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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9일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오 16,13-23)
Who do you say that I am?
말씀의 초대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한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북부 이스라엘 왕국에 대하여 예언했던 것이 남부 유다 왕국에도 현실로 나타난다. 이 어려운 순간에, 예레미야는 희망으로 가득 찬 미래를 펼쳐 보인다. 주님께서 백성과 새로운 계약을 맺어 주시리라는 것이다. 새 계약은 딱딱하고 외적인 율법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사랑의 감각과 충실성으로 주님과 맺는 계약이 될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다. 그리고 장차 당신의 사명을 이어받아 수행할 공동체의 주춧돌로 베드로를 세우신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위와 능력을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당신을 향한 인간의 믿음을 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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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는 주님을 믿고 따르며, 세례성사까지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여기에 오셔서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제자들 가운데 맏형 격인 시몬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고 칭찬하십니다.
베드로의 짧은 신앙 고백 하나로 그를 칭찬하시며, 주님께서는 보잘것없는 베드로의 어깨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게다가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합니까? 특별히 타인들과 맺는 관계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증언하기는 하고 있습니까? 혹 타인들 앞에서 신앙인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십자 성호도 제대로 그을 줄 모르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 위에 당신의 나라를 일구어 가십니다. 주님을 증언하고 고백하는 데에는 어떤 조건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향한 신앙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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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우리는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그 답을 들으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작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시는 행위입니다.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사는 일입니다.
주님은 ‘주인(主人)님’을 줄인 말입니다. 무엇의 주인입니까? 내 삶의 주인이며 내 운명의 주인이며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의 주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사실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역시 우리말로 ‘구세주’(救世主)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이란 뜻이지요.
사람들은 ‘세상’을 너무 막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별 느낌 없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연상합니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내게 주어진 세상’ ‘내가 책임져야 할 세상’입니다. 그곳에는 운명적으로 맡겨진 사람이 있고, 의무로 주어진 일이 있습니다. 기쁘게 살아야 할 미래가 있습니다. 누가 이러한 ‘나의 세상’을 구원해 줄 수 있을는지요?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것을 묻고 계십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모범적인 고백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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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의 답변에 스승은 반응이 없습니다. 세상의 판단보다 제자들의 생각이 더 궁금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의 고백은 순간적인 재치가 아니라 평생을 섬기겠다는 맹세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행복하다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베드로의 고백을 재연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세주이십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세상이란 말에 있습니다. 어떤 세상이겠습니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구 전체이겠습니까?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먼저 나와 연관된 세상을 기억합시다. 내가 살고 있고 책임질 사람이 있으며, 내 미래가 있는 세상입니다.
바로 그 세상을 예수님께서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세주라는 고백은 그 자체가 신앙 행위입니다. 이를 누구나 입술로는 고백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마음의 승복인데, 그분을 느끼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 앞서, 그분께서 내 인생에 행하신 일들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래야 답변이 쉬워집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베드로의 이 고백을 믿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믿어야 하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망설여질 때 이 고백을 먼저 떠올립시다. 그러면 주님의 이끄심을 느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
- 최재도 신부-
베드로는 예수님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칭찬하시며 그 고백은 바로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알려주신 것임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고백은 이렇듯 우리의 의지가 아닌 아버지께 온전히 전권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 가장 가까운 곳에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해 저를 많이 애태운 분이 계십니다. 바로 제 아버지이십니다. 아들이 신부가 될 때까지 확고하게 뜻을?(??) 굽히지 않으신 분이 바로 제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언젠가 저랑 가정 형편이 비슷한 수사님이 이런 체험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분도 아버지께서 성당에 다니지 않아 참 많은 기도와 권고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한순간 자신의 모든 노력이 인간적으로 해결하려는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진정 바라신다면 분명 변화시켜 주시리라는 확신이 부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하던 노력을 모두 멈추고 그저 하느님께 맡겨드렸다고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알아서 해주십사고 맡겨드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이듬해 부모님이 함께 세례를 받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아버지께 대한 믿음. 그것은 제가 부여잡고 흔든다고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버지께서 알려주시고 허락해 주실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내 이기적인 생각만 고수한다면 칭찬을 받았다가 바로 예수님께 ‘마귀’?라는 꾸지람을 들은 베드로와 다를 것이 없겠지요. 인간적으로 느린 듯 보이고 무능해 보이지만 하느님을 믿고 맡겨드리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가장 현명한 선택임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의 일에만 매어 있지 않은 신앙
-김희준 신부-
“주님, ○○○의 자녀가 이번에 시험을 본다고 합니다. 꼭 합격하게 해 주시고,
○○○의 남편이 바람기가 많다고 합니다. 그 바람기 좀 잠재워 주시고,
○○○의 집이 얼른 팔려야 새집으로 이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집 좀
잘 팔리게 해 주십시오.” 요즘 주님 앞에 앉아 열과 성을 다해 읊조리고 있는
저의 기도입니다. 신자들의 부탁을 받아 정성을 다해 하게 되는 기도이지만,
한참을 이렇게 기도하고 나면 내가 수도자인지 무당인지 헷갈리곤 합니다.
