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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5일 연중 제18주일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24-35)
"I am the bread of life;
whoever comes to me
will never hunger,
and whoever believes in me
will never thirst."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먹을 것이 부족했다. 그들은 모세에게 불평을 쏟아 낸다. 이집트에서의 생활이 더 좋았다고 투덜거린다. 주님께서는 기적의 음식을 내려 주신다. 저녁에는 ‘메추라기 떼’를 보내시고, 아침에는 기적의 ‘만나’를 양식으로 주신다(제1독서). 신앙인은 이방인처럼 헛된 마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진리대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영과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옛 삶을 버리고 새 인간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제2독서).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 나선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양식을 얻으라고 하신다. 당신을 믿고 따를 것을 명하신 것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을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 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분께 ‘삶의 이유’가 있지만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러기에 엉뚱한 곳에서 찾습니다. ‘전혀 아닌 곳’에 가서 자신과 가족들의 앞날을 묻고 있습니다. 답이 나올 리 없습니다. 생명은 주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어떤 생명이든 주님의 섭리 안에서 존재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삶이 밝아집니다. 그것이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생명의 빵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육체는 활기찬데 영혼은 굶주려 있다면 삶의 균형은 무너집니다. 사는 것이 불안하고 왠지 허무한 것은 영혼이 보내는 ‘갈증의 신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심히 넘깁니다. 원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기에, 불안과 허무는 더 심해집니다. 사람들이 물질에 매달리고 본능에 탐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혼에게 생명력이 주어져야 합니다. 영적 음식이 제공되어야 합니다. ‘왜 살고 있는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답변이 주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서 답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생명의 빵’이라 하셨습니다. 신앙인은 영성체를 통해 생명의 빵을 체험합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영성체인지요!
☆☆☆
사막에서 가장 강한 짐승은 낙타입니다. 다른 동물은 강렬한 태양 아래서 맥을 못 추지만 낙타는 견디어 냅니다. 그는 자신의 몸에 물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많은 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느 동물과 비슷한 양의 물입니다. 하지만 낙타는 자신의 내부에 물이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기억합니다. 그 기억이 희망이 되어 사막의 뜨거움을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사막에서 강한 식물은 선인장입니다. 줄기는 최대한 물을 머금어야 했기에 뚱뚱해졌습니다. 잎은 최소한의 물로써 버티어야 했기에 가늘어졌습니다. 선인장의 가시는 잎이 퇴화된 것이라고 합니다. 생존을 위한 발버둥은 이렇게 모양새마저 바꾸었습니다. 그러기에 선인장 꽃은 슬픔을 간직한 화려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생명의 에너지가 있음을 설파하십니다. 인생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려면 당신께 오라는 말씀입니다.
낙타는 오아시스를 만나면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내부에 다시 물을 채웁니다. ‘물은 곧 희망’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낙타의 지혜를 생각해 봅니다. 희망의 주님께서 생명의 빵으로 오신 이유를 묵상해 봅니다.
★★★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육체가 성하면 영혼도 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는 육체만 건강하면 영혼은 자동적으로 건강해지는 줄로 생각합니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표어를 너무 많이 들어 온 탓입니다. 이 외침의 본래 의미는 육체와 함께 정신(영혼)도 건전해지자는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를 위한 노력은 별개의 것입니다. 육체에 쏟는 정성의 절반만 영혼에 쏟더라도 얼마나 강인한 영혼이 될는지요. 육체는 건강미가 넘치지만, 영혼이 병들어 있다면 문제입니다. 당연히 반응이 나타납니다. 삶이 허무하고 까닭 없는 불안이 떠나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원인을 모릅니다. 영적 갈증인 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지요.
어디로 가겠습니까? 본능의 충족이 탈출구가 되기 쉽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성욕과 식욕과 소유욕을 좇는 불나비가 되어 가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갈증을 없앨 오아시스는 당신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은 사막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힘을 받아야 건강한 영혼이 될 수 있습니다. 본능을 조절하는 절제를 지닐 수 있습니다.
낮은 곳에서 ‘생명의 빵’ 되어라
-배광하신부-
아낌없이 주시는 주님
▤ 배고프지 않도록
그리스 신화에는 신들의 불을 훔쳐다가 인간에게 전해 주는 ‘프로메테우스’가 등장합니다. 그는 ‘제우스’ 신을 속인 죄로 카우카소스 산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파 먹히는 형벌을 받습니다. 인간이 추위로부터 따뜻할 수 있도록, 음식을 조리하여 안전하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불을 전한 그의 사랑에 비하여 형벌은 참으로 끔찍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이같은 신화의 이야기인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화의 이야기일 뿐 실화는 아닙니다. 반면 예수님의 인간 사랑은 실제로 있었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이 얼마나 목말라 하는지, 얼마나 배고파 굶주려 하는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 같은 지극한 사랑이 세상 창조 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사랑의 말씀인 성경은 잘 밝히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창세 1,29).
창세 이래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양식을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대지가 아무리 메마르고 척박하여도, 마치 오늘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것이 결여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생수를 마셨듯이, 그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인간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멈추어지거나 불가능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내어주는 진실한 사랑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 같은 끊임없는 사랑이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할 것입니다. 이 같은 가없는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에 보답할 길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찾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받은 생명의 양식인 이 사랑을 찾는 우리의 자세에 대하여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결코 세상적인 것 때문에 배고프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받는 것만이 아니라, 나눌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받은 그 생명의 빵을 이웃과 주님께 향한 나눔으로 보답해야 합니다.
▤ 갚아야 할 은혜
“당신은 빵을 사고 싶을 때 동전을 지불한다. 가구를 사고 싶을 때 은전을 지불한다. 그리고 토지를 사고 싶을 때 금전을 지불한다. 그러나 사랑을 사고 싶을 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지불해야 한다. 사랑의 값은 당신이다.”
예수님 때문에 영원한 생명의 빵을 먹은, 영원한 생명의 사랑을 체험한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성인의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빵을 거저 얻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의 값으로 바쳐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함을 생명의 빵이신 주님께서 먼저 당신 삶의 표양으로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내어 놓는다는 것은 낮춤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를 로마의 ‘노바티아누스’는 창세기의 말씀으로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람이 먹은 첫 양식은 나무에서 얻은 것들과 열매뿐이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은 결과 빵을 먹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양심에 따라 몸가짐이 달라집니다. 양심에 꺼리지 않는 한, 죄가 없는 이는 나무에서 양식을 얻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하지만 한때 죄를 지었던 인간은 땅에서 곡물을 얻기 위해 몸을 낮추게 됩니다.”
