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 설악산 등반기

(이 사진은 지난 설날에 올랐을때의 사진 입니다.)
1973 8. 9 ~ 8.13.
정 지 홍 글.
山처녀 머리칼에
꽂혀 오는 그리움은
진달래 하마 벙글 듯
네 속 앓는 넋을 닮아
山心에
산까치 울어
아, 꽃바람 산바람......
지난 8일 오후부터의 5박 6일에 걸친 하기휴가의 기행을 적고자 글을 쓴다.
산 이름을 설악 이라 하여 그 최고봉이 1708m이며 강원도 인제군과 양양군 사이에 있어 원통리에서 동북으 로 속초에, 동남으로는 양양에, 이르는 두 갈래 길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태백산맥의 주능으 로서 남한에서 한라산, 지리산, 다음으로 높고, 그 오묘하고 웅장한 아름다움 때문에 제2 금강 이라 일컬어 오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한마디로 한라산을 60대의 노년산,지리산을 40대 의 중년산이라 치면, 설악은 생기 발랄한 20대에 해당되며 젊음이 엄치고 가장 다양한 산이다.
외관이 극히 견고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석리가 거칠고 풍화작용으로 기괴한 모습은 천하의 절경을 이루었고 울창한 숲, 맑은 계곡, 기암 괴석, 웅장한 폭포, 700여종의 고산식물과 각종 의 산짐승과 곤충 등은 나의 마음을 완전히 앗아 가고 말았다.
더구나 최고봉인 대청봉을 정복 한 그 승리에 찬 마음! 표현이 될까?
고3의 수학여행. 그러니까 1968.10.21.에 급우들과 설악산 을 향하던 설레임보다 더 큰 설레임이 가슴을 조이게 하고 큰 산 (大山)에 대한 두려움과 변화 무쌍한 설악산에 기후에 겁먹는 상태에서 그래도 기다리던 날이 왔다.
엄마의 몸조심하라는 다 정스런 인사를 뒤에 남기고 6시 30분 동부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서울에 도착하니 7시15분,
50여㎏의 대형 키스링을 메고 흥일 여인숙에 들어가 저녁은 순대국을 한 그릇 먹었다.
동대문 시장을 온통 뒤져서 텐트 지주 1개와 야전삽 1자루를 구입. 여인숙에 돌아와 포도 한 송이를 사다 놓고는 내일에 대한 부푼 가슴을 조이며 잠을 청한 게 11시경이다.
8월 9일. 맑음, 아침에는 짙은 안개. 5시 50분 기상. 아차! 늦었구나.
6시 차인데. 빨리! 헤이 택시! 마장동 시외버스로 6시 15분. 륙색을 버스에 놓고 급히 해장국 한 그릇. 멀건 해장국을. 6시 30분. 하늘도 안 보이는 짙은 안개. 30여m의 전방이 희끄무레할 정도인대도 금강운수 버스는 신나게 달린다. 음악은 팔랑대며 나르고 차창으로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원스런 바람! 여행은 즐거워라. 더구나 용대리가 6시간 정도면 도착한다니 여행신은 나를 돕는구나.
7시. 팔당 유원지 통과. 한강의 상류인데도 불이 굉장히 많다. 9시 30분 홍천 도착. 꽁치 통조림, 마늘 통조림, 미원, 사이다, 계란, 빵을 샀다.
10시 15분 홍천 출발. 11시 인제 경유. 12시30분 용대리(외가평) 도착. 알콜 2병과 비누 1개사다. 이곳서 백담사까지는 10여 km. 봄이면 2시간 이내에 돌파하겠는데. 계곡을 따라 걸으니 불은 점차 맑아지고, 바위는 커지고, 山을 느끼게 한다.
파아란 물이 어물져 흐르고, 산세는 험해지는가 하면, 나비들이 하늘거리며 한가로이 춤 추고 있다. 등에서 땀은 샘 솟듯 하고...
