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에 한민족참역사에 대한 비판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연사와 청연사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서 쓴 글이 있는데, 그냥 참고하십사하며 글을 올립니다.
---------------------------
안녕하세요. 비사인(greenyds)입니다. 한민족참역사측에서도 이 릴레이를 알게 되었더군요. 이번 기회에 서로 간에 활발한 토론을 하고 그에 대한 논박을 하면서 진정한 역사를 찾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번 글은 아마도 상당한 논란을 초래할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반드시 한번쯤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사안인 듯 합니다. 즉 한민족참역사에서 말하고 그들의 심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연사(演史)』와 『청연사(淸然史)』의 사료적 가치 말이지요. 지금 그들은 그 책을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뭐라고 단정 짓기가 힘든 게 사실이긴 합니다. 그러나 부분부분 연사와 청연사를 언급해 놓았고 그에 관련된 글을 몇 편 올려놓았기에 그것을 바탕으로 연사와 청연사의 사료적 가치를 따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연사와 청연사는 한민족참역사 카페의 정신적 지주이신 삼우선생께서 소장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공개를 피하고 있으며, 대신 부분부분 자신들의 논거를 밝히는 중요한 사료로서 들고 있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작 한민족참역사 카페에서는 연사와 청연사를 공개하라는 글이 오르면 그 회원을 탈퇴시킨다는 점입니다. 이는 공공연히 퍼져있는 사실이며 실제로 그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한민족참역사 카페의 ‘뒷간(해우소)’라는 폴더에는 이러한 설명이 있습니다. ‘중국요원이나 매국노등의 부적절한 글 들 입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글들을 모아놓고 있지요. 예전에 이 폴더의 이름은 ‘Anti 칸코리아’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지식in에서 제 비판글을 퍼서 카페에 올려놓고, 그 후에 회원들 간의 마찰이 있자 무조건 강등 및 탈퇴를 시킨 후 그 글들을 모두 한 곳에다가 모아 놓은 것이 시초이지요.
이 폴더의 캐논슈터님이 쓰신 117번글인 ‘연사가 존재하나요?’는 그 전형적인 일례입니다. 연사를 밝히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요새 카페가 정체된 것에 대해서 지적하고, 인터넷 상에서 문제점을 지적한 것인데 별다른 이유 없이 강등시키고 해우소로 보냈지요. 이런 식의 태도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카페에 대해 그에 대한 제안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곳의 글들을 보면 아쉬운 게 참 많습니다. 발전 없는 정체... 그 무서움은 언제가 알게 되겠지요. 해우소는 불교에서 근심을 푸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근심을 풀지 않고 쌓아두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럼 이제 한민족참역사에서 말하는 연사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아래의 글은 ‘먼저 읽어보십시오.’폴더의 6번째 글인 ‘연사(演史)’라는 글로서 외로운 짚시님이 쓰신 글입니다.
연사는, 고려후손인 려진족(만주족)이 명국(중국)을 정복했을 당시 청조
태종의 아들 순치제가 난징(명나라 서울)을 접수하면서 사관에 명하기를
" 태조께서 말씀하시길 우리한(칸)민족의 역사가 유구한데 기록이 부실하다
하신바 명황실 서고에 있던 사료중 한민족역사를 따로 정리하라!" 는 명
을 내림으로써 만들어진 한민족 전문 역사서인데 청조의 멸망이후 사가에
따로 보관되어오던 필사본을 삼우선생이 아주 우연히 당시 관계자후손을 만나
입수하게 된 매우 귀한 한민족 역사자료 입니다.
이게 바로 연사가 쓰이게 된 배경입니다. 청이 남경을 공략한 것은 1645년입니다. 이때는 바로 순치 3년으로서 순치제가 즉위한 것은 1643년입니다. 근데 즉위 당시 순치제의 나이는 겨우 6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청의 실권은 도르곤과 지르하란이 장악하고 있었지요. 다른 강한 친족들이 실권을 잡고 있으며, 그 당시 정세 상 8살의 순치제가 과연 그러한 판단아래 명령을 내릴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명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청나라가 아니라 이자성의 대순국입니다. 물론 잔존세력은 청나라 순치제 때 모두 평정하였지만 말이지요. 그리고 위의 기록은 『청사고』에도 나와 있지 않는 내용입니다. 물론 『청사고』에 나와 있지 않다고 해서 사실이 아니라고 하기엔 근거가 부족하지만, 정작 한민족참역사에서는 어느 역사서에서 저런 사실을 발췌하였다는 기록이 없어서 답답하군요.