물론 이러한 기도를 하고 또 신자들이 제게 간절히 기도를 부탁하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 신자들에게 구원이 절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구원을 갈망하고 있는지, 또 너무나 지나치게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사람의 일에만 매여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구원자라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물론 이러한 신앙은 우리를 복되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일에만 매달려
기도하고 드리는 신앙고백은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마땅히 자신을 하느님 일을 위한
도구로 봉헌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결코 하느님을, 나의 일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고통을 피하기 위한 도구로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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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도인
-홍성남 신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다” “이제는 마음의 분노도 없고 평안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만나서 대화하다 보면 때로는 상당히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진짜 도인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진짜 도인인지 아닌지는 이들을 대하는 내 마음이 편안한가 아닌가로
알 수가 있습니다. 도인인 척하는 사람들은 무능력한 자기 자신을 맞대면하지
못해서 그런 도인인 척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것에
초월한 듯보여서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고 모양새도 그럴듯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심리학자인 융은
‘인격내부의 독재’라는 이론을 말했습니다. 극단적인 상태는
모두 그 대립물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와 정반대의 가치로
전환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인인 척 착각 속에 살아가더라도
언제라도 뒤집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겸허함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심리적인
부작용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후계자로 삼으신 것은 베드로 사도가
도인인 척하지 않고 인간적인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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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의 열쇠
- 이정석 신부-
오늘 시몬은 바위(베드로)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원래 그의 별명은 바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바위가 보통 바위가 아니라 당신 교회의 기반이 될 바위라고 선언하신 것인지, 아니면 당신의 질문에 옳게 대답해서 하늘나라의 열쇠도 약속하고 교회의 주춧돌로 삼겠다고 하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베드로는 간만에 어깨에 힘 좀 들어갔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오늘 복음 말미에서 베드로는 너무 앞서 나가다가 큰 코를 다칩니다. 하늘나라의 수문장이 ‘사탄’으로 전락했으니 말입니다. 베드로는 한순간에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는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잘못을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엄밀히 말하자면 베드로는 사람의 일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분리해 생각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서는 ‘하느님의 일이 곧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도 매여 있고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도 풀려 있습니다(마태 16,19; 18,18). 하느님께서는 남을 판단하고 저울질하는 대로 그대를 심판하고 저울질할 것입니다(마태 7,2).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 하나에게 해준 일이 주님께 해드리는 일입니다(마태 25,3146). 그래서 사람은 ‘이 땅에서 행한 대로’ 심판받을 것입니다(마태 16,27 참조). 하느님의 나라가 오고 그분의 뜻이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것(마태 6,10 참조), 그것은 하느님 혼자 이루시는 일이 아니라 바로 그분의 교회, 믿는 이들의 공동체를 통해서, 그들과 함께, 그들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는 폼 잡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라는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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急轉直下
-김찬선신부-
추종자인가?
동반자인가?
방해꾼인가?
오늘 복음의 사도 베드로를 보면서
나는 누구인지 우리는 되돌아보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의 첫 제자요 추종자였고
지근거리에서 주님을 따라다닌 동반자였는데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네가 그런 말을 한 것은 하느님께서 알려주셔서 한 것이니
이제부터 너는 교회의 반석으로서
너의 풀고 매는 것에 따라
하늘에서도 풀리고 매일 것이라는 칭찬을 들었는데
猝地에, 아니 倉卒間에 急轉直下하여
‘사탄’, ‘걸림돌’이 되어 주님으로부터 내침을 당합니다.
어떻게, 왜 이런 일이!
결론부터 얘기하면
눈을 한 순간이라도 주님으로부터 눈을 떼면
며칠 전 주님만 보고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에 빠지듯
우리 인간은 순식간에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고
추종자에서 방해자로, 그래서 마침내 사탄으로 둔갑합니다.
참으로 무섭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주님의 뜻에서 눈을 돌려
나의 생각,
나의 감정,
나의 사랑,
나의 바람에 눈길을 주는 순간,
그것은 잠깐의 눈길 줌이 아니라
완전히 풍덩 빠져버림이 됩니다.
며칠 전, 그러니까 포르치운쿨라 축일을 지내고
수고한 분들을 모시고 뒤풀이를 할 때의 일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악마의 장난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영 다르게 상황이 되어가고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것이고,
수고한 분들 제가 감사드려야 할 자리이니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기쁘고 즐겁게 해드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간수에 의해 두부가 굳어가듯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제 마음은 점점 굳어져 갔습니다.
결국 전체 분위기가 얼마간은 어색하게 되었습니다.
포르치운쿨라 행사가 정말 은혜롭게 잘 끝났고
저를 포함하여 모두 애쓴 보람이 있어 기쁘기 그지없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악마적인 마음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물론 지금 생각해도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상황,
하느님께서 성공에 대해 교만하지 말라고 그리하셨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한 순간 깨어있지 못함,
한 순간 마음을 놓은 것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좋고 싫고를 생각지 않고
모두에게 은혜로운 행사가 되기를 바라고 내내 봉사자들을 격려했는데
행사를 끝내고,
그것도 모두가 은혜로웠다고 할 정도로 행사를 잘 끝내고
제가 마음을 놓은 순간
저의 마음에서 받들고 섬기는 정신이 빠져나가고
저 중심적으로 만족하고 싶은 마음이
슬그머니 들어와 있었던 것입니다.
불교의 禪 修行 방식에 頓悟와 漸修가 있습니다.
돈오는 순간적인 깨달음이고, 단번에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고,
한 번 이 경지에 오르면 이전과는 영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반면 점수는 계속적인 수행을 통해 점차 깨달음에 나가는 것입니다.
종풍에 따라 돈오를 더 강조하고 점수를 더 강조하지만
돈오를 하였다 하여 점수가 필요치 않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순간이라도 수행의 정신을 놓을 때
한 순간이라도 주님께 대한 의식을 놓을 때
한 순간이라도 섬김의 정신을 놓을 때
우리는 나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혹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그때의 봉사자들이 계시다면 용서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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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드로)- 수동(受動)의 신앙
-김홍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시몬에게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게파, 바위,돌)이다. 내가 이 바위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태 16,18)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하고많은 이름 중에 왜 하필 바위, 돌이라 이름 붙이셨을까? 우리는 지금까지 이 뜻을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는다는 의미로만 알아들어 왔다.
