만
이제는 티만 보거나,
티를 대들보로 보는 어리석음이,
티만 보고 사람은 보지 못하는 그런 어리석음이
줄어든 것이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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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나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만나는 가족과 이웃을
-기정만신부-
우리 성당 안에는 ‘사랑마을’이란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노인복지를 위해서 지어진 것인데, 매일 어르신들이 오셔서 점심을 함께하십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봉사를 합니다. 이곳에 가면 ‘사랑마을’이란 이름처럼 따스함을 느끼게 됩니다. 많은 봉사자들이 기쁘게 봉사하고, 어르신들이 둘러앉아 담소도 나누며 기쁜 시간을 보냅니다. 이 ‘사랑마을’에서는 비교나 질투 그리고 투정이나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그 자리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마을’을 이루어 가는 모든 이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마음으로 행하기에 그렇습니다. 웃으며 찾아오는 어르신들, 반갑게 맞이하는 봉사자들, 기쁨으로 음식과 재료를 내어놓는 이들로 이루어졌기에 이곳엔 늘 평화가 있습니다.
이 모습대로라면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어리석음을 자처하는 판단은 불가능합니다. 판단하기 이전에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 내어드린다면 판단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으로 채우지 못하고, 하느님께 봉헌하지 못할 때 우리 삶에 여러 부정적인 아픔과 상처를 만드는 판단이 자리하게 됩니다. 먼저 나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만나는 가족과 이웃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면 판단으로 인한 시기·질투·미움과 분노가 아니라 이해와 받아들임을 통한 사랑과 평화가 우리 삶의 자리에 가득 피어날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지난 토요일에는 어떤 선배 신부님을 찾아뵈었습니다. 그 신부님께서 컴퓨터에 이상이 생겼다고 저에게 한번 와달라고 부탁을 하셨거든요. 사실 요즘 일이 많아서 가기 싫었습니다. 더군다나 큰 본당의 주임 신부님이시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아시겠어요? 그리고 그분들 중에 설마 컴퓨터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요? 그렇지 않겠지요. 분명히 저보다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신부님께서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저에게 전화를 해서 컴퓨터에 이상이 있다고 꼭 좀 와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할 일이 태산같이 쌓였는데, 또한 강화에서 그곳까지 가는 시간도 꽤 되는데……. 이런 생각들로 ‘가기 싫다’라는 생각이 굳어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를 잊지 않고 불러주시는 신부님을 생각해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전번과 마찬가지로 컴퓨터 자체에 커다란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대로 사용한다고 해도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제 나름대로 설명을 자세히 드린 뒤 성지로 돌아가겠다고 나오는데, 신부님께서 성지에서 얼마나 힘드냐면서 용돈 쓰라고 흰 봉투를 하나 내미시는 것이었어요. 저는 사양했지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심각한 고장을 고친 것도 아니고 그냥 컴퓨터 하드디스크만 정리했을 뿐이거든요. 그런데도 신부님께서는 많이 못줘서 미안하다면서 그 봉투를 저에게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성지로 다시 돌아오면서 신부님께서 저를 찾은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컴퓨터를 고치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후배 신부에게 용돈이라도 쥐어주고 싶으신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그 마음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내가 지금 귀찮고 힘들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못된 놈인지요?
자신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할 때, 바로 이렇게 못된 놈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여러분이 직접 목격을 하게 되면 어떻습니까? 보기 싫지요. 보는 것 자체도 짜증이 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이렇게 보기 싫어하는 모습을 바로 내가 따르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못된 놈이 되길 원치 않으시지요. 그보다는 좋은 사람이, 사랑을 가득히 담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세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관점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그래서 못된 놈의 길에서 벗어나 주님의 길인 진정한 사랑의 길로 들어서길 원하십니다.
지금 나는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나요? 내가 서 있는 그 길이 바로 사랑의 길이 아니라면, 얼른 자리를 옮기십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요.
빠다킹신부
누구나 가슴은 따뜻하다
-이봉하수사-
한국 천주교회는 1970-80년대를 지나오면서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각인되었고, 두 번에 걸친 교황님의 내한과 성체대회를 통해서 신자수 또한 급속도로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늘어나는 숫자에 비해 교회는 신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교회는 ‘내 탓이요’라는 운동을 전개하여 큰 효과를 얻었고, 교회 내에서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었습니다.
