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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12일 연중 제19주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6, 41-51)
I am the living bread that came down from heaven;
whoever eats this bread will live forever;
and the bread that I will give is my flesh
for the life of the world.”
말씀의 초대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의 예언자였다. 당시 임금 ‘아합’은 우상 숭배에 빠져 백성을 그르치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를 꾸짖었기에, 아합의 아내 ‘이제벨’은 예언자를 없애려 했다. 피난길에 오른 엘리야는 죽음을 각오하며 기도한다. 주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엘리야를 도와주신다(제1독서). 신앙인은 악한 생각을 피해야 한다. 원한과 분노와 폭언을 삼가야 한다. 그런 일은 성령을 슬프게 하는 일이다. 서로 사랑하며 용서해야 주님을 본받는 삶이 된다.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이 된다(제2독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시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늘의 기운’이 함께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는 수없이 성체를 모셨습니다. 아직도 ‘영적인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돌아봐야 합니다. 어떻게 성체를 모셨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체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성체 앞에 선다는 것은 살아 계신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생략되었기에, 당연한 듯 모시는 성체가 되었습니다. 구경하는 미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늘의 힘은 거저 오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부터 성체 신심에는 정성이 실렸습니다. 교회가 ‘공복재’를 규정한 것도 지성으로 모시라는 의도입니다. 지금의 공복재는 성체 모시기 전 ‘한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는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70년 전만 해도 성체를 모시려면 전날 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선교사들의 지나친 신심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성체께 정성을 드리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성체를 자주 모시면 ‘그분의 힘’은 강하게 활동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불안과 허무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생명의 빵이 주는 ‘천상의 힘’입니다. 누구라도 온몸으로 성체를 모시며 이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성으로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이승과 저승’에서도 결코 헤매지 않게 됩니다.
☆☆☆
사노라면 지칠 때가 많습니다.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몸이 지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음식으로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신의 상처와 절망 등으로 마음이 지칠 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위로와 격려, 사랑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힘이시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빵
- 최영균 신부-
우리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은 사물에 반사된 빛이 눈을 통해 뇌의
영역으로 전해지면, 과거에 경험했던 형태를 연상하면서 저것은 ‘빨간
장미꽃이다’라고 인식을 하게 됩니다. 박쥐는 초음파를 통해 자신의 뇌에
3차원적 화면을 구성하여 물체를 인식합니다. 박쥐의 사물 인식은 인간의
인식보다 더 정밀하다고 말을 합니다. 각각의 동물들은 가지각색의 시각 영역을
가지고 있고 각기 다르게 사물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진짜 실체는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아니 나에게 보이는 것만 진실일까요?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것,
한계성을 가진 인식의 지평에서 하느님을 보려고 합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주님은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 우리를 영원히 살릴 빵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넘치는 생명을 제공해주십니다. 감각적 세상을 넘어,
나의 경험된 세상을 넘어 예수님을, 내 삶을 지탱해주시는 살아 있는 빵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만이 할 수 있는 것.
-김찬선신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작년 처음으로 인터넷에 강론을 올릴 때
다들 다른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을 보고
인터넷 이름이 따로 있어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어떤 이름을 가질까 생각하다가 “당쇠”를 쓰기로 했습니다.
마당쇠의 준말이지요.
나는 주님의 마당쇠라는 정체 의식의 반영이기도 하고
나는 주님의 마당쇠가 되겠다는 의지의 반영이기도 하고
나는 주님의 마당쇠가 되고 싶은 바람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말씀도 같습니다.
당신을 빵으로 생각하시고
빵으로 내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빵.
빵은 먹히는 것.
자연계는 먹고 먹히는 관계입니다.
먹히는 것이 약자이고
먹히면 죽는 것이고
먹히지 않으려는 것이 자연의 순리인데
주님은 약자가 되시고
주님은 먹히시겠다고 하시고
주님은 죽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먹는 이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누구를 살린다면, It's very nice!
내가 죽어가는 누구를 살려준다면 그가 얼마나 고마워하겠습니까?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을 구해주면 얼마나 고마워하겠습니까?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주는 의사는 얼마나 멋있습니까?
화재로 인해 죽을 위험에 처한 사람을 소방관이 구해내면
얼마나 멋지고 얼마나 보람이 있습니까?
그러니 내가 생명을 창조하지는 못해도
누군가를 살게 할 수만 있다면
저의 인생은 멋지고 살 만한 인생이고,
설사 살려내지는 못해도 죽어가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선사하여
평화롭고 아름답게 죽을 수 있게만 해도 멋지고 보람 있는 인생입니다.
정말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가 죽어야 살릴 수 있다면 문제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도 살릴 수 있다면, 그리고
멋지고 보람된 나의 인생을 위해서 남을 살리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가 죽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이 하는 것은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가 죽는 것뿐이 아닙니다.
자기가 죽으면서도 자기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으면서도 살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살아있는 빵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죽으면서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으면서도 싱싱하고
그것은 고통 중에서도 기쁩니다.
이렇게 활력과 기쁨이 있어야만 죽으면서 남을 살릴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성체, 하늘에서 내려온 율법서
-전삼용신부-
제가 아는 한 신부님이 봉성체를 나갔는데 치매 할머니였습니다. 집에 들어갔더니 그 할머니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밥 줘, 밥 줘!”만을 연신 외치고 계셨습니다. 가족들이 아무리 설득해도 꿈쩍도 안 하시던 할머니께서 신부님의, “성체 모시셔야죠!”하니까, 손도 씻고 얼굴도 씻고 앉으셔서 성체를 정성스럽게 영하시고 그 날은 멀쩡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봉성체를 매일 오셨으면 좋겠다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육신의 밥을 달라고 할 때는 정신이 없다가도 영적인 밥을 먹을 때는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 영성체는 육신의 밥과는 차원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음식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육신은 흙으로 만들어져서 흙으로 돌아가고 흙에서 나는 것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의 영혼은 하늘에서 왔고 하늘로 돌아가며 그래서 하늘에서 나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께서 저에게 깨닫게 하신 가장 큰 것들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이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나무”라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그 열매를 먹는 것이지만, 영원히 살게 하는 나무는 그 ‘나무’ 자체를 먹는 다는 것에 과연 생명나무가 무엇일까를 고민하였습니다.