이를 생명의 빵을 얻게 되어 다시금 하늘을 바라보며 영원한 생명을 꿈꾸게 된 우리에게 오늘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2-24).
분명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빵을 우리에게 주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우리 또한 생명의 빵이 되어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 같이 살기 위하여는 가장 겸손의 자세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빵을 우리에게 먹이시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낮추실 대로 다 낮추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통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빵인 성체의 신비이며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삶이야말로 지상에서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양식, 그 생명을 누리는 길입니다. 다시금 우리는 세상의 음식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음식을 먹고 나누어야 할 그리스도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썩어 없어질 것과 영원한 것"
-이기양신부-
하느님께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청하시겠습니까?
돈 때문에 걱정이 많으신 분들은 평생 쓰고도 남을 재산을 청하실 것이고, 몸이 아파 고생하시는 분들은 건강을, 자식교육 때문에 고민이 많은 부모는 자식의 성공과 건강을 청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이렇게 하느님께 청한다면 오늘 복음처럼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는 경고 말씀을 듣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이 신자들에게 이 세상을 떠나서 영원한 것만을 추구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런 뜻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삶이 중요하기에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서 그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는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깨닫게 되기를 바라셨지요. 하지만 사람들 관심이 여전히 썩어 없어질 빵에만 쏠려 있었기에 이런 염려 말씀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가르침을 통해 영원한 것에 관심을 보이는 군중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하고 한 단계 높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은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느 사회복지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래 젊은이들은 여름 휴가철이라 바다로 놀러간다, 어학연수를 떠난다 하며 자기만을 생각하며 계획을 세우는데 성당 청년연합회원인 이들은 사회복지시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아기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아기들을 달래고 먹이며 생전 남의 빨래는 처음 하면서도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보는 저 역시 행복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에 반해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아주 가난하게 살았던 부부가 있습니다. 이 부부는 너무도 가난하게 살았기에 억척같이 일해서 돈을 벌었고 자식들에게는 절대로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어느 아이들보다 잘 먹이고 잘 입혔으며 자식들을 위한 일에는 액수를 가리지 않고 돈을 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입니다.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는데 아들을 보호하고 있으니 부모가 와야 한다는 통보였습니다. 깜짝 놀라 뛰어가 보니, 글쎄 그 집 아들이 강도짓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한 달 용돈이 30만 원인데 그것도 모자라서 세 녀석이 합세해 가난한 슈퍼를 털었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부족해 이런 짓거리를 했느냐며 자식을 나무랐지만 아들은 조금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어서 돈으로 자기를 빼내 달라는 소리만 했습니다.
오직 돈만을 아는 이기적 아이로 키운 결과입니다.
세상에서의 안락함과 출세,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몸만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아무리 몸이 편해도 마음이 불편하면 모든 것이 괴로워집니다. 몸이 불편해도 정신과 영혼이 평화를 누릴 때 진정 행복해집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
-허영엽신부-
오 래전 본당에서 1년 동안의 예비자 교리를 마치고
세례성사를 위해 마지막 면담을 할 때였습니다. 그
때 형제 한 분과 나눈 대화가 제 기억 속에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신부님! 저는 시장에서 작은 신발 가게를 합니다. 사실
제가 성당에 온 이유가 신발을 많이 팔기 위해서였습니다.
옆 가게를 보니 주인이 천주교 신자라 성당 사람들이 많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세례를 받고 성당에 다니면 돈을
더 많이 벌게 될 것이라 생각했죠. 그런데 교리를 배우면서
제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
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신앙을 가지는 것은 결코 순수
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신부
님! 제가 돈에 눈이 멀었습니다. 너무 죄스럽습니다. 용서
해주십시오.”
“형제님! 하느님은 형제님을 바로 그런 방법으로 부르셨
나 봅니다. 이미 하느님이 다 아시고 용서해주셨을 것입니
다. 용기를 갖고 세례를 받으세요.”
그분은 지금도 아주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신앙생활
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찾아 배를
타고 멀리 가파르나움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께
서는 군중들의 어리석은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썩
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라고 말입니다. 오직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고 하십니다.
헛된 것에 힘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빵의 기적을 올바로 이
해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모
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세속적 욕심을 한껏 채
워 줄 분으로 기대했고, 충분히 자신들의 왕이 되고도 남을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의 중심이 예수
님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군중들은“그럼,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
니까?”하고 다그쳐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하느님의 일
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라고 분명하
게 대답하십니다.
믿음을 이기적 욕심을 채우는 방편으로 생각한다면 우
리의 믿음은 아주 왜곡되어 버립니다. 마치 부모님께 효도
를 드리는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
앙은 바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어쩌면 그 옛날 예
수님께 꾸지람을 들었던 군중이 바로 우리의 모습은 아닐
까요?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이나 욕심에 사로잡혀 있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잘
못도 범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어느 때나 예
수님께 대한 믿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음과 자신의 욕심
가운데서 갈등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오늘의 복음말
씀을 기억한다면 순수한 믿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
다”(요한 6,35).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강선남-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닙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나누어 먹이셨던 곳에도 계시지 않자, 그들은 그분을 찾아 배를 타고 카파르나움으로 갑니다
(24절). 마침내 예수님을 찾아내고는 어떻게 그곳에 가셨는지 당황하며 묻습니다.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전에 있던 곳에는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제자들이 그 배를 타고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22절).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왜 그토록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서는 잠시 이전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곱 개의 이적 설화 가운데 공관복음서 모두에 나오는 유일한 설화인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6, 1‐15)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 가운데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어 그들이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놀라운 일을 보고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킬 종말의 예언자 또는 정치적 메시아로 여기면서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 하자, 그분은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셨지요(15절). 그 뒤 카파르나움으로 예수님을 찾아갔던 사람들은 바로 그분을 정치적 메시아로 만들고자 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인 듯합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냐는 그들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의 마음 상태를 지적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26절)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사람들이 배부르게 된 ‘이적’, 곧 ‘놀라운 일’과 예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신 ‘표징’은 서로 다른 두 개의 현상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 ‘이적’과 ‘표징’은 예수님의 활동과 제자들의 사명에서 곧잘 짝을 이루어 등장합니다(예 : 사도 2, 22. 43; 6, 8). 보통 일상생활에서 볼 수 없는 ‘이적’에는 그것을 지시하는 ‘표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바람과 달리 빵과 물고기로 배불렀던 이적 사건에만 마음이 가 있고, 그 속에 담긴 뜻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27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과 주고받은 대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 13‐14) 그때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 있는 물질로서의 물 그 이상을 알지 못하였듯이, 지금의 군중도 먹어서 배부른 물질로서의 빵만을 알고 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주신다고 하신 예수님은, 이제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27절) 다른 어느 누구한테서가 아니라 예수님한테서 그 양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께 파견받은 분으로 그분께서 행하시는 표징들은, 하느님께서 그분의 일에 정통성과 권위를 보장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 35)
이에 그들이 다시 묻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28절)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어려워서일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헤매고 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본디 그리스어에서 ‘하느님의 일들’입니다. 곧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여러 일을 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질문이지요.
