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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28일 금요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갓 태어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헤로데의 명령으로 살해된 아기들을 기리는 축일이다. 축일의 기원은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회는 이 축일을 아기 예수님 때문에 살해된 아기들을 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생각하여 공경하며, 해마다 12월 28일에 지낸다. 동방 교회에서는 12월 29일에 지낸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어린 아기들이 세상이 저지른 죄악으로 고통 받으며 죽어 가고 있고, 어머니 배 속에서 살해된 낙태아들도 있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채 전쟁터로 끌려가는 청소년들도 있다. 그들 또한 죄 없는 어린이들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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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끓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오 2,13-18)
A voice was heard in Ramah,
sobbing and loud lamentation;
Rachel weeping for her children,
and she would not be consoled,
since they were no more.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빛이시며 어둠이 없으시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산다는 것은 빛 속에 산다는 뜻이다. 빛 속에서 사는 이들은 어둠의 길을 걷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 주신다(제1독서). 권력을 잃을까 불안해진 헤로데는 메시아 탄생에 즈음하여 예수님을 없애려 하였고, 박사들이 그를 속인 것을 알고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 권력욕에 숨어 있는 악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낸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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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강화도 전등사에 가면 대웅전의 육중한 지붕을 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을 볼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사찰을 수호하는 원숭이나 다른 짐승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거기에 얽힌 전설 때문에 여인으로 보는 의견이 많습니다. 전등사를 건립할 당시 그 건물을 건축하는 도편수가 일이 끝나면 주막을 드나들다가 그곳 주모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도편수는 자기가 버는 돈을 주모에게 그대로 가져다주면서 일이 끝나면 주모와 함께 살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웅전 불사를 마무리할 때쯤 주모는 그가 번 돈을 몽땅 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도편수는 배신감과 분노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는 공사를 마무리하면서 그 괘씸한 여인의 나부상을 만들어 불사의 육중한 지붕을 영원히 지게 했던 것입니다.
이 전설은 우리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전해지지만, 자신이 지은 죄업(罪業)을 그런 모습으로 지고 산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우리 속담에도 ‘맞은 사람은 발을 뻗고 잘 수 있지만 때린 사람은 발을 뻗고 자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듯 남에게 해를 끼친 사람은 마음이 늘 불안하고 무거운 것이 짓누르는 듯 힘겹게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가 죄 없는 아기들을 살해합니다.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의 특징은 간교하고 잔인합니다. 불안한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잔인한 죄를 저지릅니다. 이런 헤로데의 그림자를 우리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태아들의 생명이 인공적으로 유산되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지요? 이익 때문에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악행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데 남에게 못할 짓을 하고 살면, 결국은 그 모든 죄업을 자신의 내면에서 알게 모르게 지고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른뺨을 치면 다른 뺨마저 돌려대 주고 속옷을 달라면 겉옷까지 내어 주며(마태 5,39-40 참조) 살라고 하셨지요. 세상 것에 탐욕을 부리거나, 작은 것에 미련을 두어 집착하지 말고 자유롭게 살라는 뜻입니다. 죄와 탐욕에 눌려 사는 것보다 손해보고 버리며 사는 것이 훨씬 자유롭고 평화롭습니다. 이것이 인생을 가장 지혜롭게 사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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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에서 도덕적 심성을 수양할 때, 그 근거로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내세웁니다. 사람의 마음은 본디 하나지만, 작용할 때에는 ‘도심’과 ‘인심’의 두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도심은 천명에 따라 나오는 것이고, 인심은 인간의 욕구에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도심인 천명을 따르는 사람은 언제나 하늘의 법도를 지키지만, 인심인 사사로움을 따르는 사람은 악에 물들고 죄에 빠져들기가 쉽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가문만이 영원한 왕족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자신의 힘을 과시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참된 왕을 살해하려고 그 또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립니다. 인간의 잔혹함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구체적인 사례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백성의 억울한 하소연도 깡그리 묵살해 버립니다.
오늘날에도 유가의 ‘인심도심설’은 여전히 유효해 보입니다. 도심을 외면하고 자신의 사사로움만 좇는 현상은 지도층과 배운 자나 가진 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인심만 좇아 가는 사람은 도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정면으로 맞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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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 자매는 12월 28일 아들을 잃었습니다. 교통사고였습니다. 군 복무를 마친 복학생이었는데, 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탔다가 함께 변을 당한 것입니다. 성탄절의 밝은 분위기가 무겁고 어두워졌습니다. 로사 자매를 아는 교우들은 자기 일처럼 가슴 아파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열심히 연도를 바치며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려 애썼습니다.
사람들은 숙연해졌습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나이 든 사람을 제치고 이십 대의 젊은이가 먼저 가다니! 그러면서 그 역시 아기 예수님을 대신한 ‘죄 없는 아기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12월 28일 사고를 당했고, 그의 죽음이 너무 억울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면 누구든 가야 합니다. 그분께서 생명을 좌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론이고, 현실에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다른 한 사람’이 자리하기까지는 얼마나 긴 드라마가 엮어지는지 모릅니다. 객관적으로는 그저 그런 사이인 듯 보여도 본인들에게는 참으로 많은 사연이 있는 법입니다.
로사 자매는 한동안 힘들어했지만 신앙 안에서 극복하려 애썼습니다. 자식에 대한 아픔을 남을 위한 봉사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는 세상에서 연옥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아기 예수님 대신에 숨진 ‘죄 없는 아기들’과 그들의 부모들을 기억해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웬만큼 억울한 일은 잊어버려야겠습니다.
복음을 향한 폭력
-안용태 신부-
성탄팔일 축제기간 동안 유독 오늘은 마음이 아픈 날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자기 권력을 위협하는 적으로 여기고 살해하려 했던 헤로데 왕의 폭력으로
애꿎은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5세기부터는
이 아이들의 죽음을 예수님을 위한 죽음으로 교회가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무죄한 아기들을 왜 지켜 주지 않으셨을까요?
고개를 돌려 우리의 현재를 봅니다. 몇 달 전 온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던
인화원 사건, 아동학대 등도 헤로데 왕의 아기 살해 사건과 그 본질은
똑같습니다. 복음 대신에 욕망을 선택한 결과는 항상 폭력과 분쟁을
불러일으키고 그 첫 희생자는 가장 연약한 인간, 아기들입니다. 인간의
악으로부터 나온 이 무고한 희생을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갚아 주시는가?
그 대답은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욕망과 악으로부터 지켜내 이런 불행을 막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만이 이러한 우리의 희망입니다.
오늘 복음은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하고 돌아간 후 요셉이 꿈에 천사가 일러주는 대로 이집트로 피난을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 살았던 내용과 헤로데가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인 일화입니다.
오늘 복음은 묵상을 하기에도 유익하고 관상을 하기에도 유익합니다. 자유롭게 했으면 합니다. 묵상을 한다면 요셉의 분별과 결정 과정을 깊게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외국으로의 피난 같은 중요한 선택을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일러 준 대로 따랐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의 태도와 자신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성찰하면 유익함이 크겠습니다.
관상을 한다면 순서대로 세 부분으로 나눠 보면 되겠습니다. 먼저 요셉의 꿈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장면입니다.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배경 삼아 보는 것도 유익하겠습니다. 그리고 꿈을 통해 드러난 요셉의 영적 체험과 그에 대한 요셉의 반응과 선택 등을 마리아와 예수님과의 연관 하에 봐 나가면 되겠습니다. 밤에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갔다고 하는 만큼 그 장면들을 차근차근 봐 나갔으면 합니다.
이어서 헤로데의 소행을 봅니다.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안 후 취하는 행동들을 하나하나 보면 되겠습니다.