생명나무는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요한 묵시록에까지 나옵니다. 즉 에덴동산에서와 마찬가지로 천상 예루살렘 안에 심겨져서 그 곳에 사는 이들에게 영원히 사는 생명을 주는 능력이 있는 나무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늘나라에 있는 양식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무’라고 하면 사람의 ‘인성’을 상징합니다. 아마도 땅에서 시작하여 하늘로 오르려는 모습이 사람과 흡사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벳사이다의 소경이 영적인 눈을 뜬 다음 사람을 보면서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인다고 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살과 피, 즉 예수님의 ‘몸’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나무’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의미로 성자께서 육체를 취하셔서 태어나신 날, 나무를 잘라 장식하는 전통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성탄트리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이 트집을 잡는 것은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예수님의 몸이 땅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썩어버릴 인간의 보통 육체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천상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아버지도 하늘에 사시고 그 분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도 하늘에서 와야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육체가 성자의 신성과 결합되면서 그 육체 또한 영원한 신성을 지니게 된 것처럼, 그 분의 몸을 먹고 그 몸과 하나가 되면서 우리도 그 분의 영원성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생명을 주는 생명나무임을 선포하시면서도 당신은 “살아있는 빵.”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다 죽은 것들이 우리 속으로 들어갑니다. 산 것이 들어가도 몸속에 들어가면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있는 빵이라고 하십니다. 그 뜻이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우리가 예수님을 양식으로 먹지만 그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우리들은 죽은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예수님을 먹는 것이고 예수님을 빨아먹든, 녹여먹든, 씹어 먹든 그 형체는 사라지지만 그 양식인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사시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을 내 안에서 사시게 하기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은 내 안의 작은 우상인 자기 자신의 자아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 분의 몸을 영하는 이들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지 않으면 인간은 텅 빈 성전, 즉 생명이 빠져나간 죽은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고 정확히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다 떠나갔어도 다른 설명을 해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개신교가 말하는 것처럼 그분의 살은 그분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떠나는 사람들을 잡고 그렇게 설명해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에 다른 설명을 해 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은 영적인 보이지 않는 무엇이 아니라, 보이는 육체와 영혼에 생명을 주는 양식, 즉 당신의 ‘몸과 피’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 되셨을까요? 몸과 피는 바로 그 분의 생명, 즉 자신의 전부를 의미합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이고 모든 것을 주는 것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성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이 사랑이고 생명인지도 동시에 가르쳐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성체는 사랑의 덩어리입니다. 세상에 성체보다 작은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큰 사랑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작아짐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무한하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 유한 속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만약 백 평 아파트에 살던 사람이 세 평 지하 단칸방으로 이사 왔다고 합시다. 정말 답답해서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무한하시던 분이 유한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그 답답함을 무한대로 극대화시키면 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렇게 작아지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 중에서 큰 인간이 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가장 가난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서 차가운 나무 위에 놓이셨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머리 누일 자리도 없이 가난하게 사셨으며 결국 마지막으로 머리를 누인 곳이 바로 십자가 나무였습니다. 인간 중에서도 가장 작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어도 그런 하느님께서 그렇게까지 작아지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손 위에 올라올 수 있을 만큼 작아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양식이 되기 위해서 무한하신 하느님께서 우리 손바닥 위에 올라오실 만큼 작아지셨습니다. 어떤 인간도 그렇게까지 작아지지는 못합니다. 그래야 인간에게 먹히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모시는 것은 바로 이 작아짐을 모시는 것이고 이 작아짐이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은 커지려고 할 때 이 작아짐의 힘은 사라지게 되고 그 영혼은 결국 생명을 주는 살아있는 빵의 정신을 잃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잃은 죽은 영혼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을 영하며 그 정신과 일치하여 살지 않는다면 그 빵은 더 이상 생명을 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체는 그 성체를 영하는 사람에게 그 성체의 정신을 심어주고 살게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성체와 한 몸이 되지 않으면 그 성체 안에 있는 영적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체는 또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고 하셨듯이, 우리에게 사람이 되시고 그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사랑을 그대로 실천하라고, 그래서 당신과 한 몸이 되라고 우리를 매일매일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체는 우리가 한 몸을 이루어야 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동시에 우리가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율법서이고 십계명 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작아지고 져주고 밥이 되어주는 삶이 성체와 하나 되는 삶이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구요비 신부-
요 한복음을 상징하는 생물은 독수리입니다. 독수리
는 가장 멀리 바라보고 제일 높이 나는 새로서 또한
이런 꿈을 지니고 있는 영적인 인간의 상태를 전해 주기도
합니다. 사실, 요한복음은 성숙한 그리스도인, 완덕에 나
아가는 사람, 다시 말해 영지(知)를 얻으려는 사람들을
염두에 둔 복음서라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복음은 정
신적이고 영적인 존재인 인간이 추구하는 진리에 대한 목
마름과 갈등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앎의 즐거움을 원합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
면서부터 앎을 원합니다(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이 갈망하
고 추구하는 진리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응답은 신앙을 통
한 앎(intellectus fidei)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이성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습니
다(요한 바오로 2세). 아우구스티노 성인은“나는 알기 위해
서 믿고, 믿기 위해서 이해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은 5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의 인격의 신비, 즉 이분의 신성(神性)을 알
아보지못합니다.“ 저사람은요셉의아들예수가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가?”(42절)
성서가 말하는 앎은 사람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나 감정
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에 대한 사랑을 포함합니다. 한 인
간과의 사랑 안에서 일어나는 심오하고 인격적인 체험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이런 앎은 어떤 분을 향한 이끌림, 매
력, 애착을 불러일으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44절).
‘내가 누구를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고 자문해 볼
때, 개인은 자신이 알리는 내용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범
위 안에서 알려질 뿐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앎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을 알려주실 때에야
그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에게 알
려졌기때문에그분을아는것입니다.“ ‘그들은모두하느
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
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
다”(45절).
이런 배경에서“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
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는 이는 영원히 살 것이다”는 말씀
의 의미가 밝혀집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정신적이고 영적
인 갈증을 채워주시는 하느님의 지혜(1코린 1,24; 콜로 2,1-3;
에페 1,17-18; 요한 14,6)이십니다. 이분은 과거의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인간의 살아있는 말로서 우리의 동시대인
(同時代人)으로서 우리 곁에 계십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느
님의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는(콜로 2,3) 주
님께 대한 허기짐과 열정에 사로잡혀 살 때에 우리 안에 계
십니다. 우리가 많은 기도의 시간과 깊은 묵상으로 관상에
이를 때에 그러합니다. 관상(contemplatio)이란 말을 풀어
서 보면 예수님과 내가 같은 시간 안에 산다는 뜻입니다.
종두득두(種豆得豆)
-곽길섭 신부 -
“뿌리부터 꼭 꼭 씹어서 몸 안에 심는다는 마음으로 드십시오”
언제 어디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산삼 먹는 법에 대해서 들었던 기억입니다. 여러분에게 산삼이 생겼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드시겠습니까? 위의 방법대로 드시지 않겠습니까?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산삼 먹는 법이 자세히 나와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몸을 정갈하게 하고’란 표현도 있었습니다. 산삼이 있었다면 아마 철저히 지켰겠지요?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먹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먹어야 사는 인간에게 무엇을 먹느냐는 그 먹는 것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약을 먹으면 병이 낫고, 독을 먹으면 병이 듭니다. 그리고 아무리 몸에 득이 되는 음식이라도 그것을 먹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먹기 위한 마음가짐과 자세 또한 중요합니다. 그렇게 정성껏 먹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먹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먹거리 자체가 지니고 있는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바로 이 빵을 먹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 주님! 그 안에는 태초부터 시작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이, 우리의 먹거리가 되심으로 절정을 이룹니다. 온전히 당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과연 그 생명의 빵을 어떤 방법으로, 나아가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로 영하고 있습니까?
