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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3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마태오 13,54-58)
Jesus came to his native place
and taught the people in their synagogue.
They were astonished and said,
“Where did this man get
such wisdom and mighty deeds?
Is he not the carpenter’s son?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성전 뜰에 서서, 유다의 모든 성읍 주민들에게 주님의 법에 충실하라고 충고한다. 주님께 충실하지 않으면 성전이 실로처럼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은 모두 예레미야가 주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하여 예레미야에게 달려든다. 사실 수많은 사람이 성전에 예배드리러 가지만,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남들에게는 경건하게 보이면서 자신의 허물을 덮으려 한다(제1독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과 기적을 보고 경탄하면서도, 그분 권위의 출처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분께서 하느님의 권위를 행사하신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척한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찾고 있지만, 자기와 가장 가까운 이웃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리를 체험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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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고향을 떠난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그리워하게 마련이지요. 예수님께서도 공생활을 하시면서 떠돌아다니시다가 가끔씩 고향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고향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도 하시고,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하십니다.
그들은 그분께서 하신 말씀과 기적들을 듣고 보았음에도, 쉽사리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찾고 있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이웃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이는 적은 것과 같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족 상황과 성장 배경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분의 말씀과 행위에는 귀를 기울이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여 실천하고 있습니까? 주변의 가장 가까운 분들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합니까? 일상생활 안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 삶의 자세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이웃을 통하여, 또는 우리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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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십니다. 소년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곳입니다. 마을 한복판에는 시장이 있고, 왁자지껄한 거리를 지나면 회당이 보입니다. 야트막한 언덕 위의 흰 건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년 시절을 떠올리셨을 겁니다. ‘어린 시절, 얼마나 크고 화려하게 보였던가!’
회당에 들어가시어 말씀을 전하시는 그분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됩니다. ‘저 사람이 누군가? 요셉이라는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형제들도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언제 저런 실력을 쌓았단 말인가?’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다 곧바로 인간적 생각에만 몰두합니다. 모처럼 찾아온 영적 기회를 잃는 순간입니다.
편견의 어리석음입니다. 고정관념의 해악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신심이 깊었음에도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한쪽만 생각하고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도 때로는 너무 쉽게 인간적인 것에 빠져 듭니다.
은총은 영적인 모습을 갖출 때 더욱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겉모습을 뛰어넘는 ‘영적 시각’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기적의 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이었기에 기적을 베풀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고향 사람들이 편견의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기적을 베풀고 싶어도 참으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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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함께했던 친구가 성공했어도 고향 친구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모습을 흔히 봅니다. 어릴 때 자신과 크게 차이를 느끼지 못했거나, 오히려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겼는데 더 훌륭하게 된 것을 인정하기가 어려운 모양입니다. 자존심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리 가까이 지내는 친구라도 그의 숨은 능력을 잘 볼 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판단한 까닭에 그 친구의 진면목을 보지 못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재능을 지니고, 또 어떤 능력은 어려서는 잘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능력과 성공을 인정하는 자세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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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은 무섭습니다. 한쪽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살면서 숱한 시행착오를 거듭합니다. 우리는 실패의 쓰라림과 좌절을 겪는 가운데 서서히 너그러운 사람으로 바뀌어 갑니다. 편견에 빠져 그릇된 판단을 내린 지도자도 적지 않습니다. 결코 하루아침에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훌륭한 지도자에게는 대부분 좋은 참모가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참모는 지도자의 편견을 지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역시 편견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기적마저 이상한 행동으로 여길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편견은 무섭습니다. 기적을 방해할 만큼 두려운 것이 편견입니다.
편견의 또 다른 모습은 고정관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고정관념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어 낼 수 있는 능력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1코린 13,7 참조). 그러므로 편견을 깨고 고정관념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사랑입니다.
편견
- 이동훈 신부-
미국 UCLA 의과대학 교수가 졸업을 앞둔 의대생들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매독에 걸려 있고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이다. 여기서 아이 넷이 태어났는데, 첫째 아이는 매독균으로 장님이 되었고, 둘째 아이는 이미 병들어 죽었고, 셋째 아이는 부모들의 병 때문에 귀머거리가 되었고, 넷째 아이는 결핵 환자가 되었다. 이런 때에 어머니가 또 임신을 했다. 이런 경우에 그대들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유산시켜야 합니다. 아버지가 매독 환자요 어머니가 폐결핵 환자이며, 이미 낳은 아이 넷도 다 그 모양이 되었는데, 그런 악조건에서 아이를 또 낳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당연히 유산시켜야 됩니다.”
그러자 교수는 대답했다. “그대들은 지금 베토벤을 죽였다. 그대들은 환자들을 대할 때 이 사실을 잊지 마라. 의학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저렇게 치료하고 수술하고 없애고 할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하느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겸손하고 신중하게 생각할 일이다.”
학생들의 판단대로였다면 음악의 성인이라 불리는 베토벤은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되기 쉬운가를 알아야 한다. 교육과 경험은 인간을 풍요롭게 살찌우기도 하지만, 그것에 갇혀 헤어나지 못할 때는 오히려 우리를 성장하지 못하게 옥죄는 족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남에게 작용할 땐, 편견으로 작용하여 사람을 억누르기도 하고 심각한 오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우리가 아는 알량한 지식에 너무 기대지 말고, 하느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성령의 이끄심에 우리 판단을 맡길 수 있어야 한다.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예언자
-김 맛세오 수사-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 라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자신 있게 피력하는 예수님을 어린 시절부터 세세히 알고 지내 온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비천한 목수의 아들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도저히 믿기지 않는 태도로 의아해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초기 회개 생활 때 ‘다미아노 십자가상 예수님의 입’에서, “다 허물어져가는 내 집을 수리해 다오.”라는 기적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직후 회개의 표시로 당시의 쓰러져 가는 3개의 성당을 손수 수리하려고
벽돌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잘 아는 고향 사람들에게 애긍을 청하기
시작하였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먹을 것을 구걸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춤과 노래로 호화판 여흥을
마다하지 않고 거리를 휩쓸고 다니던 그가 전혀 다른 거지의 모습으로
변하였으니 주민들은 머리가 돌아버린 미친 사람으로 취급할 밖에요.