1시간쯤 강행군을 하다 넓적한 바위 위에 땀에 젖은 옷을 널고 물 속에 텀벙! 뼈가 시리도록 차가운 물이다. 양쪽 나뭇잎에 물들어서 초록빛 물은 나의 마음을 한껏 즐겁게 해준다. 25분 행군. 5분 휴식. 이런 식으로 백담사에 오르니 4시경.
샘물 한 바가지를 얻어 마시고는 백담 산장에서 1박하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계속 등정. 조그 만 계곡이 나오기에 륙색을 풀고 늦은 점심을 먹고 오솔길을 오르니 영시암 터에 이르렀다.
지루하던 행군이 끝난 셈이다 .
6시 40분 경 영시암터에 도착. 매점 옆 텐트 치던 곳에 양해를 얻어 텐트를 치고는 늦 점심에 남은 밥으로 저녁을 먹는다.
텐트 뒤에 벼랑 아래를 파아랗게 단장한 시냇물이 웅덩이를 만들고는 등산객을 유혹한다.
오늘이 음력으로는 7월11일이라나? 달빛이 제법 밝은데도 이곳은 암흑! 나무 밑이라서 그늘진 탓이다.
9시 30분 취침.
8월 10일. 맑음, 금요일, 6시 10분 기상. 취사와 세면. 7시 30분 출발, 옆에 팀은 륙색을 꾸 리고 있다(설악산 해수욕장서 다시만남).
산은 점점 험하여 길 잃기 안성 맞춤이고, 코스도 분별하기 힘들 정도인데 가끔 붉은 표시의 등산로 표식은 전혀 다른 코스로 유인하기도 하다. 8시경에 수렴동 대피소 통과. 백운동 계곡으로 올라가다 경기고 팀 만나서 동행을 시작한다. 10시 20여분 쌍폭에 도착. 100여 m의 폭포는 시원스런 물줄기를 내리쏟고 있다. 조금 오르니 정말 막바지 인가? 네발로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우뚝한 바위만 보면, 저게 봉정암인가? (봉정암이 바위인줄 착각했다.). 사방으로 거대한 기암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80도의 경사를 200여 m기어오르다가는 내리막과 평지를 100여 m가니 암자가 있고 산장이 보인다. 봉정암이란다. 뒤에는 어마어마한 바위가 금방이라도 쏟아 내려질 것만 같다. 2시간이 12시 20분. 피로에 지쳐 륙색을 벗어 던지고는 샘터에 가서 둬 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반즈봉으로 갈아입자마자 누웠다. 누운게 아니라 쓰러졌다는 표현이 훨씬 낫겠다. 12시 30분부터 취사준비. 감자 국을 끓여 먹고는 기념사진을 찰칵! 1시30여분. 대청을 향해 출발. 한참을 가노라니 코스가 아닌 것 같기에 Back. 봉정암까지 돌아와서 다른 코스로 도전. 2시 20분 경인가 보다. 봉정암에 오르는 길과 이 험한 코스도 1시간 가량을 열심히 오르니 소청봉이다. 산 아래는 구름이 산허리에 맴돌고 시원한 산바람은 나를 반기는구나. 륙색을 매점에 맡기고 중청에 오르니 3시 15분. 1666m를 정복한 셈이다. 3시 20분. 대청을 향하여 돌진. 너무 높아서인가? 소나무들이 모두 동쪽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다. 바람의 거센 탓도 있을 테지.... 3시 35분. 설악의 최고봉. 대청봉 정복.
1708m 정복. 꿈과 희망의 덩어리였던 대청을 정복한 이 승리감. 사방은 흰 구름에 휩싸이고 빛은 따갑기만 하여라. 세상 만물이 무릎 꿇고 절하는듯하구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나외 에 누구도 존재치 않는 듯.... 여기 이것을 위해 이토록 땀을 흘렸구나. 땀의 결정! 그것이 대 청의 정복이구나. 정상에는 케룬들이 몇 개있고 그 곳에 있는 비문 중에 하나를 적는다.
