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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0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 12,8-12)
“Everyone who speaks a word
against the Son of Man will be forgiven,
but the one who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ot be forgiven.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공동체에게 감사한다. 에페소 신자들이 주님께 믿음을 두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안다고 증언하면, 그분도 우리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라고 하신다. 어떻게 증언할 것인가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성령께서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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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주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성령은 누구십니까? 성령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영, 얼이십니다. 곧,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사랑이시고, 진리이시고, 생명이시며, 평화이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이나 행위는 곧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나,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당신을 안다고 증언한다면, 당신 또한 그를 안다고 증언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증언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모른다고 하는 자는, 당신께서도 그를 모른다고 하시겠답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나,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증언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걱정할 것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는 바로 그 모습으로 당신의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해야 할 말을 성령을 통하여 다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상의 위협에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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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얘기하고 설득하는 것만이 증언은 아닙니다. 삶 자체가 예수님을 증언할 때에 그 증언은 더욱 힘이 있습니다.
굳이 말로 전하지 않더라도 ‘저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면, 그가 바로 증언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저이는 신자라지만 어딘가 미심쩍어.’ 하는 느낌을 준다면, 어찌 증언하는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무심코 드러내는 말과 행동 속에 주님을 증언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풍기는 믿음의 향기입니다. 그 향기는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는지, 교회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깊이와 실천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좌우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말만 신자이지 예수님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생각보다는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나 가까이 살고 있는 이웃들에게 먼저 주님을 증언하는 말과 행동을 실천합시다. 그들에게 풍기는 예수님의 향기는 결코 그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은총 선물
- 김희준 신부-
돼지 한 마리가 울타리 주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빨갛게 잘 익은 홍시 하나가 돼지 눈앞에 떨어졌습니다.
돼지는 얼마간 킁킁거리다 조심스럽게 입 안에 넣어 봤습니다.
그러자 꿀맛같이 단맛이 입 안에 퍼졌습니다. 돼지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그 천상의 맛을 다시 먹고 싶어 주둥이로 감이 떨어진 주위를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감이 나올 리 없었지만 돼지는 멈출 수도 없었습니다.
흙 속에 묻혀 있던 깨진 병 조각들이 돼지의 주둥이를 찔러 피가 나고
기진맥진해진 돼지는 마침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에도 돼지는 달디 단 홍시의 맛을 잊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 숨진 돼지 등 위로 빨간 감 하나가 뚝 떨어졌습니다.
감이 나무 위에서 떨어진 줄도 모르고 미련하게 땅만 파헤친 돼지의 모습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미련함을 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허락되었을진대, 정작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하기보다는
생존 경쟁 속에서 상처입고 피를 흘려도 땅의 일에만 집착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은총을 입은 아홉 명의 나환자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복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해 주어진 선물임을 인정하고
겸손되이 감사드리는 사람입니다.
성령은 어디에
- 유정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드넓은 사랑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참된 복음이며 하느님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었지요. 이 증언과 복음 선포 역사는 목숨을 건 용기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한편 그리스도교 역사상, 대대적인 선교는 식민지를 개척하던 15세기 말에 시작되었습니다. “1492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부스가 ‘서인도’?를 발견하고, 1497년에 바스코 드 가마가 인도를 발견”?(「여성과 그리스도교?(3)」)?한 것이 선교에 박차를 가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와 복음 선포는 예수님 때와는 정반대 양상을 보입니다.
15세기 말에 교황은 세상이 교회를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했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동등한 가치를 지녔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놀랍도록 신속한 아메리카 정복은 그리스도교의 연민을 조금도 보여주지 않았고, 특정한 사람들은 본래부터 노예로 지어졌다는 고대 아리스토텔레스 신조를 가지고 인간과 하위 인간을 나누었지요.”?(같은 책) 이런 가톨릭의 관점에 따라 하위 인간은 그리스도인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고 치부되었습니다. “아메리카인들은 성찬례에 참여할 수 없었고, 당연히 토착민 성직자도 없었던 것입니다.”?(같은 책)
유다 회당이나 관청에 끌려가 어떻게 증언을 할지 걱정하던 처지에서 다른 민족과 다른 신앙인을 동등한 인간으로도 취급하지 않는 이 역전극은, 선교가 얼마나 그 본뜻에서 멀어져버렸는지 확인시켜줍니다. 성령은 그 때 그들에게 무엇을 알려주셨을까요??
미리 하는 걱정과 그때에 역사하시는 성령
-김찬선신부-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내용들입니다.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면
당신도 하늘에서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앞에서 얘기하시고선 곧 바로 뒤에선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것은 용서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모른다고 하는 것과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것은 많이 다른 것인가요?
비슷한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거슬러 말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씀은
거슬러 말하는 것이 모르다고 하는 것보다
잘못이 중하지 않아서 용서받을 수 있다는 뜻이기보다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그 만큼 더 중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신 말씀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거역해도 되고
성령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이니
성령을 고백하는 것이나 성자를 고백하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말이란 어떤 것일까요?
성령은 없다고 얘기하는 것일까요?
성령은 악령이라고 얘기하는 것일까요?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물론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과 연결시켜 이해를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모름지기 신앙인이라면
성령이 없다거나 성령은 악령이라고 얘기하는 것과 같은
그런 모독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이라도 이런 잘못은 자주 범합니다.
성령께서 아니 계신 듯이,
성령께서 아무 것도 하시지 않기에 필요 없다는 듯이
무엇을 할 때 걱정을 하는 잘못 말입니다.
걱정이란 그런 말을 쓰지 않아도 늘 “미리”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그때에”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수많은 걱정들이 다 때가 되면 “그때에” 다 알려주실
성령의 역할을 부정하고 필요 없다는 듯이 “미리” 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도 한 번은 그러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설교를 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미리”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되어
막상 사람들 앞에 서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니 성령께서 프란치스코의 말문을 막은 것이지요.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내려왔습니다.
“미리” 하는 걱정은 “그때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손길을 막고,
이것이 바로 성령께 맡기지 못하는 성령에 대한 모독인 것 같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를 추구하고 찾아내는 사람이다.(알버트 슈바이처)
<걱정에 발목이 잡혀>
-양승국신부-
유학 시절 때의 일입니다. 서둘러 어학연수를 끝내고 대학교 기숙사로 들어갔습니다. 3-4개월 정도 밖에 안 되는 짧은 어학연수로 무슨 수업이 가능하겠냐고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젊은 혈기 하나만 믿고 ‘그래도 한번 해 보는거지!’하며 첫 학기 수강신청을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수업시간에 귀를 쫑긋 세우고 제일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강의를 들었지만 도통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업태도는 만점이었지만 이해도는 빵점이었습니다.
가끔씩 교수님들이 양념삼아 우스갯소리를 하실 때가 제일 난감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배를 쥐고 깔깔 웃어대는데, 저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따라 웃었습니다.