온갖 수모를 감내해야 했던 그에게 그것은 어쩌면 회개의 단단한 각오와 표시로
예수님의 수난 고통을 겪어보기 위한 십자가 체험이었겠지요.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그가 하느님의 진정한 바보였음을 깨달은 주민들은 존경과 사랑으로 대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짊어지신 것처럼 옳은 일에도 반대의 표적이 되는 시금석으로서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한 어둠의 길이요 정화의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잔상을 떨쳐버려라!
-김찬선신부-
“그때에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공생활 이전의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여러 추측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예수님께서 인도에 가서 지혜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도에 유학을 갔다는 얘깁니다.
이 얘기대로 예수님께서 인도에 가 수행을 통해 그루가 되고
그리고 이제 막 돌아와서 사람들을 가르쳤다면
고향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의 힘이
어디서 왔는지 의아해 하고 심지어 못마땅해 합니다.
이 것을 보면
예수님은 인도에 가지도 않았고
어떤 유명한 랍비나 예언자 밑에서 수학한 것도 아니었나봅니다.
그렇다면 고향 사람들의 태도는 이해할 만합니다.
특별한 집안 출신도 아니고 특별한 양성이나 수행을 받지 않았다면
인간적으로 예수님의 출중한 지혜와 기적의 힘을 이해하기 어렵고
더욱이 그것을 인정하며 축하하기는 쉽지 않지요.
나와 같이 ‘야야’ 하며 지내고 ‘이놈저놈’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친구가 높은 직위에 오르면
인격적 성숙에 따라 같이 기뻐하며 축하하는 친구도 있지만
친구가 그렇게 된 것이 못마땅해 하는 친구도 있을 것입니다.
친구의 출세를 시기질투하지 않더라도
그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쉽지 않고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인간적인 변화도 인격적인 성숙의 정도에 따라
받아들이기도 하고 못 받아들이기도 하는데
예수님의 놀라운 변화, 즉 신적인 면모를 보임에 대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못마땅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인격적 또는 인간적 성숙 이상의 성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적이고 영적으로 대단한 성숙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 지혜와 기적의 힘이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즉시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아보고 인정하는 성숙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뭔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많은 사람, 보통 사람들은 그 원인을 자기 잘못에서 찾거나,
그러기 싫으면,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방해에서 찾습니다.
자기든 남이든 인간적인 차원에서 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깊은 눈을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거나 섭리를 찾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뜻이 좌절되게 하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좌절에는 하느님의 크신 뜻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지혜와 기적의 힘이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면
즉시 우리의 눈을 높은 곳으로 돌려야 합니다.
눈에는 殘像이 있게 마련이지요.
먼저 본 모습이 눈을 감고 있는데도 떠나지 않고 계속 남아있고
심지어 다른 것을 보고 있는데도 계속 남아있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물리적인 잔상 말고
심리적 잔상, 의식적 잔상, 관념의 잔상도 있습니다.
누구에 대해 한 번 박힌 상이나 관념이 잘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고정 관념과도 같은 것입니다.
어렸을 때의 모습이 어른이 되고 나서도 계속 남아있어
순순히 현재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고
변화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변화에도 적용이 된다면
앞서 보았듯이 그 변화가 분명 하느님에게서 온 것인데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잔상의 이런 작용에 머물지 말고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업적들을 열린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날이 은총을 입는 길입니다.
나는 사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전삼용신부-
제가 마리아론 시험을 볼 때의 일입니다. 교수님이 성모님의 평생 동정의 의미를 지금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여기서 현대 젊은이들이라 함은 믿음이 없고 지극히 이성적이어서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저는 그 사람들에게는 평생 동정 교리를 설명해 줄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하신 말씀은 기억 했지만 내가 수긍하지 못하는 대답을 하기는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교수님은 수업 때 말씀하신 대로, “성경으로부터 시작 해야지. 성경 안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리라는 예언도 있고, 복음에서도 처녀로 그리스도를 낳으시는 이야기가 나오잖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그 말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느님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경은 믿겠습니까? 하느님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당연히 성경도 믿지 않는 것인데, 그 사람에게 성경을 대고 거기에 나온다고 믿으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교수님도 제 말에 대해 대답을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물론 기분이 나쁘셨는지 안 좋은 점수를 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고장에 가셨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요셉의 아들 예수만 생각하며 그 예수가 메시아였음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요셉의 아들로서 목수 일을 하는 평범한 나자렛 사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에서는 기적을 하고 싶으셔도 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메시아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의 동기 신부 중 하나는 첫 보좌 발령을 자신의 출신본당에서 분가한 성당으로 받았습니다. 보통은 출신 본당으로는 보내지 않는데 인사에 착오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성당에서 첫 미사를 하고 제의를 입은 채 신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께서 다가오시더니, “야~ 고추 내놓고 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신부님이 되셨네?”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은 그 신부 할머니의 친구 분이셨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한 청년 자매가 뛰어오면서 사람 많은데 “오빠~”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년들과 술자리를 하여도 사제로서 인정해주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그들의 탓도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전에 편하게 대할 때의 모습을 더 원하는가 봅니다.
