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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요한 6,51-58)
Whoever eats my flesh and drinks my blood
has eternal life,
and I will raise him on the last day.
For my flesh is true food,
and my blood is true drink.
말씀의 초대
누구나 지혜롭게 살기를 바란다. 노력하면 지혜를 얻는 길은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하지만 진정한 지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다. 쉬운 이 길을 제쳐 두고 엉뚱한 곳에서 지혜를 찾고 있다(제1독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르다. 시간을 잘 활용한다. 술에 취하거나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는다. 언제나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간다. 그리고 매사에 감사한다. 바오로 사도는 삶의 기초가 튼튼해야 지혜롭게 살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제2독서).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보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그분의 정체를 모르면, 말씀도 이해할 수 없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성체 안에 남겨 주셨다. 은혜로운 성사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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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너무나 직설적인 표현입니다. 성경 말씀이지만 거부감은 있습니다. 성체 신심을 알고 있는 우리가 이런 느낌을 가진다면,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반발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유다인들은 즉각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어떠한지요? 우리 역시 상식과 이해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인지요?
성체는 상식이 아닙니다. 성체는 신비입니다. 인간의 지식을 뛰어넘는 하늘의 행동입니다. 우리는 다만 영성체를 통해 접근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접근은 하느님의 힘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영성체는 하느님을 만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만남을 강조하시고자 ‘살과 피를 섞는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성체를 모셨습니다. 그때마다 살과 피를 섞는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셨더라면 ‘그만큼 살아 있는’ 만남이 되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모르면 성체는 다만 작은 밀떡으로 다가올 뿐입니다. 모르면 ‘하느님의 힘’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분께서는 ‘살과 피’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적극적으로 성체를 모시라는 당부입니다. 영성체는 미래를 ‘주관하시는 분’을 모시는 행위입니다.
☆☆☆
유다인은 기적을 찾습니다. 그리스인은 지혜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찾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그리스인들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운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잃는다면 도를 깨치는 일, 온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일, 만물박사가 되는 일, 온 세상을 차지하는 일, 이 모두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일찍이 시편 저자는 노래하였습니다. 오직 한 가지 소원은 하느님 장막 안에 들어가는 일이라고.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어리석게도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모두 내어놓을 때 영원한 삶있다.
-배광하신부-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참으로 많은 분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고 세상이 온통 캄캄한 암흑의 절벽 같다는 아픔을 쏟아냅니다. 어떤 위로의 말도 통하지 않을 때 더욱 답답한 가슴을 쓸어냅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끝까지 희망 있는 세상을 만들려는 장한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훌륭한 여인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에 대한 끝없는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차 대학에 들어가서도 사회의 변혁과 신앙, 인간 본질의 문제로 늘 고민하며 아파했었다고 합니다.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쓰린 가슴으로 살았고, 군사독재 시절에는 어두운 곳에서 매도 많이 맞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작은 노력으로라도 희망을 일구어 보려는 장하고 아픈 꿈을 뒤로 하고 세상을 떠난 그녀의 마지막 일기엔 다음과 같은 글이 남겨 있었다고 합니다.
“지복이로다. 지복이로다.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모든 예수님이 이 내 한 몸 위해 온 마음을 내니 모든 산 사람 중에 이 한 몸 지복이로다. 엎드려 경배하노니 모든 우주의 이치로 그 베품에 곱절 더하여 받으소서. 달이 차면 이울고 이우면 다시 차나니, 생과 사도 이와 같아 마음 한 자락 봄바람에 거칠 것이 없어라. 보름달 빛 타고 계곡물 흘러 어두운 밤을 씻어 내리도다.”
실로 가슴 아픈 글이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생을 살다 천국 본향의 아버지 집으로 떠난 여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승에서의 삶에 죽음은 있을지라도 신앙인의 삶에는 죽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머물던 자리의 이동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와 같은 믿음의 확신이 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슬프고 짧은 생을 아파하지만은 않습니다. 더구나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더욱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갖게 만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4).
실로 우리는 지존하신 하느님의 몸과 피를 이 지상에서부터 맛보았던 복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를 통하여 감미로운 그 맛을 이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생명주는 살아있는 빵이여, 제 영혼 당신으로 살아가고 언제나 그 단맛을 느끼게 하소서.”
▤깨달아라
이탈리아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세계 문학사의 시성으로 대접 받는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는 그의 대표적 작품인 「신곡」에서 이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쓸쓸한 벌판을 지나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기 위해 걸었네, 하늘은 영원히 빛나는 아름다운 별들을 보여주며 우리 영혼을 감싸고 있건만 우리의 눈은 오직 지상의 것에만 쏠려 있었으니, 오랜 세월동안 눈물로 간구해 온 평화, 기나긴 금단을 풀고 천국 문을 여는 평화, 그 평화를 지상에 알리러 온 천사가 거기 눈앞에 살아있는 것처럼 새겨져 있었네.”
단테의 말처럼 우리의 고통은 어쩌면 온통 지상의 것들에만 목표와 눈을 돌렸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행복에 이르는 참 평화의 길을 분명히 보여주고 계셨건만 세상 집착과 욕심이 우리의 눈을 가려 천국의 문을 볼 수 없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때문에 오늘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주님께 듣는 우리 모두에게 사도 성 바오로는 다시금 이야기 합니다.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에페 5,15-17).
진정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우리는 신앙의 삶 안에서 너무도 깊이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감각의 맛에만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는데, 그것만을 찾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바로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는 삶, 예수님처럼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살 때 영원한 생명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의 살과 피를 온전히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 가르침을 오늘 예수님과 사도 성 바오로는 ‘깨달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과 육적인 것만을 쫓다 보면 그 길은 고통이며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살과 피를 모시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게 되면 영원한 생명과 기쁨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같은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살고 계시는 앞서 가신 성인 성녀의 삶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고 그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 잠언의 현자의 가르침을 따른 것입니다. “어리석음을 버리고 살아라. 예지의 길을 걸어라”(잠언 9,6).
성체 안에 사는 사람들"
-이기양신부-
대부분 신자들과는 달리 가끔은 믿음이 부족한 신자를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체 안에 예수님이 정말 실재하시는 것일까? 의심쩍어하고 자신의 불신앙에 괴로워합니다. 이들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유다인들은 이렇게 서로 따집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지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
예수님께서는 성체가 당신의 몸임을 명명백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신자들은 초대 교회 때부터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것을 확신하며 모셔왔습니다. 그러므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는 말씀처럼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도 없고 또 거기에서 나오는 힘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프랑스 혁명 때 일입니다. 혁명이 일어나자 여기저기에서 많은 범죄가 덩달아 기승을 부렸는데, 1793년 폭풍이 사납게 몰아치는 어느 날 한 프랑스 군대가 시골 어느 작은 성당으로 난입을 했습니다. 들고 있던 무기와 여러 가지 짐꾸러미들을 성당 여기저기에 내동댕이치고 군인들은 마치 그 곳이 술집이나 되는 것처럼 마음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나가서 술 좀 가져와라."
한 군인이 부하에게 명령을 하자 옆에 있던 군인도 소리 질렀습니다.
"잔도 가져와."