그렇게 지옥 같은 첫 학기가 마무리되면서 또 다른 지옥,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구술시험이었습니다. 교수님과 일대 일로 마주 앉아 교수님의 질문에 대답해야하는 참으로 괴로운 시험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강의 내용을 요약하고 또 요약했습니다. 몇 가지 가상 질문에 대한 답도 작성해서 달달 외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걱정되던지 밤잠을 다 설쳤습니다. 드디어 내 차례, 교수실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얼마나 긴장되던지 심장 뛰는 소리가 쿵쾅쿵쾅 들렸습니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 자리에 앉으니 분위기는 전혀 달랐습니다. 교수신부님은 수업시간과는 달리 너무나도 편안하고 자상하게 대해주셨습니다.
“그래, 첫 학기에 얼마나 고생이 많냐? 건강은 괜찮냐? 수업시간에 잘 이해했냐? 잘 알아들은 것들, 이해한 것들만 몇 가지 말해봐라.”
떠듬떠듬 계속 말이 막히고 꼬이는 저를 바라보며 빙그래 웃으시던 교수님은 당신 강의의 핵심 몇 가지만 조목조목 짚어주시며, 그래 첫 학기 수업 듣느라고 고생 많았다, 잘 했다고 하시며 시험을 마치셨습니다.
나오면서 혼자말로 그랬습니다. “별것도 아니었는데 괜히 엄청나게 걱정을 했군, 걱정하느라 빠진 몸무게 3Kg 이거 어떻게 보충하지?”
살다보면 걱정에 발목이 잡혀 인생이 괴로운 분들 많이 계십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우리네 인생, 그 안에서 쓸데없는 걱정으로 허비하는 시간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연구조사에 따르면 우리의 걱정 가운데 96%는 쓸 데 없는 것이랍니다. 내게 해당되지도 않을 걱정, 괜한 걱정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찬찬히 짚어보니 우리는 참으로 많은 걱정들의 틈바구니 속에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돈 걱정, 건강 걱정, 자식 걱정, 미래 걱정, 자동차 사고 걱정, 시험 걱정, 취직 걱정...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걱정하지 마라. 성령께서 계시지 않느냐?”
우리가 비록 나약하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강건합니다. 우리가 비록 무지하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지혜롭습니다. 우리가 비록 죄인이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성스럽습니다. 우리가 비록 죽음을 향해 걸어가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영원히 살 것입니다.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 유경희-
현재는 군종교구의 지원과 군종 신부님들의 노력으로 사관생도들의 가톨릭 복음화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신자 수가 많이 증가하고 있으나 60?70년대 초만 해도 타종파에 비하여 사관생도 신자 수가 적은 편이었다. 그로인해 그 당시 신자인 선배에 관한 기억이 하나 있다.
계급이 높은 선배인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분이었다. 그 선배는 생도 시절에는 신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떠한 계기로 신자가 되었는지 물었더니 월남전 파병 당시 주둔하고 있던 기지 옆에 중대 규모의 미군 전차부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미군부대에 군복에 로만 칼라를 한 미국 군종 신부님이 혼자 지프차를 운전하고 매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방문하는 것을 관찰했다고 한다. 전투지역에서는 같은 통로를 정기적으로 반복하여 다니는 것이 가장 위험한 행위인데 그 신부님은 대담하게 행동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저 정도의 신념과 용기를 갖게 하는 것이 종교라면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귀국하자 바로 가톨릭에 입교해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 군종 신부님은 하느님의 배경을 믿고 행동하셨을 것이고 지금 생각하니 베트남이 원래 가톨릭 신자가 많았으니 베트콩 중에도 신부님을 알아보는 자가 있었을 것이고 그 신부님의 용기에 감복해 적이지만 습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늘 복음을 보면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하셨다. 그 군종 신부님이야말로 이 말씀을 믿고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실천한 분이신 것 같다
용서받지 못할 죄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모른다고 하면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우리를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상당히 감정적인 말씀으로 들리기도 하고,
하느님의 아드님답지 않은 매우 인간적인 말,
그것도 좀생이의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이 그러셔서는 안 될 것 같고
뭔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봐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아무리 당신을 거슬러 말해도 용서한다고 하였으니
무시당한 것에 대한 감정적 보복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모른다고 하시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모른다고 할 때
주님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시는 그 깊은 뜻은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일지 얼른 짚이는 것이 없습니다.
한참을 생각해보니 이런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른다고 하겠다는 것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모르고 지내는 사이라는 것의 천명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앞으로 모르는 사이로 지내겠다는 의지의 천명입니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앞으로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천명입니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그와 나를 엮거나 얽지 말라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매우 악마적입니다.
악마가 그러하지 않습니까?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하십니까?’
‘간섭하지 말아주세요.’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모르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 의해 상관이 없어진 당신과 우리의 관계를
당신도 어쩔 수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지체를 모르실 리 없고
당신의 지체를 떼어낼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손가락을 모를 리 없고
괜히 자기 손가락을 떼어낼 리도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모른다고 하면 당신도 모른다고 하시겠다는 뜻은
우리에 의지에 따른 단절입니다.
계속 단절하면서 살겠다면 당신도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옥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지옥이 어떤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옥이란 영원히 하느님과 단절된,
곳이라면 곳이고,
상태라면 상태일 것입니다.
사랑을 거부하고,
사랑이신 성령을 거부하고,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
이곳에서부터 저 하늘에서까지 그러하는 것,
지금부터 영원히 그러하는 것,
이것이 언제고 용서하길 원하시고 관계 개선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고
그 결과는 지옥입니다.
작지만 큰 신앙고백, ‘성호경’
-전삼용신부-
얼마 전 우연치 않게 한 신부님의 아버님을 뵙고 식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그 아버님은 성체 신심이 특별하신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그 아버님은 신앙이 그리 강한 편이 아니셨습니다. 아니 어쩌면 신을 부정하며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있었고 그렇게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하루는 일하시는 곳에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아버님은 그 화재를 직접적으로 입으셨고 3도 화상으로 죽은 것으로 판명이 되어 병원 영안실에 넣어지기 직전이었습니다. 영안실에 넣으려는 순간 일하는 사람들이 숨소리를 듣고 혹시 살아있는 것이 아니냐고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기억이 없으시다고 합니다.
깨어보니 병원 침대 위에 뉘여 있었습니다. 입도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코와 귀도 화재로 사라져버린 그야말로 회생 불가능 상태였습니다. 그 병원이 수원에 있는 가톨릭 병원이어서 수녀님이 “혹시 영성체 하고 싶으세요?”라고 물어 보셨고 아버님은 말씀을 하실 수가 없으셔서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입도 벌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성체를 영하시려고 하신 것일까요?
아버님은 그 때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영성체를 하고 싶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잊고 사셨던 기도를 다시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데 주위에 사람들이 나타나더니 성모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모송을 바치면 주위의 사람들이 주님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들이 기도를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은 제대로 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처럼 방해하던 무리들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아버님은 성호를 긋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이때부터 깊게 인식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렇게 밤새 기도를 하시는데 온 병원에 불이 났다고 합니다. 그 분은 어떻게 걷고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고 하시며, 사람들을 깨워 피하라고 하였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옆 병실에 입원해 계신 모 주교님을 찾아갔는데 그 주교님은 일어나셨습니다.