어쨌건 그 신부는 신자들을 만나는 것보다는 주임 신부님에게 꼭 붙어 있으며 필요하지 않으면 신자들을 멀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자들이 원하는 것과는 반대로 사제가 된 사람은 사제로서 여겨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제임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사제는 그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사제가 아니고 사제로서의 역할도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인정하고 믿지 않는 고향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기적도 하실 수 없으셨고 그래서 다른 고을에서 더 많이 기적을 행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항상 사제 서품 피정 때 제 앞에서 나뭇잎이 떨어진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일주일 동안 피정을 하면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마지막 날 저녁 산에서 내려오는데 한 조그만 나무에 나뭇잎이 유일하게 하나 달려 있었습니다. ‘마지막 잎새’를 연상하며 바라보면서 내려오고 있는데 그 앞을 지나가자 바로 제 앞에서 뚝 떨어졌습니다.
저는 온 우주의 시간이 멈추고 지금 그 나뭇잎이 떨어지는 순간에 집중됨을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섭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 태초부터 바로 지금 내가 지나갈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두신 나뭇잎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이렇게 나뭇잎 하나로 주님의 섭리하심이 가슴 깊이 새겨졌습니다. 즉, 성경 말씀대로라면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데 내가 사제가 되기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이끌어 주신 주님의 섭리까지도 느낄 수 있었고 이렇게 성소를 확신하며 서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 게 뭔 대수라고...”하며 비웃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신자는 “저는 신부님 하는 이야기는 하나도 안 믿어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분들에게는 더 이상 섭리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저도 말로는 그 때 느꼈던 소름끼치는 기억을 표현해 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야기해봤자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그 사람들에게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 느끼는 것은 ‘무기력’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그 무기력은 그것을 느끼게 한 사람들로부터 저를 멀어지게 만듭니다.
이야기를 할 때 상대가 믿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면 답답하지만 아무 말도 더 이상 해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믿지 않는 마음은 전능하신 하느님까지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하느님도 우리를 통해서 무언가를 하시고 싶지만 우리 믿음이 부족하다면 그만큼 그 분의 활동은 내 안에서 제한됩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기에 예수님이 나자렛에서는 어떠한 은총도 주시지 못하고, 또 나자렛을 떠나셔야 했듯이, 사제들이 주님의 대리자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곳에서는 사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은총도 감소되고 사제의 수도 감소하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은 아직까지 신자들이 사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유럽과 같은 나라들보다는 훨씬 좋습니다. 유럽은 사제성소가 말라버렸지만 한국은 아직도 적지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은총을 받고 못 받고는, 바로 그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가짐에 달린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마음은 나자렛 사람들처럼 굳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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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소금
-홍성남 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진짜가
아닌 가짜 소금들이 많습니다. 가짜 소금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삶의 실제보다 이론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이론에 의지합니다. 이것은 상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담자들은 내담자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기보다는 이론에 근거해 내담자를 파악하고
치료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향이 지나치다 보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상담자가 지나치게 이론에 의존하면 예상치 못한 상황은
그냥 지나치기 쉽고 자기 기만적이고 섣부른 이해를 환자에게 강요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상담자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늘 새롭게 마음을 열 수 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요즈음 사람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이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사람을 쉽게 판단하기 위한 도구로 변질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늘 새롭게 성장한다는 진짜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얇팎한 지식으로만 모든 걸 바라보고 평가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되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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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사람과 판단
- 이정석 신부-
한국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연고와 서열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 어느 집안, 어느 학교, 그리고 요즘엔 어느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에 따라서 잘나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합니다. 그렇게 공공연히 인정되는 줄을 잡는 것이 출세의 비결이라는 확신을 갖고 지금도 열심히 그런 사돈에 팔촌, 아니면 이웃사촌이라도 없는지 찾아보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좋은 학교의 기준은 어떤 교육을 시키느냐가 아니라 상급학교의 진학률과 취직이 전부인 사회. 그래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탄탄한 출세 가도를 만드는 것이 모든 학교의 졸업생들에게 주어지는 지상 과업이 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초기에 고향 마을인 나자렛에 가셨다가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한 사건을 보고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지혜와 기적의 원천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 13,56)라고 물으면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비유 말씀과 그분께서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이 자기들이 알고 있던 ‘그 청년’의 배경으로 볼 때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어리둥절한 것입니다.
성경은 예언자를 가리켜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예언자들 스스로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신탁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 하신 말씀의 이유입니다. 비록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단순히 자기들이 알고 있는 사람의 말로 알아들을 때 예언자는 배척을 받게 됩니다. 오히려 자기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인 양 겉꾸민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사람들은 더욱 열광합니다.
예언자는 자기의 말을 하는 사람도, 청중의 호응을 받으려고 진실을 외면하고 야합하는 사람도 아닌 하느님의 말만을 전하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어느 예언자가 옳고 그르냐는 청중의 마음에 흡족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그 말씀이 제대로 효력을 발생하느냐에 따라서 판단됩니다(신명 18,22; 이사 55,8 이하 참조).
현대사회의 보이지 않는 정보의 바다에는 수많은 말이 떠다닙니다. 국민들은 더 이상 단순한 정보의 소비자가 아니라 주체적인 생산자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말 가운데 어느 것이 하느님의 뜻을 담고 있는 예언인지는 그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어떤 ‘진리’를 담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특히 위정자들과 ‘잘나가는 사람들’은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늘의 마음이라는 민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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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인연에 가두지 마라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두루 다니시며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비유로 쉽게 깨우치신 다음
고향에 가십니다.
왜 고향에 가셨을까요?
지나는 길에 그저 들리신 것인가?
그리워서 일부러 가신 것일까?
금의환향을 기대하며 가신 것일까?
알 수 없지만
만일 금의환향을 기대하며 가셨다면 그 똑똑하신 주님도
보통 사람들의 보통 심리를 모르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스님들에게 나이를 묻고 과거를 묻는 것은 대단한 실례이고
수녀님들에게도 이런 점은 비슷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인연, 과거를 털어버리고 미래를 사는 사람에게
과거와 과거의 인연을 들먹이는 것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부적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통의 인간은 자기와의 인연에
다른 사람을 가두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의 아들이라는 인연에 아들을 가두어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막으려 합니다.
