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12월 24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루가 1,67-79)
In the tender compassion of our God
the dawn from on high shall break upon us,
to shine on those who dwell in darkness
and the shadow of death,
and to guide our feet into the way of peace.”
말씀의 초대
다윗 임금이 국가를 평정하고 하느님의 성전을 마련하여 봉헌하고자 한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임금으로 세우신 다윗을 향해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선택의 말씀으로 다윗의 가문에서 메시아가 탄생된다(제1독서). 이스라엘 백성은 엘리야 예언자가 구원의 길을 준비할 선구자로 다시 올 것을 믿었다. 즈카르야는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하고 노래하며 아들 요한이 바로 주님의 길을 준비할 선구자임을 고백하며 노래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성모의 노래(마니피캇: Magnificat)가 『성무일도』의 저녁 기도에 포함되어 있다면 즈카르야의 노래인 오늘 복음은 『성무일도』 아침 기도 때 바칩니다. 마니피캇은 하루를 돌아보며, 은총을 베푸신 주님을 찬미하는, 고요하고 감미로운 저녁 노을 같은 기도라면,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의 노래는 동이 트는 새벽처럼 기쁨과 희망을 노래하는 여명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말문이 막혀 어둠 속에 있던 즈카르야가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자 어둠과 죽음의 그늘 밑에 있던 백성이 구원의 빛을 받게 되리라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은 곧 구약의 백성이 신약의 시대를 맞이하는 새로운 구원의 아침을 여는 기도입니다.
요즘은 사람들의 하루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점점 저녁 쪽으로 옮겨 가더니 언제부턴가 낮과 저녁, 밤과 새벽의 경계가 사라졌습니다. 도시의 하루는 해가 져도 해가 지는 줄 모르고, 해가 떠도 해가 뜨는 줄 모르게 인공 불빛이 밤새워 어둠을 밝힙니다. 자연과 교감이 없는 삶, 시작과 마침이 없는 일상에서 우리는 무질서하게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더욱 지치게 됩니다.
아침 저녁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친다면 우리 삶은 질서가 잡힐 것입니다. 비록 아침이 없는 아침, 저녁이 없는 저녁을 살아도, 아침에 눈을 뜨면 새벽 동이 트는 여명을 눈에 그리며 즈카르야의 노래를 부르고, 하루를 마친 저녁에는 아름다운 노을을 마음에 그리며 마니피캇을 부르며 살면 어떨지요? 즈카르야의 힘찬 희망이, 마리아의 복된 기쁨이 말씀을 타고 우리 삶 속에 스미게 될 것입니다.
☆☆☆
가난한 이들은 곧 오실 주님 안에서, 원수들과 그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해 주시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그분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하느님 앞에서 거룩한 백성, 사람들 앞에서는 정의로운 백성의 공동체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이 찬미가를 통하여 장차 오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될 백성에게 희망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그분을 믿고 따르는 백성이 어떠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주님께서는 결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함께하실 것이라 예언합니다. 즈카르야는 자신의 아들 세례자 요한이 장차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며,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는 선구자가 되리라고 예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원수들과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주님께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을 닮아 그분께서 오실 길을 미리 닦고, 즈카르야처럼 그분께 찬미가를 불러 드려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 은총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여야겠습니다. 이는 그분의 은총으로 사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
즈카르야의 노래’는 희망이 주제입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심을 담담히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평생을 사제로 살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한순간’의 의심으로 벙어리가 되고 맙니다.
본인에게는 엄청난 충격입니다.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으니, 처참한 심정입니다. 한동안 그는 멍하게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의 주님께 다시 나아갔고, ‘은총과 깨달음’을 만나게 됩니다. 바닥까지 내려갔기에 새롭게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위대한 사람들에게는 공통 요소가 있습니다. 시련을 딛고 일어섰다는 사실입니다. 그들 역시 불평하고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엔 받아들였고, 시련에 담긴 ‘의미’에 매달렸습니다. 그런 뒤에는 시련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마음을 열었기에 깨달음을 만났던 것입니다.
벙어리가 되지 않았다면 ‘즈카르야의 노래’는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통은 언제라도 은총입니다. 더 큰 세계를 향해 눈뜨게 해 줍니다. 즈카르야의 희생이 있었기에, 요한은 축복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할 것이다.” 은총의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예언할 수 있었습니다.
온전한 신뢰
-손영순 수녀-
옛날에는 모든 천재지변도 임금의 덕과 상관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특히 비가
오지 않는 가뭄의 시기에는 임금이 직접 기우제를 지내면 하늘이 감동하여 비를
뿌려주었다고 합니다. 인디언들도 그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하늘이 다 들어준다. 왜냐햐면 들어줄 때까지 기도를 하기 때문이다.” 기우제를
지내서 비가 오는 것이 아니고 비가 올 때까지 꾸준히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대한 놀라운 신뢰이고 신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가끔 기도를 하면서
왜 하느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느냐고 성화를 부릴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더 잘 아시고 우리가 행복하기를
우리보다 더 바라는 분이시기에 그분은 우리의 앞날을 더 걱정하고 밝혀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으신 계약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그대로 이루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물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당신 자녀의
소원은 얼마나 잘 들어주시겠습니까? 우리가 할 일은 신뢰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응답의 시기와 방법은 전적으로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가끔 우리는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해서 판단하고, 오해하고,
해석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녀의 행복을 외면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성탄을 기다리며
-김찬선신부-
솔직히 저는 오늘 복음에서 들은 즈카르야의 찬미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 성무일도 기도를 바칠 때마다 이 찬미가를 노래하는데
그때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참으로 속 좁아서 그런 것입니다.