불이 났다고 피하라는 그 아버님의 말에 “하느님께서 무언가 일을 하시려는 모양이네.” 하시며 아버님께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불은 그 아버님께만 보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시간 동안 아버님은 기적을 체험하십니다. 화상이 다 벗겨져 새살이 돋아난 것뿐만 아니라 없어졌던 코와 귀까지도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그렇게 아침 미사에 당당히 내려가 성체를 영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그 주교님께서 다 목격하셨습니다. 그 아버님보다 뒤에서 있다가 더 적게 화상을 입으셨던 분들이 지금까지 다 불구자로 계신 것을 보면 아버님의 기적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이 아침미사에서 성체를 영하고 돌아왔더니 온 병원이 난리가 났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환자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아버님께 와서 혹시 여기 누워있던 환자 못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누구도 하룻밤에 그렇게 온전해진 아버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고, 그분의 아버님, 즉 팔순이 훨씬 넘으신 할아버지께서는 그 일이 있어서 아들 얼굴이 더 잘생겨졌다고 농담까지 하셨습니다.
아들 신부는 우연히 아버지께 이런 기적이 있었던 병원에서 봉사를 하다가 지금도 실제로 이 사실을 기억하고 계신 수녀님과 이야기 할 수 있었고 그것이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 이후 바뀐 것은 아버님의 외모만이 아니라 마음이었습니다. 그 전에 냉담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열심한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성체신심은 말할 것도 없고 성호경에 대한 특별한 신심이 생기셨습니다. 그 분은 성호경에 가톨릭의 모든 신비가 다 들어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성체를 아무 감흥 없이 일상적으로 받아 모시는 이유는 아무 감흥 없이 성호를 긋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믿고 계셨습니다.
그 이후로 아버님은 누구와 있건 간에 삼종기도와 식사 전후기도 할 때 성호를 크게 그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고 하느님을 배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당에 나오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자신 있게 성호를 긋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른다고 배교하는 것이고 심하게는 하느님을 부끄러워하면서 성당에 나와서는 성체를 모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독성죄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아버님은 건설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초창기 규모가 작을 때였는데 100억이 넘는 입찰에 도전을 해 보셨습니다. 당대 대기업 건설 회사들이 수주를 따내기 위해 입찰을 넣은 상태라 현실적으로는 입찰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아버님은 입찰이 이루어지는 동안 계속 묵주기도를 바치셨고 점심때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성호를 긋고 삼종기도를 먼저 바치시고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다가오더니 서류를 좀 보여 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서류를 주었는데 결과적으로 아버님의 회사가 그 일을 따내게 되었습니다.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방금 전에 서류를 달라고 하셨던 분이 중앙에 앉아계셨다고 합니다. 그 분은 누구도 그런 곳에서 성호를 긋고 식사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하며 그렇게 신앙이 있는 분이라면 반드시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하여 그 분께 일을 맡기기로 결정 한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성호 긋는 것 덕분에 사업은 크게 번창하였고 전국 몇 위 안에 드는 건설회사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일에 본의 아니게 관여되면서 사업을 접고 빚더미에 앉아야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버님은 또 다시 절망에 빠져 자살을 결심하셨습니다. 산에 소주 한 병과 극약 한 봉지를 들고 올라가셨습니다. 우선 소주를 좀 마시고 약을 먹으려는 순간 밥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자신도 모르게 성호를 그었다고 합니다. 그 때 문득 처자식도 있고 이런 신앙을 갖도록 기적을 일으켜주신 주님께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며 다시 산을 내려오셨습니다. 성호가 또다시 생명을 구한 것입니다.
아버님은 사업이 번창하면서 소홀하게 되었던 가정의 소중함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사업을 실패하게 한 것임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님은 당신의 대자가 된 전직 목사님 4분을 포함하여 지금도 한 해에 10명 이상을 전교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도 성당에 다니라고 한 적은 없다고 합니다. 강요해서 되는 일이 아님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디에 가든, 누구와 있든 항상 성호를 긋고 식사를 하면 사람들이 저절로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세례를 받을 수 있는지 묻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저의 출신 본당 선교 왕이 생각났습니다. 그 분은 옷가게를 하시는데 들어오는 손님마다 “찬미 예수님!”하고 인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뿐인데도 어떤 때는 일 년에 40분이나 선교를 하셨습니다. 다만 자신이 가톨릭교회의 신앙인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드러내는 것뿐인데 관심이 있었어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좋은 연결 고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당신을 부끄러워하면 마지막 날 아버지 앞에서 우리도 부끄럽게 여기겠다고 하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성호를 긋는 것이 사실은 작지만 큰 신앙고백이고 선교의 시작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순교자 이냐시오 성인도 큰 순교를 하기 이전에 이런 작은 증거의 삶을 사셨음을 의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큰 업적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떳떳하게 성호를 긋고 가톨릭 신앙인임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며 삽시다.
나를 아느냐?
-상지종신부-
후줄근한 차림의 한 사람이 반갑게 다가와 아는 척을 합니다
누구 아니니?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알 것 같기도 한데...
아니 어쩌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괜히 아는 척 했다가 귀찮은 일이 생길까봐 몸을 움추리는지도 모릅니다
말숙한 차림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다가가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너 누구 아니니?
자그마한 기억이라도 붙잡아 어떻게든 연결을 시키고 싶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 조바심을 느끼면서
그 사람이 나를 알아볼 때까지 여러가지 끈으로 닿으려 합니다
사람들 가운데, 세상 한 가운데
참혹한 모습의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시기와 질투로 뺨맞고
불의와 부정으로 짓이겨지고
억압과 착취로 찢겨진 상처받은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당신을 알아보기를 원하시는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눈을 돌립니다
씁쓸한 마음으로 애써 되내어 봅니다
당신을 모릅니다
당신을 알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아는 척 하지 말아 주십시오
사람들 가운데, 세상 한 가운데
영광된 모습의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기쁨과 희망
자유와 해방
평등과 평화를 가득 머금은
죽음을 넘어선 승리자로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예수님께로 눈을 돌립니다
접니다
저라니까요
저를 아시겠죠
예수님께서 눈을 돌리십니다
나는 너를 모른다
아니 네가 나의 반쪽 밖에 모른다
반쪽 만의 앎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나를 모르는 너이기에 안타깝게도 나 역시 너를 알 수 없구나
예수님을 알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상처받고 쓰러진 예수님을 알아보고 품에 안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외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외쳐야 합니다
모든 이가 외면할지라도 비참한 모습의 예수님을 안다고 외쳐야 합니다
힘없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
쓰러진 예수님을 보듬어 안는 것이
세상살이의 걸림돌이 될 지언정
예수님을 알아보고 보듬어 안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보듬어 안고 싶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축복 중의 축복>
-양승국신부-
우리 꼬맹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 중에 "마음을 드높이"(김태진 신부 작사작곡)란 생활성가가 있습니다. 제 사무실이 성당 바로 옆인데, 가끔씩 아이들이 목청껏 부르는 이 노랫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얼마나 기분이 좋아지는지 모릅니다. 저도 흥얼흥얼 따라 부르며 "다시 한번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노래입니다.
"당신을 몰랐더라면 더욱 편했을지도 모르는 그런 세상이지만,
당신을 알게됨으로 얻은 자유 평화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네.