코 흘리던 초등학교 때 인연에 친구를 가두어
친구의 놀라운 성장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인연에
성공한 고향 사람의 운신을 곤란하게 합니다.
심지어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나이가 위인 성직자를 만나면 성직자로 상대를 합니다.
나이가 어려도 성직자로 상대를 합니다.
그러다 어찌 나이 얘기를 하다가 동갑임을 알면
그때부터 분위기가 묘해집니다.
성직자로 대하던 사람이 그때부터
동갑네기로 대하려는 기류가 역력합니다.
이런 식으로
보통의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도,
하느님의 일도
자기 인연에 가두고
심지어 하느님마저도 자기 인연에 가둡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도 예외는 아니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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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양승국신부-
<더 이상 쓸쓸하지도, 허전하지도>
형제들과 한 학기를 마무리하면서 수도공동체 청빈생활에 대해 점검하면서, 저희 살레시안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이신 돈보스코의 말씀들을 묵상해보았습니다.
돈보스코는 평생 얼마나 청빈하게 사셨는지, 그리고 몸소 실천한 청빈생활을 얼마나 자주 형제들에게 강조했었는지, 가끔씩 회원들 사이에서 ‘이거 해도 해도 너무하시는군. 이렇게 먹고 어떻게 견뎌내겠어?’하는 불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청빈생활과 관련해서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하신 돈보스코의 몇 가지 권고들입니다.
“한가함이나 논쟁을 피하고, 음식이나 음료 및 침실을 극히 간소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옷이나 음식이나 거처가 가난하다는 것을 세상 모두 인정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느님 앞에서 부유해지며 사람들의 마음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편리함과 안이함과 욕망이 우리 안에 자라날 때 우리 수도회는 그 갈 길을 다 간 것입니다.”
“불편한 방에서, 허술한 가구를 놓고 사는 것, 검소한 의복을 사용하고, 검소한 식사를 하는 것들은 청빈을 서원한 사람에게 오히려 크나큰 영예가 되는 것이니, 이는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닮게 하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로 제대로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사는 것일까요? 갖출 것 다 갖추고 사는 것일까요? 누릴 것 다 누리고 사는 것일까요? 부족함이나 불편함 하나도 없이 희희낙락하며 사는 것일까요?
절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정 반대일 것입니다.
어느 정도 춥고 배고프다면 수도자로 잘 사는 것일 것입니다. 늘 뭔가 부족함을 느끼고, 그래서 허전하고, 아쉽다면 수도자로 잘 사는 것일 것입니다. 쓸쓸하고 외롭고 고달프다면 수도자로 잘 사는 것일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고, 권력자들이나 세력가들로부터 박해를 받으면 수도자로 잘 사는 것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 예언자이자 모든 수도자들의 모범이신 세례자 요한께서 그렇게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대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의 청빈하고 당당한 삶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늘 세례자 요한을 보다 편안한 곳으로, 보다 잘 갖춰지고 안락한 곳으로, 보다 빛깔 좋은 곳으로 끌어내리려고 기를 썼습니다만, 그럴수록 세례자 요한은 더 깊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더 깊은 내면으로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부패 권력 앞에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다가 순교당하는 영예를 차지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리도 당당하고 의연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철저하게도 하느님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뜻에 반하는 일과 맞서기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각오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용기의 바탕에는 그 무엇 앞에서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정도(正道)만을 추구했던 삶이 있었습니다. 청빈하고 티 없이 깨끗한 삶이 있었습니다.
양심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제대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은 때로 고독하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성실한 구도자의 길은 언제나 쓸쓸하고 고독하고 외롭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언젠가 주님께서는 그 쓸쓸함, 그 고독함, 그 외로움을 충만한 기쁨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더 이상 쓸쓸하지도, 고독하지도, 외롭지도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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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박해받는 예레미야
-경규봉 신부-
예레미야는 성전 뜰에서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 악행을 버리고 하느님의 법을 지키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선포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루살렘 성전과 성읍이 파괴될 것을 예언한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레미야가 이처럼 성전의 존속을 문제 삼기 때문에 그가 하느님의 신탁을 받아 전하는 예언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예루살렘과 성전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아시리아의 위협에서 벗어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기원전 701년. 1열왕 18-19장 참조). 그래서 그들에게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성전을 그 어떤 적에게도 절대로 넘겨주시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누가 혹시라도 성전이 짓밟히리라는 주장을 하면 이를 신앙이 없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겼다.
하느님을 믿는다 함은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 욕심이나 기대 등을 모두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하느님이 좋으신 아버지이심을 믿고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때로 고통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헤쳐 나가기 어려운 문제가 있더라도, 아버지께서 더 좋게 이끌어주시리라 믿고 실망과 좌절에 빠지지 않고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믿지 않는다.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 해석을 믿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하느님을 각기 다르게 생각하고 해석한다. 어떤 이는 하느님을 자신의 욕구와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믿는다. 그래서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 매달린다. 그 필요가 채워지면 이내 하느님과 멀어지고, 필요가 채워지지 않을 때에는 하느님에 대해 원망하곤 한다.
어떤 이는 하느님을 자신의 종이나 노예처럼 생각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셔야 마땅한 분으로 생각한다. 어떤 이는 하느님을 장사꾼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하느님과 흥정하곤 한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주시면 나는 그 대가로 어떤 것을 드리겠다고 하면서 하느님과 흥정한다. 어떤 이는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는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잘못된 것은 모두 하느님 때문이라고 하느님 탓을 하곤 한다.