어디서 났는지 큰 포도주 통이 하나 들어오자 잔을 가져오라고 소리쳤던 군인이 벌떡 일어나서 성당 제단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감실문을 쳐부수고 성합을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안에 담겨있던 성체를 모조리 바닥에 쏟아버리고 포도주 통으로 가서 성합에 술을 가득 채우려고 허리를 숙였습니다.
그러나 그 군인은 술을 채우기도 전에 갑자기 쓰러졌고 그 길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갑작스런 일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달려왔지요. 그 군인은 뻣뻣해진 손으로 성합을 꼭 움켜쥔 채 죽어 있었습니다. 다른 군인들이 그의 손에서 성합을 빼내려고 애썼지만 빼낼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힘을 써도 안 되자 할 수 없이 그 성당 신부를 잡아왔고 신부가 와서야 죽은 군인 손에서 성합을 빼낼 수가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본 군인들은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그 길로 성당을 빠져나와 도망을 치고 말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성체를 모독하는 이런 행동은 하느님 진노를 살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반면에 예수님께서 성체 안에 계심을 믿고 확신하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살고 그에게는 놀라운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더 데레사가 우리나라에 오셨을 때 일입니다. 그 때 마더 데레사는 무척 연로하셨지요. 연세 많으신 분이 그 노구에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사람들을 만나고 가난한 곳을 방문하는 등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하러 다녔습니다. 이를 지켜본 기자가 놀라서 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십니까? 지치지도 않으십니까?"
마더 데레사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힘으로 삽니다. 아침 미사 때 성체를 모시고 하느님의 힘으로 사는데 제가 어찌 지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그 힘으로 살고 그 분의 삶을 드러냅니다. 우리 안에 오시는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그분의 마음으로 사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서로 밥이 되어 주십시오
-안병철신부-
오 늘의 복음을 묵상하면서 김수환 추기경님께서“서
로 밥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올림픽이 끝난 다음 해인 1989년, 우리나라에서는 참으
로 은혜롭게도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가 열리게 되었습니
다. 세계 도처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모여들었고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몸소 성체 대회를 주관하셨습니다.
세계 성체 대회를 준비하고 지내면서 김수환 추기경님께
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성체성사의 의미를 실질적으로 살
아가는 것이라고 판단하셨던 것 같습니다. 추기경님께서
는 우리의 고유한 문화적인 토양 위에서 성체성사를 살아
갈 수 있는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기 위해서“서로 밥
이 되어 주십시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사회를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의 공간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믿는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서로에게 밥이 되어주는 성체
성사적인 삶을 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셨던 것입니
다. 추기경님의 말씀은 한마디로 우리 사회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토대로 성체성사의 의미를 살아가려는 신앙인들
의 강력한 몸짓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하신 것이
라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을 유지
해 갈 수 있도록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주셨지만 오늘 복
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 실존을 생명의 양식
으로 내어주십니다.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바
로 그분께서 주시는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 이들은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분 안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무한한 사랑의 성사에
초대받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듣게 되는‘생명’이나‘머물다’또는‘다
시 살리다’라는 용어는 우리가 향유하게 될 구원의 유익을
설명해 주는 표현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체성사는 우
리의 생명을 위해 예수님께서 몸소 내어주시는 그분의 살
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은총의 순간이요, 기쁨의 장소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눔의 심오한 신비가 극명하게 표출되
는 성체성사 안에서 신앙인들은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고
있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참 하느님이시요,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와 만남을 이루는 특별한 자리입니다. 믿는 이들
은 성체성사 안에서 그분을 만남으로써 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주신 그분의 사랑을 전해야 할 필요성과 당위성을 깨
달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신앙인은 그리스
도로부터 살과 피로 생명을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
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인임을 자처하고는 있지만 과연 자
신을 온전히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진정
으로 만나고 있는지요?
믿는 이들은 성체성사 안에서 어떤 식으로 사랑을 실천
해야 할지를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에 기초한
나눔의 실천적인 삶은 성체성사의 의미를 실질적으로 살
아가는데서 구현됩니다. 자기의 배 속만을 채우려 하지 말
고 오히려 밥이 되어주는 삶을 살라 하신 추기경님의 말씀
이 이렇게 강하게 귓전을 울리는 것이 과연 저 혼자만의 느
낌일까요?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강선남-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문에 싸여 불평한 것처럼(6, 41.52), 이제 ‘제자들’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불평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빵’이야기에서 ‘군중’이었던 이들이 그다음에는 ‘유다인들’로 그리고 이제 ‘제자들’로 점점 몰이해와 불평의 주체가 구체적으로 제한되고 강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듣기에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60절ㄴ) 그들의 불평은 예수님께 대한 ‘비토(거부)’처럼 들립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영원한 ‘생명의 빵’이라고 하신 말씀과 당신의 살과 피를 먹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가르침(6, 26 ‐ 58참조)을 제자들도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 안에서 부글거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투덜거림을 아시고 다음과 같이 물으시는 말씀에서, 그들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61절ㄴ) 이 구절을 직역하면 ‘이것이 너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느냐?’입니다. 곧 그들에게 ‘스캔들’(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어 그것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어서 물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62절) 그리스어 원문에서 불완전한 문장으로 끝나는 이 말은, 너희가 그런 일을 본다면 지금 마음속에 가진 의문이나 당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아니면 지금까지 하신 말씀에 그러한 반응을 보인다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씀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동고동락하며 가까이서 따르던 제자들조차 예수님께서 아버지한테서 오신 분인 것을 믿을 수 없다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돌아가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살’이 되신 ‘말씀’은 부활하신 뒤에 아버지께로 올라가실 것입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요한 20, 17)
제자들의 믿지 못함 앞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63절)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 또는 예수님에게서 오는) ‘영’으로 다시 나기를 원하지 않고 ‘육’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육(살)’은 물질로서 제한된 가능성에 갇혀 있는 인간을 뜻합니다. 빛이 아닌 ‘육’으로서의 인간은 혼자 힘으로는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도 못합니다.(요한 6, 36) 그러나 빛으로 표현되는 ‘영’은 사람을 살게 하는 생명의 힘으로서, 인간에게 빛을 비추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을 알게 하고 받아들이도록 해줍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도움, 곧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64절ㄱ) 그들은 자기들의 ‘육’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지 깨닫지 못한 채 그분 곁을 떠납니다. ‘하느님 나라 건설’대열에서 낙오되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많은 제자가 길을 바꾸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7절) 이 물음은 그들에게 선택을 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이적들을 베풀어 일상적인 지상생활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왕’을 찾아 떠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내주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예수님을 계속 따를 것인지 두 갈래 길에서의 선택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질문에 베드로가 열두 제자를 대표해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68 ‐ 69절) 베드로는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고 간 여호수아가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말합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민족들에게 하신 것을 다 보았다. 그러니 이제 너희는 주님을 경외하며 그분을 온전하고 진실하게 섬겨라.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여호 23, 3; 24, 14‐15) 그러자 백성이 그에게 대답합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24, 16) 자신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신 하느님께 대한 변치 않는 믿음을 다짐했던 그들이었듯이, 이제 베드로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는 예수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비록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신앙고백입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불가분의 결속 관계를 표현합니다(요한 3, 2; 5, 19; 10, 30).