서양의 유명한 철학자도 ‘먼저 너 자신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깊이 성찰한 가운데 나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성 안에서 먼저 자신을 살피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보다 남을 탓하고 단죄하는 행위는 창조 이래 변함없이 이어온 사람들의
단적인 모습이요 끊임없이 이어지는 원죄의 한 조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 모든 덕목 중에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서 우리는 스스로 소홀히 하게 됩니다. 어쩌면 인간의 본성상 자신의 치부는 감추면서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싶은 욕망이겠지요. 그러나 모든 것이 허구로 드러났을 때는 어떠합니까? 네 탓을 하기 전에 내 탓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사회는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고 또 하느님 나라가 바로 그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살아 있는 자신이 성전임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 탓이 아닌 남의 탓으로 생각하고 행동했을 때는 우리가
오히려 이방인보다 못한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서 있는 그 자리에서부터.
▶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이기양 신부-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지요. 우리는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또 반대로 말 한 마디로 원수 관계를 만들기도 합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갈등과 싸움이 ?말?에서 시작이 되는 것을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떠한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싸움으로 치닫기도 하고 또 화해의 계기가 만들어지기도 하지요. 사람과의 관계 대부분이 언어로 시작되고 언어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위로가 되기도 하고 상처가 되기도 하며, 한 마디의 말이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쓰러뜨리기도 하지요.
지혜로운 말과 어리석은 말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남을 감싸주고 칭찬하는 말들은 지혜로운 말이지요. 남을 비난하고 헐뜯는 말들은 어리석은 말입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지요. 큰 전쟁이 일어날 뻔한 일을 막은 한 줄의 글을 소개합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양국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국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동상으로 인해 오히려 두 나라는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상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 칠레의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 동상이 칠레에 등을 돌리고 계신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동상 전면은 아르헨티나를 향했고 뒷면은 칠레 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칠레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분노케 했습니다.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거칠어갔지요. 양국간의 감정이 나쁜 방향으로 치닫고 있을 때 이를 명쾌하게 극복하는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칠레의 한 기자가 신문에 쓴 재치 있는 기사였다.
?예수님의 얼굴이 아르헨티나를 향하여 서 계시는 이유는 아르헨티나가 칠레보다 더 예수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칠레인의 고조된 감정을 가라앉힐 만큼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한 사람의 긍정적이고 평화적인 글이 두 나라의 엄청난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따뜻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담은 지혜로운 말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옵니다. 불에 기름을 끼얹듯 성난 국민을 선동하는 모난 기사가 실렸다면 아마도 전쟁이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7,1)
여기서 판단한다는 것은 나쁘게 보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쁘게 보고 말하고 생각하면 그 사람 또한 그대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쁜 말과 행동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누워서 침 뱉는 사람?이지요. 누워서 침을 뱉으면 그 침이 어디로 떨어집니까? 바로 내 얼굴로 떨어지지요. 남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면 나에게는 더 고약한 말이 돌아오는 법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지요. 남을 판단하고 나쁘게 말하는 것은 참으로 지혜롭지 못한 태도입니다.
특히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7,2)
그렇습니다. 내가 이러쿵저러쿵 이웃을 욕하고 저울질하면 하느님께서 나를 저울질하시기 전에 벌써 이 세상에서 그와 똑같이, 어쩌면 그 이상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말을 조심하고 지혜로운 말로써 공동체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여러번 말씀하셨지요.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4,29)
오늘 예수님께서는 남을 판단하지 말고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하고 말할 수 있느냐??(마태7,3-4)
오늘도 우리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며 공격적인 말들과 사건들로 넘쳐나는 세상에 나가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휩쓸리면 같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요. 그 와중에서도 이웃을 살리고 희망을 주는 긍정적인 말들을 생각하고 행하는 것, 이것이 복음을 사는 방법입니다. 위로와 격려의 내 말 한 마디가 깨어지고 상처가 나서 보복하고 싶은 감정들을 누그러뜨리고 새로운 계기를 만드는 바탕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기보다는 칭찬하고 격려하며 사랑의 언어만을 세상에 심는 복된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강민구 목사-
◆모든 일과가 끝난 주일 오후면 가끔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은 아닌가?’, ‘나도 실천하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치려고만 한 것은 아닌가?’, ‘내 속에 있는 들보를 못 본 체, 남의 티를 빼주겠다고 설치지는 않았나?’ 그런 생각들 가운데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중요한 해답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 전에 갖추어야 될 마땅한 자세’에 대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또한 ‘다른 이들에게는 신경 쓰지 말고 네 할 일이나 잘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대로 하느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2절). 주님이 보시기에 안타까운 점은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를 구분하고 나누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속에서 비교의식과 차별의식이 생기게 되고, 우월감과 열등감도 뒤따라오게 됩니다. 결국 ‘사람’의 온전한 모습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차이점 못지않게 공통점도 많습니다. 어쩌면 일치되는 면이 더 많고 본질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고, 생명의 호흡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또한 맏형이신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며 사는 한가족 공동체, 한 주님을 모시고 사는 한몸을 이룬 교회입니다. 그러니 남이 아프면 나도 아픕니다. 남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합니다. 내가 누구를 심판하면 나도 이미 심판받은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 안에서 하나인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마땅한 것 아니겠습니까? 나를 잘 닦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 당연히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남을 나쁘게 판단하지 마라
◆ 이홍기 몬 시뇰 ◆
1. 마태 오 복음 5장부터 7장까지는 예수님의 주요 설교 모음집인 산상설교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이 들어 있는 7장부터는 설교의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고,
그 대상도 주로 제자들, 곧 지역 교회의 공 동체 내부 사람들, 나아가서 모든 시대의
공동체 구성원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본 당 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보아도 됩니다.