그들의 이런 모습과는 상반되는 명쾌하고 단호한 대답이 주어집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29절)이라고요. 여러 가지 일들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이루는 데 필요한 ‘하느님의 일’은 오직 한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음으로써 그분의 일에 협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대화의 상대방인 예수님 쪽으로 가지 못하고, 자신들의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며,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함께 가나안 땅을 향해 행진할 때 만나를 먹었던 일을 들추어냅니다.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예언자로 보고(6, 14 참조), 모세가 행한 것과 같은 기적을 예수님께 기대하고 있는 것이지요. 몰이해와 아집의 두꺼운 벽이 예수님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이해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구약성경을 들고 ‘하늘에서 빵을 내려주신 분은 모세가 아니고 하느님이셨다.’라고 설명해 주시고, 지금 ‘그들에게 참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당신 아버지이며 그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4, 15) 했던 것처럼 사람들도 말합니다.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34절) 그러나 그들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께서 주시는 생명의 물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채 우물로 물을 길러 오는 수고를 덜겠다는 생각에서 물을 구한 것처럼, 자신들이 요구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청한 것입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은 그들의 깨닫지 못함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다시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당신이 누구신지를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양식이신 당신을….
“나에게 오너라, 나를 원하는 이들아.
와서 내 열매를 배불리 먹어라.”(집회 24, 19)
최영균 신부
-영혼의 창문-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을 넘어선 믿음을 요구하시는 데
반해서 유다인들은 지상적 표징, 보이는 기적만을 요구합니다.
우리도 어쩌면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만을 찾아다니고 있는지 모릅니다.
<피카소, 세상을 바꾼 위대한 예술가>라는 책에서 제니퍼 펜델은 말합니다.
“나는 찾지 않는다. 발견할 뿐이다. 나는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 작품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 의해서만 살아 있다.”
피카소가 눈에 보이는 것만 그렸다면 세상을 바꾼 위대한 예술가의 출현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보이는 것만 추구하면, 표징만을 요구하는
신앙생활로 마감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인생을 그리기
시작하면 바로 그날부터 우리의 삶은 새로운 희망의 삶으로,
세상을 바꾸는 삶으로 바뀌어갈 것입니다.
눈을 감고, 영혼의 창문을 열어보십시오. 새로운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여름밤 시골집에서 창문을 열면 밤의 어둠이 두려움이 아닌 새로운 향기로
다가오듯이, 또 풀벌레의 울음이 아름다운 선율로 들려오듯이
여러분은 새로운 창조의 세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넘어, 보이는 것을 넘어 주님의 나라를 보실 준비가 되셨는지요?
하느님께서 빵을 주신다.
-김찬선신부-
연중 제 18주일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빵을 주신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빵을 주신다 할 때
거기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다른 누가 주지 않고 하느님께서 빵을 주신다는,
하느님께서 전갈을 주지 않으시고 빵을 주신다는,
내가 달래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는 면을 보겠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가지게 될 때
하느님께서 주셔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얻어서 가지게 되었거나
우연히 운이 좋아서 가지게 되었거나
다른 사람이 주어서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것 이외의 모든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사람은 반대로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가능성을 통해 우리에게 주십니다.
무전 순례를 하면 이런 경험을 뼈저리게 합니다.
몇 끼 굶을 때까지는 누구에게 밥 달라는 말을 못합니다.
대 여섯 끼 굶고 나서야 밥을 구걸하는데
처음에는 그나마 밥 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밥 달라고 하려다 사람이 나오면 겨우 물 달라고 합니다.
그러다 더 굶어 도저히 견딜 수 없으면 밥을 구걸하는데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도 여간해서 얻어먹지 못하고
줄 것 같은 사람을 찾아가 청해도 주지 않습니다.
모든 시도가 다 실패하고 그래서 포기하였을 때,
그 때 전혀 기대하지도 않은 사람을 통하여 밥을 얻어먹습니다.
이런 것이 반복될 때 깨닫게 되는 것이 밥 한 끼도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구나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두 번째로 하느님은 전갈을 주시지 않고 빵을 주십니다.
오늘 탈출기에서 보듯 고기타령을 하니까
뱀이나 전갈이 아니라 메추라기를 보내시는 하느님입니다.
나중에 불 뱀을 보내신 적이 있으나
이 또한 깨우치시기 위함이지 역심에서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을 주시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 좋은 것을 주십니다.
세 번째로 하느님은 주시는 분입니다.
안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너무도 인색하여 우리가 떼를 쓰거나 졸라대야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주시고자 하시는 당신의 본성대로 주십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이시고 흘러넘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실은 오늘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이나
예수님께 “그 빵을 달라”고 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달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청하는 이유는
청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청함으로써 갈망을 명징하게 하고 절실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체를 영할 수 있다는 은총
-전삼용신부-
오늘 우연치 않게 동기 신부 아버님을 뵙고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 아버님은 성체 신심이 특별하신데 그 연유는 이와 같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그 아버님은 신앙이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신을 부정하며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있었고 그렇게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하루는 일하시는 곳에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아버님은 그 화재를 직접적으로 입으셨고 3도 화상으로 죽은 것으로 판명이 되어 병원 영안실에 넣어지기 직전이었습니다. 영안실에 넣으려는 순간 일하는 사람들이 숨소리를 듣고 혹시 살아있는 것이 아니냐고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기억이 없으시다고 합니다.