이처럼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경우가 많다. 그 까닭은 사람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필요, 욕구에 따라 나름대로 해석하여 보곤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유다백성은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의 옥좌요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예루살렘과 성전은 결코 적의 손에 짓밟히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법과 말씀을 따르지 않고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하느님의 옥좌인 성전이 있기에 자신들은 안전하리라고 믿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기보다 하느님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믿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믿음을 따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된 믿음을 지적하는 예레미야를 오히려 박해했다. 자신들의 믿음에 반하여 성전과 성읍의 파괴를 예언하는 예레미야가 하느님을 모독하며 성전을 모독하는 자라고 박해했다. 잘못된 믿음은 오히려 하느님의 예언자를 박해하고 죽이려 함으로써 하느님을 박해하고 죽이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잘못된 믿음, 그것은 오히려 하느님을 왜곡하고 하느님의 말씀과 법을 흐리게 한다. 잘못된 믿음, 그것은 하느님의 법인 사랑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고, 증오와 적대심을 키우게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이름으로 수많은 무고한 이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으며,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참된 믿음, 그것은 순수하다.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 욕심과 기대까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십자가의 길일지라도 주님의 법과 말씀인 사랑을 마음에 담고, 따르며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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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 보자.
-서유승 신부-
한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한 때는 꽤 명성도 자자하고, 그래서 뭇 선남선녀들이 찾아오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엔 성소자들도 많아서 늘 수도원은 사람들로 복작복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성소자들의 발길도 뚝 끊겨버렸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수도원의 문을 닫아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그 수도원 가족 모두의 어깨를 짓누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수사님이 제안을 합니다. “이 근처 숲 속 깊은 곳에 아주 德이 높으신 은수자 한 분이 계시답니다. 우리 모두 그분께 가서 우리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조언을 구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수도원 안에서는 곧 찬반 양론이 격렬하게 벌어졌습니다. “숨어 지내는 고작 은수자 한 명에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수도원이 어떻게 자문을 구할 수 있느냐!” “우리와는 수도회가 다른 그 사람에게 우리의 어려움을 말한다는 것은 창피스러운 일이다!”라는 의견들도 있었지만, 결국은 한 번 찾아가 보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사실 그 수도원을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결론이었지요. 그리고 몇 일 후, 수사님들은 모두 주저주저하며 망설이면서도 그 은수자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은수자는 고작 단 한마디 말을 남기고는 입을 닫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위대한 성인이 감추어져 계십니다.”
수사님들은 모두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그 깊은 숲속까지 힘들게 창피를 무릅쓰면서 찾아왔는데 고작 한마디라니, 자존심이 세신 분들의 입장에서는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하지요. 그러나 점쟎은 체면에 더 이상 뭘 해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모두들 투덜투덜대며 본래의 수도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이 수도원에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발길을 끊었던 뭇 교형자매들이 하나 둘 다시 발걸음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연히 성소자들도 많아진 이 수도원은 과거의 활기찬 모습을 찾아나가게 될 희망에 다시금 부풀어 오릅니다.
여러분, 비밀은 무엇이었을까요?
비밀은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빨래가 바람에 날려 떨어져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빨래방 베드로 수사는 너무 게을러!”하며 그냥 지나쳐 버리던 마르코 수사도, 주방 바오로 수사가 밥을 태워먹을 때마다 버럭 버럭 성을 내던 마태오 수사도, 요한 수사가 아파 누워있을 때마다 약을 타다주는 것조차 귀찮아하던 스테파노 수사도 “혹시 저 이가 은수자가 말한 그 감추어진 위대한 성인이 아니실까?”라는 생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옆에 있는 동료들을 바라보니, 당연히 그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는 다를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세상의 사람들은 그러한 수사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닫힌 사람은 그 눈까지도 닫혀있기 마련입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리고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아닌가?”라고 말하며 마음의 눈을 열려고 하지 않았던 유다인들이 그분의 지혜와 능력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창세기의 말씀대로 모든 인간은 주님을 닮아 그 모습대로 창조되었습니다.(창세1,26) 여기에는 어느 한 사람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내 아버지, 어머니, 나의 남편과 아내 그리고 내 자녀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못 살게구는 직장 상사도, 무능력하게만 보이는 학교 후배도 그 안에는 주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분명하게 새겨놓아 두셨습니다. 그 사실을 볼 눈도, 보고자 하는 마음도 닫혀있는 이들에게, 주님의 기적과도 같은 은총이 다가올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가슴을 쫙 펴봅시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눈을 크게 떠 봅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과 내 주위의 사람들을 바라다 보십시오.
어쩌면 구세주께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내 가까이에 이미 와 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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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시간 속의 영적 여행
-이인주 신부-
사람들은 가끔 잠적 내지 잠수를 한다. 이유가 뭘까? 영원한 시간의 신비를 알고자 함이고, 영혼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길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특히 설산이나 밀림, 우주를 여행한 사람은 그 안에 자신과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낀다. 그 느낌이 바로 영적 여행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그분의 숨겨진 시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영의 영역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그렇다. 예수님은 분명 마리아의 아들이고 그의 아버지는 요셉이다. 형제들은 야고보·요셉·시몬·유다이다. 그걸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은 무엇일까? 두 가지다. 하나는 ‘저 사람이 지혜를 어떻게 얻었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랄 때 예수는 저런 위인이 아니었는데.’ 하며 부정하는 것이다.
문맥상으로 보아 예수님은 별로 두각을 드러내지 않은 평범한 청년이었던 것 같다. 예수님은 성장과정에서 신성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이 더 예수님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사람에겐 다 때가 있다. 예수님도 홀연 자신의 때를 알아차리기라도 한듯 서른이 되어 나자렛을 떠났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나자렛에 들렀는데 그때는 이미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과연 소문대로였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왜 사람들은 상대방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과거의 행적만 보고 단언을 하는 것일까?