예수님은 하느님에 의해 거룩하게 되어 지상으로 파견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하였다.”(10, 36)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아니 선언하고 있습니다. “당신 말고는 어느 누구의 뒤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신 말씀과 당신 일을 모두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순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진리를 두고 다른 곳에서 방황하지 않고 당신을 따르는 온전한 믿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머무르다’와 ‘조종하다’
-유원진 신부-
저는 때로 학생들에게 사진 찍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처음 만져보는
커다란 렌즈의 카메라에 학생들은 겁을 먹기도 하지만, 이내 곧 적응해서
제법 그럴듯한 ‘작품’을 찍어내기도 합니다.
가끔은 제 비싼 카메라를 망가뜨리지나 않을까 걱정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진땀을 흘리며 만들어낸 멋진 구도를 보노라면 제 마음까지
흐뭇해집니다. 옆에서 잔소리하고 싶고, 더 잘 찍을 수 있게 간섭도 하고 싶지만
학생들을 ‘조종’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저 옆에서 ‘머물러’줍니다.
학생들은 저의 자세한 가르침보다 곁에 머물러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다만 저의 도움이 필요해서 물어오는 것을 질책하지 않고 그 학생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만 가르쳐줍니다. 그것이 ‘조종’과 ‘머무름’의 차이겠지요.
예수님은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이것은 ‘조종’과 달라서
갑작스럽게 우리의 행동이 달라지거나 쉽게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할 때면 언제나 든든히, 그리고 고요히 가르쳐주십니다.
이것이 ‘머무름’입니다. 간섭하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는 기다림,
필요로 할 때에 꼭 받아들일 만큼만 제공해주는 소리 없는 가르침.
예수님은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전삼용신부-
옆에 개신교 신학교를 둔 서울 어느 한 본당 신부님의 하소연입니다.
개신교 신학생들이 몰래 미사에 참석하여 성체를 (그들 말대로) 먹어 본다든가, 쪼개 보다든가 아니면 가다가 길에 버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큰 성당이기에 일일이 신원조회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아예 성당 입구에 “개신교 신학생 출입금지”라고 써놓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신학교의 목사 교수님에게 전화가 와서 왜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냐며 한 소리 들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성체에 대해 설명하려 해도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살과 피를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에 말이 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이정도이니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유다인들이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하며 모두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갔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의 신비를 거행하고 나서,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성을 넘어섭니다.
마더 데레사가 한국에 왔을 때입니다. 그 분이 연세가 꽤 있고 몸이 약해진 상태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해 위로해주기 위해서 쉴 틈도 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한 기자가 그렇게 쉬지도 않으시는데도 피곤하시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침에 영한 성체의 힘으로 살아요. 내가 힘을 빼고 그 분의 힘으로 사는데 내가 힘들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과연 기자는 마더 데레사의 대답을 이해했을까요?
우리 모두는 살아갈 힘을 어디에선가 얻어야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나 쾌락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인생에서의 성공을 향한 강한 집념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고상하고 가치 있는 것은 사랑에서 힘을 얻는 것입니다.
“내가 너 때문에 산다.”라는 말을 하듯이, 남편이 스트레스 받는 직장에 오늘도 출근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이 있기 때문이고 아내도 가정에서의 어려운 일들을 해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랑이 줄어들면 같은 일을 하더라도 이전보다 훨씬 힘들어 질 것은 뻔한 일입니다. 사랑이 없어지면서 결국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데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결국 우울증 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이 있다고 하여 과연 우리 삶에 충분한 에너지를 줄 수 있을까요?
한번은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좋아했던 여자와 결혼을 하여 한 집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밥상 차려주다 말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짜증을 냅니다. 저는 그 여자의 의외의 성격에 놀라고 실망합니다. 저는 결혼을 후회하게 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하며 고민하다가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리고 제 자신이 그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고 사제라는 사실에 큰 안도의 한숨과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전에는 그렇게도 원했던 삶이었지만 막상 꿈을 꾸어보니 그만한 악몽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을 삶의 의미로 생각하고 사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이 그렇게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에 버스가 낭떠러지로 굴러서 모두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며칠 뒤 뉴스에 그 사고로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다가 같은 장소에서 남편도 떨어져 자살했다는 소식이 나왔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아내가 삶의 전부였고 아내가 없이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살한 그 사람은 지옥에 갔을 확률이 큽니다. 자신을 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 어리석은 이야기입니다. 아내가 죽었다고 자신의 영혼까지 포기해야 할 필요가 없고 아내도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을 삶의 의미로 사랑한다면 그 세상 것이 사라지면 삶의 의미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삼손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잉태될 때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었습니다. 자신은 물론 부모님도 술과 방탕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되었고 머리도 깎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삼손이 그렇게 하느님께 바쳐져서 하느님을 사랑하며 살 때는 수천수만 명의 불레셋 병사들이 몰려왔어도 그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영광이었고 하느님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삶의 의미를 두지 않고 이스라엘의 적인 불레셋의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완전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데릴라라고 하는 한 여인을 위해서 살게 되었고 결국에는 머리카락까지 깎여버리게 되고 눈까지 뽑히는 굴욕과 아픔을 당하면서 하느님께, 혹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수치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완전하거나 영원할 수 없습니다. 완전하시고 영원한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 삶의 의미를 두지 않고 변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면 그것이 흔들릴 때면 자신도 따라서 흔들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볼 성서 구절은 이것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삶의 의미였고 이유였습니다. 예수님만큼 세상에서 고통을 받고 살았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고통일지라도 세상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느님께서 받으시는 고통과 인간이 어쩔 수 없어 당하는 고통과는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그 큰 고통을 겪어내시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사실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요? 이미 말씀드렸듯이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삶의 기쁨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고통만을 원하셨지만 그 고통을 당하면서도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행복해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모든 희생을 마다하지 않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그것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것으로 모든 보상을 받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하게 된다면 상상할 수 없는 삶의 에너지가 생깁니다. 예수님 혼자만을 위했다면 절대 십자가를 지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계셨고 그 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실 수 있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만큼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할 이유와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인식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바로 세례 때 성령님을 보내시는 것을 보고 아셨습니다. 성령님은 사랑 자체입니다. 즉 하느님의 본질이고 전부인 사랑을 운반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을 보내셨다는 뜻은 당신의 모든 것을 아들에게 주셨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주는 것이니 완전히 사랑하신다는 뜻이고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하여 예수님도 목숨을 바치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성체입니다. 당신의 전부인 살과 피를 심장에서 찢어 내시어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믿는 만큼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고 그 분을 위해 살게 되고 그만큼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삶"
-이수철신부-
지혜로운 삶을 추구하는 이들은 아름답습니다.
예전, 무수한 이들이 삶의 지혜를 얻고자 사막의 수도승들을 찾았습니다.
성경의 지혜문학에 속하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지혜서, 집회서 모두가
풍부한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지혜는 영혼의 꽃과 같고 내면의 빛과 같습니다.
성당 안 아름다운 꽃처럼 영혼의 꽃과 같은 지혜요,
외모로 들어나는 은은한 지혜의 빛입니다.
그러니 지혜의 꽃이, 지혜의 빛이 사라지면
그 인생 얼마나 삭막하고 어둡겠는지요.
진정한 아름다움은 지혜의 아름다움임을 깨닫습니다.
