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찬찬한 위안, 담양
살다 보면, 숨고 싶은 순간이 있다. 씩씩한 척 억지로 웃는 일에 염증이 나고, 마음에 없는 소리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일이 버거워질 즘 담양을 찾았다. 온통 짙은 초록으로 물든 이곳은 움츠러든 여행자를 토닥토닥 다독인다. 그 온전한 위로에 마음이 놓여 느릿하게 오랜 시간 머물게 되는 곳, 담양이다.
담양 메타세쿼이아길
고려, 조선시대의 귀양은 형벌이었겠지만, 빠르게 변하는 시절을 허겁지겁 버둥거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귀양은 꿈같은 일이다. 더군다나 그 목적지가 담양이라면 그 꿈은 더욱 달콤해진다. 옛 속담에 “담양 갈 놈”이라는 말이 있다. 담양으로 유배살이를 갈 놈이라는 뜻의 욕으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이 변해서 지금 누군가에게 ‘담양 갈 놈’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머리를 조아리며 절이라도 할 만큼 고맙게 들릴 것 같다.
은둔의 정원, 소쇄원과 명옥헌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별서정원으로 꼽히는 소쇄원은 담양 남쪽에 있다. 조선시대 문인인 양산보는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자 고향에 내려와 소쇄원을 짓고 자연을 벗 삼으며 여생을 보냈다. 입구의 대나무 숲길을 백여 미터 걸어 야트막한 구릉의 정점에 닿으면 깊고 고요한 정원의 풍경이 한눈에 든다. ‘소쇄(瀟灑)’라는 이름 뜻 그대로 맑고 깨끗하다. 울창한 숲 사이로 계곡이 흐르고 숲과 계곡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에 정자인 광풍각과 사랑채 겸 서재의 기능을 하는 제월당이 다소곳이 자리 잡았다. 마른장마에 계곡 물은 졸졸 흐르지만, 비가 오면 물길이 열려 폭포가 된다고 한다. 그 때문에 소쇄원의 정취를 제대로 만끽하려는 사람들은 비 오는 날을 골라 찾기도 한단다.
광풍각 마루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 바람 소리 새소리가 청아하게 들린다. 여기에 물 흐르는 소리까지 더해지면 ‘이곳이 무릉도원이겠구나.’ 싶다. 사계절 내내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뽐내는 소쇄원의 정취에 반해 정철, 고경명, 기대승, 김인후,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이들이 지은 수많은 찬시 중 고경명이 지은 시의 제목은 소쇄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명쾌하게 설명한다. 시의 제목은 이렇다. ‘꿈에서 소쇄원을 노닐다’. 좋은 꿈을 꾸다 어렴풋이 깬 어느 아침, 꿈을 계속 이어 가기 위해 다시 잠드는 순간의 달고 포근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곳, 소쇄원이다.