내 이야기를 해보자. 초중학교 시절 나를 알던 사람들은 “뭐? 그가 신부가 됐다고?”, “야! 서천 소가 웃겠다.”라고 할 것이다. 초중학교 시절에 나를 알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내 영적 삶의 과정을 헤아린다면 과거의 내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 또한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뭐 대수인가? 예수님은 씩씩하게 자신의 길을 갔다. 자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그들에겐 조금의 흔적만 남기고 떠나신다. 그렇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지금보다 한 단계 그분께 더 나아가는 것이 무엇이며, 영적인 삶에 더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식별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새벽을 열며
요즘 너무나 덥습니다. 글쎄 어제 낮 시간에 제 방 온도가 34도였으니 얼마나 더운 날씨였겠습니까? 특히 요즘에는 밖에서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지난 장마로 인해서 물에 잠긴 창고의 물건을 모두 꺼내서 말리는 일, 어제부터 시작된 십자가의 길 설치 작업, 축대 쌓는 작업 등등 할 일이 너무나 많네요. 그런데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일하기가 얼마나 힘들던지요. 그러다보니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집니다. 그리고 이런 소리가 저절로 나오네요.
“태양이 싫다…….”
그 순간에 저는 깜짝 놀랐어요. 사실 지난 장마 때, 계속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거든요.
“비가 싫다…….”
생각해보니 ‘싫다’라고 말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해가 나와도 싫다고, 비가 내려도 싫다고, 또 흐리면 흐리다고 싫다고 말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면서, 하느님께서는 과연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까 라는 의구심도 듭니다.
이렇게 날씨만을 보면서 ‘싫다’라고 말하는 있는 우리들이 아니지요. 우리들의 삶 안에서 ‘싫다’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었으며, 부정적인 생각을 간직하고 있었을까요? 창세기에서도 나오듯이,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게 창조했던 이 세상을 우리는 얼마나 ‘좋다’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하느님과 달리 ‘좋다’ 보다는 ‘싫다’를 더 많이 외치고 있는 나는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말을 했나요? 사람들은 당시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예수님을 보면서 이렇게 부정적인 말을 하면서 못마땅하게 여길 뿐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사람은 누구나 고향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의 추억이 간직되어 있는 곳이 고향이니까요. 따라서 예수님도 고향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하고 계셨을 것이고,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더 좋은 말씀과 놀라운 행적으로 고향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무조건 ‘싫다’라고 말하는 우리들의 나쁜 습관을 이들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깔보고 무시하는 말로써 그들은 결국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싫다’라는 말은 이제 그만 써야 하지 않을까요? 태양이 싫어, 비가 싫어, 흐린 것이 싫어, 사람이 싫어……. 그러한 말보다는 태양이 좋아, 비가 좋아, 흐린 것이 좋아, 사람이 너무나 좋아……. 라는 말로써 주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예수님의 고향사람들과는 달리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기적 체험을…….
‘싫다’라는 말보다는 ‘좋다’라는 말만 합시다.
빠다킹신부
아는 게 병이다
-서현승 신부-
복음에서 묘사하는 동네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모두 놀랐으면서도, 그분의 출신을 알아내고는 못마땅해했습니다.
한편으로, 예수님의 가정이 동네 사람들에게 신비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유별나지 않았으며 예수님 역시 어렸을 적부터 신동이었다거나 특별히 뛰어나 보이지 않으셨을 것 같아서, 별로 내세울 것 없는 민초 출신인 나로서는 큰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이셨던 분이 그렇게 동네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할 만큼 진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어서 기분이 괜찮습니다.
물론 동네 사람을 보면서는 안타까움이 많습니다. 차라리 예수님의 가족과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했더라면,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아는 게 병입니다. 우리 말에도 ‘사람은 열 번 변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이 시대를 사는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민정 지음, 생활성서사)
라는 책 서문에서 인용하는 어떤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중죄를 짓고 수감 중인 아들을 찾아가, 사람들이 자기 아들이 얼마나 착한지 알았으면 좋겠다며 끝까지 아들을 믿어주었던 어머니의 마음이 결국 아들을 새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사람을 변화시킬 뿐더러 실제로 구원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박혜원-
◆고향은 마음의 안식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속속들이 드러내는 곳이다. 고향에서는 누구나 자기 자신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벗은 몸으로 다니는 것과 같다. 또한 인간은 떳떳하게 설 수 있는 인간이 없다. 음행한 여자를 치려던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했을 때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님만 남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다. 또한 떳떳하지 못한 과거를 은폐하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어둔 역사에 동참하는 공범자를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익명성이 통하지 않는 고향에서 그 누구도 떳떳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그 속에 예수님도 함께 몰아넣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고와 지식 안에서 예수님을 인식하려 했다. 그리고 자기의 범주 안에 예수님을 넣으려 했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동생…. 이것이 우리 인간 인식의 한계다.