아무리 잘난 외모도 지혜가 없다면
향기 없는 꽃처럼 얼마못가 실증을 느낄 것입니다.
지혜를 깨우쳐주는 교육이 참으로 절실한 시대입니다.
화요일 3시경 마다 반복하여 듣는 잠언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지혜를 찾으면 얼마나 행복하랴!
슬기를 얻으면 얼마나 행복하랴!
지혜를 얻는 것이 은보다 값있고 황금보다 유익하다.
지혜는 붉은 산호보다도 값진 것,
네가 가진 어느 것도 그만큼 값지지는 못하다.”(잠언3,13-15).
이런 지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깨달음의 은총을 통해 체득되는 이런 지혜는
아무리 거금을 주고도 살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지혜를 얻어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지혜로운 삶의 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첫째, 끊임없이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추구한다는 것은
바로 지혜 자체이신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을 때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지혜의 선물에 단순한 삶입니다.
이 길 말고 참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지혜 자체이신 하느님 태양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지와 탐욕, 교만입니다.
하느님을 찾을 때 비로소
무지와 탐욕, 교만의 구름은 걷혀
무욕과 순수, 겸손의 지혜로운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진정 아름다운 영혼의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제1독서 잠언을 통해
우리 모두를 당신 지혜의 식탁에 초대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이는 누구나 이리로 들어와라!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
어리석음을 버리고 살아라.
예지의 길을 걸어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주님의 성체와 성혈, 말씀을 모시는 것이 지혜를 얻는 첩경입니다.
정말 정성을 다해 주님의 식탁에 부지런히 참여하여
주님의 말씀과 성체성혈을 모실 때 지혜로운 삶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른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자주 성체성사에 참여하여
지혜자체이신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하나 되어 살 때
비로소 지혜로운 삶이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을 실감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이 은혜로운 미사를 통해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있는 빵이신 주님을 모셔야
영원한 생명에 지혜로운 삶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둘째, 끊임없이 주님을 찬양하는 삶입니다.
주님을 찬양할 때
저절로 지혜자체이신 주님께 들어 높여져 지혜로운 삶입니다.
이래야 세상 유혹에 빠져 세상 것들에 중독되지 않습니다.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몸과 마음이 무너져 폐인 되는 이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망가지고 무너지기는 쉬워도
다시 세우기는 어려운 게 우리의 마음과 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참으로 적절합니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바로 우리 수도공동체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찬양할 때 성령 충만한 삶에 샘솟는 지혜입니다.
뭔가 취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세상이요 제일 취하기 쉬운 게 술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술 소비량이 많은 게 한국이라 합니다.
술에 취해 살 것이 아니라
주님께, 성령께 취하여 산다면 얼마나 맑고 향기로운 삶이겠는지요.
우리의 참 비전이자, 희망이신 하느님을 잃어버리면
손쉬운 세상 것들에 취해 살 수 뿐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찬양할 때 희망 자체이신 주님을 만납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이 참 좋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주님 맛으로, 주님을 찬미하는 기쁨으로 살아야
영육의 건강이요 참 행복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무슨 맛으로, 무슨 기쁨으로 살아가십니까?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는 시간이자
세상 것들의 중독에서 해독되는 치유와 구원, 정화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셋째, 시간을 잘 사용하는 삶입니다.
시간을 잘 쓰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시간 낭비도 큰 죄입니다.
시간을 얼마나 알뜰히 사용하시는지요.
쓰레기로 나가는 시간은 없습니까?
요즘 제가 제 집무실에서 또 수도원에서 나가는 쓰레기들을 볼 때 마다
참 착잡해지는 심정입니다.
세월과 비례하여 나가는 쓰레기도 점점 많아집니다.
순간 터져 나온 말입니다.
‘쓰레기가 적을수록 잘 사는 삶이다.’
시간, 장소, 물건들,
얼마나 함부로 사용하고 버리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인지요.
부지런하고 단순하고 검소한 삶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주님의 뜻을 깨달아
시간 낭비하지 않고 부지런히 검소하게 사는 자가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이다.’ 라는 분도 성인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한가한 틈을 교묘히 파고드는 악마의 온갖 유혹들입니다.
누구나 공평하게 하루 스물 네 시간의 시간을 선물로 받고 있는 우리들이요, 너나할 것 없이 바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루 삶의 끝이 공허로 가득하다면
낭비한 시간이 많다는 증거요 잠자리도 편안치 않을 것입니다.
이래서 저는 시간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각자의 삶의 환경에 적절한 일과표에 따라
규칙적 생활을 할 것을 많이 강조합니다.
과연 시간을 잘 사용하고 있는지,
바쁘게 산다하지만
온통 쓰레기로 버려지는 시간은 아닌지 자주 성찰해 봐야 하겠습니다.
누구나 어리석은 삶이 아닌 지혜로운 삶을 바랄 것입니다.
지혜로운 삶일 때 맑고 향기로운 아름다운 삶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추구할 때,
끊임없이 주님을 찬양할 때,
시간을 잘 활용할 때 비로소 지혜로운 삶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마음을 다해 당신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더불어 좋은 지혜를 선사하십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시편130,7).
아멘
새벽을 열며
얼마 전, 신문 사이에 전단지 한 장이 끼워 있더군요. 가전제품 전단지였는데, 그 중에서 세탁기 이름에서 눈길이 갔습니다. 글쎄 그 세탁기 이름이 ‘드림’입니다. 즉, 드림 세탁기라고 적혀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모두가 *** 드림 세탁기라고 이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꿈의 세탁기’라는 이름이 좋기는 하지만 조금 촌스럽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모델인가 하고서 자세히 보려는 순간, 어처구니없는 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글씨를 잘못 본 것이었지요. 드림 세탁기가 아니라, 드럼 세탁기군요.
이런 착각은 여러분도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살인 미수’를 ‘살인 미소’로 보았다고 하고요, 또한 ‘님의 침묵’을 ‘남의 침묵’이라고 읽어서 웃음바다가 된 적도 있습니다. 단지 한 획의 차이인데도 불구하고, 그 뜻이 엉뚱하게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이 한 획의 차이로 엉뚱한 뜻으로 바뀌는 것처럼, 별 것도 아닌 아주 사소한 것들로 인해서 우리들의 삶 안에 얼마나 많은 오해와 실수가 있었나요?
어쩌면 이천년 전의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지요. 분명히 하느님의 아드님이고,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라는 정답을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하면서 다투고 있지요.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통해서 어떤 의미로 말씀하셨는지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도 그렇지는 않을까요? 생명의 빵으로써, 즉 우리를 구원하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신데, 단지 지금 이 순간의 위기만을 모면하게 하는 분 정도로만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내가 힘들면 주님을 찾고,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우리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어떻게든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서 힘을 써주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충신하신 주님에 비해서 과연 얼마나 충실했나요? 주님께서 그토록 힘주어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나요?
이제는 주님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이해를 위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사랑의 행동을…….
참, 오늘부터 저는 여름휴가를 떠납니다. 오늘 11시 미사를 마치고서 곧바로 짐을 들고 여행을 떠날 예정입니다. 따라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은 없겠습니다. 또한 인터넷 방송도 일주일간은 쉬겠습니다. 착오 없으시길 바라며, 이번 휴가를 통해서 더욱더 좋은 모습으로 여러분 앞에 다가서겠습니다.