그러나 좀 더 다른, ‘반석’이라는 의미 외에 또 다른 의미는 없을까? 불현듯 20대 초반에 읽었던 일본의 고바야시 주교님의 ‘석정’이라는 글이 떠올랐다(‘아름다운 인간상’). 이 글이 우리의 묵상과 연관될 수 있겠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교오또의 류우안사라는 절에는 ‘석정’(石庭)이라는 정원이 있습니다. 돌 石자, 뜰 庭자, 곧 돌로 정원을 꾸민 유명한 곳입니다. 어느 유명한 정원사의 손으로 꾸며진 이 정원은 지금도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습니다.
“자네에게 재미있는 곳을 한군데 보여줄 곳이 있네” 하고 어느 친구가, 나를 데리고 이 정원을 찾아간 것은, 연대는 잊었지만 어느 해 봄날이었습니다. 길이 와 폭이 30미터와 30미터 쯤 될까, 어쨌든 긴 네모의 흙담으로 둘러싸인 일정한 칸 안에, 온통 둥근 휜 조약돌이 깔려 있고 정면에 가까운 곳과 왼편 구석, 오른편 앞쪽에 두 세개씩 별로 모양도 없는 바위돌이 그저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그런 정도였습니다. ‘석정’이기에 그런지 문자 그대로 돌밖에 없는 정원이었습니다. 처음 봤을 때의 이 정원은 아무런 특이한 점도 없이 그저 아지랑이가 하늘하늘 올라오고 있어서, 돌 하나하나가 봄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는 일종의 풍경 그뿐이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유명한 정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의심만 안고 나는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여하튼 그것이 인연이 되어, 몇 차례 더 방문하던 어느 날, 왜 이 정원이 대 예술가의 위대한 작품이며, 이름 그대로 ‘명원’(名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두 번째로 그 정원을 방문한 것을 그로부터 수개월 후, 아마 7월인가 8월의 무더운 여름 햇볕이 쨍쨍한 한낮이 조금 지나서였습니다. 그날은 돌의 하나하나가 바싹 말라 버려서, 물을 끼어 얹을 것 같으면 대번에 ‘치익!’ 하고 소리 내어 빨아들이고 말 것만 같았습니다. 인간의 갈증을 그대로 나타낸 듯한 돌과 돌이 서로 격렬한 열을 뿜으며, 또한 그것을 서로 나누고 있는 듯한 모습은 일종의 비장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그리고 나서 얼마 후, 역시 여름이라고 생각됩니다마는, 비가 오는 무더운 한낮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의 정원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허, 이상하다!” 하고 정원을 둘러보았습니다. 실로 처음 온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완전히 달라졌구나...”. 그러나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색깔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색조가 달랐던 것입니다. 아니 색깔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비에 젖은, 비를 맞고 있는 그 돌 전체가, 그 모습 전부가, 그 풍취가, 말하자면 정원 전체가 조성하는 감흥이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봄날의 오후와, 여름날의 한 낮, 그 두 번의 방문으로 석정의 하나하나의 모습까지도 전부 외워 버린 나였지만, 이 돌과 이 정원이 이와 같은 색채와, 이러한 풍취를 자아낼 줄이야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어느 가을날 저녁 무렵, 절 문이 닫힐 시간에 임박하여 또 석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가을의 저녁 햇빛을 받아, 긴 그림자를 밟으면서 그 석정에 섰던 것입니다. 똑 같은 흰빛이라 해도, 그 그림자의 검은빛이 형언할 수 없는 뉘앙스를 자아내어, 가을이 온 것을 인간보다도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한 정원의 돌 하나하나가 만추의 석양에 그윽한 윤기를 내며 빛나고 있었습니다. “아아, 이것이다!” 하고 나는 부지중에 외쳤습니다. 얄미울 정도로 능란한 솜씨로 이 정원을 꾸민 정원사의 비범한 솜씨에 나는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실로 이 명원이 가지는 신비에 접촉하려면 한 두 번의 방문만으로는 부족하였던 것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도, 한 줌의 잔디도 없는 이 석정의 매력은, 계절이 바뀜과 더불어, 자기 힘으로는 변화 할 수 없는 “돌”이, 주위와 환경과 계절의 변화 중에서, 다만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에 있으면서, 그 시기, 그 환경에서만이 발휘할 수가 있는 뉘앙스를 형성하면서, “돌”이 가지는 최고의 아름다움으로써 정원 전체를 장식하고 있다는 그것에 있었던 것입니다.
돌 그 자체는 자기 혼자서는 변화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환경 속에 잘 조화되어 그 환경과 더불어 천변만화의 변화의 묘를...... 봄에는 봄의, 가을에는 가을의 풍취를 조성하고, 또 햇볕에 빛나고, 비에 젖고, 눈에 덮여서는, 그때그때 마다 전혀 다른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면서, 석정은 무언의 교훈을 말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무언의 교훈이 무엇이었을까? 고바야시 주교님은 그것을 ‘수동의 철학’이라고 불렀다. 돌이 빚어내는 이러한 수동적인 아름다움은 오늘의 복음과 잘 연관된다고 생각된다. 우리도 일상을 살아가면서 그때그때마다 저 석정의 돌처럼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뜻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우리가 저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발산하는 존재가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빛을 반사하는 거울 같은 존재는 되어야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느님의 뜻보다 내 뜻을 더 앞세우고, 자신을 이 세상과 하느님의 중심에 내세우며 살아가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칭찬하신 대목은 참 특이하다. 시몬이 스스로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 신앙고백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을 받아들여 한 고백이기에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마태 16,16-17). 그리고 나서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 곧 바위돌이라고 부르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한 것은 교회가 단지 바위처럼 그저 든든해 주기만을 바래서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모습은 바로 이 돌처럼 하느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수동적인 자세, 수동의 신앙, 수동의 지혜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예수님 스스로가 한결같이 보이셨던 신앙 - 특히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도 게세마니 동산에서 연거푸 세 번이나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마태 26,36-44)라고 기도하셨던 바로 그런 수동의 신앙 말이다. 바로 이런 교회의 모습일 때 “감히 죽음의 힘도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셨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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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를 반석이라고 하시며 교회의 큰 열쇠를 맡깁니다.