여기, 간단히 그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민족은 신나쪽(지금의 경상도 지역:고지명 신나)에서 비
롯된 금사람들로써 최초의 제국인 주신나라(제국)을 만들었
는데, 지도자를 단 이라 하였고 주신 당시에는 한민족외 다
른종족은 그 수가 상당히 적었으며 주변의 다른 종족들 스스
로 백성이 되기를 자청하여 지금의 반도와 일본, 중국과 러
시아지역까지 다물하였다. 단의 명에의해 이외의 각지를 배
달간자들중에 돌아오지않는 이들이 있었다.(배달=정복, 다
물=통치,신나=신라) 주신사람들은 가죽옷을 입고 말과 수례
를 타고다녔으며 멀리가는사람은 활, 쇠검,솥,개를 가지고 다
녔으며 사각뿔의 무덤과 제사 풍습이 있다.지도자를 한(단)이
라고 하였는데 다물안팍이 모두 존경하여 복종할뿐 2천년이
조선(고조선)의 원래이름이 주신이며 백성을 금이라 했고,한민족 최초의
발원지가 지금의 경상도지방이라는 점, 최고 지도자 이름이 단이며,제국
을 건설한 당시에 다른 민족들에 비해 한민족이 크게많았으며 군사조직이
있었고 기마군,활,칼,솥등의 도구들이 있었고, 주변에 살고있던 작은수의
종족들 모두가 단과 주신제국을 존중하여 스스로 영역에 들었고,단은 주변
으로 계속 원정대를 보냈는데 멀리간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주신의 문
화는 피라미드 무덤풍습이 있으며 역사는 약 2쳔년이다... (상세해설)
이게 『연사』의 일부 내용입니다. 신나를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신라는 본디 사로, 사라 등으로 불렸으며, 이게 후에 지증왕 대에 이르러 정립된 명칭이 신라입니다.
그리고 반도와 러시아라는 용어는 근래에 와서 번역한 것이라고 생각해야겠습니다만 본디 사서의 본지를 취하려면 그 당시의 언어로 쓰는 게 옳지 않을까요? 반도라는 단어도 근대에 등장한 용어이며, 러시아는 20세기 초까지 아라사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각지를 배달간 자들 중에서 돌아오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라... 배달 갔다는 표현이야 제쳐두고 보더라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중앙정부의 통제가 약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게 따지면 애초에 강력한 중앙정부가 성립해야 존재 할 수 있는 제국이라는 말과 정면적으로 대치됩니다.
그리고 사각뿔이라... 이런 말도 근대에 들어서 나온 말입니다. 한자에서는 사각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차라리 이 경우엔 方角이라는 단어가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원본 초기 번역이나 상세해설이나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본디 이런 용어를 쓰지 않습니다. 직역과 의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해야 하는데, 원본 초기 번역은 말 그대로 직역으로 해야 하며(사실 직역으로 보기엔 무리적인 표현이 많습니다.), 상세해설은 의역의 형태를 띠고 있지 해설적 성격은 약합니다.
즉, 한민족역사는 약 5~6천년전으로써 신라지방에서 번성하여 점차 북진하여 최초
의 제국인 주신제국을 건설한 후, 세계각지로 이동했다고 정의 합니다. 이점이 한단
고기하고 다른 부분입니다. 우리는 한단고기의 내용보다 연사의 내용이 더 실사적이
라고 판단하기때문에 한민족역사의 모든 정의를 이에 근거하여 내립니다. 그러하지
만 한단고기를 위서라고 판단하는것은 아닙니다. 공통부분도 있기때문입니다. 단지
전체적으로 연구가 연사보다 덜 진행되어 있으므로, 실사구시적으로 연사를 기준으
로 정한것입니다.
