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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30일 연중 제26주일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마르 9,38~43.45.47~48 )
"Whoever causes one of these little ones
who believe in me to sin,
it would be better for him if a great millstone
were put around his neck
and he were thrown into the sea.
말씀의 초대
주님의 영이 내리면 누구나 예언자가 된다. 모세는 모든 백성이 주님의 영을 받아 예언자가 되기를 바란다. 하느님의 기운이 머물면 온갖 축복 또한 함께하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아직 주님의 영을 받지 못했다. 그는 인간적 생각에 머물러 있다(제1독서). 부자들에 대한 경고다. 종말에 대한 준비가 없으면 재앙을 맞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날에는 재물과 보화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부정하게 쌓아 올린 것들은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그러니 지금부터 회개의 새 삶을 준비해야 한다(제2독서). 제자들과 함께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간섭하지 말라고 하신다. 오히려 남을 죄짓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신다. 죄의 원인이 되면 과감하게 피하라는 말씀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너무나 직설적인 표현입니다. 조금도 타협이 없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실천을 강요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손발처럼 중요해도 ‘죄가 된다면’ 피하라는 것입니다. 내 몸의 눈처럼 요긴해도 ‘죄의 원인’이라면 단념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습관이나 친구일 수 있습니다. 직업이나 취미일 수 있습니다. 평생 추구하던 이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계명과 위배된다면 ‘끊고 돌아서라’는 말씀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깨달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의 계명은 ‘사랑이 근본’입니다. 베풀고 나누는 행위입니다. 실천하면 쉽게 깨달아집니다. ‘베푸는 사랑’이 얼마나 은혜로운 것인지 금방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하지 못합니다. 삶을 바꾸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정 관념을 깨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직설적이고 타협이 없는 단호한 말씀을 남기신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삶은 삭막해집니다. 지식과 재물이 넘치더라도 삭막함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담아야 인생은 따뜻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데 방해되는 것들을 과감하게 정리하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보다 사랑하지 않은 죄>
-양승국신부-
죄와 관련해서 강경하고도 섬뜩한 경고말씀을 던지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죄 중의 죄’가 어떤 죄일까,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많은 분들이 죄를 고백하는데 있어, 지극히 제한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나 자신’이라는 테두리를 치고, 거기에서 단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너무도 편협한 사고로 인한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무엇에 앞서서 내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노력, 내 허물부터 먼저 살펴보고 쇄신하려는 노력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여기 더 큰 죄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죄이겠지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은 죄, 보다 능동적으로 공동선을 위해 투신하지 않은 죄, 이 시대가 심각하게 겪고 있는 아픔에 마음 깊이 동참하지 않은 죄, 보다 나은 세상을 건설하려고 노력하는 선한 의지를 지닌 의인들과 연대하지 않은 죄...
마태오 복음 25장에서는 더 명확하게 ‘큰 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은 죄, 누군가가 목말라하는데 마실 것을 주지 않은 죄, 누군가가 떠돌이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를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은 죄, 누군가가 추운 날씨에 덜덜 떨고 있는데, 입을 옷을 주지 않은 죄, 누군가가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데, 병문안 한번 가지 않은 죄, 누군가가 감옥에 갇혀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는데,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죄...
결국 우리가 일상적으로 짓는 죄 중에 큰 죄는 ‘보다 적극적으로 사랑하지 않은 죄’입니다. 나 자신으로 향하는 작은 사랑을 보다 큰 사랑으로 키워나가지 않은 죄, 나만, 우리 가족만, 우리 공동체만 문제없으면 그만이라는 극단적 이기주의로 인한 죄는 죄 중에 정말 큰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 ‘작은 사랑’이 나날이 성장해나가길 바랍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작은 안목, 작은 시야가 점점 확대되어 세상의 작은 아픔도 예민하게 느끼게 되길 바랍니다.
성숙한 신앙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유심히 바라보게 되길 바랍니다. 눈물의 골짜기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근심하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이 나 자신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보다 넓은 영역으로 확대되길 바랍니다. 세상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고, 세상의 눈물이 내 눈물이 되고, 세상의 구원이 내 구원이 되길 바랍니다.