그럼……. 일주일동안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일주일 동안 건강하세요.
빠다킹 신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
-김광태 신부-
전례의 활성화를 위해서 노력해야 할 부분을 꼽으라면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사전 준비로서 독서 말씀을 미리 읽고 묵상하는 일,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는 일, 전례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온전한 마음으로 응답하는 일, 감사와 찬미의 마음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성가를 부르는 일 등일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부분을 놓치면 이 모든 노력은 지극히 피상적인 것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례와 일상 삶의 조화라는 측면입니다.
즉 전례는 참다운 삶을 위해 필요하고, 진지한 삶의 바탕에서 거행될 때 전례가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삶을 떠난 전례는 형식으로 그치고, 전례와 무관한 삶은 위선이 됩니다. 미사 전례 때 거행하는 부분은 바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 ‘아멘’ 하고 응답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초대에 대한 응답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운명을 우리의 운명으로 받아들여 그분처럼 다른 이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겠다는 약속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 파견됩니다. 즉 미사 전례 때 기념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파견된 이들이 일상의 삶 안에서 거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 안에서 사제와 함께 거행하는 미사가, 평신도 사도직을 통해서 ‘세상 안에서 드리는 미사’로 재연될 때 그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김흥주 신부-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갖는 우리 동창 신부들의 경우에 예전에는 대화 내용이 본당 사목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나이가 4050대이다 보니 건강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어디가 아픈데 거기에는 뭐가 좋고 또 뭐가 안 좋고 등 식생활에서 운동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경험과 더불어 건강에 좋다는 정보를 나누는 것으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이렇게 건강에 대한 관심사는 단지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닐 듯싶다. 주변 사람들 가운데 각종 성인병이나 암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부쩍 늘어난 것 같다. 아무튼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건강에 관심이 많고, 그에 발맞춰 건강에 좋다는 건강 식품이니 웰빙 식품이니 하는 것들이 유행하며 인기를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자녀로서 건강을 챙기는 데는 얼마나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짧든 길든 냉담을 하다 다시 성당에 나오는 신자들과 면담을 하면서 냉담을 하게 된 동기를 물어보면 대부분 미사를 이런저런 이유로 한두 번 빠지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었다는 말을 듣는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음식과 영양분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면 병에 걸리거나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듯이 하느님의 자녀가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영적인 양식과 영양분이 필요하며, 그것을 제대로 섭취하지 않는다면 냉담이라는 병에 걸리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라고 하시면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까지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섭취해야 할 최고의 건강식품은 뭐니뭐니 해도 미사성제를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몸인 성체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 건강식품은 비싼 돈을 들여 구입할 필요도 없이 단지 우리의 성의만 있으면 매일 섭취할 수 있는 거저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 아닌가.
나를 꼭꼭 씹어 먹어라!
-강종석 신부-
세상에는 아무리 먹어도 체할 염려가 없는 음식이 있습니다. 오히려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구원을 확실히 얻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입니다. 탈이 없을 뿐 아니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꼭꼭 씹어 철저하게 소화시킬 음식(빵)인 것입니다. “생명의 빵”이라고 계시하시는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일련의 “자기 계시”를 종합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니 우리 영혼의 양식이요, 구원에 이르도록 만들어주는 “생명의 빵”인 예수님을 잘 알고 먹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제대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빛”(요한 8장) “착한 목자”(요한 10장) “진리, 생명”(요한 14장) “참 포도나무”(요한 15장)라고 표현하시기도 하지만, 우리의 직접적인 간여, 즉 따라 걸어야하는 “길”(요한14장)이나 잘 알고 먹어서 우리 영혼의 살과 피로 삼아야 하는 “생명의 빵”(요한 6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길”이나 “생명의 빵”이라는 표현은 “바라봄”보다 예수님에 대한 철저한 앎과 수용의 태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요한 6장)에 앞서 예수님은 자기 계시를 통해 당신은 영원한 생명수의 소유자, 계시의 완성자, 성부의 뜻을 실천하고 완수하는 분, 당신을 보고 이미 구원자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출현하기 시작했음,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임을(요한 4장), 병자의 치유자, 안식일의 주인, 하느님과 대등함,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심, 성부의 전권을 받았음, 심판의 권한, 당신 말씀을 통해 영생을 얻음, 당신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을 추구함,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는 구원자, 성부께서 증언하는 구원자, 불신자의 영광을 거절하심을(요한 5장), 5천명 군중을 먹이심,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능력소유, 구약의 권위있는 해석자, 하늘에서 내려온 분, 아버지의 사람을 모두 살리는 일을 하는 분, 성부께서 뽑은 사람들만이 당신을 믿을 수 있음, 성부를 직접 보신 분임을(요한 6장) 계시하면서 결론으로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먹어야하고 그분의 사랑과 행동거지를 먹어야 합니다. 그것도 확고한 믿음으로 먹어야 합니다. 회개하지 못해서 믿지 못하는 불신자들처럼 하지말고 회개하고 진정으로 그분을 믿고 먹어야 합니다. 아멘!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양승국신부-
<갓 구운 신선한 빵의 향기에 취해>
저희는 아침식사를 간단하게 합니다. 빵을 위주로 하는데, 유통기한이 살짝 지난 빵, 아니면 냉동실에서 얼렸다 해동시킨 빵, 그래서 조금은 의심스러워 보이는 빵을 주로 먹습니다.
오랜만에 갓 구운 신선한 식빵을 먹게 되었는데, 그 맛이 얼마나 좋은지...토스트기에 노릇노릇 적당히 구운 식빵에 버터를 골고루 발라서 한 입 베어 먹으니, 맛이 기가 막힙니다.
신선한 빵의 향기에 흐뭇해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빵도 이렇게 맛있는데, 주님께서 주실 영원한 생명의 빵은 그 맛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그 맛있는 빵, 그 값비싼 빵을 매일, 무상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예수님은 얼마나 고마운 분이신가? 왜 이리도 나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한 끼 식사에만 혈안이 되어있는가? 노릇노릇 구워진 맛있는 빵도 중요하지만, 영원히 먹고 살아갈 생명의 빵은 얼마나 더 중요한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냥 빵이 아니라 먹게 되면 절대로 배고프지도 죽지도 않을 구원의 빵, 그냥 음료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음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배고팠던 시절 기억나십니까? 고등학생 때의 일입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습니다. 자취하신 분들 기억나실 것입니다. 1인분 저녁식사로 꽤 큰 솥에 한 솥 가득 밥을 지었습니다. 그것을 꾸역꾸역 혼자 다 먹었습니다. 그래서 뭔가 허전해서 후식으로 라면 하나 끓여먹었습니다.
밤늦은 시간, 또 다시 배가 고파 옵니다. 값싸고 양이 많은 긴 식빵 한 줄을 사옵니다. 놀랍게도 혼자 그걸 다 먹습니다. 그래도 뭔가 허전해서 마무리로 단팥빵 하나를 더 먹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놀라서 뱃속 구조가 도대체 어떻게 되어있을까 궁금해 했습니다.