새로운 학설이긴 합니다만 그에 대한 구체적인 고고학적 물증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문화권의 형성 및 이동은 그에 공반되는 유물이나 유적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경상도지방을 두고 보았을 경우 청동기의 경우엔 다른 지역에 비해서 늦게 등장하며 그 전으로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 흔적은 크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하나지 둘이 아닙니다. 민족의 기원을 정 반대로 말하고 있는데 어째서 『환단고기』와 병립 할 수 있으며 둘 다 위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인지요? 역사는 그 당시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입맛에 따라서 맞출 수 있는 기호식품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연사』와 『환단고기』는 둘 다 중요한 사실에서 정 반대의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경우... 둘 중 하나는 위서일 수밖에 없습니다.
위서는 본래의 기록적 유산이라는 의미가 아닌, 가필로 인한 왜곡의 역사를 써 놓은 책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기록이 무조건적으로 정확할 수 없기에 약간의 오차는 용서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중요한 내용에서 완전히 다른 기록이 있을 경우엔 위서여부를 가를 수밖에 없습니다. 위서란 다수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그 속에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역사적 사실과 관계가 없이 쓰이면 성립됩니다. 그리고 위서로 취급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기사가 많은 경우 신뢰적 부분은 상당히 하락하게 됩니다. 그만큼 사료적 가치가 사라지지요.
최근들어 우리 한사(한민족참역사)가 보유하고 있는 연사와 청연사를 공개하라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우리 한민족참역사 교수진은 소장자의 뜻을 받아들여 비공개
하기로 하였다는 점을 다시 밝혀드립니다.
그 이유는
첫째: 원 소장자가 현재 중국인으로서 생존해 있고,
둘째: 내용에 대한 번역작업이 현재 신중하게 진행중이며
셋째: 현재 국사와 너무나 다르기때문에 시간이 필요하다.
입니다.
사료의 경우 비공개시 사료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은 있겠지만, 우선 그 경우 소수의 사람들로 인하여 사료가 쓰이고, 그 경우 객관적인 사료비판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료비판이 되지 않은 사료가 됩니다. 즉 현 상황에서 『연사』의 사료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민족참역사에서는 3가지 이유를 들어서 연사를 공개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를 살펴보면 원 소장자가 중국인으로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 그 근거인데, 동산의 경우 소유권을 양도하면 현 소장자에게 그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도 원 소장자가 중국인인데 그들과 연락하면서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되려 중국 정부의 의혹을 받기에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두 번째 이유를 살펴보면 번역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하는데, 백산님의 리플을 보면 한문 몇 자 적힌 종이 200쪽으로 그 양이 소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게으르지 않고서야 번역이 이렇게도 늦을까라는 의문이 들며, 번역문을 보아도 이건 번역이 아니라 2차, 3차적으로 걸러진 의역입니다. 의역의 경우 번역가의 의도가 들어가기에 사료적 가치가 떨어집니다. 역사를 전공하는 이라면 이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재 국사와 내용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수긍할 부분이 있다면 이에 대해서 외적이거나 혹은 내적인 사료 비판이 가해지면서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한민족참역사의 행위는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못 담는 격으로 사료 공개를 극히 꺼리는 것은 의심을 사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만약 스스로 사료비판을 한다면 이에 대한 철저한 예증을 들고, 적극적으로 연구의 홍보를 해야 합니다.
위의 글 아래에 달린 외로운 짚시님의 리플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연사는 영인본(원본을 사진이나 기타 과학적 방법으로 복제한 책)이 아니고 필사본(원본을 손으로 내용그대로 직접 옮겨적음으로써 만들어진 책)입니다. 원본자체가 필사본이고, 이후에도 만주족 자손들이 귀중한 내용을 보존하여 후대에 전하기위해 필사하여 보관, 전해져오던 자료입니다. 우리카페 교수진은 연사의 내용을 다른 사서들과 엄밀하고 정밀하게 검토한 후에 필요판단에 따라 조금씩 공개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원문은 한자로 기록되어있어 원본에 별 의미가 없고 내용에 대한 신뢰여부인데 중국은 현재 원 소장자를 찾고있고 일본은 침묵하고 있으며 국내사학계는 애써 무시하는 척 하고 있습니다^^
지속된 필사본이라면 그 사료적 가치에서 문제가 없을 수 없지요. 그리고 원문이 한자라는 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합니다. 청나라에서는 황제에게 올리는 글은 만주어로 표기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지속된 것으로서 그들의 주장대로 순치제의 명을 따라서 역사서를 집필하였다면 만주어로 써야 하는 게 상식입니다. 황제의 명령으로 역사서를 편찬하였는데 도리어 다른 글자를 쓴다면... 그 자체가 항명 아닐까요?