당신만이 곁에 계신다면 아무 것도 부럽지 않네."
우리가 한 평생을 살아가다 보면 하느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여러 가지 축복들이 있습니다. 자상한 부모님을 만난 축복, 잠시만 떨어져 있어도 어떻게 사나 궁금해지고 보고 싶어 안달이 나는 친구를 얻은 축복,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들을 얻은 축복, 사랑스런 배우자를 얻은 축복, 건강, 지식 등등. 그러나 그 모든 축복을 훨씬 능가하는 큰 축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을 알게된 축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그 누군가를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그 만남이 그저 사무적이거나 피상적인 만남이라면 수 천 번을 만나도 상대방을 잘 파악할 수가 없겠습니다. 그 누군가를 진정으로 알기 위해서는 몇 번의 술자리나 차 한잔을 통해서는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누군가를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해서 구체적인 관심을 갖는 다는 것입니다. 상대방과 인연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일대기를 쫙 꿰차고 있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분의 삶을 내 삶으로 선택한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매료되어 그분의 열렬한 팬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군가를 진정으로 알게 된다면 우리는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를 이 세상 모든 가치관 그 위에 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으로 인해 집착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주는 그 어떤 기쁨보다 몇 천 배나 되는 기쁨을 획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과 이 세상 안의 모든 만물, 우리가 불변의 진리처럼 여기고 있는 가치관이나 사고방식들도 모두 멀지 않은 미래에 연기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결국 우리에게 영원히 남게 될 것은 주님을 알게 됨으로 얻게 된 행복입니다. 그분만이 영원하십니다. 그분을 안 것 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떤 형제님 아들이 세 살 때, 왼쪽 눈 위가 찢어져 병원으로 달려간 적이 있다고 합니다. 간호사들은 아이를 침대네 눕히더니 양손을 묶었지요. 의사가 아이의 머리를 꿰맬 때 형제님은 아들의 손을 꼭 잡았지만, 아들이 소리칠 때는 거의 냉정을 잃었습니다.
“아빠, 아빠. 아저씨가 날 아프게 해. 못하게 해줘! 아빠!”
아이는 자신을 늘 지켜주던 아빠가 왜 지금은 지켜주지 않는 건지 궁금해 했을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는 아들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보호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었지요. 아들이 이 아픔을 이겨내야 상처가 완전히 치유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겪을 때,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셔서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이라고 의심합니다. 이렇게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지 않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잘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의 곁에서 아무런 활동도 하시지 않고 지켜만 주실 때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려움이 있습니까? 고통스러운 부분이 있나요? 왜 하느님은 내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데도 그냥 내버려두시나 원망스러울 때가 있나요?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앞선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빠가 아이를 미워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닌 것처럼, 하느님은 여러분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시는 선하신 아버지이기에 때로는 침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무엇이든 맡기면 다 이루어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내 구미에만 맞아 떨어지는 하느님을 만들 때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를 위한 하느님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주님을 증언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는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구미에 맞을 때에만 받아들이겠다는 식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을 제대로 증언하지 못하는,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거부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는 삶. 분명히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며, 우리가 이 세상을 보다 더 의미 있고 기쁘게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제대로 찾지 못한다면 오히려 예수님을 반대하는 편에 서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데 쉬운 삶을 갈망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기도하는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
고통과 시련 중에서도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빠다킹신부
유비무환
-이수철 신부-
유비무환(有備無患), ‘준비가 있으면 근심할 것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일상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신앙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입니다.
성령은 어떤 박해나 곤경 중에서도 거기서 벗어날 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간음하다 사로잡힌 여자의 처리를 묻는 적대자들의
진퇴양난의 물음에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는 천상적 지혜의 말씀으로 멋있게 벗어나지 않았습니까?
하느님은 지혜의 원천이시며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그러나 이런 지혜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마음이 흔들리거나 어두우면
떠오르지 않습니다. 고요하고 맑은 호수 위에 떠오르는 푸른 하늘의 밝은 달이듯,
성령으로 충만해 평화롭고 안정된 마음에서 떠오르는 것이 하느님 지혜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는 기도와 성경 묵상이 필수입니다.
언젠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지혜가 아니라, 평상시에
기도와 말씀 공부로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 때, 위기에도 하느님이 주시는
지혜로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가 날 알아?
-안성철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께 대한 신앙고백을 요구하신다. 이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 위해서는 목숨의 위협까지 각오해야 했던 당시 상황에서 대단한 용기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증언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닌 듯싶다. 사회 학문의 급속한 발전과 기계 문명의 발전, 무신론적 사고로 말미암아 신앙인들은 한낱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당당하게 안다고 증언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한다면 그분 또한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도 내어 주셨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분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순교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 것은 그분의 사랑을 배신할 수 없어서였을 것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어 놓는 선교사가 많다. 그런데 우리 중에는 아직도 공공장소에서 십자 성호를 긋는 것을 창피해한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슬쩍 조그맣게 하거나 재빨리 성호를 긋는다. 참으로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많은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십자 성호마저도 부끄럽게 여긴다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은혜를 저버리는 일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더니 우리가 그 꼴 아닌가?
- 손태성 신부-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많은 사고들이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기아, 테러와 재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까? 얼마 전에는 인도 파키스탄에서 지진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그런 일들을 보면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기에 살아있는 우리들로서는 심각한 무력감에 빠집니다. 인간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도 하게 됩니다. 왜 그런 일들이 생기나, 하느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허무한 질문 앞에 우리는 아무런 대답을 들을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액면 그대로 오늘 복음을 해석해보면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인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될 것이다.” 열매가 맺힐 것을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는 무화과 나무의 주인의 심정을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 주인은 언제든지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를 베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 나무는 주인의 말 한마디에 자신이 운명이 달려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주인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삶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흥정을 하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채 마치 자신이 생명의 주인 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무화과 나무가 주인이 자신을 언제라도 베어버릴 수 있음을 모르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회개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회개를 미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음에 하리라, 내일 하리라 하는 것이지요. 참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결국은 못하게 되겠지요. 무화과 나무 주인이 마지막 기회를 줄 때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면 결국 잘려버리고 말겁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회개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그것에 집중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짧은 인생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뻔하게 알고 있는데도 우리는 곧잘 그 사실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참 어이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복음 말씀을 한번 다시 듣고 소리내어 읽어보아야 겠습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 버리십시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든 어떤 모습으로 죽든 그 모든 것은 주인이신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주셨고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실 주님 앞에서 내 생명의 가치를 잘 살아내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 복된 날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터부와 증언
-최영균 신부 -
증언’이라는 말은 보통 법정에서 많이 쓰는 말입니다.
어떤 사실에 대하여 그것을 목격하거나 직접적인 체험이 있을 때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증언입니다. 일본에 가면 세 마리의 원숭이가 각각 귀를 막고, 입을 막고, 눈을 가리고 있는 원숭이 상이 있습니다.
이 원숭이들은 인간사회의 터부(Taboo, 금기)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는 알고도 모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보아도 못본 척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서는 안 되는 장소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묵시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분명 문명사회 안에 존재하는 터부(금기)는 한 사회를 질서 있게 만드는 건강한 문화적 소인의 그러나 때론 진리를 말하는 것이 터부시 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터부는 건강한 사회를 구성하는 공동체의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두려움과 인간 사회의 어둠으로부터 오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증언이라 함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밝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눈을 가리고 입을 막고 귀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요한 복음 1장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를 진리로 간주합니다.