이 세상이 주는 인간적인 빵은 먹어도 먹어도 늘 뭔가 허전합니다. 이 세상이 주는 육적인 기쁨 역시 한 순간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인간적인 사랑 역시 늘 불완전하고 미완성에 머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비결에 대해서 설명하시는데, 어렵지 않습니다. 너무나 간단해서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예수님 그분만이 영원하십니다. 그분의 말씀만이 영원히 빛을 발합니다. 그분께서 제정하신 성찬례만이 진리입니다. 찾아갈 때 마다 시원한 생수를 마음껏 퍼마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주님, 이런 주님을 두고 우리가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서공석신부-
요한복음서가 기록된 서기 100년 경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들은 이미 성찬례를 자기들 방식으로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고 그 회상한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기념하여 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 전례의 원시 형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이야기 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는 말씀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이어서 유대인들의 항의가 나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유대인들은 성찬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은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복음은 설명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살이라는 말은 인간관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내 살’이라고 말하면 ‘내 형제’를 의미합니다. 나와 관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의 인간관계를 우리의 삶 안에 살려낸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피는 생명입니다(레위 17,11). 따라서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말은 그분의 생명을 우리 안에 살아 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은 예수님이 사람들과 가지셨던 관계와 예수님이 사셨던 생명을 우리의 것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만나면 그들을 고쳐 주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을 만나면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그들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기득권층이 소외시킨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들 마음의 부담을 없애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사람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실의에 빠져 살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하느님에 대한 그분의 확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는 말씀을 복음서에 남겼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과 가지셨던 인간관계는 사람들에게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신 생명은 자기 스스로를 높이고 보존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기회만 있으면 자기 한 사람 잘 되는 길을 찾습니다. 자기가 경쟁에서 이기고, 자기 한 사람 더 잘 살기 위해서는 이웃이 겪는 피해는 괘념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속하는 정당에 유리하다고 생각되면, 다른 정당에 대한 모략과 중상을 주저하지 않는 우리의 정치 현실이 인간의 그런 불행한 면모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 신앙 언어 안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순명’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흔히는 그리스도 신앙의 덕목(德目)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소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하느님에게 순종하라고 말하지, 사람에게 순종하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사람에게 하는 순종을 신앙의 덕목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거 유럽 중세 사회에는 대부분의 무식한 사람과 극소수의 유식한 상위 신분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무식한 사람이 유식한 사람의 뜻을 따라 행동하는 것은 현명하게 처신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세상에서는 인간 각자가 자기가 필요한 정보를 얻어서 삽니다. 윗사람의 보살핌을 받아서 사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런 여건에서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뜻을 강요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비하하고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순종은 종과 같이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는 예수님의 근본정신을 정면으로 거스릅니다. 사람은 어떤 구실로도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상대방에게 귀 기울이고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섬김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생명을 섬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최후 만찬에서 ‘내어주는 몸이다 받아먹어라’, ‘쏟는 피다 받아 마셔라’라고 하신 말씀은 당신의 삶을 요약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성찬을 거행하는 공동체도 그 사실을 알아들었고, 그 말씀은 오늘의 미사에까지 보존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삶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복음은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예수님의 살이라는 빵을 먹고 예수님의 피라는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삶을 살아야 하고, 그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을 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만찬에서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또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당신의 몸이고 우리를 위한 당신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감사로우면, 그것을 모든 사람을 위해 주어진 은혜로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모든 사람을 위한 축복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체성사가 지닌 의미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고 자기 한 사람 잘 되기 위해 전력을 다 하는 사람에게는 은혜로운 것도 축복도 없습니다. 그는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누리지 못해서 안타깝고 불행할 따름입니다. 그런 추태들은 사회에도 교회에도 있습니다. 교회도 사람들의 모임이라 명예와 권력을 위한 은밀한 추태들은 있습니다.
미사는 우리가 하느님에게 무엇을 바쳐서 그분으로부터 축복을 얻어내는 길이 아닙니다. 미사에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것은 이제부터 빵을 예수님의 몸으로, 포도주를 예수님의 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고 마시면서 그리스도 신앙인은 마음 다짐을 합니다.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으신 예수님의 인간관계와 생명을 우리의 것으로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축복과 은혜로움을 사람들에게 나눕니다.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우리가 그것을 먹고 마시는 이유가 없어집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또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이 되면서 성찬에서 일어나는 ‘성변화’는 우리에게도 현실이 됩니다. ◆
성체성사의 은총과 지혜
-홍승모 신부-
지난 주에 이어 오늘 복음 말씀에도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에 대해 비로소 언급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5). 성경에 따르면 피는 생명과 연관되어 있기에 세속적인 사용을 금지하고 속죄예식에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생물의 생명이 그 피에 있기 때문이다… 피가 그 생명으로 속죄하기 때문이다”(레위 17,11). 그리스도의 피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속죄의 피를 상징합니다. 빵과 포도주, 곧 그리스도의 몸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분의 피와 함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계시하는 구원의 성사가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폭력으로 인한 아벨의 피와는 다릅니다. “네가(카인)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아벨)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창세 4,10). 인간이 창조된 이래,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전쟁과 폭력으로 인해 울부짖는 피의 소리는 모든 인간의 고통을 상징합니다. 그 고통은 삶의 의지를 무력화시키고 마음을 슬픔과 분노로 채웁니다. 결국에는 인간의 내면을 분열시키고 혼돈에 떨어뜨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합니다(히브 9,14 참조). 곧 우리의 영적인 내면을 용서와 희망의 빛으로 채웁니다. 그리하여 배고픔의 고통을 빵의 기적으로 채우셨듯이, 피의 울부짖음을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어난 포도주의 기적처럼, 화해와 기쁨의 축제로 변화시키십니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생명을 줄 때, 고통과 기쁨은 하나가 됩니다. 그것을 뛰어넘어,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까지도 내어주셔서 오히려 우리를 풍요롭게 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희생과 기쁨은 둘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가 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6-57). 주님의 몸과 피를 영하는 것은 살아 계신 그분의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을 통해 주님의 생애와 말씀을 내적으로 되새기며 그분께서 원하시는 뜻과 하나가 되기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 내면에는 주님이 주시는 깨달음의 겨자씨가 발아하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성체성사의 은총과 지혜입니다.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 어리석음을 버리고 살아라. 예지의 길을 걸어라”(잠언 9,5-6). 우리는 이 생명의 씨앗을 지속적으로 성장시켜야 합니다. 이 거룩한 생명의 씨앗이 완성되도록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새겨 봅시다.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에페 5,16-17).
성체성사의 신비
-조욱현 신부 -
오늘의 독서는 이제 성체성사에 대한 본질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단순히 ‘빵을 먹는다’만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의 ‘피를 마신다’고도 한다.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마실 피까지도 주시는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한 말씀이다.