사료비판(Quallenkritik)은 외적 비판과 내적 비판을 통하여 이뤄야 합니다. 『연사』의 내적 비판은 후일로 미룬다고 하더라도 외적 비판은 지금 이 시점에서는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외적비판의 3요소는 ‘진실성의 비판’, ‘내력비판’, ‘본원성비판’입니다.
『연사』를 진실성의 비판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원문 초기 번역이 직역일 경우엔 바로 걸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용례의 면에서 실제로 쓰인 단어와 거리가 먼 부분이 많으니 말이지요. 그리고 현재 『연사』에서 밝히는 방식을 살펴본다면 진실성의 비판을 적용하기엔 한계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즉 사료비판조차 제대로 하기 힘들 정도라는 것은 사료적 가치를 말할 시 치명적일 수밖에 없지요.
내력비판에서도 문제가 됩니다. 앞서 지적한대로 순치제의 명에 따라 집필되었다면 최초의 판본은 만주어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를 한문본으로 바꿨다면 그 과정에서 1차적 번역의 문제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이를 지속적으로 필사하였다면 이로 인하여 2차적 문제가 일어났을 가능성 또한 높습니다. 그리고 이를 한글로 바꿀 시 변형시킨 부분이 많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3차적 문제가 일어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본다면 내력비판의 면에서 『연사』는 상당히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
본원성비판은 기타의 사료를 얼마나 참조하였고, 다른 사서에 매치되는 내용이 어떠한 것이 있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한민족참역사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타 사서와의 비교가 상당히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역사학의 기본인데, 상호비교를 통하여 그 당시 상황을 복원하려는 노력은 필수입니다. 그런데 이점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으며 그 대상이 위서인 경우엔 역시 불리한 위치에 속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도 『연사』는 결코 위치가 좋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연사에 대해서 제가 조선시대의 기록들을 살펴보면서 그 용례가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연사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니 과연 나오긴 하더군요. 저도 매우 깜짝 놀랐습니다. 어디 한번 살펴볼까요?
불초가 일찍이 《서유기(西遊記)》ㆍ《삼국연의(三國演義)》를 보는데 선군께서 보고 크게 책망하시기를 '이러한 잡서(雜書)는 정사(正史)를 어지럽히고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엄한 아비가 되는 동시 좋은 스승이 되기도 하였다. 어찌 나의 자식이 나쁜 길로 들어가게 하겠는가?' 하므로 불초가 그 훈계를 받들어 감히 다시는 연사(演史)와 패기(稗記)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 『청장관전서』 「야정유고」 제 8권 ‘선고부군의 유사’
과연 연사가 나오긴 합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요. 선군이 불초에게 잡서를 본다고 호통을 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 호통을 듣고 난 이후에 연사와 패기를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나오지요. 그런데 그에 앞서서 언급되는 것은 『서유기』와 『삼국연의』입니다. 즉 이들이 연사와 패기라는 것을 말하지요.
연사(演史)의 형식으로 지어진 것들은 처음부터 아이들 장난과 같아서 그 문자를 보더라도 비속(卑俗)하기만 하니, 진정한 역사를 어지럽힐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들이 일단 오랜 세월 속에 유전(流傳)되어 오고, 그리하여 진짜 사실과 가짜 이야기들이 뒤섞여서 병행되어 오는 동안, 거기에 실린 말들이 꽤나 유서(類書)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문장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또한 자세히 살피지도 않은 채 혼용(混用)하는 경우도 있다 하겠다.