죄를 끊어버립니까?
-전삼용신부-
우리는 세례 때 “죄를 끊어버립니까?”라는 사제의 질문에 “예! 끊어버립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세례를 받고 죄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를 짓고 고해성사를 보거나 아예 고해성사 보기가 싫어서 죄인으로 남아있기를 결심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죄를 끊어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 중독성 때문일 것이고 또 고해성사라는 탈출구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술을 여러 번 끊어보려고 했습니다. 한 번 결심을 하면 1년 내외 정도는 끊었다가 또 어떤 계기로 해서 다시 시작하곤 합니다.
술을 끊게 되는 이유는 술을 마시고 실수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다닐 때는 절제 없이 술을 마셨습니다.
한 번은 동아리 모임 때 술을 너무 많이 마셔 필름이 끊겼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전 날 일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고 생전 처음 보는 방에 실오라기 하나 걸쳐있지 않은 나체로 누워있는 겁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선배 형이 술을 먹고 눈을 떠 보았는데 사창가였고 그렇게 기억도 없이 순결을 잃었다고 했던 기억이 나서 가슴이 철렁 하였습니다.
다행히 그 방은 동아리 친구의 집이었고 전날 있었던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관이었습니다. 제가 지하철에서 한 여자 동기의 옷에 오바이트를 해서 집에서 쫓겨날 처지에 있고 저는 토한 오물 위에 주저앉는 바람에 옷을 다 벼려서 집까지 데려와 옷을 벗기고 재웠다는 것입니다.
친구는 다정스럽게 그 어머니가 해 놓고 간 해장국을 내어주었지만 저는 그 해장국을 보자 다시 구토가 나려고 해서 아침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집에서 걱정할 것 같아 옷을 빌려 입고 버스를 탔는데 버스 안에서도 다시 울렁거려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려 하였습니다. 이를 꽉 깨물었더니 물만 떨어졌고 건더기는 다시 꿀꺽 삼켰습니다. 그 모양새를 본 사람들이 저의 곁에서 멀리 떨어졌습니다.
그 후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개다.”
그러나 이런 결심은 한 달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술을 마시고 실수 할 때마다 술을 끊겠다고 매번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콜라만 마시고 있을 수 없어서, 또 사제가 되어서는 사목적인 핑계로 다시 시작하고 또 끊고 다시 시작하곤 하였습니다.
얼마 전에도 한 8개월 끊었다가 다시 마시기 시작하였는데 이젠 한 10년 동안 마시지 않던 소주까지도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술을 끊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요즘엔 술을 마시되 후회할 일을 할 때까지 가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절제가 되어가니 술은 오히려 좋은 면도 많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면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끊었다가도 그 좋은 면 때문에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담배는 피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호기심으로 한 갑 정도를 피워보긴 했지만 그 이후로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습니다. 왜 담배를 피우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술에 비해서 담배는 백해무익하다는 말을 하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고 또 아버지를 포함해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중에 현재 담배를 끊기 위해 기를 쓰고 고생하는 것을 많이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백해무익한 것을 시작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군대 들어갔을 때 큰 위기가 왔었습니다. 자대에 처음 배치되어 일병 주임이 이것저것 알려주면서 담배를 한 대 권하였습니다. 저는 담배를 안 피운다고 거절하였는데 그 선배는 기분이 나빴는지 한 달 내로 담배를 피우게 해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눈을 뜰 때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군대용어로 말하자면 저를 갈궜습니다. 그러나 저는 끝까지 담배피우기를 거부하였고 그 선임은 제대하는 날까지 저를 괴롭혔었습니다. 이런 일까지 있었으니 제대하고도 담배를 다시 피울 일은 없는 것입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이유는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알고 또 그동안 참아왔던 것을 일순간에 무너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술처럼, 한 번 시작하면 끊는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울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저에게 담배일까요, 술일까요? 담배도 술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는 담배처럼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알지만 술처럼 끊었다고 마셨다가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죄를 완전히 끊지 못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눈이 죄를 짓거든 눈을 파 버리고 팔이 죄를 짓거든 팔을 잘라버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정말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만큼 굳은 결심으로 죄를 끊어버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남을 죄 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져 죽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만약 오늘 복음 말씀처럼 그대로 실행한다면 사지가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사람이 죄를 반복하게 되는 이유가 그 백해무익함을 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작은 거짓말이라도 한 번 하느니 천 번 죽는 편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작은 거짓말이라도 그 결과가 얼마나 안 좋은지를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농약을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농약을 그냥 한 번 마셔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를 끊기 위해서는 그 죄의 백해무익함을 절실하게 깨닫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지으면 어떤 결과가 찾아올까요?