깨어보니 병원 침대 위에 뉘여 있었습니다. 입도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코와 귀도 화재로 사라져버린 그야말로 회생 불가능 상태였습니다. 그 병원이 수원에 있는 가톨릭 병원이어서 수녀님이 “혹시 영성체 하고 싶으세요?”라고 물어 보셨고 아버님은 말씀을 하실 수가 없으셔서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입도 벌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성체를 영하시려고 하신 것일까요?
아버님은 그 때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영성체를 하고 싶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잊고 사셨던 기도를 다시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데 주위에 사람들이 나타나더니 성모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모송을 바치면 주위의 사람들이 주님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들이 기도를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이 제대로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하니 그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밤새 기도를 하시는데 온 병원에 불이 났다고 합니다. 그 분은 어떻게 걷고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고 하시며, 사람들을 깨워 피하라고 하였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옆 병실에 입원해 계신 모 주교님을 찾아갔는데 그 주교님은 일어나셨습니다.
불이 났다고 피하라는 그 아버님의 말에 “하느님께서 무언가 일을 하시려는 모양이네.” 하시며 아버님께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불은 그 아버님께만 보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시간 동안 아버님은 기적을 체험하십니다. 화상이 다 벗겨져 새살이 돋아난 것뿐만 아니라 없어졌던 코와 귀까지도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그렇게 아침 미사에 당당히 내려가 성체를 영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그 주교님께서 다 목격하셨습니다. 그 아버님보다 훨씬 뒤에서 약하게 화상을 입으셨던 분들이 지금까지 다 불구자로 계신 것을 보면 아버님의 기적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성체를 영하고 돌아왔더니 온 병원이 난리가 났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환자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아버님께 와서 혹시 여기 누워있던 환자 못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누구도 하룻밤에 그렇게 온전해 진 아버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고, 그분의 아버님, 즉 팔순이 훨씬 넘으신 할아버지께서는 그 일이 있어서 아들 얼굴이 더 나아지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후 바뀐 것은 아버님의 외모만이 아니라 마음이었습니다. 아버님은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성체를 영하셨고 지금도 성체를 보면 타오르는 불꽃이 보인다고 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며 예수 성심 그림을 생각했습니다. 예수 성심 그림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불타고 찢겨진 가시관 씌워진 심장을 손으로 들고 계십니다.
이태리 란치아노에서 성체 성혈 기적이 1200년 전에 있었는데 아직도 그 성체와 성혈이 그 곳에 모셔져 있습니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그 살과 피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였는데 성체가 변해서 된 살은 사람의 살이며 심장을 예리한 칼로 도려낸 것이고 피는 AB형이며 보통 사람의 피와 다를 바가 없는데 단지 극도의 고통을 당하면 나오는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은 죽은 사람의 살과 피가 아니라 극도의 고통을 당하는 살아있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심장 살과 그 속에서 쏟아지는 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심장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성령의 불이 타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님은 아마 그 불을 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셨지만 그들은 그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빵의 기적과 당신의 성체성사를 연결시키십니다. 결국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말씀이 그렇게 어려워서야 어떻게 이해하겠느냐며 모두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게 어떻게 말씀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그 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 먹어서는 안 되는 나무 열매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였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선이시기 때문에 선은 이미 알고 있지만 악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를 따 먹으면서 악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은 것입니다. 죄란 곧 하느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건들지 말아야 하는 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생명나무’입니다. 그 생명나무를 먹으면 영원히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생명나무는 열매를 먹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 자체를 먹어야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인인 상태로 영원히 살게 해서는 안 되겠기에 우선은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 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이 아니라 죄인인 상태로 영원히 살게 하시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우선 인간의 죄를 씻어주고 그 다음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사제가 미사를 드릴 때 성혈을 들며,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너희와 모든 이의 죄의 사함을 위하여 흘릴 피다.”라고 합니다. 피는 영원한 계약을 위해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보속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 원죄가 없어지고 고해성사를 받으며 죄가 없어질 때, 그 죗값을 우리가 하는 보속으로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우리가 보속을 하지 않아도 사제의 사죄경으로 죄가 용서됩니다. 인간이 자신의 죗값을 치를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인간 죄의 보속으로 순결한 희생제물이 필요했는데 그 보속에 합당한 순결한 피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희생제물이 되시기 위해 성모님으로부터 순결한 육체를 취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체와 성혈을 볼 때 그 성체와 성혈이 성모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예수님은 피를 흘리시며 인간의 죄를 씻으신 후,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먹고 마시라고 내어주십니다.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즉,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아담과 하와가 먹지 못하도록 했던 영원히 살게 하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이심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성탄 때 트리를 장식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바로 생명나무가 이 세상에 탄생하셨음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생명나무이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일을 겪으셨던 아버지와 똑 같은 경험을 아들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신학생인 아들이 신학교를 나가려고 생각하며 군대를 갔는데 부탄가스가 폭발하는 바람에 얼굴에 역시 같은 화상을 입었습니다. 얼굴이 원래대로 회복될 수 없다는 의사 말에 자살까지 생각하다가 주머니에 있는 묵주를 그냥 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엔 기도가 아니라 그냥 돌리기 시작하였는데 나중에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주일날 미사 때 기타를 칠 사람이 없다는 말에 자신이 가겠다고 말만 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밤새 묵주 알을 돌렸고 온통 수포로 덮여있던 얼굴에서 물이 다 빠져 나가고 아침에 뱀이 껍질을 벗듯 화상 자국이 한 겹에 다 벗겨졌고 아기와 같은 피부가 생겨있었습니다.
이런 기적을 체험하고 그 신학생은 눈물을 흘리며 다시 신학교에 들어와 사제가 되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아버지의 성체에 대한 신심과 아들의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별개가 아니라는 메시지도 분명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이니 어머니의 살과 피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게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이고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동참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 자주 하여 일상이 되어버리기 쉬운 성체, 그 신비를 알면 알수록 그냥 받아 모신다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어떤 개신교 신자가 천주교로 개종하고 처음으로 성체를 영할 때 눈물을 쏟았습니다. 왜 그러냐는 남편의 질문에, “성경말씀이 예수님의 몸인 줄 알고 열심히 허기를 채우려 했지만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이렇게 실제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데 어떻게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어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바로 감사의 제물을 드림으로써 그것이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도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감사의 제물로 드림으로써 우리 모두를 배불리 먹이십니다. 오늘도 아니 영원히 당신의 심장을 칼로 오려내어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는 예수님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야겠습니다.
