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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관련된 사람들은 대개 세 신앙 그룹 중 하나로 분류되어집니다. 만일 당신이 유대인아니 로마 카톨릭 신자가 아니라면, 자동적으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개신교)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침례성도들도 보통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려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침례성도들이 프로테스탄트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은 일반적으로 마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Wittenburg)에 있는 캐슬(Castle) 교회의 문에 붙였을 때인 1517년 10월 31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은 로마와의 공식적인 결렬(決裂)을 이끌어 내었던 일련의 행동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건이면서도 흔히 간과되어지는 사건은 1529년 4월 25일에 열린 제 2차 슈파이에르(Speier) 의회(Diet)입니다. 이 의회는 투르크(Turk, 터키)족에 대항하는 조치를 취하고, 교황에 합력하지 않고 있는 루터교도들과 다른 교도들의 진행 사항을 파악하기 위해 소집된 로마 카톨릭 공의회였습니다.
소수 루터파 영주들은 그들이 이해하고 있던 크리스쳔 믿음에 반하는 그 의회의 사안들에 대항하는 정식 서면 항의서를 가지고 이 로마 카톨릭 의회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 항의서는 작센 지방의 요한 선제후(選帝侯; Elector) 브라운쉬바이그(역자 주 - 신성 로마 제국에서 황제 선정권(選定權) 가지고 있던 귀족을 지칭하는 용어임) - 루네부르크의 어네스트 공작과 프란시스 공작, 헤세의 필립 백작, 안할트의 볼프강 영주와 열 네 개의 황제 도시들이 대표자들에 의해 서명되어졌습니다.
그 항의서의 목적은 그 공의회의 결정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방어적 대책이었습니다. 저명한 역사 학자 필립 샤프(Philip Schaaf)는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진술을 기록했습니다.
"이 항의와 항소가 있은 때로부터 루터교는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리어졌다"(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ume VII, p. 692). 동일한 사실들이 카톨릭 백과사전(Volume XII, p.495)에도 기술되어 있습니다.
유명해진 슈파이에르 의회에서 항소 및 항의를 했던 이 루터파 지도자들과 몇몇 종교 개혁자들은 그들 자신들을 위해 변호한 것이지 결코 침례성도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침례 성도들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성명서에서 직접적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모든 재침례교도들(Anabaptists)과 재(再)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성년에 속한 사람은 영적인 재판관들에 의해 예심(豫審)없이 심판을 받아 불이든 칼이든, 다른 어떤 수단에 의해서든, 그들에게 어울리는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그 때 침례성도들은 이 항의에 함께 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프로테스탄트"(개신교)라는 이름을 지닐 수 없습니다. 침례성도들이 프로테스탄트가 될 수 없는 세 가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는 16세기에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루터교도들, 종교 개혁자들, 그리고 한 때 로마 카톨릭교도였으나 자신들의 교파들을 시작하려고 로마 카톨릭의 신앙을 떠난 자들입니다.
침례성도들은 루터나 칼빈이나 쯔빙글리가 했던 것처럼 로마 카톨릭을 떠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로마 카톨릭 안에 있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종교 개혁 시대로부터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종교 개혁이 있기 몇 백년 전부터 이미 존재했습니다.
침례성도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기원을 원숭이(Apesties)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이 피력하는 바는 침례성도들이 오늘날 고수하고 있는 동일한 교리들을 견지했던 그룹들이 교회 역사상 매 시대마다 존재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 그룹들은 서로 연결되기도 하고,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몬타니스트(Montanists, A.D. 150), 노바티안스(Novatians, A.D. 240), 도나티스트(Donatists, A.D. 305), 알비겐시스(Albigenses, A.D.1022), 왈덴시안스(Waldensians, A.D. 1170), 그리고 아나밥티스트(재침례성도)이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 직전에 두드러진 활약을 했습니다.
전 역사 자료들은 즉각적으로 마틴 루터 때까지 로마 카톨릭 교회라는 단 하나의 종교 그룹만이 있었다는 견해를 반박합니다.
이를 주장하는 사람은 단지 자신의 숙제를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필자는 의도적으로 위대한 옛 침례성도들에 대해 증거한 비침례성도(nonBaptist)인들의 증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호시우스(Hosius, 1504-1579) 추기경은 자신의 일생 과업으로서 비카톨릭 그룹들을 조사하고 억압하는 데 바친 로마 카톨릭의 고위 성직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교황 바오로 4세로부터 유명한 트렌트 공의회의 세 로마 카톨릭 의장 중 한 사람으로 지명을 받았습니다.