바로 성령님은 죄와 함께 하실 수가 없기 때문에 성령님의 열매가 시들어버립니다. 즉,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고 기쁨이 우울함으로, 평화가 초조함이나 두려움으로 바뀌고 자기 절제가 되지 않아 계속 그 수렁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한 마디로 행복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을 묵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죄인은 단 한 순간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죄의 결과들은 고해성사를 하면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죄를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짓는 죄의 결과가 이 세상에서만 유지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죄의 결과는 영원히 지속됩니다.
가끔 연세 드신 자매님들이 이야기 하는 중에 예전에 남편이 바람피웠던 기억들을 잊지 못하고 그것이 용서가 아직도 안 된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만약 한 번 외도를 하는 것이 평생 그렇게 커다란 상처를 남에게 주고 또 그 상처로 인해서 평생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임을 안다면 어떻게 바람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은 말로는 용서를 한다고 하더라도 상처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짓는 죄들의 결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상처를 계속 지니고 계셨던 것처럼 부활한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며 영원히 우리의 죄를 되새기며 가슴을 쳐야 할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런 상처를 받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이 그리스도께 더 감사하게 되는 이유가 될 것이기는 하겠지만 또한 그렇게 고통을 드리는 줄 알면서도 죄를 반복했다는 죄책감은 마치 베드로가 닭이 울 때마다 눈물을 흘려 얼굴에 눈물 골이 파였다고 하듯이 우리를 영원히 슬프게 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바람을 피우고 용서를 받아서 함께 사는 것보다 처음에 했던 서약을 깨지 않고 온전히 지켜 끝까지 완전한 부부로 살아가는 것이 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습일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여 내 죄를 대신하여 수난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마치 거저 얻는 무엇인양 가볍게 여기고 죄를 반복한다면 무한하신 그리스도도 용서를 청하는 우리에게 당신의 수난공로를 나누어주시기는 하시겠지만 마음이 아프실 것입니다. 또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해 그 분이 마음아파 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죄에 떨어집니다.
오늘 예수님은 죄에 대한 인식을 다시 가지라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눈을 뽑고 손발을 자를 정도의 결심을 하고 고해를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쩌면 또 범할 죄를 고해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자비를 비웃는 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해성사를 남용하지 맙시다. 올바른 성찰이란 정말 앞으로는 그런 일을 다시 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까지 봉헌하고 나서야 완성되는 것입니다
열리고 확장된 자아
-김찬선신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그러면 팔촌이 땅을 사면 어떻습니까?
배가 아프지는 않고 발가락 정도는 아프겠지요?
전혀 남이 땅을 사면 어떻겠습니까?
아마 아무 데도 아프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와 남 사이의 경계에 있는 관계일 것입니다.
남이 아무런 관계가 없는 관계라면
사촌은 우리 안에 들어오는 관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관계도 아닌 관계이고
그래서 경쟁적 관계입니다.
그런데 형제 사이도 우리가 아니고 경쟁 관계일 수 있고
남도 남이 아니고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우리란 개방되고 확장된 자아의 표현인데
완전히 닫히고 축소된 자아는 형제도 남이거나 경쟁 관계가 될 것이고
열리고 확장된 자아는 모든 사람을 우리로 생각할 것입니다.
사촌이란 그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아닌 관계입니다.
사촌이란 그의 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인 관계이지요.