생명의 양식
-전삼용신부-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도쿄 올림픽을 위해 집을 헐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인부들이 지붕을 뜯어내고 있을 때 도마뱀 한 마리가 몸 안쪽에 못이 박힌 채 살아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인부들이 희한하게 생각되어 주인을 불러 도마뱀을 보여주었습니다. 집 주인은 그 도마뱀은 3년 전 이 집을 지을 때 잡아서 그렇게 못을 박아놓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있는 것이 신기해서 모두 잠시 그 도마뱀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른 도마뱀 하나가 그 도마뱀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의문이 풀렸습니다. 3년 동안 벽에 못 박혀 있는 도마뱀을 위해 다른 도마뱀이 먹이를 물어다 준 것이었습니다.
음식을 먹지 못하면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입니다. 인간의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잠깐이나 영적인 죽음은 영원히 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과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있습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온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여러분의 영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안전하고 흠 없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1테살 5,28)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신 것처럼 인간도 당신 모상대로 삼위일체로 만드신 것입니다. ‘영혼’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아버지와 같습니다. 영혼은 인간이 만들어질 때 하느님께서 육체 안에 넣어주신 것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영혼은 그래서 자신의 고향인 하느님을 항상 그리워합니다.
‘육체’는 성자 예수님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듯이 육체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상태를 계시해줍니다. 누가 화내는 모습을 보면 육체가 화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영혼이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보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영’은 성령님과 같습니다. 성령님은 사랑의 전달자로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오고가시며 두 분을 하나로 이어주십니다.
인간의 영은 마치 자동차의 기름통처럼 텅 빈 공간입니다. 그 공간에 성령님으로 채워주지 않으면 마치 기름이 없는 자동차처럼 영혼은 죽게 됩니다. 즉, 영혼과 육체의 분열이 일어납니다. 영혼은 사랑하며 살고 싶지만 육체는 사람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성령님께서 인간의 영 안에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실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와 물로 인간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즉, 피로 죄를 씻고 물, 즉 성령님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당신의 피와 물, 이것이 바로 성체고 성경말씀입니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아 자신 안에 영을 채워 영혼이 원하는 것을 육체도 따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만으로는 성령님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치 못 박혀 벽에 붙어있는 도마뱀 신새입니다. 누군가가 음식을 날라다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음식을 날라다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성사와 가르침을 통하여 매일매일 생명의 양식을 먹고 삽니다.
바다에 표류하고 있다고 목이 마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바닷물이 많아도 그 물로는 해갈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떨어져야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바다의 짠물로 해갈을 풀려고 하면서 더욱 더 영혼은 메말라가고 죽어갑니다. 즉, 생명의 양식을 찾지 않고 육체의 만족만 찾으며 영혼을 돌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바로 영혼의 기본적인 욕구, 즉 사랑과 행복입니다.
영혼은 죄로 잃었던 하느님을 그리워합니다. 그 그리움이 배고픔과 목마름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에덴동산의 풍요로움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육체를 채울지 영을 채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빵
- 오정순-
사람들은 ‘먹는다.’ 또는 ‘먹힌다.’라는 말을 다양한 경우에 사용한다. 무엇인가 부족한 것을 채울 때 그 행위의 상징으로 먹는다고 표현한다. 성이 고픈 남성이 여성을 취했을 때도 먹었다고 말하고, 운동경기에서 승리했을 때도 ‘1등 먹었다.’라고 표현한다.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합병했을 때도 ‘먹었다.’고 표현한다. ‘먹었다.’는 것이 곧 ‘채워졌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채워져야 할 것이 무수히 많겠지만 그중 생명에 가장 치명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빵이다. 영혼과 육신의 생명 질서는 그 원칙에서 동일하다. 먹는다는 말은 생명을 이어간다는 말이 전제되고, 생명이란 단어는 빵과 직결된다. 물질의 빵과 영적 빵인 말씀이 동시에 우리에게 들어와야 하며 한쪽이 모자라면 다른 쪽에서 많이 채워 생명의 균형을 잡아간다.
한 번의 영적 변화로 일생 동안 건강한 영혼을 보장받을 수는 없다. 새로 태어났어도 태어난 것은 빵을 먹으며 성장 발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종종 자기 점검을 해야 한다. 사람들과 잘 부딪치고 타인에게 너그럽지 못하며 남의 심정을 헤아리기보다 정의를 앞세워 칼같이 단죄하는 습성이 자주 드러난다면 이미 은총의 물이 욕조를 빠져나가듯 바닥이 보일 때다. ‘꼬르륵’ 하고 마지막 물 빠지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생명의 빵을 정기적으로 챙겨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 “얘야, 생명의 빵 좀 먹고 가거라.”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양승국신부-
<과잉친절의 하느님>
언젠가 형제들과 농가 봉사활동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절대로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 점심 식사로 도시락까지 맞춰 갔었는데, 홀로 사시는 할머님, 막무가내셨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드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희를 위해 큰 가마솥에 밥을 지으셨는데, 뚜껑을 여는 순간, 냄새부터 다르더군요. 밥에 기름이 자르르 흘렀습니다.
후덕하신 할머님, 아니나 다를까, 밥공기 크기부터 달랐습니다. 놋쇠로 된 무거운 밥그릇은 보통 식당 공기그릇의 거의 두 배였습니다. 그런 그릇에 밥을 꽉꽉 눌러 담은 다음, 또 다시 애써 고봉으로 담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껄쭉하게 잘 끓인 청국장을 큰 대접에 한 대접씩 퍼주셨습니다.
밥숟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여도 밥공기에 든 밥은 통 줄어들지를 않았습니다. 저희 모두는 하나같이 밥그릇, 국그릇, 비운다고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살았다, 이제 다 먹었다, 했는데, 비호처럼 다가오신 할머니, 어느새 제 밥그릇 안으로 밥 한 주걱을 더 얹어주시며 하시는 말씀.