『山은 우리를 부른다. 우리는 山처럼 의젓하게 되자.』-대한민국 산악인 일동.
대청에서 보니 모든 봉우리들이 구름에 휩싸이는가 하면 벗어지고 벗어지나 하면 싸인다. 저 멀리는 하늘인가? 수평선인가? 분간하기 힘든 것은 정녕 수평선이로구나. 3시 50분. 얼마간 보이던 봉우리들이 흰 구름에 싸여 없어져 버렸구나. 아! 설악의 정상이여, 내 다시 오마. 그날 은 우리는 함께 자 볼까? 4시 5분 하산. 4시 45분 소청에서 희운각 산장을 향하여 내리막 길 을 걷다. 까딱 잘못하면 세상이여 안녕이다. 돌 틈과 사다리를 떨리는 다리로 짚어 내려가자니 여간 고통이 아니다. 다리는 후들후들 하구..... 5시 45분. 희운각 산장 옆에 텐트치고는 세수.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손이 시리니까. 뼈 속까지 어는 것 같다. 파 썰고, 감자 깎아 썰고 마늘 으깨어 넣고, 북어 새끼 잘라 넣고 양념하여 끓이니 천하일미 여라. 취사를 끝내니 8시 15분.
텐트 밖과 안을 모두 정리하고 모기향을 피워 놓고는 놈들에게 글 쓰다. 엽서로. 라디오에서 흐르는 말이있다.
『여행은 인간을 겸허하게 한다.
세상에서 한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가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엔더슨 프로 벨러르-
8월 11일. 5시 30분 기상. 토요일. 맑음. 손이 시린 물에 정신과 얼굴을 닦고 취사를 끝내니 7시 30여분. 양폭산장을 향해 출발. 계곡의 물은 맑고 깎아지를 절벽과 괴암들! 계곡을 건너 는 출렁 다리며 나무 사다리는 아슬아슬한 재미가 있다. 8시 40분. 양폭산장. 폭음을 내며 쏟 아지는 폭포들. 음폭과 양폭. 9시 40분 귀면암 도착. 6~70여 m의 기암. 이천 설봉산에 있다 면 얼마나 좋을까? 크라이밍과 자일 하강. 생각만해도 좋은데... 10시 45분. 금강굴이 보인다. 땀에 젖은 몸과 옷을 빨아 널었다. 11시 40분. 비선대 도착. 금강굴이 지척에 있으나 그냥 하
산. 12시 25분. 설악동. 낙산을 향해 1시 30분 출발하다. 3시경. 바닷물에 텀벙. 으~되게 시 원하구만. 긴데 와이리 짜노? 거품이 일고있다. 너무 짜서인가 보다. 물과 백사장이 싫증날때는 조개도 줍고 물안경으로 물 속에 진 풍경도 즐기면서 6시 30분에야 저녁 식사.
10시경에 취침.
8월 12일. 일요일. 7시경 기상. 맑음. 일요일이라 선가? 사람들이 오기 시작한다. 어제보다 바다에도 많이 들어가고 모래에 몸과 마음을 묻어도 본다. 3시경 경포대 향발. 완행버스로.6시 10분. 경포대 도착. 모래사장에서 저녁 식사. 텐트를 걷으라기에 민박을 하려고 가다가 소나무 밭에 텐트를 깔고 취침했다. 왜 그리 모기가 많을까?
잠을 못 자게 하니 원 살 수가 있는가?
8월 13일. 월요일. 맑음. 5시 25분 기상. 6시 20분. 해수욕장에 나가니 해는 벌써 많이 떠있다. 약간의 구름,
9시경 오죽헌 행. 영동관광으로 15분 달리니 율곡 이이가 탄생하신 오죽헌에 도착. 사임당 신씨의 글씨와 그림과 율곡 형제들의 작품, 율곡의 작품들이 진열돼 있다. 사임당은 초충도를 잘 그리셨단다. 집 뒤에는 검은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10시 4분 강릉 도착. 11시 30분 급행 버스로 원주를 향해 출발. 12시 40분 횡계읍을 지나고 횡성을지나 5시에 원주 도착. 6시에 고속 버스가 있다고 하는데 5시 40분에 완행버스를 타고서 7시15분 여주도착후 45분에 여주를 출발하여 8시 20분 이천에 도착했다.
