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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6일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마태 14,13-21)
Taking the five loaves and the two fish,
and looking up to heaven,
he said the blessing, broke the loaves,
and gave them to the disciples,
who in turn gave them to the crowds.
They all ate and were satisfied,
말씀의 초대
하난야는 주님의 집에서 사제들과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빌론에서 곧 해방될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 그는 백성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고, 꼭 필요한 말을 해 주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하느님 말씀을 받아, 그의 예언이 거짓임을 밝히고, 장차 있을 패배의 징벌을 예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순교 소식을 듣고 배를 타시고 외딴곳으로 물러가신다. 그렇지만, 당신을 찾아 몰려온 군중을 철저하게 섬기신다. 그분께서는 군중에게 빵의 기적을 베푸심으로써, 교회를 통하여 믿는 이들에게 주실 성체성사의 표징을 미리 보여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에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배를 타시고 외딴곳으로 물러가십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당신께 몰려드는 백성을 가엾게 여기시며 빵의 기적을 베푸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새로운 생활 방식과 하느님 나라를 백성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거룩한 잔치, 곧 성찬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 자리에 모인 백성은 성찬에 참여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성찬은 주님의 현존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사입니다. 성찬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부르심을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기억하게 해 주는 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것을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 큰일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가진 것이 제아무리 부족하고 초라해도 참으로 주님께 봉헌하는 삶이 될 때, 주님께서는 그것을 사용하시어, 다른 사람들에게 크나큰 사랑의 일을 하십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의 신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은 나누면 나눌수록, 그 기쁨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커집니다.
☆☆☆
“여기는 외딴곳이라 먹을 곳이 없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을 보내야겠습니다.” 제자들은 걱정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배고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시장기를 느끼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화들짝 놀랍니다. ‘저희가 무엇을 어떻게 줄 수 있단 말씀입니까?’ 자신들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기적의 스승님을 곁에 두고도 그런 생각에 빠진 것입니다. 제자들도 ‘있어야’ 준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겨우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구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생각을 바꾸어 주십니다. 하찮은 것도 당신께는 기적의 음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면 마음도 바뀝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제자들 앞에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사람들보다 제자들이 더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리 ‘적어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정도의 ‘무엇’은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께 드리면 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감사히 받아들이면’ 됩니다. 결과는 서서히 나타날 것입니다. 오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복음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고행하실 때, 돌을 빵으로 만드는 기적을 유혹의 하나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물질 만능주의를 경계하고자 한 까닭입니다. 그럼에도 배고픈 백성을 가엾이 여기시는 마음 때문에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빵의 기적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번도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는데도 먹고 살아갑니다. 한 번도 공장에서 일한 적이 없는데도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농부가 뿌린 씨앗을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조그만 씨앗 하나에서 30배, 60배, 100배, 아니 수백 배의 결실을 맺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늘 우리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기적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기적의 시작점
- 최재도 신부-
예수님은 당신께 다가온 군중을 그냥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생각이 말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호소하는 의미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밖에 없다며 가져왔는데 오히려 예수님은 그때서야 군중을 자리에 앉게 하십니다.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군중에게 모두 나누어 줍니다. 그러자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모두가 빵을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합니다.
빵을 뻥튀기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요 ? 우리는 빵이 불어난 상황에 집중하기보다 예수님께서 그 기적을 행하실 수 있게 한 근원적 동력에 대해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기적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는 어디에서 났습니까 ?
오늘 복음인 마태오복음서에는 그것을 준 이가 나오지 않지만 요한복음에 보면 그것을 준 사람은 바로 아이였습니다. 안드레아 사도가 아이한테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예수님께 가져다줍니다. 아이는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의 식량 전체를 희생해 내놓았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어린이의 작은 희생이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시작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작은 희생이면 충분함을 아시고 군중을 자리 잡게 하고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 작은 것을 나눈다고 뭐가 되겠어 ?’ 라고 생각하고 계신가요 ? 절대로 작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작은 것에서 시작하셨습니다. 내가 가진 그 작은 것을 그저 하느님 앞에 내놓고서 예수님처럼 ‘감사’ 를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후는 하느님 몫입니다
펭귄의 생존 전략
-김희준 신부-
남극 지방의 겨울철 혹한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생물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특히 펭귄의 월동 지혜는
감동스럽기까지 합니다. 겨울이 다가오면 펭귄 무리는 극점으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강풍을 피하기 위해서지요. 극점에 도달한 펭귄 무리는 서로 몸을
맞대고 촘촘히 포개 앉아 원을 만듭니다. 그런 상태로 춥고 캄캄한 겨울을
보냅니다.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가혹한 추위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체온을 나눔으로써 상대방의 체온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펭귄의 생존 전략인 셈입니다.
