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는 사랑의 증거이다.
묵상 :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태어난 보람이 무엇인가?" 신부님의 말씀이다. ‘순교'의 본 의미는 ’증거'이다. 성인은 하느님을 우리의 임자로, 주님으로 믿었기에 그분께 대한 믿음과 사랑, 생명을 바쳐 증거 하였다. 순교, 바보들의 행진인가?
어떤 본당에서 순교자 성월을 맞아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한 순교 성인들에 대한 특별강론이 있었다, 본당신부님은 김대건 성인의 생애를 설명해 갔다. '1821.8.21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출생, 1836 마카오로 유학, 1845.8.17 한국 최초의 사제로 서품, 선교사 입국의 길을 트려다 1846,6.5 순위도에서 체포, 서양학문을 익힌 최초의 한국인, 외국어(라틴어, 불어, 영어, 중국어)에 능통, 조정에서는 그 재주와 인품이 아까워 죽이지 않으려고 회유도 했으나, 끝내 신앙을 지킴, 1846.9.16 서품된 지 1년 1개월 만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새남터에서, 칼 아래 순교' 강론은 차츰 열기를 더해갔다.
그런데 갑자기 고1 학생이 손을 번쩍 돌고는, "신부님, 저는 솔직히 김대건 신부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속이 답답합니다, 참으로 어렵게 사제가 되어가지고, 사목 자라고는 아무도 없는데 신부된 지 1년 만에 꼭 그렇게 순교를 해야 했는지? 배교(背敎)하는 척하고 교회를 위해 열심히 오랫동안 일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하였다, 이러다 보니 '순교자 현양이 아니라, '순교자 규탄대회'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고 한다.
X(신)세대다운 약삭빠르고 영악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모르긴 해도, 많은 사람들의 순교자에 대한 생각이 이 학생들의 태도와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요즘 여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신랑감은 ‘돈 많고 명(命) 짧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철저하게 이해 타산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사람들에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하느님을 위해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무리야말로 ’바보들의 행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님은 참 믿음의 소유자였다.
신부님은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태어난 보람이 무엇인가? 그를 알아보았으되 배신하면 차라리 이 세상에 아니 난 것만 못하다"하였다, ‘임자'라는 신부님의 표현은, 우리 조상들이 하느님을 ’대군대부(大君大父)'라고 불렀던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임자'란 '주님'과 같은 뜻으로, 하느님은 인간과 세상만물을 창조하시고 절대권을 가지고 계시므로 만물의 주인이며, 아버지라는 신앙의 고백이다."
“하느님이 우리의 '임자요, 주인'임을 알았다면 그분을 배반할 수 없다"는 것이 김대건 신부님의 움직일 수 없는 믿음이었다. 이 믿음이 바로 25세의 젊은 사제 김대건을 순교의 길로 용감히 나아가게 하였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님은 참 희망과 사랑의 소유자였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6년 6월5일 체포된 후 6월21일 서울 포도청에 갇힌 후, 7월19일까지 40여 차례의 심문을 받았다. 신부님은 새남터에서 참수되기 전, 8월29일 페레올 주교와 신자들에게 하직편지를 썼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후(死後)에 영원한 복락을 얻으려면 반드시 그리스도교 인이 되십시오."
이 마지막 편지를 보면
김 신부님은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굳은 희망을 지닌 분이셨음을 알 수 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즈가리야는 죽으면서 "주께서 굽어보시고 갚으시리라"(2역대 24,22)고 외친다. 김 신부님은 이 지상의 삶이 끝나는 그 시점에서 '임자'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믿고 따르기 위한 모든 고통을 갚아주실 것을 확신하셨고, 그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꽉 차있었다. 죽음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믿음과 희망이 아닐 수 없다.
신부님의 '임자'께 대한 믿음은 신자들에게 대한 완전한 헌신과 사랑으로 나타났다,
1844떤 부제품을 받기 전 조선 입국의 길을 뚫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고 장백산을 넘으면서 2000리가 넘는 길을 혹한 속에서 헤매야 했다. 그리고 1845떤 항해 경험이 전혀 없는 11명의 신자와 함께 손수 만든 작은 배를 타고, 신부와 주교를 모셔오기 위해 4월30일 제물포를 떠나 6월4일 상해에 도착하기까지 죽음과 맞선 항해를 하셨다. 김 신부님은 참으로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낸다'는 것을 온 생애를 통해 보여주셨다,
16세에 부모를 떠나 10년 만에 사제가 되셨고, 1년 남짓 사제로 살다가 25세의 젊은 생명을 산 제물로 바치신 김대건 신부님은, 한국 교회의 꽃이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모든 사제들의 주보인 김 신부님은 사제들을 끊임없이 회개에로 부르시는 은총의 샘이라 할 수 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님, 저희 사제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묵상 : 선조들은 스스로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신앙의 길을 찾았다. 그리고 평신도들의 힘으로 교회를 세우고 키우며 지켰다. 자신의 인생을 걸만한 확신이 없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라기보다 취미생활이 아닌가? 반성해 볼 일이다.