그러므로 사촌이 우리 사이가 되려면
할아버지로부터 관계가 맺어야 하고
그것도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이렇게 관계를 위로, 위로 올라가서 맺으면
8촌도 100촌도 사랑의 우리 사이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만나는 순간,
하늘에서 보는 땅 만큼,
또는 하늘을 덮고 있는 땅 만큼
이 땅 위의 모든 이가 우리가 될 것입니다.
산에 올라가면 시야가 넓어져
왜 그리 좁은 땅 덩어리 안에서 금을 그어 놓고
아옹다옹하며 살았는지 보게 되고
그래서 마음이 넓어집니다.
이런 의미로 우리는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런 의미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고백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영, 즉 사랑이 모든 이에게 내리고
아버지의 선, 즉 유산이 모든 이에게 주어지고
아버지의 힘, 즉 능력이 모든 이에게 주어져도 배 아프지 않는
열리고 확장된 자아의 사랑을 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진영에 있는 원로에게 영이 내렸다고 배 아파하는 여호수아와
자기들과 함께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빌어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시기 질투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령의 은사를 마치 자기들이 특허 낸 것처럼 독점하려 합니다.
모세의 뛰어난 제자 여호수아와 주님의 제자들조차 그러합니다.
그러니 보통의 우리가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 하는 것,
그것 정상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에게 열리고 확장된 자아의 모세와 주님은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시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 너의 자아를 열고 확장하라 하십니다.
회개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쳐라
-배광하신부-
꺼지지 않는 지옥불
소리 높여 울어라
순수한 어린이와 탐욕스런 어른을 비교한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여름 밤…아이들은 꿈을 꾼다. 아이들은 꿈속에서 잠자리를 잡고, 아이들은 꿈속에서 물놀이를 하고, 아이들은 꿈속에서 하늘을 날아 다니고, 아이들은 꿈속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아이들은 꿈속에서 한껏 뛰어 놀며, 아이들은 꿈속에서 탐험가가 된다. 아이들은 꿈속에서 피터 팬이 된다.
여름 밤…어른들도 꿈을 꾼다. 어른들은 꿈속에서 해외 여행을 하고, 어른들은 꿈속에서 큰 성공을 하고, 어른들은 꿈속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고, 어른들은 꿈속에서 고급차를 타고 다니며, 어른들은 꿈속에서 부자가 된다. 어른들은 꿈속에서 스크루지가 된다.”
어른들의 삶이 고달픈 것은 탐욕에 눈이 멀어 어릴적 동심을 잃어버렸다는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순수한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면 어느새 마음이 삭막하고 무디어져 고약한 냄새를 풍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채우고 또 채워도 만족할 줄 모르게 됩니다. 물론 나눔은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 결과 가장 비참한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탐욕이 커지면 커질수록 쾌락에 더욱 빠져들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적인 쾌락 역시 만족이 없어서 더욱더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됩니다. 오감을 유혹하는 더 큰 쾌락을 찾고 끝내 만족하지 못한채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됩니다. 그같이 불행한 인생을 사는 인간들을 향하여 오늘 야고보 사도는 이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야고 5,1.5)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심판과 종말과 지옥벌에 대한 의식과 두려움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아무 두려움 없이 사치와 쾌락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 우리 어른들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죄를 짓게되면, 크게 꾸짖을 때에 “이놈아! 하늘 무서운줄 알아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 이 시대는 하늘 무서운줄 알고 자신의 죄를 뉘우쳐 크게 울수 있어야 합니다. 소리 높여 깊은 참회의 눈물을 흘릴때, 자비하신 하느님 용서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받을 상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성인의 신학은 그 출발이 눈물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통회의 눈물에서 그의 신학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아우구스티누스 성인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많은 성인 성녀들이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죄를 뉘우치는 눈물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그토록 자신만만하였고, 오만한 박해자, 다혈질적인 인물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아예 울보가 되어 버렸습니다. 