-이병훈 신부-
맛있는 만두를 빚으려면 먼저 밀가루를 반죽하여야 합니다. 반죽이 잘되게 하려면 잘 주물러야합니다. 주무르면 주무를수록 반죽이 잘 됩니다. 반죽이 잘되면 만두피가 얇아도 속이 터지지 않고 맛있습니다.
멋있는 도자기를 빚으려면 먼저 진흙을 반죽하여야 합니다. 반죽이 잘되게 하려면 잘 주물러야합니다. 주무르면 주무를수록 반죽이 잘 됩니다. 반죽이 잘되면 두께가 얇아도 깨지지 않고 잘 마릅니다.
죽은 사람 편히 쉴려면 먼저 무덤을 잘 만들어야 합니다. 무덤을 잘 만들려면 덜구를 잘 찧어 주어야 합니다. 잘 밟아주면 줄수록 무덤이 튼튼해집니다. 무덤이 튼튼해지면 비가와도 죽은 사람이 편히 쉴 수있습니다.
가족이 편히 쉴려면 먼저 집을 잘 만들어야 합니다. 집을 잘 만들려면 기초를 잘 다지고 주춧돌을 잘 놓아야 합니다. 기초가 잘 되면 잘 될수록 그 집은 튼튼합니다. 집이 튼튼하면 바깥에 아무리 추운 비바람이 불어도 안에 있는 가족들은 행복합니다.
그런데 커다란 집을 지으려면 그만큼 커다랗고 튼튼한 땅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힘들고 기계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 땅속 깊은 곳에 넓은 암반이 있으면 그 위에 말뚝을 여러 개 박고 그것을 기초삼아 건물을 세우면 됩니다. 이것을 말뚝시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땅은 흔하지 않고 대부분의 땅은 큰건물을 짓기에는 무른 곳이 많습니다. 그래도 그 곳이 마음에 들어 크고 오래가야하는 건물을 지으려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씁니다. 땅속깊이 구멍을 여러개 뚫고 모래를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 땅위에 무거운 흙을 많이 덮어 놓습니다. 그러면 땅을 무르게 만드는 물들이 모래로 모여들어 모래기둥을 타고 빠르게 흘러나옵니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땅은 매우 단단해집니다. 이것을 샌드 드레인(Sand Drain) 즉, 모래배수시공이라고 합니다.
작은 밀가루 반죽들도 손으로 부비는 아픔을 겪고 난 다음에 쫄깃한 만두피로 다시 태어나듯이, 큰 땅일수록 땅을 뚫는 커다란 아픔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지고 난 다음에 라야 필요없는 물이 빠지면서 튼튼한 땅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반석이라고 하시며 교회의 큰 열쇠를 맡깁니다. 베드로를 반석으로 부른 것은 베드로가 튼튼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한 고백이 영원무궁한 반석이기 때문에 반석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자체도 반석이 될 수 있도록 삶을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배반이라는 베드로의 가슴을 뚫는 커다란 아픔과 예수님의 양들을 맡고 있다는 무거운 짐들을 통해 베드로 안에 숨어있던 인간적인 나약함들은 밖으로 새어나오게 되고, 베드로는 더욱 단단해집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베드로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라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뚫어진 가슴을 채워오며 아픔을 낫게하고, 양들에 대한 짐스런 마음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만들며, 인간적인 나약함이 새어나간 곳을 사랑으로 단단히 채워줍니다. 그 위에 우리는 예수님을 주춧돌로 하여 서로 의지하며 교회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받아들일 만한 정도의 짐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짐을 함께 짊어지고 계십니다.우리 삶 속에 다가오는 가슴을 뚫는 아픔과 삶의 무게들은 과연 무엇 때문일가요? 그것은 단순히 겪어내야만하고 짊어져야만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스며들어나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사랑이 아닐까? 그 사랑을 아는 자는 자신의 짐의 무게에 넘어지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서로 남의 짐을 져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십시오”(갈라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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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올 여름은 이상합니다. 글쎄 본당의 모든 캠프 때 비가 왜 이렇게 많이 오는지 모릅니다. 중고등부 연합 캠프가 그랬고, 또 어제 있었던 초등부 물놀이 역시 비가 많이 왔습니다. 사실 어제 아침에는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물놀이 하는 장소가 의정부에 있는 어느 계곡이었기 때문에, 어제처럼 많은 비를 바라보면서 위험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취소하느냐? 아니면 그냥 강행하느냐?’