남극에서 펭귄들이 매서운 추위를 이겨내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의
배고픔을 채워 주신 그 현장을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내어줌으로써
생명을 보존하게 된다는 교훈을 얻게 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특별히 예수님이
‘쉰 명씩 떼를 지어’ 앉게 하셨다고 전함으로써 그 해결 방법이 공동체와
무관하지 않음을 더욱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펭귄처럼
혼자가 아닌 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것을 내어줌으로써 힘겹고 메마른 세상에서
생명을 보존해 나가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부자와 가난한 자
-김찬선신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행복한 삶과 불행한 삶,
만족한 삶과 불만인 삶.
이 두 가지를 가르는 것은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나의 평가라는 뜻으로
우리는 흔히 물 반잔의 비유를 들지요.
물이 반 잔 있습니다.
물 반잔은 우리의 바뀔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 물 반잔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반잔이나 남았다고 하면 만족하고 행복할 것이요,
반잔밖에 없다고 하면 불만이고 불행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라는 표현을 씁니다.
주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나”된다고 하셨을 것입니다.
재산을 불리고 부자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 비해 가진 것 다 잃고 쪽박마저 깨는 사람도 있습니다.
쪽박을 차는 사람은 작은 것을 무시하고 소홀히 합니다.
그래서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줄줄 새듯 돈이 줄줄 새고 맙니다.
손으로 모래를 퍼 담을 때 손가락이 벌어지지 않게 신경 써야지
손가락이 조금이라도 벌어지면 모래는 다 새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작은 것은 소홀히 하여 흘려버리고는
허황되기는 이를 데 없어 한꺼번에 떼돈 벌 생각만 합니다.
그러나 재산을 불리고 부자 되는 사람은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않고 소중히 여깁니다.
그것을 성실히 모으고 종자돈 삼아 부자가 됩니다.
작은 것 안에서 무한히 큰 희망을 보고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부자는 그런 눈을 가진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작은 것에 실망하고
그래서 작은 것에서 아무런 희망과 미래를 보지 못하지만
부자는 겨자씨가 큰 나무 될 것이라는 희망과 미래를 봅니다.
세상 부자의 이치가 이러한데
하느님 나라의 부자의 이치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없는 데서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부자 하느님께서
작은 것이라 하여 못하실 것이 없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더욱이 사랑이신 하느님이시기에
사랑으로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라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보다 더 작은 것을 가지고도
더 큰 일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측은한 마음
- 최영균 신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꿈꾸었던 동지가
독재 군주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 동지를 잃은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선교여행에서 지친 제자들을 쉬게 하신 예수님은 요한을 잃은
슬픔에 홀로 있고 싶어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예수님을
더욱더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 길이 멀어도, 힘들더라도, 먹을 것이 없더라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선하심과 정의를 보고 싶어 했고, 나자렛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참 생명에 대한 갈망이 이 사람들을 압도하여 어떠한 장애도
뛰어넘어 주님께 다가가게 합니다. 요한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홀로 있고 싶은
마음은 뒤로한 채 당신을 찾아, 진리의 말씀을 찾아 온 사람들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셨고, 그들의 마음을 읽어주셨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의 물을, 영원한 하늘의 빵을 갈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당신 자신보다 인간이 먼저였고, 그들의 행복이
당신의 행복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행복함을 느껴보시겠습니까?
기 적
- 이동훈 신부-
아무것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부자도 없다고 했다. 사람을 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어디 돈 뿐이랴?
지적장애인들의 생활 시설인 살레시오의 집에는 대건안드레아란 가족이 있다. 이 가족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암기력이 남달리 뛰어나다. 텔레비전에서 보고 들은 일기예보며, 연속극 장면을 잘도 기억하여 목소리도 그럴듯하게 흉내를 낸다. 미사경문도 줄줄 외우고 동작도 잘 따라 해 일명 ‘보좌신부’로 통하기도 한다.