또 그 생명의 빵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 먹거리 자체가 지니고 있는 힘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받아 영하면서 무엇을 받아 영하고 있는지 망각하고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종두득두(種豆得豆),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고 했습니다. 먹은 데로 드러나도록 해야 되지 않을까요?
생명의 빵인 예수님
- 박창목 신부-
성모님께서 사랑하시는 사제들에게 하신 말씀(443번 참조)을 보면 사람은 현세를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굶주림을 겪고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육신의 굶주림은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외에도 “정신적 굶주림이 있는데 주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며, 영혼의 굶주림이 있는데 여기에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함을 그리고 마음의 굶주림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채우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요한 6, 51)으로 산다…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교만, 무절제한 이기심, 증오, 폭력, 그리고 심각한 사랑 불능증의 끔찍한 종살이를 하고 있는지!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일치와 사랑의 길뿐이다.예수께서 무한히 숭고한 선물, 즉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를 너희에게 주신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오늘날에도 “성체 예수님”께서당신 ‘말씀’으로 인간 정신의 굶주림을 채워 주시고, 당신 ‘은총’으로 영혼의 굶주림을 채워 주시며, 당신 ‘사랑’으로 마음의 굶주림을 채워 주십니다.
가톨릭 교회는 성체성사에 관한 수많은 성인들의 증거와 증언을 갖고 있습니다. 성녀 파우스티나(1905~1938)는 수도자로서 33년간의 짧은 생애를 살면서 성체 안에 계신 주님을 자서전에서 강력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 성체 조배가 있었다…기도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갔을 때, 나는 영적으로 경당으로 옮겨졌고 거기에서 성광에 모셔져 있는 예수님을 뵈었다. 성광이 있는 자리에서 나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네가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을 이 영혼들은 신앙을 통해서 본다. 오, 그들의 위대한 신앙은 나를 얼마나 기쁘게 하는가! 겉으로 보기에는 내 안에 아무런 생명의 흔적이 드러나지 않지만 실제로는 모든 성체 하나 하나 안에 생명이 완전하게 존재하고 있다. 내가 어느 영혼 안에서 활동할 수 있으려면 그 영혼이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살아 있는 신앙이 나를 얼마나 기쁘게하는가!”(성녀 파우스티나 수녀의 일기, 1420, 팔로티회)
“이제 너는 거룩한 성사 안에 있는 나의 사랑을 묵상하여라. 여기서 나는 너의 배우자로서, 영혼과 육신 그리고 신성(神性) 모두 온전히 너의 것이 되어 준다.사랑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너는 잘 안다. 사랑이 요구하는 것은 다만 한가지, 그것은 상호성이다.”(1770).
오늘 화답송 시편에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라고 초대합니다.
본당에는 성체 조배실이 있습니다. 우리 본당에도 작은 조배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체주님을 찾는 교우 분들은 소수입니다. 좀 더 많아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우리를 부요케 하시고자 창조주시요 구세주로서의 엄위하심을 감추시고 성체 안에 가난과 겸손과 사랑으로 침묵 가운데 살아 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인생 여정에 생명과 빛과 힘을 주시고자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 35) 아멘.
생선 대가리와 생명의 빵
-이일환신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 하나!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생선 대가리(?)를 좋아하십니다. 밥을 먹어도 맨 밑에 누른 밥을 좋아하시는데, 그나마 먹다 남은 찬밥이 없을 경우에 그러합니다. 삼겹살을 먹을 때도 야채만 좋아하시고, 자장면 짬뽕을 먹어도 국물만 좋아하십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정말 좋아하시는가, 맛있는 것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맛있다는 생선 대가리를 먹어 보지만 쓴 맛만 납니다. 그나마 붙어 있는 살은 발라내어 먹기가 어렵습니다. 삼겹살에서의 야채는 고기 맛을 돋우어 주고 영양분을 조절해 주지만 결코 그 자체로는 별 맛이 아닙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세상 누구도 양념만을 먹기 위해 자장면을 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좋은 것도 모자라 더 좋은 것을 자녀들을 위해 내어 주고 자신은 덜 좋은 것을 택하십니다. 아니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선택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깨닫는 데에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 51).
예수님의 이 말씀을 깨닫는데도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또 서품을 받고 사제로 살고 있는 지난 1년 동안에도 여전히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 가고 있는 중입니다. 유다인들에게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분은 진정으로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우리가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그분은 하염없이 자신의 살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돌아가셨는지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에 왜 그토록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려고 하셨는지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 좋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당신이 가지려 하셨던 그 마음을 사제로 살면서 조금씩 느껴봅니다. 덜 좋은 것을 타인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좋은 것을 가지려는 계산된 행위가 아닌, 오히려 자신의 것마저 내어 놓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어려서는 생선의 살을 먹으며 육신이 자랐고, 이제는 예수님의 살을 먹으며 영혼을 살찌워갑니다. 이제 우리도 생선의 대가리를 먹고 예수님을 따라 우리의 몸을 내어 주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강선남-
‘유다인들’이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앞의 이야기(6, 1 ‐ 40)에서 ‘군중’(사람들)이었던 이들이 이제 ‘유다인들’로 불리며 그들의 ‘규격화’되고 ‘제한된’모습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수군거린 까닭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못마땅했기 때문입니다(41절). 그들 앞에 있는 사람은 자기들과 똑같은 인간인데,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빵이라고 하니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고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들이 알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분명한데 무슨 해괴한 소리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였다고 해서(6, 1‐15), 예수가 자기들과 같은 인간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온’존재일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보고 귀에 들리는 대로 들을 뿐 그 너머로 안에 들어 있는 의미에 도달하기에는 한참 멀었습니다. 규격화되고 제한된 틀을 벗어나 진리에 의해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자신들을 종살이에서 해방하시고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깨닫지 못하고,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고 나와 광야에서 굶어 죽게 하느냐며 자기들을 이끄는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던’이스라엘 백성의 모습(탈출 16, 2‐8)이 떠오릅니다.
현재의 불편함과 곤고함에 짓눌려 하느님의 구원을 볼 수 없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놓고 따지지는 못합니다. 그저 자기들끼리 고개를 저으며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는 있지만, 평범한 보통 사람들과 달리 ‘이적들’을 일으키는 특별한 능력과 권위를 지닌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불평과 수군거림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그들의 딱한 형편을 지적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44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만 예수님께 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시고 그분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저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도록 이끄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인간 편에서 마음의 문을 열어야만 그분에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인간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그 믿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실 것입니다(에페 3, 17). 바오로 사도는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습니다.”