이 찬미가를 싫어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첫 마디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찬미 받으시라고 하는 것은 싫고
대한민국의 하느님이 찬미 받으시라고 하는 것은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는 얼마나 국수주의적으로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까?
하느님은 모든 민족의 하느님이어야 하기에,
다시 말해서 어느 한 민족의 하느님이 아니어야 하기에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은 거부하면서
대한민국의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은 좋아한다면 얼마나 모순입니까?
저는 다 압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고 할 때,
그 이스라엘이 중동의 한 민족 이스라엘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를 말하는 것임을 머리로는 다 압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고 할 때,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소유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소유라는 것도 압니다.
그러니 즈카르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미함은
요한의 태어남이 비단 자기와 자기 가문만의 구원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구원임을 깊이 인식한 자의 찬미인 것도 압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잘못된 선민의식에 대한 거부감을 아직도 가지고 있음은
이스라엘이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건 말건 상관 말아야 하는데
제가 그것을 아직도 초월하지 못하고 있다는 표시이니
성탄을 코앞에 둔 이 아침,
주님께서는 저에게 당신을 온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으로
새롭게 맞이하라고 강력히 촉구하십니다.
나와 모든 것의 관계
-전삼용신부-
저의 어머니는 제가 잉태될 때 태몽을 뱀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수많은 뱀이 집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에게 들으니 그 꿈은 주위에 사람이 많을 팔자라고 했습니다. 사제가 팔자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습지만 정말 제 주위엔 사람이 많습니다. 사제가 되어서 더욱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태몽을 어머니만 꾸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 꾸어주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가 태몽을 대신 꾸어 혹시 임신하지 않았느냐고 연락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감은 맞는 경우가 많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어쩌면 그냥 스쳐지나갈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정말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육체적으로는 다른 이들과 분리되어 있지만 영적으로는 보이지 않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리야는 자신의 아들이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예언을 합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아기가 자라기도 전에 아버지가 아기의 일생을 예언합니다. 왜 본인의 일생을 본인에게 예언하게 하지 않고 아버지의 입을 통해 예언하게 하셨을까요? 사람은 서로 영적으로도 관계 맺어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떤 자그마한 연못에 물고기 두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먹이와 공간은 충분하지가 않았습니다. 한 물고기는 다른 물고기가 없었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자신이 더 넓은 공간에서 많은 먹이를 먹으며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물고기의 바람대로 다른 물고기가 죽었습니다. 다른 물고기는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죽은 물고기 때문에 작은 연못이 썩어가는 것입니다. 나머지 한 물고기도 결국 숨이 막혀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가끔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떤 사람은 나와 관계가 깊은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무관한 사람이라고 판단을 내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와 완전히 무관한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과 미세하게나마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끼리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땅도 함께 저주를 하십니다. 사람과 자연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또 땅이 죄를 짓는 인간들을 토해낼 것이라고까지 합니다.
“너희는 이런 행위 가운데서 어느 하나라도 저질러 부정을 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 낼 민족들은 이런 온갖 행위로 부정을 탄 것들이다. 그 땅도 부정을 탔기 때문에, 나는 그 죄악을 벌할 것이다. 그 땅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토해 내리라.” (레위 18,24-25)
따라서 급격히 많이 일어나는 세상의 자연재해들도 인간의 죄가 늘어가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런 의미에서 보면 내가 주님과 온전한 관계를 이루며 산다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아니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자연까지도 그것을 기뻐한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됩니다.
한 아담의 죄로 온 인류와 자연이 저주를 받았던 것처럼 또 다른 아담의 보속으로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제 2의 그리스도가 되어 산다면 나는 물론이요 온 세상에 유익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묵상해 보아야겠습니다.
한 사람의 경사는 그 가족 모두의 경사입니다. 한 사람이 결혼하지만 그 기쁨은 온 가족과 친지, 친구들까지 번져나갑니다. 반대로 한 사람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슬프게 합니다.
더 나아가서 소화 데레사가 선교를 지향해 리지외라는 작은 시골 봉쇄 수도원에서 바쳤던 희생은 전 세계의 그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 하게 하였습니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힘도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기도와 희생으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모님은 오래전 시골의 가난한 한 여인이었지만 그 분의 ‘예!’라는 한 마디가 온 세상에 구원이 내려오게 하였습니다. 그 분의 거룩함으로 온 세상이 구원을 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거룩해지는 것이 세상이 거룩해지는 것이고 내가 회개하는 것이 세상이 회개하는 것이며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나와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마다 즈카르야의 노래를>
-양승국신부-
대 침묵 피정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요즘 여러 수도회나 교구에서 종신서원이나 사제품을 앞둔 후보자들에게 의무적으로 대 침묵 피정을 시킵니다.
하루 이틀, 사흘은 그럭저럭 참을만한데, 일주일, 열흘, 사십일 대 침묵 피정,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큰 괴로움입니다.
