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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6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라 하였느냐?
악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사람을 살리라고 하였느냐?
죽이라고 하였느냐?
(루가 6,6-11)
“I ask you,
is it lawful to do good on the sabbath
rather than to do evil,
to save life rather than to destroy it?”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공동체에게 불륜과 자만에 대하여 걱정을 하면서 꾸중한다. 부도덕한 자에 대하여 용납하지 않고 단죄를 선언한다. 그리고 악의와 사악이라는 묵은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내자고 권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관한 율법에 대하여 인간을 살리고 자유스럽게 하는 법률로 해석해야 함을 보여 주신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신 것은 그 본보기이다. 그러나 낡은 체제에 길들여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없애 버릴 궁리를 하기 시작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주님께서는 온갖 법률 위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여러 종교적 법률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만들어 낸 모든 법률 위에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죽이는 법률을 지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법률을 지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인간이 만들어 낸 온갖 법률을 상대화시키십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법률이든지 개의치 않으시고, 대신에 그 법률이 인간을 생존에 필요한 공동의 선익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지적하시고, 그러한 법률은 폐기되어야 마땅함을 보여 주십니다.
가끔씩 세상의 법이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생명과 사랑과 정의와 진리에 어긋나는데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세상의 법이 정당하다고 추켜세우거나 그 법을 따라갑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못된 법에 항거하는 형제자매들을 욕하기도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은 곧 주님이십니다. 아무리 세상의 법이 집요하게 파고들어도 그것이 주님의 뜻에 비추어 잘못된 법률이라면, 우리는 과감하게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
☆☆☆
오그라든 손은 고통스러운 손입니다. 병으로 그랬든 사고로 그랬든, 그는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한’을 풀어 주려 하십니다. 그는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을까요?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딴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안식일 법을 어기는지 ‘어기지 않는지’ 지켜보고 있을 뿐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언제 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기약이 없었기에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베푸시려 합니다. 안식일인 줄 아셨지만 ‘모든 것’을 뛰어넘으셨습니다. 그분의 넓은 마음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오직 법을 어긴다는 행위만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하도 답답하니까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바리사이들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라는 율법이지, 죽이라는 율법은 아닙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소홀히 했기에 그런 해석이 등장합니다.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법을 따지지’ 않습니다. 주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법을 따지고 규칙을 내세웁니다. ‘베푸는 연습’을 게을리하면 남아도는 것도 주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인간은 하늘도 좋아하지 않는 법입니다.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김기현신부-
오늘 독서 마지막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
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그
말씀을 묵상하다가, 장영희 교수님의 글에서 읽은 이야기가 생각나서 옮겨봅니다.
【초등 학교 3학년인 제이미는 공부는 잘 못해도 착하고 배려 깊은 아이였습니다. 제이미는
연말에 할 학예회 연극에서 배역을 맡고 싶어했습니다. 제이미의 엄마는 제이미가 연극에 참
여하고 싶어 무척 큰 노력과 기대를 하기 때문에 혹시 배역을 맡지 못하면 실망할까 봐 노심
초사하고 있었습니다.
배역이 정해지는 날, 방과 후에 제이미를 데리러 간 엄마는 조바심하며 차 안에서 기다렸습
니다. 학교 정문을 나와 엄마에게 달려오는 제이미의 두 눈이 자부심과 흥분으로 빛났습니
다.
“엄마, 알아맞여 보세요. 내가 이번에 무슨 역으로 뽑혔는지!” 제이미가 외쳤습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는 엄마에게 제이미가 곧 덧붙였습니다. “엄마, 나 손뼉 치고 응원하는 사람
으로 뽑혔어요!”】
‘손뼉치는 역할’을 얻고도 기뻐하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 예쁜 것 같습니다. 욕심이 많거나
이기적인 아이 같았으면, 자신이 제대로 된 역할을 맡지 못했으니 연극에 나가지 않겠다고
심술을 부렸을 지도 모릅니다. 설령 연극에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시큰둥하고 박수도 성의
없이 쳤겠죠. 보통 세상에서도 비중 있는 자리, 자신이 좀 더 드러날 수 있는 자리를 선호하
는 것이 보통인데, 그런 생각에 물들지 않은 제이미의 마음이 순결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또
존재감 없는 배역에도 기뻐하는 제이미의 모습에서 진실함이 느껴집니다.
그 아이처럼 순결함과 진실함을 가지고 성당에 나오는 이들이 많아져야 교회가 더 건강해 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만약 교회에 ‘내가 이 단체에서 제일 영향력이 있어... 내가 가장 비
중 있는 자리를 맡고 있지, 나 없으면 안 돌아가...’ 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많아진다면 어
떻게 될까요? 악한 누룩을 간직한 그 공동체 구성원들은 서로 비중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
해서 다투기도 하고, 좋은 자리를 차지한 이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미워할지도 모릅니다. 심
하면 공동체가 와해되고 갈라져 버릴 수도 있겠죠.
우리는 악한 누룩이 없는 순결하고 진실한 빵을 만들어야 합니다. 곧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주님의 일을 성실히 수행할 수 있는 예수님의 지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이들이 많아져
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공동체가 더 크고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
씀하시는 것처럼 예수님에게 소중하지 않은 지체는 아무도 없습니다. 또 보잘 것 없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을 성실히 수행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한 노인이 우체국에서 자기 마음대로
우표를 붙인 소포를 내밀었다.
“할아버지! 무게가 더 나가니 우표를 더 붙여야 돼요!”
이 말을 들은 노인이 말했다.
“여보게, 우표를 붙이면 이 소포가 더 가벼워지나?”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
- 정희완 신부-
나약한 인간의 신앙은 어쩔 수 없이 형식을 필요로 하며,
종교적 형식은 어쩔 수 없이 종교적 제도를 필요로 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출발한 신앙이라 할지라도
이 같은 제도적 종교화의 과정 안에서 변질될 위험이 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제도적 종교는 외형적 예식을 필요로 하며, 종교적 예식은 자칫 신앙을
습관적 반복적 행위 안에 가두어 둘 위험을 내포합니다. 우리는 의지가 약한
인간이기에 반복을 통해 좋은 것을 몸에 익숙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덕이라는 것도 좋은 습관의 반복 속에서 쌓이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복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익숙함에서 오는 편안함을 낳습니다.