끝으로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이 이집트에서 생활하시는 장면도 봤으면 합니다. 이때 유념할 것은 헤로데의 소행을 둘러싼 소동이라든지 이집트 생활 등을 보면서 이것저것 여러 내용을 피상적으로 훑어 내려가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기도가 이런저런 생각이나 상상을 동원하며 전개되는 가운데 별 영양가 없는 생각들의 파편 나열에 그쳐 버릴 위험이 많기 때문입니다.
영원의 바다에 낙엽처럼
-김찬선신부-
87세이신 저의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곧 돌아가실지 모른다고 하면
사실만큼 사셨으니 이제 돌아가셔도 된다고 얘기들 하시고,
제 욕심에 더 오래 사셨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저도 이제 돌아가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몇 살까지 살아야 살만큼 산 것입니까?
그리고 몇 살 이상이면 너무 오래 산 것이고,
몇 살 이하이면 너무 일찍 죽는 것입니까?
대략 7-80년 살면 적당하다고 하는 것 같은데,
그것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 경우이고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이면 그렇게 꾸역꾸역 오래 사느니
빨리 데려 가시라고도 하는 우리입니다.
아무튼 삶과 죽음이란 물리적 시간의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 즉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재내는 무죄한 아기들의 순교 축일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질문을 하게 합니다.
그렇게 일찍 죽을 걸 왜 태어났을까?
죄 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무고한 죽음은 왜 있는 걸까?
저는 십대 때부터 삶의 의미 문제를 가지고 너무 고민을 하였고
그래서 자살 장난 같은 것도 하였습니다.
그때 저의 큰 의문은 결국 죽을 걸 왜 사느냐였고,
그것도 고통스러운 삶을 왜 살아야 하느냐였습니다.
어차피 죽을 거면 빨리 죽지 오래 살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삶과 죽음의 절대적인 기준을 갖게 되었습니다.
영원하지 않다면 오래 살건, 빨리 죽건 그게 그거고,
행복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살건, 저 세상에 살건 마찬가지다.
거대한 영원 안에서 이 세상의 삶과 죽음이란
정말 거대한 바다의 작은 돛단배, 아니 낙엽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순간에 영원을 담는다면, 지금 이 순간을 영원을 산다면
이 세상에 사는 것도, 이 세상에서 죽는 것도 다 영원의 현재입니다.
그러니 삶과 죽음이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삶과 죽음이 영원과 맞닿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리고 영원을 산다 해도 행복하지 않으면 그것이 영원의 지옥이니
이 세상이건, 저 세상이건 어떻게 행복느냐가 문제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당하지 말고 스스로 사는 것입니다.
죽임을 당하지도 말고 원치 않는 삶을 살지도 않는 것입니다.
억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고
죽음에 의해 죽임 당하지 않고 스스로 죽는 겁니다.
곧 자유와 사랑입니다.
사랑과 자유가 삶이든 죽음이든 그것을 의미 있게 하고
이 세상 삶과 죽음의 유한성을 넘어 영원을 살게 합니다.
사랑과 자유의 하느님이 이때 우리의 삶과 죽음에서 발생합니다.
이렇게 사랑과 자유의 하느님이 내 삶과 죽음에서 발생하면
이제 나는 스스로 곧 사랑과 자유로 하느님께 복종합니다.
하느님의 거대한 뜻, 곧 사랑에 평안히 내맡기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대한 뜻이 죽음으로 다가오건,
하느님의 거대한 뜻이 폭력으로 다가오건,
그것을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 안에서 받아들이고 내맡기는 겁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거대한 뜻을 거스르는 폭력과 불의에 대해서는
또한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 안에서 대적합니다.
헤로데의 폭력은 오늘날도 계속됩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나는 어떠한 경우건 평안히 죽을 수 있지만
하느님 사랑 때문에
곧 하느님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나 순교할 수 있기를
오늘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에 희망해봅니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양승국신부-
<자동차 멈추기>
암흑의 세월,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유명했던 독일의 본 회퍼 목사님을 떠올려봅니다. 그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공개적으로 나치에 대한 저항의 깃발을 높이 올렸습니다. 그의 논리는 너무나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어떤 미친 사람이 자동차를 몰고 대로를 질주하고 있는데, 나는 성직자로서 그 미친 사람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이나 치러주고, 그 가족들을 위로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더 많은 무고한 희생자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자동차 안으로 뛰어들어 미친 사람으로부터 핸들을 빼앗아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거대한 범국가적, 조직적 불의 앞에 침묵하지 않았고,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정면으로 맞서다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인간이란 존재,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왜곡된 사고방식, 그릇된 가치관, 그로 인한 극단적 행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 그 결과가 너무나 참담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한 나라의 지도자가 그러할 때 폐해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말도 안 되는 이데올로기로 사람들을 현혹시킵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혼돈상태에 빠집니다. 사람들을 집단으로 죽음의 골짜기로 내몹니다. 때로 페스트나 콜레라보다 더 무섭습니다. 히틀러가 그랬습니다. 네로 황제가 그랬습니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우리나라 역사 안에서 쉽게 그런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습니까? 그 한 사람의 그릇된 생각,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역시 마찬가지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즉흥적이고, 또 얼마나 포악한지, 얼마나 앞뒤 생각 않고 행동하는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그는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것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머리 뚜껑이 활짝 열리다보니 이성을 잃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해서는 안 될 명령을 내렸습니다.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은 이유도 묻지 않습니다. 말도 필요 없습니다. 다짜고짜 애지중지, 금지옥엽, 키우고 있는 사내아이들을 부모가 보는 앞에서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생떼 같은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에 닿을 지경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랄 일이며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무고하게 학살당한 그 어린 아이들의 영혼을 당신 사랑의 품 안에 거두시어 큰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께서는 죄 없이 죽어간 아기 순교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무엇인가를 원하시리라 믿습니다.
개념 없는 지도자, 정신 나간 리더들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움직이는 것, 불의 앞에 침묵하지 않는 것,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 참 정의, 참 진리의 길을 따라 움직이는 신앙인이 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을까요?
뿐만 아니라 더 요구되는 행동이 있습니다.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희생자들을 치료하기, 통제불능인 자동차를 멈추게 만들기...
“이 무서운 시절의 소란이 끝나면
우리에게
확신의 시절을 주십시오.
이 기나긴 어둠속의 방황이 끝나면,
우리로 하여금
밝은 햇빛 아래로 걷게 하십시오.
거짓의 굽은 길이 끝나면,
우리에게
당신 말씀의 길을 열어주십시오.
그리고 당신께서 우리의 범죄를 씻어주실 때까지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견디게 하여주십시오.”
생명의 문화와 죽음의 문화
-이병우 신부-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빛’이 되어 오셨습니다. ‘기쁜 소식’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분은 마구간에서 나심으로써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가장 비천한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한 구원’이었습니다.
‘너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예수님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너를 살리기보다
너를 죽이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헤로데가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습니다. 오늘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낙태로 숨져 가는 태아들,
기아에 허덕이며 굶어죽는 어린이들, 4대강 사업과 같은 생태계 파괴로 사라지는
생물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모든 모습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주님과는 상충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어떻게 하면 너에게
힘이 되어 주고, 너를 기쁘게 해 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합니다.
너를 살리는 일에 적극 동참해야 합니다. 이것이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헤로데
- 김혜경-
헤로데 (기원전 37–4) 는 유다와 그 주변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로마에서 임명한 왕이었다. 그는 정통 유다인이 아닌 팔레스타인 남부지역 에돔 지방 출신으로 유다인의 왕이 된 사람이다. 그는 로마의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신임을 받으면서 유다 지역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 떠올라 이후 사대에 걸쳐 왕조를 형성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통치는 로마에 충성할 수밖에 없었고 유다인들의 적개심과 미움을 사는 동기가 되었다.