특히 차 한 잔 앞에 두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담소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술 한 잔씩 들이키며 ‘술술’ 풀어놓아야 쌓인 것이 풀리는 사람들에게 있어 ‘대 침묵’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10개월간의 대 침묵 피정에 참석했습니다. 그 10개월 동안 얼마나 할 말이 많았을까요? 억울한 심정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타의에 의해서 10개월 동안 말을 못하게 되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런 즈카르야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더불어 10개월 만에 혀가 풀리고 말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10개월 만에 말을 하게 된 즈카르야가 내뱉은 첫마디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 대한 투덜거림이었을까요? 강한 분노의 표출이었을까요? 자신이 뭐 그리 큰 잘못을 했다고 그렇게 강한 벌칙을 주셨냐며, 하느님께 따졌을까요?
모두 아니었습니다. 즈카르야의 입에서 터져 나온 첫 마디는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찬가 ‘즈카르야의 노래’였습니다.
저희 수도자들은 매일 아침기도 때 마다 즈카르야의 노래를 바칩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구약을 완성하기 마지막 대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하느님께 감사하는 노래입니다. 동시에 메시아의 탄생을 고대하는 희망의 노래입니다. 이런 희망과 환희와 감사로 가득 찬 ‘즈카르야의 노래’와 더불어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라는 의미에서 아침마다 이 노래를 바치는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세례자 요한 탄생 사화의 결론입니다. 즈카르야 노래의 작곡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작사자는 성령이십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즈카르야의 신앙고백입니다.
즈카르야의 ‘깨어남’은 하느님의 영광과 능력을 찬미하는 ‘즈카르야의 노래’로 연결됩니다. 즈카르야가 찬미가를 부르는 순간은 그간 지니고 있었던 모든 불신과 의혹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입니다. 즈카르야가 환희의 노래를 부르는 순간은 자기중심적 삶을 넘어 참된 하느님의 사제로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눈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은 또 다른 ‘즈카르야의 노래’를 부를 순간입니다. 그 순간은 다시금 자비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새 출발의 순간입니다.
세상의 크리스마스
-심종민 신부-
종교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12월 24일만 되면 누구나 조금씩 흥분하고 기대하기
시작합니다. 나도 모를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고, 또 좋은 일을
만들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특별히 연인들이나 아이들은
남들보다 더 큰 기대감에 부풀어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기대감을 한껏 부풀려 놓았을까요? 예수님의 지상탄생?
불행히도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성탄은 이벤트의 날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이벤트 속에서 실질적인 주인공인
예수님은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옛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구유를 만들어 놓고 울었다고 합니다.
세상의 구원자가 초라한 말구유 속에서 태어난 사실이
너무 슬프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성탄은 분명 기쁜 날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어디까지나
이벤트 때문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자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초라하게 오셨던
그분을 생각하며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주님의 탄생을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즈카르야의 구원체험
-김찬선신부-
오늘 즈카르야는 말문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대단한 구원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즈카르야는 우선 개인적인 구원을 하였습니다.
말문이 막혔다가 풀리는 구원체험을 한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불신이 치유되는 구원체험을 한 것입니다.
자신도 믿을 수 없고
이웃은 더더욱 믿을 수 없고
하느님은 그 존재와 능력을 보지 못했으니 믿기가 어려웠는데
인간의 불가능을 넘으시는 하느님의 그 존재와 능력을
체험하고
믿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구원체험은 없습니다.
두 번째는 자기 가문의 구원체험입니다.
자손이 없음은 가문의 가장 큰 수치요 불행인데
아들이 생겼고 그것도 늘그막에 아들을 얻었으니
이 구원체험은 너무도 극적이고 기쁨은 배가됩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이 사실은 자기 가문만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구원할 주님을 예비하는 자로서 온 것임을 깨닫습니다.
자기 가문 전체가 하느님 소명 체험을 한 것이고
그래서 이제는 공동체적 소명의식을 갖게 됩니다.
자기 집안이 이스라엘 구원 전체의 도구가 된다니
이 얼마나 큰 가문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그의 찬미 첫 마디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입니다.
자기와 자기의 동포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집단이 아니고
하느님의 굄을 받고 속량될 집단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공동체의 구원 체험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셨다.”고 이어서 노래합니다.
이제 즈카르야에게 이스라엘 백성은 확고하게
당신 백성,
곧 주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분의 자비하심이
- 황지원 신부-
서울에서 나고 자란 저는 밤의 어둠을 잘 모르고 살았습니다. 군대에 가서야 ‘칠흑 같은 어둠’이란 표현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야간 근무를 나가면 주변에는 불빛 하나 없는 어둠만이 있었고 그 어둠을 헤치고 가야만 했습니다. 어둠에 눈이 익어가면서 제 발 아래로 그림자를 발견하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무수한 별들과 은은한 달빛과 마주하게 됩니다. 조금은 힘들고 고된 나날이었지만 그것이 마치 칠흑같이 어두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지만 고개를 들어보면 언제나 우리를 비춰주는 빛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 앞길만 바라보며 언제나 불이 밝혀진 세상에서 그 빛의 따스함과 밝음은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참으로 어둡고 힘든 길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 별빛과 달빛의 따뜻함은 포근함과 안식을 전해 줍니다.