언젠가 시설 직원들에게 대안생리대에 대한 강의를 해주기 위해 몇 분의 손님이 오셨다. 잠깐 여유가 있어 내가 시설 주변 안내를 하는 차에 마당에서 일명 그 보좌신부를 만났다. 그에게 손님들을 3층 다락방 성당으로 안내해 달라고 하고 잠깐 내 일을 보았다. 성당으로 올라간 손님들은 금방 내려오지 않았다. 기도를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한참 후에 내려온 이들의 눈에는 금방 닦은 눈물자국이 보였고, 목소리도 잠겨 있었다. 기도를 하며 참회를 많이 했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손님들은 차를 마시며 눈물의 의미를 고백했다.
안내하던 가족이 성당으로 들어가더니 갑자기 미사를 하더라는 것이었다. 처음엔 놀라고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한참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한다. 미사 경문을 줄줄 외우는 한 장애인 앞에서 자신들의 신앙이 보잘것없음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장애인들에게 봉사하러 오지만 사실 사람들은 오히려 장애인들한테 많이 배운다. 좋은 머리로 남을 속여 먹기도 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린이 수준의 지적 능력밖에 지니지 못한 지적장애인들은, 세상은 그렇게 머리 쓰고 남을 속여 먹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알려준다. 사람을 살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어디 돈뿐이랴? 나의 작은 것이라도 나눌 수 있을 때, 세상은 그 나눔으로 풍요로워진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측은지심의 하느님>
-양승국신부-
사람이 꽤 ‘괜찮은’ 한 연예인을 가까이서 뵌 적이 있었습니다. 빡빡한 스케줄 가운데서도 마음이 얼마나 착하고 관대한지 깜짝 놀랐습니다. 정기적인 출연을 소화하기에도 벅찰텐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각종 자선바자회, 음악회, 자원봉사활동에도 열심이었습니다. 아무리 바쁘다 해도 시간이 허락하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봉사하러 간다는 말에 얼마나 존경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또 얼굴이 알려지다 보니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은 듯 했습니다. 자신만을 위한 시간, 여유 있는 휴식시간은 거의 없다고 했습니다. 어디든 가도 사람들이 알아보니 아는 채 하니, 당연히 행동에 제약이 따르겠지요. 속상할 때도 많답니다. 동물구경 하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고, ‘어린 것들’도 예의 없이 함부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댄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늘 환한 미소를 달고 다니니 대단했습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친절하게 대하고 웃어주는 등 일일이 ‘제대로’ 응대하는 모습이 보기 정말 좋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공생활이 본격화되면서 예수님 역시 여유 있는 개인적인 삶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 마다 사람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군중들은 어떻게 해서라고 예수님 가까이 자리 잡기 위해서 목숨 걸고 경쟁했습니다. 군중들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 손 한번 잡아보려고 난리였습니다.
끝도 없이 몰려드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치유를 원하면 치유를, 구마를 원하면 구마를, 안수를 원하면 안수를, 먹을 것이 필요하면 먹을 것을, 재미있는 이야기가 필요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그렇게 반복하셨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계속되는 강행군 속에 예수님의 심신은 지쳐만 갔습니다. 거의 탈진 상태에 도달한 예수님께서는 ‘이러다가 큰 일 나겠다.’ 싶어 억지로라도 휴식시간 찾으십니다.
잠시 틈이 나자 예수님께서는 ‘잽싸게’ 군중들을 따돌리십니다. 군중들을 피해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십니다. 한숨을 돌린 예수님께서는 ‘이제야 조금 쉬게 되었구나.’ 하셨는데, 결코 그게 아니었습니다.