그리운 이천에 돌아 온 것이다. 5박 6일의 긴 여정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첫댓글 이 글은 1973년 군대 입대 영장을 받아놓고 직장에서 얻은 여름 휴가를 이용하여 등산했던 기록입니다.
그당시에 가리방이라는 철필로 등사를 해서 만들어 둔 기행문을 컴퓨터로 그대로 작성한 글 입니다.
43년된 꽤 오래된 기행문 이라서인가 많은 애착이 갑니다. 다른 기행문은 원고지에 썼는데 이글은 프린트를 했었지요.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오른 내설악 종주 등산이였고 그당시에는 등산로가 분명하지 않았고 이정표도 물론 없었지요.
자칫 잘못하면 다른 길로 올라갈수 있었고 지금은 큰절이 있는 영시암에는 당시 지도에는 영시암터라고만 표시돼있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다른 감회가 밀려 오네요. 감사합니다.
어려서 기대 부풀었던 그당시가 지금 얼마나 감회가 깊겠어요.
오랜 세월만큼 지금은 많이도 변한 아름다운 설악이겠지만
이렇게 박진감있는 표현으로 산행기록을 남기시었군요~
모두가 똑 같은 산을 향해도 그사람의 특별한 마음은 다 다른가 보네요.
저같아도 그때는 한없이 마음이설레이었을것 같아요.
끊임없이 지금도 도전에 박차를 가하는 친구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은데요. ㅎㅎ
멋지다, 섬세하다,용감하다라고 ㅎㅎㅎ
잘 읽었습니다.
함께 동행한 관악산도 멋진 추억이 되었답니다.
아~~ 보라친구~~
옛날에 써 두었던 등산기록이지....
전에는 원고지에다 기행문을 써 두었는데 이 기행문은 등산이 너무 좋아서 여러부 만들어 친구들에게 보냈었지.
나만 좋으면 됐는데 자랑하고 싶었나봐....
그때는 등산인구가 지금처럼 많지않았지.
하루종일 걸었어도 대여섯명 만났을 정도였으니까.....
지금은 믿기지 않을 일이지만 내설악엔 등산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
음~~공감가는 글입니다.
특히 기스링~~~!
잠시 옛 생각에 잠겨 보며 그 시간으로 부터 지금 멀리 와 있군요.
추억에 젖어 들게 하여준 글 감사 합니다.
그렇지요?? 꽤 오래된 해묵은 글이지요.
지난 연휴에 설악을 다녀온뒤에 기행을 정리하려다 생각이나서 올려 봤어요.
감사 합니다.
73년이면 까마득한 옛날애긴데 지금까지 보존하신 기행문이라니 감회가 새롭겠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60%는 설악산에 갔을터인데 대청봉 정산 등정은 0.2%도 안될겁니다만,
흰구름님 덕분에 대청봉에 갔다온듯한 느낌입니다...ㅎ 암튼 축하 드려요..
아~~~ 이든샘님~~~ 반가워요~~~
맞아요. 예전에 써놓은 글을 다시 컴퓨터에 옮겨 보았지요.
옛날에 쓴 기행문은 갱지에 프린트되었지요.
옛날엔 타자기도 드물던 시절이였지요.
타자기보다 프린트가 제일이였던 옛날 이야기지요~~~ㅎㅎ
저도 군대 가기전 기념으로 같은해 73년도에 지리산을 새벽4시에 등반시작하여 하루에 넘었던 기억이 새롭게 나네요
터덜거리는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국산 등반장비도 없는 시대에 무전여행이 유행했었지요.
그 당시 전 사진 몇장을 간직하고 있는데 글로서 기록을 간직하고 있음에 대단하고 존경스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