이제 곧 시작될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이보다 더 밝게 빛나고 더 따뜻하게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즈카르야가 성령의 은총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찬송하면서 그분의 자비하심이, 곧 우리에게 다가왔음을 우리의 어둠과 그늘을 환히 밝혀주실 것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자신감 비료
-조명연 신부-
어떤 농부가 황무지를 개간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 땅은 돌멩이가 많은
매우 척박한 땅이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가 포기하라고 말립니다.
하지만 농부는 기어이 그 땅을 일궈냈고 몇 년 후에는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농부를 찾아와 “어떤 비료를 사용했나요?”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것쯤이야’라고 하는 자신감 비료를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가장 필요한 비료는 바로 이 자신감 비료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여러 가지 작은 조건들만을 꼽으면서 정작 중요한
자신감 비료 쓰는 것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인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인 즈카르야 역시
이런 자신감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아내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인해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주님의 뜻을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불안과 의심이 해소되는 순간에
비로소 입이 열리고 주님께 찬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렇게 입이 열리고 찬양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한 조건이 아니라 ‘이것쯤이야!’라는
자신감 비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찬미는 우리의 기도
-허영엽 신부-
어떤 분의 신앙체험이다. “저는 세례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너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어 매일매일이 은총의 나날이었습니다. 어느 날 잘 알고 지내던 한 자매가 찾아와 어려운 사정 이야기를 하면서 돈을 꾸어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사랑으로 그 사람에게 아주 큰돈을 꾸어주었는데 그는 얼마 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교회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일 년 정도 병상에 있게 되었습니다. 근처 성당 신자들이 저를 방문했지만 냉정하게 그들을 배척했습니다. 그런데도 연세가 지긋하신 신자 몇 분이 계속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함께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기도 중에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를 찾아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편협한 마음과 어리석음 때문에 고통을 당하면서 그것을 남의 탓으로만 돌렸던 것입니다. 주님은 신자로부터 받은 상처를 다른 신자들을 통해서 치유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암흑과 같은 어려운 시대에도 빛과 희망을 노래했다. 하느님이 절대로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즈카르야는 오랜 기다림의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눈으로 하느님 약속의 시작을 보았다. 즈카르야는 하느님께서 죄와 죽음에서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시고 세상에 구원의 빛을 비추실 것이라고 노래한다. 그는 드디어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희망의 노래를 부른다. 사실 즈카르야는 천사 가브리엘이 요한의 잉태소식을 전했을 때 믿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적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는 자신의 불신을 넘어서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를 보여주는 노래를 부른다. 혀와 귀가 풀린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보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불평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양승국신부-
<역동적이신 하느님>
제대로 된 영성생활, 참 신앙생활을 위해서, 그리고 신앙생활의 정점인 하느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서 꼭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비록 숙달이 되지 않아 어렵겠지만 나란 존재 자체를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한 심오한 삶의 ‘이동’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지부진한, 그저 그런, 물에 물탄 듯한 나날에서 의미와 영양가로 충만한 나날에로의 이동,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전부인 삶에로의 움직임,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에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주신 것은 바로 우리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신 친히 큰 별, 정확한 이정표가 되어주시면서 방황하고 흔들리는 우리를 제대로 인도하기 위해 육화하신 것입니다.
유목민들 삶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동’입니다. 더 나은 초원을 향해, 더 적합한 기후를 찾아 부단히 이동합니다.
끊임없는 이동이 습관화된 그들은 한 가지 진리를 터득했습니다. 보다 간단히, 보다 신속히 이동하기 위해 방법은 오직 한 가지, 꼭 필요한 것 외에 짐을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때로 아쉽지만 불필요한 것, 거추장스러운 것, 부차적인 것들은 과감히 버립니다.
태어나실 아기 예수님, 우리 주님은 역동적인 분이십니다. 한 곳에 정지해계시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분이십니다.
그분을 지속적으로 따라가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은 구세주의 별빛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부차적인 것들을,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즈카르야 역시 우리를 위해 움직이시는 하느님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심오한 삶의 이동입니다. 미성숙에서 성숙에로의 이동, ‘이기’에서 ‘이타’에로의 이동, 어둠에서 빛으로의 이동, 억압에서 자유에로의 이동,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평화의 나라로 이동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목전으로 다가온 성탄, 우리도 좀 움직였으면 좋겠습니다. 어둡고 긴 터널을 이제 좀 빠져나오면 좋겠습니다. ‘나’란 껍질을 깨고 이웃을 향해, 세상을 향해 이동을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즈카르야의 노래
-이병우 신부-
우리에게 어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 지난 과거와 미래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깨어 있는 것이, 오늘 내가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지나간 어제와 오지 않은 미래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제의
하느님 체험과 어제의 죄와 허물을 모두 내려놓고 늘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어제보다 더 회개해야 하는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고,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정말 우리가 준비하면서
기다려 온 주님의 성탄이 거의 때가 다 되어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잘 준비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준비는 바로 우리의 회개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즈카르야처럼
세상 안으로 들어오시는 주님이야말로 우리의 구원자,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이 세상의 어둠과 죽음의 그늘 밑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의 삶으로 기쁘게 노래해야 하겠습니다.