예컨대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로 말하면 마반(馬班)에 버금가는 사서(史書)라고 할 것인데,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은폐된 나머지 사람들이 더 이상 보지 않는 책이 되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는 역대(歷代)에 걸쳐서 각 시대마다 연의(演義)가 나와 있는데, 심지어는 황조(皇朝)가 개국(開國)하면서 만든 성전(盛典)에도 연의에 나오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채용해서 부연(敷衍)한 기록이 실릴 정도였으니, 진(秦) 나라 시대에 책을 불태웠던 것처럼 국가에서 통렬히 금단(禁斷)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演史之作。初似兒戲。文字亦卑俗。不足亂眞。流傳旣久。眞假竝行。其所載之言。頗採入類書。文章之士。亦不察而混用之。如陳壽三國志。馬,班之亞也。而爲演義所掩。人不復觀。今歷代各有演義。至於皇朝開國盛典。亦用誕說敷衍。宜自國家痛禁之。如秦代之焚書可也。
- 『택당집』 「별집」 제 15권 ‘산록’
여기에서도 연사라는 단어가 보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연사는 한민족참역사에서 말하는 것과 한자가 동일합니다.
글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이제 연사가 가리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네. 바로 역사 소설을 연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조선시대에 쓰인 단어로서, 연의의 성격을 가진 소설이란 말이지요.
한민족참역사에서 말하는 연사가 바로 이 역사소설일 가능성이야 당연히 없겠지요. 다만 단어사용에서 같은 단어의 용례가 흥미로워서 이렇게 언급해 보았습니다. 물론 연사가 단순한 소설인지 아닌지는 좀 더 살펴봐야 알겠지만 말이지요.
이상입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쪽에서 사료를 공개하는 게 가장 낫겠지요. 그러면서 적극적인 토론이 이뤄져야 그들 본연의 목적인 국사교과서 개정이 가능하니 말입니다.
이번 글은 좀 복잡하여서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한사의 논리대로라면 8살의 순치제의 명령으로 『연사』가 집필되었다.
2. 『연사』의 원문 초기번역은 직역을 따르지 않고 의역의 성격이 강하다. 이 경우 사실 확인을 위해 원문을 보아야 한다.(번역에서도 17세기의 단어가 아닌, 근현대적 단어가 너무 많이 등장한다.)
3. 『연사』에선 한민족의 기원이 신나(지금의 경상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나 이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4. 『연사』와 『환단고기』는 민족의 근원의 면에서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다르며, 이 경우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위서이다.(위서일 경우 그 사료적 가치는 소실된다.)
5. 현 상황에서 『연사』의 사료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공개가 될 때까지는 사료적 가치는 없다.)
6. 한민족참역사에서 말하는 3가지 공개 금지 이유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7. 청나라 황실의 명으로 편찬된 사서라면, 청나라에선 황제에게 올리는 공문서가 만주어로 통일한 점을 미루어 볼 때 한자로 기록되었다면 이는 분명한 모순이다.
8. 내적 사료비판의 면에서 살펴 볼 때, 연사의 위치는 특히 내력비판의 면에서 불리한 편에 속한다.
9. ‘연사’는 본디 조선시대에는 역사소설이라는 뜻의 단어이다.
※ 참고문헌
『택당집』
『청사고』
『청장관전서』
박성수, 『歷史學槪論』, 삼영사, 2000
배용일, 『한국사개론』, 대왕사, 1993
http://kin.naver.com/open100/r_entry.php?eid=fAJMpKGJxu7FsqM9bImvNB4Xk6gr8nto&state=pr&rid=172881&l_url=L29wZW4xMDAvZGlyX2xpc3QucGhwP2Rpcl9pZD0xMTAxMDE=#7
첫댓글 이정도 수준의 비판글을 올리셨다면 탈퇴되실만 하십니다.. 기존의 공부를 배제하고 자신의 논리만을 주장하는 적당하게 공부하시는 게으르신 분들께는 다소 무리였을테니 말입니다. 근대 이전의 유교적 역사관이나 역사연구방법론보다 못한 역사인식론으로 민족만을 부르짖기만 할뿐이겠죠.. 삼국지연의에 빠져서 진수의 삼국지가 껄끄러워진 제게는 청장관전서의 '이러한 잡서(雜書)는 정사(正史)를 어지럽히고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이다.'의 부분이 눈에 쏙 들어오는군요...잘 읽었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