이 의견에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저는 과감하게 소위 물놀이 공원(워터 파크)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장소를 바꾸자고 주장했지요. 비용이 훨씬 많이 들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안전이며, 이것 역시 하나의 약속이기에 계획한 날짜에 반드시 행해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신부가 나서서 장소를 바꾸라고 하니, 결국 물놀이 공원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변경 후 조금 걱정되는 것이 있었어요. 물놀이 공원에서는 선생님들이 오랫동안 준비한 프로그램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동안의 수고가 다 헛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연 이 변경이 제대로 된 선택인가 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러한 갈등에 섰을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것도 옳은 것 같고, 저것도 옳은 것 같고……. 그러한 판단의 기로에 섰을 때 참으로 난감합니다.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기도 하고 또 반대로 꾸짖기도 하십니다. 먼저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물음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정답을 말함으로 인해 칭찬을 받고 하늘나라의 열쇠까지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말했을 때, 그는 앞 다투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반박을 하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베드로는 선택의 순간에서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기준에서 보는 스승님의 아픔, 그리고 자신들이 그 뒤에 겪을 고통과 시련. 그 모든 것을 생각했을 때,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모든 인류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일의 관점에서 예수님은 그러한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셔야만 했습니다.
선택의 순간에서 사람의 일만을 생각할 때, 그 선택은 예수님께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그리고 우리 곁에서 활동하시려는 예수님을 방해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는 과연 하느님의 일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지요? 혹시 나만의 편함을 생각하는 사람의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선택의 순간에서 하느님의 일을 염두에 둡시다.
빠다킹신부
베드로와 예수님
-임문철 신부-
베드로의 경솔함과 예수님에 대한 배반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성인이 아무리 멋진 신앙고백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고 또 천국의 열쇠를 주신 주님이 잘 이해되지
않기도 합니다. 혹 열정의 사도 바오로라면 모를까, 덤벙대기 일쑤이며 주님의
면전에서 헛맹세까지 하며 배반한 베드로를 그렇게까지 대접하시다니….
논공행상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꾸중하시면서까지 가르치고자 하신
‘하느님의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은총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가르쳤지만, 베드로는 그 은총의 산 증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당신을 전혀 모른다고 잡아떼는 베드로를, 고개를 돌려 돌아보시며,
“베드로야,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눈길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눈길은 베드로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라는 말은 한 개인을 두고 한 것이 아니라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를 두고 한 말이라는 해설도 있지만,
저는 그 모든 배신도 품어 안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를 두고
하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문현답
-이인주 신부-
우리는 많은 의문을 가지고 산다. 궁금한 것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느냐에 따라 그 답 또한 대단한 편차가 있다. 그러기에 좋은 답을 얻으려면 좋은 질문을 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영적인 질문 안에서 영적인 답을 구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깊게 생각해야 한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주님의 질문에 영적인 답을 하지만, 주님의 속 깊은 영적 차원을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해 추락하는 아주 쓴맛을 보게 된다. 늘 우리가 깊게 봐야 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현상적인 것이 아니다. 내면에 흐르는 천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다른 제자들은 요한·엘리야·예레미야라고 대답하지만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보다 더 정확한 답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영적 차원의 현답을 함으로써 베드로는 예수께 칭찬을 받는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그 복이 그대로 하늘에서 쏟아진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은총 관리를 잘하라고 했던가? 그런데 베드로는 은총 관리를 잘못했거나 아니면 사탄의 시기를 받았는지, 현답을 한 후 곧 낭패를 본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쓴맛을 보게 했는지 잘 보아야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 아신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 어찌하여 수난 예고에 대하여 눈치를 채지 못할까?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완강하게 반박했고 예수께서 그대로 직격탄을 날리신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고 꾸짖으셨다.
그러기에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역풍을 만날 수도 있다. 잘 모르면 되물어야 하고, 아무리 사랑과 충정이라 해도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충정과 사랑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정해진 길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반기를 드니, 이는 예수님을 걱정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안겨드리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예, 저도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했을 것이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양승국신부-
<유독 내 하늘만 짙은 잿빛인 순간>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이럴 때가 있습니다. 유독 내 하늘만 짙은 잿빛인 순간 말입니다. 세상의 파도에 두들겨 맞아 기운이 쏙 빠지는 날, 붙잡지 말아야 할 인연에 걷어차야 한없이 슬픈 날, 날카로운 세월의 칼날에 크게 베어 가슴 아픈 날, 밥숟가락 드는 것이 그리도 힘겨운 날...
세상 모든 사람들은 겨울을 떠나보내고 화사한 봄을 만끽하고 있는데, 유독 나만 두터운 겨울 외투에 몸을 숨기고 있는 그런 날.
그런 날, 우리에게 필요한 분은 어떤 분일까요?
내 비극적인 처지와는 철저하게도 다르게 천상 예루살렘 높은 옥좌에 평화로이 앉아계신 하느님이실까요?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하는 ‘심연의 고통’을 단 한 번도 겪어보지 않으신 그런 하느님이실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 사도께서는 바로 그런 하느님을 추구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왕들을 무력으로 정복하는 권위의 메시아, 세상의 악인들을 힘으로 ‘싹’ 쓸어버리는 능력의 메시아, 이 세상에서의 끝없는 만사형통을 가져다주실 기적의 메시아를 염원했습니다.
이런 베드로 사도를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무섭기만 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극한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힘겨운 십자가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로는 함께 고통을 분담해주는 일입니다. 함께 십자가를 져주는 일입니다.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함께 걸어가 주는 일입니다.