축복의 노래
- 김혜경-
오늘 복음은 성무일도에서 아침마다 부르는 ‘축복의 노래 (베네딕투스)’다. 흔히 ‘즈카르야의 노래’ 라고도 하는 이 노래는 저녁마다 부르는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 과 함께 초대교회에서 이어져 오는 귀중한 복음찬가다.
이 노래를 따라 부르니 오늘 내게 와 닿은 구절은 71절과 74-75절이다. 내가 가장 힘들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하필이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정작 나를 가장 힘들게 하던 기억이 난다. 일에 대한 의견이 달라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이다. 아마도 질투였거나 아니면 내 의지를 꺾음으로써 우위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
그럴 때 나는 원수에게 둘러싸여 미움을 받거나 반대자들의 반대에 맞서 외롭게 투쟁하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지나고 보면 그때 내가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 옳은 것이 많았음에도 가장 협조적이어야 할 사람이 비협조적이었다.
그렇게 힘들고 아픈 시간을 견디다 보니 이제는 어떤 일을 판단하고 결정하기에 앞서 기도하는 습관이 생겼다. 가까이에 있는 원수 ( ?) 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에 대한 식별에 무게를 두게 되었다. 물론 나의 식별이 늘 올바르다고 할 수 없지만 먼저 기도를 하다 보면 감정에 매몰되지 않게 된다는 것도 알았다. 하느님께서 원수들 손에서 나를 구원해 주시리라는 믿음과 그래서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며 살게 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난세의 영웅이 아니라 하느님의 종이
-김찬선신부-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늘 저에게 도전을 합니다.
다윗과 이스라엘을 초월하라고 말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이스라엘의 다윗을 초월하고
다윗의 이스라엘을 초월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제가 구원되고
그래야 제가 하느님 구원의 동력자가 된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대림시기 구세주께서 빨리 오시기를 노래합니다.
아니 대림시기뿐이 아니지요.
세상을 구원할 존재는 언제나 필요하고
그래서 구원자가 나타나기를 우리는 늘 고대합니다.
그리고 정치지도자가 구원자가 될 수 있는 양
선거 때만 되면 누가 대통령이 되고
누가 국회의원이 되어야 하는데 하며 대단한 관심을 보이곤 합니다.
그런가 하면 구원자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느니 차라리
내가 구원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한 때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난세가 영웅을 필요로 한다.”
한 때 제가 좋아하던 경구입니다.
저는 다행히 빨리 정신을 차려 더 이상 미친 짓을 그만 두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나섭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너무도 세상의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음을 증명하고
우리는 이 거짓 구원자들을 멍청하게도
진정 우리를 구원해줄 사람인 양 기대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런데 진정 세상을 구원할 사람은
사욕에 눈이 먼 사람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집단의 이익에 편승하는 파당주의자도 아닙니다.
구원자는 하느님의 종이어야 합니다.
난세의 영웅이 아니라 하느님의 종입니다.
다윗도 이스라엘의 임금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종입니다.
그래서 즈카르야의 찬가도 “당신 종 다윗의 가문”에서
구세주를 일으키셨다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도록 우리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오만 방자하게 내가 세상의 구원자가 되겠다고 하고,
누가 그러 했듯이
내가 이 세상을 접수하여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 구원의 동력자의 자세가 아니고
그런 사람은 하느님의 종이 아닙니다.
오늘 사무엘 하권에서 하느님의 성전을 지어바치겠다는 다윗의 청을
하느님께서 물리치신 것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세상이 구원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망하고 다윗은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등걸에서 새싹이 돋을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한 여자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용기가 없었던 이 남자는 차마 이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 한마디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저 얼굴만 바라보는 것으로도 만족을 하면서 가슴 속에 깊은 사랑을 키워왔습니다. 사실 이 여자는 멀리 사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벽 하나를 사이에 끼고 살고 있는 옆집의 아가씨였지만, 그는 사랑 고백을 하지 못하면서 가슴앓이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옆집의 그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아가씨는 숨을 헐떡이고 있으며, 침대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입니다. 이 남자는 크게 실망을 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여인이 저렇게 부정한 사람이라니…….’
그리고 사랑에 배신당했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을 매달아 목숨을 끊습니다.
이 유서를 본 경찰은 옆집의 아가씨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옆집의 초인종을 눌렀지요. 하지만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집주인에게 부탁해서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여인도 독약을 먹고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청년이 들었던 그 소리는 독약으로 괴로워하는 아가씨의 신음과 몸부림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 아가씨의 유서에는 홀로 있다는 외로움 때문에 생을 마감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벽으로 인해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반대편이 보이지 않는 벽으로 인해서 남자 역시 커다란 오해를 간직한 채 자신의 생을 마감했던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언젠가 읽었던 단편소설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이러한 벽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즉,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을 방해하는 미움과 오해를 만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우리 인간들 삶 안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한 즈카르야도 이러한 벽을 하나 가지고 있었지요. 그래서 천사 가브리엘이 요한의 잉태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그는 믿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의심하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즈카르야의 노래를 통해서 그 벽이 완전히 치워졌음을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벽은 과연 어떤 것인가요? 미움의 벽, 불신의 벽, 오해의 벽, 불의의 벽……. 그 벽들을 차례대로 허물어서 완전히 사라지는 그날, 우리 곁에서 당신의 사랑으로 도움을 주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벽을 허무시기 위해서 2000년 전,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남을 받아들이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 벽들을 부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합시다.