호시우스는 반 종교개혁 과업을 활발하게 수행했습니다. 종교 개혁 후기에 비카톨릭 그룹들의 교리와 역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은 호시우스였습니다.
추기경 호시우스는 말하기를, "침례교도들이 과거 1200년 동안 처참하게 고문을 당하고 칼로 절단되지 않았었다면, 그들은 모든 종교 개혁자들보다도 더 많은 수의 무리를 이루었을 것이다" (Letters Apud Opera, pp. 112, 113).
이 박식한 카톨릭 학자가 침례성도들이 견뎌 온 혹독한 박해에 대해 천명하고 있고, 또 침례성도들을 종교 개혁자들과 분명하게 구별시키고 있으며, 침례성도들의 유래를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 있기 1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음을 유의하여 주목하기 바랍니다.
침례성도들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자들과 그들 추종자들에 의해 혹독하게 박해를 받았으므로 결코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자명(自明)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침례성도들이 이러한 박해들 속에서 자신들의 재산과 땅과 목숨을 잃었습니다.
콘레드 그레벨(Konred Grebel)은 1526년 감옥에서 죽었고, 펠릭스 만쯔(Felix Manz)는 1527년에 취리히(Zurich)에서 당국자들에게 의해 익사 당했습니다. 주목을 받던 침례인 지도자였던 흅마이어(Balthauser Hubmaier)도 1528년 3월 10일 비엔나에서 산 채로 화형을 당했습니다. 삼일 후에 그의 아내도 다뉴브 다리에서 목에 돌을 매단채 던져져 익사를 당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역사적으로 침례성도들이 프로테스탄트가 아님을 충분히 입증해 줍니다.
침례성도들이 프로테스탄트 그룹들과 공통된 교리적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는 견해는 정확한 사실들을 보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섯 가지 현저한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1. 침례성도들은 온 마음을 다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도 믿음과 실행을 위해 충분하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디모데후서 3:16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디모데후서 3:16)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여러 프로테스탄트 교단들은 자신들의 신조들(creeds)과 교리문답들(catechism)과 체계화된 교리적 기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침례성도들은 오직 성경만을 고수합니다.
2. 침례성도들은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니라"(엡 5:23)라는 성경의 말씀대로 오직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시라고 믿습니다.
침례교회의 감독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역 회중들을 통제하는 조직이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침례성도들은 교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각 지역 교회는 자치적(自治的)이며, 자신의 머리이신 오직 그리스도께만 해명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침례교회는 동일한 믿음과 실행을 하는 회중들의 교회들과는 교제를 갖지만, 지상의 어느 곳에도 본부를 두지 않습니다. 침례교회의 본부는 하늘에 있습니다.
3. 침례성도들은 (국가와 교회가 상호 간섭하지 않는) 자유로운 국가 내에 자유로운 교회를 마음으로부터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국가와 교회는 각자 자기의 영역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 침례성도들은 국가와 교회의 연합을 완강하게 반대하며, 국가가 교회에 의해 통제되어져야 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하나의 비열한 변명에 지나지 않으며, 성경으로부터 명백히 벗어난 것이라고 믿습니다. 모든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자들은 자신들을 따르는 자들에게 국가 교회(국교회)들을 주입시켰습니다.
4. 침례성도들은 각인이 하나님께 대하여 해명할 책임(accountability)이 있음을 강하게 믿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분명하게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하나님께 해명(회계보고)하게 되리라"(롬 14:12)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가 당신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답변할 수 없으며, 교회가 당신을 대신하여 답변할 수도 없습니다. 대부모(代父母, God-parents)도 당신을 대신하여 답변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부모가 믿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어떤 신앙과 혼연일체가 되었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에 관해 하나님께 해명(회계보고)할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점차 성경적인 교리를 견지하지 않습니다.