(2코린 4, 1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른 차원의 주제를 말씀하십니다. 죽음과 생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이스라엘 조상을 상기시킵니다. 광야의 고단한 여정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던 만나는 그들의 하루하루의 삶을 지탱해 주는 양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정착지에 다다를 때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 가나안 땅 경계에 다다를 때까지 그들은 만나를 먹었던 것이다.”(탈출 16, 35)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들의 육체적 필요를 채워주셨던 만나는 물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는 ‘불사’의 양식이 아니었습니다. 중국의 진시황이 구했던 ‘불로장생’의 음식도 아니었습니다. 그날 하루 안에 먹도록 되어 있던 만나는 사람에게 하루 동안의 생명을 보장해 주는 ‘하루의 양식’일 뿐이었습니다
(탈출 16, 19).
그렇다면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50절)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절) ‘살아 있는 빵’이신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한테서 받은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지니신 분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들에게 내주실 것입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요한 1, 2)
셈어에서 ‘살(바사르)’이라는 말은 가능성과 동시에 한계를 지닌 인간의 실체를 이루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이란 말로 당신 실체를 사람들에게 주신다고 하십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곧 사람을 참되게 그리고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해 자신을 내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실체인 그 ‘살’을 먹는 사람은 그분이 지니고 계신 영원한 생명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인간적인 지식으로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잡혀 있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믿음의 영’이 우리 안에서 활발하게 일하실 때 도달할 수 있는 신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에페 5, 2), 오늘 우리는 그분으로 인하여 살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소리 높여 외치겠습니다.
마음으로, 가슴으로 먹는 밥
-상지종신부-
사람은 살기 위해서 밥을 먹습니다.
사람은 밥을 먹기 때문에 생명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밥은 생명을 이끌어가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됩니다.
차라리 밥이 생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밥이 있습니다.
입으로 먹는 밥이 있습니다.
몸의 생명을 가꾸고 이어주는 밥입니다.
말 그대로 밥입니다.
마음으로, 가슴으로 먹는 밥이 있습니다.
사람이 개 돼지가 아니라, 사람답게 살도록 가꾸어주는 밥입니다.
사랑, 믿음, 자유, 나눔, 섬김, 화해, 평화, 일치.....가 이 밥입니다.
밥을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가슴으로 먹어야만 하는 밥의 소중함을 압니다.
그러나 입으로 먹는 밥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서로 많이 먹겠다고 싸웁니다. 서로 잡아 먹으려고 난리입니다.
생명인 밥을 놓고 싸우다고 서로 멱살을 잡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떨어집니다.
밥은 결코 죽음을 주지 않습니다.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밥 때문에 사람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들어섭니다.
자기 탓 없이 생명의 밥이 죽음의 밥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않을 때,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일 따름입니다.
입으로 먹는 밥 때문에 마음으로 먹는 밥을 잊어버린 사람은 사람답지 않습니다.
겉은 사람이지만 이미 속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을 주시고자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생명의 빵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으로...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으로....
입으로 먹어야 하는 밥의 노예가 되어 사람답기를 포기한 사람들을 깨우시려고...
마음으로, 가슴으로 먹어야 하는 밥의 소중함을 일깨우시고, 그것을 주시려고...
그리하여 구원을 주시고자 오십니다.
예수님은
성체로,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구원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을 먹습니다.
예수님처럼 변합니다.
나도 밥이 됩니다.
나를 먹으라고 내어놓습니다.
누군가 나를 바라봅니다.
누군가 나를 먹습니다.
누군가 나처럼 변합니다.
누군가 나처럼 밥이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누군가
그 다음 누군가
아득히 머나먼 길이기에
선뜻 나서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모했던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기꺼이 따라나서고자 합니다.
가다가 부딪히고 깨지고 넘어지겠지요.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겠지요.
다시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오늘 이 시간 길을 떠납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 나보다 먼저 밥이 되어 준 누군가와 함께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아주 특별한 미사>
-양승국신부-
오늘 오전은 교도소에 있는 형제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교도소에서 미사를 드릴 때마다 느끼는 바지만 미사에 임하는 형제들의 모습이 얼마나 진지하고 적극적인지 모릅니다. 본당에서 미사드릴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비록 매끄럽지 못한 투박한 음성들이지만 씩씩하고도 우렁찬 목소리로 얼마나 열심히 성가를 부르는지 흥이 저절로 납니다.
강론시간에도 눈들이 다들 살아있지요. "언제 끝나나"하는 삭은 표정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눈들이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더운 날씨여서 축 처질 것 같았는데...기운이 절로 났습니다.
미사 끝에는 정성스런 간식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한 마음씨 좋은 부부가 새벽 4시부터 일어나서 삶았다는 고구마와 감자, 아이스박스에 채워온 시원한 냉커피 한잔, 싱싱한 사과 한 알이 각자의 접시 놓여졌습니다. 고향냄새가 듬뿍 묻어나는 간식이었습니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너무도 가벼웠습니다.
미사예물도 봉헌금도 없는 미사, 신자수가 몇 명 되지도 않은 미사, 아무런 장식도 없는 허름한 교실에서 봉헌된 미사였지만 진정 살아있는 미사, 진실한 마음들이 함께 했던 아름다운 미사였습니다.
"미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일까" 자주 생각해봅니다.
저절로 기도분위기가 조성되는 장중한 분위기의 대성전도 중요하지요. 잘 연습된 성가대도 필요합니다. 요즘같이 더운 날씨엔 냉방장치도 무시 못합니다. 잘 준비된 강론 원고(일단 짧은)도 다들 선호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서서 필요한 요소가 바로 미사에 온 사람들의 마음가짐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려는 마음, 진정 예수님을 모시려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진지한 마음과 정성스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매일 받아 모시는 성체가 진정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 되기 위해서는 내적인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냥 때가 되었으니, 이왕 미사에 나왔으니, 남들이 줄줄이 앞으로 나가니 하는 준비되지 않은 영성체는 진실로 완결된 영성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이것은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진정한 영성체, 완결된 영성체는 준비된 영성체입니다. 그리고 성체의 살아있는 의미가 삶 가운데서 실천될 때 영성체가 완결됨을 저는 믿습니다.
완결된 영성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진지한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한 잘 준비된 고백성사가 먼저 이루어져야합니다.
그리고 받아 모실 성체가 진실로 살아있는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받아 모신 성체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성당 밖에 나가서 실천함을 통해서 미사는 완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성체가 우리에게 주는 자비와 사랑, 자기희생과 나눔, 친교와 일치를 매일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실천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의 미사는 완결될 것입니다.