소쇄원을 찾은 날, 광주 유니버시아드에 참가한 해외 선수단과 마주쳤다. 그들에게 광풍각의 누마루에 등을 대고 바람 소리를 듣는다는 건 어떤 느낌이었을까
소쇄원에서 길을 나서 887번 국도를 타고 가다 보면 '후산리'라는 마을이 나온다.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가 있는 마을로 유명하다. 인조가 반정을 꾀하기 전 세를 모으기 위해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오희도를 찾아왔을 당시 이 은행나무에 말고삐를 맸다고 전해진다. 명옥헌은 오희도의 아들 오이정이 아버지가 살던 곳에 부친을 기리며 칩거하기 위해 지은 정원이다. 소쇄원보다 유명하지 않아 이곳을 찾는 사람은 적지만 그 아름다움은 소쇄원에 뒤지지 않는다. 마을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데다, 건물 누마루에 앉으면 마을 전경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여 아늑한 정취와 시원한 풍광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다. 명옥헌 앞에는 네모진 연못이 있다. 연못 사방으로는 배롱나무가 빼곡하게 심겨 있다. 8월에 이곳을 다시 찾아야 할 명백한 이유가 생겼다. 오랜 세월을 지나 고목이 된 배롱나무에 붉은 백일홍이 가득 달린 명옥헌의 정취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완연한 여름을 오매불망 기다리게 됐다. 백일홍이 가득한 명옥헌은 상상만으로 가슴이 설렌다
천천히 느리게, 창평 슬로시티
담양 창평면 삼지내마을은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된 곳이다. 창평초등학교 앞 골목으로 들어서서 몇 발자국만 옮기면 다른 차원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이곳에선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도, 거세게 부는 바람도 그 흐르는 속도가 급격히 느려질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마을을 굽어 도는 3600m의 돌담을 따라 난 흙길과 길옆의 개울은 조선시대의 모습 그대로며, 돌담 사이로 백년이 넘은 고택과 오래된 옛집이 옹기종기 들어선 풍경이 포근해서 굳어있던 마음은 금세 말랑해진다. 고양이가 새끼를 낳아 기르는 아늑한 마당, 돌담 아래 길섶으로 피어난 이름 모를 꽃들, 한쪽 벽면을 온전히 가릴 만큼 가득 핀 능소화, 오랜 세월을 묵묵히 선 돌담, 첩첩이 중첩되어 보이는 기와의 물결, 기와 위로 머리를 불쑥 내민 커다란 나무에 가득 열린 복숭아까지. 눈이 가는 모든 풍경들은 따뜻한 그림을 보는 듯하고, 그 풍경과 마주치는 매 순간은 더없이 행복하다. 오래된 마을인 만큼 중요 민속자료, 등록문화재, 보물, 시도 기념물 등이 가득한 데다, 슬로시티인지라 천천히 시간을 들여 만든 정성이 가득한 먹거리를 시식할 수 있는 곳과 전통 공예를 체험할 수 있는 공방도 많다.
삼지내마을 길을 둘러보는 데는 걸어서 한 시간 남짓이지만 창평면을 두루 보려면 다른 이동 수단이 필요하다. 담양 창평 슬로시티는 이에 맞춰 자전거로 둘러볼 수 있는 이야기 길을 조성했다. 예전 나무꾼들이 다니던 길을 따라 낸 싸목싸목(느리게 천천히라는 뜻의 전라도 말)길, 조용하고 맑은 사색의 길인 명옥헌길, 창평 주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미암길까지 세 개의 코스가 있다. 바람을 가르고 평온한 시골 길을 달리며 담양의 정취를 만끽하는 것, 몸과 마음의 긴장을 온전히 푸는 매력적인 방법이다.
창평 슬로시티의 골목길은 지금이 조선 시대라 해도 믿어질 정도로 보존이 잘 돼 있다. 인공적으로 조성한 길이 아닌, 몇백 년을 같은 모습으로 이어온 길이라 더 귀하다
초록 꿈을 꾸는 길
담양 시내에는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않을 것 같은 초록의 길이 있다. 메타세쿼이아길과 관방제림을 지나 죽녹원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먼저 영화와 cf의 단골 배경인 메타세쿼이아길에 들어섰다. 2002년 고속도로가 될 뻔한 이 길을 담양 주민들이 지켜낸 이래로 전체 구간 중 차량 출입이 제한된 학동리 앞의 1.5km 구간은 사계절 내내 인기다.
표를 사고 들어가 길 중앙에 서면 비현실처럼 느껴질 만큼 아름답다. 20m가 넘게 자란 나무들이 초록으로 물든 가지를 뻗어 하늘을 가린 풍광은 마치 눈앞에 초록 구름이 떠 있는 듯 환상적이다. 나비를 쫓아 나무 사이를 가로질러 달리는 길고양이의 아름다운 몸짓에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이 길에 최대한 오래 머물고 싶다면 오두막에 누워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을 멍하니 봐도 좋고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듣거나 책을 봐도 좋겠다. 마음을 고스란히 앗아가는 아름다운 정취 덕에 아무리 오래 머물러도 이곳에서의 시간은 짧게만 느껴진다.