빠다킹 신부
노래하는 즈카르야
-강영구 신부-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대에게
대림(待臨)시기가 끝나고 성탄 대축일이 다가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와 함께 하느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심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만 성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신을 고집하던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되어 침묵하는 동안 생생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느님의 소리는 침묵 가운데 비로소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입이 풀리자 하느님의 대자대비하심을 노래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느님의 큰 사랑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침묵 가운데 들려오듯이
그분의 자비와 권능은 언제나 작고 가난하고 힘없는 것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성령(聖靈)으로 충만한 사람이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하고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귀의(歸依)하여 그분께 의지하는 사람 안에 성령은 충만하고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사람을 비추어줍니다.
아기 예수님이 당신의 가슴에도 태어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김정용 신부-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희망이 족할까/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곰곰이 생각하니/세상만사가 춘몽 중에/또다시 꿈같도다….”(작사·작곡 미상, ‘희망가’ 중에서) 일본 강점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막걸리 한잔에 휘청거리듯 그렇게 시대를 살며 세상살이의 절망스러움을 뱉어낸 노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혹자들은 퇴폐적이라고 말하지만 희망을 품고 살기에도 버거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어떤 희망가보다 더 절절합니다.
사람들은 시대마다 그 시대의 그늘을 노래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시대의 그늘을 어떻게 노래하고 있을까요? “돈 벌어 돈, 내 사랑 안 뺏기려면은/돈 벌어 돈, 큰소리치고 싶으면은/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생각해도/돈 없고 빽 없으면 찬밥 신세! 돈!”(The Solist, ‘돈 벌어 돈!’ 중에서) ‘돈 벌어 돈!’이라는 노래입니다. 사랑도 사람도 돈보다 못한 시대라고 말합니다. 인정하든 안 하든 시대의 물결은 이미 그리로 넘어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즈카르야의 노래는 과연 우리 시대의 대안적 희망가가 될 수 있을까요? 어느 시대든지 굴절된 시대의 뒷자리엔 늘 고약한 배설물이 남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죄와 죽음’입니다.(루카 1,77과 79 참조) 그리고 죄와 죽음의 차가움은 세상을 다스리는 그 무엇도, 그 어떤 힘에 의해서도 풀리지 않는다는 것 또한 시대의 엄연한 진리입니다. 죄와 죽음의 그늘 밑 어둠을 벗어나려는 인간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그 앞에서 헛되이 좌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즈카르야는 하느님께서 스스로 죄와 죽음의 깊은 곳에 찾아와 세상의 어둠을 녹여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시고 세상에 구원의 빛을 비추실 것이라고 노래합니다.(루카 1,68.78-79 참조) 즈카르야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듯 얼음장 같은 세상의 밤이 풀리리라는 희망의 노래입니다.
하느님, 영원한 희망이신 그분께서 우리의 깊은 절망 속에서 몸소 노래하시니 그런 희망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의 구원과 평화를 선포하는 즈카르야
-경규봉신부-
즈카르야는 아이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짓겠느냐는 친척들의 질문에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즉시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메시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인 세례 요한의 앞일을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을 찾아오시어 은총을 베푸시어 속량하신다. 즉 외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내시어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으로써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기워 갚으시고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도록 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다윗 가문에서 구원의 능력을 지닌 구세주 곧 메시아를 일으키셨는데, 이는 구약성경 전체를 통하여 예언한 것처럼 우리를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죄를 지음으로써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깨뜨리곤 하였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와 맺으신 계약을 깨뜨리지 않으시고 늘 기억하셨다. 하느님께서는 구세사의 중요한 시기마다 새롭게 계약을 맺으시어 인류구원의 계획을 약속의 형태로 제시해주셨다. 이제 이러한 모든 계약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새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고 하느님의 보호 아래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게 될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어떤 사람보다 크고 위대한 예언자이다(마태 11,11). 그는 신약과 구약을 연결하는 예언자이며,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면서 예수님의 권능을 목격하며 주님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할 것이다. 구약에 뛰어난 예언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메시아의 앞길을 닦고 준비한 예언자는 오직 세례자 요한뿐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죄를 용서받도록 하기 위하여 회개의 세례를 베풀 것이다(루카 3,3). 그럼으로써 흠이 없으시고 완전한 희생양이신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의 희생을 통해 영원하고도 완전하게 죄를 없이하시는(히브 9,25-26) 주님을 준비할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큰 죄도 모두 용서하시고(이사 1,18), 한번 용서한 죄는 기억하지 않으심으로써(이사 43,25) 완전하게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선포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주님의 백성에게 죄를 용서받고 구원되는 길을 깨우쳐주며,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멸망하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어 평화의 길로 이끌어줄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불안과 초조, 두려움과 절망에 떨고 있는 백성에게 즈카르야는 하느님의 구원과 평화를 선포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선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듯이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당신 백성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시고 그들의 마음속 깊이 당신의 평화를 주실 것이다. 평화의 왕(이사 9,5)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달리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는 영원하고 완전한 평화이다(요한 14,27). 주님께서는 바로 그 평화를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다.