진리(진실)를 증언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두려움과 사회적 악과의 고단한 싸움입니다.
때론 이 증언 때문에 한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터부시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겐 진리 앞의 터부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작은 이익과 작은 憫맒??
또 작은 인간적 편안함을 위해 진실을 말하는 것을 주저할 때가 있습니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이 바로 신앙이 아닌가 싶습니다.
복음 선포, 사람의 지식, 하느님의 지혜, 성령의 인도하심
-이성우 -
하느님의 말씀인 복음은 누가 선포해야 합니까? 사제나 수도자나 일부 열성 평신도에게만 주어진 사명입니까?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입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를 늘 되풀이하고 있는 우리에게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복음을 선포할 자격과 능력이 없거나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주저합니다. ‘자격이 없어서’, ‘아는 것이 부족해서’, ‘배움이 짧아서’, ‘말을 할 줄 몰라서’ 등등, 우리가 하고 있는 핑계는 다양합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지식과 지혜는 어디서부터 옵니까? 사람이 제아무리 똑똑해도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에 비하면 사람의 지식은 바다 앞에 물 한 방울과도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사람이 몇 십 년을 애써서 축적한 지식도 단 몇 초에 훌쩍 뛰어넘습니다. 사람의 지식은 하느님의 지혜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학식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지닌 자에 비하면 어리석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느님은 지혜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좋은 지향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수천 배의 성령의 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등에 업고 성령의 인도 하에 그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느님이 나의 지혜의 원천이시라는 믿음을 지녀야 가능한 일입니다.
가장 귀한 사랑의 표현
-최명숙 목사-
제가 사랑하는 이들 중에 휠체어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자매가 있습니다. 그 자매는 유전적으로 손발톱이 없는 형제와 결혼해 딸을 낳았는데 그 딸 역시 손톱 일부와 발톱이 없습니다. 어느날 그 자매는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딸을 마중나갔는데 그 어린 딸은 친구들과 함께 있다가 휠체어를 탄 엄마를 보는 순간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그 자매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고 했습니다. 저녁에 그 자매는 딸에게 “네가 엄마를 부끄러워하면 앞으로 엄마도 너를 부끄러워할 거야. 너도 손톱·발톱이 없잖아!”라고 했답니다. 어린 자식의 행동이지만 그 마음에 얼마나 큰상처가 되었으면 그렇게 냉정하고 모진 말까지 했을까 생각했습니다.
심한 지체장애를 갖고 있는 저에게는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특별히 더 마음에 와 닿을 때가 많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 형제나 친척들에게 용돈이나 선물을 받는 것보다는 그들이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를 자식으로, 누나로, 언니나 동생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더 기뻤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동생이 결혼할 상대를 부모님께 인사시키기도 전에 먼저 나에게 데리고 와서 소개한 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교회에 나와서 많은 봉사를 하는 이들보다는 연약한 나를 얕보거나 무시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의 목사로 자랑스럽게 인정해 주는 신자들에게서 감동을 받고 고마움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일’이란 그분이 보내신 이, 곧 당신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는지요!(요한 6,28-29)
지금 우리는 생각 속에서, 말과 행동에서, 어떤 것을 결정해야 할 순간순간 하느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심을, 예수님께서 내 구원자이심을 믿으며 살고 있는지요? 주님을 향한 그 귀한 사랑의 표현을 통하여 ‘그날에’ 천사들 앞에서 그분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그분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는지요?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
-양승국신부-
<은은한 꽃향기 같으신 분, 성령>
‘젊은 시절, 꼭 한번 이루어야 할 것이 지리산 종주’라며 젊은 형제들을 살살 ’꼬셔’ 조금은 무리한 산행을 다녀왔습니다.
제 젊은 시절의 여러 추억들이 긷든 지리산 자락 이곳 저 곳을 다시 밟으니 감회가 새롭더군요. 이름만 들어도 정겹고 마음이 훈훈해오는 노고단, 토끼봉, 연하천산장, 벽소령대피소, 세석평전, 장터목산장, 그리고 천왕봉.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만, 천왕봉에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나이를 생각했어야 했는데...갑자기 왼쪽 다리에 쥐가 나는가 하면, 관절부위에 심각한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내려갈 길은 까마득하고, 하산 시간은 빠듯하고, 우선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는 형제들을 먼저 내려 보냈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심각했습니다. 깎아 지르는 절벽 길을 계속 내려 가야하는데, 통증은 점점 심해오고, 스프레이를 뿌린다, 파스를 붙인다, 마사지를 해본다, 별짓을 다했지만 완화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몇 백 미터 내려와 보니 상황의 심각성을 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하산(下山)이 전혀 진척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고, 겁도 나기 시작했습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제가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평소 부탁하는 분들에게도 ‘저는 별로 효과 없다’며 마다했던 안수기도를 했습니다. 주모경도 바치고, 성령송가도 바치고, 그리고 정성껏, 간절한 마음으로 제가 제 무릎에 안수를 했습니다. 웃기지요? 상황이 워낙 다급하다보니.
결과가 어땠는지 아십니까? 제가 기대했던 대로 통증이 완화되거나 씻은 듯이 낫기는커녕 통증이 더 심해졌습니다.
그러나 안수기도 하는 동안 놀라운 일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쥐가 나고, 통증도 심각하고, 기진맥진한 상태인데다가 마음이 몹시 불안해져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그리고 ‘이까짓 것 별 것도 아니야’ 하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러는 순간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기도만 할 게 아니라 네가 스스로 노력도 해야지!”
마음이 안정되다보니 요령도 생기더군요. 아픈 다리에 최대한 무게가 실리지 않게 뒤로 돌아서 게걸음으로 내려오니 훨씬 진도가 잘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끔 쉬어가며 마사지도 해주고, 다리를 쭉 뻗는 스트레칭도 해주니 그런대로 내려올 만 했습니다. 평탄한 오솔길로 접어드니 신기하게도 그렇게 극심했던 통증도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존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나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주실 협조자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박해를 받을 때, 고초를 겪을 때, 한계 앞에 부딪혔을 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끝까지 함께 하실 것이고, 성령께서 알아서 다 알려주실 것이고, 성령께서 결국 우리를 아버지 품으로 인도하실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의 나날을 스쳐지나가는 미풍과도 같으신 분, 은은한 꽃향기 같으신 분, 가장 중요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는 공기, 물, 산소 같으신 분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성령께서 우리 곁에 늘 현존하시면서 우리를 바라보시는데, 우리를 지켜주시는데, 우리는 너무 많은 걱정 속에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한 작은 생명으로 빛을 본 순간에서부터 세례성사나 견진성사, 성체성사 등 다양한 성사 때마다 우리 인생 안에 현존하셨던 당신의 존재를 환기시키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주지 못할 마음의 평화를 선물로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갖은 세파와 인생의 고초 앞에서도 다시금 힘을 내고 살아갈 용기와 위로를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오늘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의 존재에 우리의 의식을 집중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 일상의 다양한 순간 안에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진리와 사랑에로,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품으로 인도하시는 성령께 우리의 존재 전체를 맡겨드렸으면 좋겠습니다.