이 습관적 익숙함에서 오는 편안함은 많은 경우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편함과 그 불편함 때문에 새로운 것, 낯선 것에 대해 편협하고 배타적인
형태를 띠기 쉽습니다. 종교적인 관습과 형식에만 익숙한 신앙,
습관적 반복에서 오는 타성적인 신앙, 우리의 욕심을 충족하기 위한
이기적인 신앙은 여전히 이 시대의 예수님을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듯이,
이 시대에도 어쩌면 신앙을 가진 종교인들이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죽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에 대한 얘깁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과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 함께 있는 회당에
예수님께서 들어서시자 즉시 긴장이 형성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시나 지켜보고
예수께서는 지켜보고 있는 그들을 둘러보십니다.
이런 긴장과 갈등의 한 가운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사람들 사이에서 가운데 서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시선을 받아본 적도 거의 없고
시선을 받아도 건전한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이 들어오시기 전에는 역시 이런 상태였습니다.
주님이 들어오시기 전에는 구석에 있었고
율사들과 바리사이들도 아무런 시선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회당에 들어오시자 갑자기 시선이 그에게 향합니다.
주님도 그를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고 하십니다.
그가 사람들 가운데 서는 것은 난생 처음입니다.
그러잖아도 두렵고 떨리는데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눈을 보니 더욱 두렵고 떨리고,
좋은 일로 가운데 서도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는데
긴장 상황에서 가운데 서니 수치스럽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만 믿습니다.
주님은 분명 자기를 사랑하시어 자기를 위하시는 분이라는 것,
위하는 것은 위하는 사람이 중심이라는 뜻인데
주님이 자기를 위하시는 것은 자기를 진정 중심 삼으신다는 것,
그것을 믿기에 그는 하라시는 대로 합니다.
먼저 일어서라 하십니다.
그래서 일어섭니다.
그런데 기적 같은 것이 일어납니다.
일어서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것이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만이 아니라
태어나서 지금까지 주저앉아 있었다는 것을 의식치 않을 정도로
주저앉아 있었던 그의 정신과 마음까지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정신과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지요.
뭔가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서라고 주님이 말씀하셔서 가운데 섭니다.
연극의 단역도 맡아본 적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연극의 주인공이 된 것과 같습니다.
자기도 사랑 받을 수 있고
자기도 중요하고
자기의 사연이 모두에게 알려지고 공감이 됩니다.
자기의 불편이 얼마나 큰 불편이었는지,
사람들의 무시가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
그럼에도 그가 얼마나 꿋꿋이 이겨냈는지 다 공감이 됨을 느낍니다.
그래서 오그라든 손이 낫지 않아도 좋을 지경이지만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그라든 손까지 낫게 하십니다.
손만 치유된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까지 치유되어
주님 공동체의 완전한 일원이 되었음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용솟음칩니다.
목표가 생겼고
희망이 생겼고
기쁩니다.
구원 받았습니다.
어느 본당의 신부님께서 이별의 아픔을 겪고 있는 어떤 자매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답니다.
“신부님, 사랑한다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인지 몰랐어요. 이제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꺼에요.”
이별의 아픔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자매님의 수척한 얼굴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었지요.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엉뚱하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셨다고 합니다.
“자매님께서는 배고플 때 밥 먹지 않고 저절로 배부르기를 바라십니까?”
“밥을 먹지 않고 어떻게 배부르기를 바랄 수가 있어요?”
“사랑도 그렇습니다. 밥 먹지 않고 저절로 배부를 수 없는 것처럼, 사랑하지 않고서 이 세상을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고통스러워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차를 타고서 가다보면 푸른 들판을 보게 됩니다. 그때의 기분은 참으로 좋지요. 그러나 항상 푸른 들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두운 터널 속도 지나가야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픔 때문에 사랑하지 않겠다는 것은 이러한 터널이 싫다고 기차를 타지 않겠다는 사람과 똑같은 것이겠지요. 사랑의 아픔도 있어야 우리 모두가 원하는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사람들, 특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적대심을 받아야만 했던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 안식일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이유로 예수님은 그들의 배척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즉, 일주일 중에 치유할 날이 6일이나 있는데, 굳이 일하지 말라는 안식일에 치유를 하냐는 것이지요.
따라서 편안한 길을 가시기 위해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면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도 당하지 않으셨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큰 아픔을 가져온다 할지라도 이 사랑을 선택하시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지금 고통 속에 있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병을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치유해주십니다.
어떤 신부님께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가지 말고, 품에 안고 가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고통과 시련이라 생각하면서 마지못해 지거나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품에 안고 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라고 하신 십자가는 고통과 시련의 십자가가 아닌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남들이 뭐라 할지라도 사랑의 길이라면 그 길로 나아가는 타협하지 않는 참된 사랑을 실천하시는 신앙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말이지요.
위대한 춤꾼은 테크닉으로 위대한 것이 아니라 열정으로 위대한 것이다(마샤 그래함).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최성기 신부-
막 태어난 아기를 보면 주먹을 꽉 쥐고 있습니다. 아직 손의 기능이 발달하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본능적으로 내 것을 끌어안으려고 하는 우리의 본성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성장해간다는 것은 내 것만을
챙기려는 꽉 쥔 손을 펴서, 누군가를 어루만져주고 내 것을 나누는 능력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시면서, 그에게
“일어나 가운데 서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를 그의 삶의 주인공으로 세워주시는
말씀입니다. 삶의 주인공인 우리 역시 마땅히 해야 할 일로서 안식일에
하느님 뜻에 맞는 일을 하는 것,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을 율법의
이름으로 막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욕심으로 가득 찬 오그라든 손을 가지고 있다면 또는 머릿속 생각만이
가득할 뿐 아무것도 실행에 옮기고 있지 않다면 일어나 우리 삶의 한가운데
서서 세상을 향해, 나의 이웃을 향해 손을 뻗어 무언가를 나눌 줄 아는,
누군가를 어루만질 줄 아는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사랑의 시선
- 김석인 신부-
어머니의 시선은 자식들의 필요를 잘 알아본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가 지닌 모성 때문에 사랑 가득한 시선으로 늘 자녀들을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자식의 필요를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으신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 인간을 자비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시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시는 분이시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사랑을 필요로 한 사람을 보시고 일으켜 세우시고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 그날은 안식일이라 병자를 고쳐서는 안 되는 날이었음에도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손을 한마디 말씀으로 성하게 해주셨다. 그를 고발하기 위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도 태연하게 행하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사랑의 실천적 면이 잘 드러난다. 법이나 규율 또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대방에게 그의 처지가 되어 그가 필요로 한 선을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구원자로 죽음을 마다않고 임무를 수행해 나가시는 것이다.