인간생명의 부양을 위한 하느님생명의 헌신
-박상대신부-
우리는 지난 몇 주간 주일복음으로 요한복음 6장을 들었다. 물론 6장 전체는 아니지만 연중 17주일(6,1-15), 18주일(6,24-35), 오늘 19주일(6,41-51), 그리고 20주일(6,51-58)과 21주일(6,60-69까지 듣게 될 것이다. 교회가 이렇게 요한복음 6장을 다섯 번 연달아 <나해>의 주일전례복음으로 택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 굶주린 군중 오천 명 이상을 먹이신 빵의 기적은 4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다.(마태 14,13-21; 마르 6,32-44; 루가 9,10-17; 요한 6,1-15) 그런데 공관복음이 빵의 기적을 예수님의 메시아적 권능을 드러내는 다른 기적사화와 같은 차원으로 다루고 있는 동안, 요한복음은 빵의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생명의 빵>으로 계시하면서 저자 특유의 성체성사신학을 펼쳐간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계시하신다. 이 말씀을 두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웅성거리거나(41절), 서로 따지거나(52절), 수군거린다는(60절) 것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불신(不信)을 뜻한다. 군중의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유다인들이 웅성거림으로 자신의 불신을 표시한 것이다. 요한복음 6장에 드러나는 불신의 대상은 두 가지로서,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께서 ① "하늘에서 내려왔다"(41절)는 것과, 생명의 빵이신 예수께서 주실 빵이 바로 ② "자기 살"(51절)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된다. 걸림돌이란 걸려 넘어질 수 있는 돌로서 사람들이 믿기 어려울 만큼 마음에 걸리는, 귀에 거슬리는(61절),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더라도 아주 어렵게 이해하는 차원을 말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첫 번째 불신의 대상인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씀을 다루고 있으며(41-47절), 두 번째 불신의 대상인 "자기 살"의 말씀은 오늘 복음의 후반부와 다음 주일 복음에서 다루어 질 것이다. 예수님 주위에는 갈릴래아 호수 주변의 사람들은 물론, 호수에서 30-40Km 떨어진 곳의 사람들도 모여 있었다. 그 가운데는 나자렛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22-23절 참조) 그러니 예수가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이라는 것은 이미 군중 사이에 퍼져있는 사실이다. 자기들과 똑같은 인간인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하느님 편에서 볼 때는 진실이요 사실이지만 사람들 편에서 볼 때는 (예수의 부모님만 제외하고) 분명히 걸림돌이다. 비천한 목수의 아들이 "하늘에서 왔다"면 하느님과 관련하여 예수를 언급하고 사고(思考)해야 한다는 자체가 그들에게 걸림돌인 것이다.
요한복음이 전개하는 성체성사신학은 단순히 "생명의 빵"만을 소재로 삼지 않는다. 이 말은 공관복음이 전하는 최후의 만찬에서 비롯된 성체성사를(마태 26,26-28; 마르 14,22-25; 루가 22,19-20; 1고린 11,23-26)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선취하는 사건으로서 성체성사를 성립시킨다면, 최후만찬 식탁의 빵은 예수님 자신으로서 "타인에게 먹혀질 빵"이다. 이 빵을 요한복음 6장에 도입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며, 사람이 되신 말씀이요 성자(聖子)이며, 곧 하느님 자신이다. 이로써 우리는 성체성사를 "생명의 빵"의 차원을 넘어 "인간에게 먹히는 하느님", 나아가 "인간생명의 부양(扶養)을 위한 하느님생명의 헌신(獻身)"의 차원으로 부각시킬 수 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먹힌다고 하느님이 줄어들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이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신은 빵을 필요로 하겠지만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못한다.(마태 4,4) 생명의 빵은 영혼을 위한 양식이 되겠지만 그 양식을 먹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47절)는 것이다. 이는 "먹음"과 "믿음"의 일치와 조화이다. 그것은 결국 요한이 자신의 복음서를 집필한 목적에서 밝혔듯이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 20,31)이다.◆
새벽을 열며
저는 요즘 자전거에 미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아침마다 운동으로 자전거 타는 것은 물론, 매일 자전거에 관련된 사이트나 자전거 관련 책을 보면서 시간 가는 것도 잘 모르면서 생활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며칠 전, 자전거 관련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아주 괜찮은 물건을 하나 보게 되었고, 큰 맘 먹고 구매를 했지요. 그리고 어제 그 물건이 택배를 통해서 왔습니다.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 자전거가 업그레이드되었다는 사실에, 그래서 보다 편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빨리 아침이 되어서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생각에 설렘까지 간직하게 되네요.
아마 자신에게 꼭 필요하고 관심 있는 어떤 것을 구입하게 되면 누구나 그런 설렘을 간직할 것입니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빨리 사용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현상인 것이지요. 그런데 자신에게 전혀 필요 없다는 생각을 갖고, 또한 자신의 관심과 거리가 먼 것을 구입하게 된다면 어떨까요? 구입하지도 않겠지만, 만약 구입을 하게 되더라도 그 물건을 별로 사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물건이 아무리 좋고, 내게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아마 곧바로 창고의 구석진 자리를 하나 차지하겠지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빵이 되셨다는 말씀이지요. 빵이란 무엇인가요? 물론 우리나라처럼 쌀을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빵이 하나의 간식 정도로만 생각되겠지만, 당시의 사람들에게 빵은 주식량으로써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거든요. 따라서 빵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영적인 빵이 바로 당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사는 빵이신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지금 당장 먹을 수 있는 빵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에만 관심이 있었지, 예수님의 말씀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토록 놀라운 기적과 가슴을 울리는 말씀을 전해주심에도 불구하고 바로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앞서 자신이 정말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별로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로 과거 유다인들은 예수님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비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은 어떨까요? 과연 예수님의 그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요? 혹시 과거의 유다인들처럼 이 세상 것들에만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의 관심사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나를 살리기 위해서 직접 빵이 되신 예수님께로 말입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얻어 살 수 있답니다.
빠다킹신부
생명의 빵
-김광태 신부-
만나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광야를 40년 동안이나 유랑하면서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양식으로 살아가게 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불모지 광야를 유랑하다보니 더욱 민감하게 그 사실을 깨닫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모세처럼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빵을 먹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일상의 삶 안에서 늘 하고 계신 일을 광야의 만나 사건처럼 좀 더 분명히 보여주신 것일 뿐입니다. 그 사건을 체험한 군중은 더욱 강하게 예수님을 따릅니다.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 이미 하느님께서 주고 계시지 않으셨던가요?
빵이 없어서가 아니라 볼 눈이 없다보니 사람들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들은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통해 내려준 빵을 먹더라도, 조상들처럼 결국 죽고 말 것입니다. 군중은 진정으로 청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이미 주십니다. 진정으로 청해야 할 것은 영원한 생명의 빵입니다. 즉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고 그분과 하나가 되어, 그분이 누리는 하느님과의 온전한 친교 안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김흥주 신부-
◆여름 휴가철이 되면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수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매년 이런 현상을 지켜보는 본당신부의 맘이 편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신자들에게 미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자 애쓰고는 있지만 휴가철만 되면 안타까울 뿐이다.