5. 게다가 침례인들은 (구원받은) 신자들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다는 신자의 침례 신앙을 고수해 왔습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의 어느 누구도 이 성경의 가르침을 지키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믿음과 회개가 항상 침례에 선행합니다. 오순절 날에 베드로는 명백하게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회개하고 침례를 받으라"(사도행전 2:38). 이것은 분명 유아(乳兒, Infant)는 회개할 수 없기 때문에 유아에게 주는 유아 세례 혹은 침례는 있을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믿지 않는 어떤 사람도 침례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침례에 대한 가르침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을 따랐습니다.
침례성도들은 이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의 가르침을 굳건하게 고수하며 지켜왔습니다.
6. 침례성도들은 성경에 근거하여 거듭난 신자들만의 교회 회원제(Membership), 다시 말해서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할 만한 믿음의 고백을 한 사람들만이 회원(지체)이 되어 참여할 수 있다는 믿음을 항상 고수해 왔습니다.
사도 교회에서는 믿는 자(신자, 信者)들만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죄를 회개한 자들만이 침례를 받고서 교회의 회원(지체)으로서 받아들여졌습니다(행 2:41). 사도 교회에서도 오늘날의 침례교회에서도 자동적으로나 의례적으로(formalistic) 회원(지체)이 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단순한 논지(論旨)들을 통해 침례성도들은 교리적으로도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라는 사실이 보다 더 명확해집니다.
몇 가지 간단하게 살펴보았던 사실들은 침례성도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프로테스탄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지적해 줍니다.
프로테스탄트 그룹들은 어떤 사람을 자신들의 창설자로 삼는데, 종종 자기 교파들의 이름을 종종 사람의 이름에서 따서 붙이기도 합니다. 루터교는 루터에게로 거슬러 올라 가고, 개혁파들은 죤 칼빈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장로교는 죤 낙스를 구심점으로 삼고, 감리교는 공공연하게 죤 웨슬리를 자신들의 창설자로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침례 교회들의 구심점은 누구입니까? 이것은 진지하게 탐구해 보아야 할 가치가 있는 역사적인 질문입니다. 침례 교회들을 일으킨 어떤 한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인간 창설자를 거명하려 한다면, 우리는 베드로나 바울이나 요한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발생지(發生地)에 있어서도 프로테스탄트들과 다릅니다.
루터는 독일에서, 개혁파들은 스위스와 네덜란드에서, 장로교는 스코틀랜드에서 성공회는 영국에서 유래되었지만, 침례교회들은 팔레스타인을 발생 근거지로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침례성도들의 신조는 아우스부르크 신앙고백(the Augsburg Confession)도 아니고, 도르트의 경전들(the Cannons of Dort)도 아니며,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도 아니며, 오직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그러므로 침례성도들을 프로테스탄트와 동일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침례성도들은 지금까지 결코 프로테스탄트들과 연결된 적이 없었고, 로마 카톨릭 교회와도 결코 제휴한 적도 없습니다.
세월을 거쳐오면서 종교 개혁 이전이나 이후에도 침례성도들은 자신들의 동질성(identity)을 유지해 왔으며, 성경 말씀에 충실해 왔습니다.
참된 침례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순수한 가르침을 그대로 견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교리들을 위해 그들은 기꺼이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16세기 한 침례성도였던 한츠 덴크(Hanz Denk)는 "믿음은 살든지 죽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분명 그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종교 개혁 시기에 로텐부르크에서는 10년도 안되어 900명 침례성도들이 처형을 당했습니다. 이들에 대한 사형들은 종종 악랄하고 잔인했습니다. 한 침례성도 마이클 사틀러(Michalel Sateler)에 대한 판결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이클 샤틀러는 교수형 집행인에게 인도될 것이며, 그 집행인은 그를 처형장에 끌고 가서 혀를 베고, 그 다음에 그를 짐수레에 실어 화(火) 집게로 그의 몸을 두 번 집어 지질 것이요, 그리고 난 후에 그를 성문으로 끌고 가 동일한 방법으로 그의 몸을 고문하라."
이것이 사틀러가 1527년 5월 21일 로텐부르크에서 죽은 방식입니다. 그의 아내와 다른 여자들도 익사를 당했고, 수많은 남자들도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침례성도들은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원시(原始) 강령들(precepts)과 실행들을 완강하게 고수합니다.
침례성도들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충분한 권위라고 믿습니다. 침례성도들은 사도 시대 이후로 발생한 모든 인간의 종교적 전통들과 실행들(practices)을 거부합니다.