“덩치는 산만한 장정들이 밥 먹는 게 통 시원찮여! ”
‘밥 고문’ 당할 당시는 물어보지도 않고 너무나 일방적인 할머니가 엄청 미웠지만,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할머님으로서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표현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셨겠지요. 할머님과 비슷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물하고 싶어 안달이 나신 분,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더 잘 먹이려고, 더 많이 먹이려고, 더 좋은 것을 먹이려고 기를 쓰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도망을 가고, 우리가 외면을 해도, 어떻게 해서든 쫓아와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과잉친절’의 하느님이 우리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희망을 주셨습니다. 기쁨을 주셨습니다. 사랑을 주셨습니다. 위로를 주셨습니다. 격려를 주셨습니다. 새 출발할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이 지니셨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예수님, 더 이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당신의 생명을 주십니다. 살과 피를 주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평생토록 자비와 은총을 흘러넘치도록 베풀어주시는 풍요의 주님이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주다주다 못해 줘서는 안 될 당신의 살과 피까지 내어놓으신 사랑의 주님이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도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되풀이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있습니다.
당신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역시 가난한 이웃들과 가진 바를 관대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공동체와 형제들을 위해 아낌없이 우리의 시간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소외된 이웃들, 고통 받는 이웃들 싫다고 해도 쫓아가서 위로의 손길을 건네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아듣기 위하여
-임준기 신부-
‘동문서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질문과는 다른 엉뚱한 대답을 한다는
것이지요. 결국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살아 있는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분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먹고 싶은 빵’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인생의 고비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련과 고통의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시련과 고통을 허락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알고 싶어 합니다. 신앙적인 의미해석을 통해서 우리는
시련과 고통을 극복할 힘을 얻게 되고, 좌절하지 않고 더 높은 희망을 향해
적극적인 자기 투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 삶의 의미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그분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받는 사람, 내주는 사람
- 김우정 신부-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묻습니다.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기가 찬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표징을 보여주셨는데 사람들은 더 큰 것, 더 자극적인 것, 더 흥미로운 것을 주님께 요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신 것은 하느님을 믿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며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하지만, 금방 모든 것을 잊고 주님께 또 다른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본질적인 것에 대해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과 다르다고 하여 결국 주님을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 청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거나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면 곧잘 하느님께 등을 돌리거나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이 그토록 많음에도 하느님께 투덜거립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모두 내어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받을까를 생각하기보다 받은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돌아봐야 합니다.
감사드릴 것이 그토록 많은데도 우리는 혹시 하느님께 받을 것만 생각하지 않는지 돌아봅시다. 만일 아직까지 감사드리지 못했다면, 이제 우리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내주는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닮은 자녀가 될 것입니다.
생명의 빵
-오상선신부-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 얼마나 힘찬 선언인가!
과연 예수만이 외칠 수 있는 말이다.
누가 감히 생명의 빵이 된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매일같이 음식을 먹지만
요 며칠간 식중독끼가 있는 듯하여
제대로 먹지를 못한다.
생명을 위해 먹지만
약이 되기는 커녕
잘못 먹으면 독이 될 수도 있단 말이겠지.
자,
나는 생명의 빵인가?
많은 영혼들에게 생명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사제요 수도자인가?
아니면 오히려 잘못 먹여서
식중독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그런 병을 주는 사제요 수도자는 아닌가?
언제
나 또한 주님처럼
<나는 생명의 빵이다!> 하고
자신있게 외칠 수 있으리오.
그 이전에
<내가 생명은 주지 못할 망정 독을 주지는 말게 하소서>
하고 청해야 하리라.
내가 진정 생명의 빵이 되려면
생명의 빵이신 그분으로 가득 채워져야 하리라.
그래야만
나도 작은 생명의 빵이 되리라.
오늘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 되게 해보자.
생명의 빵이신 그분이 내 안에서 일하시게 해보자.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 을 것이다.
- 신요안 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자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 해도 인정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분께 삶의 이유와 활력이 있는데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관하고 계시는 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곳에서 열심히 찾고들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빵은 음식입니다. 생명의 빵은 영혼의 음식입니다. 영혼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는 건강한데 영혼이 병들어 있다면 균형은 깨어지고 무너지고 맙니다. 삶이 불안해 지고 허무감에 휩싸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굶주림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고 갈증을 느낀다며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고, 모르고 있기에 불안과 허무에서 벗어나려고 본능적인 삶에 탐닉을 합니다. 영혼의 목마름은 더욱더 심해질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혼의 목마름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 방법은 영혼에게 생명력이 주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영적 음식이 제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답변이 주어져야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안에서 대답을 찾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자신을 두고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성체성사 안에서 생명의 빵을 체험하게 됩니다. 영성체를 통해 영적 음식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건강해진 영혼이 육체적인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영성체 입니까?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성체를 수없이 모시지만 영적인 힘을 느끼지 못했다면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나는 성체를 어떻게 모시고 있는가?
성체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성체 앞에 나선다는 것은 실제로 살아 계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냥 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최소한의 정성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생략되었기에 구경하는 미사가 되고, 아무 뜻 없이 받아먹는 영성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성체신심은 정성에서 출발합니다. 교회가 공심재를 정해놓은 것은 정성을 다해 성체를 모시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많이 후퇴하여 성체를 모시기 한시간 전 까지면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오래 전에 우리 교우들은 성체를 모시려면 전날 밤부터 아무 것도 먹지를 못했습니다. 물도 못 먹게 하였고 양치질을 해도 양칫물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과장된 행동이었지만 그 만큼 정성을 들여 성체를 모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네 옛 교우들은 이 규정을 끔직 이도 지켰답니다.
정성으로 성체를 모셔야 필요한 곳에서 영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분 힘이 우리 영혼과 성체 안에 머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생활 속의 불안과 허무를 극복할 줄 압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아름다운 변화가 자신에게 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빵이 주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성체를 정성껏 모실 수 있을 때, 성체께 대한 신심은 새로워 질 것이고, 그 분 안에서 결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문병찬 신부-
군중들이 예수님께 믿을 만한 근거로 기적이나 일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믿을만한 예로써 자신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를 제시합니다.
만나를 먹고 광야에서 살아날 수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는 곧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만큼 절실하고 가장 믿을 만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적을 보여준다면, 기꺼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만나에 대하여 설명하시면서 바로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무엇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순간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예수님께 믿을 만한 징표를 요구합니다.