순교자의 달을 지내면서 이러한 점에서 순교자들이 예수님을 닮았다고 할 수 있겠다. 또 다른 작은 예수가 되어 사신 모습을 이런 면에서 발견하게 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예수님을 닮은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남을 고발하기 위해 지켜보는 자세가 아니라 진정 상대방의 필요를 읽을 줄 아는 사랑의 시선을 가져야겠다. 항상 자녀들의 필요를 알아보는 어머니처럼 말이다. 사랑은 우리에게 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준다.
최악과 극단의 가정법
-김찬선신부-
얼마 전 상담을 할 때 그분이 하신 말씀.
별 거 아닌 거 가지고 하루를 꼬박 거기에 매달렸다고.
그래서 제가 답하기를.
지나고 나서 보니 별 거 아닌 작은 것이었지만
그 때는 큰 것이었기에 하루 종일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그분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는 모두 그러합니다.
별 거 아닌 것 가지고 크게 생각하고
그렇기에 그 문제에 집착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곤 합니다.
예를 들어 저에게 고백성사를 볼 때 많은 분들이
자기 배우자가 미워서 죽겠다고 하고
꼴도 보기 싫다고 합니다.
얼마나 미우면 죽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꼴도 보기 싫은 사람 아주 죽으면 어떻게냐고 묻습니다.
대부분 펄쩍 뛰지요.
죽을 지경이 되면 용서 못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큰 것도 죽음 보다는 작습니다.
어떤 불만도 죽음 앞에서는 사라집니다.
그래서 제가 인생에 있어서 너무 지질한 것에 좀스럽게 매일 때면
죽게 되는 상황을 종종 가정합니다.
그러면 즉시 그 모든 감정과 집착에서 초월할 수 있게 되고
사소한 것은 다 가지를 쳐 아주 대범하게 되며
그래서 가장 중요하고 좋은 것만 긍정적으로 선택하게 합니다.
이것이 최악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선이 되는 원리이고
극단으로 가면 가장 단순해지는 원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쓰신 원리와 방법이 이것입니다.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게 하는 것이 옳으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좋으냐,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좋으냐?
우리 인생 사랑하고 살기에도 너무 짧고
좋은 일 하기에 너무도 부족한 나날인데
왜 이리 별 거 아닌 것 때문에 평생 원수마냥 미워하고
못 된 생각을 궁리하고 있는지....
오늘 복음에서 최악과 극단의 가정법을 배워
밝고 담대하게 하루를 살아가렵니다.
나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시선
-전삼용신부-
제가 첫 보좌를 할 때 신자 분들이 가끔 와서 “신부님, 좀 일찍 주무세요.”, 혹은 “신부님, 참 일찍 일어나시네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걸 어떻게 아세요?”라고 물으면, “예, 집에서 다 보여요.”라고 대답하십니다. 왜냐하면 사제관의 앞쪽이 아파트 단지이기 때문에 아파트에서 보면 사제관에 불이 켜있는지, 꺼져있는지 다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고는 창문도 제대로 열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은 과히 좋은 느낌은 아닙니다. 샤워를 하고 벌거벗고 거실로 나왔는데 창문이 열려있어 밖이 보이면 깜짝 놀라 벽에 딱 붙습니다. 그리고 벽을 따라서 안보이게 움직여서 창문을 닫습니다. 그제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또 제가 쳐다보다가 큰일 날 뻔 했던 적도 몇 번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밤에 돌아오다가 어떤 남학생이 여자와 앉아서 있는 것을 슬쩍 봤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그 남자는 뭘 쳐다보냐며 계속 와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무서워서 못들은 채 하고 빨리 걸음을 걸어서 도망쳤습니다.
한 번은 군대 첫 휴가를 나와서 친구와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는데 불량배들이 들어와 함께 술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모습이 저로서는 매우 웃겨 보였습니다. 말은 못 하였지만 슬쩍슬쩍 보며 재밌어 하였습니다. 보스가 술을 따를 때는 아무 대나 보지도 않고 따릅니다. 그러면 졸개가 병 있는 곳으로 가서 술을 받고 머리를 포장마차 밖으로 내밀고 마시고 다시 제자리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집으로 가려는데 그 졸개가 나오더니 담배를 같이 피우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고 저를 이 지역의 건달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담배를 못 피웠는데 기침이 나오는 것을 참고 눈물을 흘리며 건달 연기를 했고 보스가 졸개를 불러서 간신히 집에 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시선만으로도 상대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예수님은 적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가시였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빛이었고 그래서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는 빛을 제거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오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을 어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식일 법을 어긴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눈을 부라리며 예수님을 주시하였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트집거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당당하십니다. 오히려 그들의 잘못을 더 밝게 드러나게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안식일은 거룩히 쉬며 주님을 찬미하라고 주님께서 거룩하게 지정하신 날입니다. 그 날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미움으로 눈이 멀어있는 그들이기 때문에 아주 간단한 질문조차 대답하지 못합니다. 옳은 일을 하건 남을 해치는 일을 하건, 사람의 목숨을 구하건, 사람을 죽이건 그들에겐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안식일에 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트집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면 긴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긴장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잘못하는 것이 없어도 누군가가 사제관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때문에 긴장이 되는데, 예수님은 어째서 미워하는 사람들이 트집을 잡기 위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의연하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실천하실 수 있으실까요?