- 김인환 신부-
사람들은 저의 활발한 평소 성격을 보고 혹자들은 제가 어떤 사람 앞에 서더라도 떨림이 없는 사람인 줄 압니다. 그런데 저는 실제로 대중 앞에 서게 되면 이유없이가슴은 콩닥 콩닥거리며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해서 하고 싶은 말, 해야 될 말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끝나기 일쑤였습니다. 지나간 이야기입니다만 신학교 시절 독서를 하거나 부제반 시절 강복을 주기 위해 독서대로 올라가면 매일 보는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그 떨리는 마음 주체하지 못해 나오는 목소리는 불안하고 톤이 덜덜 거리는 날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매일 같이 미사를 주례하고, 미사 시간 안에서의 강론을 하는 덕분인지 말을 하는데 있어서 떨림은 없어진 것 같습니다만 당시는 하느님께 얼마나 떨지 않게 해주십사고 기도를 했는지 모릅니다. 내 마음이 떨리지 않게 하고 남들 앞에 섰을 때 내가 어떻게 처신할 지 이끌어 주시는 분, 성령이 있기에 제가 변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다소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예수님도 성령도 한분이신 하느님이신데 예수님을 욕하는 것은 괜찮고, 성령을 욕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인지 어색한 여지를 남깁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성령을 더 높이시기 위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것도 아닌 것 같아서 제법 긴 시간 동안 고민을 했습니다.
먼저 죄를 지은 나의 상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고립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죄를 지은 나 자신이 주님 앞에 서기 민망하기 때문에 고립되고, 죄를 지은 당사자에게 미안해서 고립되게 됩니다. 따라서 죄의 현실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욕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것과 연관 지어 생각해 봅시다. 성령을 욕한다는 것은 곧 성령을 거부한다는 뜻이 되겠지요. 여기서 성령의 역할과 결부시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성령은 여러 가지 은사를 통해 나의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고, 주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나의 정신과 육체를 능동적으로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거부하게 되면 성령이 내려주는 어떤 은사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되고, 하느님과의 관계성은 제동이 걸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과의 관계성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 죄의 상태에 있는 나 자신이 다시 회복되는 데에도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게 되고, 이에 죄의 상태의 지속이라는 결과가 발생합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성령을 욕하는 것은 성령을 거부하는 것이 되고, 회개의 길로 이끌어 주는 성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나는 죄의 용서를 받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람의 아들을 욕했다는 것과 성령을 욕했다는 것은 차이가 있게 됩니다.
많은 신자분들이 바람 또는 숨으로 상징되는 성령을 생각하면서 ‘과연 성령의 바람이란 어떤 것일까 나도 한번 경험해 보고 싶다’라는 바램를 가지실 겁니다. 그런데 지난날의 나와 그 후로 신앙생활을 해오던 나 자신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생각하는 지평도,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도, 주님에 대한 앎도, 교회 공동체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도 모두 변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단순히 사회화 과정을 통해 전부 습득했다는 것은 억지가 아닐까요?
봄에 부는 시원한 바람은 내가 미처 ‘참 시원하다’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나에게 불어와 나를 상쾌하게 만듭니다. 이것처럼 성령께서도 조용히 시원하게 나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직장에서 회의 중에 어떤 말을 할까? 싸웠던 교우와 화해하고 싶은데 어떻게 다가갈까? 고민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성령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특별히 성령께 더 깊이 의탁하는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끊임없이 감사드립니다
-이회진신부-
우리는 신앙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살아갈까요?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하느님께서 에페소인들에게 크나큰 은총을 내리시는 것을 보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기쁜 마음을 드러냅니다.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는 지금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을까요?
바오로 사도처럼 끊임없이 하느님으로 인해 끊임없이 기뻐하고, 감사드리며,
기도할 수 있는(1데살 5,16-18참조) 신앙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 때 선하게 살며 착한 일도 많이 했기에 그는
하늘나라에서 베드로 사도의 마중을 받게 되었고,
베드로 사도의 안내로 하늘나라도 두루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하늘나라 천사들이 모여 일하는 곳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천사들은 3곳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첫 번째 일터에 가니 천사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에게
"여기는 접수처라네. 사람들이 하느님께 기도하는 온갖 청원을 이곳에서 접수하고 있지.”
하고 설명해주었습니다.
그가 자세히 보니 그곳에서 일하는 천사들은 정말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천사들이 세상 도처의 사람들이 보내 온 온갖 종류의 기도들을 분류하고 있었는데
엄청나게 많아서 그런지 정말 눈코 뜰 사이가 없이 날아다녔습니다.
그곳을 나와 두 번째 부서에 갔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에게
"여기는 포장 및 발송처라네. 사람들에게 보내 줄 은총과 축복이
이곳에서 포장되어 뭐 해달라고 기도하는 이들에게 보내지는 곳이지." 하고 말했습니다.
그가 보니 그곳은 정신없이 바쁜 뿐만 아니라
첫 번째 기도 접수처 보다 더 많은 천사들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축복과 선물 꾸러미를
포장해서 배달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을 나와 마지막으로 작업실 가장 후미진 구석에 위치한 마지막 부서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놀랍게도 천사가 딱 하나 밖에 근무하지 않는데다
그 천사 하나도 아무 할 일이 없다는 듯이 빈둥거리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가 의아해 하자, 베드로 사도가 "이곳은 확인처라네." 라고 힘없이 말했습니다.
그가 "그런데 어째서 이곳은 어째 할 일이 없는 겁니까?" 라고 그가 묻자
베드로 사도가 대답했습니다.
"서글픈 일이야.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께 은총을 청할 때는 죽자사자 기도하지만
부탁한 은총과 축복을 받고 나서는 확인서를 보내는 일이 거의 없거든."
그가 "축복을 어떻게 확인하는 건데요?" 하고 묻자
베드로 사도가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네, 그저 '주님, 감사합니다.' 하면 되는 거지."
우리는 하루에 몇 번이나 감사하며 살고 있을까요?
하느님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고, 또 얼마나 많을까요?
“감사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음은 우리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모든 말이자 마지막 말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저는 분명히 압니다.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이웃들에게도 감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예수를 아는 삶
-강영구 신부 -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그대에게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智識)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고향 나자렛 사람들 가운데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마태오 13,53-58). 나자렛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그들에게는 큰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저는 신학(神學)을 공부하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저를 구원해주지 않습니다.
우리 본당 교우들은 대부분 연세 많은 어르신들입니다.
어르신들은 성경이나 교리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르신들의 삶은 신학지식으로 무장한 저보다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그분들은 교리지식이나 신학지식은 없지만 예수님을 잘 알고 있고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따라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분들의 삶을 통해서 이웃들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이것은 마치 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요한10,14-15)
안다는 것은 메마른 지식을 뛰어넘어 서로 사랑하고 생명을 나누는 관계를 말합니다.
예수를 아는 사람은 예수처럼 삽니다.