스스로 깨달은 진리
18세기 주자학(朱子學)에 젖어 있던 조선사회는 갖가지 병폐와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다. 새로운 학문과 사조를 갈망하던 학자들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천주실의(天主實義), 칠극(七克) 등의 서적들을 통해 신앙에 눈뜨게 되었고, 단순히 학문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초이레, 열나흘, 스무-하루 등 날짜를 정해놓고, 그 날은 육신 일을 파(罷)하고. 상제(上帝)이신 하느님을 섬기며 기도하고, 이웃에 봉사하며 나름대로 주일을 지키며 살았다, 그들은 교회의 계명을 지키며, 수계생활(守誡生活)에 전념하였다.
'하느님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교회의 가르침은 반상(班常)의 신분 차이가 뚜렷하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가슴 벅찬 깨달음이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1784떤 이승훈이 영세하고, 1836떤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할 때까지 50여년을 중국인 사제 두 분이 잠시 사목했을 뿐, 평신도들이 스스로 교회를 일으키고 박해 중에도 신앙을 지켜나갔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순교는 믿음의 증거다
'순교자(martyr)'는 원래 '증거자'란 뜻이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100여 년 동안 1만여 명의 순교자들이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쳤다,
우리나라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신부의 부친 최영환(프란치스코)은 1839년 7월 아들을 유학시킨 사학죄인으로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당하며, 100대가 넘는 곤장을 두 번 이상 맞고, 고문을 당한 끝에 장독(丈毒)으로 9윌12일 돌아가셨다. 그 어머니 이성례(마리아)는 최 신부의 동생들인 5명의 자녀들과 함께 옥에 갇혔다.
12세인 둘째 최희정(야고보), 셋째 최선정(안드레아), 넷째 최우정(바실리오), 다섯째 최신정(델네시포로)은 나이가 어려 석방되었고, 세 살짜리 젖먹이(최 스테파노)만 옥에 남았다. 그런데 굶주림과 고문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유도(乳道)가 막혀 젖이 나지 않아, 젖먹이가 어머니 무릎에서 굶어죽기에 이르렀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자기 자녀가 무릎 위에서 굶어죽자, 이 마리아는 한때 관장에게 배교한다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수감 중인 여러 교우들의 위로와 격려로 다시금 순교의 뜻을 굳힐 수 있었다,
옥에서 풀려 나온 둘째 ‘최 야고보'는 동생들과 함께 푼푼이 동냥한 돈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옥중의 어머니를 면회하고, 동생들을 잘 돌볼 것을 약속하며 격려하였다. 순교의 때가 가까이 오자, 어머니 목을 벨 희광이를 찾아가 구걸한 돈을 건네고, 어머니의 모습을 상세히 일러주면서 ’칼을 잘 갈아 어머니가 고통을 많이 받지 않고 죽을 수 있도록' 한칼에 목을 베어주도록 부탁하였다.
이렇게 순교자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혹독한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들이 믿는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생명을 바쳤던 것이다.
취미생활인가? 신앙생활인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내놓을 각오로 신앙생활을 하였던 선조들에 비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라기보다 차라리 취미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우리 시대엔 똑똑한 사람은 많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자기 진리나 신념을 지닌 사람을 보기는 힘들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이권에 눈먼 철새 정치인,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자를 찬양하기에 바쁜 매스컴, 실직한 남편과 자녀들을 미련 없이 버리고 자기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자들이 보여주는 세태는, 신앙을 위해 칼 앞에 목을 내민 순교자들의 대열을 '바보들의 행진'으로 비웃기에 충분하다.
만일 우리나라에 ‘천주교 신자는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없다'든가, ’국가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법이라도 있다면, 그래도 성당에 나올 신자가 몇 명이나 될까?
우리와 순교선열들과의 근본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이 없고, 부활한 예수가 들어간 그 세계, 즉 죽음 후의 영원한 생명을 믿는 믿음도 없다.
이 세상이 전부인 이들이 어떻게 생명을 바칠 수 있겠는가? 구제금융 시기를 맞아 빈부격차가 점점 극심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자들의 자녀들을 자기 친자식처럼 돌보며 어려움을 함께 나누었듯이, 실직과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이웃의 아픔을, 내일처럼 지극 정성으로 함께 나누어보자. 그 안에서 하느님 현존을 체험토록 하자, 그리하여 죽음도 두렵지 않는 참 믿음을 가꾸도록 하자.
[말씀자료 : --유영봉 몬시뇰-- I 편집 : 원 요아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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