그것은 그 분이 평상시 혼자 있을 때도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의식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을 때, 이미 하느님께서 당신께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보고 계심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에 주목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시선에만 집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시지 않고 항상 혼자 있을 때도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느님께만 잘 보이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이 보는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시선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눈이 한 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를 짓기 위해 눈을 감아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바로 죄를 짓기 위해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는 것을 잊고 뱀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죄를 지은 이후부터는 하느님의 시선은 사랑의 시선이 아니라 심판관의 무서운 시선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로부터 더 숨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시선을 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죄를 짓기 위해 하느님의 시선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며 살면, 사람의 시선조차도 커다란 짐이고 그래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정말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 먼저 하느님의 시선 앞에 당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얼마 전이었습니다. 새벽미사를 끝내고 교우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러 근처의 해장국집에 갔습니다.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그 근처의 24시간 영업을 하는 식당에서 한 쌍의 인상적인 연인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둘 다 완전히 만취된 것으로 보이더군요. 그리고 테이블에는 소주 8병과 조금 남은 음식이 어지럽게 있었습니다. 그때의 시간이 아침 8시…….
‘밤새 술을 마셨나? 이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사람들은 일하지 않나? 무슨 술에 원수졌다고 저렇게까지 마실 수 있지?’
저뿐만이 아니라,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 연인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더군요. 그만큼 이들의 모습은 긍정적인 모습이기보다는 부정적인 모습이라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어요. 나의 모습은 과연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설까?
이 문제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나 역시 이 연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들의 모습은 눈에 보이는 것이고 나의 모습은 가려져 있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내 마음의 모습은 그들보다도 더 흉하지 않을까 라는 반성도 해봅니다.
스스로 이렇게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 봅니다. 그리고 보다 더 겸손한 마음, 보다 더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사제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여 봅니다. 왜냐하면 나는 옳고 남은 옳지 않다는 모습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위선적인 모습을 닮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식일 법을 항상 강조했지요.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안식일 법은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뒤 갖는 거룩한 주님의 날이기에 반드시 잘 지켜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모습은 거룩하게 안식일을 지낸다기보다는 꼬투리 잡기에 바쁩니다. 그래서 거룩한 주님의 날에 사랑으로서 사람을 치유하셨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못하고, 단순히 ‘일했다’는 사실에만 주목하면서 예수님을 단죄하려는 생각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올바르기에 이러한 단죄는 너무나 당연하다고 하지요.
내가 옳다면 남도 옳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스스로 완벽하다는 것은 완벽한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또 하나의 욕심이라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나쁜 모습, 부정적인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에 대해서 판단하고 단죄하기 전에 우선은 기도하셨으면 합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복음적인 모습이 아닐까요?
나쁜 모습, 부정적인 모습에 대해서 기도합시다.
빠다킹신부
마음의 병
-김인한 신부-
어느 유치원 선생님으로부터 발도로프 인형이라는 것을 선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손으로 만든 인형으로 아주 단순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 인형의 얼굴에
눈코입 등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선물한 선생님 말로는 유아들이
자신의 감정에 따라 이 인형의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기쁘면
인형도 웃고, 자신이 화 내면 인형도 찡그리는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어겨서라도 드러내고자 하신 것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째려보고 있던
사람들의 오그라붙은 그 마음들입니다. 예수께서 안타깝게 바라본 것은
오그라든 손보다도 오그라든 그들의 마음입니다.
손을 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그라든 마음을 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그라든 마음은 다른 이들도 오그라들게 만듭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다른 이를 해할 수 없지만 오그라든 마음은
다른 이를 해합니다. 펴진 마음은 다른 이를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오그라든 마음을 펴고 다른 이를 살리는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치유의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박기호 신부-
예수께서 구마와 치유를 베푸신 기적의 에너지는 애정이다. 가장 강력한 애정은 자기 몸을 보호하는 이른바 본능이다. 그런데 불행한 처지의 누군가에 대한 연민이 넘치면 그가 자기 몸으로 여겨진다. 바로 그때 본능 이상의 에너지가 발생하여 희생과 기적이 된다. 예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이를 당신 앞에 세우시어 치유하신다. 진정 예수님을 영접해 내 상처를 보여드릴 때 치유가 이루어진다.
‘산 위의 마을’ 가족들은 성체성혈의 주님을 영접할 때 다음 기도를 바친다.
‘치유를 구하는 기도’
주 예수님, 당신 앞에 오롯이 왔나이다.
저의 죄를 참회하오며 뉘우치오니
당신의 이름으로 저를 용서하소서.
다른 모든 이들이 저에게 저지른 것을 용서하나이다.
악마와 악령과 그것들의 모든 악행을 끊어버립니다.
주 예수님, 제 자신을 온전히
이제와 영원히 당신께 드립니다.
예수님 당신을 저의 삶에 초대하오며
저의 주님으로 영접하옵니다.
하느님, 그리고 구세주시여.
저를 치유하소서, 저를 변화시키소서.
저의 몸과 영혼과 정신을 강건케 하소서.
오소서, 주 예수님.
당신의 고귀한 피로 저를 덮어주소서.
당신의 거룩한 영혼으로 저를 채워주소서.
주 예수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예수님,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예수님, 당신께 감사드리나이다.
제 삶의 모든 날에 당신을 따르겠나이다. 아멘.
나의 어머니이시며 평화의 여왕이신 마리아님,
모든 천사와 성인들이여, 저를 도와주소서.
하느님의 바램
-서영남 -
민들레 국숫집은 오전 열 시에 문을 열고 오후 다섯 시에 문을 닫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닫는 시간이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기다리면 아홉 시에도 문을 엽니다. 문 닫고 정리를 하다가도 배고픈 손님이 오시면 상을 차려드립니다.
진호씨는 몇 해 전에 이혼하여 혼자 살고 있습니다. 시력이 나빠져서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정부에서 나오는 생계지원비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돈이 나오면 술과 노름으로 다 써버립니다. 어느날 술에 취한 진호씨가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 찾아왔습니다. 늦었지만 빨리 드시라며 상을 차려드렸습니다. 그런데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식사를 합니다. 조금 빨리 드시라고 했더니 화를 벌컥 내며 밥을 먹는 데 재촉하니 체할 것 같다고 하십니다. 천천히 다 드시고 물도 한 잔 드신 다음에 밖에서 기다리는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진호씨는 화가 잔뜩 나서 말합니다. “정부에서 한 달에 수백만 원씩이나 받으면서 왜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지 않느냐? 경찰에 고소해 버리겠다.” 옆에서 듣던 대성씨가 “아저씨, 우리는 정부 지원을 받지 않아요.” “세상에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자기 돈을 들여서 밥을 주는 사람이 있느냐?” 코웃음을 치면서 온갖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큰소리로 떠들다가 다시는 오지 않겠다면서 떠났습니다. 다음날 저녁 무렵에 어색한 웃음을 띠고 진호씨가 왔습니다. “배고프세요?” 고개를 끄덕입니다. 상을 차려드렸습니다. 국수집에 오는 걸 많이 망설였는지 무척이나 시장하셨나 봅니다. 밥을 아주 맛있게 드십니다.