바오로의 편지 곳곳에서 죄인들에 대한 연민과, 세속적인 탐욕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우매한 인간들을 보며 자주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도무지 통회할 줄 모르고 세상 탐욕에 빠져들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연민의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라 미쓰요’라는 일본인 여성 변호사가 있습니다. 그녀는 중학생 시절 친구들의 따돌림을 견디지 못해 여러 차례 자살을 기도합니다. 그리고 끝없는 방황 속에 비행 청소년으로 성장합니다. 더구나 부모의 폭행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하여 열 여섯 살의 어린 소녀로 일본의 범죄 조직 야쿠자 두목과 결혼하나 아이를 낳고 이혼을 당합니다. 그리고 결국 윤락가의 몸을 파는 여인으로 타락해 버립니다. 실로 지독한 방황속에 좌절과 절망을 딛고 일어나 상상하기 어려운 피나는 노력으로 일본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인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비행 청소년을 변호하는 변호사가 되어 사랑을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가 한국을 방문하여 서울과 안양 소년원 방문에서 어렵게 배운 한국말로 그곳 원생들과 부모님들, 지도위원 등에게 눈물의 강연을 감동적으로 가졌습니다. 그녀는 연설 제일 마지막에 이같이 힘주어 말하였습니다. “제발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열심히 살아주길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발이 죄를 지으면 발을 자르라고 하시며 지옥불의 끔찍한 두려움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 뒤에는 늘 회개를 강조하시는 장면이 뒤따릅니다. 참된 회개의 눈물로 다시금 돌아서면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받을 참된 상인 것입니다.
죄는 단호하게,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이기양신부-
오늘 복음은 죄 짓게 하는 사람은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고,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발을 찍어 버리며, 눈이 죄 짓게 하거든 눈을 빼어 버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실천한다면 한 주가 지나지 않아서 애꾸눈이 된 사람, 손이나 발이 하나 둘씩 없어지는 사람이 꽤 생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어떠한 마음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할까요?
신라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 김유신 장군입니다. 그런데 김유신이 젊었을 때 아끼던 말의 목을 내리친 사건이 있습니다. 15살 때 화랑이 된 김유신은 천관이라는 기녀를 알게 되었는데 이 기녀는 미모뿐 아니라 학식까지 뛰어나 말 그대로 재색을 겸비한 미인이었습니다. 천관녀에 반한 김유신은 그 집을 자주 찾았고 천관녀와 사랑을 키워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부모님께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됩니다.
"네가 장차 삼국통일의 큰 꿈을 천하에 펼칠 대장부란 말이냐?"
심한 꾸지람을 들은 김유신은 천관녀의 집에 두 번 다시 출입하지 않기로 굳은 결심을 합니다. 어느 날 김유신은 술에 취한 채 말을 타고 집으로 오다가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김유신을 태운 말이 습관적으로 천관녀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김유신이 눈을 떠보니 천관녀가 생긋 웃으며 "그럼 그렇지, 오실 수밖에 없지요"하고 반갑게 맞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김유신은 칼을 빼어 말의 목을 치고 그 길로 돌아서서 자기 길을 갔습니다.
그 후 재상에 오른 김유신은 천관녀가 자신에게 한을 품고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천관사를 지어 혼을 달랬다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결단이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죄의 유혹 앞에서 바로 이러한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습관적으로 되풀이하는 죄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말'로 죄짓는 일이 우리 주위에 참으로 많습니다. 남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가 하면 소문을 내고 헐뜯는 버릇이 습관적으로 배어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인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심한 상처를 주고 공동체를 분란에 빠뜨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남에 대한 말을 할 때마다 한 번 더 생각해보는 노력을 하고 남에게 희망을 주는 말을 하도록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하지 못한다면 주변에서 그런 그를 위해 아픈 충고라도 서슴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 오늘 예수님의 단호한 가르침입니다.
또 세상을 살면서 인색한 것도 큰 죄입니다. 부모 형제간에 불화가 끊이지 않고 왕래가 단절되며, 상처를 주고받는 일들이 생기는 것은 많은 경우 인색함에서 비롯됩니다.