그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했을 때 그 일대를 다스렸고 (마태 2, 1; 루카 3, 1) 유다인들이 믿고 기다리는 왕 (메시아) 의 출현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자신이 유다인이 아니라는 열등의식도 작용했을 것이다. 헤로데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베들레헴 일대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인 이면에는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이 내재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 점이 오늘 복음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헤로데의 정책은 이렇듯 유다인들한테는 한없이 잔인했다. 그러나 로마로부터는 뛰어난 지략가요 건설자로 인정받을 만큼 유다의 국경이 확장되고 문화적으로 헬라화가 시도되며 예루살렘 성전 재건 (50여년에 걸쳐 완공) 과 수로를 건설하는 등 위대한 건물들이 세워졌다. 그의 업적은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되었고, 그 결과 그를 따르는 추종자 무리가 생겨 ‘헤로데 당’ 이 형성되기까지 했다.
헤로데 당원들은 이후 계속해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모함할 때 함께 등장한다. 마태오복음 (22, 16), 마르코복음 (3, 6; 12, 13) 등에서 예수님을 없애기 위한 정치적 명분을 얻기 위해 바리사이들이 헤로데 당원들을 동원한 것이다
위로
- 김혜림 수녀-
지난 5월에 중국을 강타한 대형 지진으로 학교 건물이 무너져 수많은 아이들이 사망했다.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의 숫자도 엄청나다고 했다. 그럴 때 우리는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하며 탄식한다.
사회범죄도 아이들이 그 피해자일 때는 몇 배의 분노를 느끼게 한다. 아이들을 직접 상대로 상상도 못할 못쓸 짓을 하는 사람들이나, 아이들이 먹는 음식에, 아이들이 사용하는 장난감과 문구류에 시쳇말로 장난을 치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예외없이 경멸하고 분노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아동학대의 주가해자 중에는 친부모가 가장 많다고 한다. 물론 부모의 불우했던 성장기의 영향이나 정신적 질환, 심리적 문제로 인한 학대도 포함된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 피해자가 어린 천사들이라는 사실이다.
일식집에서 조리사로 일하는 아버지와 함께 사는 어린 형제가 있었다. 그 아버지는 매일 술에 절어 살면서도 생선회를 뜨는 기술이 남다르다고 했다. 두 형제는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면서 나쁜 일을 저질러 우리 센터에 오게 된 것이다. 아이들이 입소한 지 얼마 안 되어 젊은 여성이 찾아왔다. 한눈에도 두 형제의 어머니임을 알았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며 겨우 말문을 열었을 때 나는 그 어머니의 치아를 보고 매우 놀랐다. 그 예쁜 얼굴에 어떻게 그렇게 망가진 치아를 가질 수 있을까?? 그 어머니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아버지의 회칼에 난도질당하다시피 했고, 결국은 회칼에 살이 도려져 피를 흘리다 기절했던 날 아이들의 외삼촌에게 발견되어 집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 당시에는 가정폭력에 대한 인식이 없던 때였고, 무엇보다 후환이 두려워 경찰에 신고도 못한 것이다. 그렇게 자녀들을 만나지도 못한 채 가슴 졸이며 살다가 집도 아닌 곳에 있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살았던 아이들이 나쁜 짓을 했다 하여 아이들에게 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오늘은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이다. 그분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하는 죄 없는 어린 생명들을 보호해 주시고 자식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연에 가슴을 치고 우는 많은 어머니들의 통곡에도 위로를 주시리라 믿는다.
생명의 소중함
-손영순 수녀-
“부모가 돌아가시면 산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끔 제가 있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을 봅니다. 채 열 살이 되지 않은 나이에 뇌종양으로 죽는 아이, 이제 갓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육종암으로 떠나는 아이…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그들의 부모들을 봅니다.
자식의 병상을 지키는 순간부터 이미 그 부모는 함께 죽어가고 있습니다.
가슴 한 켠에는 커다란 바위덩어리 같은 것을 품고 아이가 떠나가는 과정을 지켜봅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은 채 아이를 위해 대신 아파해줄 수 있다면, 대신 죽을 수 있다면 무슨 방법이라도 다 하겠다고 울부짖습니다. 그들의 애절한 기도 앞에서 하느님은 귀를 막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하느님께 어린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데려가시는지, 또 죄 없는 아기들이 왜 죽임을 당해야 했는지 묻습니다. 그런데 ‘혹시 그런 일이 생긴 건 우리가 저지른 잘못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면 하느님께 질문하기 전에 먼저 우리들이 세상에서 행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반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아기들이 낙태되고 있는지, 소중한 생명인 배아들이 왜 실험현장에서 쓰레기처럼
폐기당하는지, 힘없는 무의식의 환자들이 왜 존엄사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마지막 삶을 제거 당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헤로데처럼 우리도 우리의 욕심으로 세상의 생명을 해치지는 않았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무죄한 어린이 순교자 축일
-김찬선신부-
이 축일의 의미도 한 때 제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20여 년 전 초등학교 6 학년짜리가 뇌종양으로 죽었습니다.
그 죽음을 제가 함께 지켜보았는데
그렇게 일찍 데려가실 것을 왜 태어나게 하시고
가족에게 고통만 남기고 떠날 걸
왜 태어나게 하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무죄한 어린이들의 죽음과 겹쳐지면서
죄 없는 어린아이의 고통과
죄 없는 어린아이의 죽음의 의미를 그때부터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의문이 풀린 것은 꽤 시간이 지나서였습니다.
죽음의 의미가 바뀌고 나서, 다시 말해서
죽음이 불행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무죄한 어린이의 고통과 죽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남은 가족의 고통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통이 곧 불행이라는 등식을 가지고 있던 제가
고통이 사실은 숨어있는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하느님께서 가족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셨는지 이해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
천수를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고 우리는 보통 생각합니다.
그런데 天壽, 이 천수란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오래 사는 것이 천수입니까?
그리고 한 80은 살아야 천수를 누리는 것입니까?
天壽란 말 그대로 하늘의 수명, 하느님이 정한 수명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께 가는 것이 행복이고,
하느님께서 정한 때 하느님께 가는 것이 천수를 누리는 것임을 압니다.
무죄한 어린이가 주님 때문에 죽은 것은
그래서 불행이 아니라 복이고 영광이라고 교회는 얘기하는 것입니다.
‘왜?’를 넘어서다
-전삼용신부-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전에 막가파나 요즘의 강호순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이 우리 보통 신앙인들보다 더 깨끗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 희생당한 사람들 중엔 역시 천주교를 열심히 믿어오던 사람도 있습니다. 성당에 봉사하러 오다가 그런 변을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땐, 하느님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당신께 그렇게 온 힘을 다하려는데 고작 주시는 것이 크나큰 고통과 이유 없는 죽음이라니.’
그러나 그 자녀의 죽음을 보면서도 부모는 신앙을 잃지 않고 딸의 그 고통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시는 모습을 볼 때 동시에 믿음의 힘이 어디까지인지 존경스런 마음이 일어납니다.
‘성인 밑에 순교자 난다.’는 말들을 가끔 합니다. 이는 성인처럼 사는 사람들 옆에 있으면 그 사람과 비교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눈총을 받거나 그와 비슷한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조금은 풍자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무죄한 순교자 아기들은 정말 예수님이 그 마을에서 태어나셨다는 이유로 모두 몰살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아이들이야 아무 것도 모르고 죽었겠지만, 그 부모들이야 예수라는 아기가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이들은 아직 이성이 온전하지 않은 아이들이었고 스스로 순교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살해를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아이들을 교회에서는 ‘순교자’라는 칭호를 주어서 예수 성탄과 이어지는 큰 축제일 중의 하나로 지내고 있는 것일까요?
순교란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아기들에게 믿음이 있었고 믿음을 증거하려는 의지가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그냥 죽음을 당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역시 무고한 죽임을 당하는 낙태되는 아이들과 다르게 더 특별한 공경을 받는 것일까요?