호수 반대편으로 배가 가까워지면서 육지를 바라본 예수님께서는 ‘어쩔 수 없구나.’하고 포기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호수 건너편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 군중들이 모여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찌된 영문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잠시 휴식을 취하러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다는 낌새를 즉시 알아차린 군중들이 선수를 친 것입니다. 사람들은 육로를 따라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호수를 직선으로 건너가는 시간보다 육로를 따라 호수를 돌아오는 시간이 훨씬 길텐데...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에 앞서 도착해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시던 동안 있는 힘을 다해서 뛰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 당신을 만나기 위해,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간절한 소망 한 가지 이루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뛰어온 군중들 앞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측은지심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파김치가 된 예수님이셨지만, 그 측은한 군중들 앞에서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목활동을 다시 시작하십니다. 병자를 치유시키십니다. 마귀를 쫒아내십니다. 당신을 따라다니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해 쓰러질 지경인 사람들을 위해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측은지심의 하느님입니다. 당신 백성의 고초를 결코 외면할 수 없으신 연민의 하느님이십니다. 병고에 시달리고 죽어가는 형제의 슬픔 앞에 함께 눈물 흘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측은지심을 우리가 지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나날이 피로와 스트레스로 힘겨운 나날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가엾은 우리 이웃들에게 다가서는 우리이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해 주신다
-전삼용신부-
마더 데레사가 처음으로 거대한 고아원을 켈커타에서 건립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의 일입니다.
전 세계 수많은 대중매체 기자들은 켈커타에서 벌어질 마더 데레사의 활약을 기대하며 여러 질문들을 해 댔습니다. 마침내 실질적인 사항에 대해 질문을 하게 되었는데 한 기자가 현재 재정 상황에 대해 질문을 하였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수도복을 뒤적이더니 3실링을 꺼내 보였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돈으로 천원도 안 되는 돈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것인 이 3실링이 전부입니다.”
기자들은 농담 하는 줄 알고 진실을 추궁하였습니다.
“정말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다만 저는 이 3실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이것으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정말 3실링으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전 세계에서 마더 데레사의 이 믿음을 대중매체로 접한 사람들의 후원으로 건물을 짓고도 많은 돈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더 데레사는 많은 후원으로 소외된 이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앞에 놓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그들을 먹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농담을 한 것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받아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오천 명을 먹이라고 하실 때 그들의 능력으로 먹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작은 교만들이 남아 있어서 자신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5명도 먹이기 힘든 정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쩌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는지 모릅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내 힘으로는 온전히 가정을 이끌어 갈 수도 없고 배우자나 자녀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내가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는 내가 가진 것이 이것밖에 되지 않으니 주님께서 해 주십사고 청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제 주일 강론을 수원 모 성당에서 했습니다.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그 기적을 체험한 아버지와 아들 신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저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 사제관에 들르게 되었고 우연처럼 그 아버님을 만나 듣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이야기 해 주라고 들려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사람들은 강론을 듣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박수는 저에게 그것들을 일깨워주신 주님께 돌아가야 합당합니다. 저 개인으로는 한 사람도 만족시킬 수 없지만 주님은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봉사 활동을 하라고 부르면 “능력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우리는 능력도 없고 시간도 없습니다. 이것이 겸손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사실은 나의 능력으로만 하려는 오늘 사도들과 같은 교만입니다. 주님께서 불러주시면 능력과 시간까지 다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겐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주님께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한 번은 마더 데레사가 미국에 있는 후원회 본부에 회의 차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회의에서는 현재 재정 상황이며 앞으로의 후원 계획에 대해 열띤 논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장시간 동안 그 논의에 지루해 하다가 각 사람들 앞에 놓인 물병을 보고 시중드는 사람에게 그 물 한 병에 얼마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한 병에 3달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마더 데레사가 갑자기 일어나 한 마디 하였습니다.
“오늘부로 이 후원회는 해체합니다.”
후원회를 해체한다면 마더 데레사가 하는 사업에 큰 차질이 있을 것은 뻔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모든 것이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너무나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주신다는 이 믿음에 도달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사랑은 기적이다.
-김찬선신부-
라자로의 죽음 때문에 눈물 흘리신 것과
예루살렘을 보고 눈물 흘리심에 대해서 묵상한 적은 있지만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드린 적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진정 저는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헤아리시는 것은 당연하고
우리는 주님 마음 헤아리지 않아도 되는 듯이 살아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시고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물러가십니다.
심란하시기 때문이었을까요?
생각의 정리, 마음의 정리가 필요하기 때문이었을까요?