제1독서: 잠언 9,1-6: 지혜의 잔치에로의 초대
1독서는 잔치로 고찰되는 성체성사의 내용을 상징적 표현을 통해 말해주고 있다. 지혜는 7기둥을 세워 집을 짓는다. 이 일곱 기둥은 지혜의 은총의 풍요함의 상징이며 하느님의 영을 의미한다(지혜 1,6; 7,22-28). 또한 거룩한 잔치의 사랑의 은총이다(1절). 이 지혜는 희생제물(소를 잡음)을 준비했고, 구원의 술과 기쁨의 식탁을 준비하였다(2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녀들’, 즉 충실한 제자들을 보내어 마을 언덕에서 잔치를 널리 알리도록 한다. 그곳에서는 목소리가 모든 사람에게 들릴 수 있는 곳이다(3절). 그리고 이것으로 구원(구세주)을 선포한다. 와서 빵을 먹고, 술을 마셔라. 죄를 벗어버리고, “어리석음”(6절)을 버리고, 왜냐하면 “죄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신비의 새로움을 알고 그 길에 살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어리석은 자’, ‘속없는 자’에게 주고자 하는 가르침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지혜의 제자들이 되는 것이다. 즉 지혜와 인간이 가까이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사실 잔치의 의미는 항상 기쁨과 우애를 표현하고 있다. 이는 성체성사에 대한 예언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복음: 요한 6,51-58: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시다. 이 지혜는 세상의 생명을 위해 즉 세상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구원의 식탁에 내어놓으시고 그 식탁에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을 하신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55절). 어리석음을 버리고 슬기로운 길에 들어가는 것은 바로 구원의 길에 있는 것이며,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이고,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신 그 살”(51절)에 참여하는 것이며, 여기에 부활로 인한 하느님의 생명에 들어가는 절대적 조건이 된다. 이 말씀을 들은 군중들은 또 다시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게 될 성체성사의 실현을 방해하고 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줄 수 있단 뼈寬?”(52절). 그러면서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떠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가 생명의 절대적 조건임을 강조하신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이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지께로부터 파견되셨고 또 사셨으며, 이제는 그 아들의 힘으로 당신의 살과 피를 먹는 자는 살 것이라고 하신다(57절). 이 놀라운 능력, 힘은 하늘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온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 빵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 옛날 만나와는 전혀 다른 아들의 살과 피이다.
이 빵을 먹는 것이 “생명을 얻는 것이고”, “그분 안에 사는 것이며”, “우리 안에 그분이 사시는 것이며”, 성자께서 아버지와 함께 머무실 수 있도록 성령으로 이미 준비된 곳이 되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당신의 생명에 우리를 참여시켜 주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제2독서: 에페 5,15-20: 영의 잔
바오로 사도의 이 명령적 교훈은 성체성사의 규정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 일치하여 그 생명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혜롭게 자신의 품행을 살피라고 한다. 미련한 자처럼 살지 말고(철없는 짓을 버리고) 어리석음을 버리면서 슬기롭게 살라고 한다. 이 시대가 악하지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라고 한다. 이 기회에 우리가 성숙하지 못한다면, 그 시간은 모두 손해가 된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주님께 “두려움”을 갖고, 그분의 뜻을 생각하는(층계송), 그래서 그분의 뜻을 항상 따르는 것으로 주님 안에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권고한다. 우리를 방탕한 생활로 끌어들이는 술에, 즉 우상과 헛된 것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성령에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한다고 한다.
이 때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받은 일치된 모습으로, 한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다. 모든 일에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릴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분께 영광을 드릴 수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깨어 있으라”(마태 25,13)고 하셨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삶을 갖는데 게으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셔서 구원을 주셨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언제나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드리도록 하자.
주님께는 자비가 있사옵고 풍요로운 구속이 있나이다 라고 영성체송에서 노래하고 있다. 이미 본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한없는 풍요로움과, 넘치는 은총으로 오늘, 여기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계시다. 즉 말씀으로서, 살과 피로서, 하느님의 말씀이 “살에서 나온 살”(창세 2,23; 요한 19,34)인 교회에 주신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온 생명의 빵이시다. 우리의 구원은 이 살과 피에 참여함으로써 삼위일체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 부활과 인간이 창조된 본연의 모습 즉 하느님의 모습을 주시는 것이다.
지혜로운 길에 서 있는 그래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그리스도와 일치한 삶을 항상 살 수 있는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영원한 생명의 향기
-양승국 신부-
학창시절을 돌아볼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추억이 배고팠던 기억입니다. 모두 없이 살던 시절, 왕성한 식욕을 주체하지 못하던 우리는 늘 배가 고팠습니다. 뱃속에 도대체 뭐가 들어있는지 밥 먹고 돌아서면 즉시 배가 고파왔습니다.
한번은 제게 생각지도 않던 목돈이 생겨 하교길에 친구들과 중국음식점에 들렀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그리도 먹고 싶었던 자장면을 시켰습니다. 그것도 곱빼기로.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장면 곱빼기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우리는 아직도 뭔가 아쉬웠습니다.
다들 서로 얼굴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데, 표현은 안했지만 '곱빼기 한 그릇씩 더 시켜먹을까?'하는 표정들이었습니다. 그러기로 합의를 보았지만, 막상 다시 주문을 하자니 계산대에 앉아있는 식당주인집 딸 앞에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 중국음식점을 나온 저희들은 길 건너에 있는 다른 중국음식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또 다른 자장면 곱빼기를 한 그릇씩 시켜놓고 깔깔 웃었습니다.
그 일을 돌아볼 때마다, 혼자 속으로 웃으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 세상이 주는 인간적인 빵은 먹어도 먹어도 늘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 이 세상이 주는 육적인 기쁨 역시 한 순간이라는 생각. 이 세상에서 이뤄지는 모든 인간적 사랑 역시 늘 불완전하고 미완성에 머문다는 생각.
육적이고 세속적인 모든 것들은 한가지 공통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는 대상이라 할지라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빛깔을 잃어가고 그 의미도 상실해 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비결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어렵지 않을 뿐 아니라 너무 간단해서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돌아보니 세상 것들은 늘 가변적이고 늘 한시적인 것이더군요. 한때 제가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몰두했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이념이나 사상, 사람마저도 이제 세월과 함께 그렇게까지 절대적이지 않게 됐습니다. 때로 우리가 그토록 집착했고 추구했던 인간관계 역시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철저한 배신감과 실망감만 남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늦게나마 조금 깨닫게 된 진리 한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 그분만이 영원하십니다. 그분 말씀만이 영원히 빛을 발합니다. 찾아갈 때마다 시원한 생수를 마음껏 퍼마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요즘 영적독서로 복자(福者) 아르테미테 자티 수사(修士)의 전기('자티', 피터 라핀, 돈보스코미디어)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태생 살레시오 회원이었던 자티 수사는 평생 병원 사도직에 종사했습니다.
책장을 넘길수록 자티 수사의 감동적 생애가 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쉰살이 된 자티 수사는 옷에는 도통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양복은 몇십년을 입었는지 색을 분간하기 힘들고 자켓은 다리지 않았으며, 바지는 무릎이 불룩 나왔습니다. 그는 늘 헌옷을 입고 있었는데, 차림새로 보아 그 옷들은 대개 남이 입다 버린 것들이었습니다. 언젠가 그가 죽은 사람 옷을 입은 적이 있습니다. 너무 낡은데다 냄새까지 나서 사람들이 불평하자 자티 수사는 "이 냄새야말로 덕행의 향기입니다"라고 대꾸했습니다.