「묵자」 공수(公輸) 편에 보면 묵자가 초나라의 침략을 저지했음에도 송나라 문지기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박대했다.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이다. 믿을 것이 못 된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인간 존재가 그렇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인정받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 때문에 진정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기적 속에 살면서도 기적을 발견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 이영훈 신부 -
하느님께서 만드신 창조물 중에 끊임없이 질문하는 존재는 무엇일까? 그것은 당연 우리 인간들이다. 인간은 수 만 년 전부터 세상은 무엇이고, 인간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나름대로의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가 바로 철학이고 과학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런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세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까지 그 사색을 넓혀 나간다. 그러나 철학과 과학은 아직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인간에 대해 완전히 알지도 그리고 말하지도 못한다.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라고 말하는 순간에 그 앎이 넓은 바다의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음을 곧장 깨닫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안다는 것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둠이 찾아오면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 둘씩 켜진다. 그러나 가로등이 비추고 있는 곳은 가로등 아랫니지, 세상 전체를 비추지는 못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볼 수 있는 범위는 가로등 아래일 뿐, 그 외에는 우리가 볼 수 없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고향으로 가신다. 그러나 고향에서의 반응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고향 사람들이 평소에 알고 있던 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의 모든 것 뿐 아니라, 그분의 가족에 대해서도 훤히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과 다름없는 나자렛 촌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 대단한 능력을 보이고 있으니 그들에게는 너무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분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예언자, 구세주로 외쳤지만 그들의 눈에는 그저 30여년을 함께 산 동네청년에 불과했다. 그렇게도 예수님을 잘 아는 그들이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왜 그들은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우리는, 다 아는 것처럼 살면서 오직 자신만이 정답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오만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세상 진리를 다 안다고 하지만 실상 그들은 아는 것이 없다. 물론 학문적인 이론은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따뜻한 마음이 뭔지를 모른다. 많은 지식이 오히려 스스로를 오만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 소리를 보고 듣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닫아놓았기에 더 이상의 다른 것을 찾을 수도 없고, 찾을 마음도 없다. 이미 그 사람에게는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그러나 정말 안다는 것은 자신이 모르고 있음을 인정할 때, 참된 앎이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음에서부터 이제 새로운 앎으로 넘어 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더 크고 새로운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앎을 추구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선입견과 편견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과 역사와 인간 안에서 말이다.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의 모든 삶의 의미, 십자가 죽음, 부활, 사랑, 용서 그리고 우리에게 하신 말 한 마디 한 마디, 수 없이 듣고 또 들었던 그 모든 것의 숨은 의미를 알고 있는가? 어쩌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내 자신이 만들어 낸 박제된 예수님은 아닌가? 우주보다 더 넓으신 예수님을 완전히 알고 있다고 자신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분을 더욱 사랑하는데 소홀하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며 끝없는 새로움이시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그 속에 숨겨진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는 어느 사제의 말이 생각이 난다.
-상지종신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긴 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의 직업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의 이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알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압니다. 그 사람의 직업을 압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이처럼 그 사람에게 속한 무엇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고 정작 그 사람 자신만이 남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사람 자신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 자신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비단 누군가 나를 제외한 다른 상대방에 대한 것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바로 나에 대해서도 해당됩니다. 과연 나는 나를 알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껍데기들을 바라 보면서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쉽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 자기 편한 식대로 사람들을 만나고, 이 만남을 통해 얻어진 상대방에 대한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그 사람을 자기 틀에 맞추기 쉽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더 잦은 만남을 갖는 사람에게 이러한 모습으로 다가가기가 오히려 쉽습니다. 자기 식대로 사랑하고 자기 식대로 미워하며, 자기 식대로 믿고 자기 식대로 불신합니다.
만남이란 관계맺음입니다. 나와 나와의 만남, 나와 남과의 만남을 통해서 관계를 맺습니다. 참된 관계라면, 믿음의 관계라면 만남의 당사자인 나 뿐만 아니라 만남의 또 다른 당사자인 또 하나의 나와 남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지닌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틀을 고집한다면, 상대방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매여 있다면, 상대방을 알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지닌 무엇을 알려고 끊임없는 노력을 할 수 있겠지만, 상대방 자신을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하는 벗들을 생각해봅니다. 가족일수도 있고, 형제 자매일수도 있고, 친구나 동료일수도 있습니다. 과연 내가 그들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지 생각해봅니다. 과연 내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들 자신을 보고 그들 자신에 대해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나를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그마한 앎이라는 두꺼운 틀을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그들을 내 안에, 내 관념에 가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고, 자유로워진 그들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꽃다발 대신 푸대접의 원인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고향방문기를 들려준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원전(마르 6,1-6)을 옮겨 쓰면서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장황한 비유설교를 마치신 예수께서는 호수에서 서쪽으로 30Km 떨어진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고향을 떠나 요르단에서 세례를 받고 갈릴래아 전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한 지 3년만에 이루어진 첫 방문이다. 물론 나자렛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향사람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도 들었고, 그래서 예수의 가족들과 친척들이 예수를 붙들러 나서기도 했다.(마르 3,21) 한번은 예수께서 한참 설교를 하고 계셨는데,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 예수를 불러달라고 청했지만, 그들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인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태 12,46-50; 마르 3,31-35)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물러가야 했었다.
오늘 고향을 방문한 예수님께 나자렛 사람들이 준비한 것은 축하의 꽃다발이 아니라 푸대접과 불신(不信)이었다.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고향사람들이 처음에는 놀라움을 표하지만 그 놀라움은 예수께 대한 불신과 거부로 변한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라는 인물과 그분의 인격을 서로 떼어놓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예수께서 지니신 지혜와 능력 자체는 인정되지만 그것을 예수라는 인물과 결부시킬 수는 없다는 그들의 고집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 예수가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요, 그들과 같은 범인(凡人)이라는 범주 안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지식과 지혜와 능력은 객관적으로도 존재한다. 오늘날 첨단 과학이 가져다 준 컴퓨터의 기술이 바로 그렇다. 사람들은 컴퓨터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와 능력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원초적으로는 사람 안에 들어 있었던, 사람의 주관적인 인격이 일구어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물을 배제한 그분의 객관적인 가르침과 업적만을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물과 인격, 즉 예수님 전체를 믿는 것이다.