기운과 맥이 빠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셨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복음에서 아무 언급이 없는 것처럼
아무런 마음의 동요 없이 그저 다음 발걸음을 떼신 것뿐일까요?
어제, 새 사제의 첫 미사가 제가 하는 형제회에서 있었습니다.
그 형제의 서품 성구가 “아빠, 아버지”였습니다.
이 성구를 선택하게 된 과정과 이유를 설명하면서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해하지도 못했다는 얘기를 하였습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남자, 아버지는 정말 불쌍합니다.
남자는 강해야 하고 그래서 울어서는 안 됩니다.
아프고 힘든 것을 토로하지도 못하고 이해받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밉보였다가는
자식들은 다 엄마 편이니 집안에서 완전히 외톨입니다.
우리는
이런 아버지 상,
이런 하느님 상,
이런 예수님 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에 닿아도 데지 않고,
누가 죽어도 끄덕 않는,
감정 없는 냉혈한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할 때 예수님은 불감증이 아닙니다.
그 어떤 여성보다도 감성이 풍부하고
부드러운 스침에도 소리를 내는 비파와 같은 분이십니다.
요한의 죽음에 마음 심란하시고 기운이 빠지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외 딴 곳으로 물러가셨지만 사람들을 피할 수는 없으셨습니다.
배를 타고 가신 분을 사람들은 육로로 기어코 따라 왔습니다.
이렇게 기를 쓰고 따라오는 사람들을 보고 또 다시 심금이 울립니다.
이들에 대한 가엾은 마음이 드시는 것입니다.
요한의 죽음에 마음 아파할 겨를이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제가 2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저의 형제는 여섯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저의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신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어린 자식을 여섯이나 남기고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 버리시니
살아야겠다는 마음 때문인지 어머니 병이 나셨다고 합니다.
남편의 죽었어도,
한 번도 밖의 일을 한 적이 없어도,
이제 자식들을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것이 기적처럼 어머니 병을 낫게 하고 힘을 내게 한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기적입니다.
요한의 죽음으로 예수님도 마음 아프고 기진하셨어도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시자 다시 마음을 추스르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동력(同力)을 구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당신 없이 우리가 무엇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도 당신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당신의 일에 동참하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나눈다
-상지종신부-
사제는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나누라는 요청을 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형제 자매들로부터만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울려나오는 주님의 음성을 통해 매일 매일 요청을 받습니다.
아는 것이 없는데 알려주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형제 자매님들께서 알려주라고 하십니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없는데 모든 일에 나서야 합니다. 주님께서, 형제 자매님들께서 나서라고 하십니다.
말 주변이 없는데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형제 자매님들께서 말하라고 하십니다.
너그럽지 못한데 너그러운 척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너그러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형제 자매님들께서 너그러우라고 하십니다.
마음에 화가 치밀어 올라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형제 자매님들께서 분노를 삭이고 웃음으로 감싸안으라고 하십니다.
인간이기에 마음으로 끌리는 형제 자매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형제 자매님들께 그렇게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항상은 아니지만, 가끔씩 "어찌하오리까?"라는 탄식이 절로 납니다.
수천명의 군중 앞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야속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주님, 어찌하오리까?"라는 제자들의 탄식이 남의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너희가 주어라."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제가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가진 것이 있어야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있지 않느냐?"
"너를 주면 되지 않느냐?"
우문현답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를 주면 됩니다. 제가 가진 무엇을 주려고,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을 애써 찾은 제가 바보였습니다. 저를 주면 되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내어주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을 나누기 보다 내어주지 못할 그럴싸한 이유를 찾았기 때문에 나눌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를 준다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의 숙제를 묵상의 결과로 받아 안습니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물음일 것입니다. 그래도 새삼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기에 기쁩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나'를 나누고 내어주어야 한다."는 깨달음 말입니다. 요 며칠 동안 조금은 머리가 복잡했었는데, 이제 조금씩 맑게 개이는 느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새벽을 열며
한 수도자가 강둑에 앉아서 묵상을 시작하려는 참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전갈 한 마리가 강가 바위틈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비가 많이 내린 뒤라 강물이 차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전갈은 금방이라도 쓸려 내려갈 것 같았지요.