진호씨를 보면서 사람을 살리는 일이 모든 일에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거나 힘이 없어지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은 죄인까지도 멸망하기를 바라지 않으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이 원하실 수 없는 악한 일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자유와 생명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것도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면서 사는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합니다.
- 조성풍 신부-
때를 안다는 것, 때를 맞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해야 할 때
하지 않았기에, 또는 하지 말아야 할 때 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시간의 흐름 속에서 때를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때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는 더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기만
하면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람을 위해 마련된 안식일 정신보다는 안식일 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율법의 정신,
안식일의 정신을 일깨워주십니다.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치유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오그라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치유를 받아야 할 처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지닐 수 있어야겠습니다.
-황태웅신부-
오늘 복음의 말씀에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잘못된 율법해석을 고쳐주십니다. 그 당시 율법해석으로는 안식일에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면 병자를 치료해서는 안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면 고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동을 지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상황을 잘 아시면서 그들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고 또 그 사람의 오그라든 손을 고쳐주십니다. 그 해석이 잘못되었고, 또 잘못된 해석을 바탕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 근본 뜻을 알고 또 지켜라 하시는 말씀이고 행동입니다. 아주 지엽적이고, 부수적인 것 하나만 생각하지 말고, 큰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너희에게 한가지 물어보겠다. 율법에 어떻게 하라고 하였느냐?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악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사람을 살리라고 하였느냐? 죽이라고 하였느냐?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대단한 반박이 아닙니까? 율법에 대한 아주 명백한 설명입니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 선생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어떤 것입니까?” 하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온 마음으로, 네 온 영혼으로, 네 온 정신으로 너희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둘째도 이와 비슷합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습니다. 성서에 “네 온 힘으로” 라는 구절이 더 첨가되어있는 곳도 있습니다. 또 다른 구절에는 율법학자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훌륭하십니다. 선생님. 옳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12,32)라고 대답합니다.
본당 생활에는 전례주년에 따라, 또 계절에 따라, 매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예수님성탄은 큰 행사인데 이 때마다 구유를 꾸미고 성탄 나무, 크리스마스 트리라고 합니다만, 성탄 나무를 세우고 장식하는 일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탄생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표현하고, 또 거기에는 은총이 빛처럼 흘러 내려오는 모습을 보여주도록 장식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나무를 많이 이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서양 그림에 나오는 성탄나무 모습과 차이가 나고 또 쉽게 구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한라산, 지리산 등지에 많이 자라고 있는 구상나무를 사용할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부산에는 날씨 때문인지 이 나무가 흔하지 않습니다. 작년에는 멀리있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정말 좋은 나무를 구했습니다. 제단 위에 올려놓고 장식을 했을 때 여러사람이 보고 나무가 좋다고 했습니다. 성탄이 지난 후 앞으로 몇 년을 더 쓸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나무를 큰 고무통에 심어서 사제관 앞에 세워놓았습니다. 봄이되자 새 잎이 돋아났습니다. 몇 번이고 쳐다 보았고, 볼때마다 이번 성탄에는 나무를 구할 걱정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여름에 그 나무가 죽고 말았습니다. 죽은 나무를 치우고, 고무통을 비우면서 뿌리에 문제가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새 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있던 뿌리마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좋은나무를 힘들여 구했으니 이제 더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봄에 새 잎이 나왔다고 보고 좋아만 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지만 뿌리를 돌보는 것이 나무를 살리는 길이었습니다. 적당한 온도를 맞추어 주기 위해서 땅에다 심는 노력이라도 했어야 했습니다.
율법의 뿌리는 무엇이고 그 줄기나 가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 근본적인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은 이웃을 사랑하고 또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장 큰 계명을 지키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되, 마음으로, 영혼으로, 정신으로, 힘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거나 소홀히 하면, 마치 뿌리를 돌보지 않아서 나무를 죽이는 것과 같이 우리의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축일에 선택된 나무로 제단 위에 올려지는 어떤 나무보다, 하느님 앞에 나아가기에 더 좋은 존재입니다. 제일 필요한 일을 소홀히 하여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자신을 죽이는 일이 없어야 겠습니다.
-허인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하필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심으로 해서, 논란을 불러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꼭 안식일에 고쳐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안식일의 근본의미를 일깨워주시기 위해섭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얼마나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지적하기 위해섭니다.
이런 예수님의 의도를 잘 아는 우리가, 지금 또 다른 바리사이로,
또 다른 율법학자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문을 해봅니다.
예수님은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왜 이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주셨을까?
그 상징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손은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표현 도굽니다.
손으로 애틋하게 만질 수 있고, 접촉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악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손을 써서 어떤 형상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창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위축되어 있고, 다른 사람과 접촉을 두려워하는,
자기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일이 소극적이 되고,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으며,
그래서 뒤에 숨어서 불만을 터트리기 십상입니다.
나병환자처럼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사람도, 함께 사는데 어려움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목적은
바로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섭니다.
오른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주심으로써, 공동체의 아웃사이더로 살고 있는 사람을,
공동체의 중심으로, 공동체의 완전한 일원으로 불러들이신 것입니다.
이 사람을 치유해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를 사람들 가운데로 나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손을 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축되어서 뒤에 숨어만 있지 말고,
당당하게 사람들 가운데로 나서라, 그리고 자신을 표현하라.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라.’하는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
하느님의 백성으로, 함께 이웃으로 형제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는,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끼리끼리만 뭉치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 레지오, 우리 단체, 우리본당만 챙기는 것은 아니겠지요?