자신의 부족한 믿음, 잘못된 믿음, 순수하지 못한 믿음을 탓하기보다
예수님께 모든 책임을 돌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믿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 자체로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신 것인데도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기에 신앙생활이 기쁘고 보람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것에서 신앙생활의 기쁨과 보람을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위로나 주변의 칭찬, 활동 속에 느끼는 인간적인 기쁨이
신앙생활의 기쁨의 참된 원천인 양 착각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고,
어느 정도 이런 것들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적인 기쁨이 주가 되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그 자체의 기쁨과 의의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든다면,
분명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기만족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영원한 빵
-김유철 신부-
오늘 요한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믿으라 하고
사람들은 믿음직한 표징을 보여달라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사람들에게 대중성을
지닌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뜻을 중심으로 서로 모여 마음을 열고,
물질을 나누었습니다. 모두 풍족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부족함이 없는
나라입니다. 이미 하느님이 우리에게 넘치도록 은총을 베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은총의 풍부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깨닫는 순간 우리는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은총을 깨닫지 못합니다.
육적으로 배고프지 않을 빵을 달라고만 합니다. 사람들은 그 옛날 조상들이
광야를 헤매며 굶주릴 때, 모세의 도움으로 ‘만나’를 먹고 살게 되었다고
모세를 칭송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만나를 준 것은 모세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니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는
육적인 배고픔을 달래주는 것으로 역할을 다했지만 열두 광주리나 남게 한
오병이어의 기적은 생각을 바꿔 이웃을 초대하고 마음을 열어 나누는 것이기에
한 번 먹고 끝나는 일회적인 행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런 생각을 이해하고 동참할 수 있다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생명의 빵을 얻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빵
-이세영 수녀-
삼십 년 가까이 수도생활을 해온 저의 삶을 되돌아보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여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저는 딱 한 번 주어지는 인생에서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수도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공동생활을 해나가면서 힘들고 어려우면 다른 사람과 비교도 하고, 제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하느님께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성장의 시간 가운데 제게 주어진 처지와 환경을 최상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다른 사람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주님이 내 안에서 더 찬미를 받으실 수 있도록 ‘나’를 포기하며 ‘나’를 낮추는 기도생활에 더욱 충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수도생활뿐 아니라 제 인생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총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평화는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타났으며, 수도생활도 한결 여유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매일 성체성사를 통하여 순간에 충실하고 평범한 일상의 삶 안에서 비범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비결을 터득하게 되어 비로소 행복한 수도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수도자로서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싶은 갈망을 안고 최선을 다한 저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혜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모든 수녀님의 얼굴을 볼 때마다 ‘하느님의 얼이 담긴 얼굴’로 보게 되고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섬길 줄 아는 능력도 생겨났습니다.
이제야 깨닫습니다. 지난 삼십 년, 아니 더 많은 시간 동안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생명의 빵이 저를 감사와 사랑이 충만한 진정한 새 생명으로 일으켜 세웠음을.
“내가 생명의 빵이다.”
-양승국신부
<대책 없는 예수님>
가끔씩 대책 없는 어르신들을 뵙니다. 아직도 ‘꽤 많이 남은 날들’을 생각해서 당신
들 몫을 잘 챙겨놓으셔야 하는데, 이 자식, 저 자식 다 마음에 걸립니다. 여기 조금,
저기 조금 다 나누어 주다보니 이제 남은 재산이라곤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더 못줘서 안달이십니다. 나중에 어떡하려고 하시는지 정말 대책이 안섭니다.
이리 떼이고 저리 뺏겨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상태, 더 이상 줄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이제 몸뚱아리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은 더 대책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있는 것 없는 것 다 나눠주고 이제
그분께 남은 것은 몸뚱아리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남은 마지막 몸뚱아
리조차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
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당신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빵’이라시며 우리에게 내어놓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무엇 하나라도 더 주지 못해 애가 타시는,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하느님
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애 내내 음식과 무척이나 관련이 있었습니다.
‘빵집’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말들이 쉴 새 없이 입을 들이대던
곳, 건초가 가득담긴 말구유에 뉘어지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허기
진 백성들의 해결사이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이제는 우리들의 배고픔을 영원히 해결해주시기 위해 생명의 빵이
되십니다.
흔들리는 우리를 보다 강건하게 만들어주시기 위해, 나약한 인간에게 당신의 신성
(神性)을 공유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까지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죄인인 우리이지만 예수님께서 내어놓으신 생명의 빵으로 인해 하느님의 영광에 참
여하게 되었습니다. 죽을 목숨인 우리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나눠주신 생명의 빵으
로 인해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이토록 과분한 축제가 성체성사입니다. 그 큰 사랑, 측량할 길 없는 감사의 축제가
성체성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뵈올 수 있는 주님 현존의 장(場)이 어디 있을
까요?
의외로, 또 은혜롭게도 그 장은 우리와 너무나 가까이 있습니다. 바로 성체성사입니
다.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 예수님께서는 파스카의 신비를 되풀이하십니다. 매 미사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난당하시고, 죽으시는가 하면 영광스럽게 부활하십니다.
성체성사에 참석하는 우리는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파스카의 신비에 깊이 침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옛날 홍해를 통해 죽음의 땅을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처럼, 매일
의 미사를 통해서 우리도 지금까지의 삶을 일단락 지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미사 안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어제의 나와 결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미사를 통해서
우리는 죄와 악습으로 물든 지난 삶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미사 때 마다 우리
는 낡은 옷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절차를 반복해야 합니다.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순간 우리는 과감하게 아래쪽을 포기하고 위쪽으로 올라서야
합니다. 죄와 암흑이 지배하는 죽음의 나라를 통과해서 은총과 빛이 흘러넘치는 생
명의 나라로 부단히 넘어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이제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한 별도의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
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뵙기 위해서 굳이 비행기 삯을 들여서 최후의 만
찬이 거행되었던 예루살렘의 다락방 순례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부활은 이제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
일 주어지는 선물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은 동물들이 하루하루 연명하는데 필요한 사료가 아니
라,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아름다운 우리 인간의 영혼들
을 영생의 창공으로 비상하게 할 참된 양식입니다.
"생명의 빵"
-이수철신부-
하루하루를 하느님 주시는 새날의 선물로 생각한다면,
늘 새 마음으로 기쁘게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죽음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들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나,
죽어있는 것들은 차고 딱딱합니다.
진화가 잘 된 동물들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나
진화가 덜된 동물은 차갑고 딱딱합니다.
진화가 최고도에 이르렀다는 사람은
부드럽고 따뜻한 살이 딱딱한 뼈를 에워싸고 있지만,
진화가 덜된 거북이, 게, 가재 같은 동물은
딱딱한 뼈가 살을 에워싸고 있다는 이야기
재미있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음이 완고하고 교만한 이들,
진화가 덜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진화가 최고도에 이르렀다는 사람들,
예나 이제나 쇠붙이 무기들 들고 전쟁하는 것을 보면
여전히 진화가 덜 된 문명과 야만을 동시에 지닌
역설적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사람들처럼 무익하고 무모한 전쟁을 하는 동물들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군대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은, 문명화된
야만인일 수뿐이 없습니다.