병세가 너무 깊어 다른 병원에서 거절당한 중환자나 병원비가 없어 어깨를 축 늘어뜨린 환자들이 찾아올 때마다 자티 수사는 병원 직원에게 이렇게 묻곤 했습니다. "우리 병원을 축복해 주러 오신 착한 목자께 내드릴 방이 있나요?" 자티 수사는 또 자주 "우리 구세주께 드릴 코트나 바지가 있습니까?" 라고 묻기도 했습니다. '우리 구세주'란 한 평생 말쑥한 코트나 바지를 한번도 입어보지 못했던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번은 병세가 위급한 인디언이 병원에 왔습니다. 그러나 병상은 물론 간이침대마저 없었습니다. 자티 수사가 그를 자기 방으로 데려가 침대를 준비하자 너무나 미안했던 그 인디언은 담요를 하나 가져오더니 바닥에 펴고 거기에 누웠습니다. 작은 실랑이가 오가던 중 자티 수사는 바닥에 누운 인디언을 안아다가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러자 인디언은 자티 수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는 이내 잠이 들었습니다.
자티 수사의 전기를 끝까지 다 읽고 책을 덮는 순간 '영원한 생명의 향기'가 한동안 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이기양 신부-
하루는 서대문 성당 신부님이 감리교회 신학생들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겠다고 하소연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성당 옆에 감리교 신학대학이 있는데 그 곳 신학생들이 가끔 미사에 참석해서는 몰래 성체를 받아 떼어보기도 하고 또 버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성당 측에서 사목위원들을 세워 놓고 지켜보기도 하고, 여러 방법으로 성체의 훼손을 막아보려고 애썼지만 그래도 미흡하자 생각다 못해 나중에는 성당 입구에 경고문을 써 붙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㰡’감리교 신학생 출입 금지! 㰡“
그랬더니 어느 날 감리교 신학대학의 목사라는 분이 전화를 해서 항의를 하더랍니다.
㰡’왜 우리 감리교 신학생들을 출입 금지 시키는 겁니까?㰡“
성당에서는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고 학생들이 미사에 와서 성체를 훼손하는 그런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완곡히 설명하였습니다. 그러자 바로 보여준 그 목사의 반응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㰡’좀 그러면 어떻습니까?㰡“
이렇게 되면 더 이상의 대화는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목사에 그 신학생이라고 하소연을 할 수 밖에요. 이것이 보여도 볼 수 없고 들려도 들을 수 없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㰡’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㰡“(요한6,51)
이 말씀을 들은 유다인들은 이렇게 서로 따집니다.
㰡’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㰡“(요한6,52)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주는 이 자체를 믿지를 못하는 것이지요. 개신교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 만찬석상에서 당신의 몸과 피를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렇게 초대 교회 때 예수님께서 내주신 당신의 몸과 피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성찬례를 통해 우리에게 계속 베풀어지고 있으며, 우리는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것을 확신하며 모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 말씀처럼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도 없고 또 거기에서 나오는 힘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의 일입니다. 혁명이 일어나자 여기저기에서 많은 범죄가 덩달아 기승을 부렸는데, 1793년 폭풍이 사납게 몰아치는 어느 날 한 프랑스 군대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폭풍우가 몹시 심해지자 이 혁명군들은 시골에 있는 어느 작은 성당으로 난입을 했습니다. 들고 있던 무기와 여러 가지 짐 꾸러미들을 성당 여기저기에 내동댕이치고 군인들은 마치 그 곳이 술집이나 되는 것처럼 마음대로 행동을 하였습니다.
㰡’나가서 술 좀 가져와라.㰡“
한 군인이 부하에게 명령을 하자 옆에 있던 군인도 소리 질렀습니다.
㰡’잔도 가져와.㰡“
어디서 났는지 큰 포도주 통이 하나 들어오자 잔을 가져오라고 외쳤던 군인이 벌떡 일어나서 성당의 제단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감실문을 쳐부수고 성합을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안에 담겨있던 성체를 모조리 바닥에 쏟아버리고 포도주 통으로 가서 성합에 술을 가득 채우려고 허리를 숙였습니다.
그러나 그 군인은 술을 채우기도 전에 갑자기 쓰러졌고 그 길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갑작스런 일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달려왔지요. 그 군인은 뻣뻣해진 손으로 성합을 꼭 움켜쥔 채 죽어 있었습니다. 다른 군인들이 그의 손에서 성합을 빼내려고 애썼지만 빼낼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힘을 써도 안 되자 할 수 없이 그 성당의 신부를 잡아왔고 신부가 와서야 죽은 군인의 손에서 성합을 빼낼 수가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본 군인들은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그 길로 성당을 빠져나와 도망을 치고 말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성체를 모독하는 이런 행동은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반면에 예수님께서 성체 안에 계심을 믿고 확신하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살고 그에게는 놀라운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더 데레사 성녀가 우리나라에 오셨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때 데레사 성녀는 무척 연로하셨지요. 연세가 많으신 분이 그 노구에 아침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사람들을 만나고 가난한 곳을 방문하는 등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하러 다녔습니다. 이를 지켜본 기자가 놀라서 성녀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㰡’어떻게 그렇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십니까? 지치지도 않으십니까?㰡“
마더 데레사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㰡’저는 하느님의 힘으로 삽니다. 아침 미사 때 성체를 모시고 하느님의 힘으로 사는데 제가 어찌 지치겠습니까?㰡“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그 힘으로 살고 그 분의 삶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제2의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이지요.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똑같이 태어나고 똑같이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지만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세상을 막 살지 않습니다. 상황이 어렵고 고통스럽다고 절망하거나 좌절하고 그래서 자살하는 일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예수님을 믿고 희망하면서 살아갑니다.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똑같이 술을 마시고 불쾌한 일이 있어도 싸움으로까지 가지 않으며 세상 사람들처럼 방탕하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똑같이 닥치더라도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고 의탁하며, 어려운 중에도 주신 은혜에 감사 드릴 줄 압니다. 그리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또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고 배신을 당하여 미움이나 증오의 마음이 들어도 끝까지 보복을 하려 한다거나 죽어도 상대를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마음에까지 이르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이 들었다가도 이내 정화할 줄 압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며 용서하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몸을 모시는 우리 신자들이 사는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며 주님의 몸인 성체를 모십니다. 참으로 주님이 그 성체 안에 계심을 믿고 예수님의 삶을 살겠다는 마음으로 모셔야 할 것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모셔야 합니다. 깨끗하지도 않고 준비되지도 않은 모습으로 성체와 마주 한다면 믿지 않는 개신교 신자와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몸을 모시기 위해서 교회는 공복(空腹)제를 지키라고 가르칩니다. 성체를 영하는 사람은 적어도 성체를 영하기 한시간 전에는 음식물을 삼가야 합니다. 간단한 물 정도는 괜찮겠지만 커피도 되도록 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나에게 죄가 있다면 고해성사를 통해서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마음으로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손과 의복에 문제가 있다면 제대로 갖추어 입고 청결하게 준비하여 주님을 모셔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우기에 앞서서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렵고 힘들며 사랑보다는 미움의 감정이 팽배해져 가는 것은 섬기려는 마음보다는 섬기는 것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은 내 주장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체를 모시는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루를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픔과 상처를 접고 먼저 이웃에게 배려하십시오. 주님께서 이렇게 내 마음에 오셨으니 이제는 내가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오늘을 살아보리라 다짐하고 실천하여 보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화해와 평화를 체험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믿으며, 주님이 살아 계심을 체험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공감하는 제 2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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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성체의 신비에 대해서 다시한번 깊이 새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