오늘 축일을 맞는 알폰소 성인의 설교를 들은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성인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당신은 자신을 잊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입으로만 전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을 말한다. 알폰소 성인이 자신의 삶으로 가르침을 보여주었듯이 예수께 대한 믿음은 그분의 가르침을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저 사람이 어디서?>(13,54-58)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래면서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이 모든 것을 얻었지?" 라고 감탄하며 말하였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나의 말과 행동을 보고 일반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저 사람은 어디서 저런 지혜를 얻었지?"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도 온화할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지혜로울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묵상을 잘 할까?" "저 신부님은, 저 수녀님은, 저 형제는, 저 자매는 어떻게 저렇게도 덕스러울까?"라는 소리를 들어 본적이 있는가? 또 그런 것에 관심을 가져 본적이라도 있는가? 아니면 "저 사람은 어떻게 해서 저렇게 돈을 많이 벌었지?" "저 자매는 어떻게 다이어트를 해서 저렇게 살을 뺐지?" "저 자매는 어떻게 해서 저렇게 예뻐졌지?" "저 사람이 입은 옷이 참 멋있다. 어디에서 샀지?" 아니면 "저 사람은 성질이 대개 나쁘군. 아니 저런 나쁜 사람이 있나?" "저 사람 형편없는 사람이군. 신부가, 수녀가, 신자가 뭐 저래?" "저 사람은 부정축재 자야, 저 사람은 강도야, 저 사람은 자기만 아는 사람이야, 저 사람은 정말 무식한 사람이야. 아니,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등 등.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또 우리도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한다. 과연 나는 어떤 소리를 주로 많이 듣고 또 어떤 소리를 듣기를 바라는가?
오늘날 우리 교회의 취약점은 신자생활을 하는 사람이나 신자가 아닌 사람이나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한 사람이나 이제 갓 영세 받은 사람이나, 성직자나 수도자나 평신도나, 사목 회장이나 구역반장, 단장이나 모두가 대개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이 아닐까? 그 사람이 그 사람이요, 그 생각이 그 생각이지 상대방을 크게 놀래킬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다. 빛이라면 어둠을 밝혀주는 지혜로운 말을 들려 주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일반 사람들이 우리 신자들의 말과 행동을 듣고, 보고도 아무런 차이점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그것은 성직자나 수도자나 평신도나 말할 것 없이 우리 모두 그들과 별 다른 차이가 없이 그냥 그냥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지?"라는 놀라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느낌을 전해 줄 수 있어야 정말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를 희랍어로 Sofia(소피아)라고 하며, 그 뜻은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판단력"이다. 즉 세상의 모든 일에는 크고 작은 것,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고,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르고 그른 것이 있다. 그리고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바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상황을 잘 판단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먼저하고 나중에 해야 하는지, 등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이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다고 하고, 나중에 해야할 일을 먼저하고 지금 해야 할 일을 나중에 하는 愚를 범하고 있다. 무엇이 우선 순위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 지혜는 어디에서 얻는가? 집회서에 보면 지혜에 대한 말씀이 있다. " 모든 지혜는 주님께로부터 오며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법칙이다. 지혜로우신 분은 오직 한 분, 두려우신 분이시며, 당신의 옥좌에 앉아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지혜를 만드시고 지켜보시고 헤아리시는 주님으로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과 모든 인간에게 지혜를 너그러이 내리시고 특히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풍부히 나누어 주신다."(집회 1, 1- 10 참조)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또 설상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모르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
지혜는 우리가 하는 직업에서, 사도직에서, 학교 공부에서, 활동에서, 자기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지혜를 얻고 싶으면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깊이 묵상해야 한다. 얼마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느냐에 따라서 지혜의 폭은 달라질 수 있다. 말씀을 읽기는 읽되 그냥 읽는 것으로 그치면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지혜는 깊은 샘물을 파듯이 깊이 깊이 말씀을 묵상할 때 얻을 수 있다. 인간의 세계와 사고의 범위를 넘어 하느님의 세계, 신비의 세계에로 깊이 내려갈수록 더 깊고 맑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나를 보고 "참 예뻐졌다. 건강해졌네."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그런 말보다도 "참 성숙해졌네, 굉장히 지혜로워졌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지?"라는 말을 듣는다면 더욱 기분이 좋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욱 지혜로워져야 한다.
그런데 몇 년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더군다나 성직자의 삶, 수도자의 삶을 살았는데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다른 진보가 없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일반사람들이나 커다란 차이가 없다면 그거야말로 불행한 삶이요 크게 잘못된 삶이다.
묵상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안에서 샘물이 솟아나오듯이 맑은 지혜가 나오는 것이다.
저 사람의 저런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떻게 해서 저 가정은 늘 화목하게 지낼까? 저 사람의 평화스런 모습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저 사람의 기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들에게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이런 삶은 신앙인들 특히 복음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서만이 가능하다.
신앙은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다. 신앙은 자기가 갖고 있는 한계를 넘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점차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길들여 질 때 비로서 가능하게 된다. 신앙은 자기에게서 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다. 신앙은 자기의 좁은 세계에서 나와 넓고 깊은 하느님의 세계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적인 생각과 능력에 머물지 않고 그 이상의 세계 즉 하느님의 세계, 하느님의 능력을 끌어 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휠씬 지혜롭고, 능력이 있고, 그리고 멀리 내다본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그 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고 오늘 복음은 끝을 맺는다.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지혜인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묵상하는 사람만이 지혜로워질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으면 우리에게서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을 것이다.
믿음을 갖고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생활에 충실한다면 분명히 몇 년 후에 사람들은 나를 보고 놀랠 것이다. "아니, 저 사람이 어디에서 저런 지혜를 얻었을까? 저 사람이 옛날의 그가 아니네! 저런 여유가, 저런 평화가, 저런 희생이, 저런 온유함이, 저런 사랑이, 저런 기쁨이, 저런 용기가 어디서 왔을까?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네."하고 감탄하게 될 것이다. 이런 소리를 듣고 싶은가?
아니면 "저 사람은 저 형편없이 되어버렸네, 저 사람은 옛날 그대로잖아, 아니 저 사람은 더 못되었네, 성질은 더 나빠졌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무척 추해졌구만. 불쌍도 하지!!!"라는 말을 들을 것인가?
인생은 빠스카이다. 시간이 흐른만큼 나는 변해간다는 말이다. 어느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가? 자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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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