어느 마을에서 한 아이가 태어날 때 백발 노인이 어머니에게 나타나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 테니 말해보라고 했답니다. 그 어머니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이 아이가 모든 이에게 사랑 받는 아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하고 청했습니다. 어머니 소원대로 아이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무럭무럭 자랐는데 받는 데만 익숙해져서 버릇없는 이기적인 아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을 나눠줄 줄은 모르고 계속 의지한 채 받으려고만 하니 사람들이 하나 둘 주변에서 떠나고 삶 자체가 아주 고독해졌습니다. 한참 지나서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다시 백발 노인이 나타나 소원을 묻자 아이 어머니는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하고 간절히 청했다고 합니다.
사랑은 부메랑 같은 것입니다. 사랑을 베풀면 없어지는 것 같지만 다시 더 큰 사랑으로 돌아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칭찬과 배려, 나눔은 세상의 죄를 없애는 지름길이며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되는 좋은 방법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지도 말고 또 남을 죄짓게 하지도 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내 작은 언행이 남을 아프게 하거나 죄 짓게 한다면 고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의 인색함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한다면 나누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함께 풍요로워지는 지름길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아주 단호하게, 사람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살아갈 것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오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실천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위한 아버지의 간절한 호소
-장광재신부-
바 늘과 실이 사이좋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입에서는
콧노래도 흘러나옵니다. 가다 쉬다 하면서 바늘과
실은 하나의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 냅니다. 서로가 힘을 모
아 만든 작품이기에 더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가위가 바늘
과 실의 우애가 샘이 났는지 한마디 합니다.
“저 옷에 남아 있는 흔적을 찾아봐. 그게 누구의 것인지
확인해 보면 누가 저 옷의 진짜 주인인지 알게 될 거야! ”
이 말에 바늘은 옷의 구석구석을 찾아봅니다. 그런데 남
아 있는 흔적이라곤 실밖에 없었습니다. 실망한 바늘은 실
을 떠납니다. 열심히 일을 해도 공로는 언제나 실에게 돌아
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지요. 이제 바늘은 혼자서 일을 합
니다. 실을 위해 언제나 비워 두었던 바늘귀도 막아버렸고
저번보다 더 아름다운 옷을 만들기 위해 쉬지 않고 열심히
합니다. 그리고 완성된 옷을 감격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때 바람이 불었고 완성된 줄 알았던 옷은 천 조각
들이 되어 떨어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바늘은 그 충격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정신이 든 바늘은 실과 함께 했던 때의 행복한 추억을 떠
올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가위의 한마디 말에 실을 떠났던
자신이 바보 같았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실을 찾아갔
습니다. 실은 반갑게 바늘을 맞아 주었고 다시는 우열을 따
지는 어리석은 일로 헤어지지 않기로 다짐하며 새로운 옷
을 만들기 위해 그동안 막아 놓았던 바늘귀를 다시 뚫고 실
을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서 바늘은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실은 하느님이시고 그분의 은총이며 섭리입니다. 바늘귀
는 하느님을 위해 비워 놓은 우리 마음의 공간을 뜻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내어 드릴 때 하느님은 기꺼이 그
공간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결국 우리가 거둔 열매
인 아름다운 옷을 끝까지 지켜 주는 것은 바늘인 우리가 아
니라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며 우리와 함께 해주
신 실인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읽다가 보면 자신의 딸과 아들을 죽음에서
생명에로 이끌기 위해 간절히 호소하고 계시는 아버지 하
느님을 보게 됩니다. 유한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지옥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로 꼭 들어가야 한다
고 절규하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 제발 육신의 완전함을
지키기 위해 죄를 선택하기보다 참된 생명을 선택하라고,
잠시의 쾌락보다 영원한 것을 위해 아낌없이 버리고 포기
하라고 눈물로 호소하시는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집중하면 하느님보다 명예와 권력 그리고 돈이
더 중요하게 보입니다. 오래 살기 위해서 꾸준히 운동을 하
지만 영원한 생명을 위해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요. 처
음엔 우리에 대한 경고로 들리던 복음말씀이 자꾸 읽다 보
니 사랑하는 자녀를 위한 아버지의 간절한 호소로 다가옵
니다. 바늘과 실이 하나여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하
나가 되어야 함을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가끔 하늘의 달과 별을 보며 마음의 여유를 찾는 그런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정애경 수녀-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만남 가운데 하느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더 아름답게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만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며, 제자들의 실수에 대해 끊임없이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로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 중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마르 9,?34)을 했습니다.