우리의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가지 않으십니다. 우리 옆에 서셔서 우리와 나란히 걸어가십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보다 훨씬 큰 고통을 겪으시면서 ‘보거라, 나도 이렇게 고통을 겪고 있단다’ 하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비록 베드로 사도는 스승의 신원과 사명에 대한 몰이해로 그분으로부터 매몰찬 질타를 받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속적인 반성과 회심, 자기 쇄신과 새 출발 작업을 통해 조금씩 영적인 눈을 뜨게 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제대로 귀가 뚫리지 않아 예수님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직 눈이 제대로 뜨이지 않아 예수님의 본모습을 알지 못합니다. 아직 마음이 제대로 열리지 않아 예수님의 실체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언젠가 반드시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반드시 귀가 뚫리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반드시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눈이 뜨이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반드시 주님의 사랑에 힘입어 마음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이토록 부족해도 낙천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긍정적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미래지향적으로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긍정심리학에 근거한 7가지 행복
행복하여라! 매사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장점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과 타인의 성장에 기여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실수를 탓하기보다 미래를 계획하는 사람들,
그들의 삶은 희망으로 가득찰 것이다.
행복하여라!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는 사람들,
그들의 나날은 축복의 꽃길로 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긍정적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그들의 마음은 평화로 넘치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신의 일을 천직으로 여기는 사람들,
그들은 세상의 빛이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들,
그들은 기쁨의 전령사가 될 것이다.
- 장재봉 신부-
예수님께서는 오직 한길을 걸어가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걸으십니다. 그 여정의 중간 지점이 되는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당신께서는 친히 걸어가야 하는 고난의 길과 그 길을 통한 우리의 구원을 말씀하시고 구세주이신 당신 예수님의 정체를 처음으로 드러내십니다. 베드로 사도가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드린 신앙고백은 우리도 모두 영세 때 드렸던 고백이고, 매 순간에 드리는 믿음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대표해서 신앙을 고백했던 그 베드로가 축복을 받은 직후에 곧바로 야단을 맞는 장면이 오늘 복음에 소개됩니다. 베드로 못지 않은 구약의 거물급인 모세,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보고 말씀을 받았던 대 예언자 모세도 하느님으로부터 야단 맞는 것이 독서에 나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르면서도 믿음이 약해 바위에 물을 내라 명령하지 않고 지팡이로 두 번이나 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또 베드로는 자신의 기대치에 어긋난 방법으로 구원 역사를 펼치시려는 예수님께 정면으로 반대하며 나서다 야단을 맞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접하면서 저도 하느님께 꾸중을 들을 것 같아 겁이 납니다. 모세가 당신의 명령을 조금 바꾸었다고 끝내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게 하신 하느님이 두렵습니다. 사제가 되면서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에 투명한 사람이 되어 신자들이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살 수 있도록 해야지"하고 결심했는데 되돌아보니 그러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하고, 뜻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주십사하고 당신 안에 머물며 당신의 뜻이 펼쳐지도록 노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판단과 논리로 신자들을 대한 것 같아서입니다. 하지만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모세와 베드로를 야단치신 그분께서는 그들을 결코 내치지 못하신 자비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많은 잘못도 겸손되이 용서를 청하면 끝내 사해 주시는 사랑의 바보가 우리의 주님인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혹 당신 뜻이 아니고 제 뜻을 펼치며 살았다면 용서해 주시고, 오로지 당신의 뜻에 전 생을 거는 당신의 사람되게 해 주소서"라고 용서를 청하고 지혜도 청하면서 힘을 얻습니다.
그분은 바보같은 사랑의 방법으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똑같은 바보 사랑을 살으라 하십니다. 그러니 세상의 똑똑함을 본받을 것이 아니라 그분 닮은 사랑으로 바보된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도 이 세상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돌(베드로)- 수동(受動)의 신앙
- 김홍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시몬에게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게파, 바위,돌)이다. 내가 이 바위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태 16,18)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하고많은 이름 중에 왜 하필 바위, 돌이라 이름 붙이셨을까? 우리는 지금까지 이 뜻을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는다는 의미로만 알아들어 왔다. 그러나 좀 더 다른, ‘반석’이라는 의미 외에 또 다른 의미는 없을까?
불현듯 20대 초반에 읽었던 일본의 고바야시 주교님의 ‘석정’이라는 글이 떠올랐다(‘아름다운 인간상’). 이 글이 우리의 묵상과 연관될 수 있겠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교오또의 류우안사라는 절에는 ‘석정’(石庭)이라는 정원이 있습니다. 돌 石자, 뜰 庭자, 곧 돌로 정원을 꾸민 유명한 곳입니다. 어느 유명한 정원사의 손으로 꾸며진 이 정원은 지금도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습니다.