당신도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이기양 신부-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 또는 전생의 선악의 인연에 따라서 뒷날 길흉화복의 갚음을 받게 됨을 이르는 말로, 원인이 있으면 그에 따른 결과가 있다는 의미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언행으로 인해 닥쳐올 어려움을 생각하시고 미리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루가11,44)하고 수 차례에 걸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야단치시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악행을 드러내시며 그 권위를 실추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에 율법교사들은 “선생님, 그런 말씀은 저희에게도 모욕이 됩니다.”(루가11,45)하고 투덜거렸고 그 정도가 심해지자 이제는 예수님에 대해서 앙심을 품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 집을 나오셨을 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앙심을 품고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예수의 대답에서 트집을 잡으려고 노리고 있었다.”(루가11,53)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트집과 보복을 예견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준비시키기 시작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증언해야 함을 제자들에게 강조하시지요.
“잘 들어라.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가12,8-9)
목숨의 위험까지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당시의 상황으로 하느님을 증언하는 것은 참으로 큰 용기와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를 잘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어떠한 어려움 중에서도 용기를 내서 증언해야 함을 가르치고 계신 것이지요.
복음을 증언하다가 목숨을 바치게 될 것을 예수님께서는 곳곳에서 예견하십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요한15,13-15)
박해를 통해서 죽을 수도 있음을 말씀하시지요.
“나의 친구들아, 잘 들어라.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은 더 어떻게 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가를 알려 주겠다. 그분은 육신을 죽인 뒤에 지옥에 떨어뜨릴 권한까지 가지신 하느님이다. 그렇다. 이분이야말로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다.”(루가12,4-5) 그리고 죽은 후에 누릴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시련을 견디어 낼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11,25)
한편 시편에서는 생명은 육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될 것임을 노래합니다.
“당신 앞에서는 천 년도 하루와 같아 지나간 어제 같고 깨어 있는 밤과 같사오니 당신께서 휩쓸어 가시면 인생은 한바탕 꿈이요, 아침에 돋아나는 풀잎이옵니다. 아침에는 싱싱하게 피었다가도 저녁이면 시들어 마르는 풀잎이옵니다.”(시편90,4-6)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시련 중에서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주시는 하느님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단돈 두 푼에 팔리지 않느냐? 그런데 그런 참새 한 마리까지도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고 계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그 흔한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루가12,6-7)
하느님께서 우리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이끄시며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고 계시니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 것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교육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으로 무장되어 있었지만 권력자들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출신과 배운 것 없는 언변으로 인간적으로 나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육신으로 오는 박해야 몸으로 때울 수 있겠지만 법당이나 회당에서 진리를 증언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지요.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리나 권력자들 앞에 끌려 갈 때에 무슨 말로 어떻게 항변할까 걱정하지 말라. 성령께서 너희가 해야 할 말을 바로 그 자리에서 일러 주실 것이다.”(루가12,11-12)
새로운 힘, 성령을 약속하시지요. 예수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박해를 받고 목숨을 바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박해는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어려움이며 박해를 받으면서까지 행해야 하는 중요한 일은 하느님을 전하는 것, 즉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마태10,61)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증언하고 하느님 중심으로 살 때 박해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시며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굳게 믿고 따르며 살아갈 것을 가르치십니다 용감하게 믿고 끝까지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그들을 ‘벗’이라고 부르시지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루가12,8)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결국 그 길을 갔고 영원한 생명에 들 수 있었습니다. 깊은 믿음과 투신의 체험에서 나오는 신앙의 증언이야말로 믿는 자들의 기쁨이며 특권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안다고 증언하라
- 김웅태 신부 -
우리는 주일이나 대축일 미사때마다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다함께 우리의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한다. 그리고 영세 때나 견진 성사 때에 모두 다함께 이 사도신경을 고백함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이 신앙 고백은 바로 우리가 몸과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루까 12:8-12]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께 대한 신앙고백을 요구하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구 하시는 신앙 고백이란 그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전인격, 전 존재를 온전히 투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이란 자신의 마음 속에 간직하면서 혼자서 지켜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이란 그저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것임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그래서 당신께 대한 신앙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라고 요구 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 목숨의 위험까지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당시의 상황으로는 굉장히 큰 용기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데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굳세게 신앙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의 증거에는 학식, 성별, 년령, 재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신앙의 증거는 예수님과 일치하는 깊은 믿음과 사랑의 체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오늘 날에도 예수님 당시의 상황과 비슷하게 예수님을 증언 하기가 점점 어렵게 되어 가고 있다. 사회 학문의 급속한 발전과 기계 기술의 발전, 무신론의 횡횡으로 말미암아 신앙인은 한낱 웃음 거리가 되기 십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공연연한 신앙 고백의 어려움이 날로 증가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더욱 더 용맹히 신앙을 증거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순교 선열의 용감한 순교 정신을 본받아 용감히 신앙을 이 사회에 전파하고 생활로서 증거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도록 하느님께 간청해야 할 것이다.
복음선포와 성령의 활동
-박상대신부-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포함한 많은 군중을 향하여 첫째,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할 것, 둘째, 하늘 아래 세상에서 감추어진 것이라고는 없으므로 예수님의 복음선포가 언젠가는 세상 천지에 알려질 것, 그리고 셋째,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영(靈)과 육(肉)의 세계를 모두 다스리시는 하느님이심을 가르쳐 주셨다. 오늘 복음은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세 가지의 단절어를 전해주고 있다. 첫째는 세상에서 예수를 안다고 증언하는 사람은 예수께서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해 주실 것이나, 모른다고 하면 예수께서도 모른다고 증언하실 것이라는 종말론적 동태(同態) 보상률에 관한 말씀이다.(8-9절) 좀 인색하게 들리겠지만 누구든지 예수를 위해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람의 아들을 거역한 죄는 용서받지만 성령을 모독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단호한 말씀이다.(10절) 셋째는 박해하는 자들 앞에서 항변할 언변을 성령께서 일러주신다는 말씀이다.(11-12절)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 복음의 세 가지 단절어는 어제 복음의 두 번째 가르침에 해당하는 복음선포와 관련이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성령의 활동과 복음선포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예수님 스스로 하늘나라가 도래했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다. 이 복음선포에는 예수님의 기적적인 활동도 포함된다. 아직은 베일에 가려 있지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아버지와 함께 세상에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다. 하느님 성령은 성자의 구원사업을 오직 교회와 그 구성원을 통하여 계속하실 것이고 미구(未久)에는 완성하실 것이다. 따라서 성령 하느님의 활동은 복음선포와 선포자 활동의 내적 원리이다. 요한복음이 성령 하느님을 선포되는 복음의 핵심인 ‘진리’의 성령이요, 복음선포자의 내적 ‘협조자’로 계시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요한 14,15-17; 15,26-27; 16,7-16) 요한복음의 이 대목들과 마태오복음의 관련대목(마태 10,17-33)을 잘 읽어보면 오늘 복음에 관한 의문의 반 이상은 해결된다.