외적상태만 아니라 내적상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말씀하신 예수님의 내면은
진화로 말하면 최고의 절정상태입니다.
다음 스테파노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딱딱하게 굳어있는 백성, 원로들, 율법학자들과는
얼마나 대조적인지요!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성령을 거역하면
마음과 몸은 차고 어둡고 거칠고 딱딱해져
완고하고 인색해 질 수뿐이 없습니다.
반면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이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참 거룩한 기도를 바칩니다.
예수님의 임종어와 똑같은 스테파노의 두 임종어가
그의 부활하신 주님과의 일치의 삶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새삼 참 영성의 특징은
단순성,
개방성,
유연성,
신축성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임을 깨닫게 됩니다.
한결같이 성령 충만한 결과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의 빵, 생명의 빵인
부활하신 주님의 성체와 말씀이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며 세상에 생명을 줍니다.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존재하는 온 세상의 피조물입니다.
오늘 복음의 백미인 다음 말씀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성체성사의 진수를 밝혀줍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결코’라는 단어에 주님의 힘이 집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육으로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지요!
영육이 배고프고 목말라도 채워지지 않아
차가워지고 굳어지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생명의 빵이신 부활하신 주님을 모실 때
일거에 해결되는 영육의 배고픔이요 목마름입니다.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복음의 군중은 물론 우리의 간절한 소원에 응답하여,
부활하신 주님은 매일의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빵인 당신 자신과 더불어 성령을 충만히 선사하십니다.
아멘.
기적 중의 기적
-강영구신부
당신은 무엇을 기적(奇跡)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의 큰 사랑이 감지(感知)할 수 있는 모습으로 드러난 것을 기적(奇跡)이라고 합니다.
창밖을 내다보시겠습니까? 당신은 거기서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습니까?
흐드러지게 핀 벚꽃과 새록새록 돋아나는 새싹들, 하루가 다르게 녹색 옷으로 갈아입는 잔디밭이 보입니까? 그것이 기적(奇跡)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손길은 그렇게 나타납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표가 될 만한 기적을 보여 달라는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날씨가 맑겠구나.’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한다. 이렇게 하늘을 보고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하느냐? 악하고 절개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나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마태16,1-4)
요나가 니느웨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손길이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인류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예수님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아침저녁 하늘을 보고 날씨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도 하느님의 큰 사랑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그는 눈 뜬 장님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고 요한복음은 증언합니다.
예수님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당신에게 허락된 오늘 하루도 큰 기적입니다.
당신 자신도 기적입니다.(一明)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박상대 신부 -
복음(6,22-29)에서 예수께서는 군중들에게 육신만을 배불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찾기'보다는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즉 '추구'하라고 강조하셨다. 이 말씀은 불멸의 양식이란 썩어 없어질 양식처럼 찾을 수 있는 어떤 무엇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추구(追求)'하라는 것이다.
'찾는다'는 말은 이미 다 만들어진 것을 뒤지거나 두루 살펴서 발견해 내는 일이다. 때로는 요구하거나 청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추구한다'는 말은 목적한 바를 이루고자 끝까지 좇아 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불멸의 양식이란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찾을 수 없고 오직 추구될 수 있을 뿐이다. 불멸의 양식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조건은 불멸의 양식을 주시고자 하는 자를 믿어야 하는 것이 어제 복음의 결론이었다. 오늘의 복음에서는 불멸의 양식이 무엇인지가 선포된다.
오늘 복음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① 예수께서 '불멸의 양식을 추구하는 조건'으로 '불멸의 양식을 주는 자'를 믿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믿음을 얻기 위한 기적을 요구한다.(30-31절) 그들은 모세와 예수를 대립시켜 "모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 우리의 조상들을 먹이는"(출애 16,1-36; 시편 78,24; 지혜 16,20-29 참조) 기적을 보여주었는데, 예수는 어떤 기적을 보여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믿음을 위해 기적(奇蹟)을 청하고 있다.
사실 믿음이란 내심(內心)에 주어진 어떤 무엇에 대한 자유로운 응답(response)이다. 기적을 보고 믿는다면 그것은 기적이 믿음을 강요하는 셈이 되고 만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라. 그들은 항상 기적을 요구했고, 기적을 보고서야 믿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에 믿음이 강요당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된 믿음이란 기적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유의지의 온전한 결단으로 성립된다. 군중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행사하기보다는 기적에 의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빵의 기적과 비슷한 기적을 요구하고 있으니 결국 육적 세계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② 이제 예수님의 부연설명이 이어진다.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다 조상들을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라 '예수의 아버지'라고 정정(訂正)하여 사람들의 오해를 풀고자 하신다.(32-33절) 예수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하느님이시다. 이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모세가 하늘에 청한 만나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빵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중에 일용할 양식이 넉넉지 못함을 불평하자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를 양식으로 주신다.(출애 16,1-36) 이 기록을 살펴보면 만나는 그야말로 하루의 양식이었고(안식일은 예외) 다음 날은 곰팡이와 구더기의 밥이었다. 그러나 오늘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빵은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그런 빵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는 것이다.
③ 사람들이 예수께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늘의 빵'을 청한다. 이에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빵'이심을 선포하신다.(34-35절) 이 언명(言明)은 더 이상의 설명이 아니다. 이는 선포요 폭로(暴露)이며 예수님의 자기계시이다. 사람들은 앞서간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조상에게 빵을 먹인 사람이 모세가 아니라 '하느님 내 아버지'라는 예수의 자기계시적 언명(言明)도 쉽게 수긍하는 듯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가파르나움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사람들 보다 순진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안중에 '하늘의 빵' 밖에 없는 것인가?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빵'이라는 선포는 자신에 대한 결정적인 계시이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허기짐과 타는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예수님이 생명의 빵이시기 때문이다. 이 빵을 얻기 위해서는 그분에게 가야하며, 그분에게 가는 것은 그분을 믿는 것이다. 그분은 빵의 기적을 행하신 그 날 밤,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 "나다"(에고 에이미)라고 하신 바로 하느님 그분이시며, 이분이 바로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자신을 구체적으로 폭로하신 하느님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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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