오늘 복음은 남을 단죄하거나 나쁘게 보는 태도를 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 다.”
여기서 ‘판단하다’는 단순하게 옭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자기 개인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나쁘게 비판하거나 죄인으로 단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은 우리가 대인 관계에서 흔히 저지르는 잘못을 잘 아시고 훈계하십니다.
우리는 입을 열었다 하면 남 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하고, 그것도 남을 칭찬하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남을 욕하거나 결점을 드러 내기를 좋아하는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때로는 남의 숨은 약점까지도 보태거나 과장해서 꾸며댑니다.
그러한 심리 이면에는 남을 깍아내리면서 자신을 치켜 세우는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표현하자면 ‘너는 못나고 나는 잘났지’ 생각하는 이른바 엘리트 의식이라 할까요.
특히 그런 현상은 우 리 한국 사람들과 한국 교회 안에서 심한 편입니다.
모두 ‘내 탓’은 없고 ‘너의 탓’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높아지는 것은 결코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판단하 는 그대로 판단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저울질을 당할 것’이 라는 원칙으로 설명하십니다.
이 말씀을 원문의 내용대로 표현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남에게 되어주는 되만큼
되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종 말 심판 때에는 남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크게 작용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동태보상률이라고들 합니 다.
하느님께서 심판 때에 각 사람에게 적용하시는 기준은 최소한 두 가지일 것 같습니다.
그 한가지는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의 기준이고,
다른 한가지는 당사자들이 이웃에게 적용한 엄격하고도 다소 왜곡된 판단입니다.
그러니 되도록 이웃을 나쁘게 판단하지 맙시다. 이웃을 좋게 보아서 손해보는 것은 없습니다.
남을 비판할 때에는 열 번 백 번 신중하게 생각하고, 나의 비판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를
살펴보고 하여야 합니다.
2. 또 예수님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에 든 티를 빼내주려는 태도를 책망하시면서 먼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라고 하십니다.
눈에 보일가 말가 한 작은 먼지같 은 남의 결점은 용케도 잘 보면서 그보다 훨씬 더 큰 자신의 결점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탓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아마도 당대에 널리 알려졌던 격언이었던 것 같 습니다.
이 말씀도 앞의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경고의 연장선상의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을 비판할 때에는 그 사람의 결점은 크게 부풀어서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의 결점은 숨기거나 너그럽게 대하곤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에서나 볼 수 있는 공통 현상입 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주로 일반 백성을 ‘땅의 백성’(암하아레츠)이라 하여 무시 하고
그들의 결점을 부각시키고 단죄하곤 하였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 들을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사들을 꾸짖으실 때에 흔히 쓰시던 말씀입니다.
지금은 비록 예수님 시대와 다르지만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도 언제나 남을 헐뜯고 욕하며 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바로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속하지나 않 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위험을 안고 사니깐요.
따라서 사랑이 넘치는 건전한 공동체 를 이루기 위해서 다음 몇가지 사항을 기억하고 실천합시다.
1) 먼저 다른 사 람에 대한 판단은 하느님께 맡깁시다.
하느님만이 사람들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십 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껴안으시고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겉모양만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르치기 쉽고, 흔히 색안경을 끼고
낮춰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2)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남을 대할 때에는 자신의 부족을 잊어버리고 혼자 완전한 사 람인듯 착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남에 대해 불평 불만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 불완전하니까 우리의 비판이 때로는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남보다 더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함부로 남의 결점을 그렇게 선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못난 우리들을 잘 아시면서도 어여삐 보아 주시고 용서를 베푸시며,
벌을 주시면서도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고자 애를 쓰십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합시 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닮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도 하느님을 닮은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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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