제자로 불러주신 것은 섬기라는 부르심인데 제자들은 군림하고 싶어했습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바로 섬기라는 표시인데 이것을 망각하면 하느님 나라와 관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실수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차근차근 가르쳐 주십니다.
제자들은 전에 더러운 영을 쫓아내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9,?28 참조)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불쾌하게 생각했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기들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 요한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예수님께 와서 당당하게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9,?38) 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그가 제자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한은 이 일이 잘한 일인지 예수님께 평가를 받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잘 보아야 할 것은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9,?38)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단지 마술적인 주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 된 자격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41절)입니다. 하느님의 자녀 된 자격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곧 성령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 이에게는 이 모든 것이 가능”(23절)한 것입니다.
믿는 자만이 하느님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더러운 영은 깨끗한 영, 곧 성령으로만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생각하기엔 이러한 기적은 예수님의 허락을 받은 자들한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기득권이 훼손당한다고 생각함으로써 그들을 막았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편협하고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면서 요한에게 그러한 행위를 “막지 말라.”(39절)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후에 즉시 주님을 비방할 사람은 없다고 하시며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내쫓는 것은 그가 주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고 그가 만일 주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게 되면 그는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하여 싸우기에 주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들을 막을 이유가 없기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41절)라고 비유를 들어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자들을 대접하는 것은 그가 제자들을 보내신 주님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그들을 보내신 주님을 대접한 것과 같은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마태 25,?40)이라며 이러한 친절한 행위는 반드시 그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를 대접하는 것이 상급을 잃지 않는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사람도 반드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당시 기록을 보면 실제로 로마 군인들이 반역자의 지도자를 처형할 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목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진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끔찍한 이 사건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경고는 요한의 그릇된 행동이 예수님을 따르는 한 형제라도 죄짓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순수한 마음으로 마귀를 쫓아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이러한 일을 조심하도록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범위를 열두 제자에만 한정하지 않고 주님을 믿고 복음 전파에 참여한 모든 숨은 사람도 제자들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모든 형제를 인정하고 격려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애욕은 그 빛이 감미로우며>
-양승국신부-
요즘 "청장년급사증후군"이란 증세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다국적 연합군처럼 포위해오는 과로와 스트레스, 중압감을 견디다 못해 우리의 육체에는 과부하가 걸리고, 자신도 모르게 세상을 하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인생이 제대로 활짝 펴보지도 못한 채 요절한다는 것은 너무도 잔혹한 일이지요. 특히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어제도 저희 집에 사는 한 아이 아버지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겨우 48세의 나이에 말입니다. 병원 영안실로 가던 차안에서 아이는 할말을 잃은 채 눈물만 뚝뚝 떨구었습니다. 흐느끼는 아이의 등을 두드려주는 일 외에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말없이 이승을 떠나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육신이란 참으로 덧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천년만년 언제까지나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 것 같았는데, 육신을 내려놓기란 순식간입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우리의 육신이란 이렇게 유한합니다. 결국 숨 한번 떨어지면 모든 것이 그걸로 끝입니다. 결국 우리의 육신은 하느님으로부터 잠시 빌린 영혼의 거처입니다. 육체란 어느 정도 빌려 쓰다가 때가 오면 하느님께 반납해야할 유한한 대여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주 강경한 표현까지 동원하시면서 우리에게 영혼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육체적인 불구가 영적인 불구보다 차라리 더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시는 젊은 분들, 건강한 분들, 내게는 아직 멀었으려니 생각하지만 육신의 소멸에는 순서가 없답니다.
죽음이란 순식간에 우리 곁에 다가와 앉습니다. 숨이 끊어진 우리의 육신은 단 몇 일도 지나지 않아 땅에 묻힐 것이며,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형태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육체의 본모습입니다.
그에 비해 영혼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요. 육체는 떠나가도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지속될 존재가 영혼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값진 투자, 안정된 미래를 위한 진정한 투자는 잠시 지나가는 육신을 위한 투자가 아니라 바로 우리 영혼을 위한 투자입니다.