“자네에게 재미있는 곳을 한군데 보여줄 곳이 있네” 하고 어느 친구가, 나를 데리고 이 정원을 찾아간 것은, 연대는 잊었지만 어느 해 봄날이었습니다. 길이 와 폭이 30미터와 30미터 쯤 될까, 어쨌든 긴 네모의 흙담으로 둘러싸인 일정한 칸 안에, 온통 둥근 휜 조약돌이 깔려 있고 정면에 가까운 곳과 왼편 구석, 오른편 앞쪽에 두 세개씩 별로 모양도 없는 바위돌이 그저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그런 정도였습니다. ‘석정’이기에 그런지 문자 그대로 돌밖에 없는 정원이었습니다. 처음 봤을 때의 이 정원은 아무런 특이한 점도 없이 그저 아지랑이가 하늘하늘 올라오고 있어서, 돌 하나하나가 봄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는 일종의 풍경 그뿐이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유명한 정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의심만 안고 나는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여하튼 그것이 인연이 되어, 몇 차례 더 방문하던 어느 날, 왜 이 정원이 대 예술가의 위대한 작품이며, 이름 그대로 ‘명원’(名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두 번째로 그 정원을 방문한 것을 그로부터 수개월 후, 아마 7월인가 8월의 무더운 여름 햇볕이 쨍쨍한 한낮이 조금 지나서였습니다. 그날은 돌의 하나하나가 바싹 말라 버려서, 물을 끼어 얹을 것 같으면 대번에 ‘치익!’ 하고 소리 내어 빨아들이고 말 것만 같았습니다. 인간의 갈증을 그대로 나타낸 듯한 돌과 돌이 서로 격렬한 열을 뿜으며, 또한 그것을 서로 나누고 있는 듯한 모습은 일종의 비장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그리고 나서 얼마 후, 역시 여름이라고 생각됩니다마는, 비가 오는 무더운 한낮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의 정원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허, 이상하다!” 하고 정원을 둘러보았습니다. 실로 처음 온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완전히 달라졌구나...”. 그러나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색깔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색조가 달랐던 것입니다. 아니 색깔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비에 젖은, 비를 맞고 있는 그 돌 전체가, 그 모습 전부가, 그 풍취가, 말하자면 정원 전체가 조성하는 감흥이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봄날의 오후와, 여름날의 한 낮, 그 두 번의 방문으로 석정의 하나하나의 모습까지도 전부 외워 버린 나였지만, 이 돌과 이 정원이 이와 같은 색채와, 이러한 풍취를 자아낼 줄이야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어느 가을날 저녁 무렵, 절 문이 닫힐 시간에 임박하여 또 석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가을의 저녁 햇빛을 받아, 긴 그림자를 밟으면서 그 석정에 섰던 것입니다. 똑 같은 흰빛이라 해도, 그 그림자의 검은빛이 형언할 수 없는 뉘앙스를 자아내어, 가을이 온 것을 인간보다도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한 정원의 돌 하나하나가 만추의 석양에 그윽한 윤기를 내며 빛나고 있었습니다. “아아, 이것이다!” 하고 나는 부지중에 외쳤습니다. 얄미울 정도로 능란한 솜씨로 이 정원을 꾸민 정원사의 비범한 솜씨에 나는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실로 이 명원이 가지는 신비에 접촉하려면 한 두 번의 방문만으로는 부족하였던 것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도, 한 줌의 잔디도 없는 이 석정의 매력은, 계절이 바뀜과 더불어, 자기 힘으로는 변화 할 수 없는 “돌”이, 주위와 환경과 계절의 변화 중에서, 다만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에 있으면서, 그 시기, 그 환경에서만이 발휘할 수가 있는 뉘앙스를 형성하면서, “돌”이 가지는 최고의 아름다움으로써 정원 전체를 장식하고 있다는 그것에 있었던 것입니다.
돌 그 자체는 자기 혼자서는 변화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환경 속에 잘 조화되어 그 환경과 더불어 천변만화의 변화의 묘를...... 봄에는 봄의, 가을에는 가을의 풍취를 조성하고, 또 햇볕에 빛나고, 비에 젖고, 눈에 덮여서는, 그때그때 마다 전혀 다른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면서, 석정은 무언의 교훈을 말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무언의 교훈이 무엇이었을까? 고바야시 주교님은 그것을 ‘수동의 철학’이라고 불렀다. 돌이 빚어내는 이러한 수동적인 아름다움은 오늘의 복음과 잘 연관된다고 생각된다. 우리도 일상을 살아가면서 그때그때마다 저 석정의 돌처럼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뜻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우리가 저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발산하는 존재가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빛을 반사하는 거울 같은 존재는 되어야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느님의 뜻보다 내 뜻을 더 앞세우고, 자신을 이 세상과 하느님의 중심에 내세우며 살아가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칭찬하신 대목은 참 특이하다. 시몬이 스스로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 신앙고백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을 받아들여 한 고백이기에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마태 16,16-17). 그리고 나서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 곧 바위돌이라고 부르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한 것은 교회가 단지 바위처럼 그저 든든해 주기만을 바래서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모습은 바로 이 돌처럼 하느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수동적인 자세, 수동의 신앙, 수동의 지혜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예수님 스스로가 한결같이 보이셨던 신앙 - 특히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도 게세마니 동산에서 연거푸 세 번이나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마태 26,36-44)라고 기도하셨던 바로 그런 수동의 신앙 말이다. 바로 이런 교회의 모습일 때 “감히 죽음의 힘도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셨던 것은 아닐까?
盤石, 시몬 베드로
-강영구신부-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그대에게
오늘 아침에는 인간 시몬 베드로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반석(盤石)-베드로-이라 이름 지어주시고
그 위에 교회도 세우시고 하늘나라의 열쇠도 맡깁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시몬 베드로의 모습은 반석(盤石)이 아니라
바람결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입니다.
베드로의 경망스러움과 변덕, 막말과 배신은 흔들림 없이 한 길을 가는 스승 예수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치면 말짜인 시몬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고 교회를 세웁니다.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자신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덤벙대며 경망스럽게 행동하기 때문에 자기 인생을 든든하게 세울 반석이 필요했고,
뒷감당 하지 못할 정도로 함부로 말하기 때문에 기대고 서야 할 ‘말씀’이 필요했습니다.
약점 많고 지혜롭지 못하고 심지(心志)가 굳지 못하기에 온전히 스승 예수께 기대설 수밖에 없었던 그를 예수께서는 당신의 수제자로 삼습니다.
똑똑하고 잘 난 사람은 제 갈 길을 고집하겠지만,
시몬 베드로는 그럴만한 위인이 되지 못합니다.
스승 예수께 기대서지 않으면 쓰러지고 말 베드로를 예수께서는 반석(盤石)이라합니다.