그러므로 대림절의 마지막 날인 오늘 구원과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자. 오시는 주님께서 내 안에 임하시도록 겸손한 마음을 갖고, 오시는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찬미 찬송하는 하루가 되자.
-최재현 신부-
오늘 밤은 구세주의 탄생으로 세상이 기뻐할 것이고, 그를 믿는 자에게는 하느님의 큰 축복이 내려오는 평화의 밤이 될 것입니다.
구세주 빨리 오사 어두움을 없이하며 동정 마리아에서 탄생하셨도다.
원조들이 범죄한 후 성조에게 허락하신 메시아를 보내소서.
어지러운 세상에 방황하는 우리들의 간구함을 들으사 보내주옵소서.
대림시기에 주님께서 오시어 우리를 구해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는 마음으로 불렀던 성가입니다.
첫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고 모든 사람이 또한 죄를 범함으로써 악의 세력에 물든 세상은 오직 하느님만이 처음 상태로 되돌릴 수 있으십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라는 로마서 5장 17절의 말씀처럼 오늘 오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은 새롭게 변할 것이며, 더 이상 죄와 죽음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것임을 믿습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아들을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한 사제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게 되었다가 요한이 태어나고 난 후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이 찬가는 ‘즈카르야의 노래’ 또는 라틴어 첫 글자를 따서 ‘베네딕투스(Benedictus)’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노래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째부분은 구원의 시작을 알리는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분께 감사의 노래를 드리는 내용이고, 둘째부분은 예언의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하느님의 약속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공생활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아주 중요한 주제였는데, 즈카르야의 노래는 그분의 백성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맞게 응답하도록 그들을 초대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처음과 끝은 ‘에피스켑세타이('επισκ'εψεται)’라는 히랍어 말로 연결되는데, 이는 ‘찾아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향해 또 인간을 위해 내려오셨고 찾아와 주십니다. 이처럼 구원은 하느님 편에서 이루어지고, 당신 백성이 죄에서 해방되어 두려움 없이 당신을 섬기고, 거룩하고 의롭게 되도록 하려는 하느님의 의도를 즈카르야의 노래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은 홀로 일하는 분이 아니시기에 당신의 구원 계획이 한 아이를 통해 준비되기를 바라십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을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을 즈카르야 노래 후반부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즈카르야의 노래가 설명하려는 것이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메시지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역할을 분명히 밝히는 데 있습니다. 이 노래는 79절에 ‘평화’라는 말로 끝맺음을 함으로써, 하느님은 예수 안에서 평화의 궁극적인 의미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이처럼 즈카르야의 노래는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확고한 구원 의지를 증언하고 있으며, 이 증언은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중심 주제인 구원의 보편주의와도 직결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죄를 용서받아 구원되기를 바라시고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 아들을 보내주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구세주 오심을 믿고 그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큰 축복과 평화가 내려오는 오늘,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을 경배하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날이길 기원합니다.
대림시기의 마감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사화를 마무리 짓는 즈가리야의 노래를 들려준다. 아홉 달 동안 잠겼던 혀가 풀리면서 성령을 가득히 받아 외치는 즈가리야의 노래는 세례자 요한 탄생사건의 결론이다. 즈가리야의 노래도 마리아에 대한 엘리사벳의 칭송(1,42-45)과 마리아의 노래(1,46-55)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그의 입에 담아주신 말씀이다. 엘리사벳도 즈가리야도 “성령을 가득히 받아”(41절; 67절) 하느님께 칭송을 외쳤고 찬미의 노래를 불렀다. 마리아의 경우는 지극히 높으신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아(1,35) 예수를 잉태하였으니 이미 주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계심을(1,28) 알아야 한다.