이제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우리의 지독한 이기심과 그릇된 욕망을 내려놓도록 합시다. 이제 우리를 영적으로 살지 못하게 가로막는 모든 비본질적인 요소들을 과감하게 잘라내도록 합시다.
잠시 지나갈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걸지 말고, 그저 나약한 우리 육신의 안위에 너무 지나친 의미를 두지 맙시다. 뜬 구름처럼 흩어져버릴 유한한 것에 목숨을 걸지 않고, 영원으로부터 존재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만날 준비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법구경의 말씀처럼 가까이 사귄 사람끼리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깁니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지요. 연정에서 근심이 생기는 것임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십시오.
오늘 복음과 너무나 유사한 구절도 있군요 "애욕은 그 빛이 곱고 감미로우며 즐겁게 합니다. 또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산산이 흐트려 놓습니다. 관능적인 애욕에는 이와 같은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십시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십시오."
외유내강(外柔內剛)
-박상대신부-
겉으로는 부드럽고 순한 태도를 보이나 마음속은 단단하고 굳센 의지를 지니고 있음을 뜻하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이 있다. 바로 오늘 복음을 두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가 싶다. 제자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스승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막았다는 요한의 옹졸함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이를 말리지 말라는 외유(外柔)의 태도를 보이신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예수를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며,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냉수 한 잔이라도 대접하는 사람에게 보상까지 약속하신다. 타인에 대한 예수님의 한량없이 넓은 도량이다.
2000년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 교회가 진즉 배웠어야 할 도량이 아니던가? 사실인즉, 우리 교회는 적어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타종교와 비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하여 단호한 외강(外剛)의 입장을 취하여 왔다. 우리 교회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철의 장벽을 치고 구원을 위한 말씀과 성사를 우리들만의 것으로 여겼고, 이에 대한 타인의 참여를 철저하게 배제하였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헌장, 교회일치에 관한 교령,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등의 문헌을 통하여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기본공식을 수정하였다. 공의회는 우리 가톨릭교회밖에도 얼마든지 성화(聖化)의 요소가 발견되며, 타종교 안에도 하느님 "말씀의 씨"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과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것을 "기쁨과 경의를 가지고 발견하도록 노력하여야 함"을 천명하였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죄를 짓게 만드는 사람과 실제로 죄를 짓게 하는 신체의 일부에 대하여 예수님은 내강(內剛)의 태도를 보이신다. 그것도 소름끼칠 정도로 단호하고 엄격한 차원이다.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져죽는 편이 훨씬 낫다니,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씀인가. 그 뿐이 아니다. 손이 죄를 짓게 하면 그 손을 잘라버리고, 발이 죄를 짓게 하면 그 발을 찍어버리며, 눈이 죄를 짓게 하면 그 눈을 빼어버리라는 말씀은 실로 엄청난 요구사항이 아닐 수 없다. 때로는 듣지 않고 피해버리고 싶은 부분의 말씀이기도하다. 우리가 결코 지킬 수 없는 과장된 요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다.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의 믿음에 책임이 있으며, 신체의 일부라 할지라도 그것이 죄를 유발시킨다면 몸 전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 뿌리부터 잘라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손과 발과 눈은 어떤 것인가? 사람의 행동을 성취하고, 그 행동을 얼마든지 악행(惡行)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신체의 기관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들 신체의 기관들이 악행의 도구가 될 바엔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말 그대로 따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다. 매일 죄를 지으며 사는 수억 명의 신자들이 사지(四肢)가 멀쩡한 채 그대로 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사실 손과 발과 눈은 인간의 내적 지향이 결정하는 대로 따라 움직이는 외적 표현에 불과하다. 그러니 신체의 기관, 즉 도구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의 내적 지향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결론으로 오늘 복음의 말씀을 쉽게 넘겨서는 안 된다. 비록 과장되고 무리한 요구이긴 하지만, 죄의 심각성을 진지하게 깨닫고, 우리 신체의 모든 기관들이 선행(善行)의 도구로 사용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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