물론 이들이 믿음을 증거한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헤레데의 그 잔악한 살인 만행으로 인해서 진정 유다의 왕도 두려워하는 천상천하의 왕이 태어나셨음을 피로서 증거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사탄의 것이고 죄로 물들어 있습니다. 하와가 죄를 지어 모든 여인이 아기를 낳을 때 피를 흘리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 저주를 받은 것처럼, 그 이후로 어떤 좋은 것이 태어나려 하면 반드시 고통을 수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죄의 당연한 결과이지만 어쩌면 세상에 좋은 것이 오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시기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마귀의 모습은 바로 헤로데인 것입니다.
하물며 세상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한 메시아가 탄생하는데 사탄이 날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태어날 때 모든 아기들이 죽은 것처럼, 또 교회가 태어날 때 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뿌리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탄생에 수많은 희생자가 나오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어린 순교자들은 그들이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이 새로운 탄생을 위해 피를 흘린 사실상 첫 번째 순교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한 몫을 담당했기 때문에 그 보상도 함께 받게 되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마치 성모님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뽑히신 것처럼, 그들도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도록 미리 뽑힌 순교자들인 것입니다.
이 무고한 순교자들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우리 주위의 많은 고통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한 아버님도 10년 이상을 루게릭으로 고생하고 계신데 저에게 당신이 왜 그런 고통을 당하셔야 하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당신은 이미 당신 잘못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 고통을 받으셨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때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미워하셔서 지독한 벌을 주시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통공’을 설명하며 아버님의 고통은 당신 자신의 보속을 넘어서서 이제는 보이지 않는 필요한 곳에 하느님께서 쓰시고 계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마치 소화 데레사가 봉쇄 수도원에서 하는 작은 기도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 시킨 것과도 같고, 그리스도의 수난의 공로를 우리 모두가 받는 것과도 같습니다.
오늘 무고한 아기들의 고통은 하느님의 섭리가 우리들의 이유 없는 고통들에도 숨어 있음을 느끼게 해 줍니다. 중요한 것은 딸을 잃은 부모님께서 그 고통이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것임을 깨달으셨던 것처럼, 다 ‘이유’가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왜 나만’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 때도 무고한 순교의 길을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궁금한 것이 많은 어린아이를 무릎에 안고 있는 한 젊은 부인에게 백과사전 세일즈맨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인에게 이 백과사전을 능수능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지요.
“이 백과사전은 어린이가 아무리 어려운 질문을 하더라도 척척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으로 가정에 반드시 비치해놓아야 할 사전입니다.”
이 말에 젊은 부인은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자주 난처한 질문을 하는 아이인지라 어떠한 질문에도 척척 답할 수 있는 백과사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평소에 자주 했었거든요. 이러한 부인의 마음을 눈치 챈 세일즈맨은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자, 꼬마야. 이 아저씨에게 무엇이든지 물어보아라. 그러면 이 아저씨가 이 책을 보고 척척 대답해 줄 테니까.”
아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 세일즈맨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고 하네요.
“아저씨! 하느님은 어떤 차를 타고 다니세요?”
과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백과사전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겠지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과학적 지식으로 모든 의문점을 풀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이 세상의 지식으로 풀 수 없는 의문점들이 더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아이들이 죽음을 당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천사가 미리 알려줌으로 인해서 무사히 피신을 갈 수가 있었지요. 그렇다면 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두 살 이하의 갓난아기들의 죽음을 방치하셨을까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영역에 해당되는 의문인 것입니다. 생명과 죽음은 우리 인간들의 뜻이 아닌,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영역이라는 것이지요. 단지 우리들은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인 성녀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서만 최선을 다하고, 그 자리에 하느님의 자리는 조금도 비워놓지 않고 있습니다.
무죄한 어린이들을 죽음으로 모는 끔찍한 죄를 범한 헤로데. 그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왕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왕의 가능성이 엿보이는 두 살 이하의 어린이를 모두 죽여 버리지요. 즉, 하느님의 영역에 속해있는 생명과 죽음을 자신이 주관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역을 탐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죄한 어린이들의 죽음이 이 세상에 더 이상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영역은 하느님께 모두 맡깁시다.
빠다킹신부
또 한 명의 헤로데
-조명연 신부-
얼마 전에 우연히 유모차 안을 보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그 안에는
갓난아기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강아지 한 마리가 들어 있는 것이었어요.
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동물이
사람보다도 더 대접을 받는 것 같아서 씁쓸한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세상의 여러 곳에서 홀대받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동물은 별식과
별난 것을 공급받고 있는 반면에, 지금 이 시간에도 굶주려 죽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동물들은 보살핌과 귀염을 독차지하고 있는 반면에,
이 세상의 빛도 못 보고 낙태되는 아이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요?
2천 년 전, 헤로데는 자신의 자리가 위협받는 착각에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합니다.
바로 욕심 때문이지요. 그 욕심이 무죄한 어린이들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헤로데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서
보호받아야 할 어린이들이 보호받지 못한다면, 우리들의 욕심만을
내세워서 어린이들의 희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면,
우리 역시 또 한 명의 헤로데인 것입니다.
사랑의 삶
-허영엽 신부-
내가 어머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갑자기 돌아가신 다음 날 염습할 때였다. 우리 앞에 누워 계신 어머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주무시는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가 입고 계신 알록달록한 몸뻬바지를 보자 갑자기 목이 메었다. 평생 쉼 없이 일을 하시고 장사를 하셨던 어머니는 외출할 때를 제외하곤 늘 몸뻬바지를 입으셨다. 나는 어릴 때 그런 어머니의 옷차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구들 어머니는 멋지게 차려입는데 어머니는 늘 같은 옷에 같은 머리 스타일로 다니셨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 좀 다른 옷 입으면 안 돼?” 하면 어머니는 늘 “난 이게 편하다.”며 말머리를 자르곤 하셨다. 나는 그때 정말 어머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러나 어머니도 여자인데 왜 멋지고 좋은 옷을 입고 싶지 않으셨을까?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평생 입고 싶은 것, 드시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사셨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다 똑같을 것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놓으실 분, 그분의 이름은 ‘어머니’다. 티끌만큼의 이기적인 욕심도 없는 어머니의 모습, 하느님 사랑의 판박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할 때마다 어머니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갑자기 밤에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 가야 했던 어머니 마리아의 고통 때문일까? 우리들의 어머니는 똑같지는 않아도 자식 때문에 평생 크고 작은 고통을 겪으신다. 어린 시절 어머니께 들었던 한국 전쟁 때의 피난 이야기는 너무 끔직해서 생각하기조차 싫다. 그때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 때문에 고통을 견딜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당신은 며칠을 굶으면서도 자식들 먹을 것을 먼저 챙겼다고 한다. 자식들이 배가 고파 울면 애간장이 녹는 것 같았다는 어머니의 말씀에서 사랑의 실체를 느끼게 된다.
헤로데는 새로운 왕이 나신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자신의 권력에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욕심은 인간의 눈을 멀게 한다. 헤로데는 이기적인 욕심에 빠져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내 것만이 제일 소중하다는 이기심, 자기 것만을 지키려는 아집은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오는가. 자신의 욕심만을 채운다면 우리의 삶은 황폐하게 될 것이다. 이제 내 것만이 소중하다는 마음부터 버려야 한다. 다른 이를 위해서 무언가 버리고 희생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그만큼 사랑으로 변화될 것이다.
악을 통해서도 구원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 -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예물을 드리고 경배한 후에 곧이어 예수님께서는 배척과 박해를 당하신다. 유대인의 왕이며 세상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께서 당신 나라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시고(요한 1,11), 도망자처럼 이집트로 급히 피하실 수밖에 없게 된다. 이집트에는 당시 약 백만 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집단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이집트로 피난한 역사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일찍이 아브라함(창세 12,10)과 야곱(창세 46,6)이 흉년으로 인해 이집트로 피난했으며, 솔로몬이 죽은 뒤 많은 유대인들이 피난하였고(1열왕 11,40), 바빌론 포로 시대에도 예레미야를 비롯한 많은 유대인이 그곳으로 갔다(예레 26,21-23; 43,7) 특히 신구약 중간기 때는 많은 유대인들이 시리아의 학정을 피해 이집트로 이주하였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자마자 곧바로 이집트로 피신하였다.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보다 하느님의 뜻에 절대적이며 즉각적으로 순명하는 깊은 믿음을 가진 요셉은 이집트의 변경까지 약 120km나 되는 먼 여행을 떠났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완전한 믿음이다(히브 11,1.6).