주일미사 의무만 지키면서 뒤로 물러나 불평불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또 다른,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들이 우리 자신은 아니겠지요?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바로 내 자신의 모습은 아닌지 우리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섭니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섭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멀쩡하던 손이 점점 더 오그라든다면 우리의 모습이 너무 비참하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오른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기 전에
먼저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 서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 자리에서 고쳐주시지 않고, 가운데로 불러내셨을까요?
그 의미를 다함께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행할 바를 깨닫게 하시며, 깨달은 바를 실천하게 하소서
-이기양 신부-
어느 병원 게시판에 재미있는 글이 적혀 있어서 소개합니다.
「전갈에 물렸던 분이 여기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 분은 하루만에 나아서 퇴원하였습니다. 또 어떤 분이 뱀에 물렸습니다. 그 분은 치료를 받고 3일만에 건강한 몸으로 퇴원하였습니다. 얼마 전에는 어떤 분이 미친개에게 물려 현재 10일 동안 치료를 받고 있는데 곧 나아서 퇴원할 것입니다. 몇 주 전에 어떤 분이 인간에게 물렸습니다. 여러 주일이 지났지만 그 분은 무의식 상태에 있으며, 회복할 가망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극도로 악에 받힌 사람의 입김을 모아 독극물 실험을 해보면 코브라독보다도 강한 맹독성 물질이 나온다고 합니다. 반면에 사랑을 하거나 즐겁게 웃는 사람의 뇌에서는 암세포도 죽일 수 있는 호르몬이 분비된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일 때와 부정적일 때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긍정적인 사고로 세상을 사는 것이 당연한 하느님의 뜻일 터인데 예수님을 대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태도는 대단히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들은 틈만 나면 트집을 잡으려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서 있었을 뿐 아니라 사사건건 부정적인 태도로 예수님 일행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태도를 철부지 어린이들처럼 보시고 통렬하게 비판하셨지요.
“마치 장터에서 편갈라 앉아 서로 소리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하는 아이들과도 같다.”(루가7,32)
오늘 복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고 계셨는데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찾아와 고쳐주기를 청하였습니다. 그 한편에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병을 고쳐주시기만 하면 안식일 법을 어긴 자로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셈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진 사람을 그들 눈앞에 서게 하신 후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어 보겠다. 율법에 어떻게 하라고 하였느냐?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악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사람을 살리라고 하였느냐? 죽이라고 하였느냐?"(루가6,9)
명확한 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안식일의 정신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틈만 나면 예수님을 걸어 넘어뜨리려고 벼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형식적인 안식일의 법규만을 들 뿐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답답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상관없이 불쌍한 병자를 고쳐주시지요. 안식일이 사람을 살리는 날이라고 해석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지극히 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잔뜩 화가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서로 의논”(루가6,11)하는 것으로 오늘 복음이 끝이 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율법으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위법에 해당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잘못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을 제약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안식일 법은 하느님과 사람을 위한 법이지 사람의 자유를 속박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법 위에 계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경우에 법 조항을 들어 이웃을 단죄하고 억압하려듭니다. 법의 취지는 어디까지나 사람을 살리는데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규칙은 많은 사람들이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 장치일 뿐이지 우리의 삶 위에 군림하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면 규칙을 떠나서 어떠한 경우에도 좋게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바르게 볼 줄 아는 시각의 중요성을 깨우쳐주고 하느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가르쳐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정적인 마음으로 보는 사람과 긍정적인 마음으로 보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수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겠습니까? 말 할 필요도 없이 긍정적인 사고로 살아가는 사람이지요.
부활 신앙이란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마음과 부정적인 선입견이 사람을 살리기보다는 오히려 질식시킨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도 내 삶의 자리에서 부정적인 마음보다는 긍정적이고 사람을 중요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한다면 주님의 오늘 말씀을 잘 실천하는 참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
-최혜영 수녀-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병자를 고쳐주셨다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고 있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그들이 병자의 입장을 생각할 수 있었더라면 예수님의 관대한 처사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겠습니까?
표면적인 이유는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법적 문제를 들고 나오지만 속셈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괜한 시기심에서 꼬투리를 잡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평등하게 만드셨는데 이 세상은 이렇게 저렇게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많습니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실시되고 대중교육이 확산되어 표면적으로는 모든 이들에게 균등한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교묘한 방식으로 차별이 심화되어 도저히 빈부의 차이나 인종차별 등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때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생존경쟁의 세상적인 가치를 거슬러 상부상조할 수 있는 복음의 가치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모두가 따라가는 세상의 가치에 대해 “아니오”라고 과감히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신앙공동체인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골이 잔뜩 나서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김경희 수녀-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예전의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골이 잔뜩 나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저도 그렇게 골이 잔뜩 나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공소에서 사도직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늦가을, 추수가 한창 때에 같이 있는 수녀님이 휴가를 가시고 혼자 콩타작을 시작했습니다. 하루 만에 끝내려고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을 떨었는데 해가 질 때까지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공소 마당에 형광등 불을 켜놓고 혼자 콩타작을 하고 있으려니 슬금슬금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지금 왜 이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수녀 둘이 사는데 농사는 왜 이렇게 많이 해서 고생을 하는 건가?’ 점점 마음은 복잡해지고 잔뜩 골이 나서 일을 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 일을 아무 지향 없이 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래서 즉시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막대기로 콩대를 칠 때마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 한 명씩 도와주세요.” 기도를 하면서 막대기를 내려치자 그 순간부터 탁! 탁! 탁! 막대기 소리가 주님을 찬미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골이 나 있던 마음이 갑자기 환해지면서 기뻤습니다.