성서학자들은 즈가리야의 노래도 마리아의 노래처럼 루가복음서 집필시기 이전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감사가, 또는 찬미가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유대교로부터 소외당하고 버림받았던 가난한 자들이 원수들과 그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박해를 받아 죽음의 암흑과 그 그늘 아래 앉아있던 사람들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 가난한 사람들이 메시아 예수의 구원을 체험하고, 또 실제로 구원의 은혜를 받아 이제는 두려움 없이 거룩하고 올바르게 하느님을 섬기며, 평화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루가는 이러한 메시아 예수의 구원사적 업적을 세례자 요한의 탄생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다. ‘아가야’(76절) 하고 시작하는 노래의 후반부는 선구자 요한에 대한 내용이다. 이것은 “이 아기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까?”(1,66) 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루가의 답변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즈가리야의 노래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 부분(68-75절)은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의 부분이다. 하느님께서는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가난한 사람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구원해 주셨고, 앞으로도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 그분의 구원을 입을 것이다. 구원의 목적은 백성들이 거룩함과 올바름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둘째 부분(76-79절)은 직접적으로 구원을 준비하는 선구자 세례자 요한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구약의 마지막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특사요 예언자”(말라 3,1)로 먼저 와서 메시아 주님의 길을 닦는다. 그는 죄를 용서받는 세례를 외칠 것이며, 백성들을 준비시켜 구원받는 길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자비로우심’ 덕분이다. 이로써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는 뜻을 가진 요한의 이름이 다시금 강조된다. 이는 즉, 하느님의 구원이 요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하늘의 태양처럼 죽음의 그늘 어둠 속에 있는 백성을 비추시어 빛이 되시는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이 빛이 백성의 앞을 비추어 그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오늘 즈가리야의 노래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미 오심’과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4주간의 대림시기를 마감한다. 세상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을 묵상하는 ‘다시 오심’의 분위기로 시작된 대림시기는 지난 12월 17일부터 ‘이미 오심’에 대한 준비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우리는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의 전사(前史)를 통하여 이 준비가 놀라움과 기쁨으로 충만하였음을 보았다. 인류의 성조(聖祖)들로부터 즈가리야와 엘리사벳과 세례자 요한,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을 통하여 펼치시는 하느님의 놀라우신 인류구원계획은 이렇게 준비되었던 것이다. 그 계획은 바로 하느님 스스로의 ‘사람이 되심’이다. 이제 그 성취가 우리의 눈앞에 놓여있다. 오늘 밤 우리는 그 성취를 우리의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성취가 인간의 눈에는 만연(漫然) 불가능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오직 성령 하느님께 자신을 여는 자만이 그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찬미 받으소서(루가1,67-79)
-유 광수신부-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탄 하루 전 날을 맞이하였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는날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막상 무슨 말을 해야하는 것인지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오늘 복음에서 즈가리야는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는 즈가리야의 노래를 들으면서 "아, 그래 맞아 !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내 마음을 잘 표현하였네"라고 공감하게 될 것이고 또 "아,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에게 이런 큰 축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구나!"하고 새롭게 깨닫게 되기도 할 것이다. 오늘 복음을 그런 입장에서 다시 한번 잘 음미해주기를 바란다.
68-75절까지의 내용을 잘 음미해보면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하느님의 축복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우리에게 주실 축복에 대해서 찬미를 드리고 있다.
즈가리야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라고 우선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찬미를 드린다는 것은 맹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찬미를 드려야 할 구체적인 내용들이 있는 법이다. 즈가리야는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비푸신 큰 은혜를 생각하면서 찬미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찬미는 즈가리야가 개인적인 일로 찬미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모든 인류에게 베풀어 주셨던 커다란 은혜에 대해 찬미를 드리는 것이다.
즈가리야가 하느님을 찬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느님이 잊지 않으시고 그 동안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주 섬세하게 준비해 오셨고 당신의 계획대로 모든 일을 진행시켜 오신 것을 시므온이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가2,29-30)라고 말한 것처럼 즈가리야도 구원을 자기 눈으로 구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느님을 찬미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찬미드리는 마음이 곧 성탄을 맞이하는 마음이다. 찬미드리는 그런 마음이 되려면 우리도 하느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아야 한다. 모르면 찬미드릴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성탄을 맞으면서고 무관신한 것은 구체적으로 아기 예수님이 왜 오셔야 했는지 그리고 아기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실 분이신 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나를 위해서 놀라운 일을 하신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찬미드리는 사람이다. 신앙인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세계 즉 하느님이 역사하고 계신 또 다른 세계를 보고 따라 가는 사람이다. 하루하루 그냥 흘러가는 시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역사임을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한 선물임을 알고 감사드리며 찬미드리는 사람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그 동안 하느님이 어떻게 역사해 오셨는지를 되돌아 보면서 우리도 찬미드리는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하도록 하자.
그 동안 하느님이 무엇을 준비해오셨는가? 한 아기가 금방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아기가 태어나려면 잉태하고 완전한 인간으로 완성되기 위해서 임산모의 뱃속에서 10개월 기간동안 자라야 하듯이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하루 아침에 아무런 준비없이 태어나시는 것이 아니다. 메시아가 탄생하기 위해서 하느님은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해오셨고 이제 때가 되어 탄생하시게 된 것이다.
68-75절까지는 그 동안 하느님이 해 오셨던 일을 열거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다. 그 일이란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76-77절까지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선구자로 요한 세례자가 해야할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요한이 장차 할 일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 "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는 것"이다.
78-79절까지는 장차 오실 메시아 즉 아기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즉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시어 이 세상에서 하실 일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하느님은 모든 일을 이미 계획하셨고 그 계획대로 이루어 가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아무 때나 어떤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하지도 않으시고 즉흥적으로 아무렇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일을 다 영원으로부터 계획하셨고 그 계획에 의해 일을 진행시키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길은 이미 다 짜여져 있고 그 길을 한 발짝 한 발짝 걸으시고 실행시켜 나가신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등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이미 당신이 친히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고 그 말씀하신 대로 이루고 계신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과거 동사가 있고 미래 동사가 혼합되어 있다. 즉 이미 이루신 일이 있고 앞으로 이루실 일들이 예언되어 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 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고 미래형이다. 그러나 지금은 2000년 전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미 이 예언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이다. 즉 우리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대에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기 예수님은 오셨고 우리는 이미 메시아가 오시면 이루시겠다고 한 약속이 실현되고 있는 은혜로운 시기에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 성탄을 맞는 것은 아직 탄생하지 않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셔야 할 구유를 준비해왔고 그리고 드디어 내 안에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찬미드리는 날이어야 한다. 성탄을 축하드리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