요셉은 이집트에서 살고 있던 동족들의 도움을 받아 커다란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호세 11,1)라는 구약의 예언과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때에 성취되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신 구약의 역사가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재현된 것이다. 구약은 곧 신약의 그림자이며, 구약의 역사는 곧 예수님을 준비하는 역사이며,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건을 미리 보여주는 하나의 표이다.
헤로데는 박사들이 자신에게 오지 않고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노하여 베들레헴과 그 근처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 이리하여 “라마에서 통곡 소리가 들린다.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구나. 그 눈앞에 아이들이 없어 위로하는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가지 않는구나.”(예레 31,15)는 예언이 성취된다.
이방의 침략으로 다윗의 왕권이 무너지고 바빌론에 유배되어 이스라엘의 어머니들(라헬)이 탄식의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또 다른 이방인인 헤로데(에돔인)의 학정으로 살해된 베들레헴 아이들의 어머니들이 통곡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 되시어 이스라엘을 다스림으로써 하느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신 새 계약(26,28; 예레 31,31-34)이 성취된다. 그리하여 하느님 백성은 위로를 받고 눈물을 거두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이요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강생하실 때에 그분을 환영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분을 적대한 이들도 있었다. 빛 안에서 사는 사람, 하느님의 계시를 따르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환영하고 주님께 경배했지만, 어둠의 자식들은 주님을 적대하여 없애고자 했다. 그리하여 무죄한 어린이들이 애꿎은 죽임을 당했다.
그들은 아무런 죄도 없고 죽음조차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젖먹이였다. 어둠의 자식들은 꽃봉오리조차 피우지 못한 젖먹이들을 무참하게 살육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그들의 죽음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다. 그처럼 무참하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면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던 편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생각할 때, 그들은 교회의 첫 순교자들이다. 비록 자신들의 의지로서 신앙을 고백하진 못했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죽임을 당한 첫 순교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되고 영광을 받은 첫 성인들이다. 그들이 비록 세상에서는 생을 다하지 못했지만, 천국에서는 영원한 생명과 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들은 비록 악의 세력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지만,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곳곳마다 그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처럼 악을 통해서도 선을 끌어내시는 하느님이시다.
오늘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축일을 보내면서 악을 통해서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자. 내가 당하는 불의와 악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심을 굳게 믿자. 불의와 고통 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주님을 원망하기보다, 그러한 어려움을 통해서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을 굳게 믿고 살아가자. 그리하여 천국 영광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자.............◆
밝고 맑은 빛으로 비쳐주는 진리를 선택한 길
-박갑조 신부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성탄의 기쁨이 어둠을 밝고 맑은 빛으로 비쳐주는 이 시기에 우리는 오늘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축일을 지내게 됩니다.
그런데 왜 이 기쁨이 이 희망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숱한 설움과 귀양살이에서 오는 크나큰 인류의 희망을 잠시 누릴 여가도 없이 또 한번 한인간의 야욕이 말도 배우기도 전의 어린 아이들을 무참히 살육하고 구세주를 야반도주케 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야 겠습니다.
바로 우리의 애착이 집착이 천륜을 끊게 하고 인류를 박탈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에서 설움과 배신과 모욕을 받아 가면서 굶주림도 추위도 입내음나는 한입김으로 이겨낼 수 있는것은 꿈은 이루어지리라는 어느 문구처럼 언젠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나도 사람답게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굽이굽이를 넘어 오는 것입니다.
허나 사람이 어둠속을 걷는 것 같은 인생살이의 고역에서 진리인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에 모질지 못하는 신뢰가 믿음이 애념의 유혹의 손길로 불의의 늪에 빠져 깨끗하고 싶다는 내면의 절규에 가책을 느끼며 뒤안길을 걷기도 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나 한 개인의 계획과 가계부의 예산 때문에 빛으로 오는 한 생명이 희생될 우려 앞에서 또 한번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피 흘리게 하는 것이며 자기가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거짓된 희망 다시말해 나만의 세상만을 꿈꾸는 것이 됩니다. 나만의 미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것은 과거의 용서가, 자비가 누군가의 사랑이 있기에 현재가 있는 것이고 미래란 것도 현재의 친교가 있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기가 있음으로써 존재하고 아버지는 가정이 있어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노고와 희생은 사랑으로써 존재 이유가 있으며 가정이라는 밤길의 여정은 하늘의 비추심으로 탄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갔다”(마태2,14)고 했습니다. 저는 이 밤을 한 가정의 고뇌의 시기이며 한 어머니가 생명을 선택하는 귀로라 여겨집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진리를 선택한 길에 있어서 자신의 애욕과 집착과의 정면 승부이며 여기서 그 빛의 승리는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의 몫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한 생명에서 시작되며 그 가문은 하늘의 축복으로 행복을 일구어 질 것입니다...........◆
완장
-양승국신부-
교회는 오늘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비록 꼭두각시 왕권이었지만 천년만년 왕좌에 앉아 지내고 싶었던 헤로데 왕의 과도한 권력욕이 불러온 안타깝고 불행한 죽음을 오늘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 가장 인간을 괴롭히는 것 중에 하나가 헤로데가 지녔었던 과도한 권력욕입니다. 물러날 순간이 오면 지체 없이 물러나는 것이 자연의 순리인데, 끝까지 권력 연장을 위해 갖은 잔머리를 굴리고, 전혀 설득력 없는 논리들을 내세워 자신을 정당화시키고 우상화시키는 헤로데 왕의 권력욕 때문에 아무런 죄도 없는 수많은 아이들이 무참히 죽어갔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정당하지 못하고 과도한 권력욕으로 인해 우리의 지난 세월들이 얼마나 피곤했습니까?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높은 양반이 외국 순방에서 돌아오기라도 하면 학교 전체가 난리가 났었지요. 점심식사도 걸러 가며 서너 시간 전부터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도로가에 서있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데다 너무 오랫동안 뙤약볕에 서있었던 나머지 여기 저기 픽픽 쓰러지던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지나친 권력욕 못지않게 우리를 괴롭히는 것인 또한 지나친 권위주의,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왕자 병 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내 논리에 동의해야 한다"는 욕심에서 나온 획일주의는 또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지요?
오늘 한 사람의 지나친 자기 보호본능이 초래한 대 참사 앞에서 모든 지도자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많은 반성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완장만 찼다하면 돌변하는 사람들을 너무도 자주 봅니다. 교회 안에서, 또 사회 안에서 우리에게 티끌만큼의 자리, 눈꼽만큼의 권위라도 주어졌다면 그것은 바로 봉사를 위한 권위입니다.
권위는 "내가 누구네!"하고 고개 뻣뻣하게 치켜세우기 위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고 멋있는 명함을 몇 천 장 찍기 위한 것도 절대로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권위는 공동체의 평화와 일치, 구성원간의 유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권위는 다스림, 군림, 지휘, 통솔보다는 섬김과 봉사를 위한 것입니다.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첫째가는 과제는 바로 친교의 중심 역할입니다.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바로 공동체의 책임자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지나친 자기욕구 충족으로 인해 우리도 모르게 큰 상처를 입는 피해자들은 없는지 한번 주변을 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과도한 자기 과시 욕구로 인해, 우리의 지나친 이벤트성 행사로 인해 부담스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은 없는지 늘 확인하면 좋겠습니다.