공소사목 3년 동안 주님께서는 저에게 자연 속에서 많은 것을 훈련시켜 주셨습니다. 공소에서 살기 전까지는 ‘나’라는 존재가 공동체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을 때, 그리고 하고 있는 일 속에서 하느님과 교감이 될 때 기뻤습니다. 그런데 공소라는 사도직 현장은 저에게 광야 같았습니다. 어느 여름이었습니다. 초봄에 참깨 농사를 짓기 위해 씨앗 몇 톨씩 심어놓은 참깨가 어느새 제 키만큼 자라서 공소 200평 밭을 생명으로 가득 채워놓았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육적인 것도 이렇게 축복을 많이 해주시는데 영적인 것은 얼마나 더 풍성히 축복해 주실까 하고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비밀을 안 것처럼 기뻤습니다. 그래서 그후부터 작은 일 하나하나에 지향을 갖게 되었습니다. 설거지할 때도, 마당을 쓸 때도, 빨래를 할 때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향을 가지면서 순간을 성화할 수 있었습니다.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양승국신부-
<보다 자유롭게, 보다 당당하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이며, 얼마나 기분 좋은 말씀인지요.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이유한 평생 외곽에만 서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한 평생 따돌림 당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세상의 주연은커녕 조연도 못되는, 그래서 늘 무시당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단 한번도 중심에 서보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다시 한번 우리와는 철저하게 다른 예수님의 사목방침을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인간 취급도 못 받던 환자들,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어린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목활동의 가장 중심에 두십니다.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생각할수록 기쁘고 감사한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저 자신에게 던지시는 생명에로의 초대입니다.
살아도 제대로 살아있지 못하는 제게, 제가 제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지 못한 저를 향해 주님께서 다가오십니다. 황송하게도 제 손을 잡으십니다. 제 삶의 한 가운데로 저를 이끌고 가십니다. 저를 모든 속박에서 풀어주십니다. 다시 한번 자유를 주십니다. 구원을 베푸십니다.
살아도 살아있지 못하는 아이들, 늘 외곽만 맴도는 아이들, 그래서 의기소침한 아이들, 눈치만 늘 대로 는 아이들을 생각합니다.
그 아이들에게 예수님처럼 다가가고 싶습니다. 손을 잡아 자신들 삶의 중심으로 이끌고 싶습니다. 그리고 크게 외치고 싶습니다.
“아이들아, 일어나 가운데 서라. 그리고 힘차게 손을 뻗어라. 너희들은 세상의 중심이며 삶의 주역이다.”
“손을 뻗어라”는 예수님 말씀은 환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마음이 오그라들 대로 오그라든 바로 오늘 나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악의와 심술, 중상모략으로 가득 찬 바리사이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것, 사실 견디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오그라든 것은 큰 문제입니다. 미움과 증오, 용서하지 못함으로 인해 잔뜩 오그라든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께서 던지시는 ‘손을 뻗어라.’는 한 말씀으로 말끔히 펴지길 기원합니다. 그래서 보다 자유롭고, 보다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날
+율법에 어떻게 하라고 하였느냐?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악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사람을 살리라고 하였느냐? 죽이라고 하였느냐?
-강영구신부-
출애급기는 안식일(安息日)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안식일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다.
이 날을 범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출애 31,14)
안식일(安息日)은 하느님의 날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날이 안식일(安息日)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1요한 4,16) 거룩하신 분입니다(레위 19,1)
안식일(安息日)은 사랑하는 날이며 거룩한 일을 하는 날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1요한 4,16)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사랑과 자비로움으로 하느님과 하나 되는 거룩한 사람이 참된 안식(安息)을 누립니다.
안식일 계명이 우리에게 안식(安息)을 주지 않습니다.
안식일 계명은 하느님을 만나는 방편일 뿐
진정한 안식은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께서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서 착한 일을 하고 병든 사람을 치유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안식일 계명을 바르게 지키는 길입니다.
달을 보라고 했더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보며
손가락이 달이라고 우기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월요일이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 예수께는 불리하나 우리에겐 유리하니...
-박상대 신부-
앞서간 복음들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의 공생활이 본격화되고 예수님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수록 예수와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유대교 지도자들 사이의 논쟁은 갈수록 그 골이 깊어간다. 지금까지 루가복음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치유하면서 죄의 용서를 먼저 운운한 일(5,20), 예수의 제자들이 나름대로의 종교적 집단을 구성하고 있으면서 전통적인 단식과 기도를 소홀히 한다는 일(5,33), 안식일에 예수의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 비벼먹은 일(6,1)로 안식일 규정을 범한 것 등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논쟁의 빌미를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이 격렬할수록 손해를 보는 측은 예수님이시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논쟁을 피하지 않으시고 정면으로 맞으신다. 왜 그러실까? 답은 우리 인간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논쟁이 격렬해질수록 우리가 얻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와 그의 아버지 하느님에 관한 진면목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물론이고 유대교와의 격렬한 논쟁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나아가 야훼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더욱 명확히 공부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6.5)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바로 천지창조의 완성과 안식과 축복의 날인 제7일(창세 2,1-3)의 주인이시라니 이 얼마나 통쾌한 말씀인가 말이다.
오늘 복음은 또 다른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하는 일을 놓고 예수와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논쟁을 전해준다. 루가는 이 대목을 마르코복음에서 베끼면서 약간의 내용만 수정하였다.(마르 3,1-6; 마태 12,9-14)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 앞에 오른손이 오그라들어 먹고 사는 데 많은 불편을 가진 병자가 있었던 것이다. 복음서들은 모두 율사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론 회당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행동을 예의주시함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안식일에 대한 엿보는 무리들의 생각과 예수의 생각이 크게 대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분은 하늘이 무너져도 병자를 고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일단 병자를 회중 가운데 세우고 질문을 던지신다. 이 질문은 사뭇 흥미롭게 들린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악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사람을 살리라고 하였느냐? 죽이라고 하였느냐?”(9절) 두말할 것 없이 착한 일을 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답이다. 여기에 무슨 잔소리가 필요한가. 그런데 더 흥미롭고 한편 부끄러운 일은 율법을 꿰뚫고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잔뜩 화가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하려고 의논했다는 것이다.(11절)
이미 예수께서는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으로 선포하셨다.(5절) 오늘은 안식일의 핵심정신을 다시 한번 밝혀주신다. 착한 일을 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일(창세 2,2-3; 출애 20,8-11)과 할례를 받는 일(창세 17,10-11)은 야훼께 대한 유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신앙행위의 지침들이다. 동시에 이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신앙심을 저울질하는 종교적 기준이 되기도 한다. 안식일 법을 지킨다는 것은 이 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것을 이 날에 금지된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예수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문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질문은 다소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다. 혹자는 예수께서 굳이 안식일 법을 어기지 말고, 안식일을 피해 다른 날을 택하여 좋은 일을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루가 13,14 참조) 그러나 꼭 알아두어야 할 점은 예수께 있어서 내일은 없다는 것이다. ‘지금’과 ‘여기’외에 다른 것은 없다. 오늘이 안식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좋은 일을 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다.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모든 일에게 손을 떼고 쉬셨다(창세 1,2)고 해서 이렛날을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날로 생각하면 착각이다. 이 날은 창조의 완성을 의미하는 날이기에 거룩한 날이고 다른 날보다 복(福)이 많은 날이다. 이 날이 유다인들에게는 토요일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일(主日)이다. 따라서 이 날은 죽은 무행(無行)의 날이 아니라 살아있는 행위(行爲)의 날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 사명의 핵심이 바로 세상에 ‘생명을 주는 일’, ‘사람을 살리는 일’에 있지 않는가? 이들 일은 안식일에 더욱 더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 생명만 챙기고 나만 살자고 하는 행위는 안식일의 정신에 크게 어긋남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오늘 행위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불리하고 결국에는 스스로 죽임을 당할 것을 내다 보시면서도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시는 뜻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손이 오그라든 모습으로 회당에 와 있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해서 손이 오그라들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무엇 때문에 손이 오그라들었을까? 우리 신체의 모든 부분이 다 중요하지만 특히 손은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손으로 시작하고 손으로 만들어 가고 손으로 완성시킨다. 손은 우리 인생을 엮어 가는 도구이며 무엇인가를 생산해 낼 수 있는 연장이다.