미사를 통해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 얼마나 큰지 각인시키기 위해 가끔 신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만일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에게 미사 때마다 백만 원씩 준다면 과연 여러분은 미사에 쉽게 빠지겠는가? 휴가 때문에 혹은 다른 모임이나 행사 때문에 미사에 빠진다는 말이 과연 나올까? 아마 휴가는 물론 다른 행사나 모임을 다 제쳐두고 미사란 미사는 다 참례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백만 원이 아니라 백억과도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것을 미사를 통해 얻고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바로 미사를 통해 백만 원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세상 모든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 내 안에 오시지 않는가? 그렇다. 정말 미사성제를 통해 하느님이신 분이 나에게 오시는 것이다. 영성체를 통해서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만물의 주인이시며 세상의 모든 것이요, 전부인 분이 나에게 오시는 것이다.
‘성체의 성인’으로 불리는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신자들에게 가능한 한 매일 영성체를 하기 위하여 미사에 참례하도록 적극적으로 권하면서 영성체를 통해 받는 놀라운 은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자주 영성체를 하면 우리 영혼은 꿀벌이 꽃향기로 목욕하는 것처럼 사랑의 향기로 목욕합니다”, “이 성사를 멀리하는 사람은 머리를 숙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물이 흘러 넘치는 샘가에서 갈증으로 죽는 사람과 같습니다. 또한 팔을 내밀지 않아서 보물을 앞에 놓고도 가난하게 지내는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가 영성체 후 무엇을 집으로 나르느냐고 묻는다면 하늘나라를 옮긴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신앙으로만 알 수 있는 성체성사의 신비
-조욱현 신부-
성체성사의 신비는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이 접근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신앙은 항상 자극적이고도 선동적인 도전을 받는다. 바로 오늘 복음 내용이 이 점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주님의 제자들까지도 믿기를 거부한다는 것요은 신앙의 파탄을 의미한다: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이것 때문에 요한 복음은 신앙의 명백한 요구조건과 동기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빵의 기적,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심, 가파르나움 회당에서의 담화, 즉 요한 6,1-66을 이끌어 들이고 있는 것이다.
제1독서: 1열왕 19,4-8: 엘리야는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하느님 산에...
‘음식’으로서의 성체성사에 대한 이야기는 제1독서에도 나타나고 있다. 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 450명을 죽인 후(1열왕 18,40) 이세벨 왕비가 그의 생명을 위협하자 엘리야는 남쪽으로 도망을 친다. 그가 생각했던 것은 이스라엘의 순수한 야훼숭배 사상이었는데 그것이 수포로 돌아갔고, 이제는 절망을 하여 주님께 죽여달라고 간청하였다(4절). 그리고 피곤과 허기 때문에 싸리나무 덤불 아래서 잠이 들었다. 그 때 주님의 천사가 그를 흔들어 깨우며 먹으라고 하였다: “그가 깨어보니 머리맡에 불에 달군 돌에 구워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음식을 먹고 또 물도 마셨다. 그러고는 다시 누워 잠이 들었다”(6절). 엘리야는 다시 일어나서 먹고 마시고는 “힘을 얻어 사십 일을 밤낮으로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8절).
엘리야의 이 여정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40년 동안 광야를 헤맬 때 일어났던 빵과 물의 기적들이 새롭게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엘리야는 그렇게 음식을 통하여 힘을 얻고, 당신 백성과 계약을 맺으신(출애 19; 24; 34,10-28) 시나이산으로 간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여정에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음식 즉 주님의 몸과 피로써 양육될 때에 하느님께 이르게 된다.
복음: 요한 6,41-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41절). 이 말씀 때문에 유다인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 대한 모든 것, 즉 부모, 생활환경을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데 있다. 자신들의 체험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한 그 이상의 것은 사실일 수가 없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니 말이 되는가?”(42절). 이런 마음 때문에 빵의 기적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신적인 면도 잊어버리고,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6,14)도 까맣게 잊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받아들이기에 힘든 하느님의 행위와 말씀의 신비를 대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자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겸손되이 순종하는 자세로 듣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며, 어떤 사람은 그 신비에 초대하고 어떤 사람은 거절하는 분이 아니시며, 신앙은 하느님께서 변덕스럽게 주시는 선물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신앙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시다. “모두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45절). 그러나 모두가 다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그 군중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은 기적을 체험하고 직접 그분을 만났지만 하느님 사랑의 신비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제 그 신비를 체험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즉 “듣고” “배운다”면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일 수 있고, 듣기만 하고 배우려하지 않고 논쟁만 하려고 한다면 예수님은 단순히 “요셉의 아들”(42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이 변변치 않은 지성이나 닫혀진 마음 때문에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이 “웅성거린다”는 말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식량과 물이 부족하다고 투덜거렸던 것을 표현하는 것과 같이 사용되었다(참조: 출애 16,2-3; 17,3; 민수 11,1; 14,27; 1고린 10,10). 즉 굳어진 마음 때문에 예수를 믿지 못하고 파멸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을 받지 않음으로써 그들 스스로 구원계획 밖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의 커다란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커다란 유익에 도달하는 길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48절). 이 말씀은 인간들에게 당신 자신을 끊임없이 내어주시는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한 말씀이다. 참으로 유다인들에게는 알아듣고 받아들이기 힘든 지나치게 감상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지성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과 믿음으로 받아들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킬 수 있도록 하지 않는다면 그 신비를 거부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상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될 것이다”(51절). 이 말씀을 듣고 유다인들은 드러나게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예수님의 ‘살’은 연약한 존재이지만 신적 존재에 결합되어 있다. 이 신적 존재에 결합되어 있는 이 살을 인간들에게 먹고 살 수 있도록 주셨다. 그러기에 성체성사를 통해서 강생의 신비가 계속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귀중한 성사인가! “세상은 내 살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것은 ‘세상의 생명’을 위해 그 ‘살’이 바쳐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해 바칠 내 몸이다”(1고린 11,24; 루가 22,19)라는 성체축성의 형식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즉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즉 ‘세상의 생명’을 자기 자신을 봉헌할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체성사의 신비는 또한 수난의 신비의 계속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죽음에 처해진 것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생명의 신비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51절). 그리스도께서는 성체를 통해 우리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신다. 그 생명은 주님의 몸을 계속 먹음으로써 양육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 성체성사를 통하여 강생의 신비와 수난의 신비를 지금 이 순간도 계속하고 계시기 때문에 여기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제2독서: 에페 4,30-5,2: 여러분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일원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이 살아가야 할 “새로운 생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선은 성령께 대한 충실성이다. 그분은 일치의 영이시기 때문에 교회 안에 분열이 있으면 슬퍼하신다(30절).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대로 서로 나누며 또한 용서하는 사랑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32절).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거대한 불꽃을 상기시켜줄 뿐 아니라 항상 처음부터 새롭게 해주는 성사이다. 우리는 이 성사로 참 생명을 얻게된다. 