수도자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강가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전갈을 집어 올려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갈은 수도자의 손이 자신의 몸에 닿을 때마다 독이 든 침을 쏘았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위험하니 그만 두시지요. 독으로 찌르는 것이 전갈의 본성인 걸 모르십니까?”
바로 이 말에 수도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알지요. 하지만 생명을 구하는 것이 저의 본성입니다. 전갈이 제 본성을 바꾸지 않는다고 하여 어찌 내가 나의 본성을 바꾸겠습니까?”
이 수도자의 모습이 어쩌면 예수님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천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떠올려 봅니다. 인간들이 얼마나 폭력적입니까? 따라서 그 폭력성을 생각하면서 인간과 거리를 두고 싶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르셨지요.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셨기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행동을 전혀 멈추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본성은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좋은 말씀으로 늦게까지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얼마나 피곤하실까요? 제자들도 피곤했나 봅니다. 그래서 이런 말로써 예수님께 ‘이제 좀 쉽시다.’라는 표현을 하지요.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의 본성 상 그냥 보내지 못하시지요. 그래서 또 다시 사랑의 실천을 하십니다. 그 사랑의 실천은 빵의 기적으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역시 이런 사랑의 본성을 간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예수님의 본성을 나의 본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나요? 혹시 예수님의 본성이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의 본성을 닮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의 사랑 실천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남자만 오천 명 가량 되는 엄청난 군중들을 배불리 먹게 하는 기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즉, 이 모습은 우리 역시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커다란 열매를 맺는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도저히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일들이 가능해 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런 기적을 잘 체험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대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사랑이 아닌, 이기적인 사랑, 보상을 바라는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기적 체험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본성을 닮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본성을 닮은 사람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이 세상은 많은 기적으로 충만해지는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빠다킹신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냉장고 문을 연다. 코끼리를
넣는다. 냉장고 문을 닫는다.” ‘어떻게 그 큰 코끼리를 작은 냉장고에 넣을까’
골몰하다가, 이런 답변을 듣고는 황당함을 느끼게 됩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가 꼭 이런 식으로 전개됩니다. 읽을 때마다
허전함을 느끼는 이유는,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가 가장 크게 호기심을
가질 만한 부분에 대한 설명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즉 어떻게 빵이 많아졌을까?
그 양이 얼마만큼 되었고, 제자들은 그것을 또 어떻게 나누어주었을까?
그러나 복음서의 이야기는 ‘빵을 나누어주었다’는 부분에서 훌쩍 건너뛰어
‘다 먹고 남은 후에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결론 부분에
즉시 도달합니다. 아마도 복음사가는 우리가 엉뚱한 데 신경 쓰지 않도록
하려고 이런 방식을 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태도가
크게 비교됩니다.
제자들은 계산을 한 후 빵 다섯 개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기도하지도 않고,
빵을 나누어 주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을 먹이는 일을 포기한 것입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께서는 계산을 하지 않고,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냥 나누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을 먹이는 일을 하느님께 맡기신 것입니다.
중요한 일은 하느님께서 다 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믿고, 기도하고, 시작하면 됩니다.
-박혜원-
언젠가 사람들을 따라 집회에 간 적이 있다. 치유은사의 기적을 보려고, 그야말로 따라서 갔다. 예수님 당시에 기적을 보려고 몰려든 구경꾼들처럼 말이다.
시골 교회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모두 아픈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는 소문을 듣고 단순히 기적을 확인하러 온 사람들도 있었고, 요행을 바라며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든 초청된 장로님이 손을 얹고 기도를 드리자 십년이 넘게 자리에 누워 있던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나서 걸었고 사람들은 손뼉을 쳤다. 나도 고개를 빼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놀란 눈으로 구경했다. 때맞추어 교회에서 준비한 떡이 돌아가고 사람들은 마치 잔칫날 모인 사람들처럼 와글와글 떡을 나누며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사건의 중심에 있지 않고 주변을 서성이며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분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위에 치유의 은혜가 베풀어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날의 흥분과 감격은 금방 가라앉아 버리고 나는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내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 것은 그 시골 교회 목사님의 눈빛이었다. 강사 장로님이 말씀을 전할 때에도 그 내용에는 무지한 사람들, 찬송을 부를 때에도 자기 자신들에게 더 관심이 많아 떠들어대는 무리들…. 그들을 바라보는 목사님의 부드러운 눈빛이 오래도록 내 가슴에 따뜻한 온기로 남아 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그분이 주시는 기쁨을 나누게 하려고 그들을 돌보던 젊은 목사님의 눈빛은 2천여년 전 빈들의 무리를 바라보던 그분의 눈빛을 닮아 있었다.