인간은 손을 가졌기 때문에 문명을 창조하고 역사를 건설한다. 인간의 손은 발명의 손이요, 건설의 손이요, 생산의 손이요, 창조의 손이다. 인간이 만일 동물처럼 발만 있고 손이 없다면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지상의 한낱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손이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손이 오그라들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예수님은 이 사람을 치유시켜 주시기 위해서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고 말씀하셨다. 손이 오그라든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은 큰 수치이다. 따라서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왜 이 사람을 조용히 고쳐주시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오라고 하셨을까? "일어나가운데에 서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이 사람은 여러 반응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내가 손을 펴기 위해 안 해 본 것이 없는데 당신이 뭘 하겠다고 나오라 마라 하십니까?" 라고 비웃거나 코웃음 칠 수도 있다.
또는 사람들 앞에 나가고 싶어도 자기의 추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나서지 못할 수도 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용기가 없어서 축복을 받지 못할 때도 있다. 우리도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보여 드리자. 아니 우리의 부끄러운 면을 우리가 먼저 볼 수 있어야 하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무엇이 나의 오그라든 모습인지를 먼저 알고 거기에서 치유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과 노력을 예수님께 보여드리자. 예수님은 오늘 우리의 오그라든 손을 펴주시기 위해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드러내 보일 수 있을 때 뜻밖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에서 나온 행동이기 때문이다. 즉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착한 일과 악한 일, 사람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중에서 무엇이 옳은 일인지를 구분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 지는 기본적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것, 사람을 살리는 일은 행하고, 죽이는 일은 피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자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삶을 살펴보면 이것이 생활화되고 있지 않다. 착한 일인지 악한 일인지, 사람을 죽이는 일인지 살리는 일인지도 구별 못하고 행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그럼 왜 이런 일들이 저질러지고 있는가? 그것은 잘못된 전통, 잘못된 교육, 잘못된 가치관, 잘못된 습관 등에 그 원인이 있으며 이런 것들로 인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오그라들었기 때문이다. 즉 착한 일을 해야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악한 일을 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런 모습이 바로 손이 오그라든 모습이다. 손과 마음이 오그라들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경우 착한 일을 하지 못하고 악한 일을 행할 때가 많았고 사람을 살려야 할 경우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한 적이 많았는가? 남을 도와야 할 때 도와 주지 않는 것은 상대방을 죽게 놔두는 것과 같은 일이다.
신앙인은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남을 도와야 할 때, 착한 일을 해야 할 때, 서슴치 말고 나서야 한다. 죽어 가는 사람을 보면 어떤 형식이나 규범에 얽매이지 말고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뛰어 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손을 펴자 그 손은 이전처럼 성하게 되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았으면 "손을 뻗어라."는 말을 듣고도 손을 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신신뢰하였다. "손을 뻗어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손을 펴는 것, 그것이 이 사람이 치유될 수 있었던 전부였다.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자. 그리고 말씀하시는 대로 그대로 우리도 행하자. 그것이 오그라든 우리의 손과 마음을 펴게 할 수 있는 비결이요, 치유 방법이다.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다시 일 할 수 있도록 손을 펴주셨다. 남을 도와 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었던 손을 치유시켜 주셨다. 우리도 우리의 굳은 마음이 펴지도록 우리의 손과 마음을 주님께 내어 드리자. 자신의 안으로 오그라 들었던 손을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 착한 일을 하기 위해,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해 펴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터 우리의 손과 마음이 점 점 더 이웃과 하느님을 향해서 더 넓게 더 높게 펴지리라. 마치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팔을 벌리셨던 예수님처럼 우리의 오그라든 손을 활짝 펴자.
만일 우리가 말씀을 듣고도 마음을 열지 못하고 착한 일에 손을 내놓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치유되지 못할 것이다. 손을 펴는 방법은 악한 일에서 착한 일에로, 죽이는 일에서 살리는 일에로 관심을 돌리는 것이요, 그 때부터 완고한 우리의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 순간 하느님이 쏟아 부어 주시는 은총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자신의 손을 펴야 한다. 가난한 이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 손을 펴야 하고, 우리를 찾아오는 이들을 따뜻이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의 손을 활짝 펴야 한다. 삶의 의욕을 잃고 죽어 가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해주기 위해 우리의 손을 펴야 한다.
우리는 각자 자기가 처해 있는 곳에서 나름대로 봉사하도록 불리움 받았다. 이 부르심이 헛되지 않도록 하느님한테 받은 각자의 탈렌트를 마음껏 활용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건설될 수 있도록 우리의 손을 활짝 펴자.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손을 뻗어라."고.
사람은 태어날 때 손을 꽉 쥐고 태어나지만 죽을 때에는 손을 펴고 죽는다.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은 사는 동안 착한 일, 옳은 일,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해 손을 펴는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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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