당신 자신을 끊임없이 내어주시는 그 사랑의 성사의 삶을 우리도 실천하며 살아가도록 도움을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서공석 신부-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요한복음서 공동체가 성찬에 대해 명상하는 바를 기록으로 남긴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먼저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이야기 한 다음, 성찬에 대한 오늘의 명상을 예수님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여 하느님에게 가신 후, 신앙인들 앞에 남은 것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하신 말씀과 행위들에 대한 기억과 그들이 이미 행하고 있던 성찬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성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기억을 더듬어 되살려내고 그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들이 살아야 하는 새로운 삶과 새로운 질서를 발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함께 광야를 헤맬 때, 하느님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다.”(출애 16,4)는 고사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 우리는 오늘 제1독서에서 호렙 산으로 향하는 엘리야 예언자를 하느님이 먹이셨다는 열왕기 상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먹이신다는 또 하나의 고사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이 베푸신 만나를 먹고, 힘을 얻어 자유의 땅을 찾아 갈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이 베푸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호렙 산에 이르러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몸이라 불리는 빵, 곧 성찬으로 힘을 얻어 새로운 삶과 새로운 질서를 산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유대인들은 수군거렸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라고 말하며, 그들은 그 말씀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못마땅함이 그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에만 머물지 않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듣고 배우는 사람이 발견할 수 있는 예수님의 참 모습이고, 새로운 삶이며 질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안에 하느님의 일을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성찬을 중심으로 모여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하고, 그것을 실천한 사람들이 새로운 삶과 새로운 질서를 만났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삶과 질서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신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들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삶과 질서를 발견하고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중심으로 한 삶과 질서에서는 우리 자신만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삶과 질서에서는 하느님의 생명이 보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다른 생명들이 보입니다. 그 삶에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질서가 있습니다. 그 질서를 요한복음서는 사랑이라고 지적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서로 사랑하시오”(15,9.17).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하느님의 생명을 산다는 뜻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도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성찬에 참여하면서 그분이 보여주신 실천을 하는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산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죽지 않고 사는 것, 곧 장생불사(長生不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을 실천하며 살다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영원히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신앙공동체가 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실천한 삶은, 예수님과 같이, 현세를 넘어서도 하느님 안에 영원히 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이 중심이 된 세계에서 살고자 합니다.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우리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 합니다. 나 자신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봅니다. 그래서 내 자식, 내 부모, 내 형제자매들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나와 특별한 인연으로 연결되지 않은 사람은 내가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나의 길을 방해하고 내 욕심의 행로를 가로막는 장애물에 불과합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백안시하고, 싫어합니다. 흔히는 신앙생활도 나와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잘 되기 위한 수단이라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까지 이용하겠다는 우리의 이기주의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 그리고 예수님을 기억하여 우리가 행하는 성찬은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한 삶을 벗어나, 하느님을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라는 주제도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읽고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우리 자신만이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인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루가 6,27)는 말씀이 있습니다. 미운 사람도 사랑하여 자기를 위한 공적을 쌓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으로 발생한 질서에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지극히 작은 내 형제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흐르는 곳에는 우리 눈에 작은 사람도 예수님과 같이 소중히 보입니다.
우리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삶에는 주변에 죽음이 발생합니다. 대자연도 죽고 우리의 이웃도 죽습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편리대로 살다 보니 오늘 대자연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강, 새들이 살지 못하는 하늘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바빠서 이웃을 바라볼 여유도 없는 우리의 마음에 이웃은 오래 전에 이미 지워졌습니다. 잘 있는 이웃을 찾아다녀서 귀찮게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알게 된 질서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외롭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우리의 사랑이 흐른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성찬에서 빵을 예수님의 살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의 삶이 보여 준 그 사랑을 우리의 실천 안에도 흐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내가 발산하는 것이 생명을 위한 것인지 생명이 억압당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이 흐르면 우리의 동작도 그것으로 채색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행보에 있어야 하는 사랑입니다. 부족한 그대로, 못난 그대로 우리는 사랑하며 하느님에게로 갑니다.
매일 마지막 미사처럼
- 양승국 신부 -
함께 살아가는 예비 수사님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 교육하는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저도 잘 안되면서 자주 강조하다보니 때로 속보이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우리 살레시오 회원들은 하루 온 종일 아이들 사이에서 숨 가쁘게 움직여야 하는 활동수도자들입니다. 영성생활에서 특별한 그 무엇을 찾지 마십시오. 짜릿한 그 무엇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대신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 안에 들어있는 값진 보화를 찾으십시오. 미사 때 제발 졸지 마십시오. 금쪽같은 시간 제발 허송세월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해서든 깨어있으십시오. 집중하고 몰입하십시오. 몸과 마음, 눈과 귀, 외적 태도 등 모든 기능을 총동원해서 미사에 푹 잠겨 드십시오. 미사의 동작 하나 하나, 경문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의미에 온 신경을 집중하십시오.
매일의 성체성사야말로 기적 중 기적이요, 표징 중 표징입니다. 매일 되풀이되는 이 성사는 우리를 순간순간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미사는 매일 우리에게 공급할 하늘에서 내려오는 영원한 생명의 빵을 굽는 가장 은혜로운 도구입니다.
매일의 미사, 그것보다 더 큰 은총은 없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매일 되풀이되는 홍해의 기적을 체험해야 합니다. 죄와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로 건너가는 파스카 신비를 온몸으로 느껴야 합니다.
부디 타성에 젖은 얼굴로, 귀찮은 얼굴로, 짜증나는 얼굴로, 그저 주어진 의무이니 온다는 얼굴로 미사에 오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순간인 만큼 최대한 기쁜 얼굴로,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감사와 감동의 마음으로, 깨어있는 자세로 미사에 오십시오."
주님께서 바라시는 영적생활,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기쁜 마음으로 성체성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영원한 생명의 빵을 모시는 것입니다.