-이수철신부-
새벽부터 잠깨어 노래하는 매미들,
자연 만물도 자신을 지으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생명과 빛, 희망을 주는 말이나 글이 좋습니다.
이래서 시편 성무일도가 그리도 좋은 것입니다.
매일 미사를 통해
생명과 빛으로, 희망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도
우리 삶을 통해 전달되는 생명과 빛이요 희망입니다.
믿음이 좋아 하느님께 가까이 이를수록
긍정적 낙관적 삶이 되고 생명과 빛, 희망이 넘칩니다만,
믿음 약해 가면서 하느님께 멀어질수록
삶은 부정적 비관적이 되고,
허무의 그 자리에 죽음과 어둠, 절망이 자리 잡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모습,
그 곤궁한 중에도 생명과 빛, 희망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모습, 추호도 없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 얼마나 고무적이고 위로가 되는지요!
바로 예수님의 삶의 자세, 기도의 자세를 보여 줍니다.
‘절망은 없다’는 진리와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중들,
사람 눈으로 보면 다분히 절망적 상황이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가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전부를 봉헌했을 때,
주님은 이들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렸고
이어 기적이 일어나 모두 배불리 먹었다 합니다.
예수님의 이 천진무구(天眞無垢)한 기도 모습이
사람들을 감동시켜 가진 먹을 것을 다 내놓게 했고,
이어 하느님을 감동시켰음이 분명합니다.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라는 말도 있듯이,
사람의 감동은 자연히 하느님의 감동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감동에 따른 기적입니다.
모든 것을 내놓는 감동의 행위에 따른 하느님 기적의 축복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기적을 체험한 자들,
결코 1독서의 거짓 예언자 하난야처럼 처신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그대로 성체성사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미사 중 우리가 간절히 바치는 ‘주님의 기도’와 더불어
나의 마음 모두를 봉헌할 때,
주님은 당신 평화와 생명의 빵을 선사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매일 미사를 통해 빵의 기적을 체험하는 우리들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의 은총이
오늘도 우리를 생명과 빛, 희망으로 가득 채워 주시어
더욱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이르셨다. 제자들이 “우리에게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하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그것을 이리 가져오너라.”하시고는 군중을 풀 위에 앉게 하셨다. (마태14,16-19)
사랑하는 예수님, 당신은 대자대비하신 분입니다. 오천 명이 넘는 군중들의 배고픔을 나의 배고픔으로 여기시는 자비지심慈悲之心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나누게 합니다.
나눔은 대자비심大慈悲心의 발로입니다.
나누면 풍요로워집니다. 나누면 부자가 됩니다. 나누면 행복해집니다. 나누면 함께 기뻐할 수 있고, 나누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열두 광주리나 흘러넘치게 됩니다.
고통과 슬픔은 나누면 작아집니다. 그리고 기쁨과 행복으로 바뀝니다.
사랑과 행복과 기쁨은 나누면 무한히 커집니다. 그리고 함께 행복 속에 잠기게 됩니다.
량量의 많고 적음, 질質의 좋고 나쁨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누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무엇이든 움켜쥐거나 독차지 하면 썩게 됩니다.
움켜쥐고 있는 손도 썩고 마음과 영혼까지도 함께 썩습니다.
빵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아도 나누지 않으면 그림의 떡입니다.
독차지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과 영혼은 탐욕으로 썩게 되고,
배고픈 사람의 가슴은 원망과 증오로 가득 차게 됩니다.
행복과 기쁨도 혼자서 차지하고 즐기면 이웃의 원망과 미움을 사게 됩니다.
고통과 슬픔을 혼자 가지면 그 속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대자대비하신 당신은 나눔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의 많고 적음에, 크기의 크고 작음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인색하고 옹졸한 가슴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우리도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무엇이든지 나누어 기적 속에서 살기를 원합니다.(一明).
-박상대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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