남은 문제는 사람의 아들을 거역한 죄는 용서받지만 성령을 모독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단호한 말씀이다.(10절) 이 단절어는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도 똑같이 발견된다. 그러나 문맥상 다른 곳에 배치되어 있고, 좀 다른 의미로 언급되어 있다. 두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적수들의 모함에 대적하는 의미로 용서받지 못할 성령께 대한 독성죄를 보도하고 있다.(마태 12,24; 마르 3,22) 실제로 마르코는 예수께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든 입으로 어떤 욕설을 하든,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그 죄는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으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를 더러운 악령에 사로잡혔다고 비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마르 3,28-30) 마태오는 여기에 ‘인자를 거역하여 죄를 범한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거슬러 범한 독성죄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임을 덧붙였다.(마태 12,32)
왜 루가복음사가는 성령 독성죄에 관한 말씀을 오늘 복음에 배치해 놓았을까? 그 이유는 다시금 ‘복음선포와 성령 하느님의 활동’ 안에서 발견된다. 많은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은 하느님나라에 관한 원초적인 복음선포자인 예수님을 거역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했다. 하느님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예수는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셨다. 하느님은 영과 육의 모든 세계를 지배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성령강림사건은 이 땅에 성령 하느님의 시대를 열었다. 따라서 이제는 하느님 아버지와 성자의 세상에 대한 모든 활동은 진리이시며 협조자이신 성령 하느님의 활동으로 계속되며, 그 주된 활동이 바로 세상 끝까지를 향한 복음선포인 것이다. 성자는 비록 세상의 손에 죽었다. 세상이 계속해서 복음선포자를 죽일 수는 있어도 더 이상 하느님을 죽일 수는 없다. 세상이 할 일은 복음선포자가 성령과 함께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든지 않든지 하는 것이다. 이 때 세상은 수용과 거부의 자유를 가진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세상이 복음을 수용하는 행위는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복음을 거부하는 행위는 곧 성령을 거역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나 우리가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을 두고 성령모독죄를 운운할 자격을 가진 것은 아니다. 아무에게도 그런 권한은 없다. 오직 인자(人子)만이 유죄와 무죄를 선언할 것이며, 그분만이 구원의 가부(可否)를 판가름하실 것이다.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루가 12,8-12)
-유 광수신부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파울러'라는 에모리 대학 교수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신앙적으로 완전히 자라게 된다면 모두 6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이제 그 여섯 단계를 간략하게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첫 단계에 들어가기 전의 단계 아닌 단계로 '전단계'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갓난아기가 배가 고프면 울고, 엄마가 와서 먹을 것을 주거나 안아주면 그냥 좋아하는 것처럼, 아직 지적 능력 같은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엄마나 다른 보호자에게 가지는 무조건적 신뢰의 단계로서 이 때 갖는 신앙을 무분별적 신앙이라고 한다.
제 1 단계는 "직관적 투사적 신앙"의 단계이다. 이 단계의 신앙은 2세에서 6,7세 사이에서 나타나는데, 이 때 아이들은 상상과 환상의 세계에 살면서 이에 걸맞는 믿음을 키워간다. 이 때 처음으로 자의식을 갖게 되고, 죽음과 성(性)과 금기사항 등을 알기 시작한다.
제 2 단계는"신화적, 문자적 신앙"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것으로서,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이야기, 설화, 신화나 신앙내용이나 의식을 받아들이되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단계이다. 아직 이런 것들의 상징적 뜻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이 이런 이야기가 말하는 것과 같이 문자적으로 이렇게 생기고 굴러간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자기는 착한 아이이기 때문에 싼타 할아버지가 와서 선물을 많이 주고 갈 것을 그대로 믿는 것이다.
제 3 단계는 "종합적, 인습적 신앙"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사춘기 때 형성되는 것으로서, 자기가 지금껏 문자적으로 믿어오던 자기 공동체의 이야기나 신앙내용, 의식이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여질 때의 모순을 의식하는 단계이다. 이런 의식을 잠재우기 위해 모순을 종합해주고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종합적, 인습적 신앙형태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아직도 독립적인 사고에 의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외적 권위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에 맞추려는 획일적 사고가 강하게 나타나고, 또 주어진 이데올로기에 따라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다. 그리고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 그것을 객관적으로 성찰해보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제 4 단계는 "개성화와 성찰의 신앙" 단계이다. 이 단계는 20대 중반의 청년기, 경우에 따라서는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에서도 형성되는데, 자기 자신의 신앙 내용이나 가치관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하고 통찰하는 단계이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이 단계에조차 이르지 못하고 한 평생을 마치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제 5 단계는 "접속적 신앙"이다. 이 단계는 주로 중년기 이후에 생기는 것으로서, 이분법적 양자택일이나 이항대립적 사고 방식을 넘어서서 '양극의 일치'를 받아들이게 되는 단계이다. 우리가 계속 말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냐나주의'에서 '이것도 저것도'의 '도도주의'를 깨닫는 단계, 변증법적 사고, 대화적 태도, 역설적 논리를 이해할 수 있는 단계이다. 빛이 파장되고 입자도 된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한 가지 사물의 양면을 동시에 볼 줄 아는 마음이다. 자기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선입관으로 사물을 보는 대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마음이다. 내 편이냐 네 편이냐, 내가 어디에 속했느냐에 따라 각각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진리 자체가 주는 것에 따라 소신을 가지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제 6 단계는 "보편화하는 신앙"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극소수의 사람만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자아를 완성한 이른바 성인의 경지이다. 어떤 외적 걸림이나 거침이나 울타리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와 무애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랑과 자비와 껴안음의 사람, 그러면서도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정의와 공평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발전하는 것이라고 할 때 과연 지금 나의 신앙이 어느 단계에까지 와 있나 하는 것을 점검해볼 수 있을 것이다.
파울러의 주장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모든 사람이 이 여섯 단계를 다 거치는 것은 아니라고 한 사실이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는 어느 단계에서든지 더 이상 발달하지 않고 그대로 주저앉고 말 수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 3 단계 정도에 이르러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있다. 제 4 단계는 독립적 사고를 가지고 사물을 보는 단계요, 제 5단계는 사물의 양면을 다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단계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증언하는 것은 꼭 강론대에 서서 말할 때만이 아니고 우리의 존재 자체가 증언이 되어야 한다. 즉 내가 사람들 앞에 있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관계없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을 하지 않더라도 "저 사람은 참 거룩하다" 라고 말 할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을 보고는 "저 사람은 신자이면서 왜 저 모양이야" 하고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꼭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인품 자체에서 풍겨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전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느냐 아니면 어떤 위치에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고 있느냐가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모른다고 하는 사람인가를 말해 준다.
"사람들 앞에서"라는 말에 주의하자. 어느 사람이라고 지목해서 말하지 않고 그냥 "사람들 앞에서"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증언해야 하는 사람은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이다. 어떤 일로 사람을 만나든 아니면 함께 일을 하고 함께 살고 있든 모든 사람은 바로 내가 예수님을 증언해야할 사람이다.
과연 평상시에 사람들은 나를 보고 무엇이라고 하는가? 저 사람은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가? 아니면 "저 사람은 말은 신자라고 하면서 전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같다" 라는 말을 듣는가? 멀리서 예수님을 증언하려고 하지 말자. 나와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부터 예수님을 증언하는 말, 행동, 생각, 인품으로 생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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