당연한 것이 선물
-민경철 신부-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어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것을 가지고 싶고, 가지게 되면 더 큰
것을 탐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가지고 있는 것을 잃고 싶지 않은
욕망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헤로데가 그랬지요. 세상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 두 살 이하의 사내를 살해하는
큰 범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어떻게 차지한 자리인데 그 누가 내 것을
빼앗아 갈 수 있단 말입니까? 이처럼 우리 삶에 당연한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지수는
그리 크지 못합니다. ‘내 지금의 자리는 정당한 방법으로 올라온
자리이니까 내 노력의 대가야, 나의 재산은 쓸 것 못 쓰고 절약하여 모은 돈으로
마련한 것이니까 그 희생에 대한 보상이야.’ 이런 생각들은 소유물에 집착하도록
만듭니다. 내게 당연한 것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감사한 선물로 바뀔 때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영원히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잠시 맡기고 잘 빌려 쓰라는
것이었다면 언제든지 내놓을 수 있는 마음으로 살아야 자유를 체험합니다.
버려야 얻는다는 진리가 사실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탓인가?
-박용식 신부-
이 세상에는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무런 죄도 없이 누명을 쓰고 감옥생활을 하는 사람들, 감옥살이는 아니더라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금전적으로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의 어떤 사람들은 그 억울함의 탓을 하느님께 돌린다. 하느님께서 그런 고통을 허락하셨다고 원망하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그 고통을 주신 것으로 간주하여 하느님을 미워하고 저주하기도 한다.
오늘 복음 말씀에도 참으로 억울한 이야기가 나온다. 헤로데가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인 것이다. “라마에서 들려오는 소리, 울부짖고 애통하는 소리, 자식 잃고 우는 라헬, 위로마저 마다는구나!”(마태 2,18; 예레 31,15) 예수님이 없었더라면 무죄한 아기들이 죽지 않았을 텐데 예수님 때문에 죽었으니 그 책임은 전적으로 예수님에게 있는 것 같다.
강에서 물놀이 중에 익사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물이 없었더라면 사고가 없었을 텐데, 물이 있어 사고가 났으니 물을 만드신 하느님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과 같다. 이처럼 억울한 사람들의 고통은 하느님의 탓인 것 같다. 그러나 인간 고통은 자신의 잘못이 전혀 없는 고통이라도 그 원인이 악마나 다른 사람이나 자연 현상에 있는 것이지 하느님에게 있지 않다. 하느님은 욥이나 특별한 성인에게 특별한 목적으로 고통을 주시는 것을 제외하고 원칙적으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시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이 당하는 고통은 그 고통이 아무리 크고 억울하다 하더라도 하느님께 탓을 돌려서는 안 된다.
무죄한 어린이들의 죽음
-이회진신부-
역사적으로 볼 때 어느 시대건 각 시대마다 헤로데와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왕권과 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가치를 극복할 수 없거나
영적 혹은 이성적 도전에 자신을 열 자신이 없다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모든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할 것이다.
그것이 부도덕한 것이고 할지라도 그들은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기에 무죄한 어린이들의 폭력적 죽음이란 비단 2000년 전
권력욕에 눈이 멀어 하느님의 오심을 거부한 미친 왕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서 그럴싸하게 포장되어서
혹은 우리들의 무관심과 외면 속에서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낙태와 영아 유기, 학대, 전쟁에 내 몰리는 아이들 등
여러 방면에서 무서운 폭력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전하는 아이들의 슬픈 울음소리는
우리의 영혼에 커다란 두려움과 상처를 줄뿐만 아니라,
하느님은 왜 이런 일마저 허락하시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성서에서 계속해서 만나는 주제이기도 한 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들은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또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 좌절, 걱정, 위험, 모험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고 좌절시키는 이 어려움들을
하느님께서는 없애주시겠다고 약속하기 보다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의 두려움과 죽음과 좌절과 고통 그리고 온갖 어려움을
없애주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 안에서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오히려 우리와 함께 그 삶의 한 가운데서 사시겠다고 약속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분명 이러한 폭력은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것이 아닌,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이 만들어낸 악의 결과입니다.
또한 오늘날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는 무죄한 어린아이들에 대한 폭력 또한
무늬만 다르게 포장되어 드러나는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에 의한 악의 결과들입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어려움들을 가져오는 악의 요소들을 제거해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고,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에게 한 생명 한 생명의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시며 우리와 함께 그 어려움의 한 가운데서 살아가십니다.
베들레헴이 수많은 아이들 중 하나였던 예수님의 존재처럼
우리 가운데 있는 수많은 아이들 가운데 하느님의 생명 자체가
지금도 우리의 악한 마음 때문에 죽음 속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느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걸으시면서
우리에게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려주십니다.
그 고통과 참혹함 가운데 하느님의 희망도 함께 있습니다.
“주님, 저희와 함께하소서.”
떨어진 꽃잎들
-강영구 신부-
+헤로데는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대에게
‘순교의 꽃들이여 절하나이다/ 새로핀 장미꽃이 폭풍에지듯/
예수님 죽이려고 쫓던무리에/ 세상빛 보자마자 지고말았네/
최초로 예수님께 바쳐진희생/ 여리기 그지없는 속죄의양떼/
주님의 제단앞에 천진스럽게/ 팔마와 화관들고 노니나이다/
오늘 성무일도 아침기도의 찬미가 중 일부입니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에 여린 꽃잎들이 떨어집니다.
매서운 추위와 눈보라에 처연한 모습으로 꽃잎은 지지만 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아십니까? 떨어져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이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떨어져 발길에 짓밟히지는 꽃잎들이 봄의 전령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좌절시키려는 헤로데의 야심과 욕망이 어린 생명들을 앗아갑니다.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피로 얼룩진 헤로데의 손이 하느님의 계획을 가로 막을 수 없습니다.
자식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며 우는 라헬들의 애끊는 통곡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지만
죽임당한 어린이들은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오릅니다.
암흑은 여명(黎明)을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솟아오르는 태양은 어둠을 몰아내고 새 시대를 엽니다.
오늘 우리시대에도 무자비한 헤로데의 손길은 곳곳에서 여린 생명들을 짓밟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불의가 정의를 이겨본 적이 없고
악이 선을 이겨본 적이 없으며
미움과 증오가 사랑과 자비를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새날은 빛과 함께 열립니다.(一明)
왜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가?
-이찬홍 신부-
전에는 8부 축제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개정된 현행 전례 개혁안에는 성탄과 부활만을 8부 축제로 보내고 있습니다.
‘8부 축제’ 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주님 탄생과 부활의 기쁨은 하루만 기뻐하고 경축하기에는 조금은 부족하기에 적어도 8일 동안 함께 기뻐하라는 의미로 제정된 것입니다.
이러한 8부 축제의 의미에 따라 주님 탄생을 기뻐하기에도 부족한 이 시기에, 우리는 어쩌면 주님 탄생과는 무관하게 느껴지는 다른 순교 축일을 함께 기념합니다.
지난 월요일 성 스테파노 순교 축일과 오늘 기념하는 무죄한 어린이의 순교 축일이 그렇습니다.
왜 기뻐해야 하는 이 순간에, 기쁨과는 거리가 먼 순교, 죽음을 기념하는 것일까요?
기쁨과 슬픔은 늘 함께 오는 것이기에, 슬픔을 거부해 버리면 참된 기쁨 역시 사라져 버리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일까요?
아마도, 스테파노 성인의 순교하는 모습과 그리고 무죄한 어린이들의 부당하게 죽임을 당하는 그 모습이 예수님과 너무 비슷하기에 그러하지 않을까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 “아버지,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라고 기도를 드리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스테파노 성인 역시,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드리며 순교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기념하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과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실, 갓 태어난 어린 아기에게 죄가 있다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혹 있다고 해도, 그 죄가 죽을 정도로 큰 죄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죽임을 당하는 것은 분명, 헤로데의 욕망,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지닌 기득권을 유지하게 위해 그런 억울하고, 정말 이해가 안 되고, 생겨서는 안 되는 그런 부당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병든 사람을 고쳐준 죄입니까?