때로 마음의 어둠이나 슬픔, 나약함, 방종한 습관 등으로 괴로울 때도 있겠지요. 그럴 때 더욱 생명의 빵인 성체가 필요합니다. 모든 어두운 감정들을 감추지 말고 솔직히 그분께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로 나아가는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 우리가 믿는 바대로 우리를 짐스럽게 했던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매일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언젠가 병세가 꽤 위중한 환자에게 병자성사를 거행하려 한 병실을 찾았습니다. 그날따라 교통체증이 무척 심했고, 또 길을 잘못 찾아 헤매다가 많이 늦었지요. 뿐만 아니라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어서 병실에 도착하자마자 속전속결로 병자성사를 집전했습니다. 그리고 재빠르게 영성체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엄청 바쁘고 여유 없는, 그래서 무척 성의 없어 보이는 저에 비해 환자 모습은 정말 진지했습니다. 엄숙하다 못해 거룩해보였습니다. 마치 수억원이나 나가는 진귀한 보물이라도 받듯이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정성껏 성체를 손에 받으십니다. 그리고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예식을 행하듯이 진지하게 성체를 영하셨습니다. 이어서 눈을 감고 깊은 침묵과 함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일분, 이분, 삼분, 사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대충 성사를 거행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맞아, 내게 부족한 것이 바로 저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정성, 마음, 진지함이 결여된 미사, 부끄럽게 드린 지난 미사들이 떠올라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침묵 가운데 진심으로 그 환자를 위해, 그리고 부족한 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매일 우리의 밥이 돼 오시는 주님, 당신 성체를 통해 매일 우리를 구원하시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기적을 찾아, 특별한 그 무엇을 찾아 이곳 저곳 기웃거리지만 사실 매일 거행되는 사랑의 성체성사 보다 더 큰 기적은 없음을 우리가 알게 하십시오.
우리 부족한 죄인들을 향한 극진한 사랑이 되풀이되는 매일의 성체성사를 그저 해치워야만 하는 숙제처럼 여기는 우리를 용서하십시오. 우리가 매일 드리는 미사가 마치 마지막 미사이듯 정성을 다하게 도와주십시오. 매일 봉헌되는 미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가장 큰 선물임을 알게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거룩한 생명의 신비
-홍승모 미카엘 신부-
하나의 빵이 그리스도의 생명의 빵이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성체성사를 언어에 비유해 가르쳐 준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하나의 울림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말(言)이 되고, 말이 생각이 되고, 생각이 진리가 되듯이, 성체성사에서 드러나는 빵의 표지도 빵이라는 본질에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신비로 변화되어 갑니다.” 이 말씀은 성체성사의 신비뿐 아니라, 신앙인이 생명의 빵으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 깨우쳐 주신다고 봅니다. 사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말이 모두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말은 진리를 거슬러 상처와 불신과 미움을 낳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을 별다른 의미 없이 습관적으로 받아 모신다면, 그리스도의 신비로 결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곧 주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으로 변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구원받기에 과연 충분한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신앙생활의 변화에 대해 왜 그렇게 간절히 호소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1-32). 에페소 공동체인들도 주님의 성찬례에 참여하던 신앙인들이였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느님께 당신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간절히 호소합니다(에페 5,1-2). 그 이유는 생명의 빵을 먹는다는 의미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생애를 따른다는 우리의 결정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른 결과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응답인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주님의 거룩한 생명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요한 6,47-50). 광야의 여정에서 주님의 구원의 손길을 체험하고도 등을 돌렸던 백성들은 만나를 먹고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주님을 원망하고 달아났던 예언자 엘리야를 보십시오.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음식으로 그는 무엇을 했습니까? 결국 엘리야는 그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주님을 만나기 위해 다시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갔습니다(1열왕 19,8).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의미는 생명을 향한 창조적 여정을 전제합니다. 우리 내면 저 깊은 곳에 계시는 주님의 현존이 우리를 새로운 인간으로 변모하도록 이끄신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한 응답이 “아멘”입니다. “아멘”은 빵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차원을 넘어서, 바로 그리스도처럼 살아가겠다는 응답인 것입니다.
성체, 이 세상에서 체험하는 하느님
- 유영봉 몬시뇰신부-
묵상길잡이; 하느님을 보고 만지고 느껴서 알 수는 없다. 하느님은 감각적인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믿음을 통해서만 하느님께 갈 수 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우리가 성체 안에 주님의 살아 계심을 믿을 때 참 생명을 발견하게 된다.
1. 감각 저 건너편에 계신 분
오늘 복음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 사함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며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다. 못마땅해하며 웅성거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요한6,46-47) 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위한 믿음을 강조하신다.
모든 종교는 하나같이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神)을 감각으로 포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주변에는 마치 하느님의 손을 잡고 인생의 길을 거닐기라도 하듯이, 하느님의 품속에라도 있는 듯이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사는 이들이 있다. 하느님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바친 수많은 순교자들이나, 철저한 헌신으로 자신을 송두리째 이웃사랑을 위해 내놓으신 분들은 마치 하느님을 눈으로 보기라도 하듯이 철저히 그분과의 일치 속에 사셨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강하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감각으로 포착할 수 없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길은 믿음의 길밖에 없다.
2. 성체성사는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다.
예수님은 왜 빵의 모습으로, 무한히 자신을 낮춘 몸짓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가? 사랑의 가장 큰 특성은 '함께 나눔'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려 하신다. 만일 신(神)과 신(神)사이라면 서로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니까 굳이 어떤 표현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말을 하든지, 몸짓을 하든지, 선물을 건네든지 어떤 표현을 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마음을 알지를 못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나누며 우리와 함께 하고 싶어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보이는 표현이 없으면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성체성사는 당신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내려오신 사랑, 수많은 기적으로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시고 우리 중의 하나가 되어 주신 사랑,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당신을 제물로 바친 사랑, 이 모든 사랑의 연장선상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몸과 피를,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시는 것이다. 성체성사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시는 성사이다.
3. 어떻게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해야 하는가?
우리는 미사 때마다 성체를 받아 모신다. 그 때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는 감동이 있는가?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 성당에 나오는 신자가 낚시 간다고 근 한달 이나 주일미사를 하지 않았다. 그러고서는 어쩌다 주일 미사에 가서 고해성사도 받지 않고 그냥 영성체 하려 나가려하기에, 부인은 남편을 꼬집으며 못나가게 하였다. 그 때 그 남편이 부인의 손을 뿌리치면서“나도 헌금했는데, 하나 받아먹으면 안되나?" 하였다. 신자들 중에는 이렇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성체를 모셔야하는지 전혀 모른 채, 습관적으로 영성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끔 영성체 하러 나오는 그 순간에도 장난치고 킥킥거리는 학생들을 보면 마음이 착잡하다.
예수님은 분명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6,51)하셨다. 나는 성체 안에 참으로 예수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는가?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께서는 성체성사로 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너무나 깊이 느껴 성체를 모실 때마다 가슴이 불로 지지듯 뜨거워 견디기 어려웠다고 하였다.
성체 안에 참으로 주님께서 현존하심을 믿는다면, 그 분이 내 안에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경험하는 무력감과 두려움과 불안을 깨끗이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분과 함께 하는 삶 안에서 참 생명을 체험할 것이다. 오늘 미사 때 성체를 받아 모시고 영성체 후 묵상 때, 이렇듯 부족한 나를 찾아주심에 깊이 감사 드리고, 우리의 결심을 봉헌하며, 우리의 걱정과 계획도 그분께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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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