자기를 아는 사람, 스스로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 기대서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권오광-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네가 믿는 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제가 믿는 예수님은 불평등한 차별 사회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 성차별, 학력 차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별에 대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이제 나는 너희를 벗이라고 부르겠다”(요한 15,15)라고 말씀하셨고, 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셨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이 땅에서 몸소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하시기 위해 모세를 보내신 것처럼, 당신의 아드님을 목수라는 노동자의 신분으로 이 세상에 보내시어 노동의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따라서 제가 하는 일은 ‘힘써 일하고, 일함으로써 세상에 봉사하는 모든 노동자들 안에서 영적이며 실천적인 복음화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적 활동’이므로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을 올곧게 꾸려가도록 돕는 일이며, 노동현장의 인간화를 위해 벗으로 살아가기 위한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저에게 본질적인 문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윤리가 아니라 신앙이기 때문에 제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예수께서는 살아 계신 인격이므로 신앙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적 귀결이고, 예수님의 요청에 언제든지 믿음의 대답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베드로처럼 과연 예수께서 물어보신다면 “그렇습니다”라고 나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베드로 사도는 성격이 급하고 덤벙거리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믿음은 강하고 충직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질문에 선뜻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예수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을 높이 사서 교회의 반석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충직한 믿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베드로 사도한테서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대목으로서 공관복음 모두가 전하고 있다. 공관복음서는 예수께서 빵의 기적을 베푸신 후 갈릴래아 주변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복음을 선포하시다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 이르러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을 받게 됨을 전한다.
루가복음은 빵의 기적 후 즉시 장소를 명기하지 않은 채 베드로의 고백을 보도하고 있다. 루가는 예수께서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에게 당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으로 보도함으로써 저자 고유의 특성인 기도를 강조하고 있다.
공관복음서는 베드로의 고백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까지 같은 순서를 따르고 있는 바, 그것은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 ‘예수 추종의 길’ -> ‘종말의 시기에 관한 토막어’ ->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의 순서이다.(마태 16,13-17,9; 마르 8,27-9,10; 루가 9,18-9,36)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전하는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과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를 그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예수께서는 일행과 함께 띠로와 시돈 지방에서 다시 갈릴래아 지방으로 돌아와 호수의 이쪽저쪽에서 활동하시고 난 뒤(마태 15,29-16,12)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 당도한다.
가이사리아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 헤로데 필립보가 헤르몬 산맥의 지하수가 샘솟는 곳을 골라 기원전 2년경 건설한 도시로서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약 40Km 지점에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신다. 이 질문은 마치 하나의 필기시험과도 같은 것이다. 제자들이 3년가량 따라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예수가 누구인지를 답하라는 것이다.
예수의 정체에 대한 질문은 2단계로 구성된다. 예수께서는 우선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하여 물으신다.(13절) 당시 사람들은 예수를 소생(蘇生)한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다른 예언자 등으로 여겼다.(14절)
다음으로 질문은 제자들을 향한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15절)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하고 대답한다. 마르코는 단순히 “그리스도”(마르 8,29)로, 루가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루가 9,20)로 소개하면서 즉각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는 예수님의 함구령을 덧붙이고는 이 단락을 끝맺는다. 물론 마태오도 함구령을 덧붙이지만(20절), 그 사이에 베드로의 대답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와 찬사, 그리고 세 가지 약속을 첨가하였다. 이는 마태오 자신의 독자적인 편집이 확실하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필기시험을 만점, 즉 100점으로 평가하시고는 그를 복된 자로 여기신다. 그런데 이 결과가 하느님의 계시에 의한 것임을 밝혀 두신다.(17절) 이어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아주 중요한 세 가지 약속을 하신다.
첫째는 시몬 베드로(돌, 바위)를 초석으로 삼아 그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교회창립 약속이다. 그리고 이 교회는 죽음의 힘도 능가하는 그런 조직이 될 것이다.(18절)
둘째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겠다는 약속이고,
셋째는 땅에서 매고 푸는 대로 하늘에서도 똑같을 것이라는 매고 푸는 권능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19절)
이는 실로 엄청난 약속이며, 이 약속이 실현된다면 베드로가 가지는 권능은 절대적이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 때문에 학자들뿐만 아니라 가톨릭교회와 그 밖의 다른 교회 간에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논쟁의 핵심은 예수께서 베드로, 즉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 전체에 주시는 권능인지, 아니면 베드로라는 수제자 개인과 그를 계승하는 교황의 인격에 주시는 권능인지를 따지는 것이다. 대답은 쉽지 않다. 예수께서 거짓으로 약속하실 리는 없을 것이므로 어느 쪽에든 그 권능이 주어져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아마 교회 전체에 주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전체 교회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과 주교단에 의해 일치됨으로 이들의 권한과 책임을 배제할 수 없다.
문제는 이 엄청난 권능을 교회나 교황이 임의로 행사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교회와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권능은 철저하게 하느님의 계획에 달려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매여 있다. 이런 사실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말씀과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에서 즉각 드러난다. 예수님의 머지않은 수난과 죽음은 이미 예정된 사실이지만 제자들에게는 쉽게 수용될 사안이 아니었다.
방금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예고를 듣고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 그는 예수를 붙들고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린다.(22절) 이것으로 베드로 고백의 진가가 드러난 셈이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정확한 고백이지만 속으로는 형편없는 고백이 되고 말았다. 필기시험에서 100점을 얻은 베드로가 실기시험에서 빵점을 맞은 격이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태도는 예수께 장애물로 간주된다.(23절) 실기시험에도 100점을 얻을 수 있을 지는 베드로에게 남은 숙제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통하여 이 숙제를 완수해야 한다. 이 숙제는 우리들에도 같은 비중으로 주어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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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