가난하고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과 어울린 죄입니까?
혹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 죄가 죽을 정도로 큰 죄입니까?
그럼에도 죽임을 당하는 것은 분명, 그 당시 지도자라 할 수 있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무죄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기념하는 무죄한 어린이들이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가 똑같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주님의 복음이 세상 많은 곳에 전해진 오늘날에도...주님을 구세주요, 사랑의 아버지로 믿고 있는 오늘날에도, 매일 2-3초 사이에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헤로데가 없는 이 시대에 왜 무죄한 어린이들은 계속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요?
왜, ‘낙태’ 라는 이름의 또 다른 순교가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 어른들의 쾌락만을 탐하는 욕망 때문입니다.
거의 방종에 가까울 정도의 무책임한 행동이 결과 때문입니다.
힘들다는 이유 때문에... 낳기 싫다는 이유 때문에... 매일 그렇게 무죄한 어린이들은 순교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무죄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매순간 그렇게 십자가상에서 부당하게 돌아가시는 고통, 아픔을 겪고 계십니다.
왜, 계속 무죄한 이들이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언제까지 무죄한 이들의 죽음이 계속되어야 합니까?
이런 무죄한 이들의 죽음은 분명 이해되지 않고 잘 풀리지 않습니다.
바로,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신비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무능력 때문입니다.
거창하고 위대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비천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마구간에 오시어 세상의 모든 악과 죄를 당신 십자가에 모두 짊어지고 비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뒤집어 업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를 이루고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늘 죽고 죽임을 당하는 그 모습에서.. 늘 무죄하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죽어가는 그 모습에서 미약하면서도 동시에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절대 권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무능력하고’ ‘힘없고’ ‘어쩔 수 없는’ 그 모습, 그 마음에서 비롯되는 전능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만이라도, 무죄한 아이들이 무참히 순교하는 그런 범죄에, 무죄한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그런 잘못에 동참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박갑조 신부-
성탄의 기쁨이 어둠을 밝고 맑은 빛으로 비쳐주는 이 시기에 우리는 오늘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축일을 지내게 됩니다.
그런데 왜 이 기쁨이 이 희망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숱한 설움과 귀양살이에서 오는 크나큰 인류의 희망을 잠시 누릴 여가도 없이 또 한번 한인간의 야욕이 말도 배우기도 전의 어린 아이들을 무참히 살육하고 구세주를 야반도주케 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야 겠습니다.
바로 우리의 애착이 집착이 천륜을 끊게 하고 인류를 박탈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에서 설움과 배신과 모욕을 받아 가면서 굶주림도 추위도 입내음나는 한입김으로 이겨낼 수 있는것은 꿈은 이루어지리라는 어느 문구처럼 언젠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나도 사람답게 살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굽이굽이를 넘어 오는 것입니다.
허나 사람이 어둠속을 걷는 것 같은 인생살이의 고역에서 진리인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에 모질지 못하는 신뢰가 믿음이 애념의 유혹의 손길로 불의의 늪에 빠져 깨끗하고 싶다는 내면의 절규에 가책을 느끼며 뒤안길을 걷기도 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나 한 개인의 계획과 가계부의 예산 때문에 빛으로 오는 한 생명이 희생될 우려 앞에서 또 한번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피 흘리게 하는 것이며 자기가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거짓된 희망 다시말해 나만의 세상만을 꿈꾸는 것이 됩니다. 나만의 미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것은 과거의 용서가, 자비가 누군가의 사랑이 있기에 현재가 있는 것이고 미래란 것도 현재의 친교가 있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기가 있음으로써 존재하고 아버지는 가정이 있어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노고와 희생은 사랑으로써 존재 이유가 있으며 가정이라는 밤길의 여정은 하늘의 비추심으로 탄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갔다”(마태2,14)고 했습니다. 저는 이 밤을 한 가정의 고뇌의 시기이며 한 어머니가 생명을 선택하는 귀로라 여겨 집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진리를 선택한 길에 있어서 자신의 애욕과 집착과의 정면 승부이며 여기서 그 빛의 승리는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의 몫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한 생명에서 시작되며 그 가문은 하늘의 축복으로 행복을 일구어 질 것입니다.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 말씀(1요한 1,5-2,2; 마태 2,13-18)
-이인옥-
어느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 다른 아기들의 목숨은 버려두고 자기 아들만 구한 것에 대해
평생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 소설의 밑바탕에는 하느님은 왜 무고한 어린 아기들의 생명을 구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는지, 과연 그런 하느님이 정의로운 분인지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신자라고 해서 한번쯤 이런 회의를 품어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맡은 예비자들도 성서필사를 하면서 궁금하다며 질문도 하였다.
먼저 우리는 성서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전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잘 잊어버리고 있다.
성서저자는 예수의 어린 시절의 성장배경이나 공생활의 업적을 시시콜콜 전해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유년 사화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 거의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복음사가가 예수를 어떻게 신앙하고 있는지의 신앙고백을
몇 개의 그럴듯한 이야기 안에 듬뿍 담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예수의 어린 시절이 역사 보도문(예수의 전기)이라고 생각한다면
각 복음서가 전해주는 유년기 이야기 중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는 것을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각 복음서는 복음사가 나름으로 예수님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를 이야기 형식에 담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이야기형식은 유다민족들이 즐겨쓰는 표현방식이다)
마태오 복음에서의 예수의 유년기는 다섯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다.
즉 ’예수 탄생예고’, ’동방 박사들의 예방’, ’에집트 피난’, ’아기들의 집단 학살’,
’에집트에서 돌아옴’이다.
마태오복음은 유대인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예수는 누구신가"를 말하고 있는 복음이다.
유대인 독자라면 이 제목들과 내용들만 보아도 연상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바로 자기 민족의 영웅, 위대한 모세의 일생과 아주 흡사하다.
당대 최고 통치자인 파라오의 명령으로 히브리 사내아이들이 죽임을 당하는 위기에서
구사일생으로 구출되어 에집트 궁정에서 자라난 모세.
당대 유다의 통치자인 헤로데왕이 베들레헴의 사내아이들을 학살하려는 위기에서
천사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에집트로 피난가는 예수.
미디안 사막에서 더부살이하던 모세는 잔혹한 왕이 죽자 가시덤불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
자기의 백성을 구출하러 돌아온다.
예수 역시 잔학한 왕이 죽었다는 소식과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아버지 요셉의 도움으로 자기의 백성이 사는 곳으로 돌아온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는 천사의 예고를 이미 받은 바 있다(1,21).
자, 이제 마태오복음사가가 그분을 어떻게 신앙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모세와 예수는 가장 강력한 인간(왕)의 잔혹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구출되어 하느님의 보호로 자라나 백성을 구원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러나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결코 모세와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자신이 속해있는 유다인 공동체 안에 그들이 가장 위대하게 생각하는 모세의 기억을
끌어다 말함으로써 보다 쉽게 그분을 이해하도록 모든 힘을 다한다.
또 예수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는 것이라는 사상을 심어주려 주력한다.
그래서 복음서 곳곳에서는 모세와 연관된 구성이 눈에 띈다.
다섯 개의 긴 설교로 구성되어 있는 복음서 전체도 그렇지만
다섯 개의 유년기의 에피소드 역시 모세 오경을 염두에 두고 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주님께 ’열개의 말씀’(십계명)을 받았지만,
예수는 산에서 스스로 복된 말씀(하느님 백성이 살아야하는 대헌장)을 반포하시는 주님이시다.
이제 이런 시각으로 오늘 복음을 다시 본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가장 어두운 시기인 바빌론 유배 당시,
학살당한 자식들의 어머니들의 참혹한 울부짖음이 회상된다.