메타세쿼이아 산책로와 이어지는 관방제림은 조선 인조 26년에, 홍수로 해마다 인근의 가옥이 피해를 당하자 당시 부사를 지낸 성이성(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졌다)이 제방을 쌓고 이를 보존하기 위해 나무를 심은 숲길이다. 담양천변을 따라 약 2km 거리에 푸조나무, 팽나무, 개서어나무 등 다양한 수종의 아름드리나무들이 가득하다. 200년에서 길게는 300년 수령의 고목들이 천변을 묵묵히 지키고 늘어선 풍경은 엄숙하고 아름답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관방제림은 담양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는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관방제림 초입에서 죽녹원 입구까지는 도보로 일분 거리다. 죽녹원은 대숲이 빼곡한 성인산 일대를 조성해 만든 대나무 정원이다. 죽림욕을 즐길 수 있는 산책로는 선비의 길, 죽마고우 길, 철학자의 길 등 이름만 들어도 걷고 싶어지는 8개의 코스로 구성됐다. 깊고 그윽한 대숲 사이의 길은 완벽하게 고요하다. 발걸음 소리, 바람 소리, 바람에 댓잎이 나부끼는 소리, 댓잎이 바닥에 닿는 소리까지 온전히 들릴 정도다.
죽림원의 갈림길에서 잠시 고민했다. ‘어느 길로 갈까’. 어느 곳으로 가든 대나무가 하늘을 가릴 만큼 빼곡히 자란 숲은 적요하고 아늑하다. 비가 내려도 머리 위로 쉽게 떨어지지 않기에 더 포근하게 느껴진다 곧고 늠름하고 듬직하고 잘생긴 이성이 나를 안자고 팔을 벌린 듯했다. 관방제림에는 이토록 멋진 나무들이 수백 그루다
천천히 걷다 보면 생태전시관 인공폭포, 죽향 체험관 등 다양한 볼거리 즐길 거리가 가득하다. 죽녹원 초입의 채상 전수관은 꼭 들러볼 것, 이곳은 서신정 채상장의 작업장이기도 하다. 채상은 여러 번의 염색 과정을 거친 다양한 색상의 얇고 가는 대나무 줄기를 세올뜨기해서 만든 상자를 일컫는다. 죽세공예 중 가장 정교한 기법이 필요한 것으로 예로부터 대나무 공예의 정수로 여겨졌다. 조선시대에는 채상을 진상하면 벼슬을 얻었고, 벼슬아치의 곳간에 채상이 여러 개면 탐관오리로 여겨졌다 하니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전수관에는 장인의 수만 번의 손길을 거쳐 탄생한 아름답고 단아한 작품들이 가득하다. 전통적인 문양뿐 아니라 현대의 감각에 맞게 재해석된 작품들도 많다.
[왼쪽]대나무 줄기를 염색하는 공정이 만만치 않다. 물들이고 말리기를 끊임없이 반복해야 곱고 단아한 색의 대나무 줄기를 얻을 수 있다
[오른쪽]대나무 공예 중에서도 가장 손이 많이 가는 분야라 더 눈이 간다. 채상은 무척 아름답다
이 시기의 담양은 어느 곳을 가나 초록이다. 편안하고 청아하고 깨끗하다. 혼탁한 두 눈은 맑게 씻긴 느낌이고, 지친 마음은 온전해졌으며 무거웠던 몸은 한결 가벼워졌다. 담양 땅에 포근히 안겨 시나브로 몸과 마음이 초록으로 물드는 마법에 걸렸다. 그리고 이 여름이 다 가기까지 그 마법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다.
출처 : 청사초롱 7+8호
글, 사진 : 문유선(여행작가)
※ 위 정보는 2015년 7월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대가 머문자리 클릭☆─━??
첫댓글 좋은정보~감사합니다,,,,,,,^)^
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