유배는 제2의 종살이로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거역하고 지은 ’죄의 응벌’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복음사가는 바빌론 유배의 역사를 회상시키며
예수께서는 이러한 죄의 종살이로부터도 당신의 백성을 이끌어 내실,
모세를 능가하는 위대한 분이시라는 것을 유다인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이야기의 끝을 모두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맺는 것도
성서에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유년사화는 어떤 역사적 사건이 있었는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어떤 분으로 신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베들레헴의 무고한 아이들을 다 놓아두시고
왜 아기 예수만을 구했는가에 대해 골몰할 필요도 없고,
한 명의 구세주 때문에 무고한 아이들이 희생양이 될 수 있는가 의아해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무고한 어린이들의 희생을 애도하고 기념하는 날을 정했을까?
다만 오늘 성서말씀을 통해서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어른들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또는 무관심 속에서 무고하게 학대받고 버려지고
심지어 생명을 빼앗기고 있는 무력한 어린이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고한 어린이들이 희생되고,
어른들의 이기심 때문에 낙태되고 있는 죄없는 아기들의 영혼의 울부짖음을
오늘 복음에서 들어야한다.
그 책임은 하느님이 아니고 우리 사람에게 있음도 분명하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 부도덕한 인간적인 판단에 따라서
또 다른 헤로데가 되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또 다른 요셉이 되든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박상대신부-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루가 2,14) 이는 대림시기와 사순시기를 제외한 모든 주일과 대축일, 성탄과 부활의 팔일축제와 성인들의 축일에 노래하는 ‘대영광송’의 첫 부분이다. 이 외침은 예수께서 탄생하신 순간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천사들과 더불어 하느님을 찬양한 데서 비롯된다. 천상군대의 찬양에 걸맞게 목동들이 떼를 지어 와서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고, 동방에서도 박사들이 셋이나 경배하고 선물을 드렸다. 그런데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했던가? 예수님 때문에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젖먹이를 포함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이 모조리 떼죽음을 당하였으니 말이다.
문제의 발단은 점성가들이었던 동방의 박사들이 하늘에 큰 별이 나타난 것을 보고, 그 별의 주인을 찾아 온 데서 시작된다. 그들이 제각기 먼 길을 거쳐 찾아와 보니, 그 별이 성도 예루살렘 위를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눈에 화려하고 웅장한 성도 예루살렘 정도라면 별의 주인인 유다인의 왕이 탄생한 장소로 적합하다고 보였던 것이다. 자기 말고 어떤 왕이라니, 아닌 밤에 홍두깨라 했던가, 헤로데 대왕은 한밤중에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모아 놓고 예언서를 뒤졌다. 거기에는 유다의 땅 베들레헴이라고 적혀 있었다.(미가 3,1.5) 그 길로 박사들은 별의 안내를 받아 베들레헴의 예수 아기가 있는 곳으로 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고 경배하였다. 물론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가서 찾아보고 와서 알려달라고 청을 했었다. 자기도 ‘유다인의 왕’에게 경배하러 가겠다는 말도 했다. 그동안 헤로데는 아기를 제거할 무슨 책략을 꾸미려 했을 것이다. 혹자(或者)는 헤로데가 박사들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당장 손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그 아기가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요 영도자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백 년을 기다려온 메시아임이 틀림없기 때문에 유대혈통이 아닌 헤로데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박사들이 꿈에 헤로데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들 나라에 돌아간 일 때문에 결국은 헤로데 대왕의 주권이 발동되고 잔악한 대학살이 벌어진다. 아버지 안티파텔을 닮아 아내를 십수 명씩 거느리며 부귀와 권세와 영달을 좋아하던 헤로데에게 두 살도 채 안되는 사내아이들이 미래 이스라엘의 꿈이라는 단순한 진리조차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구약의 모세도 서슬이 시퍼런 파라오의 칼날을 피해 갔고, 아기 예수도 하느님의 안배로 미리 피난길에 올랐지만, 졸지에 변을 당한 그들의 억울함을 누가 있어 송사해 주겠는가?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도 있기는 하다만, 그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으랴. 또 그이들을 젖 먹여 키운 엄마들의 찢어진 마음은 누가 있어 위로해 주겠는가? 어처구니가 없음은 마태오복음사가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라마에서 들려오는 소리, 울부짖고 애통하는 소리, 자식 잃고 우는 라헬, 위로마저 마다는구나!”(예레 31,15)라는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
교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수님의 성탄대축일 이후 팔일축제의 첫 3일간을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 예수님의 애제자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그리고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을 잇달아 기념하여 왔다.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은 서방교회에서 형성된 것으로서, 500년경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지역에서 처음으로 기념되었다. 12월 28일에 이 축일을 지내게 된 이유는 무죄한 어린이들에 대한 헤로데의 학살극이 예수 탄생 3일 후에 일어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아이들의 죽음이 졸지에 당한 ‘개죽음’이나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의 죽음으로 볼 지도 모르지만, 교회는 이 아이들의 무죄한 죽음과 이 아들을 잃고 애통해 하는 어머니들의 마음을 순교의 행위로 승격시켰다. 경배와 찬양으로 둘러싸인 아기 예수의 요람(搖籃) 아래, 이미 증오와 박해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미 예수님의 구원사명과 운명에 포함된 것이리라. 우리 주변에도 이러한 죽음들과 죽어가는 이들을 애통해 하는 마음들이 많다. 아직 한마디 말도 못하고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아기 예수님이지만, 예수님은 오늘 헤로데의 칼날에 쓰러져간 무죄한 아이들의 죽음과 다른 모든 죄 없는 죽음과 의로운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계실 것이다. 오늘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그 빛이 세상을 밝힐 수 있도록 ‘초의 심지’와도 같은 죽음이 된 것이다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 13-18)
-유 광수신부-
그 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확실히 알아 낸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에서 그 아래의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1.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의 천사의 역할과 헤로데의 역할이 서로 상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님의 천사는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일어나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요셉에게 일러줌으로써 그들의 목숨을 구하도록 도와주었다. 즉 주님의 천사가 한 일은 죽을 위험에 처한 이들을 구하는 일을 하였다. 한편 헤로데는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들을 모든 위험에서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켜주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이지만 아기 예수가 자기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알아보라고 하였고 그들이 몰래 도망간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면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에서 그 아래의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헤로데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회생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구하기 위해 자기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는 무조건 다 죽여 버리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주님의 천사는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일을 하였다면 헤로데는 반대로 자기가 살기 남을 죽이는 일을 하였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위해 어떤 삶을 사는가? 를 묻게 된다. 주님의 천사처럼 다른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를 구해주는 삶을 사는가?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즉 내 가족과 이웃에게 주님의 천사인가 아니면 헤로데인가?
2. 오늘 교회는 예수님 때문에 첫 번째로 죽은 무죄한 어린이들을 순교자들로 지낸다. 순교자란 교회에서 주는 최고의 영광스러운 칭호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사람이 무엇을 하다가 어떻게 죽는 것이 중요한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헤로데는 분명 어린이들보다 오래 살았고 높은 권좌에서 호화스럽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누리며 오래 살았다. 즉 헤로데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누구나 다 바라는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소유한 성공한 사람이다. 그에 비해 무죄한 어린이는 두 살밖에 살지 못한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는 짧은 인생을 살았다. 인간적으로 볼 때 무죄한 어린이들은 불쌍한 아기들이었고 정말 불행한 아기들이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성공한 사람은 헤로데가 아니라 무죄한 아기들이었으며 헤로데가 장수한 것이 아니라 무죄한 어린이들이 장수하고 있다. 사람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 또 얼마나 높은 자리에 앉았는가도 중요하지 않다. 하느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를 위해서 살다가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하다. 비록 두 살밖에 살지 못한 어린이들이지만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은 순교가 된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필립1,20) 라고 말씀하셨듯이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죽느냐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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